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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차 18:00 ![]() 타쉬켄트 공항 출발 (약 1시간 20분 소요) | |||
비쉬켁 (키르키즈스탄) | 20:15 ![]() 키르키즈스탄의 수도 비쉬켁 도착 (시차 : -3시간) (우즈벡보다 한시간 느립니다)
* 국내선은 현지사정에 따라 항공편 및 출도착 시간이 변경될 수 있습니다.
가이드 미팅 후 호텔 투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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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박시설 | Golden Dragon 또는 동급 | 식사 | 조식: 호텔식 중식: 한식 석식: 기내식 |
비쉬켁 (키르키즈스탄) | 호텔 조식 후
비쉬켁 출발, 이식쿨로 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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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쿨 호수 관광후 다시 비슈케크로 이동
이식쿨 (키르키즈스탄) | 호텔 조식 후
이식쿨 출발, 비쉬켁으로 이동 (약 5시간 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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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쉬켁 (키르키즈스탄) | 비쉬켁 시내관광 구소련 국민들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인민친선광장, 국회의사당건물 마나스동상, 알라 투 광장, 빅토리광장, 핀필로브 공원, 박물관 등
석식 후 호텔 투숙 및 휴식 | ||
비쉬켁 (키르키즈스탄) | 호텔 조식 후
비쉬켁 출발
국립공원의 멋진 산악풍광을 감상하며 카자흐스탄 국경지대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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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 (카자흐스탄) | 카자흐스탄 경제중심도시 알마티 도착 및 관광 (약 6시간 소요) |
비슈케크
알라토 광장
1.행정구역
시는 레닌스키 구, 페르보마이스키 구, 스베르들롭스키 구, 옥탸브리스키 구의 4개의 구로 나뉜다.
2.역사
15세기부터 19세기 처음에 키르기스인이 당시 피슈페크(러시아어:Пишпек)로 불리고 있던 이 땅에 진출했다. 1825년 코칸트 한국이 요새를 건설했다.
1845년부터 러시아 제국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1860년 러시아 제국이 잠시 피슈페크를 점령했지만, 부대 철수 뒤에는 코칸트 한국이 탈환했다. 1862년에 러시아 제국이 피슈케크를 다시 점령했고 다음 해 키르기스스탄은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다. 1878년 피슈페크는 시로 승격되었다. 소련은 군인 겸 혁명가인 미하일 프룬제를 기념하기 위한 차원에서 시의 이름을 프룬제(러시아어:Фрунзе, 영어:Frunze)로 바꾸었다. 1991년에 소련으로부터 키르기스스탄이 독립하면서 비슈케크(Bishkek)로 개명되었다.
비슈케크(러시아어: Бишке́к, 키르기스어: Бишкек, بىﺸﮑﻪك, 문화어: 비슈께크)는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이자 키르시스스탄의 가장 큰 도시다. 인구는 약 100만 명이다. 키르기스스탄에서 생산되는 공업 생산품의 대부분을 생산하며, 농업기계, 건설자재, 직물, 의복 외에 식육콤비나트 및 양조공장이 있다.[1]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옛 이름은 Pishpek(~1926), Frunze(1926~92).
인구:750,327명 (1999)
화폐;솜
키르기스 산맥과 가까운 추 강 유역 해발 750~900m의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알라르차·알라메딘 강이 흐르며 볼쇼이[大]추이스키 운하가 북쪽을 가로지르고 있다. 1878년 러시아가 19세기초 현지에 세워진 코칸트 칸국의 요새를 점령하고 요새 부근에 건설한 도시이다.
1913년 주민이 1만 4,000명에 이르렀다. 이 지역의 행정중심지였지만 본질적으로 엉성하고 불규칙한 모양으로 펼쳐진 먼지투성이 마을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있다가 1924년 새로 창설된 키르기스 자치주의 주도로 선정되었다. 1926년 키르기스 자치주가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 되면서 피슈페크는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고 명칭도 1885년 이곳에서 태어난, 혁명가이자 적군의 지도자였던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프룬제의 이름을 따서 프룬제로 바뀌었다. 그뒤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현대적 도시로 성장했다.
오늘날 가로수가 늘어서 있는 넓은 도로들이 바둑판처럼 뻗어 있으며, 공원과 과수원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남쪽으로는 만년설에 덮인 산들이 보인다. 많은 관청 건물들과 함께 극장, 키르기스 과학 아카데미(1954 창립), 키르기스국립대학교, 농과대학, 의과대학, 과학기술전문대학, 사범대학이 있다.
비슈케크의 산업은 2단계로 발전해왔다. 1941년까지는 현지에서 나는 원료들을 이용한 식료품산업과 경공업에 중점을 두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중 러시아 서부의 중공업이 이곳으로 철수한 뒤부터는 기계조립과 금속공업이 널리 이루어졌다. 특히 1960년대에 급속히 발전했으며 1959~70년에 인구가 거의 2배로 늘어났다. 인구 750,327(1999).
비슈케크 날씨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주간 날씨
톈산 산맥의 실크로드 도시 비슈케크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는 어딜 가나 길이 있어요. 하얀 포플러 줄기가 끝없이 가로수가 되어 길을 잇고 길을 만듭니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를 떠나 대상들이 지칠 때쯤 나타나는 오아시스의 도시가 바로 비슈케크입니다. 중앙아시아의 지붕인 톈산 산맥을 따라 펼쳐지는 풍요로운 곳이지요.
비슈케크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그럼 역사박물관으로 가야 해요.
박물관에는 키르기스스탄의 역사 시대 유물들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3층에는 투르크 시대 석상들을 초원에서 옮겨다 놓았는데 제주도의 돌하루방과 형태가 매우 비슷해요. 이 석상은 7~8세기 무덤을 지키던 수호신들이랍니다. 원래 유목 전사들은 죽으면 화장을 했는데, 10세기 이후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매장으로 바뀌었다고 해요. 석상들의 오른손은 물그릇을 들고 있고, 왼손은 칼을 들고 있어요. 이것은 물을 마시면서 칼을 잡던 돌궐 시대 유목 전사들의 굳은 약속과 의지를 표현한 거예요.
또 이곳에는 흉노 역사를 알 수 있는 발굴품이 전시되어 있어요. 이 지역에서는 212개의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 대부분이 기원전후에 살았던 흉노 귀족들의 무덤이에요.
시내 중심에 서 있는 커다란 동상은 전설속의 영웅 마나스예요. 키르기스스탄의 신화의 주인공이고 키르기스인들의 삶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핵심 인물이지요. 입으로 전해오던 마나스 신화는 19세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고 해요.
키르기스인들의 역동적인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대시장인 오쉬 바자르입니다. 그 옛날 실크로드를 따라 찾아 온 상인들이 눌러 앉아 장사를 해 오던 곳이지요.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특이하게 생긴 전통 모자 칼팍이에요. 염소 털로 곱게 짜서 금실로 수를 놓은 이 모자는 처음 뜨거운 목욕탕에서 머리의 열기를 보호하기 위해 썼다고 해요. 그러나 이제는 키르기스 남성들의 명예와 존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시장에서 고려인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1937년 연해주에서 시작된 강제이주의 한과 핏줄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중앙아시아 곳곳에 슬픈 역사를 남긴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슈케크 시민들은 80퍼센트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지만, 길거리에서 차도르를 쓴 여성들은 거의 보이지 않아요. 어느 이슬람 국가에서나 쉽게 눈에 띄는 모스크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120년 가까운 러시아의 통치 때문에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이슬람 문화도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독립한 뒤 비슈케크는 잃어버린 종교와 전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답니다.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 문명
중앙아시아를 키운 실크로드, 실크로드를 알려면 먼저 중앙아시아의 자연환경을 살펴봐야 해요. 왜냐하면 자연환경은 사람이 사는 방식을 결정하고 그것에 맞는 문화를 이루도록 하기 때문이지요.
중앙아시아는 비가 아주 적게 오는 건조 지대예요. 그래서 타클라마칸, 키질(붉은), 카라(검은)라고 이름 붙여진 사막과 물이 적어서 큰 나무를 키우지 못해 풀이나 키 작은 나무들만이 자라는 초원 지대가 대부분이지요.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사는 지역에 따라 대개 두 종류의 모습으로 살았어요. 사막 지대에서는 오아시스각주[1] 주변에서 하천이나 샘을 이용해 농사를 지으며 집을 짓고 살았고, 초원 지대에서는 말이나 양, 염소, 낙타 등을 키우며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집을 옮기면서 지내는 유목 생활을 했어요.
중앙아시아에서는 강한 결속력을 가지는 중앙 집권 국가를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사막 속의 오아시스는 많은 유목민들이 모여 살기에는 물이나 식량이 풍부하지 못해서 곳곳에 떨어져 살아야 했지요. 마치 넓은 바다 가운데 띄엄띄엄 떠 있는 섬처럼 말이에요.
그렇지만 중앙아시아에는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정보와 기술을 바탕으로 흉노, 돌궐, 위구르 같은 대제국이 일찍부터 일어났어요. 그리고 10세기 이후에는 투르크 족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면서 중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지요.
13세기에는 몽골의 칭기즈 칸이 중앙아시아 전체를 통일하고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헝가리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대제국을 건설했어요. 그리고 14~15세기에는 티무르 왕조가 동부 이란에서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했어요. 하지만 19세기에 중국 청나라에 의해서 힘이 약해진 뒤 최근까지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소련의 연방에 속해 사회주의 체제를 경험했습니다.
이제 중앙아시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실크로드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중앙아시아는 동쪽에 중국, 서쪽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낳은 서아시아와 유럽, 남쪽에 인더스 문명의 땅 인도라는 인류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둘러싸여 있어요. 문명을 이룬 나라들은 자기 나라의 특산품을 팔면서 자기 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진귀한 물건들을 구하고 싶어 했고, 그래서 중앙아시아는 그 물건을 사고파는 각 상인들이 오고가는 길목이 되었던 것이지요.
실크로드란 말 그대로 해석하면 비단길이라는 뜻인데, 비단으로 된 길이라는 뜻은 아니랍니다. 고대 중국에서 비단을 서역각주[2] 에 팔게 된 것을 시작으로 무역품만이 아닌 정치, 경제, 문화가 교류되던 길을 말합니다. 중국에서 시작해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파미르 고원, 중앙아시아 초원, 이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까지 총 9,000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이지요.
처음 실크로드가 열린 것은 기원전 139년 중국 한나라 때 장건각주[3] 이라는 사람에 의해서였어요. 장건이 중앙아시아의 유목 민족인 흉노와의 전쟁을 위해 중앙아시아로 원정을 갔다가 서아시아를 잇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던 것이지요.
이 길을 통해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여러 나라들은 비단을 비롯해서 서로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팔았어요.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초원을 지나가는 데 알맞은 낙타의 등에 짐을 싣고 말이에요. 낙타 상인들을 카라반이라 불렀어요.
그리고 이렇게 물건을 팔고 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술과 문화도 서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비단과 양잠각주[4] , 제지법이 이때 서역으로 전해지고 서역의 과학과 기술, 불교 등의 종교가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전해졌어요. 그러니까 실크로드는 교통수단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 동과 서, 지구를 하나로 이어 주는 동맥이었던 것이지요.
다른 교통수단의 눈부신 발달로 지금 실크로드는 파키스탄과 중국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를 잇는 도로로 그 명맥만 남아 있어요.
동과 서를 잇는 길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 문명
중앙아시아는 말 그대로 아시아의 중앙을 말해요. 아시아의 한가운데 사막과 초원 그리고 세계의 지붕이라고 말하는 파미르 같은 고원이 있는 곳이지요. 실크로드는 우리말로는 비단길이라는 뜻인데, 중앙아시아는 바로 그 실크로드가 지나가던 곳이기도 해요. 실크로드는 중국의 비단이 지나가고 유럽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이슬람 세계의 과학과 기술이 전해졌던 길이에요. 그래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이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크게 번성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