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즈음인가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로 카페가 시끌시끌 했었는데 5개월만에 또 불거져 나오는군요. 그 당시에 고려대인님이나 연개소문 1님 등 지금 토론에 참여하시는 분들 중 상당수는 그때 당시 토론을 잘 모르시니 님들께서는 그리 신경쓰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당시 토론에 참여했던 저로써는 식상할 따름입니다. 그것도 새로운 견해가 나와서 다시 거론되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이미 나왔던 견해가 또 나오고,,저는 같은 답변을 또하고,,솔직히 지겹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가설이 아니라면 더 이상 연개소문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 것은 그만하고 다른 얘기 좀 했으면 싶습니다. 최소한 카페에서 연개소문에 관한 글을 먼저 찾아보시거나 찾기 힘드시다면 이 분야에서 가장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 분석한 김용만 선생님의 연개소문 책을 정독하고 나서 이런 논의를 다시 거론해 주셨으면 하는 군요.
그리고 특정분을 향해서 제가 뭐라고 하긴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 고려대인님의 연개소문에 대해 보는 시각의 문제점은 사료를 너무 표면적, 결과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먼저 연개소문을 창조리나 명림답부보다 격이 떨어지는 영웅이라고 하셨는데 단지 폭군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혹은 자기 정파의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했던 군사쿠데타와 목적의식이 분명한 혁명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는지요? 창조리와 명림답부의 쿠데타 과정을 다시 한번 보시고 그런 비교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반대가 되면 반대가 되었지 연개소문이 창조리나 명림답부보다 격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은 제가 보기에 비교 대상부터 잘못된 것 같습니다.
두번째로 영류왕의 외교 정책이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숙이는 것이 굳이 잘못되진 않았다는 의견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처사입니다. 당태종 이세민이 626년에 즉위하고 630년에 동돌궐을 멸망시킨 후 고구려에 대한 침략의도를 노골적으로 비추고 있었습니다. 631년에 당에서 장손사를 보내어 고구려의 경관을 허물게 하려고 했을 때 영류왕은 당의 침략 의도를 분명히 알아차리고서 천리장성 축조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것 말고 당의 공세에 대한 대비를 딱히 하진 않았습니다. 비록 동돌궐이라는 강대국을 멸망시킨 것에 겁을 집어먹고 공격할 엄두를 못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면서 동정적인 시각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만약 영류왕이 생각을 고쳐먹고 당시 정치적,군사적으로 어느 정도 불안정했던 당왕실이 안정화 되기 이전에 영양왕이 그랬던 것처럼 국경지대에 대한 기동기습전을 행했다면 당이 주변제국을 멸망시킨 후 최종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이 고구려에게만 신경을 쓸 수 있는 제국은 아니라고 하셨던 말을 뒤집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고구려가 마음만 먹으면 다른 제국과의 전쟁 상황에서 얼마든지 당을 교란시킬 수 있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아니 최소한 당과 동돌궐이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고구려가 당에 붙든 돌궐에 붙든 둘중 하나를 택해 멸망시키면서 그에 따른 전략적 이득을 취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류왕은 상황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전의 고구려의 유연했던 천하 경영시스템을 생각할 때 영류왕의 정책이야 말로 유연한 외교정책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영국이 근대 유럽 사회에서 초강대국으로 세력을 유지했던 것은 유럽에 새로운 강대국이 출현했을 때 그와 반대되는 세력과 손잡고 신흥 강대국을 견제하여 위협요소로 발전하는 것 자체를 근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영류왕의 정책은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인 셈입니다.(사실 영류왕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국가의 이득을 도모하기 보다 왕 자신의 권력 기반이 되고 있었던 반전파 귀족들의 이익에 따른 입장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던데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617년을 마지막으로 4차에 걸친 고수 전쟁이 막을 내린 후 15년 정도, 즉 고구려인에게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사실 직접적인 전투를 치른 2차 고수전쟁이 있었던 612년을 생각하면 거진 20년 정도의 시차가 있습니다.) 전쟁의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물었던 그 상황에서 고구려가 전쟁을 치를 역량이나 의지가 부족했다는 것은 큰 설득력을 발휘하기 힘듭니다. 물론 고수 전쟁 당시에 청야작전으로 인해 전국토가 유린되었기 때문에 전후 복구로 인하여 전쟁을 치를 역량까지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청야전술이 벌어졌던 것은 요동 전선과 30만 별동군이 평양을 향해 진군하던 경로에 한정될 뿐이고 최소한 고구려 동부지역은 전력이 고스란히 유지가 되었으며 경제구조가 자급자족 경제인 조선과는 달리 유통경제가 발달한 고구려의 경우 전후 복구능력이 월등히 앞설 것이라는 예상을 해보면 한세대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경우 또다른 전쟁을 치를 역량이 된다고 판단됩니다. 실제로 645년 1차 고당전쟁에서 요동성이 함락될 당시 요동성 1개에서 비축된 전략물자가 군량 50만석이란 걸 상기하면 영류왕 말년부터 당에 대비하여 군수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전후 복구가 되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고구려가 최소한 국지전투로서 당을 괴롭힐 역량조차도 없다고 할 순 없을 겁니다.
만일 영류왕이 살아 생전 당시 당에서 고구려에 대한 야욕이 없었다가 연개소문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태도를 바꾸었다면 고려대인님의 말이 맞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연개소문의 대당정책이 유연하지 못했다고 하시는데 협상을 할 의지가 없는 대상에 대해 일방적으로 평화를 외칠 수 있나요? 당태종 이세민은 자신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라도 고구려를 꼭 멸망시켜야 했습니다. 정당한 정권이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천자로써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정통성을 인정을 받으려면 온 천하에 대한 지배가 선행되어 신의 대리자로써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진정한 의미의 천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구려는 중원 천하와 확실히 구분되며 대등한 규모의 천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고구려 멸망은 이세민의 숙원 사업이었습니다. 요즘 시각에서 보자면 웬 미친 소리냐고 반문하실테지만 신 왕망, 수 양제 같은 전례가 이미 있고 실제로 양제의 경우는 그런 소리를 공공연하게 하고 다닙니다. 내가 온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이니 모든 왕들은 내말을 들어야 한다는 둥,,어쩌고 합니다. 또한 이 부분은 이세민이 심심하면 봉선제사를 지내서 진정한 천자로 인정받으려고 할 때 신하들이 천하의 평정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봉선제사를 지낼 수 없다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반대파 숙청을 위해 원정을 갔다는 말은 당췌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군요. 혹시 안시성주가 연개소문에 대항했다가 당의 침공 때문에 연합했다는 기록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그러나 그것은 안시성 전투에서 끝내 이기지 못했던 당태종이 자신도 점령을 못하자 못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심보로 그런 기록을 남겼던 것 뿐입니다. 만약에 연개소문에 대항했던 세력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안시성만이 살아남아 대항을 하고 있었다면 포위전을 통해 고사시키면 그만입니다. 과연 안시성에서 몇달을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은 것이 642년이고 1차 고당전쟁이 발발한 것이 645년입니다. 3년의 시차가 있는데 만약 645년까지 사태가 이어졌다고 쳐도 집권 직후 부터 1차 고당전쟁 전까지 당에 고압적 자세로 나간 연개소문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그 상황에 타국과의 전쟁을 막으려해도 시원치않을 판국에 전쟁의 빌미를 만든다는 것이 과연 상식적으로 가능한 것입니까? 또한 644년 1월 이후에 연개소문이 직접 신라 북변의 성 2개를 공취했다는 기사로 봐서 최소한 643년 말경에 연개소문이 출정을 나갔다고 본다면 그런 고려대인님의 설명처럼 그토록 불안정한 정국에 연개소문이 정권이 탈취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도저히 말이 안됩니다.
배신자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645년 전쟁에서 배신자라고는 백암성주 손대음 한명 뿐입니다. 그 조차도 항복하려 할 때 상당히 망설였습니다. 고연수, 고혜진? 그들은 전투에서 사로잡혀서 항복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배신을 했다라고 친다면 최소한 당의 기록에서 그들을 통해 향도 노릇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요? 물론 기록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667년 3차 고당전쟁에서 신성의 사부구라는 자가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 역시 정황을 다시 봐야 합니다. 신당서 고려열전을 보면 당군이 최초로 신성에 도착한 시점이 667년 1월입니다. 그런데 점령시기는 9월 14일이죠. 대략 8개월간 포위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부구가 성문을 열고 항복한 것은 배고파서 항복한 것에 불과합니다. 장안성이 함락될 때도 성문을 열어준 신성은 당시 고구려에서 정책적으로 탄압하고 있던 불교 승려입니다. 남건이 정권 불안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 세력과 정치 동맹을 체결했지만 신성으로써는 전쟁 후의 상황에서 또다시 불교가 탄압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배신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과연 당시 고구려에서 연개소문 정권이 독재정권이어서 그것이 싫어 배신을 했다라고 볼 수 있습니까?
그리고 외교전에서의 실책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오히려 실책이 아니라 연개소문의 고도로 계산된 정책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이 말씀하시듯이 고구려가 백제와 연합하고 신라를 버린 것은 그만큼 백제의 국력이 강한 것과 더불어 자칫 당군의 보급기지가 될 수도 있었던 백제의 지리적 이점을 놓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왜 백제와 손잡고 신라를 멸망시키지 않았을까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유는 이렇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있어 동북아시아에서 수백년 동안 패권을 다퉈온 경쟁국입니다. 비록 당나라의 위협 때문에 일시적으로 손을 잡고 있지만 언제 갈라설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구려에게 신라는 백제를 통제할 수 있는 제어장치가 되는 셈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백제가 만약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구려를 배신하고 당과 손을 잡게 될 경우 그것을 견제할 만한 세력으로 신라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굳이 신라를 멸망시켜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고구려는 백제가 신라를 침공할 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괜히 백제를 도와서 백제가 신라를 수월하게 접수하고 한반도 남쪽에서 패자가 된 후 영토 욕심으로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당과 손이라도 잡게되면 고구려로써는 그것만큼 골치아픈게 없지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난 후의 상황과 유사해집니다. 또한 신라가 당과 동맹을 맺게 한 것이 실책이라고 이도형님이 말씀하셨는데 그것 또한 결과론적 해석이고 그것이 고구려에게 악재로 작용한다고 보긴 힘듭니다. 오히려 고구려-백제, 당-신라, 라는 구도를 만들어서 백제가 딴마음을 먹지 못하게 만드는 안전장치가 될 여지가 큽니다. 실지 백제의 멸망은 당나라가 배 수천척 만들기라는 터무니 없는 짓거리를 하는 통에 그렇게 된 것이니까요.
또한 연개소문이 당을 도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명분상 그런 것이고 1차적인 과제는 당의 침략 의도를 분쇄하는데 있습니다. 실제로 고구려에서 중원을 도모하려고 한 적이 있었던가요? 중원 땅이 필요할 만큼 고구려의 산업이 발달되지 않은것도 아니기에 굳이 중원 땅을 도모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개소문의 그러한 정책에 고구려의 민심이 반응을 한 것은 당에 대한 도모가 당의 분열을 통한 천하 경영을 의미할 뿐이었고 연개소문 자신도 그렇게 인식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연개소문 정권의 독재정권이 멸망의 원인이라고 하셨는데 글쎄요? 연개소문의 독재정권에 대해서 고구려인들은 그다지 반감을 가졌다고 보긴 힘듭니다. 독재정권의 여파로 남건의 쿠데타나 남생의 당 투항 같은 단순히 추잡한 권력 다툼에 의해 멸망을 했다고 보는 관점도 유교식의 결과론적 해석에 불과합니다. (관련된 제글을 밑에 복사해두겠습니다.) 독재에 관한 관점은 요즘에서 별로 안좋게 생각하는 것이죠. 물론 연개소문의 반대파에서는 연개소문이 탐탁찮게 생각했겠지만 그 독재정권의 계승에 고구려 민중이 반발을 했다고 보긴 힘듭니다. 연개소문 정권에 문제가 있다면 고구려 정치의 낡은 체제, 즉 귀족의 권력세습 관례로 인한 다양한 부류의 인재 부재라는 시스템 상의 부족함을 뒤집지 못했다는 것에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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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연개소문의 독재정권에 대해서,,(과연 그럴까?)
요 며칠 동안 선구자님께서 연개소문에 대한 토론 쟁의에 관한 글을 올리셔서 많은 분들이 관심속에 지켜보셨습니다. 저도 예전에 선생님 책을 본후 연표를 짜면서 몇가지 생각했던걸 글로 정리해 올리게 되어서 제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구요.
그런데 연개소문이나 고구려 멸망에 관한 글들을 보면 꼭 빠지지 않고 연개소문 정권의 독재성을 들고 나오곤 합니다. 그거 때문에 고구려가 망했다는 식으로 초점을 잡는 경우가 많지요.
그런데 저는 그런 글 볼때 마다 드는 생각이 '아니, 그 당시에 독재정권 아닌게 어딨어?' 였습니다. 사실 전제왕권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쉽게 얘기해서 왕의 독재정권이 아닌가요? 물론 연개소문은 왕은 아닙니다.
역대로 독재정권 한 사람 많았지만 멸망으로 결말지어진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정국의 이합집산이 일어날 때 적절한 인물이 나타나서 그런 혼란을 종결짓는다는 의미에서는 독재정권이 꼭 부정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면을 떠나서 과연 연개소문 정권이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독재 정권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삼국사기나 신,구당서 계열의 사서를 보면 연개소문이 정권을 휘어잡고 왕조차 함부로 못대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승자라고 할 수 있는 당의 일방적인 기록을 위주로 서술된 사료이기 때문에 정말로 그런 것인가에 대해서는 100% 확신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면 그 확신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 맥 놓고 있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구려의 기록이 없다면 제 3자가 쓴 단편적인 기록이나마 참고를 해봐야 겠지요. 그것이 아니면 왜곡을 한 기록이 있더라도 사실이 아닌 부분은 분명 윤색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어색한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일본서기 황극천황 2년 조에는 연개소문으로 추정되는 이리가수미가 왕을 포함, 이리거세사를 죽이고 동성인 도수류금류를 대신으로 내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대신은 대대로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도수류금류는 후에 15만 대군을 지휘한 대로 고정의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병도는 동성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이리거세사와 도수류금류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하고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동성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동성이라는 표현은 같은 동부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만약 연개소문이 독재정권을 지향했다고 한다면 아무리 정치적성향이 비슷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은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얼굴마담 형식일 수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얼굴마담에게 고구려 총 병력의 반이나 3분의1에 해당하는 15만에 달하는 병력의 지휘권을 주지는 않지요. 그것도 국가 비상시기에 말입니다. 15만 대군을 이끌 역량이 있을 정도로 실력이 있는 사람에게 얼굴마담을 시킨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발상입니다. 이것은 고정의가 연개소문과는 다른, 일정한 실권을 쥐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증거입니다.
또한 삼국사기를 보면 보장왕이 647년에 왕자 임무를 막리지에 임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연개소문이 왕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전권을 휘둘렀다면 자신이 세운 꼭두각시 왕이 힘을 기를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함에도 왕자 임무는 막리지에 임명됩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의 권력 세습이 문제가 됩니다. 권력 세습은 독재 정권이 부패화 되었을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유가 다 있습니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멸망에 이르는 순간까지의 정치제도를 보면 한가지 특이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직의 세습성입니다.
모두루 묘지명(저는 이 묘의 주인이 모두루가 아닌 염모라고 생각합니다만,,,)을 보면 고구려 건국 초기부터 한 귀족가문의 권력 세습이 쭉 내려져 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적어도 이 묘지명이 나오는 장수왕 초기까지는 귀족 가문의 권력 세습성이 나타납니다. 이후 장수왕이 평양천도를 행하고 그에 따라 귀족가문의 전면적인 세력 개편이 이어지긴 했지만 안장왕 말기의 정치 혼란으로 원상복구됩니다. 결국 고구려 멸망까지 일정 가문의 권력세습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어느 시대나 나타나는 문벌 가문의 보편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음입니다. 고구려 말기의 각 귀족가문에 대한 자료를 모아보면 단순히 권력의 세습이 아니라 관직의 세습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삼국사기를 봐도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관직인 동부대인의 직위에 오르려고 하자 각 귀족들이 반대하여 이루지 못했기에 빌어가면서 까지 간신히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관직의 세습이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이것은 천남생 묘지명에서 누대로 막리지의 관등에 있었던 것을 감안 할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고자묘지명에서도 관직이 반드시 세습된 것은 아니지만 일정 이상의 관등과 직위를 세습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그 당시 연남생 3형제가 점차 권력을 세습해과는 과정은 고구려인에게 있어서 그리 큰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사 그 세습했던 측면이 독재정권의 강화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독재정권의 경직성 때문에 고구려 지도층의 일부 분열의 여지를 줄 수는 있었지만 고구려가 멸망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미 연개소문 정권 이전부터 이런 불씨는 있었왔습니다. 굳이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터질 수 있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국가 말기현상 같은 망조라고 보기도 힘듭니다. 어느 시대나 좌익이 있다면 우익이 있기 마련이지요. 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결과론적인 해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이전 시대에도 고구려가 멸망의 위기를 겪은 사실도 있지요. 내분에 의해 나라 전체가 두동강이 날뻔한 적도 있습니다. 일부 지도층의 국가적 배신도 없는 것이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멸망 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문제일 뿐입니다. 강도가 약했을 뿐 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고구려 700년 사직을 보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 시대에는 이를 헤쳐나갈 수 있었지만 668년에는 이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고구려가 멸망했던 것입니다. 좀 강도가 심했던 것이지 당시 고구려가 너무 오래되어 망쪼가 든다든지 아니면 엄청나게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망했다고 보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나름대로 그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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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연남건의 쿠테타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유야 여러가지로 복합적이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연남건의 쿠테타가 적극적인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사실 이거 때문에 고구려가 내전으로 돌입하게 된 것이죠. 단순히 권력욕 때문에 이런 쿠테타가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을 보면 665년 10월 즈음에 벌어졌을 것으로 보이는(이건 제 추정입니다.) 연남건의 쿠테타는 642년의 연개소문의 혁명과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대치를 시켜보면 연남생=영류왕, 연남건=연개소문이라는 구도가 됩니다. 정치적 성향을 봐도 비슷한 면이 있죠.
연남생과 영류왕은 양 대전을 치른 후에 피폐된 고구려 경제를 우선적으로 살리는데 주력하기 위해 전쟁을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면이 강합니다. 물론 이 이면에는 수나 당의 국력을 두려워하는 면도 없진 않겠죠. 특히 연남생의 경우 당나라 계필하력의 군대에 대패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연개소문과 연남건은 대외 강경파적인 성격을 보입니다. 연남건이 정권을 잡은 뒤의 시간이 길지 않아서 사료가 거의 남지 않았긴 하지만 당에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상당히 강경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물론 연남생 정권의 성향을 봤을 때 그에 반대하는 것으로 충분히 증명되지만요.
이 두 시대 모두 전쟁으로 인한 피해 복구를 위해 당나라에 저자세를 취하며 기존의 정권 집권을 유지하려는 보수귀족세력과 전쟁이 없어진 뒤 공을 세우지 못하고 하위직에 머무르며 불만이쌓이는 소장파 장수들 간의 대립이 첨예한 시기입니다.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권력 욕심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보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혁명은 성공적으로 고구려 국론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했지만 연남건은 그러질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경제력 약화에 따른 국론 분열이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연개소문이 쿠테타를 일으킬 시점에 영류왕은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거의 만회한 시기였습니다. 시간도 2~30년 가량 흘러서 사실상 전쟁의 처참함을 경험한 세대는 물러나고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점차적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잡아가던 시기입니다.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어졌으니 그 다음 남은 일은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지요.
그런 상황에서 왕이라는 작자가 외국에 저자세로 나옵니다. 뭐 소국이면 백성들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습니다만 고구려는 대국입니다. 자존심 문제를 떠나서 대국이 그렇게 약하게 나오면 주변국들이 우습게 아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정계를 주도하는 인사들이 이런 점을 모를리도 없고 백성들도 자존심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 힘든 문제입니다.
거기에 적국인 당의 국력은 점차적으로 강력해지고 고구려에 대한 적대 행동을 강화해가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키니 거국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연남건의 쿠테타는 그러질 못합니다. 우선은 662년 2월에야 2차 고당 전쟁이 종결되었기 때문에 경제를 회복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3번에 따른 전쟁을 그대로 몸으로 부딧혔기 때문에 수십년간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졌지요. 대략 1세대의 인구가 초토화 된 상태에서 최소한 1세대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가지는 전쟁에 대한 혐오감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전 수나라와의 대전에서는 그나마 직접적인 대전을 고수 2차 전쟁 밖에는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덜하지만 당나라와는 그런 대전을 2번이나 겪었고 고당 2차 전쟁 이전에는 계속적인 국지전으로 국경지대의 긴장상태가 수십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과연 사람들이 전쟁을 하고 싶어하겠습니까? 먹고 살기도 바쁜데 당나라 때려부수자 하면 과연 얼마나 동조를 하겠습니까? 이 당시 연남생 정권이 전쟁을 의도적으로 피할 수 밖에 없던 배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뭐,,수나라와의 대전 이후에 세력이 성장했던 수성적인 성향의 전통 보수귀족계층이 이때에도 연남생의 배후가 되었겠지요. 이들의 바램 때문이 아니더라도 고구려는 전쟁을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국력이 피폐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급한것은 고구려였기 때문에 연남생은 영류왕이 그랬던 것 처럼 상당히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가면서까지 당나라와 화친하려 했습니다. 태자를 663년의 봉선제사에 파견했던 것이 그것이죠.
때문에 연남건의 쿠테타는 일부 소장파 장수들이 연남생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이를 연남건에게 부축여서 벌어진 것입니다. 단순히 연남건의 권력욕 때문이라고 보기만은 힘듭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명분이라고 해야겠죠. 지방 군대의 지휘관들 말입니다. 아무리 중앙에서 권력을 장악한다고 해도 지방에서 이를 따라주지 않는다면 헛수고일 뿐입니다.
결정적으로 영류왕은 쿠테타가 벌어진 뒤 바로 잡혀서 살해당했지만 연남생은 국내 순수중에 벌어졌기 때문에 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연남건의 실책 중하나가 바로 연남생을 평양성에서 죽이지 못하고 국내성으로 몸을 피할 시간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구심점의 유무가 승패의 주요 관건이었던 셈입니다. 때문에 국내지역에서 중앙에 반기를 들었던 연남생에게 상당 세력이 동조했던 것이구요. 만약 연남생이 평양성에서 영류왕이 살해당했던 것 처럼 그 역시 죽임을 당했다면 고구려 국내에 내분이 일어나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에 외부의 위험을 인식하기 힘들었다는 것도 쿠테타 실패의 이유가 됩니다. 연남생의 권력 장악으로 대당 화친정책을 펼치고 국력 소모가 심했던 당나라가 663년 8월에 전선 만들기를 중단할 정도로 전쟁 의지가 약화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내에서 전쟁에 대한 위험을 642년 때 보다 훨씬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보통 국론을 모으는데 외부의 위협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연남건의 쿠테타는 시기를 잘 타질 못했습니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독재정권이 붕괴된 뒤에 벌어진 권려 괴리가 문제라기 보다는 경제력 약화로 인한 국론 분열이 가장 큰 원인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자료는 없습니다. 단지 전쟁 상황을 보고 추론하는 수준이죠. 단지 645년 요동성 전투 기록을 보면 요동성에서 탈취한 군량미가 50만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걸 토대로 계산하면 고구려의 전략 비축미는 대략 1천만석 안밖이라는 계산이 나오더군요. 참고로 수대의 전략 비축미는 2500만석인가 그럴겁니다.
첫댓글 글 잘 읽었읍니다..제가 알고 싶은건,, 경제적인 측면입니다...혹시 자료 가지고 계시면 올려주실수 없는지요..돌궐과 백제 멸망 전후을 비교해서 올려주셨으면 하는데요...^^
정확한 자료는 없습니다. 단지 전쟁 상황을 보고 추론하는 수준이죠. 단지 645년 요동성 전투 기록을 보면 요동성에서 탈취한 군량미가 50만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걸 토대로 계산하면 고구려의 전략 비축미는 대략 1천만석 안밖이라는 계산이 나오더군요. 참고로 수대의 전략 비축미는 2500만석인가 그럴겁니다.
지금 기억이 확실치는 않은데 수의 전체 전략 비축미가 2500만석인지, 아니면 여양창의 비축미만 2500만석인지 확실히 기억이 안나는 군요. 참고로,,이 양은 수나라 조세 수입 60년치라고 하더라구요.
아 그런 사실이 ? 몰랐습니다.. 아울러 김용만 선생님 저서 한글자도 안놓치려고 2번 이상 정독했습니다. 더불어서 개인적으로 모앗던 모든 자료들도 나름대로 판단해서 올렸으며 올초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몰랏군요.. 실증과 논리적 해석이 상당합니다...
내심 테클을 기대했는데 아무도 안써주시네요. 고려대인님이라도 반박을 해주셨으면 했는데,,지금 제가 쓴 글 보니 허점이 약간 몇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