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모(國母) 육영수(陸英修 : 1925 ~ 1974)
제 3·4공화국 박정희 대통령 부인으로
부 육종관과 모 이경령 사이의 차녀.
아버지가 소문난 부호로 부유한 가정에 있었으나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을 지닌 여자.
옥천읍내 죽향국민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0년 전란으로
부산에 피난중일 때
육군중령 박정희와 혼인하여
슬하에 지만·근혜·근영 등 1남2녀를 두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5.16군사 쿠테타를 주도하여 성공한 뒤
1963년 10.15 총선거에서
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연임됨에 따라
대통령 부인으로 11년간 내조하였다.
검소한 안 살림과 우아한 품위로
대외적인 활약을 하였으며,
숨어서 남이 못하는 일을 많이하여 덕망을 쌓았다.
만년의 공직은
양지회 명예회장과 자연보존협회 총재였으나
평소 재야 여론을 수렴하여
대통령에게 건의를 잘 하여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도 들었다.
남산에 어린이 회관을 설립하는가 하면,
서울 구의동 일대에 어린이 대공원을 조성하고
정수기술직업훈련원 설립을 비롯하여
재해대책기금조성과
정신박약아 돕기 운동 등 그늘진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사회복지사업에 분망한 일과를 보내었다.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창간과
서울대학교 기숙사 정영사를
설립하였으며, 경향 각처의 여성회관 건립은 물론
연말마다 고아원·양로원을 위문하여
따뜻한 구호의 손길을 미쳤고,
1969년부터 전국에 87개소나 되는 음성나환자 정착촌을 만들어
나환자들이 재생을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국립극장 단상에서
문세광(文世光)에게
저격당하여 서거하였다.
박정희대통령 저격사건에 희생양이 된 격이어서
애도 인파가 청와대에 연일 쇄도하였는데,
국민장 영결식은
8월19일 오전10시 중앙청(현 국립중앙박물관) 광장에서
각국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고 이날 오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는 백일탈상 하루 전인
1974년 11월21일에 제막되었으며,
이듬해 기념사업회도 발족되어 추모책자를 펴냈다.
그는 우리 시대가 낳은 훌륭한 어머니와 아내로서
이상적인 한국의 여인상을
국민의 가슴속에 심어놓고 간 것이다.
우리 시대에 다시 없을 국모로서
우리들 가슴속에 각인되어 있다.
다시 모시고 싶은 국모이다.
육영수(陸英修) 여사는...
육영수 여사는
1925년 11월 29일(음 10월 14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덕유산기슭에 터를 잡은
육종관씨와 이경령 여사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1938년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배화고등여학교에
6대 1이라는 높은 경쟁을 거쳐 입학했다.
충청도에서 온 학생으로는 유일한 입학생이었다.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치열한 경쟁을 거쳐 입학했다 해서
1학년 때부터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육여사는 몸가짐이 늘 단정했다.
당시 여학생들은 주름치마를 입었는데
주름이 한 번도 펴진 것을 볼 수 없었다.
특히 육여사는 머리숱이 많았지만
항상 곱고 단정하게 빗은 모습이었다.
성격이 차분한 육여사는
늘 조용한 미소를 짓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친구들과 다툰 적도 없었다.
너무나 순진하여 소풍을 가 노래를 시키면
숨어 버리고 마는 성품이었다.
또한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언행이 겸손하고 검소해서
육여사가 옥천의 부잣집 딸이란 사실을
모든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모를 정도였다.
이렇게 얌전한 모범생이었던 육여사는
웃어른의 말을 거역하는 일도 없었다.
졸업기념 수학여행을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어른들이 허락을 해주지 않아 가지 못했다.
그러나 육여사는
어른들을 원망하거나 불평을 하지 않았다.
육여사는 재봉과 수예에 뛰어나
전 학년에서도 으뜸이었다.
그래서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곧잘「시집가서 잘 살겠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마음 착한 교동집 작은아씨'로
이름이 나 있었던 육여사는
진흙 속에 물들지 않은군자의 기품을 지니고 있는 연꽃,
철 따라 피어나는 꽃밭의 꽃들,
그리고 뒤뜰의 백년이 넘은 아름드리 은행나무,
감나무 속에 묻혀서 꿈 많은 소녀시절을 보냈다.
졸업을 하자 육여사는 옥천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집에서 가사를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옥천여학교에서
선생으로 나와 달라는 부탁이 왔다.
육여사는 청을 받았을 때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하고 망설였다.
매사에 조심하는 여사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러나 학교에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학생들은
육여사를 무척이나 따르고 좋아했다.
학생들은 다정하고 친절한
그리고 상냥스런 육여사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와대의 안주인이 되어서...
1963년 12월 17일.
육여사 38세 때
제3공화국의 퍼스트레이디로
청와대의 안주인이 되었다.
육여사는 청와대 생활이 시작되자
세 가지 일을 실천에 옮겼다.
그 첫째가
열심히 공부하는 일이었다.
둘째는
많은 사람을 만나 시중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끝으로
청와대의 살림을 중류 가정 정도로 하는 것이었다.
시장의 얘기와 관심사를 토대로
대통령께 직접 건의하여
<청와대 야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육여사는 사회 각층으로부터의 들은 얘기를 그 나름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면
서슴없이박대통령에게 직언했으며,
또한 솔직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박대통령이 들어주지 않을 때에는
<나는 정권 야욕도, 조직도 없는 사람>
이라는
슬기로운 농으로써 우회작전을 펴기도 했다.
육여사는 새벽 6시부터 밤 1시가 넘을 때까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바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늘 고된 하루였다.
자녀들이 등교하고 난 7시 반부터 조반을 들기까지의
1시간 동안은 조간신문을 읽고 라디오를 들으며
대통령의 판단에 도움이 되도록 메모를 하거나
신문에 언더라인을 치는 일을 하였다.
9시경 식사가 끝나
박대통령이 집무실에 들어서면
육여사의 민원처리가 시작되었다.
하루에 50여 통이나 되는
서신을 일일이 읽어보고는
정성껏 답장을 해주기도 하고
좋은 일도 베풀어 주었다.
그런 바쁜 틈틈이 가족의 식단을 짜거나
옷가지를 매만지거나
실내장식에 마음을 쓰는 등
생활 주위의 정리를 했다.
그러다 보면 점심시간이 되었다.
박대통령과 함께 또는 혼자서
외부 손님을 초청하여 오찬을 나누었다.
하오는 접견시간이었다.
외국의 빈객을 비롯하여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
각 단체의 간부나 회원들,
벽촌의 어린이들, 새마을 지도자들,
일반 서민층 주부에 이르기까지 접견,
그 수많은 손님들에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했다.
하오 4시부터 6시까지는 공부시간이었다.
여러 전문 학자들을 초빙하여
세계사·문화사·종교사·역사·지리·철학·고고학
경제학·교육학·외교 정치사·시문학 등
각 방면에 걸쳐 공부를 했다.
6시가 넘으면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식사를 나누었다.
불가피한 일로
박대통령이 불참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전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했다.
때로는 예고 없이
허물없는 손님이 동석하기도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석간신문을 살피고
라디오, 텔레비전의 뉴스를 체크하고,
자녀들과의 대화, 독서, 도착된 편지를 읽는 등
밤 1시가 될 때까지
일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보통의 육여사의 일과이지만
봉사활동, 지방시찰 등의 일이 겹칠 때는
눈코 뜰 새가 없게 된다.
한편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무엇 하나 변변하게 갖춰진 것이 없던 시기에
선물포장을 제대로 하기위해 고심하고,
한국적 미각의 요리를 마련키 위해
꾸준한 노력과 연구를 거듭하고,
외빈의 편안한 방문을 위해서,
'진실은 누구에게나 통하며
신의는 동서를 막론하고 믿음을 갖게한다'
고 말하며
따뜻한 정과 창의적인 기지를 발휘한 육여사는
그야말로 알뜰한 주부,
슬기로운 퍼스트레이디로서
선구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외국을 방문할 때나
청와대에서 손님들을 접견할 때에도
언제나 한복을 즐겨 입었는데
이는 우리 한복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널리 인식시킬 수 있었고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우아하고 매혹적인 퍼스트레이디'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런 분주한 생활을 보다 못해
주위에서너무 고되지 않느냐고
얘기하면 육여사는 서슴지 않고
「내 생활신조는 항상 최선을 다하는 것」
이라면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을 때는
마치
숙제를 하지 않은 학생과 같은 기분이 든다」
고 말했다.
언제나 차분한 여유와 부드러운 미소,
유쾌한 위트와 유머가
육여사의 주변에서 맴돌고 있었다.
피난시절을 회상하며 쓴육영수 여사의 수필
영도다리 아래로
잔잔한 파도를 내려다보며
얼마동안은 넋빠진 인형모양 혼자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17년전 7월 하순 그 어느 날.
동족끼리의 처참함.
6.25동란으로
나도 나의 고향산천을 뒤돌아보며
4식구의 책임을 지고
부모님은 옥천에 남아 계신 채
헤어져 남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산이란 곳은 난생 처음이요,
어느 누구에게 의지할 곳 없는 곳이었다.
혼자서 이곳저곳을 헤매다니다,
방이라고 얻어보니
또한 말로만 듣던 영도섬이란다.
뒤늦게 남하하시겠다던
부모님을 맞이하기 위해
매일같이 영도에서 초량,
부산진역 등을 막연히 찾아 헤매며
애타는 초조감과 긴박감 속에서 오로지 국군의
승리만을 기원하며 불안에 싸였던 그때,
다리난간 아래로
푸른 바다를 내려다 보고만 있던 나에게
인내라는 두 글자가 새로워졌다.
참고 견디며 노력하면
광명은 다시 찾아 줄 것만 같아
지쳤던 나에게 순간적으로 미약하나마
새로운 용기가 되살아남을 느꼈다.
인내는 무위(無爲)가 아니며
또한 무능(無能)도 아닐 것이다.
인내는 달성을 위한 노력이요
성취를 위한 진통이 아닐까.
때가 성숙될 때까지 피나는 노력을 계속하며
가진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인간의 존엄성.
노력이란 후일에
그 성과의 비중도 중요하겠으나
노력한다는
그 자체가 더욱 귀중하게 생각된다.
이것은
마치 머리가 우수하여 노력하지 않고서도
성적이 좋은 어린이보다는
보다 좋아지려고
꾸준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어린이의 모습이
보다 슬기롭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과 같다.
이 정다운 파도도
그 어느 때에는 노도로 변하여
생명과 재산을 잔인하게 삼켜버려
사람들의 가슴마다
뼈저린 상처를 남겨주었겠지만
그 자연의 위력도
지금은 저 바다 속 깊은 곳에서 선량해지고저
인내로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때의 걷잡을 수 없던 불안과 빈곤을
그 영도 다리 난간에서 무아(無我)의 심정으로
생각 아닌 생각에 잠기어
찾은 인내로써 극복했음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항상 내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용기있는 사람은 인내할 줄 알며
지혜로운 사람도 인내할 줄 알고
선량한 사람 또한 인내할 줄 알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권회복도,
민주국가의 수립도,
동란으로부터의 승리도,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빈곤에서 풍요한 사회로 진보하는 것.
이 모두가
우리 겨레의 인내와 노력에서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져 가고 있지 않은가.
특별히 참고 견디어
크게 내 뜻을 이루어 본 일도 없고
그로 말미암아
자기가 지닌 괴로움을 잊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기적도 없기는 하나,
역시 참고 견디어 후회해 본 일 없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
현재도 또 후일에도 인내와 노력
그리고 성실만은 나의 신조요
가장 가까운 벗이고
단 하나의 위안이며
나의 축소된 과거 기록이기도 하다.
" 어머니
자신은 서예에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예에 집착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였으며,
1973년 초부터는 항상 거처하는 방에 조그마한
서예용 책상을 마련해 두고
틈이날 때마다 서예에 몰두하였습니다.
걱정스럽거나 고달플 때
언제나 책상 앞에서
단정히 붓을 잡던 모습은
마치 마음을 한곳에 모으며
정리하는 도인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제가 옆에서 먹을 갈아드리곤 했지만,
세상의 시름을 잠재우려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또다른 힘이 느껴지는 광경이었습니다."
<나의 어머니 육영수 (박근혜)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