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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페 4,1-7.11-13
복 음 : 마태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빈틈과 제자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의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1985년 졸업 후, 만 30년 만에 혼인미사 주례차 모교인 서강대 성당을 찾았습니다.
30년 전과는 너무나 변한 상전벽해의 외적모습이었습니다.
얼마나 외적발전을 이루었는지 말 그대로 빈틈의 외적공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발전하면 할수록 외적공간의 빈틈도, 자유도, 낭만도 사라집니다.
예전 모습을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언덕도, 솔밭의 넉넉한 공간도 사라졌습니다.
비슷한 시기 개원했던 우리 요셉수도원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빈틈이 없네요.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수도원과는 너무 대조적입니다.
여기에 비하면 수도원은 외적변화나 발전이 거의 없었습니다.”
“외적발전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수도원만은 외적발전이 없는 것이 좋습니다.”
성당에서 혼인미사에 참석했던 어느 형제와의 짧은 대화입니다.
수도원에 귀원도중 차 안에서도 동행했던 수사님과 ‘빈틈’에 대한 대화를 많이 나눴습니다.
사실 수도원은 30년 전 쯤이나 지금이나 외형은 큰 변화가 없어 큰 틀의 윤곽은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넉넉한 외적공간이요 빈틈이 많습니다.
하여 많은 이들이 쉬기 위해 하느님의 빈틈을 찾아 수도원에 옵니다.
오늘은 ‘빈틈과 제자리’에 대한 묵상나눔입니다.
‘빈틈이 없다’는 것은 쉴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빈틈없는 공간에 사람이기에 삶이 너무나 팍팍하고 인정도 메말라 갑니다.
여유도 넉넉함도 없습니다.
외적공간의 빈틈은 부족해도 내적공간의 빈틈은 넉넉하게 마련해야 좋습니다.
빈틈이 많은, 인간미와 인정이 넘치는 어벙한 사람들이 때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하느님은 빈틈 자체입니다. 누구나 머물 수 있는 빈틈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여전히 빈틈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을 따를 때 비로소 제자리의 확보입니다.
주님의 빈틈 안에 우리의 제자리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기 전까지는 제자리의 신원도 분명치 않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똑같은 제자리도 없습니다.
주님의 빈틈 안에 각자 고유의 제자리가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세리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부르심에 즉시 응답해 주님을 따라 나선 마태오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비로소 주님 안 빈틈에서 제자리를 찾은 마태오입니다.
세상에서 제자리가 없던 세리와 죄인들이 주님 안 빈틈에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다음 장면이 저에겐 그렇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자리를 함께 하였다.’
마치 주님 안 빈틈에 각자 고유의 제자리를 잡고 있는 세리와 죄인들,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흡사 우리말 ‘제자리’와 ‘제자’가 연결되는 느낌입니다.
주님 안 빈틈에 제자리를 잡을 때 비로서 제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차별받아 제자리가 없던 이들을 부르시어 제자리를 찾게 해주심이 바로 복음입니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재 그 사람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과거나 밖의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면의 마음을, 각자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병자요 죄인입니다.
잘나서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기에 불러주셨습니다.
바로 주님은 병든 이들, 죄인들을 불러 치유, 구원해 주시고자 당신 빈틈 안에서 제자리를 마련해 주십니다.
주님 없이는 제자리도 없고, 제자리에 있어도 모릅니다.
성소는 바로 주님 안 빈틈에서 제자리를 찾았다는 것이며, 제자리의 중심에 머물 때 비로소 안정과 평화입니다.
삶이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 안 제자리에 머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주님 안 빈틈 안에 제자리를 잡을 때 비로소 내외적 일치입니다.
주님 안 제자리에 머무는 이들은 과거로부터, 현재의 온갖 외적인 것들로부터 해방입니다.
참으로 자유롭기에 가면을 쓸 필요도 없고 위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치(unity)는 획일화(uniformity)가 아닙니다.
일치는 다양한 요소들이 주님의 ‘하나’안에서 함께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합니다.
주님은 바오로를 통해 당신의 빈틈 안에서 제자리를 찾은 이들에게 당부하십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하십시오.”
바로 주님 안 빈틈에서 제자리를 찾았을 때 이런 덕목의 아름다운 일치의 공동체입니다.
희망도 하나,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 세례도 하나, 만물의 아버지인 하느님도 하나,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편재하신 하나이신 하느님입니다.
주님의 ‘하나’ 안에 제자리요 일치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떠날 때 제자리를 잃고 분열이 뒤따릅니다.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끊임없이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살아있는 유기체의 공동체입니다.
생명 없는 무기체의 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생명체인 공동체입니다.
각자 주님 안 제자리에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 그리스도의 몸도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공동체의 성장과 개인의 성장은 함께 갑니다.
우리가 모두 각자의 제자리에 충실함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마침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일치-성숙-충만함’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분열-미성숙-결핍’의 부정적 현실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바오로의 통찰이 참으로 깊고 신선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각자 제자리를 확인시켜 주시고 일치와 조화의 아름다운 공동체로 성장시켜 주십니다.
주님의 파스카의 신비와 사랑을 먹고 자라나는 당신 몸인 생명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크래시 배기지(Crash Baggage)라는 여행 가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방의 외부는 울퉁불퉁하게 되어 있어서 마치 손상된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낡은 가방처럼, 또 손상된 가방처럼 보이는데도 사람들은 이 가방을 선택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새로 산 여행 가방이 여행 중에 이리저리 부딪혀서 패이게 되면 아주 속상하지요.
그런데 이 가방은 미리 손상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에 부딪혀도 그렇게 속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크래시 배기지의 슬로건은 이것입니다.
“(주의 없이) 막 다루세요.”(Handle without care)
보통 주의사항으로 ‘주의해서 다루세요.’를 많이 보지요. 그런데 그런 주의사항과 정반대인 것입니다.
이 정반대의 생각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되었고, 많이 팔리는 이탈리아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생각의 전환이 이렇게 커다란 가치를 가져온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바꾸어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때문이지요.
그러나 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기 위해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고정관념은 무엇일까요?
돈이 많아야 하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 등의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다보니 늘 부족한 것투성입니다.
남들은 많이 가지고 있고, 나는 한 없이 부족하기만 한 것 같아서
세상의 불평등의 주인공으로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세상의 가치를 쫓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쫓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하다는 것을 많은 성인성녀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발견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역시 그 모습을 보여주지요.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직업은 아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따라라.”는 주님의 말씀에 곧바로 일어나 주님을 따릅니다.
편하고 쉬운 삶을 버리고,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하는 생각의 전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의 전환이 주님의 제자로 만들었고, 하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계속해서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과연 어떠할까요?
주님 안에서의 참 행복을 생각하기보다는,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할 수 없습니다. 힘듭니다. 나중에 하겠습니다.”라는 말만을 내뱉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주님을 따르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생각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 안에서만이 참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병든 세상을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무엇이 죄인지도 모르고 살아온 우리들에게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기쁨과 행복을 먼저 가르쳐주십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 여겼던
우리의 거짓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삶이 슬픈 것은 진정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이용하려하다가 서로가 병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없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사랑에서 복음은 선포됩니다.
수많은 잡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건
진실된 사랑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장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하게 하는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이 순간 우리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기쁨을 아직 모르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함께하는 기쁨을 가르쳐주십니다.
복음은 함께하는 기쁜 소식이며
사랑은 함께 나누는 행복입니다.
“나를 따라라.”
사랑의 의무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나 지금이나 천대 받고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오라는 인물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세리를 부정하게 돈거래 하는 사기꾼이나 탐욕스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부르시고 그 집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5,44-46)하신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9,11)하며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매일 다짐하지만 흔들비쭉인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이 계시니 행복합니다.
다윗이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12,13).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루 옷을 걸치고 흙을 뒤집어쓴 채 단식하여(느헤9,1) 회개하였습니다.
요나도 죽음의 뱃속에서 살려 달라 외쳤더니 그 호소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요나2,3)
세리도 ‘오, 하느님! 죄 많은 제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18,13)하고 기도했고,
자캐오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속여 먹은 것에 대해서는
그 네 곱절을 갚아 주겠다고 말씀 드렸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는(루가19,8-9)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자가위의 오른 쪽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여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는 확답을 얻었습니다.(루가23,43)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의사로서 다가 가셨고, 외적인 병을 치료하는 것을 뛰어 넘어 뿌리를 다스리셨습니다.
주님은 진정 회개하는 죄인에게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그분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차별 없이 사랑해야겠습니다.
밉살스런 사람은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보기 싫어도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로마13,8)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에페소서4,1-2)
최선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복음: 마태 9,9-13: “나를 따라 오라”. 그는 예수를 즉시 따라 나섰다
마태오 사도는 본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다.
이 직업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국노와 같은 미움을 받는 직업이었다.
세리였기 때문에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착취당하는 그런 처지였다.
이러한 세리가 예수님께 불림을 받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
마태오는 60-90년 사이에 마태오 복음서를 아람어로 저술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마태오는 동방으로 가서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에티오피아나 페르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를 부르신다.
그러니까 마태오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마태오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여기에 마태오는 지금까지 함께 일하며 사귀었던 친구들도 함께 초대하여 식사를 하였던 것 같다.
아마 그들을 부른 것은 주님을 따라 나서기 전에 그들과 인사를 하는 기회를 만들었을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자리를 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된 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나선다.
제자로 삼는 것도 너무나 큰 죄인인 세리를 뽑고, 노는 것도 그런 부류하고만 논다는 것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한 마디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모두가 당신의 자녀로서 살기를 바라시고 부르시고 계시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응답이 마태오처럼 즉시 일어나서 그분을 따르듯이
응답을 할 것인지 아닌지는 각자 인간의 의지적인 응답에 달렸다는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 자신이 부족하고 죄스런 인간임을 느끼는 것이지만, 그것을 물으시는 주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항상 주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삶, 회개하는 삶이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이다.
마태오와 같이 세관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정된 것이었겠지만,
용감하게 그 자리를 떠나 전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든지 이렇게 첫 발을 내딛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착각 때문에
우리는 이를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과감히 일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잘 알 수 있고, 또 변화되어 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려 노력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마태오 사도와 같이 매 순간 용감한 결단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하느님 사랑의 필요충분조건인 마태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오늘 복음에 의하면 마태오 사도는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당신 제자로 부르신 존재입니다.
여기에는 일부로 마태오를 찾아왔다는 얘기는 분명 없고,
마태오 사도를 눈여겨보셨다는 얘기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다른 목적 때문에 지나가시는데 어떻게 눈에 띄어
부르심 받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태오는 진정 그렇게 부르심 받은 걸까요?
이것을 확대해서 얘기하면 우연일까, 필연일까, 그 문제입니다.
마태오가 나중에 사도가 된 것은 주님의 기도와 숙고 후에 된 거지만
제자가 된 것은 축구 지도자가 길 가다 재능 있는 선수를 보고 발탁하듯,
그야말로 지나가시다가 눈에 띄어 발탁이 된, 그런 우연한 사건일까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눈에서 보고, 마태오 입장에서 보면
우연히 주님의 눈에 띄어 제자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의 입장, 특히 하느님의 사랑의 입장에서 보면
마태오 사도 뿐 아니라 무릇 모든 부르심은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 1장에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우리를 부르시고 뽑으시는 것으로 얘기하지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더욱이 마태오 사도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에 충분조건을 갖췄습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에게
마태오 사도는 이 조건에 딱 맞는 죄인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사랑에 맞는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사랑하기에 좋은 사람을 필요로 하고,
그런 조건을 충분히 채운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만을 사랑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죄인을 더 사랑하시고
당신 사랑이 더 필요한 죄인을 필요로 하시고,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은 마태오 사도를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제자로 부르신 것은 첫째로 마태오의 구원을 위한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구원, 특히 모든 죄인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니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죄인들의 대명사인 마태오 사도를 부르시면서 다른 죄인을 부르시고,
죄인 마태오를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한 사도로 삼으시면서
다른 모든 죄인들도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한 사도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죄인도 하느님께는 사랑을 받는다는 것,
죄인도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모든 죄인들에게 깨닫게 하는 데 마태오 사도는 적격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마태오 사도의 부르심 안에서 이런 사랑을 배웁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윤성희
시작기도
성령님, 예수님의 방식대로 예수님의 일을 해나가도록 저에게 분별 있는 사랑을 주소서.
말씀 들여다보기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을 하시며
예수님은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이와 비슷한 격언이 예수님 시대 이전에 있었는데,
그 의미는 누군가를 치유하고 가르치려면
무엇보다 병들고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가야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신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을 것이다.
모든 이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 가난한 이들만 선택하셨을 리 없다.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 모든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먼저 가난하고 병들고 어리석은 이들에게 다가가셨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예수님도 나름대로 우선순위와 효율성을 따지신 것이다.
이런 점을 헤아리면 이웃 사랑도 지혜롭게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예수님도 우선순위나 효율성을 따지셨으니 그분의 일을 이어가야 할 제자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
다만 예수님은 ‘효율적’ 사목을 이야기하시면서 ‘자비’를 함께 언급하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점을 헤아리면 이웃 사랑도 지혜롭게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예수님도 우선순위나 효율성을 따지셨으니
그분의 일을 이어가야 할 제자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
다만 예수님은 ‘효율적’ 사목을 이야기하시면서 ‘자비’를 함께 언급하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효율성만 생각한다면 가난한 이들보다는 로마 황제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게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위를 회개하게 하여 그 신앙이 아래까지 흐르게 하는 방식보다는,
아래에서 퍼져나간 신앙이 위까지 이르는 방식을 택하신 것이다.
나를 건드리는 말씀 한마디
말씀 따라 걷기
*나는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인가, 예수님이 얼마나 간절히 필요한가?
*봉사활동 할 때나 이웃을 대할 때, 효율성과 자비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
마침기도
사람들의 눈총과 비난에도, 병들고 죄 많은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신 예수님,
제가 당신께서 맡기신 사명을 지혜롭게 수행하되
언제나 당신의 마음을 잃지 않게 하소서. 아멘.
<야곱의 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