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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룻기 1:1-5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룻 1:1-5 / [나오미와 룻] 사사들이 활동하던 때에 그 땅에 기근이 든 적이 있었다. 그러자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어떤 남자가 모압 지방에 가서 더부살이하려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2) 이 남자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아내는 나오미, 두 아들은 말론과 기룐이었다. 이들은 유다 베들레헴 출신으로 에브랏 집안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한동안 지내다가 3)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남겨 두고 그만 세상을 떠났다. 4) 그 뒤 두 아들은 모압 여인들 가운데에서 신부감을 골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작은 며느리의 이름은 오르바이고 큰며느리의 이름은 룻이었다. 이들이 거기에서 10년쯤 살았는데 5) 말론과 기룐도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래서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마저 여의고 홀로 남게 되었다.
룻기의 시대는 영적으로 심히 어두웠던 사사기 후기입니다. 본서는 나오미라는 여인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백성이 겪는 고난, 그리고 그 고난에서 축복으로 되돌리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1-2) 사사 시대의 특징은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삿 17:6; 18:1; 19:1; 21:25). 따라서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했던 시기입니다. 이런 특징이 유다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에게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가 살던 유다 떡집이라는 뜻인 베들레헴조차 흉년이 들었습니다. 기근은 불순종한 백성에게 임하는 저주입니다(신 11:17). 그러자 그는 가족을 데리고 요단 강을 건너 이방의 땅 모압으로 이주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린 불순종이며, 모든 불행의 씨앗입니다. 유다 베들레헴은 하나님께서 엘리멜렉에게 대대로 허락하신 약속의 땅입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는 이름의 뜻과는 반대로 약속의 땅을 멀리 벗어나 이방 땅에 체류합니다. 아들 말론의 이름의 뜻은 병약함, 기룐의 이름의 뜻은 낭비입니다. 이들의 이름에서 이미 불길함을 예고됩니다. 믿는 자들은 굶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보호가운데 있겠다고 다짐해야겠습니다.
과부가 된 세 여인(3-5) 이주한 지 10년 만에 나오미에게 불행이 닥칩니다. 남편 엘리멜렉이 먼저 죽고 다음에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습니다.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이방 여인과의 혼인은 언약 백성으로서 금지된 일입니다(신 23:3). 나오미의 뜻은 기쁨이지만 현실은 슬픔, 고난이었으며,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함께 과부가 된 두 며느리들뿐입니다. 나오미의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자신을 돌봐줄 남편도, 돌아갈 집도 없습니다. 그녀의 미래였던 두 아들마저 죽었기에 의지할 곳이 아무데도 없으며, 나오미는 두 며느리 걱정까지 해야 할 형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 고난을 당한 남자를 꼽자면 욥이겠지만, 가장 큰 고난을 당한 여자는 나오미일 것입니다. 나오미는 어디에서도 돌봄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는 구절은 우리의 눈물을 자아냅니다.
적용: 형편이 어려워 잠시나마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의 생활을 떠난 적이 있습니까?
‘가나안 사람들’이라는 용어는 이스라엘 정복 전쟁 이전에 가나안에 거주하던 여러 집단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광범위한 집단은 다양한 국적과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다 민족적 종교와 문화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속적인 올무가 되었습니다. 바알들과 아스다롯들은 농업과 풍요에 대한 책임을 맡은 가나안의 남신과 여신들을 대표했습니다. 그에 대한 충성은 번영과 성공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이 새로운 문화는 번영에 대한 열망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을 제공했습니다.
< 설 교 >
하나님을 떠나는 삶
룻 1장 1~8절 / 이정익목사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사람은 살아가면서 선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씩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선택에는 단순한 선택도 있고 별로 중요치 않은 선택도 있지만 때로는 아주 중요한 선택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10년이 아니고 어떤 순간의 결정은 일생을 좌우하고 영원을 좌우하는 선택도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은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앞으로 4주 동안 룻기서를 통해서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는 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나오미 가정의 선택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을 보면 유다 베들레헴에 큰 흉년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거기 살던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엘리멜렉이고 아내는 나오미이며 두 아들 말론과 기룐입니다. 그들이 살고 있던 베들레헴에 큰 흉년이 들어 엘리멜렉은 온 가족을 데리고 모압으로 갔습니다. 모압으로 간 동기는 조상대대로 살아온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먹고 살기 위해서 모압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들의 순간의 선택이 과연 잘한 선택인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결과를 보면 그 선택은 아주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모압에 가서 남편을 잃고 곧 이어 두 아들도 잃고 마침내 두 며느리와 나오미만 남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 남자가 다 죽고 세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간 것은 아주 참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것이 본문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여기서 우리들이 뭔가를 결정할 때 좀 더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떠났는가
무엇이든 동기가 중요합니다. 지금 엘리멜렉이 왜 베들레헴을 떠나기로 판단했는지 동기가 참 중요합니다. 나오미 가정은 먹고 살기 위해서 모압으로 갔습니다. 가장이었던 엘리멜렉은 모압으로 내려갈 때 임시로 간 것이 아니고 영주 목적으로 갔습니다. 그것은 두 아들을 모두 모압에 가서 모압 여인들과 결혼시킨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오미 가족은 모압에 먹고 살기 위해서 갔고 또 그곳에서 정착하려고 갔습니다. 동기가 참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언제 떠났는가 하면 본문 1절을 보면 사사시대에 떠났다고 했습니다. 사사시대는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고 사울이 왕이 될 때까지 350년 기간을 말합니다. 그 때를 가리켜서 영적 혼란기 혹은 영적 암흑기라고 부릅니다(사사기21장25절). 당시는 모세와 여호수아가 죽고 지도자가 없을 때입니다. 그래서 당시 백성들은 자기소견에 좋을 대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온갖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지금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까지 우상숭배를 지독하게 행하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은 왜 들어갔는가 하면 백성들이 애굽에서 우상을 지독하게 숭배해서 하나님이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그 가나안에 들어가서까지 우상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베들레헴에 흉년이 임한 것입니다. 그 흉년은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영적으로 조금만이라도 눈을 뜨고 보면 하나님의 진노이고 징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오미 가정이 살그머니 자기들만 살겠다고 모압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것도 임시로 간 것이 아니고 아주 정착하겠다고 생각하고 가자마자 두 아들을 그 땅의 여인들과 결혼을 시킵니다. 이것이 나오미 가정의 계산이고 처신이고 지금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삶의 중심, 삶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이사할 때도, 무슨 일을 할 때에도 먼저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은 그런 생각이 전무하였습니다. 지금 베들레헴은 영적 암흑 속에 살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성별시켜서 백성들에게 주신 땅입니다. 그 땅에서는 우상숭배를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가나안에서 살면서 이제는 편안하고 안정되니까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침내 그 땅에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나오미 가정은 살그머니 도망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도망간 곳이 하필이면 모압입니다. 모압은 롯의 큰딸의 아들 이름입니다. 롯이 가족과 함께 소돔성에 살다가 유황불로 심판을 받을 때 두 딸만을 데리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살아남았습니다. 그때 롯의 부인도 두 사위도 다 유황불 심판에 죽었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아버지와 두 딸, 그 후 두 딸은 자손을 이어가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여 취하게 한 다음 아버지와 동침하여 낳은 자식이 모압입니다. 그 모압 자손들이 오래 살면서 이룬 땅이 모압입니다.(창세기 19장30-38절) 그 땅은 지독하게 우상을 섬겼습니다. 모압 사람들은 그 유명한 그모스 신과 몰렉 신을 국가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리고 국가적으로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그 신들에게 인신제물을 바치는 인신제사를 드렸습니다.(열왕기하 3장27절) 그것이 그모스 신과 몰렉 신인데 모압 사람들이 그 신을 섬겼습니다. 이 엘리멜렉이 가족을 이끌고 그 모압 땅으로 간 것입니다. 그러니 복을 받겠습니까.
솔로몬이 처음에 얼마나 복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그 솔로몬이 나중에 타락하여 이방여인들을 맞아들였습니다. 마침내 솔로몬이 모압과 친화정책을 펴면서 그모스 예배당을 예루살렘 기드론 골짜기의 동쪽 구릉에 성소를 지어주었습니다(열왕기상 11장7절). 그래서 하나님이 솔로몬을 버리신 것입니다. 나오미 가정이 배가 고파도 갈 곳에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 없이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모압으로 가기로 결정할 때 하나님은 염두에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의 계산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나라가 우상숭배로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있다는 생각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 시대가 그렇게 영적으로 암흑시대였습니다. 신앙인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무엇을 먼저 생각하여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큰 시험은 직장을 선택할 때, 직장을 옳길 때, 월급을 더 준다고 오라는 곳이 있을 때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턱대고 먹고 살기 위해서 더 잘 살기 위해서 아무 것이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나는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모압으로는 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신조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물질의 시대입니다. 돈을 더 준다고 하면 사람들이 생각도 하지 않고 옮겨 다닙니다. 미래를 준비할 때, 직업을 선택할 때, 사람을 선택할 때, 내게 이익이 되고 돈을 더 준다면 덥석 물어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내 미래가 길지 못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출발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하나님이 만족하게 그에게 복과 지혜와 영화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철학이 없었습니다. 신앙 중심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중심이 약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어디인데 거기다 몰렉과 그모스 신당을 지어줍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입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모압은 엘리멜렉이 갈 곳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지긋이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를 묵묵히 받고 있는데 나오미 가족은 너무 약삭빠르게 가족을 이끌고 잘 살아보겠다고 이방 땅으로 떠나버립니다. 모압으로 간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기대하지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호구지책을 강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결국 그것이 화근이 되어 10년이 못되어 남편이 죽고 곧 이어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사사기1장5절). 우리 그리스도인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의 제자들이 된 이상은 자존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멜렉은 누구인가
나오미와 엘리멜렉은 누구입니까. 그들이 누구 길래 함부로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에 생각 없이 가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까. 엘리멜렉은 에브랏(에브라다) 혈통에 속하는 사람입니다(역대상2장19절). 에브랏은 갈렙의 아내 이름입니다. 그리고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모세 뒤에는 여호수아와 갈렙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이 두 사람 때문에 가나안 행을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앞에는 홍해가 가로놓였고 뒤에서는 애급군대가 쫓아올 때 모세가 홍해 앞에서 우물쭈물 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갈렙이 모세를 바다로 떼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가 앞으로 넘어지면서 홍해 물을 밟자마자 홍해가 좍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탐꾼들이 정탐 후 보고할 때 열사람이 그 땅은 갈수 없는 땅이라고 보고해서 백성이 얼마나 분노합니까. 그때 그 땅은 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적극적으로 가나안행을 독려했던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도중에 죽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갔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의 적들을 다 내쫒고 땅을 끝까지 분배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갈렙입니다. 갈렙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베들레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대대로 살았습니다. 그 갈렙의 11대 후손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입니다. 그렇다면 이 엘리멜렉이 어떻게 그 베들레헴을 먹을 것이 없다고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습니까. 이 아비멜렉이 너무 쉽게 생각했고 결심하였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파도 베들레헴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지금 하나님의 징계 중인데 자기들만 살겠다고 미련 없이 이방 땅으로 가서 두 아들을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시킵니다. 그러니 그들이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 신앙의 역사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유산을 한 푼도 받은 것이 없고 집 한 채 받은 적은 없지만 그 보다 더 소중한 신앙을 물려주셨습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왕래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신앙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동네에서 우리 집만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것이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보면 참 놀라운 복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최고의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 그 신앙이 5대째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역사를 아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내게 천만금이 주어진다 해도 이 역사를 부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더구나 모압에 가는 일도 없을 것이고 모압에 가서 아이들을 결혼시키고 몰렉을 섬기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자존심이고 나의 중심입니다. 내가 이 중심을 고수하고 있는 한 하나님은 나와 내 자손을 지키실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은 이 점을 너무 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출생지이고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 또 그 땅은 갈렙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얻은 땅이고 갈렙이 정착한 땅입니다. 그리고 그 땅은 이미 장차 메시야가 태어나리라고 예언되어 있는 약속의 땅입니다. 그곳이 베들레헴입니다. 그 후에 이 사건이 있은 후 1100년 후에 그 땅 베들레헴에서 마침내 메시야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엘리멜렉이 배가 고프다고 그 땅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것은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은 것과 같은 모양입니다. 아주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결정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큰 결정도 하고 작은 결정도 합니다. 중요한 결정도 하고 별로 중요치 않은 결정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 한번 결정으로 몇 년을 좌우할 결정도 있고 어떤 결정은 평생을 좌우할 결정도 있고 또 때로는 영원을 좌우할 결정이 요구될 때도 있습니다.
본문의 중심 메시지
그러면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근본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면 실패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것만 봐도 그가 어려서부터 자라난 집안의 전통이 어떤 것이었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갈렙의 11대 후손입니다. 그런 그가 먹을 것을 찾아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세계로 갔다는 뜻입니다. 여기 엘리멜렉이 베들레헴을 떠난 것은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어디로 도망갔는가 하면 이방 땅 모압입니다. 모압은 그모스와 인신제사를 드리는 몰렉 신을 섬기는 땅입니다. 그곳으로 나오미 가정은 생각 없이 갔습니다. 그뿐 아니고 아비멜렉은 모압 땅에 가서 두 아들을 그 땅 여인들과 결혼을 시킵니다. 그 땅 여인들은 핏속에, 생각 속에, 의식 속에 그모스 신과 몰렉 신에게 인신제사를 드리는 문화로 가득 차 있는 여성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그 멀리 하란으로 가서 며느리를 구한 것과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엘리멜렉은 그 땅 여인들을 며느리로 맞으면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타향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도 작용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들과 혼인을 맺음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을 것입니다. 엘리멜렉의 계산은 치밀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의 가정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에 가자마자 불행이 찾아온 것입니다. 먼저 계산에 빨랐던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이제는 혈통이 끊기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성경은 그들이 왜 죽었는지를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슨 병에 걸려 죽었는지, 사고사를 당했는지 그 사연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단순한 메시지 하나는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 겪어야 할 손실이 크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완전한 상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때로는 철저한 패배도 주어진다”는 것을 시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참 꼭 명심하여야 할 무서운 사례입니다.
여기 엘리멜렉의 선택은 지극히 실용주의였습니다. 지극히 편리주의이고 현실주의에 근거한 선택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 다 지금 배고파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징계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보아스도 같은 시대에 베들레헴에 그대로 살았고 그 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엘리멜렉의 가정만 그 땅을 피하여 이사를 갔습니다. 그것도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땅으로, 그것도 그모스와 몰렉이라는 최악의 우상을 섬기는 땅으로 갔습니다. 그 땅에 가서 두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도 아주 철저하게 계산해서 떠났습니다. 그 결과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본문에 나오는 그대로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알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면 개인이든지 사회든지 국가든지 가정이든지 위기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탄은 이 세상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길을,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도록 계속 종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는 너무 빠르게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너무 쉽게 하나님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내가 판단해서, 내가 주도해서 하나님을 떠나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메시지로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그런 안목을 가지게 합니다. 하나님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고 내 영혼의 창조자이시고 내 삶의 인도자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주인이시오 의지 자시오 나의 목자시오 내가 의지할 바위시오 나의 산성”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하나님 안에 깊이 들어가 그 하나님의 인도를 힘입고 살아가는 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신앙인의 행복
>성경본문|
룻01장 01절 ~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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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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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김철현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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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행복
룻기 1:1~14 / 김철현목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서” 라는 답변을 합니다. 삶의 과정이야 어떻게 되었든지 그 결과에는 행복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대부분이 공감하는 대답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밤낮으로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행복에도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행복의 그 이면에는 지극히 이기적인 부작용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누구도 내 행복에는 초미의 관심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언제나 나에게 필요한 사람만 찾습니다. 나의 행복에 도움이 될 사람, 내 행복을 가져다 줄 상황들만 찾을 뿐이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겠다는 생각이나, 남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존재로 살겠다는 의지는 상대적으로 강하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하고 또한 분명히 다릅니다. 그래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세상 살아가는 모습들이 참으로 다양합니다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첫째 인간상은 기독교인이면서 선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둘째 인간상은 기독교인이면서 악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는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선하게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리고 넷째 인간상은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악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네 가지 인간상 중에 어떤 사람이 가장 악한 인간상일까요? 바로 기독교인이면서 악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하나님의 의도도 알고, 하나님의 뜻도 아는 사람이면서 모든 선한 것으로부터 벗어나 악하게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도 행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드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 성경에서 기록하는 인간창조의 역사입니다.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인간이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가졌다는 사실은 인간만이 행복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기때문입니다. 창조사건이래로 영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인간은 행복에 대한 정의도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즉, 진정한 행복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영적 만족감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행복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의 행복 론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 유명한 마6:33절에 예수님의 행복 론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예수님의 행복 론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행복해야할 예수를 믿는 우리들조차도 왜 행복하다는 말보다 불행하다는 말을 더 많이 하고 살아갈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행복 론에 비추어 볼 때 보면 인간 불행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혼의 문제에서 떠날 때 인간은 불행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는 예수님의 행복 론을 따르지 않은 결과입니다. 즉 신앙의 문제가 희미해 질 때 불행은 여지없이 찾아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의 시작은 [나오미] 라는 여자의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나오미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발견 할 수 있고 그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을 찾는 방법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나오미의 불행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하나님을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이 살던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나오미는 모압이라고 하는 이방 땅으로 이사를 갑니다. 물론 이사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혹은 이방 땅이라고 못 갈 곳은 아닙니다. 심방을 하다보면 커다란 절간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부부가 다정스럽게 찍은 사진을 걸어 놓은 집이 있습니다. 교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면 더 좋겠습니다마는 성도들도 산에 등산을 가면 절에 들어가 보기도 한다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그걸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나오미가 이방 땅 모압에 이사 간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기가 문제입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세상을 의지하고자 하는 그 숨겨진 내적 동기가 문제입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다고 좀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난 곳이 이방 땅 모압입니다. 어떻게든 하나님께 매달려 해결해야 할 일을 눈에 보이는 만족을 찾아 떠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기대했던 행복을 모압에서 찾았습니까? 아닙니다. 그 곳에서 남편을 잃었습니다. 모압에 기대를 걸었고 남편에게 의지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두 아들입니다. 그런데 며느리를 얻으면서 나오미는 또 한번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신7:3-4에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방여인을 며느리로 들이지 말라고 했지만 나오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현실적인 타협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들들의 결혼을 통해 잃어버린 행복을 다소나마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오미는 또 다시 그 아들들마저 죽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인간적으로 의지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나오미의 불행이자 오늘 우리 인간들의 불행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기생각과 세상의 보이는 것을 따라간 나오미의 불행이 바로 이 세상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흉년은 있습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흉년은 있게 마련입니다. 갑자기 직장을 잃어버리고 고통과 고민의 날을 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경제적 흉년이라고 합니다. 또한 어떠한 일로 모든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버리는 인간관계의 흉년을 겪기도 합니다. 메마르고 삭막한 부부관계의 흉년 속에 계신 분은 없습니까?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교회 속에서 경험하는 성도의 관계는 이상이 없나요? 또 신체적 흉년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이 모든 흉년보다 더욱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영혼의 흉년입니다. 지금 우리의 영적 생활은 어떻습니까? 말씀이 모자라는 분은 안계십니까? 기도가 메마르고 마음속에서 찬송의 샘이 메말라 버린 상태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봉사니, 전도니 아무리 떠들어도 남의 이야기처럼 들려서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교회나 들락거리는 사람은 없습니까? 흉년입니다. 영적인 흉년입니다. 이 모든 흉년 앞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혹시 채우지 못할 만족을 갈구 하여 오늘도 모압을 찾아 늘 방황하면서 살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흉년이 오고 환란이 오더라도 절대로 떠나지 말고 끝까지 머물러 지켜야할 곳은 하나님 품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흉년이 올 때 너무나 쉽게 도피를 결정하고 맙니다.“모압이라도 좋다. 일단 피하고 보자.”는 불신앙적인 도피행각에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 베들레헴을 버리고 타락의 땅 모압을 선택했던 나오미는 남편도, 두 아들도 그 땅에서 잃어버리는 불행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보세요. 좀 더 잘 살아보겠다고 간 걸음인데! 출세해서 여봐란 듯이 살고 싶어서 간 곳인데! 그 기대의 끝은 절망이며 한숨과 탄식뿐이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 이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여기까지가 나오미의 불행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나오미의 삶은 불행으로 끝나버리지 않았고 행복을 찾는 신앙으로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최악의 상태에서 나오미에게 자기 고향 베들레헴에 흉년이 해결되었다는 은혜의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때 나오미는 소식을 듣는 즉시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참 뻔뻔한 여자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얼굴에 철판깔았나?’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흉년 가운데서 베들레헴을 떠나지 않고 지켰거든요. 그런데 도망갔던 여자가 다시 돌아온다고 했을 때 아마 그 곳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쏟아 부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형편과 처지가 뭡니까? 잘 살겠다고 도망치더니 남편도 죽고 두 아들마저 죽었으니 깨질 대로 다 깨어지고 부숴 질 대로 다 부숴 진 모습으로 그 곳에 다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마 차라리 죽기보다 싫은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이제야 제 정신이 돌아 온 것입니다. 하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주위에 사람들, 비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안 보입니다. 안 들립니다. 오직 하나님만 보일 뿐입니다. 어떻습니까? 이게 정상적인 신앙 아닙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인간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것에는 체면의 문제가 아닙니다. 위신과 명예가 문제 안 됩니다. 행복이란 이 모든 것을 극복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가치입니다. 보세요. 제 정신이 든 나오미가 처음에는 며느리들을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생각을 바꾸어 며느리들에게 자기를 떠나 친정으로 돌아가도록 했습니다. 혼자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제는 더 이상 사람과 세상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신앙의 결단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며느리들을 떠나보내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한 순간부터 하나님의 복이 시작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한 나오미에게 하나님은 그 중의 한 사람 룻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때로는 내가 바로 포기한 그것을 다시 주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포기 하지 않아서 얻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오늘 나오미가 세상 적인 모든 것과 부끄러움까지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결단 할 때 그녀에게 주신 복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며느리 룻을 통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룻을 통해 메시야가 탄생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복도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복주시기로 작정만 하면 어마어마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압을 버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즉, 세상과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만을 의지 할 때 행복 된 삶은 회복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위치에 서 있습니까? 기대 했던 모든 것을 다 잃고서 낙심할 모압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포기할 것 다 포기하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베들레헴을 향하고 있나요? 거기에 여러분의 신앙적인 행복이 있습니다.
모압 지방으로 가서 우거하였는데
룻 1장 1~5절 / 이현상목사
삶의 위기라는 것은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그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그 비결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본문 룻기 1장 1절을 보면,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룻기의 배경이 사사시대임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 가나안 정복의 지도자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난 후 이스라엘에 사울 왕이 등장하기까지의 약 400년간을 사사시대라고 합니다. 그 시대는 왕이 없는 때여서 백성들이 각각 자기의 소견대로 살아가던 시대였습니다(삿 17:6).
여호수아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 백성들에게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하면서 여호와를 섬길 것을 간곡하게 부탁하였습니다(수 24:14-15). 그러나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그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 사람들의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과 주변의 사람들을 통하여 그들을 징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징계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사들을 세워 그들을 그 어려움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백성들을 이방인의 손에서 구원해 내고 그 백성들을 재판하여 바른 길로 인도해 준 사람을 ‘사사’(士師)라고 합니다. 평안하면 백성들은 또 옛날의 그 죄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사사 시대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사 시대에 일어난 여러 가지 아픔 중의 하나를 표현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룻기의 배경을 기드온이 사사로 세움을 받기 전에 있었던 극심한 흉년의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등장하기 직전의 흉년은 사사기 6장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삿 6:1-11). 이것은 이스라엘의 위기였습니다.
오늘 저는 「모압 지방으로 가서 우거하였는데」라는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Ⅰ. 「모압」으로 간 사람들
본문 1절에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오는 「한 사람」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으로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었습니다(2절).
「엘리멜렉」과 「나오미」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나오미’라는 이름은 ‘나의 유쾌한 자’, ‘나의 기쁨’, ‘나의 즐거워하는 자’ ‘나의 사랑스러운’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말론」과 「기룐」
‘말론’이라는 이름은 ‘병약함’을 의미하고, ‘기룐’은 ‘낭비’, ‘허비’를 의미합니다. 말론과 기룐은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자가 아니라 걱정과 근심만 주는 아들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모두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었습니다(2절). 실제 지명(地名)인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집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유다’는 ‘찬송’, ‘베들레헴’은 ‘떡집’, ‘에브랏’은 ‘풍성’을 뜻합니다.
엘리멜렉, 나오미, 두 사람은 신앙적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사랑했던 부모가 그 자녀들이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어 준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 엘리멜렉은 자신의 이름과 같이 살아왔을 것입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고 먹을 것이 풍족하였을 때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당신만이 나의 전부입니다.”라며 살았을 것입니다.
나오미 역시, “하나님은 나의 즐거움”, 아니 “나는 하나님의 기쁨이요, 하나님의 즐거움입니다.”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을 때,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그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이름과는 반대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어려웠을 때, 그들은 이웃을 떠나고,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을 떠나 모압으로 갔습니다.
Ⅱ. 그들이 갔던 모압 지방
본문 1절에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모압 지방에 가서…」, 2절에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라고 하였습니다.
모압은 인본주의적 사고와 죄악으로 출발한 민족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들이 갔던 모압은 지극히 인간중심, 인본주의 사상에서 출발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롯과 그 딸들입니다. 그들은 소돔성이 불과 유황으로 멸망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도망했던 소알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산으로 올라가 숨어 살았습니다. 롯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어느 날 큰 딸이 동생에게 “이 땅에는 우리들의 배필이 될 사람이 없다.” 그러니 “우리 아버지로 인하여 인종을 전하자.”고 모의를 하였습니다(창 19:30-34). 이것은 철두철미하게 불신앙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발언입니다.
롯과 그의 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하나님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정말 힘들고 두려웠으면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찾기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찾아가는 것보다 자신들의 머리에서 나온 아주 이상한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아비를 술에 취하도록 해서 동침함으로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 첫째 딸의 자식은 ‘모압’으로 모압 족속의 시조(始祖)이고, 둘째 딸의 아들은 ‘벤암미’로 암몬 자손의 시조가 되었습니다(창 19:35-38).
이것은 인간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타락할 때 어디까지 내려가는지를 보여 주는, 죄악의 극치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모압은 하나님의 백성이 갈 곳이 아닙니다.
모압의 대표적인 종교는 그모스였습니다(왕상 11:7, 33, 왕하 3:27, 민 21:29, 삿 10:6, 렘 48:7, 렘 48:13, 렘 48:46). 몰렉(밀곰)은 암몬의 종교였습니다(왕상 11:7). 암몬의 몰렉과 모압의 그모스를 동일하게 보기도 합니다. 그모스와 몰렉은 인간을 제물로 받는 신이었습니다(레 18:21, 20:3, 왕하 3:26-27).
모압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을 저주하며 음란의 죄를 범하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했던 민족입니다(민 31:16, 25:1-5, 수 24:9). 사사시대에 모압은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18년 동안이나 약탈과 방화로 괴롭혔습니다(삿 3:12-14, 22:3-4).
한마디로 말해 모압은 죄악으로 출발했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민족, 이스라엘을 범죄케 한 민족, 우상을 섬기는 민족, 교만하고 거만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모압은 하나님의 회중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말 민족이었습니다(신 23:3-4, 사 16:14, 겔 25:8-11, 사 48:42-47).
그렇다면 모압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서는 안 될 곳이었습니다. 엘리멜렉은 가지 않아야 할 곳을 찾아 간 것입니다.
Ⅲ. 모압으로 내려 간 엘리멜렉, 그들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들은 그곳에서 우거(寓居)하였습니다.
본문 1절에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2절에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4절에 「…거기 거한 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우거하다’, ‘유하더니’, ‘거하다’라는 말은 의미가 다른 단어이기는 하지만, ‘혈족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임시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엘리멜렉은 그 땅의 시민, 그들과 같은 민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땅의 사람들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어 줄 때 그 땅에 머물며 체류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가 나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여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며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때, 그는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눅 15:15)라고 하였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족이 모압 지방으로 갈 때는 이스라엘 땅에 불어 닥친 흉년을 잠시 피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도 모압 지방으로 가는 것에 대해, 그곳에서 사는 것에 대해 찜찜한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압에 절대로 오래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엉거주춤하게 끼어 사는 것이 우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이웃과 친구가 생기면서 그들은 여기서 머물며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은 그곳에 10년이나 살았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챈 것 때문에 형 에서를 피하여 외삼촌이 사는 밧단 아람으로 도망하는 중에 벧엘 광야에 이르렀고, 그 날 밤에 꿈에서 자신과 함께 하겠다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하나님 앞에 서원하였습니다(창 28:10-22). 세월이 지난 후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야곱은 수많은 근심이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이 되고 평안해지자 가족들을 데리고 숙곳으로 가서 「자기를 위하여 장막을 짓고, 짐승들을 위하여 우릿간을」 만들었습니다(창 33:17). 더 평안해지자 야곱은 세겜으로 가서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은 일백 개로 사고 거기서 단을」 쌓았습니다(창 33:18-20). 바로 그곳에서 야곱은 세겜 사람에게 수치를 당했고 아들들은 살인자로 돌변하였습니다(창 34:1-31).
야곱이 서원한 곳은 벧엘이었습니다. 야곱이 가야 하고 있어야 할 곳은 숙곳이 아니었습니다. 세겜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벧엘이었습니다(창 35:1-3).
세속화(世俗化) 되었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고 하였습니다(14절 참조).
유다와 베들레헴과 에브랏을 떠나, 하나님이 없는 모압으로 가는 것, 우상이 있는 모압으로 가는 것, 교회를 떠나 하나님 없는 세상으로 가는 것,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자신의 소견을 따라 살겠다고 하는 이것이 타락이요, 세속화의 시작입니다.
모압으로 간 지 얼마 후에 엘리멜렉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나오미와 두 아들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 그 땅 사람들과 결혼을 하여 아내로, 며느리로 맞아들였습니다. ‘오르바’와 ‘룻’이 바로 그 모압 사람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자부를 구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었습니다(창 24:1-67). 그들의 결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창 6:2)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신 7:1-8).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라」(7:3)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7:4). 더 큰 이유는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聖民)이라…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7:6)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수효가 많아서가 아니라 사랑하신다는 그 이유만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구원하셨기 때문에 이방인과의 결혼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7:7-8). 고린도후서 6장 14-15절에도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나오미는 그 아들들이 모압의 여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는 일에 대해 묵인을 하였거나, 타협을 하였거나 아니면 적극적으로 나섰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는 행위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집에 몰려와 “네게 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들과 상관할 것이라”고 하였을 때 롯은 자기의 두 딸을 폭력배들에게 내어 줄 테니 “너희의 좋아하는 대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19:7-8). 부모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무책임한 말이 아닙니까?
성도의 세속화, 교회의 세속화는 대부분 ‘이것쯤이야 어떠랴!’고 하는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세속화는 영적 타락을 가져 옵니다. 영적인 무지는 자신을 망하게 하는 수단이 되고 맙니다(시 49:10, 시 1:1-6, 호 4:6). 세속화를 방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시 119:9).
많은 슬픔을 만났습니다.
나오미는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을 잃고 홀로 남았습니다.
본문 1장 3절에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라고 하였습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지만 두 아들은 남았습니다. 아직까지는 소망이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그 아들들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고 하였습니다(룻 1:4-5).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는 과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고아’와 ‘과부’는 성경에서 불쌍하고 가련하고 연약한 자의 대명사입니다(출 22:22, 눅 7:13).
재산마저 다 잃었습니다.
룻기 1장 21절에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남은 재산이라도 아들들에게 물려줘야지…’라고 했겠지만 돈이라는 것도 날개가 달린 듯 다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겹치고 겹친 슬픔을 말합니다. 나오미는 이 때의 아픈 경험을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었다고,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1:13, 21).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성도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여야 합니다.
말론은 병약하고, 기룐은 인생을 허비하면서 산다 할지라도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만은 중심을 잡고 자녀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이끌어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엘리멜렉은 그 이름마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였고, 나오미는 ‘나의 즐거운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이름을 주신 하나님을 실망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라는 것을 진실로 믿는 자는, “나의 하나님은 왕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따라 순종하고 살아야 합니다. 내 의지가 앞장서는 자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자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 한분만을 즐거워하며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시편 33편 12절에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를 향하여 ‘나의 기뻐하는 자, 나의 즐거워하는 자’라고 할 것입니다.
어떤 힘든 경우를 만났어도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은 엘리멜렉과 그 가족이 떠나지 말고 살아야 할 곳입니다.
기근이 닥친 땅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에 가족에게 풍부한 양식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것(移民)은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족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굶길 수 없다는 가장의 판단은 누가 보아도 옳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멜렉은 자신의 소유를 처분하고 모압으로 갔습니다(룻 3:12-13, 4:3-5). 그러나 그 땅은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 조상에게 주신 것이고, 조상들이 살아왔고, 조상들이 물려준 것이기 때문입니다(레 25:23).
아합이 통치하던 때에 나봇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아합이 나봇에게 ‘당신의 포도원을 나에게 주시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 때 나봇은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왕상 21:3)라고 하였습니다. 조상의 유업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는 신앙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거기가 엘리멜렉의 고향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에게 언약대로 주신 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땅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과 찬송이 있는 땅입니다. 그 땅은 풍성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땅입니다. 그 땅에 어려움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엘리멜렉은 그 땅에서 인내하면서 하나님이 회복해 주시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그 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성도는 문제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고, 목이 마를 수밖에 없는 흉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강가, 저 강가를 다녀도 물 한 방울 얻을 수 없는 기근을 만났습니다. 그 원인은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결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로 산 결과 하나님의 징계로 흉년이 왔던 것입니다(신 11:16-17).
그렇다면 그들이 흉년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회개하는 데 있었습니다.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왕상 8:35-36).
모압으로 갔던 결과는 한 마디로 비참하였습니다.
엘리멜렉은 가족을 데리고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을 떠나 이방 모압으로 갔습니다. 어떤 이유이든 하나님의 백성이 모압으로 가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그들 가운데 선택의 문제가 찾아왔을 때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였고, 신앙과 세속 앞에서 타협을 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그들이 선택한 것에 대해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2)라고 하였습니다.
먹고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이 흉년을 피하여 모압으로 가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땅에서는 먹고 살 희망이 없고, 모압으로 가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판단한 데 있었습니다.
성도들도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면 불신자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 있어야 하고, 많이 버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되면 그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으로서, 부모로서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문제입니다(마 4:4, 6:33-34).
오늘의 엘리멜렉과 나오미인 여러분! 인생의 어려움, 생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위기를 피하기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도우심을 믿고 간구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 성민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신앙의 태요 보금자리인 교회를 떠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돈보다 하나님을 우선으로, 아니 전부로 삼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모압에 있게 되었다면 한 시라도 빨리 그곳에서 나와야 합니다(계 18:4). 이것이 오늘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현실에 대한 올바른 진단
룻 1장 1~5절 / 노경모목사
룻기서의 배경은 사사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사는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갑니다. 흉년을 모면하려고 모압 땅으로 간 것입니다. 거기서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이 모압 여자들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마저도 모압에서 죽고 맙니다. 이제 엘리멜렉의 부인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습니다. 남자 셋은 다 죽고 과부만 셋이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정말로 기구한 인생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질병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진찰이 필요합니다. 이 질병이 전염이 된 것인지, 유전적인 요인인지, 심리적인 요인인지, 식생활 문제인지, 환경적인 요인으로 온 것인지, 다양한 면에서 그 질병을 원인을 분석해 보는 접근이 필요합니다. 문제 해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문제를 바로 해결하기 위해서 왜 그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는가 하는 정확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즉 정확한 원인 분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한 유대인 가족이 모압에 들어갔다가 참 어려운 일을 당했구나 하면서 하나의 역사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오늘의 메시지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우리가 정확하게 진단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게 될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면, 이것을 벗어나고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제공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징벌을 받기도 하고, 심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성경에 기록한 것은 그냥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들에게 단순히 알리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교훈을 받고, 그 일들이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어서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5절-10절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엘리멜렉 가족이 이렇게 어렵게 된 이유는 선택에 잘못에 있었다고 진단할 수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이라는 땅으로 간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현실적인 상황만을 고려한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들레헴에는 흉년이 있었습니다. 이 흉년을 벗어나서 좀더 풍요로운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들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곡식이 풍성한 모압으로 가자고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흉년이 들어 양식부족하다 할지라도 모압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보호하시려고 이방 나라와 섞이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모압은 사실상 이스라엘에게는 원수의 나라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려고 하였을 때 집요하게 방해를 하였던 사람들이 바로 이 모압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모압 사람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을 섬기는 족속이고 도덕적으로도 상당히 부패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민도 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멜렉 가족은 모압으로 들어가기로 선택을 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분명히 눈앞에 보이는 것은 베들레헴에는 양식이 부족하고 모압 땅에는 양식이 풍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살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우선이다’ 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올바른 것인가?’ 하는 이 부분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고려를 하지 않는다면 복구할 수 없는, 회복될 수 없는 엄청난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가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살 길처럼 보이는 것들이 살 길이 아닌 경우가 참 많습니다.. 성경의 끝없는 외침은 그 세상의 신기루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살 수 있는 기회는 하나님의 품 안에 있지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살 길이 없다는 것을 성경이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살려고 나간 가족에게 찾아 온 것은 죽음 밖에 없었습니다. 가장인 엘리멜렉도 죽고 기둥 같은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잠시 살 길을 찾아 나섰는데 십년이 넘도록 이방 땅에 머물면서 죽음의 아픔과 고통속에서 몸부림을 쳐 왔던 것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차지하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형의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고 난 뒤에 형이 자기를 죽일까봐 무서워서 도망을 갑니다. 잠시 갔다가 돌아 올거라고 생각으로 아버지를 떠나고 어머니를 떠나서 외삼춘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갑니다. 잠시있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까?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지금 나의 현 상황에서 더 나은 살 길을 찾으십니까? 그렇다면 육신적인, 눈에 보이는 계산으로 길을 선택하지 말고 신앙 안에서 믿음의 계산으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계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순종하면 가장 좋은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섬기는 것을 팽개치고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것 먼저 택하면 실패합니다. 후회합니다.
우리는 정말로 사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당장의 물질의 풍부나 육신의 편리나 삶의 안일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내가 이렇게 결정을 내린다면 내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진지하게 검토를 해야 합니다.
또한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선택보다는 나의 삶, 생애 전체를 내다보는 안목 속에서 선택하는 것이 살 길입니다. ‘당장 배가 고픈데 어떻게 합니까? 당장 사업이 위태위태한데 어떻게 합니까?’ 물론 절박한 물음이지만 ‘이것이 내 삶의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내 삶이 끝나는 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이 선택을 잘했다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물어보고 선택하는 것이 살 길입니다.
예수님이 40일을 굶으셨을 때 마귀는 당장의 해결책으로 유혹하였습니다.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님은 그 굶주림 가운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에게 떡이 필요한 줄 아셨습니다. 그러나 떡만 생각하는 길이 당장 살 길인 듯 보여도 진정으로는 사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것이 진정으로 사는 길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진정한 살 길임을 명심합시다..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더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진정한 기준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눈 앞에 벌어진 상황으로만 판단하려는 삶은 곧 삶의 기준을 상실한 것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잘 알고 있을 엘리멜렉의 가족이 그 법을 어기고 이방나라인 모압으로 갔을까요? 그 답은 이 본문의 첫 마디의 단어에 있었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지금의 배경은 사사 시대입니다. 사사 시대는 기드온이나 삼손 같은 이스라엘의 영웅들이 나오는 시대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이스라엘의 가장 극심한 타락이 나타나는 시대입니다. 그 시대를 기록한 사사기는 이런 타락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이렇게 반복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가기 21장 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여기서 말하는 왕이 없었다는 말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아직 왕정시대가 아니었다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궁국적인 왕이신 하나님조차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인 지도자를 거절했습니다. 왜 입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찾아온 것은 기근과 굶주림입니다. 아니면 이웃나라의 침략으로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렸습니다. 사사기의 내용은 영웅들의 통쾌한 승리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그 징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베들레헴의 기근도 그 징벌 중 하나일 것입니다. 원래 이 땅은 기름진 곳이고 농사가 잘되는 곳입니다. 성경은 종종 사람이나 도시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상징적인 뜻을 담도록 하였습니다.
2절에 이들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고 말하고 있는데, ‘유다’라는 지명의 뜻은 ‘찬양’이란 말이요,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말이요, ‘에브랏’은 (에브라다) ‘수확이 많다’라는 말입니다. 이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던 곳은 ‘찬양이 가득한 수확이 많은 떡집’입니다. 이들이 살고 있던 시대 곧 사사시대의 패역과 죄악 때문에 기근과 배고픔이 있고 찬양 대신에 불평의 소리가 가득해 져 버렸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선택하는 방식도 사사시대의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도 없고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선택하는 것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삶의 기준이 없습니다. 기준이 있다면 오직 자기 생각입니다. 삶의 기준이 없고 자기 계산만이 있는 삶, 이것이 죽음의 길을 살길로 착각한 원인입니다. 사람에게 삶의 기준이 없으면 막상 급한 일이 오면 누구나 자기 생각에 눈 앞에 보이는 살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다보니 불행하게도 대부분 살 길이 아닌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삶의 기준이 있습니까? 내 소견에 좋은 대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할 기준이 있습니까? 그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의 원래 이름은 캐논입니다. 캐논의 의미는 잣대라는 것입니다. 삶의 잣대 기준입니다. 내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견을 밝혀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살 길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막상 문제 앞에서 하나님 말씀 보다는 내 생각에 살 길 처럼 보이는 그것을 붙들면, 그것은 살 길이 아니라 죽을 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살 길을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의 삶을 제한하는 딱딱한 감옥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기쁨과 평안을 유지하도록 하는 안내서요 나의 살 길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05절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어떤 상황속에서도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움이 찾아 왔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을 감당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엘리멜렉 가족은 그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 것은 신앙인에게 고난이 없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흉년이 오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흉년은 찾아 왔습니다.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흉년은 있었습니다. 흉년은 베들레헴에도 찾아 옵니다.
신앙인에게 흉년과 같은 고난-경제적 흉년이든, 인간관계의 흉년이든, 신체의 흉년이든-은 여러 이유로 찾아 옵니다. 우리의 계속되는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찾아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이 계속 어두움 속에서 살아갈 때 사랑의 매를 드는 것입니다. 또한 흉년은 우리의 신앙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시험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시험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확인될 뿐만 아니라,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의 갈등을 멈추고 확실히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차원 깊은 헌신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고난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세상 소망의 헛됨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80절은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웠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멜렉 가족에게 찾아온 흉년의 이유는 잘 모릅니다. 사사시대의 만연한 죄에 대한 징계일 수도 있고, 엘리멜렉 가족의 순종하는 삶에 대한 시험일 수 있고, 혹은 불신앙과 부도덕의 환경 속에서 그 가족의 삶의 연단하고 정화시키고자 하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가지 않아도 넉넉히 이 흉년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흉년이 왔지만 베들레헴을 떠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입니다. 후에 우리가 살펴볼 보아스 같은 사람입니다. 동일하게 흉년은 찾아왔건만 보아스 같은 사람은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흉년들이 무엇입니까? 경제, 자녀, 부모 형제 등 가족, 건강, 인간 관계, 직장 혹은 사업? 그리고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징계입니까? 시험입니까? 아니면 훈련입니까? 각자의 형편에 따라 가지각색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그 고난을 잘 감당하고 견디어 내면 이전보다 더 온전한 신앙과 삶의 자리에 들어 갑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그 고통과 환란 속에서 그것을 감당하게 하실 분으로 주님을 믿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을 여러분의 구체적인 고난과 시험 앞에서 믿으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남겨질 결과는 어두운 것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보면서 엘리멜렉 가정의 엄청난 결과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진단해 보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려움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이 말씀에 비추어서 진단을 해 보아야 합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부끄럽다 할찌라도 냉철하게 우리의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합시다.
정확한 진단이 있어야만 치유가 있게 됩니다. 회복이 있게 됩니다.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바뀌어진 거와 같은 회복말입니다. 나는 저주를 받았다고 한숨을 지었던 나오미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을 가슴에 안고 양육하는 복된 여인으로 회복되는 은총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오미와 룻
룻 1장 1~18절 / 정용섭목사
신구약 성경 66권 중에서 여성 이름을 딴 성경이 구약에 두 권 나옵니다. 룻과 에스더입니다. 룻은 에스더보다 비중이 높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의 증조할머니로서 예수님의 족보에도 나옵니다. 마 1:5b-6a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니 룻은 곧 예수님의 조상에 속합니다. 룻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는 점에서도 특이합니다.
룻 이야기
룻 이야기는 유다 지방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식으로 시작됩니다. 사해 서편 지역인 베들레헴에 사는 어떤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사해 동편 지역인 모압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이런 일들은 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조상들 중에서도 먹고살기 힘들어질 때 압록강을 건너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중국에 사는 조선족입니다. 북한의 경제 사정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중국과의 국경선을 넘은 북한 주민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모압으로 간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고, 그의 아내 이름은 나오미이며, 두 아들은 각각 말론과 기룐입니다. 그 집의 가장인 엘리멜렉이 모압 땅에서 죽었습니다. 과부가 된 나오미는 혼자서 두 아들을 키웠습니다. 생활력이 강한 여자였는지 어려운 형편에서도 나오미는 두 아들을 장가보낼 수 있었습니다. 신부는 모압 여자였습니다. 한 여자의 이름은 오르바이고, 다른 여자의 이름은 룻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입니다. 10년 뒤에 두 아들까지 죽었습니다. 그 집안의 남자들이 다 죽은 겁니다. 이미 오래 전에 과부가 된 나오미와 새로 과부가 된 두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나오미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당시에 가장 가련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갔을 겁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중에 나오미는 고향에서 새로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극심한 기근이 끝나고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해졌다는 소식입니다. 나오미는 귀향을 결심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가난하던 1960-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교포들이 다시 역이민을 오는 거와 비슷합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두 명과 함께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중에 며느리들의 입장을 역지사지로 돌아봤습니다. 자신은 고향으로 가는 거지만 며느리들은 모든 게 낯선 타국으로 가는 거였습니다. 며느리들은 남편도 없습니다. 홀로 된 시어머니만 믿고 베들레헴으로 간다는 게 얼마나 불안하고 가슴 답답한 일인지를 나오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며느리들에게 8,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시어머니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꼭 안아주었습니다. 며느리들은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두 며느리들인 오르바와 룻은 10절에서 나오미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며느리들의 생각이 정 이렇다면 못이기는 척하면서 데리고 갈 수도 있었지만 나오미는 다시 며느리들을 설득합니다. 함께 갈 수 없는 좀더 현실적인 이유를 댑니다. 핵심은 나오미가 아들을 낳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는 ‘형사취수제도’가 있었습니다. 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후손을 잇는 제도입니다. 후손을 잇는 것이 최선인 시대였기에 이런 제도가 당시에는 자연스러웠습니다. 나오미는 과부가 되었으니 자식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 재혼을 한다고 해도 아들을 낳아서 키우려면 세월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13절에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나오미는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이 치신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며느리들까지 자신의 저주스러운 운명 안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습니다. 나오미의 말이 떨어지자 며느리들은 다시 대성통곡을 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관계가 이보다 더 감동적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여러 인간관계를 맺습니다. 가깝게는 가족이고, 친구나 직장 동료 관계도 있습니다. 순전히 취미생활을 함께 하는 관계도 있습니다. 사제관계도 중요합니다. 요즘은 ‘갑을 관계’라는 말이 두드러지는 세대입니다. 교수와 조교들 사이가, 담임 목사와 부목사의 관계가 갑을이 되기도 합니다. 진실한 사랑의 관계로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은 현대인들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들이 처한 상황은 열악했지만 행복 지수는 높다고 봐야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룻기를 읽으면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절감했을 겁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도 그들과 동일한 감동을 받습니다.
룻의 노래
두 며느리 중에서 큰 며느리로 보이는 오르바가 나오미에게 절을 하고 먼저 떠났습니다. 둘째인 룻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다시 ‘네 동서를 따라서 너도 돌아가라.’고 타일렀습니다. 룻은 자신의 결심을 길게 설명합니다. 16절과 17절입니다. 다른 본문은 산문으로 되어 있지만 이 구절만은 시가(詩歌)입니다. 이 노래가 고대 유대 사회에서 민간 사이에서 일종의 민요처럼 불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운율이 따르는 시로 느끼면서 들어보십시오.
저에게 어머님을 버려두고 혼자 돌아가라고 너무 성화하시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어머님이 눈 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을 감고 어머님 곁에 같이 묻히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됩니다. 죽음밖에는 아무도 저를 어머님에게서 떼어내지 못합니다.
룻의 결심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죽음밖에는 아무도 자신을 시어머니에게서 떼어내지 못한다고 외쳤습니다. 대단한 결기입니다. 룻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십시오. 청상과부에게는 좋지 않은 소문이 따라다닙니다. 먹고살 길도 막막합니다. 이방인들을 낮춰보는 유대인들 마을에서 살려면 몸도 고생이고 마음도 고생입니다. 고향에 남아 있으면 친정 식구들이 있으니 어느 정도 새 출발할 기회가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마음 아파하고 있으니 시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모압 땅으로 돌아가는 게 바른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룻은 무서울 게 없다는 식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룻의 결심을 꺾지 못했습니다. 결국 쌍과부라 할 나오미와 룻은 베들레헴으로 함께 갔습니다. 이들 앞에 어떤 인생이 펼쳐질지 보장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오미와 룻 이야기는 구약 신앙의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들으면서 그런 신앙 전통을 되새겼을 겁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을 믿고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간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단초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우리에게는 뻔한 스토리이겠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의 모든 운명을 거는 모험이자 결단이었습니다. 이게 쉽지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며, 다른 하나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만 주어졌지 아무 것도 보장된 것은 없었습니다. 문화와 관습이 완전히 다른 가나안 토착민들과 어울려 산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섭리하시며 보호하신다는 믿음에 의지해서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세월이 흐른 뒤에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집단적 경험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출애굽 사건입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랜 세월 살았던 이집트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것도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이집트를 떠난 뒤의 미래는 확실하게 보장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은 아직 손에 잡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광야 40년을 거치면서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실망하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간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광야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든지 출애굽 당시에 20살 이상 된 남자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을 믿고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신앙전통을 아는 사람들은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에서 똑같이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을 겁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그들과 다릅니다. 성경 이야기가 아무리 감동적이라고 해도 거리가 멀게 들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들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집트를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라는 여호와의 명령과 약속도 우리에게는 거리가 멉니다. 나오미와 룻 이야기는 가깝게 느끼기가 더 곤란합니다. 그녀들이 모압에 머물 것인지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것인지의 선택은 그들의 문제이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모압은 무엇이며, 베들레헴은 무엇일까요? 손에 딱 잡히지 않습니다. 제가 목사로 살기로 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목사가 아닌 방식으로 살았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뜻이나 아니냐 하는 기준으로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의 아내나 남편과 결혼한 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일까요? 아닐까요?
섭리 신앙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에 간 뒤에 어떤 일들이 그녀에게 일어났는지는 룻 2장부터 자세하게 나옵니다. 눈물겹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도 한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룻기의 마지막 대목인 4:18-22절은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족보 이야기입니다. 룻은 여차여차하여 베들레헴의 유지에 속하는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오벳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나오미는 아기 오벳을 맡아 키웁니다. 오벳은 훗날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습니다. 즉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급기야 마 1:5절에 그 이름이 올랐습니다. 만약 나오미의 두 아들이 모압에서 죽지 않았다면, 그리고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또한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설득당하여 고향 모압으로 돌아갔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개인도 그렇고 인류도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원칙적으로는 그게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꿀 수 없습니다. 빙하기의 도래를 우리가 막을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복지의 완전한 구현으로 사람들의 종교심이 줄어든다면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한다고 해도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줄어들 것이며, 교회는 내리막을 걷게 될 것입니다. 거꾸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들로 인해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교회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개인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고, 어쩌다가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건강하게 태어난 사람도 있고, 병약하게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어떤 이는 가난한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납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운명과 사건과 역사가 우리를 엄습합니다. 그렇다면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일종의 숙명주의에 떨어져서 살아도 된다는 말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하심을 받아들이는 신앙은 훨씬 더 역동적입니다. 이 신앙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과 역사에 대한 두렵고 떨리는 마음입니다. 인류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개인의 차원에서도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더 정확하게는 우리와 지구의 미래가 열려 있으니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개인의 실존이 우주 전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각자 숨을 쉽니다. 우리가 들이키는 숨은 태평양 무인도에서 온 것일 수도 있고, 몽고 초원이나 알라스카에서 불어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몸 안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숨은 어떤 식물의 탄소동화 작용을 돕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숨조차도 지구와 우주 전체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도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브라질, 베트남, 콜롬비아 등, 가난한 농부들의 땀에 배어있습니다. 이 모든 유기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성서기자들은 종종 하나님을 가리켜 알파와 오메가라고, 즉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지난 수요 공부모임에서 읽은 사 48:12절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서 벌어지는 유기적인 생명 현상 안에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러니 매 순간을 생명 경외의 심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영혼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나오미와 룻을 다시 보십시오. 그녀들은 가장 불행한 처지에 떨어진 사람들에 속했습니다.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손으로 자기를 치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거칠게 저항했던 욥의 처지와 같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하나님의 섭리를 내다보았기에 절박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따금 흔들리기는 했겠지만, 방향만을 잃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운명을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와 룻처럼 비루한 처지로 떨어질까 노심초사하십니까? 예수님처럼 십자가 운명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십니까? 그런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저도 비슷합니다. 물신숭배의 이 시대가 이전투구와 같으니 어쩌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설교자로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현실(reality)입니다.
누구나 축복 가능성은 있다
룻기 1장 1절 / 이한규목사
< 누구나 축복 가능성은 있다 >
룻 이야기가 있었던 때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였다(1절). 그때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흑암기로서 리더십 부재의 시대였고 사회적인 방종이 극심하던 시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흉년까지 들었다. 그때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 가정이 ‘모압 드림’을 가지고 모압으로 이주했다가 더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다. 그 상황에서 살아남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희망을 찾아 나서서 시어머니가 원 거주지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결국 희망을 성취한다. 그래서 룻기는 절망 중에도 희망이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경제적인 문제와 심리적인 문제로 절망적인 환경에 처해 있다. 그런 사람에게 룻기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준다. 살다 보면 때로 극심한 어둠에 처하지만 성도는 늘 어둠 속에 잠재된 희망의 등불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 등불을 켜고 저 앞에서 나를 오라고 손짓하고 계신다. 성도가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다. ‘사람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고 ‘사람의 절망적인 벽’은 ‘하나님의 새로운 길’이다.
룻은 유대인이 멸시하는 모압 여인으로서 일찍 남편을 잃고 먹을 것조차 걱정해야 했던 불행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를 모시고 성실하고 아름답게 살다가 베들레헴 부호의 아내가 되고 유대인들이 위대한 성군으로 여기는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4명의 여인 중 한 명이 되었다(마 1:5). 결국 룻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신약 성도에게도 가장 복된 이름이 되었다. 그처럼 아무리 불행한 환경에 처해도 하나님 안에서 아름답고 성실하게 살면 누구나 복된 존재가 될 수 있다.
이 세상에 가치 없는 사람은 없다. 특히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다면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처럼 놀라운 자산은 없다. 믿음은 세상을 능히 이기게 한다. 믿음이 작아지면 세상과 문제가 크게 보이지만 믿음이 커지면 세상과 문제가 작게 보인다. 세상과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나의 신실한 믿음에 달려 있다. 현재의 내 모습이 연약해 보여도 그런 현실 때문에 꿈과 비전이 좌절될 인생은 하나도 없다.
< 성도의 삶은 늘 해피엔딩이다 >
룻기 1장을 보면 불행한 삶에서 허우적대는 여인들을 발견하지만 룻기 4장을 보면 기쁨이 넘치는 한 가정의 평화스러운 모습이 발견된다. 성도의 삶은 ‘룻기 4장’을 향해 나아가는 삶으로서 시작은 불행했어도 나중에는 행복할 것이다. 성도의 인생은 현재는 마라(고통)와 같아도 미래는 샬롬(평안)으로 가득하게 되면서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다.
때로 ‘룻기 1장’의 삶이 펼쳐져도 룻처럼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가정적인 삶과 공동체적인 삶과 남을 배려하는 복된 삶을 버리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떠나지 말라. 언젠가는 ‘룻기 4장’의 삶이 펼쳐질 것이기에 ‘룻기 1장’의 삶에서 너무 탄식하고 슬퍼하지 말라. 옛날의 삶을 회상해 보라. 그때 나를 심각한 고민에 빠뜨렸던 순간들이 지금은 거의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어느새 그 순간을 잘 헤쳐 나온 것이다.
외모가 부족해서 콤플렉스가 있던 것도 결혼하고 나니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다 잊어버렸다. 그럴 줄 알았다면 그때 그렇게 고민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반복된 경험을 통해 이제는 문제가 생겨도 크게 겁나지 않다. “살다보면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그래도 나의 내일은 보장되었다.”라고 생각하며 문제 앞에서 걱정 근심이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처럼 믿음은 희망찬 내일을 바라보게 한다. 현재의 부족한 모습으로 고민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다면 복된 내일이 성큼 다가설 것이다.
누구에게나 찬란한 꿈이 있다. 그 꿈이 종종 장벽을 만나면 절망감이 들면서 인생 역전승은 소설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나의 삶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나의 현실에서 얼마든지 인생 역전이 가능하다. 지금의 어려운 현실에 결코 실망하지 말고 가끔 다가오는 장벽과 실패 앞에서 주저앉지 말라. 복된 삶을 위해서는 생각하는 사고(思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불행한 사고(事故)도 필요하다. 어두워지면 별이 나오듯이 고난과 실패와 사고 중에도 믿음과 용기와 꿈을 잃지 않으면 최종 승리의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약속의 땅에 대한 믿음
양인국목사 / 룻 1:1-22
1. 룻기는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에 대한 지극한 효심과 시어머니의 며느리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 그러나 룻기는 이들 사이에 있었던 감동적인 사랑의 이야기만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신학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한 가정이 기근을 피하여 약속의 땅을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서 실패한 것과 실패 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서 회복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는 룻기의 이야는 그 자체가 신학적 교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룻기를 통해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할 때 한 가정에서 일어난 외적 이야기뿐만 아니라 내면에 흐르는 신학적 의미까지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2. 룻기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을 때 엘리멜렉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직면하게 된 여러 가지 시련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다. 여기 엘리멜렉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버리고 모압으로 이주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었다.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대하여 가졌던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의 어떠함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기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땅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이 그 땅을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으로 믿고 약속해 주신 말씀대로 그 땅을 통하여 젖과 꿀을 내어 줄 것을 믿고 그 땅에 거(居)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지만, 환경으로 인하여 그 땅을 떠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라는 의미다. 1절의 말씀이다.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여기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을 시험할 수 있는 때라는 것을 말해 준다. 언급한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그 땅을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은 흉년이 들었어도 그 땅을 떠나지 않을 것이지만 이와 같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기근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엘리멜렉은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자신의 가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인의 땅 모압으로 이주했다.
안타깝게도 엘리멜렉은 모압 땅으로 이주 한 후 죽었다. 이것은 불신앙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을 떠난 이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하심이었다. 따라서 이때 가족들이 가장(家長)의 죽음을 하나님의 경고하심으로 알았더라면 그후 더 이상의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 죽음을 하나님의 경고하심으로 듣지 못했다. 어쩌면 당시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는 비록 남편이 죽었을지라도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두 아들을 모압 여인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이 모압에 거주한지 십년 즈음에 두 아들도 죽었다. 그래서 그 집에는 세 명의 과부만 남았다. 특별히 그들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죽음이 결혼 초기였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이처럼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이 떠나온 약속의 땅에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모압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들이 하나님의 징계하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모압을 떠나 자신의 기업이 있는 약속의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그의 두 며느리도 함께 했다. 그러나 나오미는 도중에 그들의 장래를 생각하여 그들을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고자 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1:8-10)” 나오미는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향할 때와 마찬가지로 모압으로부터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도 신앙에 따라 행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믿음의 결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두 며느리에게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한 것은 그들에 대한 사랑이었지만 믿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을 남편으로 택한 것은 단순히 결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개종(改宗)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시 어머니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본래의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1:15). 만일 나오미가 확고한 신앙의 사람이었다면 그들의 장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오미의 확고하지 못한 신앙으로 인하여 두 자부 중의 하나인 오르바는 자신의 옛 백성과 신들에게로 돌아갔다. 이것은 오르바의 일생에 가장 불행한 일이었다.
나오미는 자기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두 자부에게 자신을 좇을 때 어떤 희망도 없다는 것을 말하며 간곡한 말로 자신을 떠나 각각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서 재혼하고 살도록 권고했다. 나오미의 이와 같은 권고로 인하여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추고 떠났다. 그러나 룻은 결코 시어머니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시어머니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의미하지만 또한 신앙을 선택한 것을 의미한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16,17)” 이 말씀은 룻이 두 가지 일을 결단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는 결코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전자(前者)의 결단은 인간의 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을 지키겠다는 것이었고, 후자(後者)의 결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다음의 말씀은 룻의 이와 같은 결단을 말해 주고 있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은 안락한 삶을 위하여 자기 백성과 그들의 신을 택하지 않았고 비록 고난을 받을지라도 어머니와 하나님을 택한 것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갔더라(1:19)” 나오미의 결심이 굳게 서 있었고, 룻의 결심이 굳게 서 있었을 때 두 사람은 베들레헴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향한 결심이 굳게 서 있을 때 앞길에 어떤 장애가 놓여 있었을지라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1:19,20)”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며 기쁘게 맞아 주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들에게 자신을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했다. 나오미는 희락이라는 의미이고 마라라는 말은 괴로움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오미가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한 것은 약속의 땅을 떠났을 때 자신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간증이요 회개였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나오미라고 속이고 싶지 않았다. 여기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식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새로운 길(회복의 은혜)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는 어째서 자신의 이름을 마라라고 불러야 마땅한지 말해 주기 위하여 약속의 땅을 떠났던 십년 동안의 삶을 보다 더 자세하게 이웃들에게 말해 주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1:20,21)”
나오미는 풍족한 가운데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갔다. 이것은 그들이 베들레헴을 떠난 것은 흉년으로 인하여 더 이상 그곳에 살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현재 누리고 있는 것보다 더 큰 풍요로움을 누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들은 더 큰 풍요로움을 누리기 위하여 신앙을 버려야 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이 얻게 된 것은 무엇인가? 나오미는 십년 동안의 삶의 경험을 통하여 이 물음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을 주고 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1:21)” 그들은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을 떠났지만 그러나 그들이 얻은 것이란 고통뿐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교훈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더 많은 것을 얻기 바란다면 이런 바람은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을 잃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천이 되기기 때문이다. 원천을 상실하면 그곳에 메마름만 있을 뿐이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1:22)”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환경과 그들의 장래를 축복으로 인도해 줄 수 있는 환경을 예비해 두셨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보리를 추수하는 밭에서 시작되었다. 특별히 룻은 그곳에서 하루의 양식을 위하여 이삭을 주었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하여 룻에 대하여 계획해 주신 길로 인도해 가고 계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룻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약속의 땅에 거하는 자기 백성들 가운데 행하시는 일이다. 즉 우리는 매일의 삶 가운데 이삭을 줍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하여 우리를 자신의 계획안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나오미에서 마라로
룻 1:1-5, 19-22 / 이종철목사
모압으로
룻기는 성경 제목 중 여성 이름을 가진 두 책 중(에스더) 하나입니다. 그것도 이방 여인의 이름입니다. 룻 혼자만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 시어머니 나오미의 대사가 더 많고, 주도적입니다. 나오미와 룻, 두 여성이 하나가 되어 자신들에게 닥친 불행을 극복해가는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다윗으로 이어지는 구원사가 전개되고, 민족 차별을 극복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던집니다. 성경은 한 개인의 일상사를 다루는 내용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하나님이 큰 관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바로 그런 일상사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이기에 우리 인생은 신성합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듯 운명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우리의 기대나 계획과는 다른 길로 전개됩니다. 그 첫 구절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단순히 시대적 배경을 밝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사시대는 왕, 곧 국가가 없는 시대입니다. 기근이라는 위기가 닥쳤는데 이 문제를 개인이 해결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상황과 같이 각자도생입니다. 룻기에는 이름들이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남편의 이름이 ‘엘리멜렉’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왕이다’는 매우 신앙적 이름입니다. 이는 룻기의 주제에 해당합니다. 인간 왕이 아닌 하나님이 왕이 되어야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죽어버렸습니다. 룻기의 결말은 결국 죽은 왕의 소생입니다. 하나님이 왕의 능력을 발휘하여 그 인생을 결국 축복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약속의 땅에 든 기근으로 시작합니다. 이들이 거주하던 베들레헴은 ‘떡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아이러니하게 이제 먹을 빵이 없는 기근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약속의 땅을 지키는 것이 신앙일까요? 모릅니다. 그 자리에 있었다면 굶어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계시도 없는 상황에서 인간은 자신의 예민한 생명력의 더듬이로 더듬더듬 살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뜻밖의 선택은 모압이었습니다.
모압이란 나라는 룻기에서 중요합니다. 룻이 모압 여인이며 룻기 전체에서 모압이라는 단어는 14번이나 등장합니다. 모압은 이스라엘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두 딸에게서 기원한 암몬과 모압 족속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지만 출애굽 당시 모압은 술사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하였습니다. 우상 숭배와 성적 타락으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할 뻔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3장 3절에서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국 내내 모압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포로기 이후에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모압 간의 통혼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13:1) 하면서 이방인과 결혼한 자들을 강제 이혼시키고 쫓아내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유대의 보수화 바람이었습니다.
룻기를 읽을 때 이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룻기가 기록된 이유가 요나서와 같이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에 대한 반발이라 하였습니다. 이방인 문제가 룻기의 중요한 주제임이 틀림없습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지만 이스라엘인들보다 의리가 있고, 또한 다윗 왕의 혈통을 낳은 자입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간 이방인입니다. 이는 한국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버리라는 메시지 정도에 해당합니다. 한국교회 내에 횡행한 소수자나 이슬람인들이나 이념적 반대 세력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버리라는 메시지와 유사합니다.
나오미의 가정은 이런 역사적 무게를 알지 못한 채 모압 행을 결정했고, 그곳에서 모압 출신 두 며느리를 얻기까지 했습니다. 의도적 도발이 아니었습니다. 최대한 자신들의 정착지로 좋을 곳을 물색했고 모압 땅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곳에 살다보니 사람들도 괜찮아서 모압 여인을 며느리로 맞아들인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취했던 이 행동은 매우 역사적이 되었습니다. 신라 백성이 고구려나 백제에 가서 살고, 그곳에서 결혼하고 살림을 장만하고 산 것과 같은 효과입니다. 국가는 경계선을 긋고 강화하려 하지만 민중들은 그것을 해체하고 이미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민중들의 이런 무의식적 행동이 더 무섭습니다. 이들은 무의식중에 이스라엘과 모압의 경계를 허물고 있습니다. 그 차별과 배타와 편견을 깨고 있습니다.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교리나 이념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생명의 위기 앞에 느끼는 공동의 연대의식입니다.
나오미 인생 마라 인생
최대한 현명한 결정을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죽었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 또한 이곳에서 불행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이 말론이고 기룐입니다. 말론은 ‘질병’이라는 뜻이고 기룐은 ‘허약함, 폐병’이라는 뜻입니다. 이름을 어떻게 이렇게 지었는지... 둘 다 병으로 젊어서 죽은 것 같습니다. 이들은 모압 여인 둘을 아내로 두었는데 불행히도 자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오미의 인생은 그야말로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남편도, 자식도, 손주도 없고, 곁에는 이방 여인들밖에 없습니다.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최악이었습니다. 영화 《기생충》에 유명한 대사 중 하나는 “무계획이 계획이다.”는 말입니다. 인생이란 것이 계획한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갈 때 오히려 내 인생을 어떤 계획이 있는 것처럼 이끌고 가는 것을 종종 봅니다. 힘없는 인생은 운명의 파도에 휩쓸리기 마련입니다.
나오미에게는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나오미가 취할 수 있었던 행동은 귀향이었습니다.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19) 이 귀향은 화려하거나 즐거운 귀향이 아닙니다. 갈 곳이 없는 자의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나오미를 고향 사람이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19) 번역이 좀 밋밋합니다. 새번역은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로 실감나는 번역을 합니다. 세월이 흘러서인지,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 것인지 고향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잘 못 알아 볼 정도로 많이 상했습니다.
이 말에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20) 나오미는 ‘사랑스러운 자, 달콤함’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마라는 ‘괴로움, 쓰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인생은 실패야’라는 탄식의 말입니다. 정말 실패일까요? 나오미에게는 후반전 인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오미에서 마라로, 마라에서 다시 나오미로 가는 과정입니다. 인간은 마라 인생이 있었기에 자기 인생이 얼마나 달콤했는지를 깨닫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렘브란트는 성화와 자화상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 그림 안에는 렘브란트의 자기 인생에 대한 생각이 반영되었습니다.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20대부터 계속해서 그렸는데 그 중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은 1669년 그가 죽던 해에 그린 60대 말년의 《자화상》입니다. 백발이 되고 쭈그러진 얼굴도 그렇지만 영욕의 세월 끝에 모든 것을 비운 듯한 처연한 눈빛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슬픔이 우러나오는 듯한 표정입니다.
그 그림처럼 노년의 렘브란트의 삶은 불운했습니다. 렘브란트는 청년시절에는 부유하게 지냈지만 노년에는 파산 선고를 당하고 아무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할 정도로 쓸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두 아내와 자녀 여섯이 있었지만 아내들뿐만 아니라 다섯 명의 자녀들이 자기보다 먼저 죽는 모습을 본 비운의 화가였습니다. 그런 고뇌가 그 얼굴 표정에 담겼습니다.
렘브란트 말년의 그림들이 대부분 그러합니다. 그가 죽던 해에 그린 성화 《시므온의 노래》에서는 아기 예수보다는 시므온의 표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렘브란트 특유의 검은 색을 배경으로 시므온은 눈이 먼 듯 거의 감긴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살이 베었고 대머리가 된 머리에 흰 수염을 날리며 고뇌와 우수가 담긴 듯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1669년에 완성한 《탕자의 귀향》도 마찬가지입니다. 까까머리에 헤어진 신발을 한 쪽만 신고서 무릎을 꿇은 거지같은 모습의 탕자를 안아 주는 아버지의 모습인데, 실명한 듯한 눈으로 담담히 아들을 맞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의 희노애락에서 달관한 표정입니다. 누가복음에 묘사된 기쁨에 벅차 아들을 맞는 아버지의 표정이 아닙니다. 기다림에 지쳤고, 기쁨도 잠시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입니다.
나오미에서 마라로, 마라의 극한에서 모든 것을 달관한 모습입니다. 육적인 눈이 감긴 후 영적인 눈이 열렸다고나 할까요? 인생의 마라가 우리 인생을 깊게 만듭니다.
여호와의 징벌?
이때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요? 자신을요? 인간인 이상 어떻게 자신을 탓할 수 있나요? 탓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교만입니다. 자기 인생을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들은 나름 최선을 다해서 인생을 삽니다. 거기까지입니다. 최선을 다했다면 자신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비난한다고 하여 자기 인생이 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네, 나오미는 대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길로 갔습니다. 나오미는 반복해서 하나님 탓을 합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20절입니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그 앞에 있는 말씀입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한탄입니다. 이 한탄은 비신앙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풍족한 것을 다 빼앗아 가난하게 만들었단 말입니까? 네 그런데 사실입니다. 모든 인생사와 역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이스라엘인들은 믿기에 당연히 불행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만 받지 말고 비난도 받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기꺼이 이 원망의 소리를 듣는 분입니다. 하나님마저 외면하신다면 우리는 이 답답함을 어디서 풀 수 있겠습니까? 그분은 이웃집 아저씨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여기에는 또한 일말의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당신이 내 인생을 그렇게 만들면 안 되지요. 바꾸어주세요. 신에 대한 책임을 물음으로써, 신이 이 부르짖음을 듣고 생각을 돌이키게 하려는 시도입니다. 보통은 이렇게 한탄만 하다 끝납니다. 룻기가 성경이 된 이유는 이런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돌파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와 룻의 굳은 우정과 신뢰가 길을 열고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약한 자들이 연대를 통해 운명의 파고에 맞섰습니다.
물론 둘이 계획한 것은 아닙니다. 둘이 처음부터 강한 결속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위기에서 서로 연대한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우정과 사랑이 있었기에 서로를 붙잡고 버텼던 것입니다. 그러다 기회가 왔고 그들은 이 역전의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이들의 삶의 투쟁이 결국 이스라엘과 모압, 이스라엘과 이방의 차별을 시정하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들의 강한 생명력이 하나님의 구원사를 잇는 한 축이 되었습니다. 우리 운명이나 불행이나, 우리의 일상사는 신의 뜻이 펼쳐치는 무대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향한 분투는 신성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 은혜가 함께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절망속에서 희망을
룻 1:1-5 / 박용규목사
2007년에 개봉되었던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겁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외도하던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게 된 젊은 여인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경남 밀양으로 이주를 합니다. 피아노 학원을 하면서 살아가던 어느 날, 아들이 유괴를 당해 살해 당하고 맙니다. 영화 밀양은 상실과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한 여인의 삶을 묘사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주제는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의 문제를 누가, 무엇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독교인 유괴범을 영화 속에 소품으로 끌어들입니다. 결국 기독교는 인간의 고통, 절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피상적인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누구도 자신의 절망, 고통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고 절규하며 몸부림치는 연기를 통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절망과 고통의 문제의 근원을 밝혀주고 그 해결책을 제시해줍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인생의 고통의 문제를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대하기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룻기서를 읽으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는 희망은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정하신 때, 역사 속에서 자신에게 놓여진 오늘의 현실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의 성공시대를 다루는 책이 아닙니다. 인간의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왔는가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책입니다. 룻기는 다윗 왕의 조상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통치를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사사시대는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습니다. 언제나 모든 기준이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 결과 신앙적으로, 윤리적으로, 영적 암흑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영적인 어둠의 시대에 한 줄기 빛을 드러냅니다. 평범했던 이방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룻’ 이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개인의 운명, 가문의 형통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절정인 다윗의 족보뿐 아니라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꿈꾸게 하시며 인생의 고통과 눈물을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바꾸시겠습니까? 인생의 죽음, 이별, 슬픔과 고통을 안고 가는 인간의 이러한 고통이 어디서 왔는지 그 근원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슬픔과 고통, 죽음으로부터 어떻게 자유 할 수 있는가’ 하는 길을 안내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절망과 탄식, 깨어지고 파산된 인생을 위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아픔과 눈물, 절망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기치 못한 불행의 씨앗(1-2절)
오늘 본문은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라고 시작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는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어서 한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모압 지방으로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거류합니다. 삶의 터전을 옮긴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 양식의 집"이란 뜻입니다. 베들레헴은 훗날 다윗 왕이 태어날 곳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곳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그렇게 그리워했던 가나안땅에 베들레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룻기의 시작은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아주 우울한 분위기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과거 풍년이 들었던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사사시대인 것을 감안할 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숭배하며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기 때문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흉년이 누구에게 찾아왔습니까? "하나님은 왕이시다" 라는 뜻을 갖고 있는 엘리멜렉의 가족에 덮친 것입니다. 흉년이 왔을 때, 엘리멜렉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회개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판단에 맡겼습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엘리멜렉은 베들레헴을 떠나서 어디로 갔습니까? 모압지방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두 아들 말론, 기룐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입니다. 신명기 23장 3절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당장 먹고 살기 힘이 드니까 이방 민족이었던 모압 땅으로 들어가서 흉년을 극복할 수 있는 대비책을 준비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흉년을 피해서 들어간 그 땅에서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약속의 땅, 베들레헴에 흉년이 든 것은 기후변화에 의한 흉년이 아니었습니다. 룻기 전체가 예기치 못했던 인생의 흉년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흉년이 누구에 찾아왔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백성의 가정에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이라고 해서 세상 사는 동안에 고통과 시련이 없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사업에 실패할 수 있고 육체의 질병에 무기력해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엘리멜렉도 흉년을 당해서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이거하는 것이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룻기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갑자기 닥친 흉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땅을 이탈한 것은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모압 땅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모압 땅으로 가는 것이 흉년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과 뜻을 기다리기 보다 모압으로 가는 것이 자신의 가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이었던 엘리멜렉이 주인공처럼 등장합니다. 그러나 엘리멜렉은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립니다. 룻기 초반부터 ‘그’ 라는 단어가 6번이나 등장하지만 엘리멜렉과 두 아들의 죽음을 그려놓고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엘리멜렉의 가정에 불행이 시작되었을까요? 어떻게 우리에게 고난, 시련, 두려움, 죽음이 시작되었습니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며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주석가 하워드 핸드릭슨은 "인간의 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저들이 매를 맞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벨론의 포로가 된 그들의 불행의 씨앗이 무엇입니까? 정치적, 지정학적 문제 이전에 하나님의 손으로 저들을 팔아넘기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매를 맞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축복의 근원이 누구며 이 세상의 주관자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이냐고 할 때, 하나님이란 존재가 자신에게 어떻게 인식되느냐 하는 것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정상화 되고 그 관계가 더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시편 1편 1-2절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무서운 영적인 중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축복, 행복이 나오며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이 있다는 것을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자녀들을 열심히 학원 보내고 공부시켜서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 아닙니까?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좀 더 품격 있는 삶을 살아가며 가족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깨어져 있다면 행복이 아니라 불행의 파고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듣기에 불편해도 목사의 평생 사명은 이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머물러야 할 그 자리에서 떠나 있는 것이 불행의 시작임을 믿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희망은 없지만 은혜의 불씨는 남아있다. (3-5절)
나오미는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큰 충격에 빠졌고 절망 속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어서 잠시나마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모압의 딸들을 자부로 맞이합니다. 비록 남편은 죽었지만 두 아들이 있고 두 며느리를 맞이해서 새 가정을 이루어 희망의 불씨를 살려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유대인이면서도 누구나 알고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원리를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10년쯤에 두 아들을 하나님께서 데려가 버리시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절망 속에서 잠시나마 행복할 수 있었지만, 그 행복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룻기서는 서론부터 너무나 슬프고 암울한 현실입니다. 나오미의 가족들 중에 이방 땅에 자신만 남았습니다. 우리나라도 60-70년 힘든 한국 땅을 떠나서 미국 등 해외로 이민을 많이 떠났습니다. 가난과 고통, 절망 속에서도 반드시 성공해서 화려하게 다시 귀국하겠다는 꿈을 안고 갔었는데, 성공은커녕 자신의 가족을 잃고 생계마저 막막한 현실에 직면하기도 했었습니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남편과 아들들이 세상을 떠난 것보다 이 세상에 남아있는 세 여인 나오미, 오르바, 룻의 상황이 더 절망적 현실이지 않습니까? 남은 여생을 평생 과부로 살아야 하는 사회적 편견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절망과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희망이 없어 보이는 절망 속에서 은혜의 불씨가 남아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룻기 1장 5절은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남았더라(히브리어, 샤아르)’는 단어의 의미는 무슨 뜻일까요? 낯선 이방인의 땅에서 맞이하는 세 여인들의 현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입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나오미는 이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남았더라"는 단어를 반복함으로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 속에 개입하실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희망은 없지만 하나님 은혜의 불씨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나오미의 고향인 유다 땅에 자기 백성들을 돌보사 그들에게 먹을 양식을 공급해주십니다. 룻기 1장 6절은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라고 말씀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하나님도 자신을 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음을 포기하면 하나님도 자신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49장 14-16절은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엘리멜렉의 영적인 탈선을 눈 감아주시지 않고 징계하셨습니다. 모든 남자는 10년만에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와 두 과부에게는 남겨두시므로 은혜의 불씨가 되게 하십니다. 이사야 6장 13절은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 기자는 오늘 우리에게 독특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희망이 없는 절망의 순간 속에서도 룻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구속의 드라마 속에는 희망의 불씨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룻기 4장에서 살펴보겠지만 룻은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위대했던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구원자로 오시게 되는 놀라운 구원의 드라마를 준비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인간의 모범적 교훈이나 윤리적 교훈을 얻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 역사 속에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믿으면 복을 받고 환난을 면케하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면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에서 이단보다 무서운 해악은 복음의 본질, 신앙의 균형을 잃어버리는 가르침입니다.
아직도 대부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사적인 행복을 지켜주시는 수호신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흉년이 들고 절망의 시간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먼저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동원해보다 안되면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온갖 핑계를 만들어 자신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시오, 이 세상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달아 알아가는 것입니다.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놓으시는 바보 같은 하나님의 사랑에 내 인생을 맡길 수 있다면 절망 속에서도 은혜의 불길을 살려낼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62편 5-6절을 읽으면서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62:5-6)
어떻게 선택해야 합니까
룻 1장 1~14절 / 조상호목사
저는 여러분들의 사랑과 기도로 선교사 수련회와 선교대회에 잘 다녀왔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인 10일에 한국에 도착하여 곧바로 2박3일 동안 수련회에 참석하고, 둘째 주에는 오세아니아선교회 예배 인도와 각종 세미나, 전략회의, 그리고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하는 등, 9박10일 동안 바쁘게 지내다가 돌아왔습니다. 원래 선교대회 참석 차 한국에 가기 전에는 스스로 ‘가급적이면 사람들을 만나지 말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며 재충전 받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가뜩이나 더니든에 방문하느라 뒤늦게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많은 일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기억나는 것을 소개하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첫째로 주말에 여행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 부모님과 막내 동생과 함께 경기도 양평 근처에 있는 용문산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주일 준비 때문에 토요일에 계획을 잡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 날만큼은 외출하게 되었습니다. 막내 동생이 30대 중반이 되어 노총각으로 지내다가 한 자매를 만나 오는 9월 하순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동생의 아내 될 자매, 그러니까 저에게는 제수씨가 될 자매가 그곳에 삽니다. 그 날 양가 어른들이 만나는 자리였기 때문에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바쁜 일정을 할애하여 효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함께 동행 했습니다. 보통 때는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자동차들이 얼마나 많은지 가는데 4시간, 오는데 3시간이 걸리면서 허리가 아프신 아버님께서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노총각으로 늙어갈 줄 알았던 막내아들의 결혼이 달린 문제라서 그런지 많이 인내하셨습니다.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주말에는 교회 가는 대신, 산으로 강으로 들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한국 교회 안에 큰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여행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많은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둘째로, 바쁜 와중에서도 귀한 만남들을 가졌습니다. 서울에 도착해서 가급적이면 연락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연락이 되어 우리 교회출신 청년들을 만나고, 집사님들을 만나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함께 교제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 지난 화요일 저녁의 만남을 잊지 못합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앞에 숙소가 있었는데, 그 숙소 커피숍에서 우리 교회 성도님의 아드님이지만 아직까지 믿지 않는 한 형제를 늦은 밤 시간에 만났습니다. 원래 그 시간에 우리 교회출신 한 형제가 상담을 요청하여 하는 수 없이 이중으로 약속이 되어서 마음 한 편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 형제가 합석을 한 것이 나중에는 더 좋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형제는 원래 성당을 다니던 형제였는데, 수년 전에 우리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단기선교까지 갔다 오고 인생의 목표를 발견한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복음을 전하고 나서 우리 교회 출신 형제로 하여금 간증을 하게 했는데, 복음과 그 간증을 들은 그 형제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가 영접기도를 할 때에는 세 사람이 함께 손을 잡고 했을 뿐 아니라, 이번 주에 그 형제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도와주기로 서로 약속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또 빼놓을 수 없는 만남이 있습니다. 금요집회에서 영상을 통하여 많은 은혜를 끼친 적이 있는 박순애전도사님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오전 숙소에서 만났습니다. 그 박순애전도사님을 만난 것은 아니고, 박순애전도사님의 남편 되시는 전도사님을 만났습니다. 전혀 계획에 없었던 만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남편 전도사님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더 감사한 일은 앞으로 2년 이상 집회계획이 꽉 잡혀 있어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스케줄임에도 불구하고, 내년 1월 초 우리 교회에 오셔서 집회를 인도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사실 제가 한국에 갈 때, 하나님께서 2007년도 1월 초에 있는 ‘신년캠프’ 강사로 누구를 만나게 하실까 하는 기대를 하고 갔었는데, 하나님께서 한 번에 강사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정말 귀한 만남을 가졌습니다.
셋째로 선택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수련회 기간 동안 충청남도 안면도의 어느 콘도미니엄에 머무를 때, 함께 방을 쓰게 된 모 전도사님이 숙소에 있는 TV의 채널을 돌리는데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채널수가 무려 6~70개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1번부터 하나하나 돌리자 영화, 스포츠, 광고, 건강, 종교, 한국말, 영어, 일본말, 중국말, 별의별 채널이 다 나왔습니다. 선교대회를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앞에 위치하고 있는 숙소의 TV는 한 술 더 떠서 채널 수가 90개 이상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보니 TV를 틀 때에는 채널 선택을 위해 고민할 밖에 없었습니다. 또 아침에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철역에 나가면 돈도 받지 않고도 볼 수 있는 신문이,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10가지 이상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안 그래도 신문을 파는 가판대에 가면 수십 가지 신문이 있어 무슨 신문을 사야 하나 고민을 많이 해야 하는데, 무료로 나누어 주는 신문까지 있으니 무슨 신문을 가져와야 하나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신문과 TV 방송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 외에도 시장에 가서 어떤 물건을 사야 하나, 서점에 가서 어떤 책을 사야 하나, 어느 음식점에 가야 하나,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나,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 메시지를 발견했습니다. <선택의 중요성>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가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우리가 선택해야 할 분야는 점점 많아져 갑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선택해야 할 것들이 놓여 있습니다. 식품점에 가서 라면 하나를 사려고 해도 종류가 수 십 가지나 됩니다. 휴대폰도 종류가 하도 많아 선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옛날과 달리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한국에 가는 것도 노선이 다양해져 어느 노선, 어떤 비행기를 타야 하나 선택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청년들은 배우자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넓은 선택의 폭이 오히려 우리를 갈등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폭이 늘어나면 날수록 갈등도 증가합니다. 왜냐하면 선택의 자유가 지닌 책임감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방문 중에 만난 어느 분으로부터 “최근 한국의 부동산 값이 너무 올랐는데, 목동에 있는 어느 아파트는 지난 10개월 동안 최소 3억, 최대로 4억이나 올랐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사지 말고 강남이나 목동에 있는 아프트를 살 걸 그랬습니다.”라고 후회하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또 한국방문 중 만난 어느 분으로부터 “목사님! 저희 오빠가 사업에 실패한 후, 노가다를 다니고 있어요. 그리고 조그만 쪽방 하나에서 온 가족이 함께 자며 어렵게 살고 있어요.”라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선택을 잘못하면 물질적인 손해나 시간적인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고, 심하면 나의 운명을 결정지을 뿐 아니라, 자녀들이나 형제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경우가 좋은 예입니다. 롯은 요단 동편의 물이 넉넉한 땅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그와 그의 가정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할 때 어려움을 겪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이삭의 첫째 아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장자권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장차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의 복된 족보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아닌, 10명의 정탐꾼의 말을 듣고 모세를 원망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아우성을 친 결과,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헤매어 다니다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단 한 사람도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 명의 보고가 아닌 바로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를 선택했더라면, 이스라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을지라도, 우리에게 선택의 능력이 없을 때 우리는 문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의 자유’에 만족하기보다 ‘선택의 능력’을 키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인지, 무엇이 좋은 선택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상대적인 것이라면 좀더 나은 것(better)을 선택하는 지혜를 배우고, 절대적인 것이라면 가장 중요하고 좋은 것 (the best)을 선택하는 지혜를 배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어떻게 선택해야 합니까?’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중 1절부터 5절까지는 5월 첫째 주 2부 예배에서 ‘인생에 흉년이 닥칠 때’라는 제목으로 청년들과 함께 은혜를 나눈 적이 있는데, 오늘은 ‘고난’이라는 주제에 이어 ‘선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본문을 접근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선택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1) 물질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말라
첫째로 우리가 선택할 때, 물질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참조는 할 수 있지만, 물질을 선택의 절대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멕렉은 물질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 무엇보다도 물질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선택했습니다. 그는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어느 해 그가 살고 있는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가 제일 먼저 취한 행동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우리 가정이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나님께 여쭙지 않았습니다. 그는 흉년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덜컥 모압 땅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을 때 모압 지방에 먹을 것이 풍부하다는 소문을 듣고 아내와 두 아들 모두 데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간 것입니다. 모압이 어떤 곳입니까? 모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원수의 땅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행진할 때 이스라엘을 집요하게 방해했던 사람들이 바로 모압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모스’라는 우상을 섬기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멜렉은 그곳에 가면 혹시 양식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이사를 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사를 결심한 유일한 이유는 경제적으로 좀 더 안정적이고 나은 삶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엘리멜렉이 어떤 사람인 줄 아십니까?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리’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이고, ‘멜렉’은 “왕”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부모님은 그에게 “하나님이 나의 삶에 왕이 되시고 주인이 되신다.”는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그 이름을 붙여 주셨고, 그는 그 이름대로 베들레헴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살고 있는 고향 땅에 기근이 불어 닥치자, 그는 자신의 이름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뜻보다는 물질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엘리멜렉은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이사를 갔지만 얼마 있지 않아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론과 기룐 두 아들이 결혼을 했지만, 두 아들 역시 그곳에 이사를 한 지 10년 쯤 되었을 때, 둘 다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물질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은 엘리멜렉은 실패를 보고 만 것입니다. 그의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경남 거창에 가면 거창고가 있는데, 그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 학교 강당 뒤편에 걸려 있는 '직업선택의 십계(十戒)'라는 유리 액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다고 합니다.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거창고 직업선택 10계명>을 소개하겠습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가라. 6) 장래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을 바랄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이 <직업선택 10계명>은 4대 교장을 지낸 전성은(전 교육혁신위원장)씨와 5대 교장을 지낸 도재은씨가 1980년대 초에 만들었습니다. 전 교장은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를 가르치기 위해 10계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거창고 직업선택 10계명>을 보면 현실성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치는 학교는 거창고 외에는 전국 어디에도 없습니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 조금이라도 나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는 요즘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월급 적은 쪽을 택하라,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황무지를 택하라, 사회의 중심부분이 아닌, 가장자리로 가라"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창고 졸업생을 비롯한 학생들은 이 십계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신이 학생들의 학업에도 좋은 영향을 미쳐 1981년부터 2003년까지 22년 동안 4,874명의 졸업생 중 무려 90%인 4,386명이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2004년에도 졸업생의 9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할 만큼 시골에 있지만 한국의 교육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그곳에 입학시키려고 할 만큼 유명한 학교가 되었고, 그 학교 출신의 수많은 학생들이 사회 곳곳에 들어가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엘리멜렉처럼 물질을 선택의 절대 기준으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질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에 놓고 자녀를 교육하고 있지 않습니까? 직업선택을 할 때, 돈을 기준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저와 여러분들이 엘리멜렉과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참조는 하되 물질을 선택의 절대 기준으로 삼지 말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
둘째로 우리가 선택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남편은 의지할 대상입니다. 그리고 아들은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해 주는 소망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남편과 아들이 모두 다 죽게 된 것입니다. 이때 나오미가 어떠한 선택을 했습니까? 보통 나오미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쉽게 좌절하고 낙담하는 반응을 보이든지, 아니면 원망하며 불평하게 됩니다만, 나오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불평할 수 있었지만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실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겠다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이이에 두 자부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여기 6절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곳이 두 곳입니다. 서두에 언급되어 있는 ‘그가’라는 단어와 ‘들었으므로’라는 단어입니다. ‘그가’라는 단어는 NIV 영어성경에 보면 'she'라고 번역되어 있고,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그 여인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이것이 좀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 여인, 즉 나오미는 뭔가를 들었습니다. 무엇을 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보아 주셔서 먹을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압 땅을 떠나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일어섰습니다. 나오미는 그녀의 남편과 달리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몇 차례 남미와 북미에 이주해 간 청교도들에 대해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1620년 9월6일,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 동부를 향하여 출발하였을 때,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라는 배를 타고 남미로 간 청교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부류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배를 탔습니다. 남미로 간 사람들은 Gold를 얻기 위해 ‘매스터호’를 탔습니다. 남미에서 엄청난 양의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새로운 대륙에 가서 새로운 기회를 잡아, 부자가 되겠다는 목적으로 ‘매스터호’를 탔습니다. 반면에 북미로 갔던 사람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메이플라워호’를 탔습니다. 영국 국교도들의 핍박으로 인해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자, 마음껏 찬양을 부르고 마음껏 기도를 하고 마음껏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메이플라워호’를 탄 것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똑같이 선택을 했지만, 그 동기와 기준이 달랐습니다. 결과적으로 ‘매스터호’를 타고 남미로 간 사람들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미로 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질을 찾아 남미로 간 사람들은 신앙도 잊어버리고 돈도 벌지 못했습니다. 지금 남미 지역의 나라들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어렵습니까?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등의 나라들은 인플레이션과 반복되는 경제 불안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찾아 북미로 간 사람들은 신앙의 르네상스를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물질의 풍성함도 누리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영화, 과학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물질을 선택하면 물질을 얻지도 못한 채 망하지만, 신앙을 쫓아가면 신앙 뿐 아니라 물질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을 여러분들의 선택의 기준으로 삼지 말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자리로 내려가지 말고 영적인 자리로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눈앞의 이익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택일까요? 과거 LA 로고스교회에서 개척하여 섬기시다가, 지금은 LA동양선교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강준민목사님은 크리스챤들이 택해야 할 세 가지 길이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1)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선택하라
첫째로 우리는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룻은 좁은 길을 택한 여인이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민 끝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두 며느리에게 "나는 이제 고향 땅으로 돌아갈 터이니 너희들은 너희들 친정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인생을 다시 시작하도록 하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 때 오르바라는 며느리는 모압을 선택하여 그곳에 남기로 결정한 반면, 룻이라는 며느리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어머님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하시는 곳에 나도 유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입니다" 기껏해야 30대밖에 안 되는 젊은 나이의 룻이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기로 결심한 것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선택이었습니다. 룻이 선택한 길은 좁은 길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나중에 축복의 길이 되었습니다. 그녀로부터 다윗 왕이 나왔고, 나중에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족보에 오르는 엄청난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겉으로 보면 좁은 길은 실패의 길처럼 보이지만, 그 길이 성공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3절과 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오르바와 같이 넓은 길을 택하기보다, 룻처럼 좁은 길을 택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공의 길보다 사랑의 길을 선택하라
둘째로 우리는 성공의 길보다 사랑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한국에 방문했을 때, 부모님과 함께 TV 드라마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원래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데, 아버님과 어머님과 할 수만 있으면 함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대화를 많이 하기 위해서 모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드라마 이름이 ‘불꽃놀이‘라고 하는 제목의 드라마인데, 약 30분 정도 보았습니다. 그 드라마의 내용은 남자 주인공이 공인회계사가 되기까지 7년 동안이나 대학 다닐 때 학비를 대주고, 학업을 도와주는 등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자기를 뒷바라지를 해 준 애인을 배반하고, 출세를 위해서 다른 여자를 선택한다는 줄거리였습니다. 요즘 우리 주위에 이런 드라마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공을 위해 사랑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이 주위에 비일비재합니다. 더 많은 이익을 위해서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사랑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실패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남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 같이 여겼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랑에는 힘이 있습니다. 또 아가서 8장 6절과 7절에서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많은 물도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랑의 길을 선택할 때, 우리는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공의 길보다 사랑의 길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오르바와 같이 편한 길을 택하기보다, 룻처럼 사랑의 길을 택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세상 길 보다 믿음의 길을 선택하라
셋째로 우리는 세상 길보다 믿음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룻은 세상 길을 택한 오르바와 달리, 믿음의 길을 택한 여인이었습니다. 비록 그 길이 손해가 되는 길이 분명했지만, 그래도 룻은 믿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국에 가서 보니까 조금만 궁해도 로토를 긁어대고, 조금만 답답해도 점쟁이를 찾아가고, 조금만 힘들어도 스포츠 신문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를 눈이 빠지도록 살펴보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만약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급하다고 길이 아닌 길을 갈 수는 없습니다.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영혼을 팔수는 없습니다. 일이 다급하면 다급할수록, 위기가 엄습하면 할수록, 우리는 믿음의 길을 선택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적당하게 세상과 타협하는 양다리 걸치기를 하지 말고, 손해 보더라도 돌아가는 일이 있어도 우리는 믿음의 길을 선택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엘리멜렉처럼 물질을 선택의 절대 기준으로 삼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룻과 같이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택하고, 성공의 길보다 사랑의 길을 택하고, 세상 길 보다 믿음의 길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장과 자녀와 자손만대에 이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을 일으키는 믿음
룻 1장 1~18절 / 최승윤목사
오늘 설교 제목은 “가정을 일으키는 믿음”입니다. 제목 자체가 조선시대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처럼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룻기라는 책은 완전히 몰락한 한 가정이 룻이라는 이방 여인의 신앙과 순종을 통해서 다시 일어나게 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룻기 1:1절은 룻기의 시대적인 배경이 사사시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봉독).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히 타락한 상태에 빠져있었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성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있었습니다. 그러한 사사시대의 모습을 반영이라도 하듯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을 단순한 자연현상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미얀마의 사이클론과 중국의 지진 등도 어쩌다가 발생한 사건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하나님께서 온 우주뿐 아니라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사건들을 다스리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재난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개입과 다스림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일어난 자연재난은 그 이유가 분명합니다. 가나안 땅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재난, 지진이나 기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사사시대에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주어진 징계입니다. 그 징계로 인해서 이스라엘 땅에는 기근이 생겼고, 그 기근으로 인해서 약속의 땅에서 살고 있었던 한 가정이 모압이라는 이방 나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떠났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그 가정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의 이름은 엘리멜렉입니다. 엘리멜렉이란 이름의 뜻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름입니까? 그 이름 자체가 벌써 이스라엘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란 이름은 “사랑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 두 사람의 이름만을 갖고 볼 때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가정입니까? 물론 이름이 좋다고 모든 것이 좋은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부모들이 자녀들의 이름을 질 때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그 이름대로 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꾼 것이라든지,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꾼 것은 모두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엘리멜렉,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나오미, “사랑을 받은 자” 두 사람의 이름을 놓고 볼 때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단지 개인으로만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사람은 그 당시 이스라엘을 나타내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가정이 약속의 땅을 떠나서 이방 나라인 모압으로 이주하게 된 것도 재난인데 그곳에서 남편인 엘리멜렉이 죽게 됩니다. 약속의 땅 밖에서 죽은 것이지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압 땅에서 결혼한 두 아들도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죽었습니다. 나오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기둥같이 의지하고 살았던 남편이 죽은 것만으로도 절망할 수 밖에 없는데 결혼까지 한 두 아들이 죽었으니 나오미의 가정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대가 끊긴 것은 고사하고 나오미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집안, 완전히 망한 집안이 된 것입니다.
그때의 심정을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룻기 1:11절-13절을 보십시오(봉독). 완전히 망해서 돌아온 나오미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십 년 전에 모압으로 떠났을 때의 나오미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비록 기근 때문에 모압 땅으로 떠났지만 떠날 때는 초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향 땅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의 모습은 초라하다 못해 얼굴과 몸에서 가난과 슬픔에 쩌든 모습이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입니다.
나오미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멍한 상태에 있는데 그들을 향해서 나오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더 이상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 주십시요. 나는 더 이상 사랑 받은 자가 아니라 괴로운 자입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징벌하셔서 나로 하여금 빈털털이로 돌아 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나를 나오미라 부르질 말고 마라라고 불러 주십시요(20절-21절)”모압 땅으로 이주했다가 완전히 망해서 돌아온 나오미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말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망한 나오미 집안이 룻기의 마지막 부분인 4장에 가서는 그 상태가 완전히 회복이 되고, 회복될 뿐 아니라 그 이전보다 더욱 풍성한 축복으로 끝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의 집안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축복에 대해서 룻기4:1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 집을 세운 라헬과,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기를 원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입니다. 그 여인이 누구입니까? 바로 룻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룻입니다. 룻으로 하여금 대가 끊긴 나오미의 집안을 이스라엘을 세운 라헬과 레아와 같게 될 것을 축복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오미를 향해서 한 이 축복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완전히 망해서 무너진 이스라엘이 이방 여인인 룻을 통해서 다시 세워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축복 이상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룻기4:12절에 기록된 두번째 축복은 더욱 의미가 심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창 49:10절에 기록된 유다 지파에 대한 야곱의 축복의 내용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창세기 49:10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무슨 말입니까? 유다 지파를 통해서 실로가 오시기까지 ‘치리자’ 다시말해서 왕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룻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룻기 4:1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부른 찬송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오미의 상태가 대가 끊기고 완전하게 절망할 수 밖에 없었던 상태였었는데 기업무를 자를 통해서 대가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바로 이스라엘 안에서 유명한 자가 되어 생명의 회복자, 노년의 봉양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회복자”죽은 것과 같은 상태에 있었던 나오미의 가정을 다시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노년의 봉양자”의지할 곳 없는 힘없는 자를 섬기는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죽은 것과 같은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고, 힘없고 무기력한 이스라엘을 붙들어주고, 힘을 주는 그 사람, 그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룻기의 저자는 바로 다윗 왕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든 예언의 내용들을 확증해 주는 것이 4:18절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다윗 왕의 족보입니다.
완전히 망해버린 나오미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까? 룻이라는 한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룻을 통한 나오미 가정의 회복은 단지 한 가정만의 일이 아닙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의 몰락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이스라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특징을 완전히 상실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시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룻을 통해서 몰락한 나오미의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셨듯이,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룻의 자손인 다윗 왕을 통해서 온전하게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가정에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과정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나서 절망에 빠져 있는 나오미에게 제일 먼저 들려온 소식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둘째 며느리인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된 때가 바로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빈털털이가 된 두 사람의 과부가 큰 어려움없이 자신의 식생활을 마련할 수 있는 시기에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룻기 2:3절을 보시지요. 룻이 이삭을 주으러 간 곳이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인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제가 ‘우연히”라고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어쩌다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나씩 하나씩 일을 꾸미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을 때에 보아스가 굉장한 호의를 베풀게 됩니다. 룻은 자신이 이방 여인임을 밝히고 무엇때문에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지에 대해서 보아스에게 묻자 보아스는 2:12절에서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히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고 답변을 합니다.
보아스의 이 말을 룻이 그대로 받아서 3:9절에서 “당신의 옷자락으로, 날개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라고 보아스에게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빈털틸이가 된 나오미와 룻의 가정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유력한 사람 보아스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보아스는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나오미의 남편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나오미 가정을 회복시킬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 기업 부를 자 곧 redeemer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보아스를 준비시켜서 룻을 만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룻의 기업 무를 자 다시 말해서 Redeemer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아스라고 하는 redeemer를 보내 주셔서 나오미 가정의 끊어진 대를 보아스와 룻을 통해서 잇도록 해주며 그 가정을 온전하게 회복을 시키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 가정의 완전한 회복은 바로 완전히 타락해서 무너져내린 이스라엘,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되는 이스라엘로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아스라는 redeemer, 기업 무를 자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이스라엘에게 임한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러한 모든 약속과 축복이 결국 다윗 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서에 기록된 다윗 왕의 사역과 그가 통치했던 이스라엘이 얼마나 큰 영광을 갖고 번성했는지 명백하게 볼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의 사역은 결국 사사 시대에 완전히 무너진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고 견고하게 만들고 더욱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만드는 사역입니다. 그와 같은 놀라운 구원의 은혜는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유다 지파를 통해서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진정한 redeemer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했다는 것을 신약 성경은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절 이하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바로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성경의 모든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의 은총과 축복이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망가지고 깨진 사람들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신약성경은 누누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몰락한 나오미의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또한 그 가정을 통해서 몰락한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지 그 모습을 살펴 보았습니다. 비록 저와 여러분들의 가정을 나오미의 가정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일치시킬 수는 없다고 할찌라도 나오미 가정에게 허락해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가정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우리 안에 주어졌고, 또한 장래에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축복이 저와 여러분들의 가정에 계속해서 임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1:20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졌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사실을 흔들림 없이 믿고 의지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망가졌다고 하더라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곤고하고, 힘들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저와 여러분들은 종국에 가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풀어주시는 영광스러운 구원의 은총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간섭하시고, 일을 만드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구원의 은총들을 순간순간 보게 될 것입니다. 몰락한 나오미 가정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섬세한 손길로 일을 꾸미시고 인도하셨듯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로 저와 여러분들을 어루만져 주실 것입니다.
문제투성이처럼 보이는 우리의 가정을 볼 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서 도무지 숨을 쉴 수조차 없을 정도로 힘들 때 과연 저와 여러분들이 어디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막연한 기대를 갖고 사시겠습니까? 지금은 힘들지만 모든 것이 곧 좋아질 것이라는 근거없는 기대감을 갖고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이런 저런 이야기, 듣기 좋은 이야기에 위로를 얻고, 그런 말에 소망을 갖고 사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무엇이라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로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이셨다면, 그 죽은 예수를 사흘 만에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요, 그 하나님의 저와 여러분들의 생명의 회복자요, 노년의 봉양자요, 지금도 살아계셔서 크신 능력과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는 아버지시라면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못할 것이 무엇이 있으시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 다윗은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편57:2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편 48편 14절에서는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오늘도 믿고, 내일도 믿고, 영원토록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저와 여러분들을 고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줄 것이요, 그 믿음이 저와 여러분들의 가정을 하나님의 가정으로 세워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그런 믿음을 갖고 살아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룻기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행복한 결말로 끝이 났다고 해서,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서 걸어온 길이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룻은 한평생을 소망없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통해서는 더 이상 자식을 낳아서 대를 이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평생 남의 밭에서 이삭이나 주으면서 가난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나오미를 따라나섰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해진 운명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그 시대에 지켜야만 하는 관습이었기 때문에 억지로 그리했을까요? 시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혹시나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을까요?
저와 여러분들이 룻이라면 운명과 관습과 요행수와 인간에 대한 기대와 사랑 때문에 눈 앞에 보이는 고난의 길을 따라서 갈 수 있겠습니까? 과연 어느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룻의 결단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내린 결단입니다. 누가보더라도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은 가운데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 나서면서 나오미에게 고백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룻이 내린 결단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결단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열망 가운데서 내린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한평생 가난하게 산다고 하여도, 한평생을 과부로 산다고 하여도 나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겠다. 한평생을 이삭을 주워먹으면서 근근히 산다고 하여도 나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살겠다. 한평생을 고난 가운데서 산다고 하여도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 반드시 들어가겠다. 나의 몸과 영혼을 하나님 나라에 묻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룻의 이런 믿음이 바로 룻을 믿음의 여인으로, 한 가정을 일으켜 세운 여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룻을 통해서 몰락한 한 가정을 일으켜 세우셨을 뿐아니라, 그 여인의 후손을 통해서 다윗 왕을 태어나게 하시고, 또한 우리의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이런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고난 가운데서 룻과 같은 신앙의 결단을 내리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눈앞에 빤히 보이는 역경과 어려움과 고난의 길을 단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길이기에 그 길을 따라서 걸어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이 기복적이요,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요, 참된 것이요, 하나님만을 믿고 바라는 진실된 것임을 보여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 믿음을 갖지 않는한 저와 여러분들은 언제든지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갖지 않는한 저와 여러분들은 언제든지 실망하고, 낙심하고, 허우적거리며 세상적인 가치를 따라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갖지 않는 한 이 땅에서 언제나 갈등하고, 우리들의 눈은 하늘나라를 바라보지 못하고 땅과 땅에 것에만 시선을 꽂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감격과 영광과 소망을 망각하고 다른 것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이생을 마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현실적이고 기복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바로 룻이 고백한 믿음입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이 믿음은 바로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 앞에서 담대하게 외친 신앙고백과 동일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이 믿음을 갖고 사십시오. 이 믿음 저와 여러분들의 진실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나타내 보여주십시오. 만약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이 여러분들의 눈에 좋지 않게 보이거든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것, 여러분들을 좋고 유익하게만 만들어주는 신을 따라서 가십시오. 저와 제 집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부디 바라기는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모든 분들이 한 분도 빠짐 없이 룻이 갖고 있었던 믿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담대하게 선포했던 그 믿음을 갖고 하나님만을 끝까지 믿고 따라가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베들레헴 교회
룻 1장 1~2절 / 이성희목사
오늘은 우리 교회의 창립 11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우리 시대에 이런 기념일을 맞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시대에 우리 교회에 주신 책임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로서 세상에 유익을 주고 생명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갇혀 있는 교회가 아니라 영문 밖에 나가는 교회가 되어 세상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고,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고, 하나님과 성도 간의 사귐이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풍성하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교회는 세상에 있으므로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킵니다. 존 웨슬리는 “사회의 거룩한 외에 거룩함이란 없다. 기독교를 개인의 종교로 만드는 것은 곧 기독교를 파괴하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잘 기억하고 사회를 위한 거룩성을 갖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면 좋을까요? 앞으로 세 주간 동안 우리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베들레헴 교회’, ‘예루살렘 교회’, ‘안디옥 교회’라고 했습니다. 세 가지 교회의 유형을 통하여 우리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 한번 모색하고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베들레헴 교회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이런 말은 못 들어봤지요? 베들레헴 교회를 의미적으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 약 10킬로미터에 있는 도시입니다. 인구는 약 2만명 가량이며 대도시권을 포함하면 7만정도 됩니다. 해발고도가 약 800미터의 구릉지대에 위치한 고대도시입니다. 베들레헴이란 이름의 뜻이 ‘빵집’이란 이 지방의 토지가 비옥함을 의미합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왕의 고향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였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1949년 제 1 차 중동전쟁 뒤에 요르단에 속하였습니다. 그 유명한 1967년 제 3 차 중동전쟁 이후에 이스라엘이 점령하여 지금은 이스라엘의 땅입니다.
베들레헴은 집이란 뜻의 ‘벧트’와 빵이란 뜻의 ‘레헴’이 합해져 ‘빵집’이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이란 지명은 창세기 35장에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에브랏입니다. 이 도시 이름의 뜻은 빵집 혹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떡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제가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국에서 2년을 살다가 미국에 가 있는 어느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몰몬교의 선교사였습니다. 이 사람은 한국에 와서 살면서 한국말도 제법 배웠고 한국인 부인을 얻어 딸도 하나 두었습니다. 이 분이 비행기 안에서 저와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경험을 얘기하면서 한국말이 굉장히 어렵다고 했습니다. 사실 한국말은 쉽고 과학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영어는 정말 어렵습니다. 예외가 많고 발음도 어려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말은 글자만 봐도 발음은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한국말이 어렵다는 것은 글씨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말을 쓰는 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무슨 집이라고 하면 그 집을 만든 소재를 말합니다. 벽돌집은 벽돌로 만든 집이고, 돌집은 돌로 만든 집입니다. 기와집은 기와로 만든 집이고, 초가는 풀로 만든 집입니다. 이 분이 저한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빵으로 만들지 않고도 빵집이라고 합니까?” 제가 할 말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지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관습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빵집이 되기를 바랍니다. 잘 모르고 빵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베들레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에게 빵이 되고, 세상에 생명의 떡이 되기 위하여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풍성하고, 기름지고, 비옥하고, 부요하고, 늘 건강한 모습을 제공하는 세상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베들레헴은 빵집입니다.
베들레헴은 빵집이란 뜻입니다. 베들레헴은 빵을 만드는 곳이며, 빵을 공급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이 곳에서 태어나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빵집에서 태어나신 일은 선포적 의미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빵집이란 뜻이지만 양 치는 목자들이 많이 살던 비옥한 목자들의 마을입니다. 예수님이 이곳에서 어린양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십니다. 빵집에서 태어나시고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48에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나라”고 하십니다. 6:51에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잡수실 때에 빵을 쪼개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은 빵이다, 떡이다” 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십니다. 떡을 떼어 주시며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받아먹어라”고 하십니다. 몸을 주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40년 동안 먹은 음식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은총의 음식입니다. 만나는 건조한 광야에 새벽에 쌓인 식물이었습니다. 처음 맛보고 ‘이게 뭐야?’(man hu?)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만나는 모아서 빵을 만드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린 떡’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늘에서 빵을 내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적인 필요를 채우십니다.
여러 해 전에 북한에 빵 공장을 세워주러 갔습니다. 그들에게는 빵이 중요한 음식입니다. 특히 그 곳에서 만든 빵은 어린이들에게 제공되었습니다. 빵을 만들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보냈습니다. 반죽하는 기계도 보내고, 굽는 기계도 보내고, 배달하는 차도 보냈습니다. 빵을 만드는데 필요한 밀가루, 달걀, 설탕, 버터까지 다 보냈습니다. 반죽할 때 쓰는 물 빼놓고는 다 보냈습니다. 빵을 만들고 제공하는 것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존 수단입니다. 빵을 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육신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그래서 가장 많이 염려한다는 말입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먹을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4:15에는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다고요? 아무 것도 먹을 필요가 없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 곳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먹는 일은 있을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삼순이의 직업은 ‘파티쉐’라고 합니다. 말이 거창해서 그렇지 빵 만드는 사람입니다. 영어로는 ‘베이커’인데 ‘파티쉐’라고 하니 유식해 보이지요? 우리나라에서 파티쉐가 되기 위해서는 6개월정도 학원에서 공부하면 제빵사 자격증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요즘은 파티쉐도 상당한 인기 직종입니다. 삼순이 때문에 더 인기가 높아진 것 같습니다. 그 후에 제과와 제빵이 날개 돋치듯 인기가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빵도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가 빵집의 파티쉐입니다. 베들레헴 교회의 파티쉐들입니다. 빵을 만들고 제공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빵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모양에 따라, 용도에 따라, 재료에 따라, 빛깔에 따라 빵의 종류가 달라지는데 빵의 종류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빵이 나오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제공해주는 은혜가 이렇게 많습니다. 그 종류도 헤아리기 힘듭니다. 지금도 세상에 주어야 하는 우리의 빵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빵은 생명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입니다. 생명을 공급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10에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빵을 주는 것은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을 지향하는 교회는 빵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주고 풍성하게 해야 합니다.
둘째, 베들레헴 교회는 생명의 빵을 제공하는 교회입니다.
베들레헴은 빵집이란 뜻입니다. 생명의 빵을 제공하는 곳이 교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를 가지시고 축사하셨습니다. 빵을 주시는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목적은 빵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빵을 제공하는 삶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는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 때 떡 가져가기를 잊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은 빵을 잊은 것을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떡 다섯개로 5천명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개로 4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빵집인데, 예수님이 빵공장인데 무엇 때문에 걱정하느냐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풍성한 빵을 공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오천명을 먹이실 때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왜 주라고 하십니까?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주라고 하십니까? 비록 아무 것도 없지만, 비록 가난하지만 주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마음이 있으면 해결하게 하십니다. “너희가 줄 마음이 있으면 빵은 내가 주겠다”고 하십니다. 성 프랜시스가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빵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7:9에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고 하십니다. 떡을 달라고 하면 떡을 주십니다. 빵을 달라고 하면 빵을 주십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교회도 빵을 달라고 하는 사회에 대하여 빵을 공급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베르자예프는 말했습니다. “내가 먹는 빵은 하나의 물질이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빵은 영적인 것이다”.
얼마 전에 신문에 보니 “남편을 남의 편 만들지 말고 내 편으로 만들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잘못하면 남의 편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내 편보다 더 좋은 것이 우리 편입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빵을 제공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선별하지 말고 빵을 주고, 생명을 주어야 합니다.
이사야 55:2에는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특히 교회는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이들에게 배부르게 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8억 5,000만 명이 굶주려 있다고 합니다. 유럽 대륙의 미식(美食)으로 나빠진 위장의 치료비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에게 충분한 빵 값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 소모되는 다이어트 비용을 다 쓰면 세계의 기근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인들이 다이어트에 돈을 얼마나 쓰는지 아십니까? 헬스클럽에 120억 달러, 개인용 운동기구에 60억 달러, 체중 감량 센터에 8억 달러, 건강 다이어트 서적에 4억 4400만 달러, 연간 약 200억 달러를 쓰고 있습니다. 인간이 시도한 다이어트 방법도 총 28,00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보세요. 부자는 나사로에게 빵 한 조각을 거절하였고, 그래서 부자는 물 한 방울을 거절당하였습니다. 빵을 주는 자는 물도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동정도 사랑도 얻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교회가 베들레헴 교회입니다. 빵집 교회입니다. 베들레헴에 가시면 구유교회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을 기념하는 교회입니다. 생명의 빵이 태어나신 교회입니다. 생명의 빵을 제공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는 아낌없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빵을 쪼개듯 자신을 쪼개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빵의 수가 늘어날 것입니다. 포도주를 따르듯 자신을 따르십시오. 그러면 자신도 잔치를 즐기게 될 것입니다.
결론
룻기의 이야기는 감동이 있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의 가족입니다. 그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녀에게는 말론과 기룐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어 두 아들과 함께 모압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거기에서 오르바와 룻이라는 두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에 룻만 따라왔습니다. 룻은 보아스를 만나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는 메시아적 로맨스입니다. 빵집에 빵이 없어서 모압으로 간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빵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이나, 심령술사나, 점쟁이를 찾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살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곳에 가서 위로를 얻고 살려고 바동거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빵을 제공해야 합니다. 빵을 제공하여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살려야 합니다.
지난 총회 때에 제법 배가 나오고 거구인 후배 목사님들이 여럿이 둘러서서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나가니까 어떤 목사님이 “목사님, 베들레헴회 모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하고 제가 의아해했습니다. “배 둘레가 햄인 똥배 모임입니다”라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풍성합니다. 빵이 풍성합니다. 베들레헴은 원래 배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빵의 도시”, “떡의 마을”이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빵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그 빵을 쪼개어 줍시다. 아무리 퍼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됩시다. 아무리 많이 떼 주어도 바닥나지 않는 빵집이 됩시다. 육으로도 영으로도 먹이는 교회가 됩시다. 세상에 생명을 주고 풍성히 줄 수 있는 교회가 됩시다.
111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가 생명이 풍성한 베들레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불신앙을 신앙으로
룻 1:1-5 / 안양준목사
룻기서의 배경은 1절에 기록된 것처럼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입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를 ‘사사시대’라고 부르는데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사사기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40년의 광야시대를 거쳐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가 생존할 때까지를 가나안 정복시대라고 부릅니다.
그후 이스라엘에는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태평의 시대가 찾아왔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바로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수 24:31을 보면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광야시대를 제1세대, 여호수아와 그와 함께 했던 장로들이 생존하던 시대를 제2세대, 그리고 이후의 시대를 제3세대, 그리고 다른 말로 사사시대라고 부릅니다.
제3세대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은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범죄-징계-구원-타락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다른 민족을 통해 하나님이 징계하셨고 하나님의 징계가 너무 심해 백성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를 통해 구원하시고, 태평의 세월이 오면 또다시 범죄하고 다시 징계와 구원, 타락의 사이클이 계속해서 반복되던 시대였습니다.
룻기서도 이런 상황 속에서 씌여진 책입니다.
룻 1:1에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 왜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까?
그 이유는 룻 1:1 바로 앞 구절이 삿 21:25인데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 땅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데로 행할 때 하나님의 징계로 흉년이 임한 것입니다.
1. 한 가정의 불행
룻기서는 사사시대 때 베들레헴에 살던 한 가정을 중심으로 쓰여진 이야기입니다.
이 가정은 2절에 ‘베들레헴 에브랏’에 살았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에브랏은 ‘풍성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 가장이 엘리멜렉이란 사람인데 엘리멜렉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란 뜻입니다. 얼마나 신앙적인 이름입니까?
아무 것도 부족할 것이 없어보이는 그런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문제는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들이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유하더니”
그때부터 이 가정에 불행이 찾아옵니다.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마저도 죽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 모두 잃었습니다. 고향 땅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룻이 이삭을 주운 것으로 먹고 산 것을 보면 물질적으로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2. 왜 이런 불행이 찾아 온 것입니까?
1) 베들레헴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 가정은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품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흉년이 찾아왔다고 가족을 이끌고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땅인 모압으로 갔다는 것은 아주 경솔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는 고백적인 이름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살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 있는 가난보다 하나님 없는 풍요를 선택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땅에 흉년이 들 수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으니 하나님의 기업도 중요하고, 하나님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당장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이런 선택을 하면서도 성경을 보면 조금도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흉년이 들자 곧바로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으로 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성도들도 환경 때문에 자신에게 다가온 여러가지 어려움 때문에 믿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상을 향해 나가지 않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끝까지 붙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의 가정은 믿음의 가정이 넘어서는 안될 선을 쉽게 넘어버린 겁니다.
에서가 배고프다는 이유 때문에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었습니다. 배가 고프다고 장자의 명분까지 팔아먹어도 되는 겁니까? 성경은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합니다.
탕자의 비유를 보면 제 멋대로 살아보겠다고 아버지의 품을 떠났을 때 모든 재산을 탕진해버리고 나중에는 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는 비참한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좀 어려움이 있다고, 좀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은혜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 아닙니까?
결국 10년만에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게 어디 있습니까? 타향에서 남편을 잃고, 두 아들마저 잃어버린 여인이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그럴려고 모압으로 갔습니까? 흉년을 피해 잘 살아볼려고, 성공해 보려고 갔지만 자신들의 꿈꾸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인생이 흘러가지 않습니까?
2) 하나님의 징계를 세상적인 방법으로 피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흉년은 하나님이 징계의 도구로 자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가나안 땅에 나타난 흉년도 사사시대에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내린 징계입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흉년은 자연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은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볼 수 잇어야 합니다. 사사기를 읽으면 그들의 타락이 말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기근이 온 것은 회개하라는 신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징계를 세상적인 방법으로 피하려고 하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모압이 어떤 곳입니까? 모압 평지는 아르논 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들판으로 풍요롭게 보이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가면 믿음이 병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할 때 모압은 이스라엘에 행음케 하여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절하게 하고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셔서 염병이 돌아 죽게 하지 않았습니까? 모압은 몰록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몰록에게 제사를 지낼 때 자기 자녀를 불에 태워 제사하는 인신제사를 드리는 나라가 모압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징계로 흉년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베들레헴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 가족만 잘 살겠다고 우상숭배가 심한 모압땅으로 간 것입니다.
3) 징계를 받고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절에 엘리멜렉은 얼마 안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나오미가 신앙이 전혀 없는 여인이었다면 남편이 죽은 것이 병들어 죽은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었다면 남편이 죽음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깨닫고 회개했다면 그때 베들레헴으로 바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모압 여인들을 며느리로 맞아 들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금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행하지 않습니까?
그 결과 두 아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의지할 것도 없고, 기대할 것도 없이 만들어 버렸습니다. 올 데까지 온 것입니다.
월터 스토프란 사람이 쓴 『아버지의 통곡』이라는 책에 보면 아들이 등산을 갔다가 사고로 죽어 슬퍼하는데 사람들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의 아들은 나중에 천국 가면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모든 슬픔을 이겨내십시요.”
그런 위로를 들으면서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마세요. 내가 슬퍼하는 것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 지금 내 앞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니 제발 그런 말을 하지 마시고 차라리 그런 말을 하려거든 ‘무슨 말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라고 말하세요.”
나오미의 슬픔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녀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을 만날 때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모두 아들, 딸이 아닙니까? 그렇게 돌이키게 하려고 애를 써도 돌이키지 않는 그 마음이 더 강팍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깨닫고 축복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호 6:1에 “오라 !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3. 축복된 삶으로
이제 나오미의 결단만 남았습니다.
자신에게 아픔과 상처만 남겨준 땅! 이 땅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모든 비난과 조소를 무릎쓰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것인가?
다시 돌아간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에 돌아갈 때 19절을 보면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었다”고 했습니다. “야! 이가 나오미가 아니냐?”
그때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원래 ‘기쁨’이라는 뜻의 나오미가 ‘쓰다’는 의미의 마라로 불려지기를 원합니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인생의 아픔을 그대로 나타냅니다.
나오미는 어쩌면 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사사시대처럼 영적으로 혼란한 시대가 아닙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자기 소견에 옳은데로 행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 흉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정말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에 몇 만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들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다이어트한다고 밥을 먹지 않지요. 살을 빼려고 수영장가고 에어로빅하고…. 먹을 것이 넉넉한 것에 대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흉년이 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징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IMF보다 더 큰 어려움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럴때 엘리멜렉의 가정처럼 모압 땅으로 갈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21절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미국 월터 크레임이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소아마비를 앓고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손가락 하나 밖에 사용할 수 없는데 절망하지 않고 그 손가락으로 녹음기의 단추를 누르며, 전국에서 보내오는 편지에 답장을 보내기도 하고, 책장 넘기는 기계까지 만들어 독서를 합니다.
이 청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소아마비에 걸리기 전에는 지금처럼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산소 호흡기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정말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 전과 다르게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전과 다르게 사는 법이 중요합니다. 정말 인생에 귀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지혜가 있기 원합니다.
룻기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의지하던 나오미의 가정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을 때 얻게되는 축복입니다. 룻기가 비극적인 책입니까? 아닙니다. 희망을 말하는 책입니다. 아픔이 아니라 위로요, 새 힘을 얻게 하는 책입니다.
룻기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룻입니까? 나오미입니까? 엘리멜렉입니까? 아닙니다. 비록 4: 끝에 작게 두 번 기록되었지만 다윗이 룻기의 주인공입니다.
룻기가 쓰여진 목적은 사무엘서를 열어갈 다윗 왕조의 시작에 다윗 왕의 조상의 신앙을 보여줌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려는 의도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앞에 온전한 신앙을 갖기를 원합니다. 만약 나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하다면 이제라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룻기 서론: 헷세드
룻 1장 1~6절 / 류영모목사
I. 서론
세종 때 이씨 왕조의 창업 이념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용비어천가”가란 작품이 있다. 이 글은 태조 이성계 이전 조상들과 앞선 왕들의 행적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대 중동에서도 한 왕조를 창업한 왕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때 그 가문에 얽힌 일화를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하곤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룻기는 세종의 용비어천가처럼 전혀 의도된 조작이나 미화가 없지만 “다윗 왕조의 용비어천가”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룻기는 언제쯤 기록이 되었을까요?
룻기는 마지막에 기록된 족보에 보면 솔로몬의 이름은 아직 없고 “이세는 다윗을 낳았더라”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룻기가 다윗 왕때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글이 다윗 왕가의 용비어천가라면 적어도 흉년을 피해 도망갔다가 저주 받아 죽은 조상 얘기는 아니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룻기는 한 가문의 이야기에 머물지 아니하고 신약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룻기의 족보는 신약 마태복음 족보로 연결되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룻기를 읽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어떤 역사를 행하셨는지 ‘구속사적 관점’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 - 구속사적 관점을 놓치고 룻기를 읽으면 독자들은 룻기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혼동을 겪게 됩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도피하는 과정에서는 엘리멜렉이라는 가장이 주인공으로 등장됩니다.
모압 땅에서 엘리멜렉은 죽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는 그의 아내 나오미가 주인공 역할을 합니다. 룻기라고 책의 이름이 되어 있으니 당연히 룻이 주인공이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후반부에서는 룻의 남편 보아스가 주인공이 되어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가 됩니다.
여기서 룻기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룻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룻기를 읽을땐 사건 배후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룻기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룻기에서는 1:8, 2:20, 3:10 세 번 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헤세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이념입니다. 헤세드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자비, 선대, 은혜, 인애라는 뜻으로 본문에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보호, 나와의 따뜻한 교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고난당한 한 가정을 향한 헤세드가 오늘 나에게도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헤세드가 없이 어찌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를 룻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룻기의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사사기에서 국가를 상대로 역사 하시던 하나님이 룻기에 와서는 한 가정,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운행하시지만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 내 머리털 하나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한 민족의 부르짖는 회개에도 귀를 기울이시지만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룻기를 일컬어 성서학자들은 인류가 낳은 최고의 단편 문학 혹은 사사기 그리고 사무엘서라는 딱딱한 조개껍질 사이에 끼어 있는 ‘영롱한 진주’라고 찬사를 보냅니다.
룻기는 히브리인들에게 참 사랑받는 책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추수를 다 끝내고 가정에서 가족이 모여 앉아 룻기를 읽곤 합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절기 때 읽는 메기로스(megilloth)라 불리는 두루마리 책이 있습니다. 거기엔 아가, 애가, 전도서, 에스더서 그리고 룻기 등 다섯 권의 책이 들어 있습니다.
룻기는 4장 85절로 구성된 짧은 책입니다. 85절 중 절반이 넘는 45절이 대화체로 되어 있어 룻기를 읽을 때 사람들은 배역을 정해 입체적으로 읽곤 합니다.
룻기에 기록된 이야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일어난 일이라고 본문 1:1 서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12사사 중 어느 사사가 치리하던 때 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 싸이클이 있습니다. “범죄 → 징계 → 회개 → 평안”입니다. 본문의 이야기가 모진 가뭄과 흉년의 때에 일어난 것을 보면 사사기 싸이클 중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상황인 것 같습니다. 룻기는 흉년만나 큰 불행을 겪고 있는 한 가정을 하나님이 어떻게 돌보시는가 하는 얘기입니다.
II. 흉년을 만났을 때
지금부터 우리가 듣게 되는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 얘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룻기가 기록될 무렵에도 벌써 옛날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옛날 얘기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화롯불가에서 어릴적 할머니에게 듣던 옛날 얘기는 무조건 재미가 있었습니다. 옛날이라고 하면 무조건 좋았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 아 옛날이여 아름다운 그 시절 다시 돌아올 수 없나.
3000년도 더 된 이 옛날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흉년이 들어 굶어 죽게 생긴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먹을 것을 찾아 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이 모두 죽은 시어머니와 두 젊은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그 땅이 어떤 땅입니까?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를 것이라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가나안 땅입니다. 약속의 땅에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만사형통이어야지 왜 고통이 오느냐고 항거합니다.
약속의 땅에 왜 고통이 오느냐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누가 그렇게 약속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고난이 면제되었다고 성경 어디에서 그렇게 말했습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아니 인류 역사상 모든 사람들은 흉년을 만났습니다. 고통을 겪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느니라”
약속의 땅 가운데서도 이곳은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란 뜻입니다. 이곳은 곡식 수확이 풍부하고 농토가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시루떡을 쌓아 놓은 것처럼 되어 있어서 “떡집” - 베들레헴이라 불려지게 된 것 같습니다. 떡집에 떡이 사라졌습니다. 약속의 당에 약속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왕이 없었으므로 각 자 제 소견에 옳은대로 살았다!” 이게 흉년입니다.
흉년을 만났을 때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합니까?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모압 족속은 이스라엘 사람들 보다 1300년 전 가나안 땅에 먼저 들어와 살던 원주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에 거짓 선지자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원수 족속이 모압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규정한 족속입니다. 사사기에서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 모압왕 거구 에글론을 화장실이 있는 다락 난간에서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있었지요. 쌩똥 싸고 죽은 왕을 기억하시지요. 그 나라가 모압입니다. 그런데 나오미 가족이 지금 그곳 모압으로 갔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산골마을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흉년 보릿고개를 몇 번 넘어 봤습니다. 사람들은 깊은 산에 들어가 칡뿌리를 캐 먹고 들판에 흩어져 쑥과 나물을 캐다 끼니를 때우고 우리네 부모님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떡을 해 먹었습니다. 하물며 3000년전 팔레스틴 농경사회, 유목사회에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었다면 그 고통이 오죽했겠습니까?
오늘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흉년은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을 잃어버려서 가족의 생계가 막막해 지신 분들, 사업에 실패해서 사채 따위로 전전긍긍하시는 분들, 경제적인 흉년을 만난 것이겠지요.
건강에 자신감을 잃어버려서 ‘이러다 잘못되는 것 아니야’,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의사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에 건강의 흉년이 온 것이지요.
행복했던 가족관계가 깨어지고 부부관계 혹은 부모자식 형제들의 관계가 깨어졌습니까? 교회 안에서 함께 사랑해야 될 우리 형제 자매들, 목장안에 가족들, 같은 사역팀 안에 관계가 사소한 말다툼이나 의견차이로 점점 골이 깊어져서 이제는 대화가 안되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까? 인간관계에 흉년이 온 것이지요.
예배를 드려도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말씀이 읽기 싫어졌습니까? 분명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해야 되겠는데 기도의 문이 막혀져 버렸습니까? 내 영적인 향상이 사라져버렸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신앙생활의 흉년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이때 흉년을 긍정적으로 직면하고 해결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못한 것 같습니다. 될 때로 되라 포기해 버리곤 합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문제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사이 점점 악화되어져만 갑니다. 환경을 바꾸면 해결되겠지 도피해 봅니다. 보기 싫은 사람 나 안보면 그만이지. 도망갑니다. 때로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인생의 난제 가운데 하나가 왜 인생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예수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왜 흉년이 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① 하나님의 징계로 고난이 올 때가 있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지고 건강에 이상이 오고 영적인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내가 잘못한 일이 없는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자세이지요.
② 고난 가운데 내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는가? 내가 가진 신앙이 참된 신앙인가? 테스트 하기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③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싸인으로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탕자는 고난을 당했을 때에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고 아버지께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고난이 가져다 주는 유익입니다.
④ 고난은 하나님의 훈련 방법 중 하나입니다.
고난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에 누군가 고난을 겪고 있다면 너무 쉽게 그 사람을 동정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지금 그 사람을 다듬고 있는 중입니다. 그의 인격과 신앙을 만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맑아지고 깨끗해지는 순간일 수 있는 것이지요. 고난이 유익이라.
III. 남겨진 여인들(하나님의 헤세드)
흉년을 만나 그 사람은 모압 평원을 찾아갑니다. “거류 했다”는 말은 잠시 머물며 흉년도 피하고 돈도 벌어 금의환양하겠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홀로 모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아내와 두 아들을 함께 데리고 떠납니다.
1절만 읽어보면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사람의 이름이 안나옵니다. 그래서 궁금해하는 독자들에게 2절에서 한꺼번에 이름들을 다 가르쳐줍니다. 2절에서는 이름이란 히브리어 “쉠”이란 말이 세 번씩이나 반복되며 네 가족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가장의 이름은 엘리멜렉입니다. 엘리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이고 “멜렉” 왕이라는 뜻입니다. 상당히 지위에 있었던 이름입니다. 전체를 붙혀보면 “나의 하나님은 왕이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왕이 없던 사사시대 이런 이름을 가진 것이 특이합니다.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인데 1:20에 나오미 이름을 가지고 언어유희를 합니다. “나를 나오미 - 즉 기쁨, 희락이라 부르지 말고, 마라 - 즉 괴로움, 슬픔이라 부르라” 이처럼 나오미는 기쁨이란 뜻입니다.
반면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입니다. 이름의 뜻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히브리어 이것 저것을 끌어다가 말론은 “병약한” 기룐은 “쇠약한”이란 뜻을 가졌다고 나쁜 쪽으로 풀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일찍 병들어 죽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연구는 잘못된 연구입니다. 그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일찍 죽으라고 이런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성경을 연구하다가 잘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게 정답입니다. 억지로 갖다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나중에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 며느리가 나오는데 이들의 이름의 뜻도 모른다는게 정답입니다. 구태여 오르바(돌아가는 자)는 나쁜 쪽으로, 룻(귀여운 여친, 우정)은 좋은 쪽으로 갖다 부칠 필요가 없습니다.
룻기 저자는 이 사람들을 소개하고 중요한 설명을 한 마디 2절에 남깁니다.
“(이들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미가서 5:2에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 바로 이곳 베들레헴 에브랏에서 바로 이 사람들 룻의 족보를 타고 이 땅에 태어나십니다.
살아보기 위해서 낯선 땅을 찾아갔던 이 가정에 3절, 5절에서 부고장이 날아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가장 엘리멜렉 그리고 두 아들이 차례대로 죽습니다. 성경은 이 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몇 살에 죽었는지, 병들어 죽었는지 사고로 죽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해설가들은 기도하지 않고 도망갔다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 죽은 것이라고 열을 올려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자들에 대한 너무 잔인한 해석입니다. 물론 흉년이 들었다고 너무 쉽게 약속의 땅을 떠나 이방 땅으로 간 것은 잘한 일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도망가는 방법은 언제나 잘못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지요.
그러나 룻기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룻기가 이 사건을 소개하고 남긴 해설은 혼돈없이 분명합니다.
3절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5절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는 것입니다. “남았다”는 말이 핵심입니다.
우리 메시야의 조상은 이방 땅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다가 어떤 억울한 일,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었고 여인들만 버려졌습니다. 남편이 가족을 살려보겠다고 몸부림하다 죽어갈 때 그 고통을 성경은 침묵합니다. 자식잃은 어미의 통곡, 남편 잃은 두 자부의 절규도 침묵합니다. 유족들의 찢어지는 가슴과 그 막막했던 상황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다만 룻기 저자는 “남았다”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함축하고 지나갑니다. 과부가 두 아이를 키우는 고통스런 이야기도 담아놓지 않았습니다. 장가를 보낼 때 그 상황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역사 두 아들이 죽은 다음 여인들만 남았더라고 설명합니다.
이방 땅에서 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독자들의 상상에 대담하게 맡겨버립니다. 왜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놓칠까봐서 그렇습니다. 텅빈 지구 한 모퉁이에 남겨진 이 과부들! 버려진 이 여인들! 사람의 손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진 이 과부들은 이제 하나님이 돌보실 차례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역사하실 차례입니다. 이것이 룻기의 주제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돌보심이 나타날 때입니다.
룻기 저자는 이 가족이 모압으로 가서 벌받아 죽었다고 열을 내지 않습니다. 후대 해설가들이 그렇게 정죄하는 것 뿐입니다. 오히려 룻기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율법이 규정한 모압 여인을 다윗 왕의 할머니로 받아들입니다. 불쌍한 이 여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간섭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왜요? 우리같은 이방인들, 이방 땅에 버려진 백성을 당신의 자녀로 받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IV. 슈브(돌아오라)
불쌍하게 남겨진 세 여인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는가 하는 것이 바로 그 다음절 6절 말씀입니다.
6절 말씀에 보면 세 가지 중요한 동사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듣다”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기쁜 소식을 듣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소식을 들었습니까? “그 여인이 모압지방에서” 즉 버려진 그 땅에서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단순히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우리 백성을 찾아오셨다! 여호와께서 다시 우리 백성을 품에 안으시고 돌보신단다!
이것이 사건을 보는 신앙인의 안목입니다. 우리 눈에 양식만 보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돌보심 - 헷세드가 보여야 합니다.
둘째 “일어나다”라는 단어입니다. 물론 이 말은 어떤 행동을 시작하는 관용적 표현이지만 이 여인들이 슬픔과 고통의 자리를 툴툴털고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누워서 못 일어나면 그건 죽는 일입니다. 일어나면 삽니다. 기독교는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를 사자성어로 고쳐보라고 했더니 젊은이들이 “기립발광”이라고 했답니다.
예수님은 서서 우리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도 십자가 위에 서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에 일어나셔서 순교하는 스데반을 응원하십니다.
일어나면 삽니다.
셋째 “돌아가다” - “슈브”라는 단어입니다.
6절 이하 1장 전체에서 이 “슈브”라는 단어가 무려 12번이나 나옵니다. 1장 전체에서 너는 모압으로 돌아가겠느냐.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내게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손짓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옛날 하나님의 첫사랑이 보입니까? 돌아가십시요. 그 옛날 하나님을 섬기던 그 행복했던 순간이 기억나십니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룻기 기자는 6절에서 이 중요한 동사들을 사용하면서 재미있는 동사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일어났다. 돌아오려 했다라는 동사를 단수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분명 주어는 나오미와 두 며느리입니다. 주어는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를 사용하는 이 동사놀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성경에서 삼위일체처럼 셋인데 하나인 경우 단수가 따라오곤 합니다. 그렇다면 나오미와 두 며느리는 한 몸, 한 마음 같이 “함께 일어났다. 함께 돌아오려 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또 다른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작 일어나 돌아와야 할 사람은 나오미 한 사람 뿐입니다. 두 며느리는 모압 사람이기 때문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지요. 그냥 묻어 가는 거지요.
돌아온다 “슈브”라는 말이 회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면 정말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사람은 나오미입니다. 지금 룻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자가 구원의 족보에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헷세드에 의해 무조건 용납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룻기의 주제입니다.
떠난 자를 한없이 기다려 주시고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헷세드!
도와줄 사람 하나 없이 이 땅에 남겨진 자들을 돌보시고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헷세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를 무조건 받아 주실 뿐만 아니라 다윗 왕가를 이룰 수 있도록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주시는 헷세드!
가족은 너를 버렸으나 하나님은 너를 새로운 가족으로 품어주시는 그 놀라운 헷세드!
한 절 한 절 감격이요 감사뿐입니다. 한 순간 한 순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칩니다.
헷세드!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차원입니다. 제한이 없는 은혜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
룻 1장 1~6절 / 손상률목사
하나님의 자녀는 존귀한 신분이지만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햇빛과 비도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 다 같이 누리는 것처럼(마 5:45), 세상이 주는 시련과 고난도 예외 없이 당하곤 합니다. 본문 성경에 나오는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의 표본입니다.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고, 하나님으로부터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었음에도 그들이 겪은 시련이나 환난은 세상 어느 사람과 다름없는 체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사(士師)시대의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1절에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라고 하였습니다. 사사시대는 여호수아 이후 사무엘 때까지 약 300년(BC 1,400-1,100)에 이르는 기간으로써 이스라엘 왕국이 수립되기 이전의 과도기에 해당합니다.
1) 왕이 없는 시대입니다.
사사기 성경의 기자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습니다(삿 17:6, 18:1, 19:1, 21:25). 이는 지도력의 공백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야곱같은 족장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직접 상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국가형태의 큰 집단이 되었을 때는 모세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통치하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죽은 다음은 여호수아가 지휘봉을 이어받았습니다(신 34:9, 수 1:1-9). 그러나 여호수아 사후에는 정상적인 지도 체계가 없이 무정부 상태의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14명의 사사가 일어나서 일정 기간 동안 백성을 다스렸으나 그가 죽고 나면 이웃 부족들에게 짓밟히는 등 불행을 겪곤 하였습니다.
2) 자기 소견대로 살았습니다.
사사기 17:6에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좋을 대로 행동했다는 것은 방종(放縱)을 뜻합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범이 있고, 그 원칙에는 누구나 다 지배를 받아야만 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동한다면 질서는 없어지고 백성들은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이스라엘에 마지막 사사인 삼손이 죽은 다음 제사 행위의 근본이 무너졌습니다. 미가의 집에서는 산당에 우상을 만들어 놓고, 자기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섬기게 하였습니다(삿 17-18장). 사사시대 말기에는 베냐민 지파 기브아 사람들의 음행이 있었고 이로 인해서 골육상잔의 피흘리는 전쟁으로 얼룩졌습니다(삿 19-21장).
3) 말세적 현상의 모델입니다.
사도 바울은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고 하였습니다(딤후 4:3-4).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도 하나님 말씀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처럼 된다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분수를 뛰어넘는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가족 공동체를 비롯하여 어떤 사회나 단체라도 구성원이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행동한다면 모두가 공멸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교회운동은 하나님 중심의 지도력에 따라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기관입니다.
2.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1절에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 하였는데”라고 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으로서 매우 유서 깊은 고장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그곳 사람이라는 것은 신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1) 언약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인물이나 사건, 지명까지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상징적 계시입니다. 구약의 대표적 인물인 다윗이나, 그의 고향 베들레헴도 예수님의 탄생지로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삼상 16:4-13). 이 사건에 근거하여 선지자 미가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미 5:2).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고향 이지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탄생지입니다. 여기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는 말씀은 영원하신 왕 예수님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요 1:1-2).
2) 축복이 보장된 사람입니다.
베들레헴(םת)이라는 히브리말의 뜻은 ‘떡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데 가장 필요한 양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여행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하늘의 양식 만나를 내려 먹여 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모세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신 8:3).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군중을 먹이신 다음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 6:48-51). 결국 ‘떡집’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며 거기에 속한 사람은 그의 말씀으로 양식을 삼아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베들레헴이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의 땅이 되는 것은 예수님과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요, 축복이 보장된 사람입니다. 성도가 누리는 축복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그 이름이 이와 같은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라는 뜻이며, 아내 ‘나오미’는 ‘희락’ 곧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풀이하면 하나님을 자기의 왕으로 모시고 항상 기쁘고 즐겁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참으로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묘사한 이름입니다. 솔로몬은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 먹고 마시는 것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전 3:13).
3.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생이 다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롬 11:36). 이 엄연한 진리를 망각하게 되면 삶의 방향을 그르칩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하여 그들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1) 시련을 겪으면서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흉년을 피하여 모압으로 이사갔다가 큰 낭패를 당했습니다. 3절에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으며”라고 했습니다. 5절에는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년 즈음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고 하였습니다. 모압은 ‘그모스’ 우상을 신으로 섬기며 하나님과 대적이 된 백성입니다(느 13:1-2). 엘리멜렉처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될 사람이 물질적 번영을 목적으로 신앙적 본분을 망각하게 되면 거기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고 맙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 앞에서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고 하였습니다(1:13).
2) 절망적인 상황에서 발견합니다.
모압 생활 십년동안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낭패와 실망을 안고 베들레헴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는 두 자부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나오미가 하는 말은 자기의 태중에 그들의 남편이 될 아들들이 없다고 했습니다. 설령 오늘밤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릴 수 없지 않느냐?고 하였습니다(11-13절). 정말 피 맺힌 절규입니다. 이와 같은 고백은 자기의 인생이 자기의 의지에 달려 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실증하는 내용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오미처럼 인생의 모진 고비를 겪으면서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이 사실을 발견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벼랑 끝으로 몰렸을 때,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게 하십니다(욘 2:7-9).
3) 하나님의 목적을 보고 알게 됩니다.
밧모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환상을 보았습니다(계 1:13-16). 환난이 극심하고 성도가 여간한 시련을 당해도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그 손안에 붙잡고 계십니다. 이사야 49:16에는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였습니다. 나오미의 경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길을 가다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징계를 받았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의 애정과 관심의 표현입니다(히 12:6). 이사야 41:10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손 안에 붙잡으시고 그의 목적을 이루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