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7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루카 6,6-11)
복음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올곧은 시선으로 정도(正道)를 걸어갑시다!>
혹시 누군가로부터 삐딱한 시선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노골적인 감시를 당해 본적이 있습니까? 어디를 가든 누군가가 은밀히 내 뒤를 따라붙습니다. 한번씩 뒤돌아보면 후다닥 숨어버립니다.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현미경 들여다보듯이 다 체크합니다. 그리고 상부에 낱낱이 다 보고합니다. 참으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정통성이 없었던 유신 정권 시절이나 군부독재자 시절, 의식 있던 사람들, 민주 인사들, 많은 대학생들이 그런 고통을 겪었습니다. 매일 뒤를 의식해야만 했습니다. 자연스레 삶이 위축되고 불안했습니다. 하루하루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삶이었습니다. 갖은 스트레스와 긴장 속에 살았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통해 만인 앞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생활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여기저기 비밀리에 첩보원들을 심어놓고서는, 예수님의 동태를 파악하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자신들이 뜻에 반하는 설교, 백성들을 선동하는 설교를 할 때는 즉시 상부로 보고가 들어갔습니다. 보고받은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분석했습니다. 자신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율법에 어긋나는 발언인지 아닌지? 발언의 수위가 너무 높은 것은 아닌지?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예수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정말이지 기가 차지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을 도와주고 구원하려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려고 찾아왔는데, 반갑다고, 고맙다고 인사하기는 커녕, 은밀히 뒤를 캐고, 당신의 말씀에 노골적인 반기를 들고, 끝끝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동족 유다인들의 모습에 마음이 몹시 슬퍼졌습니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셨으면 노기 띤 얼굴로 바라보셨겠습니까?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한심스런 작태에 크게 분노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분노!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를 바라보면서, 그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면서도 참 인간이셨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는가 하면 분노하셨습니다. 기뻐하셨는가 하면 슬퍼하셨습니다. 때로 눈물 흘리기도 하셨습니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그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치유받았지만, 그들의 오그라든 마음은 치유받지 못했습니다.”(아타나시우스)
예수님께서 마침내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손을 뻗어라.” 이 말씀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향해 던지신 말씀이기도 하지만, 둘러 서 있던 사람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들, 내면이 비뚤어진 사람들, 삶 전체가 왜곡되어 있었던 율법학자들과 바라사이들을 향해 던진 말씀입니다. 동시에 마음이 비뚤어져 있는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굽은 길을 고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굽은 허리를 펴게 만드시는 주님이십니다. 비뚤어진 마음도 바르게 펴시는 주님이십니다. 삐딱한 시선도 바로 잡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새롭게 은총의 선물로 주신 은혜로운 하루입니다. 허리도 곧게 펴고, 마음도 똑 바로 갖고, 시선도 올곧은 시선으로, 똑바로 직진(直進)해야겠습니다. 정도(正道)를 걸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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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를 통제하려는 사람들의 심리>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자존감이 낮은지, 높은지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녀나 직장에서 책임자의 위치에 섰을 때는 그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방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마치 나무 분재를 하듯 사람들을 통제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들은 아주 작은 일에까지 간섭하지 않으면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꼭 필요한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앞에서 통제를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자존감을 상실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통제받지 않습니다.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의 저자 아른힐 레우뱅은 끊임없이 통제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누구에게라도 통제되어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통제권을 자기 내면의 폭군이자 자아인 ‘선장’에게 내맡겼습니다. 통제권을 상실한 아른힐은 선장이 시키는 대로 밥 대신 벽지를 뜯어먹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선장은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니?”라고 다독입니다. 이렇게 벽지라도 뜯어먹으며 배를 채우게 한 선장은 으쓱해집니다.
그런데 선장과 같이 자신을 통제하려는 사람이 주위에 너무 많았습니다. 자주 자해를 하는 덕에 아른힐은 정신병원에서 1년 동안 햇빛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독방에 갇혀 있거나 지독한 통제를 받아야 했습니다.
자기 자유의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자해하는 것과 약을 거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물론 자해할 수 있는 어떤 물건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른힐은 마지막 남은 통제권인 약을 먹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때마다 간호사들은 그의 목을 누르고 주사를 놓았습니다. 매우 아프기도 했지만 그 굴욕감이 더 아팠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자신의 선택권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른힐이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한 때는 자신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사람을 한 명, 두 명 만나면서부터입니다.
한 번은 경찰 두 명과 여섯 명의 간호사가 아른힐을 붙잡고 병실로 옮겼습니다. 아른힐은 아이 한 명에 어른 여덟 명은 좀 비겁한 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그때의 의사는 아른힐을 풀어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덟 명의 어른들은 아른힐이 또 자해할까 봐 놓아주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사흘 동안 세 번의 자살 시도를 했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하지만 의사는 아른힐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이 미안하다고 사과하였습니다. 이렇게 느낀 자유는 아른힐에게 조금 더 살아도 되겠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또 어떤 간호사는 아른힐과 함께 산책을 해 주었습니다. 보통은 간호사가 아른힐의 손을 묶고 그 줄을 자신에게 묶어서 함께 산책하러 다녔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볼 때는 굴욕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간호사는 자해할 수도 있고 도망칠 수도 있는 자신을 믿어주었습니다. 줄도 풀어주었고 걸으면 함께 걷고 뛰면 잡지 않고 옆에서 함께 뛰어주었습니다. 그 간호사 앞에서는 자해하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았습니다.
병원에는 유리나 사기로 된 접시나 잔이 없습니다.
그것을 깨서 자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어머니 집에 갔을 때, 어머니는 “넌 내 딸이다. 난 너를 믿는다”라고 하며 가장 귀한 사기로 만든 잔에 커피를 주었습니다.
물론 아른힐은 그렇게 믿어주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며칠 전 사람들이 실험한답시고 유리잔에 커피를 따라주어 아른힐이 그들의 믿음대로 그것을 깨서 자해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나에게 자유를 줍니다. 그 자유가 나의 자존감이 됩니다.
이렇게 아른힐은 수많은 자살 시도가 성공하지 못한 덕분으로 자기를 믿어주는 몇몇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힘이 되어 불가능하다고만 했던 조현병을 이겼고, 공부를 하여 심리학 교수가 됩니다.
자유는 인간의 존엄성 중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자유를 빼앗기면 존엄성이 빼앗깁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남을 통제하면서 자신들이 유용하고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려 합니다.
자신의 열등감을 남을 통제하며 극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통제되는 사람들은 점점 자기가 존중받을 사람임을 잊어갑니다. 믿으면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 자유가 자존감을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통제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통제를 받아야만 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불쌍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통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신이 통제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법으로 예수님을 통제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율법으로 무조건 통제만 해 왔던 이들은 무엇이 옳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자유로운 사람만이 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 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가 자신의 주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나를 통제하려는 사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주는 분을 따를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주체는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은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이들 가운데서 그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손을 뻗습니다.
우리의 통제권을 남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의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바로 그 오른손입니다. 오른손은 의식을 나타냅니다. 내가 의식적으로 나의 통제권을 자아나 나를 통제하려는 사람에게 맡겨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나를 통제하려는 것들에서 벗어납시다. 우리는 누구의 노예가 될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하느님 아닌 것에 통제받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폭군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러 오셨습니다.
출처: 복음말씀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