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의 생애(제1편)
카페 가족 여러분!
여러분께서도 잘 알고 계시듯,「진달래 꽃」의 시(詩)는,
한국인의 정서(情緖)적 대표적인 시로서
지금도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그렇게「진달래 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시입니다.
우리가 흔히 서정시인(抒情詩人)... 하면,
시(詩)의 감정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시인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표적 서정시인 「김소월(金素月)의 생애」를
오늘부터 한 3회에 걸쳐 써 볼까 합니다.
이미 그의 작품에 관해서는 학계의 전문가들이 두루 평가했고
또한 논문도 여러 가지 나와 있을 정도이니
감히 주제넘게 제가 다시금 얘기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우스꽝스럽기에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 옛날 학창시절의 추억을 떠 올리며
봄의 향기를 글로 실어 볼까 해서 기획해 봤습니다.
소월의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 1902~1934).
그렇지만 그는, 본 이름보다 아호인 소월(素月)을 필명(筆名)으로 사용했기에
우리에게는 그의 필명인 「김소월」로 불리며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소월은 평안북도 구성(龜城) 출생으로
조부(祖父)는 공주(公州) 김씨의 김상주(金相疇)이고,
부친 김성도(金性燾)와 모친 장경숙(張景淑)사이에서 태어나
인저(仁姐)라는 여동생을 두고 있습니다.
그의 나이 13살이 되던 1915년,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오산리(五山里)에 소재한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에 입학했습니다.
그때 교장인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 1882∼1950)선생을 비롯,
야뢰(夜雷) 이돈화(李敦化 : 1884∼?),
오봉(五峰) 서춘(徐椿 : 1894∼1943),
안서(岸曙) 김억(金億 : 1893~?) 등을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배우게 됩니다.
참고로 오산학교(五山學校)는
1907년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 1864 ~ 1930)선생이
민족운동 인재양성기관으로 설립한 학교입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교육취지를 기독교정신으로 바꾸고 사관학교, 훈련원, 정치,
인문중학교, 특수모범자양성소 등을 겸한 학교로
소정의 교과과정보다 민족성개조에 치중하였습니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이승훈선생이 투옥되자
한때 학교가 폐교되어 김소월은 배재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하여
그곳에서 졸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산학교는 1922년 이승훈선생이 출옥하여 재단법인을 만들고
다시 교사(校舍)를 신축하는 등 규모를 확장하였지만
해방되기 3년 전, 1942년 일제의 민족의식 말살정책으로 교사와 학생들이
다수 투옥되는 불운을 겪기도 합니다.
8,15 해방 후에는 공산당의 탄압으로 많은 교직원과 학생들이 남하하여,
6.25 전쟁이 나자 1953년 부산시 서구(西區) 동대신동(東大新洞)에 재건한 뒤,
1956년 다시 서울 용산구(龍山區) 보광동(普光洞)으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산학교 시절에 그는,
안서 김억을 만나 시재(詩才)를 인정받고 사사(師事)를 받으며
그의 시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 때 소월시의 원천(源泉)이 된
한시, 민요, 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것입니다.
연변 북한 자료에 의하면 이 시기에 소월은
오산학교 중학부에서 시를 짓기 시작했고
「먼 후일」의 시를 발표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머리도 식힐 겸,
그의「먼 후일」시를 적어보고 다시 얘기를 이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먼후일」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당시 소월의 문단 벗으로는
나도향(羅稻香 : 1902∼1926)을 비롯해,
평양 출생의 주요한(朱耀翰 : 1900∼1979),
춘사(春士) 김동인(金東仁 : 1900~1951),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 : 1901~?) 등이 있었습니다.
1916년 14세가 되던 해에
소월은 그의 나이보다 세살 많은 홍실단(洪實丹)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홍실단」여사는, 1928년 장편소설『임꺽정(林巨正)』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 1888∼1968)의 딸입니다.
그리고 슬하에 장녀 구생(龜生), 차녀 구원(龜媛),
장남 준호(俊鎬), 차남 은호(殷鎬), 삼남 정호(正鎬),
사남 낙호(洛鎬) 등 4남 2녀를 두었습니다.
1923년 일제강점기에 그는 일본 동경상과대학 전문부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곧 중퇴하고 귀국하기에 이릅니다.
이즈음에 그는 서울생활을 하게 되었고
나도향 등과 어울렸으며 이때의 서울생활의 느낌을
시로 읊은「서울밤」과「부칭추칭(不稱錘秤)」등을 발표합니다.
이 시기에 그는 가장 많은 서정시를 창작하고
그것들을 대부분「개벽(開闢)」지(誌)를 비롯한
「창조(創造)」,「학생계」,「배재」,「영대(靈臺)」,
「동아일보」,「조선문단(朝鮮文壇)」,「문명(文明)」,
「신천지(新天地)」지 등에 발표하는 등 활동의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개벽」지에는 126편의 많은 시를 발표했는데
「개벽」지는 1920년 6월에 창간된 월간 종합잡지로서
항일운동과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을 활발히 전개하던
민족문화실현운동의 일환으로 출간한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종합잡지였습니다.
당시 이 잡지를 통해 작품 활동을 한 작가로는
횡보(橫步) 염상섭 (廉想涉 : 1897∼1963)
서해(曙海) 최서해 (崔曙海 : 1899~?)
빙허(憑虛) 현진건 (玄鎭健 : 1900∼1943)
춘사(春士) 김동인 (金東仁 : 1900∼1951)
파인(巴人) 김동환 (金東煥 : 1901∼?)
회월(懷月) 박영희 (朴英熙 : 1901∼?)
상화(尙火) 이상화 (李相和 : 1901∼1943)
월탄(月灘) 박종화 (朴鍾和 : 1901∼1981)
도향(稻香) 나경손 (羅慶孫 : 1902∼1926)
팔봉(八峰) 김기진 (金基鎭 : 1903∼1985) 등의
많은 문인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개벽(開闢)」지(誌)는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문학이론, 외국문학 등을 소개하였고 신인을 발굴해 내는 등
1920년대 문학창달에 큰 기여를 했던 잡지였습니다.
이때부터 소월은,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여성적 정조(情調)로
민요적 율조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차츰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카페 가족 여러분!
그럼 오늘은 여기서 제1편을 마치기로 하고
내일 다시 제2편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008년 3월20일 목요일 새벽 4:50
첫댓글 ^^여고 시절로 다시 돌아 간 기분으로 읽어 내려 왔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김소월님 의시을 한참 좋아했어답니다 그중에서도 초혼이라는 시가 너무 좋터라구요
좋은 정보에 감사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