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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복 데뷔 시절 사진(1933년)
왕수복은 건장한 몸집과 같이 목소리도 우렁차고 기운 좋고 세차게 나왔다. 특히 평양 예기학교, 즉 기생학교를 졸업한 만큼 그 넘김에는 과연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본 성대가 아니라 순전히 만들어 내는 성대이면서도 일반대중에게 열광적 대환영을 받아 「고도의 정한」은 조선 최고의 유행가가 되었다.
레코드 판매도 조선 레코드 계에 있어서 최고를 기록했다. 왕수복이 평양 기생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대가수가 되자 콜롬비아·빅타 등 각 레코드 회사의 가수쟁탈전은 평양 기생들을 싸고 전개되는 양상을 띠었다.
이와 함께 한국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한 1930년대가 열리고 있었다. 근대음악사의 발전과정에서는 그 시대가 새로운 대중음악을 등장시킨 하나의 전환기였고 그 중요한 획을 그은 이가 평양 출신 기생 왕수복이었다. 이처럼 급격한 사회변동에 따라 생성된 새로운 대중음악의 등장은 그 시대를 앞 시대와 구분 짓도록 만든 전환기적 사건이었다.
이는 송방송(宋方松)이 「한국근대음악사의 한 양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로 지금의 대중가요의 뿌리에 해당하는 유행가·신민요·신가요·유행소곡 등과 같은 새로운 갈래의 노래들이 이 시기에 작사자와 작곡가들에 의해서 창작됐다는 사실 때문이다.
새 노래문화의 창작자들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음악사적 관점에서 보면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없었던 명백한 증거물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30년대 본격적으로 작곡가에 의해 새로 등장한 '신민요(新民謠)'라는 성악의 갈래는 일제강점기 전통 민요와 유행가의 중간 다리 역할을 맡았던 전환기적 시대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기생 왕수복의 폴리돌레코드 신문광고「동아일보」(1933.10.2.)
신민요의 등장은 근대의 단초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근대화는 전통적 사회에 내재된 전통적인 바탕 위에서 외재적인 요소를 가지고 변질 또는 변형시키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신민요는 전통적인 문화에 외래적인 문화가 더해진 문화적 종합화라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레코드 산업의 등장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뿐 아니라, 새로운 가수의 등장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것은 기존의 서양음악가나 전통음악가와 달리, 새로운 수요에 적극적으로 응대할 수 있는 유행가 가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28년에서 1936년 사이에 콜럼비아, 빅타, 오케이, 태평, 폴리돌, 리갈, 시에론 등 각 레코드사들은 음반 제작에 기생 출신의 여가수들을 잇따라 참여케 함으로써 1930년대 중반 레코드 음악의 황금기를 장식했다.
왕수복이 첫 전성기로 '10대 가수'의 여왕이 된 1930년대를 중요한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봉건적 잔재의 전근대 표상이었던 '기생'이 근대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는 대중문화의 '대중스타'로 바뀌어는 과정은 바로 근대 사회로의 변화 모습이다.
레코드 축음기의 보급은 대중매체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그 레코드 가요의 주축 팬은 기생들이었다. 기생들은 레코드에서 배운 노래를 술자리에서 불러 유행에 도움을 주어 레코드회사에서 보면 큰 고객이었고 이에 따라 판매 전략이 세워지는 것이었다.
결국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는 한 축이 바로 전근대 표상이었던 기생이었기에, 기생출신이었던 왕수복, 선우일선, 김복희 등 3명이 1935년 발표한 『삼천리』 잡지 10대 가수 순위에서 5명의 여자 가수 중에 1위, 2위, 5위를 차지하며 대중 유행가의 여왕으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937년 21세의 왕수복은 폴리돌레코드와 결별하면서 일본 우에노 동경음악학교 벨트라멜리 요시코의 영향으로 조선민요를 세계화한다는 포부를 가지고 이탈리아 성악을 전공하게 된다. 그녀는 1959년 43세에 북한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고, 마침내 2004년 애국열사릉에까지 묻히게 되었다.
각주.
1 김창욱, 「이 땅의 음악을 생각하면서: 일제강점기 음악의 사회사–신문잡지(1910~1945)를 중심으로」, 『음악학』 11호, 한국음악학학회, 2004, 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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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제시대의 대중스타 기생 이야기
장 읽었습니다.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는 한 축이 바로
전근대 표상 이었던 기생이라는 글에
놀랬습니다.
자세히 올려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