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월이 오면, 우리는 눈을 들어, 부활의 신비가 스며드는 세상을 만난다. 새롭게 자라나는 아이들의 웃음을 만나고, 인간에게 가장 아름다운 선물인 부모의 마음을 만난다. 그렇게 부활의 생명이 무르익고, 또 세상 곳곳에 번져 가는 소리를 듣는다. 시편 작가는 그래서, “비록 소리 없어도, 그 소리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말들이 세상 끝까지 전해진다” (시편 19,1-5)고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주님의 가르침은 생명을 새롭게 한다”(시편 19,9)고 노래한다. 비록 우리가 만나는 일상이 고단해도, 눈을 들어, 새롭게 변하는 것, 죽음이 변하여 새 생명이 되는 그 깊이를 만나라고 초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오월에 나는 서둘러 성모님을 만난다.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는 어머님의 맘을 묵상한다. 나는 몇 주 전, 친하게 지내는 이슬람 친구 어머님의 부고를 들었다. 세상에서 내가 본 얼굴 중에 가장 슬픈 얼굴을 하며 침묵하는 내 친구는 그 순간 미국에서 나름 일가를 이룬 전문가도 아니었고, 노년을 맞은 초로의 신사도 아니었다. 그냥 엄마를 잃고 슬픔에 빠진 아이였다. 나도 영상 통화로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어머니는 얼굴을 무척 아름다운 분이셨는데, 나에게 집에서 하는 이슬람 기도도 보여 주시기도 하고, 아들이 곁에서 알려 주는 영어를 눈치껏 따라하시던 명랑한 시골의 할머니였다. 그런데 며칠 전 친구는 갑자기 “우리 엄마가 왜 너를 좋아했는지 아니?”라고 물었고, 답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는 나에게, “네가 성모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서였다”라고 했다. 나는 열심한 이슬람 신자인 그 어머니와 성모님이 도무지 연결이 안 되어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가 말하기를, 자기 어머니는 스물두 살에 과부가 되었는데, 그때 이미 아이 셋이 있었고, 막내는 임신 중이었다고 했다. 남편 없이 넷째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어머니는 누구의 아이인지 모른다는 동네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들어야 했고, 그 와중에도 꼭 네 명의 아이를 잘 키울 결심을 했었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수근거림으로 맘이 힘 들 때, 성모님의 사진을 구해 집 벽에 붙여 두었다고 했다. 예수님의 엄마도 임신했을 때 억울한 이야기를 들으셨지만, 아드님을 잘 키우셨으니, 당신은 성모 마리아를 자기의 모델로 삼으셨다는 거였다.
하늘은 하늘을 비추고, 나무는 나무의 푸름을 비추어 주고 있다. 없는 것을 비출 수는 없으니, 성령이 오시길. 그래서 내 맘속에 움트는 하늘나라를, 그 푸르름을 한껏 비추기를. 그렇게 하늘나라가 새롭게 되기를 기도한다. ⓒ박정은
우리는 애도의 시간을 가지면서, 친구 어머니는 성모님처럼, 어머니의 길을 충실히 달리셨고, 좋은 어머니가 되고 싶으셨던 삶의 꿈을 이루신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성모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고, 나도 내 신앙 여정 속에 성모님이 계심을 늘 감사하는 사람이지만, 이란의 어느 시골, 열심한 회교도의 가난한 젊은 과부가 만난 성모님의 이야기는 내게 깊은 감동을 준다. 어디 그 어머니뿐이랴. 어쩌면 모든 어머님의 삶은 그렇게 감동을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드러운 빛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성모님의 삶을 생각하는 오월은 그래서 부활의 신비 한가운데서 새 생명으로 나아가게 인도한다.
나도 내가 몸담은 학교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무언가 내게 익숙했던 생명이 역사 속으로 흘러가는 순간 같아, 만나는 모든 사람을 맘속에 넣고 싶었다. 하여 알 수 없는 새 생명을 향해 걸어가는 한 순간 한 순간이 내겐 너무 소중하다. 어제는 학교를 닫기 전에, 모든 졸업생들, 전직 교수들과 교직원들이 모두 함께 모여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다. 그리고 모두 한자리에서 서로의 삶을 축복했다. 150년의 역사가 한눈에 걸어 나가는 느낌이었다. 호호 할머니가 된 총장 수녀님들과 옛날 졸업생들이 서로 손을 잡고 추억을 이야기했다.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보는 전직 교수들도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다. 다른 대학에서 총장이 된 옛 동료는 자기 학교로 오라고 바로 제안을 하기도 했고, 나와 함께 혁명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던 아르헨티나 출신 교수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버클리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면서 윙크를 했다.
하지만 내게 가장 반갑고 아름다운 이들은 내가 직접 가르친 졸업생들이었다. 같이 피정을 가서 지내기도 했고, 또 미시시피에서 집을 짓기도 했으며, 수업 시간에 함께 웃고 울었던 많은 젊은 졸업생들의 얼굴을 보자, 이번에는 기쁨으로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물이 포도주로 변해, 그 향기를 맡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와이에서 제법 높은 지위에 오른 누구는 오늘을 위해 기꺼이 날아왔고, 언젠가 임신을 해서 떠나갔던 여학생은 아기 사진을 보여 주며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젊은 엄마가 된 그 학생들에겐 무언가 깊은 삶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또 성 정체성으로 힘들어 하던 한 여학생은, 자기 파트너를 당당하게 소개했다. 어디 그뿐인가. 세속화 되는 학교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겠다며, 나와 함께 매일 미사를 봉헌하던 열성분자들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들에게는 젊음의 한 페이지이겠고, 나에게는 미션 한가운데서 머물던 행복한 날들이었다.
민들레 홀씨 되어. 나도 그리고 홀리네임즈 공동체의 그 누구도 새로운 곳을 향해, 그동안 나누었던 꿈과 사랑을 마음에 품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달려 나갈 것이다. ⓒ박정은
헤어지기 섭섭해 하면서, 그들은 하나둘 돌아가고, 고요해진 교정을 혼자 걷는데, 민들레 홀씨들이 보인다. 이제 사람이 불면, 우리는 다 흩어져 갈 것이다. 학생들에게 지성과 영성을 제공하던 이 공간은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하지만, 그 꽃씨들은 바람을 따라 또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겠지. 학생들이 다음 주에 졸업을 하고 나면, 내가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한 이 학생들이 걸어 나가고 나면, 나도, 그들도 함께 이제 새로운 꽃씨가 되어 또 어딘가로 흘러가겠지.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기다린다. 부활의 신비 속을 걸어가다, 무언가 보이지 않아서, 희미한 생명을 부여잡고 두려움과 혼돈 속에, 그저 기쁨을 막연히 느끼기도 하다가, 그렇게 우리의 존재는 새로운 생명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문화가 섞이고, 언어가 섞이며, 우리는 가는 곳마다 새 공동체를 만날 것이다. 그래서 이 즈음이면, 우리는 간절히 그 새로움의 축제를 기다리는데, 성령이 오시는 그날에, 교회는 새롭게 태어나고, 그 교회는 성령께 사로잡혀 새로운 곳을 향해 흘러간다. 그래서 나도, 어머니이신 교회와 한마음이 되어, 성령이 오시기를, 온 누리를 새롭게 하시기를, 그리고 오랫동안 품어 온 사랑들이 민들레 홀씨 되어 어딘가 새롭게 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오소서, 성령이여!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