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일본역사의 분수령 – 세키가하라전투
関ヶ原の戦い(せきがはらのたたか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사망직전 최고정치협의체 멤버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을 비롯하여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우에스기 가게가쓰(上杉景勝), 그리고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등 다섯 명의 고다이로(五大老)를 불러 아들 히데요리(秀頼)의 후계승계를 몇 번이고 다짐받았다. 그러나 이 약속은 히데요시 사후 형식상으로는 17년간 지켜졌으나 이에야스가 강자로 등장하면서 실질적으론 2년 만에 깨지고 말았다. 1600년 정초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거성이었던 오사카성으로 가 그를 지지하는 많은 영주들로부터 신년하례를 받음으로써 그의 위상을 과시했다.
히데요시는 권력을 잡은 후 1590년 교토(京都) 가까이에 위치한 미카와국(三河國, 現愛知県)영주 이에야스를 멀리 동쪽 관동지방의 8주를 영지로 주어 밀어내버렸다. 이는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항상 버거운 상대로 여겼기 때문에 그를 가능한 한 교토에서 먼 곳에 두기 위한 계책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이러한 이에야스 견제책이 이에야스에겐 오히려 기회가 됐다. 거리 관계로 히데요시의 감시가 소홀해 이에야스는 마음 놓고 군비증강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德川家康
1588년8월 히데요시 사망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력자로 급부상하자 고다이로 상호간은 물론 전국 각지의 영주들과 히데요시의 책사였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 사방에서 이에야스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 가운데 미쓰나리가 가장 강적으로 떠올랐다. 히데요시가 미쓰나리를 처음 본 것은 한 사찰에서였다. 매사냥 중 목이 말라 절에 가 물 한잔 달라는 히데요시에게 童子僧이 물 그릇에 나뭇잎을 띄워 갖다 주었다. 이 소년이 당시 13살인 미쓰나리였다. 그의 지혜로움에 감탄한 히데요시가 미쓰나리를 데려가 키웠다. 그런데 이 미쓰나리가 고다이로의 멤버였던 아이즈 와카마쓰(会津若松)영주인 우에스기 가게가쓰와 손잡고 이에야스를 공격한다는 첩보가 전달돼 이에야스는 1600년6월 에도(江戸)를 출발, 우선 가게가쓰 정벌에 나섰다.
그런데 이 출정은 이에야스가 교토를 비울 경우 미쓰나리가 이에야스를 공격하기 위해 거병할 것으로 예상하고 구실을 만들어 미쓰나리를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행한 위장출진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도쿠가와의 예견은 적중했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가 가게가쓰 정벌에 나선 직후 7월 모리 데루모토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 히데요시 편 영주들을 오사카성으로 긴급 소집하고 이에야스 토벌을 협의한 후 데루모토를 대장으로 병력을 편성했다. 이를 역사학자들은 서군(西軍)이라 불렀다. 선제공격에 나선 미쓰나리의 西軍은 일차로 이에야스가 임시집무실로 사용하던 오사카성의 서성(西城)과 역시 이에야스의 교토 집무실인 후시미성(伏見城)을 공략했다. 미쓰나리는 여세를 몰아 이세국과 미노국으로까지 침공지역을 확대해 나갔다. 이에야스도 즉시 가신들과 협의, ‘히데요리에게 해를 끼치는 간신을 토벌한다’는 깃발을 내걸고 자신을 총대장으로 하는 군대를 편성했다. 이에야스의 ‘동군(東軍)’은 이렇게 해서 결성됐다.
이에야스는 즉시 오사카를 향해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에야스의 동군(東軍)과 미쓰나리가 이끈 서군(西軍)은 1600년9월15일 새벽5시 지금의 기후현(岐阜県) 남서부 끝자락에 위치한 세키가하라(関ケ原)에서 마주쳤다. 미쓰나리군은 이날 새벽1시 이곳에 미리 도착해 이에야스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키가하라는 북쪽으로 해발 1377미터의 이부키야마(伊吹山)와 사사오야마(笹尾山), 그리고 서남쪽으로 마쓰오야마(松尾山)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지금은 전쟁터였던 분지 가운데로 日本列島의 동서를 잇는 도카이도본선(東海道本線)철도가 지나고 있고 남쪽에는 西日本 간선도로인 메이신(名神)고속도로가 뻗어있는 교통요충지로 변해 있다.
세키가하라에 대치한 병력은 東軍이 22개 부대에 75,000명, 그리고 西軍이 22개 부대에 84,000명으로 西軍이 9,000명 더 많았다. 병력대치형태는 西軍이 서쪽과 동쪽으로 분할 배치됐고 그 사이에 東軍이 끼어있어 東軍이 마치 포위된듯한 포진이어서 불리한 형세였다. 이날 새벽은 가랑비가 내린데다 안개가 짙어 양측은 싸우지 않고 한동안 대치하다가 8시경 안개가 걷히자 東軍이 먼저 총성을 울리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치열한 총격전이 두 시간 남짓 이어졌으나 승패를 가름할 우열이 보이지 않았다. 西軍은 위치와 병력면에서 東軍은 부대간 연계가 잘 돼 동시다방면으로부터 西軍을 공격했고 유격대의 활약 또한 돋보였다.
승리를 확신했던 미쓰나리는 10시가 되도록 승전의 기미기 보이지 않자 우선 사쓰마의 시마즈영주에게 출진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냈다. 그러나 시마즈는 지원을 부탁하러 온 사자가 말에서 내리지 않은 무례를 범했다는 이유를 들어 지원요청을 거부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게다가 총대장인 모리 데루모토가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지원요청에 즉각 응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으며 히데요시의 양자인 고하야가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와 히데요시의 처남(측실의 동생)인 교고쿠 다카쓰구(京極高次)가 배신하여 이에야스 편으로 가 西軍 공격에 나서는 일마저 벌어졌다. 미쓰나리의 지원요청거부와 히데요시 측근 영주들의 배신으로 西軍 진영의 패색이 짙어지자 이에야스가 이끄는 본진이 전면으로 나아가 패주하는 西軍에 총공격을 가했다.
오후 2시 패배를 감지한 미쓰나리는 소수 호위병과 함께 이부키야마 골짜기로 도주했다. 그리고 오후 4시 싸움은 東軍의 승리로 끝났다. 포로로 잡힌 미쓰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한달반 뒤인 10월1일 처형됐다. 이에야스의 세키가하라전투 승리는 총칼이 아닌 머리싸움의 결과인 것으로 후세 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西軍의 패배는 전투에 동원됐던 西軍 영주들이 대세의 흐름이 이에야스 쪽이라고 읽고 미쓰나리를 배반한데다 총대장인 모리 데루모토가 소극적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지만 이들의 행동은 단순히 현장에서 전세를 보고 판단한 게 아니라 싸움에 앞서 미리 이에야스와 협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 히데요시의 책사로서 미쓰나리가 평소 무장들 위에 군림해 무장들이 싫어한데다 전투경험이 전혀 없어 작전수행이 미숙했던 게 또 하나의 주요 이유가 됐다.

関ヶ原の戦い
세키가하라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한 이에야스는 십여 일이 지난 9월 27일 오사카성으로 가 히데요리(秀頼)와 그의 어머니인 요도기미(淀君)에게 전투결과를 보고하고 히데요리에게 거듭 충성을 맹세했다. 이 때 이에야스는 후계자인 아들 히데다다(秀忠)를 대동하여 아들의 존재를 과시했다. 그리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가신과 영주들에게 포상하고 자기의 반대편영주들에겐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이에야스는 우선 자신의 영지를 255만석에서 400만석으로 늘리고 교토와 오사카 가까운 곳에 영지를 가지고 있던 미쓰나리 편의 주요 영주들을 모두 먼 지방에 영지를 주어 내 쫓고 그 자리에 그의 아들과 측근 가신들을 배치했다. 또한 120만석이던 모리 데루모토의 연공을 36만석으로 크게 줄이고 시고쿠의 조소카베 영지는 몰수하여 세키가하라전투에서 공을 세운 야마우치 도요가즈(山內一豊)에 넘겨주었다.

島津義久
노부나가의 손자인 기후성(岐阜城) 성주 산보시 히데노부(三法師秀信)는 고야산으로 추방했다가 몇 년 뒤 사면하여 야마토(奈良県)에 작은 영지를 마련해 주었다. 강적이던 가고시마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 )는 우여곡절 끝에 60만석의 영지를 그대로 보존했으나 임진왜란 때 총대장이었던 우키다 히데이에는 도쿄에서 남쪽으로 300여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섬 하치죠지마(八丈島)에 유배됐다. 누구보다 가혹한 처벌을 받은 영주는 히데요리로 222만석의 직할령이 65만석으로 대폭 감축됐다. 이는 겉으로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도요토미가의 힘을 완전히 빼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로써 히데요리는 명목상으론 간파쿠였으나 사실은 일개 영주로 전락했다. 일본의 패자가 된 이에야스는 1603년 조정으로부터 세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의 임명장을 받고 에도막부(江戶幕府)를 개설했다. 이후 明治維新까지 일본은 260년 동안 전쟁 없는 평화시대가 이어졌다. 西軍에 가담한 많은 영주들은 영지를 몰수당해 낭인(浪人)으로 전락했으나 일부는 명치유신까지 존속했으며 시마즈(薩摩県)가와 모리(長州県)가, 그리고 시고쿠의 조소카베 수하의 하급무사 후손들은 막부말기인 19세기 중반 幕府타도를 외치며 도막(倒幕)운동에 앞장서 도쿠가와가를 타도하고 明治維新을 성공시킴으로써 구원(舊怨)을 갚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2년 작은 나라였던 미가와국(三河國) 영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다케치요(竹千代)와 마쓰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 본래 지방의 작은 호족이었던 이에야스의 가문은 그의 조부인 마쓰다이라 기요야스(松平淸康)가 중흥시켰으나 기요야스가 가신에게 암살되고 또한 재산을 노린 문중의 일당이 이에야스의 아버지 히로타다마저 해하려 하자 이세(伊勢)로 도피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게 됐다.
수년 후 미가와로 돌아간 히로타다는 처가가 그가 속해있는 슈고영주 이마가와가(今川家)와 적대관계에 있어 다케치요의 생모와 이혼하고 여섯 살인 다케치요는 이마가와가에 인질로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이마가와가로 호송되던 도중 오다 노부나가의 병사들이 인질을 탈취한 변이 일어났다. 2년후 이마가와가와 오다가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져 다케치요는 다시 이마가와가의 인질이 돼 순푸(駿府, 現静岡市)로 갔다. 이 때 요시모토의 양녀와 결혼하고 이름을 도쿠가와 모토야스로 개명했다. 노부나가가 아마가와군을 대파한 오케하사마전투 때 이마가와 군의 한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모토야스는 전투가 끝 난 후 노부나가 부하로 들어갔으며 인질생활 13년 만인 1561년 고향인 미카와의 오카사키성(岡崎城)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이름을 이에야스로 고치고 노부나가의 딸을 며느리로 받아드려 사돈관계를 맺었다.

岡崎城
1600년의 세키가하라전투를 전후한 시기 우리나라는 임진왜란이 막 끝난 때이다. 1599년 對馬島主로부터 조선과 우호관계를 맺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3차례나 받은 후 朝鮮조정은 사명대사 유정을 일본에 파견,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회담을 개최. 1605년 3월 사명대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담을 가진 후 日本측의 화해의 진정성을 확인했으며 朝鮮人 포로 3,000명을 데리고 귀국. 1606년엔 대마도로 끌려갔던 1,390명의 朝鮮人도 귀국함. 그리고 1607년부터 朝鮮通信使를 파견함. 朝鮮조정은 통신사의명칭을 ‘일본측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전쟁중에 日本으로 끌려간 朝鮮人 포로를 데려오기 위한 사절단’이란 뜻으로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명명했음. 1606년 4월 오대산과 태백산의 사고(史庫)를 재건. 역대실록을 재 간행하여 춘추관, 묘향산, 태백산에 1질씩, 그리고 초본은 오대산에 보관함.
用語說明

초기의 江戶

1860년대의 에도
에도(江戶): 도쿄(東京)의 옛 이름. ‘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강(江)의 문(門, と), 또는 ‘바다가 뭍으로 휘어 들어간 곳’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 무로마치막부시대인 1457년 무장 오다 도칸(太田道灌)이 처음 성을 쌓고 조카마치(城下町)를 이룸. 159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입성했으며 1603년 막부를 개설함. 그 후 일본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 1868년 도쿄로 개칭됨.

伏見城
후시미성(伏見城): 교토 후시미구에 있는 성.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축성.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무장소로 잠시 사용. 1600년 이시다 미쓰나리가 공격, 점령했으나 미쓰나리 사망 후 이에야스에게 되돌아감. 1620년 폐성 됨.
오카자키성(岡崎城): 아이치현(愛知県) 오카사키에 위치한 성. 1452년 미가와국(三河國)의 슈고대행 사이고(西鄕)가문이 축성. 153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조부 기요야스(淸 康)성주가 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성에서 출생. 1570년 성주인 이에야스가 아들 노부야스(信康)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하마마쓰성(浜松城)으로 이전. 1873년 폐성 됐다가 1959년 재건됨.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