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전체개요
신앙은 성경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적인 신앙이어야 한다. 처음에는 내가 성경을 읽지만
나중에는 성경이 나를 읽는다. 그 속에 내가 발견이 된다.
성경은 명령적인 신앙을 요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우상의 제물을 일체먹지 말라’ 이렇게 단적으로 명령하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오히려 ‘시장에서 파는 식물은 묻지 말고 먹어라’ 이런식이다.
만약 명령적인 신앙이라면 ‘안식일을 지켜라’고 못을 박으면 상당히 곤란하다.
산업사회에서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예를 들면 포항종합제철의 용광로는
불을 다시 붙여 정상가동이 되려면 7일 동안 열을 가해야 한단다.
만약 하나님이 ‘그래도 지켜라’ 하시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명령적인 신앙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인 신앙을 요구한다.
인격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유기적인 자율이다.
예를 들면 어떤 경우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고 어떤 경우는 먹으면 안 된다.
신앙에 있어서 문제는 자율이 제대로 안 됨으로 율법적이고
신조적이며 명령 일변도로 끌어가고 마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발달하기 전에는 독재자가 국민들을 끌고 가는 것이
오히려 일사분란하고 효과적이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조직과 제도와
지도자의 절대적인 카리스마가 사람들에게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공헌을 한 것처럼 보이나 여전히
고린도교회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를 양산하고 만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현 주소이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명령 일변도의 신조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없다. 유대인의 안식일 개념과 십일조 개념을 극히 신조적이다.
그러나 안식일 날 소나 나귀가 구덩이에 빠지면 안 건질 수가 있는가? 건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신앙의 맹점이다.
명분만 앞세우고 실제는 아무것도 안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외식이다.
무슬림의 라마단의 금식 기간에 그들을 지켜보면 낮엔 억지로
굶다가 밤 만 되면 거창하게 차려 놓고 새벽까지 먹어댄다.
그 모습을 보면 우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3단계의 신앙을 알아야 한다
1)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그 분과 그 백성들의 관계
2)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죄 사함만 받고 있는 사람
3)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제(섞임)를 통해 그 분의 형상과
모양을 이루어 가는 수준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새 언약의 시대는 구약과 같이 율법적이며
신조적이며 기계적인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로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인격적이고 자율적인 신앙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고라 일당을 단번에 땅속에 묻어 버리고 아나니아 삽비라를
즉결처단을 했지만 지금은 적결처단하지 않으신다.
그냥 가만히 둔다.
이것이 바로 영생과 다른 한 쪽은 심판이 되고 있는 시대이다.
하나님이 간섭을 하셔서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사람과 할 수 없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으로 구분이 된다. 내버려 두는 것이 바로 현재 심판이다.
마지막 때는 어떤 직분이나 권위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시대가 아니다.
각자의 신앙이 얼마나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영원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성경의 지식보다 한 구절만 가지고도 넉넉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창세기를 모르고 계시록을 모른다고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것은 잘못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이 되었고
어떠한 삶을 누리고 있는가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로 와야 구원이 있고 안 오면 곤란하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사실을 모르고 말하는 망발이다.
1절의 문제는 지식이냐 사랑이냐 하는 것이다.
지식은 주관적이며 사랑은 의롭고 거룩하고 가치있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래서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집을 세운다는 뜻이다.
지식으로 남에게 어필은 할 수 있지만 그 양이 한계가 있다.
그러나 사랑은 샘처럼 솟아나는 생명이다. 한계가 없다.
8장의 주제는 우상의 제물의 문제인 것 같으나
사실은 자유와 지식을 사랑으로 활용하라는 것이다.
우상의 제물은 먹으라고 해서도 안 되고 먹지 말라고 해서도 안 된다.
쉽게 말하면 ‘네가 알아서 해라’이다. 십일조 주일 성수가 다 같은 내용이다.
만약 신조적인 생활에 얽매인 사람이라면 나중에 천국에 가서 누가 시키면
쓰레기통도 비우고 화장실 청소도 잘 할 것이다(천국은 다행히 이런 것들이 없지만)
마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 중에 염소와 같은 사람들이다.
고린도전서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와 지식이다.
이것들은 십자가의 원수들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말씀을 듣고 좋다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멀었다.
자신이 궁금해 하는 부분이 해결되었다는 뜻일 뿐 자신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요16장의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일차적으로 자신 안에 일대혼란이
일어나야 한다. 뒤죽박죽이 되고 거짓과 탐욕과 추잡스러움이 다 드러나야 한다.
요조숙녀나 공주처럼 신앙생활하면 평생 고치지 못한다.
2절 진정 자신이 좀 안다고 하는 사람은 모르는 것을 자랑할 수밖에 없다.
성경의 지식도 알면 알수록 자신의 양이 보잘 것 없어 보인다.
3절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
사랑은 두 인격이 한 몸을 이룬다. 사랑은 서로 영접하고 주고받는다.
섞인다. 사랑은 상대를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교회는 사랑의 탑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집을 세우는 의미의 덕이다.
사랑이 있는 것 같으나 없는 교회가 있고, 사랑이 없는 것 같으나 있는 교회가 있다.
사랑이냐 의무냐?
사랑은 잘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것의 분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일에 대한 고통이 따를 뿐이다. 누가 나를 향해 욕을 한다고 볼 때에
그것 때문에 약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고 있는 그 사람 때문에 고통이 내게 온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우상의 제물을 두고 지식이냐 사랑이냐 하는 문제를 대두하는 목적은
그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 없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먹음으로 덕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12절 양심이 약한 자에게 죄를 짓는 것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요나 같은 경우를 보자. 요나는 니느웨 성을 외면했다.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을 싫어했다.
그리고 도피를 했다. 이런 행동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다.
우리의 신앙이 자기 구원만을 위한 것인가
하나님의 관심에 관심을 두고 있는 신앙인가 항상 살펴봐야 한다.
사람의 행함을 지켜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입과 손과 발 그리고 소유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누가 말리겠는가마는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섭섭하게는 하지 말자.
그렇다고 행3장의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같은 이에게
은전이나 금전 몇 닢을 던지려고 하지는 말라.
인간은 호구지책보다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그래서 주님은 ‘네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고 하신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는가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
신앙의 원칙과 원리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원래 겸손이라는 단어는 사실 필요가 없다.
인간이 교만하므로 겸손하라고 말을 한다.
천국에는 교만한 자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안 사람은 교만할 수가 없다.
십계명을 뒤집어 보면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 말씀은 하나님만 섬기라가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도적질 하지 말라’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살아라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찬양이나 섬김을 받는다고 만족하실 분은 아니다.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까지 나아가길 원하신다.
성경공부가 계급장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 수학여행을 보낸 다음 무얼 보고 왔냐고 물으니
‘선생님 빨간 모자만 따라 다녔다’고 한 것처럼 성경공부를 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의 삶이 진리 안에서 자유하면서 사랑하므로 자연과 동화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를 보면서 금방이라도 팽개쳐버리고 싶은 마음이 바울에게 있지만 그러나
자세하게 다시 설명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사랑이며 긍휼임을 알아야 한다.
바로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관심의 척도 이것이 그의 사랑이다.
첫댓글 처음에는 내가 성경을 읽지만 나중에는 성경이 나를 읽는다. 그 속에 내가 발견이 된다.
💖지혜가 깊은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이익이 있음으로 해서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군요,
누구를 사랑한다는 그 자체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랍니다.
어머니에 조건 없는 사랑, 우리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조건 없이 누구를 사랑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