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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샤흐리삽스)
사마르칸트 (우즈베키스탄) | 호텔 조식 후
사마르칸트 출발 / 샤크리샵으로 이동 (약 3시간 30분 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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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크리샵 (우즈베키스탄) | 티무르의 고향 샤크리샵 도착 및 관광
오아시스의 도시 부하라로 출발 (약 5시간 소요) |
우즈베키스탄 샤크리샵
티무르가 태어난 곳이다.
티무르
1.이름
티무르( 1336년 4월 9일~1405년 2월 18일; 페르시아어: تيمور Tīmūr/Taymūr; 우즈베크어: Amir Temur ko‘ragoniy ibn Amir Tarag‘ay ibn Amir Burqul)는 중앙아시아의 몽골·투르크계 군사 지도자이며,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재위: 1370년 ~ 1405년)이다. 그의 이름은 본래 투르크·몽골어계 인명인 테무르이나, 그것의 페르시아어형인 티무르라는 표기로[2] 더 많이 쓰인다. 유럽권에서는 태멀레인 또는 타메를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티무르’는 몽골어 ‘테무르Temür(현대 우즈베크어로는 ‘Temur’)’의 이란어형이다.[2] 테무르는 철(鐵)을 의미하는 몽골어에서 나온 것으로, 투르크-몽골인들의 이름에 흔히 사용되었다. 철(鐵)이라는 뜻의 테무르는 현대 투르크어에서 테미르(temir)로 변형되어 그대로 통용되고 있고 남성의 이름에 자주 사용되고 있다. 티무르의 시대의 투르크-몽골의 전통은 칭기즈 칸의 후예가 아닌 사람이 칸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칸을 자칭할 수 없었다. 그는 대신 ‘아미르’(지휘관)라는 호칭을 사용했고, 때때로 그 앞에 ‘부주르그buzurg’ 또는 ‘칼란kalān’, 즉 ‘위대한’을 붙여 ‘위대한 아미르’라 했다.[3]
그가 칭기스 칸의 후손들을 허수아비 칸으로 세워 그의 이름으로 통치한 뒤에는 ‘부마‘(몽골어: хүргэн /kürügän/)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는 ‘사위’라는 의미인데, 그가 칭기스 가문의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이런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다.[3] 티무르의 후손들인 무굴 제국의 군주들은 이를 근거로 스스로의 왕조를 ‘구르칸Gurkān(‘후르겡’의 이란어형) 왕조’라고 불렀다.[4]
이란의 사서들에서 그는 티무리 랑(페르시아어: تيمور لنگ Tīmūr-i Lang)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절음발이 티무르라는 의미이다. 그의 적들은 그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싶을 때 그를 이렇게 불렀다. 유럽에서 그를 부를때 사용하는 태멀레인(Tamerlane)은 ‘티무리 랑’의 변형이다.
2.배경
1340년대 차가타이 칸국은 동과 서로 분열되었다. 마 와라 알나흐르를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에서는 1346년에 유력한 아미르인 카자간이 군주인 카잔 칸을 살해하고 실권을 잡았다. 권력을 장악한 카자간은 헤라트와 인도 방면에 대한 원정을 기도했지만, 1358년에 암살당하고 만다. 카자간의 죽음이후 마 와라 알나흐르 지역은 다시 무정부 상태로 돌아갔다. 이때 동차가타이 칸국에서는 투글루크 티무르가 칸으로 즉위하면서 칸의 권력이 확고하게 되었다. 투글루크 티무르는 이슬람을 수용하고 카자간의 암살 이후 혼란에 빠진 마 와라 알나흐르에 두 번이나 진군해 차가타이 울루스를 재통일했다. 티무르가 역사의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때이다.[5]
티무르가 속한 바를라스부는 칭기스 칸이 차가타이에게 부여한 4개 천호의 하나이다. 티무르의 가문은 바를라스부의 명문에 속했지만, 티무르가 태어날 무렵에는 소수의 하인을 거느린 가문에 불가했다.[6] 그러나 그의 가문의 사회적 명망은 아주 높았었다. 그의 가문은 칭기스 가문과 공통적인 조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티무르의 아버지 아미르 타라가이는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바를라스부 내부에서는 존중받았다.[7]
3.생애
젊은 시절 티무르는 차가타이 한국의 동서분열과 혼란을 틈타 하인들을 데리고 가축을 약탈하는 도적질을 일삼았지만, 뛰어난 군사지휘자로서 그 재능을 발휘하면서 서서히 인망을 모아 서차가타이 한국의 유력자로까지 성장하였다.
1360년 동 차가타이 한국의 투그르 티무르가 침공하자 티무르는 그에게 복종하여 발라스부의 옛 영지를 하사 받았다. 그러나 곧 동 차가타이 한국을 배신하고, 카라우나스부의 아미르 후사인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대해 본거지로써 사마르칸드를 손에 넣었다. 이 기간 전장에서 다리 한쪽을 다쳐 ‘절름발이 티무르’를 뜻하는 Tīmūr-i Lang 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이것이 서양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되어 타멜랑(또는 타메렝, 크리스토퍼 말로위(Christopher Marlowe)에 따르면 타메를란(Tamerlane))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후 패권을 둘러싸고 후사인과 대립하여 1369년에 후사인의 본거지 발흐를 공격해 후사인을 죽이고 트란스옥시아나의 패권을 장악한 뒤 1370년에 후사인이 내세운 칸인 카불 샤를 처형하고 그 대신에 오고타이의 후예 슈르가드미슈 란 왕자를 칸으로 옹립하였다. 그해 후사인의 과부로써 칭기스칸의 자손이기도 한 왕녀를 왕비로 맞이하여 [칭기스칸 가문의 사위(큐레겐)]를 자칭했다.
칭기스칸의 자손이 아닌 티무르와 그의 후계자들은 스스로 칸에 즉위하지 않고, 다른 유목부족의 장군들과 같이 아미르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명목상은 칸이었던 칭기스칸 가문의 사위로써 칸의 곁에 있는 아미르의 최고 유력자로써 권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1370년 중앙 아시아에서 티무르 가문의 권력이 확립되고, 티무르 가문에 의한 지배가 진행되면서 이를 티무르 왕조(티무르 제국)이라고 불렀다.
티무르는 칭기스칸이 쌓아 올렸던 세계제국의 꿈을 이상으로 삼았고, 또한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투에서 승리를 계속해, 전리품을 휘하의 여러 부족에게 분배해 주어야 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대외 원정을 계속 되풀이하였다. 트란스옥시아나를 통일한 후 10년간 동 차가타이 한국을 지배한 모그리즈탄(동 투르크스탄)에 원정을 되풀이해, 코기란트 부족이 지배하던 호라즘을 병합하고, 주치의 후예 토그타미슈를 지원하여 토크다미슈를 주치 우르스의 칸에 추대해주고, 주변의 여러 세력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1380년부터는 일 한국왕조의 해체후 분열상태로 있던 이란에 진출하여 호라산을 정복하고, 1386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등까지 지배하에 두었다.
1388년 토그타미슈가 티무르 제국을 공격한 것을 계기로 잠시 3년 전쟁을 종료한 티무르는 토그타미슈를 격파한 뒤 다시 이란에 대한 원정을 재개하여 1392년부터 시작하여 5년 전쟁에서 무자파르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란 전역을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맘루크 왕조와 대치하게 된 티무르는 여기서 북상하여 카프카스를 넘어 토크타미슈를 격파하여 볼가강 유역에까지 진군하여 주치 우루스의 수도 사라이를 파괴하고 루시제국(諸國)까지 침입한뒤 1396년에 귀환했다.
1398년 티무르는 인도 원정을 결심하고, 델리 술탄 왕조를 격파하고 델리를 점령했다. 1399년 시작된 7년 전쟁에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반란을 일으킨 3남 미란 샤를 굴복시키고, 그루지아,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시리아로 들어가서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거기서 이라크로 전진해 모술을 정복했다. 1402년 중앙 아나톨리아에 진출한 티무르군은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여 오스만 제국의 확대를 저지하고, 아나톨리아의 오스만 영지를 바야지드에게 영토를 빼앗겼던 옛 영주들에게 반환해 준 뒤에 귀환했다. 이 원정을 통해 몽골 제국의 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곳이 티무르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오스만 제국, 맘루크 왕조가 티무르에게 명목상 복속하여 티무르의 지배영역은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1404년말 티무르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격파하여 원나라의 옛 영지를 탈환한다는 목표를 갖고 중국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나 티무르는 원정 도중에 갑자기 병이 나서 1405년 2월 오트라르에서 병사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맏아들 자한기르의 둘째 아들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4.평가
티무르는 군사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인물로, 생애에 걸쳐 벌인 전투에서는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을 할 경우 특별한 이슬람교적인 문화로서의 도시건설을 할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원정은 그곳을 다스리기 위함이라기보다 약탈하고 파괴하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또한 칭기즈칸은 항복하거나 투항하는 적을 살려주었던 반면에 티무르는 투항하는 적도 여지없이 살육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티무르 1대에 쌓아올린 티무르 왕조는 그 지배도 티무르의 개성에 크게 기대고 있었고, 티무르 생전에 확고한 지배체제가 준비되지 못했다. 그 때문에 티무르의 사후 그의 제국은 급속도로 동요하고 분열되어 갔다.
5.일화
구리 아미르 사당(“아미르의 묘”란 뜻)에 있던 티무르의 검은돌로 된 관 속에는 “내가 이 무덤에서 나올 때, 가장 커다란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어 아무도 관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 6월 19일 소련의 조사에 의해 처음으로 개봉되어 다리의 장애 등이 있음을 확인했다. 그 일이 있은 후 3일 후 바르바로사 작전(독일에 의한 소련 침공)이 실행되어 이것이 소련에서 본 제2차 세계대전의 발단이었다. 후에 두려움을 느낀 소련에 의해 뚜껑이 납으로 용접되어, 이후 두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샤크리샵(샤흐리삽스)
샤흐리삽스는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80 km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는 아미르 티무르의 고향으로 유명합니다. 본래 이 곳은 기원적 4 세기 즈음 ‘새로운 장소’ 라는 뜻의 나우타가 (Nautaka) 라고 불리는 소그드 (Sogd) 의 한 지역 지도자의 딸 록사나 (Roxsana)와 결혼하고 군인들 또한 현지인 여자들과 결혼시켰다고 합니다. 이후 7 세기 즈음에는 게쉬 (Kesh) 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14세기부터는 '촐록색의 도시' 라는 뜻인 샤흐리삽스라 불린입니다. 티무르의 힘으로 도시에 나무와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에 초록색 도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샤흐리삽스는 수공으로 만드는 직물 등으로 도 유명합니다.
샤흐리삽스는 작은 도시이고 유적지가 그리 많지 않아 아침에 사마르칸트에서 출발하여 3-4시간 정도 돌아보고 오후에 다시 사마르간트로 돌아을 수 있습니다. 유적지는 광장을 중심으로 3개가 밀질되어 있어 모두 걸어서 느긋하게 돌아볼수 있습니다. 유적지의 세부모습이 사마르칸트와는 어떻게 다른지 차이점을 찾아보는 것도 관광의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광장 중앙에는 아미르 티무르 동상이,북쩍에는 악 – 사라이 유적지, 남쩍에는 코크 - 굼바즈 사원과 도루트 - 사오닷이 있습니다. 택시로 도착하면 대개 광장에서 내려주므로 먼저 악 - 사리이를 구경하고 나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천전히 걸어서 코크-굼바즈 사원까지 내려가는 것이 좋습니다.
악-사리이를 그대로 지역하면 «하얀 궁전» 이지만 «고귀한 궁전» 이라는 가지고 있습니다. 1380-1386년 사이에 아미르 티무르의 명령에 따라 거대하고 아름다운 궁전이 지어졌습니다. ( 일설에 따르면 1380-1405년) 티무르와 그의 부인들이 머무르던 별장인 동시에 접대의 궁전이기도 하였습니다. 스페인 사절로 우즈벡을 방문했던 루이 - 곤잘레스데 그라비호 ( Ruy Gonzalez de Clavijo) 의 기록에도 악 - 사라이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헌재는 성벽 일부와 성문만이 남아 있습니다. 광장 북쪽에 악 - 시라이라고 남아 있는 두 개의 건축물은 악 - 시라이 궁전의 성문이있으며 성문 바로 앞에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성문은 원래 아치 형태의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아치가 붕괴듸어 엿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넓이 22,5미터, 높이 38미터인 성문의 규모로 보아 엣날의 악 - 사라이가 얼마나 크고 응장했을지 상상할수 있습니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성벽의 꼭대기까지 올라가 볼수 있습니다. 올라가는 길이 좁고 가파른데다가 빙글빙글 돌아가서 조금 힘들긴 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샤흐리삽스 전체를 볼수 있습니다. 광장 너머로 보이는 두 개의 유적지를 목표로 삼아루트를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입니다.
악 - 사라이에서 광장을 지나 시장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푸른 돔이 우뚝 서 있습니다. 코크 - 굼바즈는 «푸른 돔» 이라는 뜻으로 1437년 울루그벡이 아버지 샤흐루흐를 위하여 지은 사원입니다.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오다 보면 독특한 느낌의 기둥과 천장이 있는 큰 복도를 지나 중앙의 뜰로올 수 있습니다. 오른쪽의 푸른 돔 아래의 건물이 바로 사원인데, 내부로 들어가면 바로 미흐랍 (사원에서 서쪽 벽을 장식함으로써 메카 방향을 표시하는 것) 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사원의 벽은 다른 사원의 조각된 벽과는 달리 프레스코화로 꾸며져 있습니다.
뜰의 건너편에는 두 개의 돔을 가진 : 명상의 집» 이란 뜻을 가진 도루트-틸로밧 건물이 있습니다. 이 곳에는 아미르 티무르의 스승 중 한 명인 세이흐 샴세딘 쿨랄(Shayx Shamsiddin Kulol)의 영묘(1347년)와 울루그벡이 세운 티무르의 아버지의 영묘 세이드 굼바즈 (1438년)이 있습니다. 세이드란 마호메트의 자손을 뜻하며 그 때문에 성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오른쪽의 영며에는 4개의 무덤이 줄지어 있고 중 가장 안쪽의 무덤들 위에는 다른 들들과 달리 괘인 곳이 있습니다. 그 곳에 고인 물은 성수라는 믿음이 있어 그 물을 아픈 곳에 바르면 병이 낫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즈라트 이맘 (Hazrati Imom) 사원과 티무르가 사랑한 아들의 무덤이 함께 있습니다. 들의 중앙을 가로질러 가면 티무르의 아들 자혼기르(Jahongir)의 묘(1392년)가 보입니다. 티무르가 가장 사람을 만듭니다. 후에 티무르의 다른 아들 우마르(Umar)도 이 곳에 아장되있습니다. 유적지의 동쪽끝 지하에는 티무르의 무덤이라 불리우는 묘실도 남아 있습니다. 티무르가 자신을 위해한 걸이 지만 그는 결국 사르칸트 구르 아미르에 안장되었습니다.
샤흐리삽스
아미르 티무르의 고향
우리에게는 아미르 티무르의 고향으로 유명한 샤흐리삽스는 2000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약90km 떨어져 있으며, 인구 58,000여명의 작은 도시이다. 샤흐리삽스로 사려면 작은 산을 하나 넘어야 하기 때문에 승용차나 봉고버스로는 1시간 30분이며 충분히 도착할 수 있으나, 대형버스는 직접 산을 넘지 못하고 우회해서 가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본래 이 지역은 기원전 4세기 즈음 '새로운 장소' 라는 뜻의 나우타가(Nautaka)라고 불리는 소그드(Sogd) 지역이었다. 7~8세기에는 남 소그드의 중심지로 정치통상의 요지로 알려져 왔다. 14세기부터 타직어로 '녹색 도시' 라는 뜻인 샤흐리 삽스라고 불렸으며, 이름에 걸맞게 도시가 푸르름으로 가득하다.
샤흐리삽스는 2,7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며,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서돌궐제국의 침입과 움마야드, 압바스 왕조 등 아랍세력의 침입 그리고 몽골제국의 점령 등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하지만 현재 샤흐리삽스의 모습과 유적들은 대부분 티무르 제국 시절에 건설된 것이다. 아미르 티무르는 늘 고향인 샤흐리삽스를 기억하고 그리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