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년을 맞아 작년 한 해 동안 제 블로그에서 야심차게(?) 연재했던 오호십육국 시리즈를 한 번 써 봅니다. 하루에 한 개 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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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년, 사마염(司馬炎)이 조환(曹奐)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晉) 왕조를 개창한 이후 사마염(무제武帝)은 280년 오(吳)를 멸망시킴으로써 중국 전토를 통일하였다.
무제는 선양을 받아 진 왕조를 개창하자마자 자신의 경험 - 강력한 권신에 의한 왕위 찬탈 -을 토대로 자신과 같은 찬탈자를 방지하고 황실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각지에 사마씨 일족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이들이 황실이 위험할 때 힘을 합쳐 황실을 보위할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이렇게 왕이 된 사마씨 일족이 27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바램과 달리 진 왕조는 막장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심지어 무제 자신조차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무제는 호색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후궁으로 삼을 미인을 선발하기 위해 천하의 혼사를 금지해 버리는 대인배스러운 명령을 내리는가 하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난 후에는 강남의 미녀들에게 빠져들어 후궁의 수가 무려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의자왕 전설 같은 것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수준이다. 황제 뿐 아니라 진 왕조의 공경대부들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무제가 생존하던 시기에는 그럭저럭 안정된 국가를 유지하기는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제 자신도 호색으로 인한 것인지는 몰라도 단명했다. 290년, 무제가 50대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은 혜제(惠帝)는 태자 시절에도 백치(白痴)라고 불렸을 정도로 무능한, 아니 저능한 황제였다. 황제가 무능하면 외척들이 득세하게 마련이다. 황제의 모후 양씨(楊氏), 황후인 가씨(賈氏)에 의한 척족 세도가 나타나는 가운데 이들의 장기말로 선택된 종실왕, 또는 이들에 대항한 종실왕들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쟁탈전에 뛰어들면서 진 왕조는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중국을 통일한지 10년, 너무나도 짧은 평화였다.
팔왕(八王)의 난(亂)이라 부르는 이 정권 쟁탈전은 290년 경부터 시작되어 306년 혜제가 죽을 때까지 16년 동안 계속되었다. 팔왕의 난이 얼마나 막장이었는가는 혜제 때 사용된 연호의 변천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팔왕의 난 초반, 양씨와 가씨가 정권을 놓고 한바탕 피보라를 불러 일으켰던 시기, 290년에서 291년까지 겨우 2년 동안 연호는 영희(永熙), 영평(永平), 원강(元康)으로 3차례나 바뀌었다. 이후 가씨의 천하는 300년까지 계속되었으나 가씨의 실각 이후 다시 본격적인 팔왕의 쟁패가 시작되자, 고작 6년 동안 영강(永康), 영녕(永寧), 태안(太安), 영안(永安), 건무(建武), 영흥(永興), 광희(光熙)까지 7개나 되는 연호가 사용되었다. 사마륜(司馬倫)이 황위를 찬탈하여 사용한 건시(建始)까지 치면 8개나 된다. 연호의 변천은 팔왕이 부침하였던 경로와 대체로 일치한다.
※ 팔왕 및 여러 왕들의 봉국 위치와 주요 도시, 오호의 최초 근거지 : 팔왕의 봉국은 위와 같지만 실제 팔왕의 난 때에 팔왕은 자신의 봉국이 아닌 다른 곳에 근거를 두고 활약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튼, 팔왕의 난이 벌어지는 동안, 중국 전토는 엉망이 된 정치 상황으로 인해 황폐화되었다. 특히 팔왕의 쟁패가 집중되었던 낙양과 장안 일대는 더 심했다. 그리고 팔왕의 본격적인 격돌이 벌어졌던 300년 이후의 내란은 각 왕들이 군사력 강화를 위해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면서 드디어 오호(五胡)를 중원 무대에 등장시켰다.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은 흉노의 좌현왕(左賢王)이었던 유연(劉淵)을 용병으로 고용하였으며, 동영공(東瀛公) 사마등(司馬騰)은 북방의 선비(鮮卑)를 끌어들였다. 그 외에도 관중(關中)에는 강(羌)과 저(氐)족 역시 후한 말 이후로 지속적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오호십육국시대의 주인공 오호가 드디어 모두 모인 것이다.
304년, 유연이 산서(山西)에서 한(漢)을 건국하고, 같은 해 파저족(巴氐族)의 이웅(李雄)이 사천 지방에서 성(成)을 건국하면서 오호십육국시대가 개막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진 왕조는 화북에서 살아남아 있었다.
팔왕의 난은 306년에 종결되고 회제(懷帝)가 즉위하였다. 그러나 이미 진 왕조는 중국 전체를 지배할만한 힘이 없는 상태였다.
산서의 흉노국가 한은 진 왕조에 대해서 적대적인 자세를 보이며 산서 일대를 평정하고 308년에는 황제를 자칭하였다. 북방의 선비 제부족들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진 왕조는 모용부(慕容部)의 수장 모용외(慕容廆)를 선비도독(鮮卑都督)으로 임명하여 이를 통제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모용부가 다른 선비 부족들을 격파-통합하는 결과만 가져왔다. 대체로 병주와 유주·평주를 제외한 지역들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상은 지방관이나 군벌에 의해 명목상의 종주권만 인정받은 채 자치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동진 원제(元帝)의 일화이다. 원제 사마예(司馬睿)는 팔왕의 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봉지인 낭야(琅邪)에서 머물고 있었다. 팔왕의 난이 끝난 직후 사마월(司馬越)에 의해 안동장군 도독양주제군사(安東將軍 都督揚州諸軍事)에 임명되는데 사마예는 측근 왕도(王導)가 서진 왕조의 쇠퇴를 예측하고 간언하자 이를 받아들어 건업(建業)으로 옮겨가 강동 지역을 평정하는데 주력한다.
또한, 팔왕의 난이 한창이던 301년, 장궤(張軌)는 팔왕의 난을 피해 양주자사(凉州刺史)를 자청하고 하서(河西) 지역에서 반독립적인 정권을 세우기도 하였다. 정권을 구축한 연대로만 따지면 16국 가운데 가장 먼저이다.
이렇듯, 팔왕의 난 이후 진 왕조는 사실상 중국 전토에 대한 통제권을 거의 상실하고 탈진 상태에 빠져 있었다.
311년, 한은 낙양(洛陽)을 공격하기 위해 남하하면서 하남(河南) 일대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팔왕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동해왕(東海王) 사마월이 이를 막기 위해 홀로 분투하는 가운데, 동해왕에 의해 옹립된 회제는 동해왕의 뒤통수를 때려 버렸다. 동해왕은 그대로 뒷목을 잡고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이제 방어작전을 지휘할 마지막 종실왕조차 세상을 등지고,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든 낙양에서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해왕 사후 군권을 이어받은 태위(太尉) 왕연(王衍)은 동해왕의 관을 호송하겠다는 것을 핑계로 황제를 버려두고 수도를 떠나 버린다.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이렇게 떠나는 왕연의 뒤를 따라간 황족, 귀족 등이 10만 명에 달했다는 것이다. 수도에서 이런 대 행렬이 떠나가는 것을 빤히 보고만 있었던 회제가 신기할 따름이다. 여하튼, 수도를 떠난 어처구니 없는 행렬은 당연히 한군에 포착되어 몰살당했다. 이때 포로로 잡힌 사마씨 종실 왕들이 48명이나 되었다니 대체 수도에서 회제를 보위하고 있던 이들은 누구였는지 궁금할 뿐이다.
무방비상태의 낙양이 함락된 것은 311년 5월, 겨우 탈출해서 장안에 이르렀던 사마업(司馬鄴)은 일종의 임시정부를 이끌다가 313년에 회제가 처형되자 정식으로 황위에 올랐다. 그래봤자 이름 뿐인 황위, 한군의 침입에 근근이 버티던 민제(愍帝)도 317년에 항복하니 이로써 화북의 진 왕조는 완전히 끝장나게 된다.
짧게 보아 311년 낙양 함락 사건, 길게 보아 317년 화북의 진 왕조가 멸망하였던 이 사건을 영가(永嘉)의 난이라 부른다. 회제의 연호 영가 연간에 일어난 난리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오호의 쟁패는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다.
※ 참고자료
<자치통감>, <진서> 등을 참고하고 싶었으나 능력이 부족하여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박한제 저)에서 대강의 줄기를 가져다 썼음.
지도는 위키피디아의 서진 시대 지도에 진서 지리지 및 위키피디아를 참고하여 직접 표기하였음. (강줄기가 무성의하게 그어진 점은 자비를...[퍽!])
원래 서식처 : http://xakyntos.egloos.com/2259265
첫댓글 오. 재밌네요.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이곳에서도 연재하시는 군요.
중국 역사상 막장시기 No1, 오호십륙국시대...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아주 흥미진진해요. 특히 기발한 유머가 담겨 있어서 더 재밌네요. 등장하는 이름들이 많아서 좀 헷갈립니다...
오홋 매우기대가 되는 시리즈네요... 삼국지 이후에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진혜제가 즉위할수있던것은 그의 장남인 태자가 (진무제의 태손) 총명했던것으로 아는데 말입니다. 머 자기아들이 얼마나 바보인지는 무제 스스로가 더잘알아서 자신의 동생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었으니..
그러나... 그 동생이었던 사마유(司馬攸)는 독살(?)당해 사망... 그리고 독살(?)에 가장 큰 의심을 받는데다 정권다툼으로 진나라가 망하는데 공헌한 원인중의 하나인 혜제의 마누라인 가남풍(賈南風)은 조비를 도와 한나라를 멸하게 한 가규(賈逵)의 손녀이며 사마염을 도와 위나라를 무너뜨리는데 공헌한 가충(賈充)의 딸입니다. 3대에 걸쳐 3개의 국가를 무너뜨린 가문이죠. ㅎㅎ
ㅎㄷㄷ한 가씨 집안이군요. ㅡㅡ;;
가남풍이 혜제가 무제의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도록 너무 수준높지도, 너무 저능하지도 않은 수준으로 '맞춤형 답안'을 준비해 달달 외우게 시켰다고 하는 일화도 있죠. 글쓴님이 참고하신 박한제 교수의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에서 읽은 얘깁니다. 진무제의 태손에 대해서도 일화가 있는데, 이런 얘깁니다. 한번은 궁궐에 불이 나서 무제가 누대로 대피하자 무제의 옷깃을 잡아 끌더랍니다. 그래서 무제가 이유를 물으니 다섯 살 짜리가 이러더래요, "대궐에 변고가 났을 때 천자께서 남의 눈에 잘 띠는 데 계시면 해를 입으십니다." 무제는 걔를 믿고 왕위를 넘겼고 태손도 가남풍 밑에서 잘 기면서 버텼는데 결국 독살당했죠.
다음 편이 기대되고 기다려 집니다.(압력*-_-*)
조조가 쌔빠지게 오환을 때려잡아 북방을 안정시켰는데 그 후계자들이 다 말아먹네요.
후한말과 위오촉 삼국시대의 대혼란을 어렵게 수습한 서진 왕조가 참 막장스럽게도 식구들끼리의 개싸움에 갈기갈기 찢어지고 중국은 350년 동안 또다시 아비규환에 빠지니, 역사란 참 보면 볼수록 재미있습니다.
여기에 연재하시다니.. 이제 야스페르츠님 블로그를 안 들러도 되겠..(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