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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베스 길르앗의 처녀들
삿 21:8-15
8 또 이르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영에 이르러 총회에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9 백성을 계수할 때에 야베스 길르앗 주민이 하나도 거기 없음을 보았음이라
10 회중이 큰 용사 만 이천 명을 그리로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야베스 길르앗 주민과 부녀와 어린 아이를 칼날로 치라
11 너희가 행할 일은 모든 남자 및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하여 바칠 것이니라 하였더라
12 그들이 야베스 길르앗 주민 중에서 젊은 처녀 사백 명을 얻었으니 이는 아직 남자와 동침한 일이 없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라 그들을 실로 진영으로 데려오니 이 곳은 가나안 땅이더라
13 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14 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 중에서 살려 둔 여자들을 그들에게 주었으나 아직도 부족하므로
15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
삿 21:8-15 /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다가 `혹시 지파 공동체 소집에 따르지 않고 여호와 앞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소?' 하고 물어 보았다. 그래서 일일이 조사해 보았더니 길르앗에 있는 야베스 성읍에서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은 것이 드러났다. 10) 이스라엘 지파 공동체 모임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용사 1만 2천 명을 야베스 길르앗으로 보내면서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야베스 길르앗 성읍에 사는 사람들은 모조리 칼로 쳐죽여라. 부인네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까지도 그냥 살려 두어서는 안 된다! 11) 너희가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남자뿐만 아니라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아낙네들까지도 모조리 죽여라. 다만 아직 사내를 모르는 처녀들만은 살려 두어라.' 12) 그래서 야베스 길르앗으로 올라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 사내를 모르는 처녀 400명만을 실로에 있는 진지로 끌고 갔다. 13) 또 이스라엘 지파 공동체 회의에서는 사람들을 뽑아 림몬 바위에 숨어 사는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보내어 그들을 치지 않겠다고 서약을 하였다. 14) 그러자 그곳에 숨어 살던 베냐민 남자 600명이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에게 야베스 길르앗에서 끌고 온 처녀들을 아내로 맞으라고 내주었으나 처녀들의 수가 모자랐다. 15) [붙들려 가는 실로 처녀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음이 아팠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 공동체 가운데에 분란을 만들어 한 지파를 잃게 하셨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딸을 베냐민 지파 남자들과는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이스라엘 총회의 감정적이고 섣부른 결의(21:1)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의 몰살과 길르앗 처녀들의 포획이란 잔인한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베냐민 지파를 회복하려는 거룩한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조차 전쟁과 납치란 행위가 반복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불순종이 사사 시대라는 짙은 어둠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냐(8-9)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는 일은 여호와 앞에 올라오는 것으로서 악을 행한 기브아 불량자들을 징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행동이었습니다(20:1; 21:5). 이 총회에 불참하는 일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이요, 내게는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없다는 증거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미스바 총회의 결정에 따르지 않은 사람들을 색출하였고,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젊은 여자 사백 명을 얻었으니(10-12) 이스라엘은 야베스 길르앗에 군대를 파견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전쟁을 했던 방식대로 야베스 길르앗 거민을 진멸합니다(수 6:21; 10:20-39; 11:11). 이 징벌은 비전투 요원인 부녀와 어린 아이까지 모두 죽이는 잔인한 전쟁이었습니다. 야베스 길르앗을 징벌한 이스라엘은 젊은 처녀 사백 명을 사로잡아 실로 진영으로 돌아옵니다. 야베스 길르앗을 징계한 표면적 명분은 미스바 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자를 징계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야베스 길르앗을 징계한 진짜 이유는 베냐민 지파의 보존을 위해 여자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멸절에 이른 형제를 살리기 위해 다른 형제를 죽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은 인간은 계속 악을 행합니다.
아직도 부족하므로(13-15)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의 남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공포하고, 야베스 길르앗에서 사로잡은 처녀들을 아내로 줍니다. 전쟁으로 갈라졌던 이스라엘 열한 지파와 베냐민 지파 사이의 관계는 회복되었고, 멸절 위기에 처한 베냐민 지파를 회복하려는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의 문제는 온전히 해결되지 못했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했던 감정적인 대응을 뉘우칩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의 불순종이 만들어 내는 사사 시대의 영적 어둠은 가실 줄 모릅니다.
적용: 삶에 위기가 왔을 때, 하나님께 먼저 묻지 않고 시도하는 문제 해결은 죄와 악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이들은 인간의 타락이 성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창세기에서는 타락 이후에 성적인 본성이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 즉 성적 부패는 타락의 원인이 아니라 타락의 결과인 것입니다. 사실 회개는 선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정작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악한 사람인데, 완전한 회개는 선한 사람만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당신이 악해질수록 회개의 필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은 점점 더 적어집니다. 완전하게 회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완전한 인간,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인간뿐입니다.
< 설 교 >
제거해야 할 사람
삿 21장 8~12절 / 백장흠목사
사형제도는 있어야 합니다. 왜? 악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사형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다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사형제도가 있습니다. 죽일 자는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생각할 때 그런 게 죄인가? 라고 할 것 같은데 죽일 만한 죄라고 지적하면서 “죽여라”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반대하지요. 그것이 정당합니다. 반대 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조용하게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그럴 수 있는 거라고 변명합니다. 아니 개성 있는 삶을 산다고 좋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죄가 되는데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가운데서 원망하고 불평하던 이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죄인가? 죄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을 보세요. 유황불에 들어 갈 사람 죄의 항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사사기의 결론적인 부분 이야기입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난 후 사무엘 에 이르기까지 약 350년간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내용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사사기라고 하였는데 원래의 이름은 “쇼페팀”이라고 불렀습니다. ‘지도자, 재판관’을 뜻하는 쇼페트의 복수형입니다. 히브리언 제목에 따라 헬라어 70인 역의 제목은 크리타이로 명명했는데 그 뜻 역시 재판관이라는 뜻이고, 영어도 Judges(져쥐) 재판관이라는 말로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모두 16명의 사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미스바에 대회가 열립니다. 그런데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불참하였습니다. 왜? 불참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이들을 치라 하였습니다. 즉, 죽이라 하신 것입니다.
누가 죽임의 대상입니까?
1. 참여해야 할 때에 불참한 이들입니다.(8절)
오늘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사사기 19장에서부터 시작되는 내용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레위 지파 사람에게 첩이 있었는데 이들이 불화하여 아내가 친정으로 갔습니다. 레위 사람은 아내를 데려 오려고 처가댁으로 갑니다. 레위 사람을 잘 대접하고 그가 아내를 데리고 오는데 날이 저뭅니다. 그래도 이방 땅에서 잠을 잘 수 없다고 선민의 땅으로 달려왔습니다. 그곳에 요셉 지파가 살고 있는 기브아라는 곳이었는데 아무도 잠잘만한 장소를 제공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노인이 좌우사정을 듣고 자기 집에서 유하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알고 그곳에 있는 불량배들이 여자를 욕보이고 죽입니다. 레위 사람이 아내의 시체를 열두 토막으로 내서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들에게 보냅니다. 이것을 안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모였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벌입니다. 처음에는 베냐민 지파가 이기는 줄 알았으나 결국은 베냐민 지파가 멸절되고 600명의 남자만 남았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을 끝내고 베냐민을 일으키자라는 합의를 위하여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불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곧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결과는 문제시 되지 아니하여도 참여만 했어도 불행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대를 말할 때 X세대 N세대 G세대를 말합니다. N세대는 Network 세대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P 세대 사람이어야 합니다. P세대는 인터넷 휴대전화 등으로 모든 것에 참여하는 세대입니다. P는 Participation(참여), Passion(열정)의 세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Power(힘) 세대를 말합니다. 우리는 항상 거룩하게 살아라 그럽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까? 세상을 피해 가보려고 입산수도합니다. 세상을 피해서 살아보려고 합니다. 가능합니까? 우리가 바퀴벌레가 싫어서 바퀴벌레 없는 세상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참여는 무엇을 말합니까? 바퀴벌레와 같이 사는 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P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 변화를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몸 하나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무슨 승리를 꿈꾸며 세상을 정복한다는 말입니까? 교회가 세상을 비판하고 욕할게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자세가 바른 자세입니다. 참여의 세대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해낸다는 뜨거운 열정,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참여와 열정을 가졌으면 힘을 가져야 합니다.
활을 잘 쏘는 궁사가 있습니다. 그와 비길 자가 없을 만큼 출중한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한 번은 그가 집 앞 공터에서 활을 쏘고 있는데 기름장수 노인이 짐을 내려놓고 구경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젊은이가 활을 쏠 때마다 고개를 끄덕끄덕합니다. 이 모습을 본 사나이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활쏘기를 멈추고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노인장도 활에 대하여 알고 계시오? 내 활 솜씨가 좋지 않소? 노인은 대답하기를 별 것 아닌 것 같소. 그저 익숙할 정도로군요. 사나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습니다. 감히 내 활솜씨를 능멸하다니 이런 미친 영감쟁이를 보았나? 그때 노인이 피씩 웃으며 말합니다. 내가 기름을 따르는 기술로 미루어 그대의 활 솜씨를 알 수 있소. 그리고는 호리병을 땅에 놓고 주둥이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국자로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이 엽전으로 들어가는데 엽전에 기름 하나도 묻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노인은 웃으면서 나도 재주라 할 것이 없소. 그저 손에 익숙한 것 뿐이요. 이제 젊은이는 자신의 교만을 사과하며 자기 집으로 모셔 극진히 대접하였답니다. 삶에 익숙한 것이 아니라 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동참하여야 합니다. 참여의 영성을 길러야 합니다.
1)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못하였으면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이는 살길이 열립니다. 용장이 공로를 세우지 않으면 힘과 무장이 되어 있고 고차원의 훈련을 받았다는 이가 용장이 아닙니다. 이름이 없어도 전장에 동참하는 참전용사가 대접받습니다. 예수께서 당한 고난에 동참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이에게는 살길이 열립니다.
2) 경쟁에도 참여 해야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경쟁에 참여함으로 그는 승리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겁쟁이들만 보여 있는데 같이 싸워보겠다고 참전하는 다윗은 승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자신감입니다. 아랍에미리트(UAE)가 발주한 원자력 발전소 건설사업자로 한국전력이 주도하는 한국형 원전컨소시엄이 선정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가르쳐 주었던 미국 프랑스 일본을 제치고 우리가 이긴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원전을 수출한 기술을 가진 나라는 미국, 프랑스, 캐나다, 러시아, 일본뿐이라는 것입니다. 경쟁에 동참하니까 그런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금액이 400억 달러 47조원이나 되는 금액입니다. 현대자동차 소나타 100만대 수출보다 나은 금액이라고 합니다. 30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 180척 수출보다 나은 거라고 합니다.
3) 헌신에 동참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하라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는 것이 죄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우리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헌신하신 분들의 손길이 있었기에 세계선교의 큰일을 하는 위대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네덜란드 나라는 바다보다 육지가 낮은 곳에 있는 나라입니다. 이것 때문에 큰 둑을 쌓아놓았습니다. 어느 날 한스라는 소년이 어디를 갔다 오다가 둑에 구멍이 난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급히 손으로 구멍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누구 한 사람도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는 손을 뺄 수가 없습니다. 그는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대신 그 소년은 마을 전체를 살리는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일에 반드시 동참하는 영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전도하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동참해야 합니다. 그런데 참여하지 아니한 사람을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동참합시다. 고난 당하시는 주님의 자리에 참여합시다. 사는 길입니다.
영적인 싸움에도 참여합시다. 헌신의 자리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전도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 자리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사는 길입니다.
2. 순결을 지키지 못한 이들입니다.
11절을 보세요. “너희의 행한 일은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인을 진멸 할 것이니라 하였더니”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근본목적은 구원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고 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주님으로 영접하면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은 “거룩”입니다. 즉, 경건입니다. 거룩이나 순결이 무엇입니까?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광고에 나오는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광고에 효과를 위하여 3B가 필수요건이라고 합니다. ‘Beautiful, Beast, Baby’라고 말합니다. 아름다워야 하고, 동물들을 동원하고, 어린아이들을 등장 시키면 더 좋은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옛날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지혜를 얻으려면 노인을 만나고 마음에 행복해지고 깨끗함을 얻으려고 하면 어린아이를 보라. 동물을 등장시키면 그렇게 좋아한답니다. 어린아이들은 순진함이 있습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거룩함이니라’ 외형적으로 거룩하게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인적인 거룩이며 총체적인 거룩입니다. 일부가 거룩하다고 거룩이 아닙니다. 어느 종단의 미사를 참여해 보세요. 얼마나 엄숙하고 경건하게 보입니까? 그런데 생활은 퍽 자유롭습니다. 금기하는 것보다는 자유가 많습니다. 성직자나 신도들의 삶에는 제한 받는 것이 우리 개신교보다 없고 폭이 넓습니다. 마음대로 술을 마시고 미사시간을 마치면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웁니다. 그러나 거룩하고 순결한 삶은 오히려 영적인 힘이며 왕과 사귐을 위하여 예복을 입은 거와 같은 것입니다. 순결이란 실리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힘들고 수고하게 되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순결입니다.
가정에서 어머니나 아내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영성이 타락하면 누구의 아내가 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순결은 한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오직 일편단심입니다. 충신이 누구이며 열녀가 누구입니까? 오직 한 사람만 생각하고 그를 위하여 살아가다 보면 열녀가 되고 충신이 됩니다. 야고보서 1:6~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순결을 지킨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입니다. 그들은 먹는 문제 때문에 흔들리지 아니하였습니다. 경제적인 유혹이 올 때 그것을 극복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음식을 거절하였습니다. 이것이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그들은 먹는 것 경제문제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느부갓네살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고 불 속에 집어 넣는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습니다. 순결을 지킨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도 지조를 지키는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철새 정치인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기회주의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회사에서 중요한 임무를 맡았던 강부장과 박부장이 명 퇴를 당했습니다. 강부장은 자신의 젊음을 바친 회사에서 이런 결정을 사전에 통보도 없이 했다고 분개하며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패배하고 회사를 떠납니다. 박부장은 명예 퇴직의 대상이 되면서 회사와 협상을 시작합니다. 퇴사 6개월을 유보하고 그 동안 사무실을 사용하고 기본급 수령을 약속 받고 조직적으로 재취업을 준비했습니다. 약속한 6개월이 되기도 전에 회사에 재취업을 약속을 받고 중견기업 임원으로 취업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인내로 순결을 지키면 살길이 열린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세요.
순결은 마음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분은 세상을 확 바꾸어야 하겠다고 약속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자신을 확 바꾸면 모든 것이 새롭게 됩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순결의 방법입니다. 사심을 버려야 합니다. 사욕을 버리면 깨끗하게 됩니다.
3. 불의를 행치 않는 사람은 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험합니까? 불의가 의를 지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베냐민 사람들을 보세요. 왜 죽입니까? 내가 도와주지 못하면 그들이 갈 길을 가게 해 주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세상을 보세요. 불의만 없어도 지상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예배하는 만큼의 정신을 가지고 정의의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시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당시 해군사령관이던 스윈스씨에게 정치이념을 물었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저는 세 가지 원칙에 따라 살았습니다. 첫째, 파도가 밀려올 때는 사자처럼 용감히 대처하리라. 둘째, 파도가 배를 덮을 때는 쥐를 잡으며 적은 일부터 해결해 나가겠다. 쥐가 선창을 갉아먹어 구멍을 뚫으면 파선하게 되니까 셋째, 어떻게 할지 몰라. 당황할 때는 무조건 정의의 편에 서서 행동하겠다. 이 이념으로 살았다고 말하더랍니다. 우리가 좀 불편하고 힘이 들더라도 바르게 살려는 다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불의가 아닌 선으로 살아야 합니다.
선이란 무엇입니까?
1) 내가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하는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불의는 반대입니다. 할 것은 하지 않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건 불의입니다. 내가 할 일을 하지 아니하여 다른 사람이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반대합니다. 이것이 불의입니다. 의로움을 쉽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이 사는 삶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한다면 이것이 선입니다. 현명하고 선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증오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되었으면 부모님을 존경하고 섬기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런데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불효하였다면 이는 불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돌보지 않는 노인을 자신의 부모같이 섬겼다면 이는 선입니다. 의무 이상을 실천하는 것이 선입니다.
베냐민 사람들은 당연히 동족을 돌봐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욕을 보이고 죽였습니다. 당연히 이런 이들은 진멸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진행할 때에 주동이 되어 그 일을 실행할 형편이 못되면 다른 사람이 하도록 맡기면 됩니다. 내가 찬성을 할 수 없다면 반대라도 안 하면 돕는 일입니다. 무슨 이유로 앞장서서 반대하는 지 모를 일입니다. 이런 이들은 진멸의 대상자라는 말입니다. 불의가 아닌 정의를 시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2) 아무도 하지 않는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편하게 쉽게 살려고 합니다. 거의 삶은 자기를 위한 삶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남이 하지 않는 일을 자신이 실천합니다.
교회에 오신 분들 중에 화장실 청소를 자신이 합니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선입니다. 당신을 위하여 자신이 기꺼이 희생해 주는 것이 선입니다. 우리가 누가복음 10:30절이하에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누가 선한 사람이었습니까? 의무 이상의 정신을 가지고 가까이 가서 상처를 싸매주고 자기 나귀에 실어서 주막까지 데리고 간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선행은 다른 사람들이 다하는 일을 나도 했다가 아니라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내가 한다. 그럼에도 다른 이들이 다하는 일도 나는 하지 아니한다. 이것은 불의입니다.
기억할 게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위하는 일은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선이란 나는 불편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자신만 좋게 하려고 남을 어렵게 하는 것은 악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 중에서 얻은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사명에 동참하자는 것입니다. 아니 마지막을 잘 하는 사람이 승리의 사람입니다. 큰 것을 못하였다고 아쉬워 할 게 아니라 좋은 일에는 반드시 동참하는 지혜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스데반 집사를 평가할 때 그는 부자로 살지 못했습니다. 오래 살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영적 승리자로 표현합니다. 귀한 일에 동참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신앙의 지조를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순결입니다. 세상과 짝하여 적당하게 살면 유익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손해는 보지 않는다. 이런 얄팍한 계산을 버립시다.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고 오직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이 목숨 다할 때까지 선을 행하여 살겠다. 다짐하면서 인생 승리, 축복의 상급을 받는 귀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호크마 주석
=====21:8
야베스 길르앗 - 요단 강 동쪽 길르앗 땅에 있는 갓 지파의 성읍이다. 이 성읍은요단강의 지류 중 갈릴리 바다 남쪽 32km 지점의 동쪽으로부터 요단 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와디 엘 야비스(Wadi el-Yabis) 근처에 위치하였다. 이 성읍을 진멸하기 위해 1만 2천 명의 군사만을 보낸 것(10절)으로 볼 때에 그리 큰 성읍은 아니었던 것 같다.이러한 견해는 그 성읍에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4백 명 밖에 되지 않았던 사실로도 뒷받침되어진다(12절). 이러한 야베스 길르앗은 훗날 사울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성읍이다(삼상 11장). 야베스 거민이 아모리 사람 나하스에게 포위당했을 때 사울이 성읍을 도와 구출해 주었다. 그리고 야베스 사람들은 훗날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벧산 성벽에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가져다가 야베스에묻어 주었다(삼상 31:11-13).
때문에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용감하고 경건한 이들 야베스 사람들의 행위에 대하여 특별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삼하2:5).
=====21:9
백성을 계수할 때에...없음을 보았음이라 - 앞서 이스라엘이 미디안 총회로 모여베냐민과의 싸움을 결의했을 때(20:1-11) 그들은 분명 군사들의 수를 점호(點呼)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총회에 참석치 않은 것을 알았을 것이다. 본절은 바로 그 같은 사실을 일컫는 듯하다. 20:17 주석 참조.
=====21:10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 치라 - 이는 곧 야베스 길르앗성읍에 대하여 철저한 심판을 가하라는 뜻이다. 한편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이 미스바총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비록 그곳의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의 책임이 아닐 터인데도 이처럼 그들까지 모두 함께 진멸시키도록 한 이유는 공동체적 책임 때문이다. 즉당시 공동체 의식을 중요시 하던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한 성읍의 일개인이 범죄하였을경우에도 그 성읍에 대하여 전체 책임을 묻곤 하였다(신 21:1-9). 그것은 곧 이웃이 범죄할 경우 그를 개도(開導)할 책임이 각자에게 있음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본절에서 야베스 길르앗 성읍을 철저히 진멸토록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인데그러나 당시 남자를 알지 못하던 처녀 400명만은 멸절 대상에서 제외되었다(12절).
=====21:11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할 것이니라 - 여기서 '남자와 잔 여자'란 곧 '기혼녀'(married women, Living Bible)를 가리킨다. 고대 사회에서는 대개 전쟁이나 변란(變亂)이 일어났을 때 기혼녀를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민 31:17). 아마 이는 그들을살려둘 경우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 획책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진멸하다'에 해당하는 '하람'(* )은 '구분하다', '봉헌하다'는 뜻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자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듯 야베스 길르앗 거민들을 멸절시킨 것을 의미한다.
=====21:12
젊은 처녀 사백인을 얻었으니 - 남은 베냐민 자손들(20:47)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야베스 길르앗을 치게 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의도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들은 겉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처럼 행했지만 실상은 교묘히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즉 이로써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이 서원한 것(1절)을 어김이 없이도 베냐민 자손들에게 아내를 구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7절 주석 참조.
그들이 실로 진으로 끌어 오니라 - 2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베냐민 지파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 번제를 드린 곳은 분명히 벧엘이었다. 그런데 본절에서 야베스 길르앗 처녀 400명을 이끌고 간 곳은 벧엘이 아니라 실로였다.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의 견해가 매우 다양하다.
혹자는 이제 베냐민의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벧엘로옮겼던 언약궤를 다시 실로로 복귀시켰다고 한다(Hervey). 그리하여 백성들은 다시금벧엘이 아닌 성소 실로로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19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가 가까웠기 때문에 언약궤를 실로로 옮겼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Goslinga). 그리하여 백성들은 다시금 성소로 모인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이처럼실로는 엘리 제사장 당시까지(삼상 4:3, 4) 희막이 있던 성소로 여호수아 시대에도 이곳에서 자주 총회가 열렸었다(수 18:1; 21:2; 22:9).
이는 가나안 땅이더라 - 야베스 길르앗은 요단 동편의 성읍인 반면 실로는 요단 서편, 즉 가나안의 성읍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로를 야베스 길르앗과 대비시키기 위하여'가나안 땅'이란 말을 사용한 듯하다(Hervey, Keil).
=====21:13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 베냐민 사람 600명은 이때까지 약 넉달 동안(20:47)림몬 바위에 숨어 지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평화를 공포하고 나서야 비로소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14, 23절). 아무튼 이스라엘 회중이 이처럼 남은 베냐민자손들에게 평화를 공포한 것은 백번 잘한 일이다. 성도는 비록 이웃과 다투었다 할지라도 먼저 화해를 청하는 것이 옳다(마 5:21-26). 뿐만 아니라 원수와 죄인조차도 회개할 때에는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고후 2:7).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의 정신이다(요 13:34, 35).
=====21:14
오히려 부족하므로 - 야베스 길르앗 성읍에서 데려온 처녀들은 400명이고(12절) 베냐민 사람들은 600명이었기 때문에(20:47) 약 200명의 처녀가 부족한 셈이다. 이를 위해 부득불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계책을 짜내었는데 곧 실로 여인 납치극이다(19-23절).
=====21:15
여호와께서...궐이 나게 하셨음이더라 - 본절에서 본서 기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궐이 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이 단지 지파간의 갈등으로 빚어진 내전이었던 것만은 아니며 거기에는 죄악중에 있던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 개입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궐'에 해당하는 '페레츠'(* )는 '분열, '갈라진 틈' 등의 뜻으로서 3절의 '이지러지다', '빠지다'라는 뜻의 '파케드'(* )와 동의어이다. 따라서 본절을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한 틈이 나게 하셨다'는 말이 된다(KJV, RSV, 공동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