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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한 장마같던 올 한해, 비상구가 절실했다. 짧은 여정이지만 상하이 트위스트 신바람 한 가락이면 속풀이 해장은 되리라 했다. 예전 상하이가 무슨 양념간장이나 되는지 장가개든, 황산이든 하다못해 항주를 가더라도 찔끔 맛배기로 들리던 탓에 여러번 행차는 했지만 아는 게 별로 없는 상하이다. 마침 그 사이 15개나 되는 지하철 노선을 구비 했다하니 차비 빼면 돈도 별로 안 들것이라 내심 쾌재를 불렀다.
알다시피 붉은 색 기운이 나는 도시( 홍콩, 싱가포르)같은 데는 숨 막혀 도저히 못 살겠다 자유를 달라 외치지 못하게 사는 밑 바탕을 채우는 먹는 것 입는 것 타는 것에 대해서는 특혜를 베풀었다. 단 돈 몇원이면 만사 편안한데 뭐 다른 생각이 들겠는가. 민주화라면 몰라도. 실제 싱가포르나 홍콩의 식재료는 최고 품질이다. 바로 그 점을 나는 노렸다. 싼 게 비지 떡이란 말이 있지만 이 경우는 싸지만 무지개 떡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묘하게 여정이 꼬였다. 분명 놀자고 떠난 외출인데 결과는 비지니스가 되고 말았다. 첫 날부터 그랬다. 날라서 간다는 고속 기차(MAG LEV)를 타지 않고 그냥 2원짜리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입성하여 돈을 벌고 황포강 유람선 백원짜리 대신 2원짜리 정기 통근 배로 후서 와이탄에서 후동을 왔다갔다 했으니 이 또한 차액은 엄청났다. 그래도 유람선 탄 것 처럼 맥주 캔을 따라 마시며 오묘한 야경을 봤으니 기분은 삼삼하고 돈 번 느낌에 괜스레 우쭐해지는 노릇이었다.
일행 다섯은 내친 김에 썩은 초두부(臭豆腐)가 요동치는 시장통 뒷골목을 찾았다. 그들은 가만 보면 돼지고기는 너무 사랑하고 소고기는 또 너무 무시한다. 우린 가엾은 소고기를 위로하기로 했다. 그랬더니만 고기 두께가 무려 5센티다. 이를 어쩌나 싶었다. 내 평생 한국에서는 돈이 무서워 차마 한 번도 시켜보지 못했던 그 두께가 아닌가. 우린 '삐에 팡샹( 향신료는 넣지 마세요)' 을 연발하며 채우기 바빴다. 상하이가 처음으로 양념간장 맛배기에서 벗어난 즐거운 하루였을 테다.
이이원이라나 예원에선가. 누구든 인터넷에서 보았을 그 유명타는 만두집, 남성만두와 딘 타이펑. 우린 두 거성의 만두중 딘타이펑을 택했다. 택한 이유, 찾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누구든 돈을 벌면 돈을 잃을 때도 있는 법, 기본을 시켰는데 가져나온 음식은 간에 기별도 안 갔다. 배를 채우려면 엄청 큰 돈이 필요했다. 우린 지금 까지 벌어 놓은 돈 잃기가 싫어서 주린 배를 움켜잡고 뱃속에 점만 찍고 일제히 일어섰다. 그만 먹자는 신호도 안보냈는데 참 묘한 감동이다.
그리고 찾은 게 길거리 먹거리 문화다. 군밤 그리고 과일, 입가심이면서 조금 전에 드신 만두의 디저트인셈이다. 물론 가격은 바닥인데, 글로 옮기기가 뭣할 정도다. 5원 더하기 10원으로 다섯이 흡족한 웃음을 지었으니. 우린 관광 구역에선 아무리 목이 말라도 물도 안 샀다. 2배에서 3배 비싸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햇님 표시가 그려진 동네 슈퍼는 우리의 지원군이 되고도 남았다.
우린 지하철여행을 작정하고 나선 길이다. 다행히 여행사에서 서비스로 일일지하철 티켓하고 2층 도시 구경 티켓을 각각 두장씩 선사했었다. 이는 우리에게 그야말로 VIP 신용카드와 다를 바 없다. 둘 째 날 상해 근교 저우장이란 곳을 찾았다. 안내 책자를 무시하고 감만 갖고 덤빈 탓에 상하이 체육관을 한바퀴 다 돌고나서 겨우 찾은 관광버스다, 그런데 이번 상해 여행 중 제일 큰 아쉬움은 바로 그날 저우장에서다. 일행중 제일 연장자인 도박사란 분이 칭따오 맥주에 그만 힘을 잃고 터덜터덜 거리를 걸을 때 였다.
그것은 보물이었다. 가게안에는 항아리가 여덟개가 있었는데 분명 항아리의 표딱지엔 50원이라고 써있었다. 뭣이여, 항아리가 통째로 50원...총무가 돈 50원을 얼른 꺼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거저 준다고 해도 그 큰 항아리를 어찌 할 것인가. 한국에 들고 갈 수도 없고 방법은 딱하나 통안에 술을 다 마시면 된다. 그런데 돗수가 50도, 젊을 적엔 몰라도 지금은 암만해도 역부족이다. 우린 약이 될만큼만 챙겼다. 일명 약술이다. 걷다가 지치면 술 한모금, 그러면 바로 또 힘이 났다. 그러니 약술이라 할 수 밖에.
수양제가 대운하를 판 시발점이 소주 근처라더니 역시 소주 근역은 물천지다. 물 구덩이만 수도 없이 보았을 뿐 가는 내내 산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민물고기하며 그들이 좋아한다는 마라샤오량사라는 가재 요리가 바로 그 물구덩이에서 나온 생산물이다.비싸다지만 한 번 쯤은 맛 보고싶은 가재요리. 우리에게 그 기회가 올까 모르겠다. 그 분 한테는 안된 말이지만 돈 관리자가우리말로 악바리다.
어제는 황포강에서 오늘은 저우장 운하에서 아무튼 우리는 또 배를 타고 저우장 처자의 노랫말을 들으며 또 약술을 홀짝 홀짝 마셔댔다. 실수를 한 게 노래가 서비스인줄 알았는데 딱 두곡 부르고 20원이다. 여행자는 유혹에 약하다.눈에서 불이 났지만 생글거리는 여인의 미소에 그만 사르르 녹았다. 베네치아에서는 100유로인데 여기선 고작 24원이니 또 돈을 번 것이 아닌가. 흥에 겹다보니 문득 서호를 노래한 이태백이 떠올랐다.
이태백(李太白)은 시의 신선이다. 그는 속세지만 그의 시는 속세를 떠나 있다. 시 속에는 항상 정결한 달이 도사려 은거(隱居)한다. 그가 세상과 연줄을 댄 것은 술로 인해서다. 그의 생활 속에는 술이 있고 그의 시 속에는 언제나 달이 있다. 그에게는 술은 늘 필수고 어느 달을 택할 것인지만 남았다. 잔을 들고 달에게 묻다(把酒問月)” 인지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獨酌)”인지....月下獨酌(월하독작)은 지금도 아른아른 한다.
같이 간 분중 곽부장이란 한 분도 다만 달이 없을 뿐 늘 술을 옆에 끼고 산다. 대신 달의 서정은 내가 만들지 않는가. 이태백은 서호를 유람하고 용정차 한잔 마시면 이세상에 부러울게 없고, 바로 서호가 무릉도원이라고 표현하였다. 지금 저우장이 바로 그곳이다. 비를 좋아하는 나는 이색의 小雨(소우)가 마음에 꼭 든다.
細雨濛濛暗小村(세우몽몽암소촌) : 이슬비 보슬보슬 내리니 작은 마을 어둡고
餘花點點落空園(여화점점락공원) : 남은 꽃 점점이 빈 동산에 떨어지네.
閑居剩得悠然興(한거잉득유연흥) : 한가한 삶 유연한 흥취가 거나하여
有客開門去閉門(유객개문거폐문) : 손님 오면 문을 열고 손님 가면 문을 닫네
작은 마을에 보슬보슬 보슬비가 내린다. 그 비 맞으며 점점이 꽃잎은 지고. 작위하지 않는 삶 속에는 생동하는 흥취가 늘 차고 넘치지 않는가. 사물의 작은 변화조차 설레는 흥분이 되고 뜻이 된다. 날 만나러 손님이 찾아오면 마다 않고 문 열어 맞이하고, 손님이 가면 또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문을 닫아 걸면 그만 아닌가. 굳이 어쩌겠다는 생각조차 따로 갖지 않으니 이만한 마음의 평화가 또 있을까. 이쯤이면 이색의 소우를 가슴에 품어도 좋지 않을까.
우린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주말이라 그런지 붉은 빛의 밤꽃이 무성한 상해는 어쩐지 신천지 같았다. 동방불패 영화가 떠오른다. 소오강호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장면중 하나는 일월신교의 장로가 배를 띄우고 죽어가며 창해일성소(滄海一聲笑)를 부르는 장면이리라.
도도한 파도는 해안에 물결을 만들고
물결따라 떴다 잠기며 아침을 맞네
푸른 하늘을 보고 웃으며 어지러운 세상사 모두 잊는다
이긴자는 누구이며 진자는 누구인지 새벽 하늘은 알까
강산에 웃음으로 물안개를 맞는다
파도와 풍랑이 다하고 인생은 늙어가니 세상사 알려고 하지않네
맑은 바람에 속세의 찌든 먼지를 모두 털어 버리니
호걸의 마음에 다시 지는 노을이 머문다
만물은 웃기를 좋아하고 속세의 영예를 싫어하니
호걸도 그렇게 어리석고 어리석어 껄껄껄 웃는다, 하 하 하 하 하 >>>
가끔은 세상만사 잊고 아침에는 남아당자강을, 늦으막한 해질녘에는 소오강호의 노래를 풍금이나 뜯으며 부르고 술 한병, 안주 한접시, 풍금 한 가락이면 어떨까 싶다. 다시 한번 의기를 충천하여 호탕하게 살고 싶은 욕심은 또 어떨까. 우리는 신천지란 동네를 찾았다. 상해의 청담동이란 동네다. 그곳에서 소오강호 노래 들으며 술한잔을 걸치려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기울이는 잔이 모두 와인이다. 생맥주도 언뜻 봤지만 분명 저 생맥주는 금가루 뿌린 맥주일 것이다. 돈이 겁났다. 분위기만 담고 우린 호텔서 오징어 뒷다리를 곁들여 한바작 3원짜리 칭다오 사랑을 했다. 면세점에서 산 시바스 리갈 양주도 거의 바닥이 보인다. 어쩌나 싶다. 이러다가는 면세점에서 내가 산 술 레미 마틴도 탐을 낼텐데.
술 애기가 나온 김에 잠시 우리의 꼼수 얘기를 하고 넘어가는게 좋을 성 싶다. 중국에는 음식점에 술 값이 만만하지 않다. 3원짜리가 금세 15원으로 둔갑을 한다. 물도 안 준다. 어쩔 수없이 우리는 물통을 끼고 다녔다. 그런데 술이 문제다. 사 먹자니 너무 배가 아프고 안먹자니 음식물 넘기는데 소화가 안된다. 할 수없이 우리는 노란 물이 들어간 녹차 물을 하나 사서 다 마시고 같은 색깔의 양주를 채웠다. 누가 봐도 녹차를 마시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여유롭게 녹차를 마시며 속이 찌르르한 탓에 크! 소리를 냈다. 또 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셋째날 우린 큰 마음을 먹고 상해를 마스터하기로 했다. 맨 처음 들른 곳은 우리 숙소 바로 옆집. 귀뚜라미만 파는 전문 시장이 바로 옆집이었다. 이를 애완동물 키우듯 한다니 참. 그런데 그뿐이 아니다. 싸움을 잘 할 것 같은 귀뚜라미를 사서, 전문 투기장에서 싸움을 시킨다. 귀뚜라미는 포악성이 있어서 두 마리가 싸움을 시작하면 서로 상대방의 머리를 물어뜯어 죽여버린다. 치열한 싸움은 약 5분 만에 끝나고 싸움에 진 놈의 주인은 판돈이 클 경우 한판에 집 한 채를 날리는 수도 허다했다는 것이다.
챔피언 귀뚜라미는 몸값이 1000만 원도 넘는 다는데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가 인민재판를 받고 들고 있던 병의 뚜껑을 열자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던 풍경이 새삼 새롭다. 따뜻한 데서 살아서인지 포동포동 살이 찐 귀뚜라미 귀엽다기보다는 징그러웠다. 냄새가 나서 더는 못 버티고 우리는 일어섰다. 일요일 우리는 절에 가고 참회하러 교회도 가고 성당도 가는 데 그들은 유교를 종교로 아는지 꾸역꾸역 공자 모신 분묘에 몰려왔다. 줄이 길게 선 만두집 지나 7원짜리 이발소를 지나자 신기루장수가 보였다. 일행 K 손가방이 너덜 해 꼴이 사나웠는데 노인은 꼼지락 꼼지락 가방을 훔쳐대더니 이내 고쳐냈다. 우리나라에서는 갖다 버리라 했을 것인데 단돈 5원으로 말짱해졌다.
이윽고 분묘에 도착했다. 어제도 이이원에서 65세 이상에게는 반값세일이더니 이곳도 해준다. 복지라기보다는 유교 덕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에서도 백발인 두 동료에게는 자리 제공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 바람에 그 두분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여기서 그냥 눌러 살까. 분묘안 마당이 북적거려서 가만 보니 중고책 사고팔고 시장이 열려 있었다. 공자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책 물물교환을 하겠다는거다. 갸륵한 지고. 공자님이 하신 말씀이다.
공자님이 어찌 생기셨나 올려다보았다. 너무 잘 생겼다. 그 옆에는 큼지막하게 文昌物華 란 글이 걸려 있다. 말 그대로 글을 깨치고 글을 알면 만물이 번창하리라 . 그래서인지 그 동네는 건물 대부분이 어린아이 공부에 관련한 것들이다. 나오면서 제일연장자이신 도박사가 한 말씀하신다. 노인을 공경하라. 나도 대꾸했다. 노인들은 음주를 삼가라. 원체 술들을 좋아하는 네 분 영감들이다. 우리 발걸음은 어느새 홍구 공원이다.
윤봉길의사가 계신곳으로 알고 있는데 어디에 홍구공원이 달라 붙어있는지는 몰랐었다. 지도책에도 없다. 젊은 중국 친구가 귀띔했다. 루쉰공원이라고. 홍구공원에서 루쉰공원으로 바뀐지가 꽤 되는데 우리가 여전히 홍구홍구 하는 것은 윤봉길의사가 바로 홍구공원이라 불리던 그 장소에서 일본군 대장을 수류탄을 던져 암살하였기에 그럴 것이다. 상해 축구경기장 옆 루쉰을 찾았다. 근대화의 아버지 아비장전의 루쉰이다. 여기서는 한국 노인에게는 공경을 안하는 모양이다. 70이상 노인은 단돈 1원으로 적혀있는데 한국인은 안된다는 것이다.
원내에는 루쉰기념관이 있고, 공원 옆에는 루쉰이 말년을 보낸 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공원 안에는 루쉰 묘가 있으며 묘비명은 마오쩌둥의 필체라고 하는데 우리는 건너 띄었다. 마우쩌뚱도 장제스도 모두 좋아했다는 인물이지만 우린 윤봉길의사가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가는 도중 위구르인들의 춤판도 보고 노인들로 구성된 루쉰합창단의 노래도 들었다. 뚱뚱한 여인의 지휘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실수하다가는 바로 혼을 낼 것 같은 진진한 모습. 하지만 그들은 서로간 잘모르는 사이들이다.
노래를 마치면 누구냐는 듯이 모르는 척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단지 그들은 취미대로 공원에 모여 하고 싶은 것을 골라 할 뿐이다. 우리 같으면 끝나면 서로 친해보자고 바로 뒷골목 술집행일 텐데 그들은 그렇지 않다. 부부가 공원에서 마주쳐도 그때만은 모른척을 한다고 한다. 우리로서는 말도 안되는 따로 국밥타령이다. 우리는 겨우 매헌이라는 누각을 찾았다. 어디에도 윤봉길이란 안내판이 없었기 때문이다.
8년전인가 이곳에 왔을 때는 그래도 조용하고 바로 눈에 띄었는데 지금은 놀이공원이 되어 찾기도 어렵고 어수선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그 사당을 지켜준 것이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마 중국과 일본의 친우관게를 기념하는 곳에서 서 있는 윤봉길의사라서인지도 모르겠다. 참 역사적인 아이러니다. 2층 누각 매헌에 드디어 당도 했다. 우리는 술잔을 올리고 예를 갖추었다. 도박사가 대표로 절을 올렸다. 곽부장이란 분이 예가 끝나자 마자 바로 술잔을 들이킨다. 염불엔 관심이 없고 잿밥이라더니.
배가 고팠다. 뭘 먹을까. 지난 번 북경여행 때 신동방 백화점 먹는 코너에서 우거지국을 먹은 기억이 떠올랐었다. 그래서 지난 밤 저우장을 다녀와서 급히 들린 신세계백화점을 들렸는데 음식 맛은 그럴듯 했지만 100% 입맛은 아니었다. 사실 신세계를 들른 것은 우리나라 신세계 소유인 줄 알고 간 것인데 전혀 관련이 없단다. 어찌 시설이 좀 시원치 않더니만 시설이 낡은 오래된 백화점이다. 그참에 봐둔 제일식품 백화점 3층에 음식전문점이 있다. 역시 선택은 옳았다. 이것저것 다 시켜먹었는데 5명 분이 260원이다.
이제 오후 일정은 .... 난 재래시장이 보고 싶었다. 어디를 가든 나는 시장부터 찾는다. 정감이 서린 곳을 나는 좋아한다. 땅콩을 살 목적도 있다. 산동지역 땅콩은 우리보다 더 낫다. 우리가 묵은 곳은 노서문 근방인데 큰 시장이 있다는 곳은 그곳과 이웃한 대경로 방면. 그런데 어찌 된 노릇인가....대경로 거리는 있는데 집이 한 채도 없다. 때려 부수고 재개발이 한창이다. 다쓰러져가는 가게집을 겨우 만났다. 누가봐도 순하고 선하게 생긴 사람이다. 우리는 인민광장부터 걸어온 탓에 목이 말랐다.
걷고 싶어 걸은 것은 아니다. 두 번인가 택시를 잡아 위치를 보여주고 가자니까 잘 모르겠다고 거절을 했다. 13원 기본요금 밖에 안 되서 그런 것만 같았다. 그 덕에 돈 13원이 생긴 거다. 그 돈으로 목을 축이려고 맥주 캔 셋 하고 물 한 병을 샀다. 슈퍼 계산으론 15원 정도 음식점 계산으로는 60원, 그런데 단 돈 11원이란다. 12원을 주니 다시 1원을 거슬러 준다. 어째서 이런 일이. 선하게 생겼더니만 가격도 솔직하다. 그러자 누군가 한마디 했다. 그러니까 집도 헐리고 못 살지. 어디에 살든 순한 사람들은 뒤처진다싶은 게 이제는 당연한 상식이라도 되는가.
우린 자리를 잡고 물었다. 친절한 그가 말한다. 큰 시장인데 다 헐리고 큰 건물이 들어선단다. 이제 상해에는 더 이상 재래시장은 없다는 것이다. 상해가 발전 한게 100년 정도인데 어찌 전통시장이 있겠느냐는 말도 있다. 그들 요우커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놀라는 게 동대문시장이고 남대문 시장이다. 쉽게 말해 일종의 짬뽕 격 없는 게 없는 시장인 것이다. 편리하고 저렴하고 양도 많고 적고 상관없이 달라는 대로 다 판다. 이 옷 백벌이요 해도 주고 한 벌만 안될까요 해도 주고 깎아 주세요 해도 다 해주니 그들로서는 놀랄 수 밖에.
아무튼 우리의 재래시장 탐방은 실패했다. 잃은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먹자골목, 운남남로. 민물가재요리'마라샤오롱샤' 좌판이 질펀하게 펼쳐진 동네가 바로 그 옆에 있었다. 동네 어느 가게집, 줄이 선 모습이 신기하여 일단 먼저 서고 무언지 알아봤다. 단돈 7원에 과자빵을 구워서 파는데 맛이 대단한 모양이다. 30분을 기다려 5봉지를 겨우 넣었다. 기다리는 사이 우리는 마라샤오롱샤 에 대해 알아보았다. 물론 알아본다는 것은 가격이다. 만만한 가격이 아니다. 210원에 반근. 비싸지만 어쩔거냐. 먹어봐야지. 낮부터 먹기는 그러하여 우린 메뉴를 사진 찍고 장소 명함도 챙기고 그 동네를 빠져나왔다.
어스름해지는 게 상하이 박물관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급한 김에 택시를 탔더니 기본요금이다. 상해도 알고보면 볼만한 곳은 대충 몰려 있다. 그러나 아뿔싸, 4시5분 도착인데 4시에 클로징.오후 발길은 번번이 가는 곳마다 헛걸음이다.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첫날 1만 칠천보 둘째날 1만보 ...연일 걷다보니 누적 피로감이 상당하다. 놀러 왔더니만 비지니스가 되고 이제는 중노동에 시달린다. 마침 이틀 치 일일 패스가 끝이 날 시간, 우리는 도시 순환 2층 티켓을 꺼냈다. 지금까지 돌아다닌 곳을 정리해보자는 심산이었다. 한번 보기는 아까워 두바퀴를 돌았다. 어느 참 우리는 밤거리를 뚫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이제는 어디가 어딘지 눈 감고도 훤할 정도다.
그 사이 정이 들었던가. 벌떼같이 몰려든 곳곳이 포근하게만 보인다. 다시 찾은 운남남로, 이곳 역시 낮과 밤은 확연히 달랐다. 붉은 네온사인은 술을 부르고 마음을 벌겋게 달구었다. 가재를 탐하고 3원 짜리 꼬치 40개를 단숨에 해치웠다. 붉게 물든 가재, 생김에 비해 맛은 덜했다. 거기에 조개는 하나에 60원, 말도 안되는 가격이다. 비로소 내가 상해서 할 비지니스를 찾은 셈이다. 우리동네 불타는 조개구이를 이곳으로 옮기면 바로 대박이 날 것이다. 음식값이 우리의 1/3인데 조개는 우리의 세배, 그렇다면 현 시세로 9배의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비지니스도 걷는 중노동도 잠시, 어느 참 내일이면 상하이를 떠난다. 축제는 극으로 치달을 필요가 있다. 한정된 시간은 더 농밀한 무드를 재촉한다. 우리는 과하게 마시고 과하게 웃었다. 이런 때는 과유불급이란 말이 들어맞지 않는다. 웃음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밀려갔다. 우리에게 이런 기회가 다시 또 있을까. 마음 한편 피어난 야릇한 미련은 못내 나를 잠시 우울하게도 했다. 클라이막스 후는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인생경험으로 늘 겪은 과정이건만 나는 익숙하지 못해 번번이 애를 먹는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지 일행은 호텔로 와서도 클라이막스 연장전을 치루자고 했다. 나는 레미 마틴을 어쩔 수 없이 내놓아야 했다. 마침 도박사님의 조카가 호텔을 찾아왔다. 미국회사 소속의 건축가인 조카는 상하이에 설계업무로 3년 째 나와 있다고 했다. 즉석에서 노총각인 조카의 혼담 주선이 이루어졌다. 원님 덕분에 나발 분다고 잘 되어 그 덕에 상해를 다시 오자고 했다. 아침에 상해 젊은 친구의 결혼 풍경을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2층 오픈 버스를 온통 치장하고 난리법석이었다. 그 조카 말이 그것은 서민층 혼례라고 했다. 부유층은 1억원 정도 물 쓰듯 쓰는데 리무진에 벤즈가 줄을 잇는다나.
그러고보면 상해는 쉬이 생각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도시다. 부동산 가격이 31평으로 해서 우리돈 15억이 예사이다. 길거리에 써 붙인 가격표를 보고 처음에는 계산을 잘못했나 싶었다. 그런데 뒷골목에 들어서면 또 그런 빈민은 없다. 단돈 10원도 큰 돈 같이만 느껴진다. 이곳에 오기전 홍콩 데모 소식을 접했었다.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이 주동이 된다해서 나는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싶었다. 따스하게 잘 먹고 잘 지내면 뭘 하나 , 말이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데. 슬로건은 민주화다 싶었다.
그런데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한마디로 이렇게 살다가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집 한채 가격이 40억원이다.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이 현실 속에서 자포자기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여기도 그런 뉘앙스가 풍긴다. 후후!! 여기만 그런가, 우리도 서울 땅은 또 그러하지 않은가. 여흥을 만끽한 우리는 모두 곪아 떨이지고 말았다.
드디어 4일 째 돌아오는 날, 호텔에서 조식을 하고 우린 9시쯤 길을 나섰다. 어제 마신 술끼가 여전한지 취기가 도는 말투다. 이틀만 더 쉬고 가면 안될까. 하지만 이 말은 단지 취기 때문 하는 말은 아닐 터 아쉬움이 봇물이다. 우리는 신천지를 다시 찾았다. 아무래도 상해 임시정부를 안들리고 간다는 것이 꺼림칙 했다. 그곳은 우리가 묵은 노서문에서 한 정거장 위치에 있다. 지하철 표는 다 썼고 이층 버스표만 남은 상황, 그냥 우린 걷기로 했다. 마장로 306번지, 8년전 내가 처음 왔을 때 그 건물 앞은 한창 재개발 중이었으며 수척한 건물은 언제 헐릴지 모른다고 했었다. 당시 그곳을 들르고 바로 옆 집으로 우리는 향했었다. 바로 짝퉁집이 그 옆집이었다.
그 집들이 아직도 건재할까. 다행히 상해임시정부 건물은 그때보다는 훨씬 덜 허름했다. 누군가가 돈을 들여 사나운 꼴을 면했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위치에 선 상해임시정부 유적지다. 당시 한창 재개발 중이던 곳은 고급 찻집이 들어서 있었다. 도박사님은 기부금을 내고 작은 선물을 받았다. 나는 다시 그 옆집을 찾았다. 아직도 짝퉁인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바로 옆집은 아니고 세 집 건너 여전히 짝퉁이 있다고 했다. 공안원이 건물에 상주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짝퉁가게가 있다는 게 묘한 느낌을 준다. 서로는 공생관계인가.
우린 2층버스를 타고 상해박물관으로 향했다. 공짜일까 아닐까. 인민을 위해서라면 공짜일 테고, 르부르박물관 같은 곳은 큰돈도 받으니 돈을 받을지도 모른다. 역시 공짜다. 그런데 동료 한 사람이 라이터를 압수당했다. 라이터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담배를 못피워 안달이다. 나는 마침 요즘 공부를 하는 게 고구려 과목이라 그들의 고대 도자기 형태나 색상만을 유심히 챙겨서 보았다. 장제스가 자금성 보물을 다 들고 대만으로 갔다더니 역시 북경이나 상해 고품은 대만보다는 훨씬 못했다. 긴 얘기는 하기 그렇고 우리의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을 동시대 송나라때는 감히 흉내도 못냈고 명나라 후반 청나라 때 비로소 금빛으로 새겨 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색상 또한 조선의 백자나 비취빛 청자만 못했다. 그러면 그렇지, 괜스레 뿌듯해지는 이 노릇은.
이윽고 박물관을 나서야 할 상황, 라이터를 다시 챙기겠다고 동료가 압수처를 향했다. 똑같이 생겼는데 어찌 챙겨올까 싶었는데 그런데 번호라도 따로 매겼나 제대로 챙겼다. 그 비결은 다름 아닌 한글이다. 대전 만년동 00술집 선전 문자...그는 말했다. 세종대왕님 감사합니다. 오는 길 2층버스정류장 앞에서 핀란드 사람을 만났는데 묻는 질문이 중국과 한국도 같은 문자를 쓰지요..엉! 이게 뭔 소리. 우리는 말했다. 고유 우리 말이 있다. 단지 한자는 곁들여 읽어줬을 뿐이다.
그런데 말이다. 여직 비지니스만 한 탓에 300원을 넘게 식사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걷은 돈 남은 돈이 무려 천원도 넘는다. 괜스레 억울한 생각이 든다. 내가 돈 쓰러 왔지 돈 벌러 왔는가. 상해서 남은 단 몇시간,' 우리 한번 호강좀 합시다.'총무인 이박사에게 이구동성이 통했다. 그래서 들른 인민광장 남상 만두집, 만두와 국수를 시켰다. 그런데 만두 맛이 장난이 아니다. 탁 무는 순간 즙이 물컹하는데 순간 퍼지는 오묘한 향기라니, 침샘이 마르지 않는다. 시키고 또 시켰다. 총무가 더 이상은 곤란하다는 눈치다. 달려나가 내 개인돈을 내며 협박을 하였다. 그러니 어쩔 수없이 또. 그것 참 이상하다. 어찌 만두 속에 국물을 채워 넣었을까. 주사 바늘이라도 이용했나. 그래봐야 쓴 돈은 정확히 301원.
지하철 비용을 아끼지고 우리는 또 이층버스를 탔다. 24기간 활용가능 이층버스도 꿑날 시간이 다 되어간다. 호텔에 들러 가방을 챙겼다. 이제는 시간이 정말 없다. 가방을 끌고 달리다 시피 후동공항으로 간다. 6시 비행기면 4시까지는 가야하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란다. 룽양루에서 우리는 고속 기차(MAG LEV)를 탔다. 45원 내고 단 7분 만에 공항에...그리고 나는 잤다. 누군가 깨운다. 인천공항이란다. 아직도 꿈속에선 여전히 상해인데 말이다. 나는 깨면서 말했다. 깨우지 마! 깨우지 마! 지금도 여전히 꿈 속은 상해다. 유망 비지니스 업종을 얻기는 했지만 중노동에 비지니스만 하다 왔는데도 여전히 상해가 아른거린다. 다음에는 정말 돈 좀 쓰고 다녀야 겠다. 한 도시만 점 찍어 맴맴 돌고 도는 여행도 해 볼만하다. 아니 더 짜릿하고 달콤하다. 몽상이 쉬이 걷히지를 않는다. 깨우지 마! 깨우지 마! 정말 달콤했는가 보다. 상해가.
첫댓글 좋은 기행 수필 잘 보고 갑니다
행보한 여행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