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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역사기실유취(歷史其實有趣)
만력14년, 서력1586년.
만력제 명신종(明神宗) 주익균(朱翊鈞)의 후계자분제가 정식으로 의사일정에 올라왔다.
황제의 나이가 적지 않고, 황제에게 아들도 있으니, 국본(國本)을 안정시키고 국조(國祚)를 이어가기 위하여는 반드시 하루빨리 후계자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당사자인 만력제는 후계자인 황태자의 후보와 관련하여, 일찌감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은 황삼자(皇三子) 주상순(朱常洵)이었다.
당연히 그가 이 아들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애옥급오(愛屋及烏)의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주상순의 모친은 바로 만력제가 가장 좋아한 비인 정귀비(鄭貴妃)였기 때문이다.
먼저, 만력제는 일찌기 정귀비에 대하여 "유가옥질(柔嘉玉質), 완닉란의(婉嬺蘭儀)"라고 칭찬한 바 있다. 그 뜻은 정귀비라는 여자는 용모도 예쁘고 기품도 있다는 것이다. 정귀비의 하드웨어적인 조건은 아주 좋았고, 만력제가 빠질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실, 황제의 여인으로서 정귀비에게는 다른 비빈들이 갖추지 않은 한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괴려(乖戾, 어그러지고 온당하지 않음)"하다는 것이다.
후궁의 황제의 여인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귀인(貴人)"이라 불리고, 어떤 사람은 "귀비(貴妃)"라 불린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귀(貴)"라는 것이다.
황제는 구오지존(九五至尊)의 몸이다 그렇다면 황제의 여인도 극히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된다. 그러나, 그녀들의 소위 사회적 지위 혹은 그녀들의 존귀함은 그저 노비나 하인의 층면에서 나타날 뿐이고, 황제의 앞에서 그녀들은 대다수의 경우 그다지 존귀하지 않고 오히려 운명이 수시로 군왕에게 장악되어 있기 마련이다.
황제는 그녀들에 대하여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그녀들의 지위는 언제든지 박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냉궁(冷宮)에 집어넣으려면 언제든지 냉궁에 집어넣을 수 있다. 그래서 비빈들은 황제의 앞에서 조심하게 된다.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 분노를 사게 되면 큰 화가 닥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후궁에서의 관계가 모두 그렇지는 않다. 역사상 금슬화명(琴瑟和鳴)의 후궁부부도 있기는 있었다.
예를 들어 만력제의 선조인 홍치제(弘治帝) 명효종(明孝宗) 주우탱(朱佑樘)은 군주로 일생을 보내면서, 비도 들이지 않았고, 첩도 들이지 않았다. 전체 후궁에 오로지 황후 장씨(張氏) 한명의 여인밖에 없었다. 일부일처제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고, 대명왕실에서 순수한 사랑의 모범사례라 할 수 있다.
그외에 수(隋)나라의 개국황제인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이 있다. 황후인 독고가라(獨孤伽羅)는 그가 다른 여자를 찾는 것을 질투하여 황제가 막 후궁으로 들인 미인 위지씨(尉遲氏)를 죽여버린다. 양견은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독고황후와는 서로 존중하며 지냈기 때문에 그녀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말을 타고 궁을 떠나 멀리 떠나버린다.
그렇다면, 어떤 독자분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평소에 황제가 황후를 폐위시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혹시 역사상 황후 혹은 비빈이 황제를 폐위시킨 사례도 있는가?
잘 물었다. 정말 그런 사례가 하나 있다.
동진(東晋)의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는 궁에서 연회를 벌였다. 술에 취했을 때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던 비빈 장씨를 폐위시키겠다고 말하게 된다. 장씨는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가 그날 밤 효무제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직접 베개로 효무제를 덮어서 질식시켜 죽인다.
만력제때, 후궁의 비빈들은 그를 두려워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를 모실 때는 어쩔 수 없이 저미순안(低眉順眼)하고, 그저 법도대로 했다.
이렇게 봉건적인 예교에 따른 여자들과의 접촉에서 만력제는 진정한 의미의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금성안의 비빈들은 너무 진부하여 황제가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귀비가 출현하자,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겁내는데, 정귀비는 매일 자기와 웃고 농담한다. 다른 사람은 자기를 무서워하는데 정귀비는 자기와 맞상대한다.
다른 사람은 그와 얘기할 때 조심하는데, 정귀비는 그의 수염을 잡아당기면서 "노친네"라고 말하며 웃는다.
이렇게 활발하고 재미있고, 귀여운 정귀비는 금방 만력제의 모든 총애를 차지한다. 정귀비가 주상순을 낳은 후에는 만력제가 심지어 정귀비에게 개인적으로 약속까지 해준다. 나중에 주상순을 황태자로 세워주겠다고.
애정의 맹세는 아름답지만 문제가 있다. 만력제는 보통백성이 아니라, 대명의 천자이다. 제국의 계승권같은 문제는 그 혼자서 결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먼저, 황실의 예의와 법도에 맞아야 했다.
명나라는 개국이래, 종법계승제도에서 한가지 철칙이 지켜져왔다. 그것은 바로 "유적입적(有嫡立嫡), 무적입장(無嫡立長)"(적자가 있으면 적자를 황태자로 세우고, 적자가 없으면 장자를 황태자로 세운다).
황후가 낳은 아이가 바로 적자(嫡子)이다.
만일 황후에게 아들이 있으면, 적자중 나이가 가장 많은 아들이 황태자가 된다. 누가 적장자이면 그가 황태자이다. 만일 적장자가 죽으면 적차자가 황태자가 되고, 적차자가 죽으면 적삼자가 황태자가 된다.
만력제에게도 황후가 있었다. 그러나 황후는 자식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만력제의 서자들에게도 후계자가 될 자격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서자가 후계자가 되더라고, 서장자계승제도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가장 나이가 많으면 계승권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주상순은 서자이지만, 서장자(庶長子)는 아니다. 서잠사(庶三子)이다. 예제에 따르면, 그에게는 황위계승권이 없다.
진정한 최우선순위의 계승자는 바로 만력제의 서장자 주상락(朱常洛)이다.
그러나 그는 비록 장자이지만, 주상락의 대우는 동생 주상순과 비교하자면 천양지차였다.
주상락의 모친은 원래 궁중의 비녀(婢女)였다. 주상락 본인은 만력제가 술에 취해서 우연히 관계한 여자가 낳은 자식인 것이다.
비녀는 주상락을 낳은 후 나중에 비록 공비(恭妃)에 봉해지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만력제에게 냉대를 받는다. 그녀는 자금성의 경양궁(景陽宮)에 연금되어 있으면서, 궁녀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죽는다.
이 아들에 대하여 만력제는 좋아하지도 않아서, 그저 주상락의 먹고 입는 것에 대하여는 간소하고 최소한으로 제공했다. 심지어 주상락에게 황실의 전장과 예의를 가르쳐줄 스승도 구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상락은 거의 문맹이었다.
만력제는 주상락 모자에 대하여는 아무런 애정이 없다. 그는 한번도 이들 모자 앞에서 남편이나 부친의 역할을 한 적이 없다. 후계자문제가 정식 제기된 때부터 만력제가 계속 생각한 것은 자신의 예전 약속을 지켜 셋째아들 주상락을 황태자에 앉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조정의 문무대신들중 아무도 그의 말에 동의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건 너무 황당한 일이다.
대신들이 보기에, 폐장입유(廢長立幼)는 취란지도(取亂之道)이다. 그래서 만력제가 셋째아들 주상순을 황태자로 세우겠다는 싹만 보이면, 바로 반대의 목소리가 온 조정을 뒤덮게 된다.
대신들이 반대 목소리는 만력제가 보기에 설득해서 해결될 수는 도저히 없는 수준이었다.
어떤 대신들은 상소문을 올려서 자신의 행위를 맹렬하게 비판했다. 내각에서 도저히 다 읽을 수가 없어서 잠시 보류해둔 상소문만도 수백수천에 이르렀다.
어떤 대신은 조정에서 공개적으로 만력제에 반대한다. 반대의견을 내기도 하고, 엄중한 목소리로 질책하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의분강개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는 몇몇 금의위가 말리지 않았다면 머리를 기둥에 들이박으며 목숨을 내놓을 기세였다.
많은 문관들의 반대로 만력제는 많은 경우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부 대신들에게 정장(廷杖)을 시행했다. 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여, 신하들에게 물러서게 하려 했다.
정장은 두터운 나무몽둥이로 1분당 30대가량의 속도로 엉덩이와 등을 때린다. 형을 받은 사람에게 영구적인 장애를 남길 뿐아니라,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들의 조복을 벗기고 엉덩이를 드러내게 하여, 씻을 수 없는 정신적인 치욕을 안기는 것이다.
그러나, 만력제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은 비록 문신들중 많은 사람들이 나이들었고 30대에서 50대의 곤장이면 바로 장애자가 되는 것인데도 이들 문관들은 전혀 겁내지 않았다. 오히려 곤장 아래 맞아죽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알았다. 이를 통해서 정의로운 신하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강경한 방법은 통하지 않으니, 온화한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신들에게 간청했다. 시간을 더 달라고 하면서 이 일에서 주의력을 돌리려 했다. 심지어 대신들에게 자신을 가만히 놔두면 안되겠냐고 애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대신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황제의 자존으로도 마음을 얻어내지 못한 것이다.
대명의 문관집단은 황제의 개인의지로 자신의 뜻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의 느낌을 고려하거나 이해하려고 한 적이 없다.
그들이 보기에, 조종성법(祖宗成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황제는 그들의 눈에 사람이 아니다. 그저 있어야 할 곳에 있는 부호였다.
기나긴 줄다리기끝에 4명의 내각수보(內閣首輔)가 압력을 받아 물러나고, 수십명의 상서급 관리들도 사직한다. 강급, 징계, 삭탈관직당한 중앙관리들만 100여명에 이르렀고, 지방관리는 200명에 이르렀다.
만력10년때의 황제는 천진하게 자신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이 해에 대명의 내각수보 장거정(張居正)이 과로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장거정이 보정(輔政)하던 10년은 만력제에게 휘황한 10년이었다. 그러나 장거정의 보정은 만력제에게는 철저한 실권(失權)을 의미했다.
장거정에 그에게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그는 서쪽으로 갈 수가 없었다. 장거정이 사과를 먹으라고 하면, 그는 배를 먹을 수가 없었다.
만력제는 표면적으로 장거정을 존중했고, 심지어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장선생이라고 존칭했지만, 내심 깊은 곳에서는 장거정에 대한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장거정이 죽자마자, 만력제는 그의 가산을 몰수해버린다.
장거정은 그가 영원히 뛰어넘을 수 없는 문턱이었다. 그런데 장거정이 죽었고, 그의 협력자인 풍보(馮保)도 축출했으니, 지금의 만력제는 모든 권한을 혼자서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앞으로는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장거정 한명이 사라지니, 수천수만의 장거정이 나타난 것이다.
문신들이 죽음을 겁내지 않으니, 황제로서 그들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정말 그들을 모조리 때려죽여야 한단 말인가?
그제서야 만력제는 확연히 깨닫게 된다. 장거정이 살아있든 죽든 자신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이런 정서하에서 만력제는 돌연 대명왕조의 정치생태에 깊은 염증을 느끼게 되고 소극적이 된다. 그리하여 그는 한 가지 신중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풍경운담(風輕雲淡)의 방식으로 이 시비의 땅을 벗어나는 것이다.
개략 만력14년부터 황제는 파업을 시작한다.
그는 더 이상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조조(早朝)이건 오조(午朝)이건. 다시는 거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경연(經筵)도 중단한다. 대경연이건 소경연이건, 그저 학사(學士)들만 있고, 황제는 볼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여하한 신하도 만나지 않았다. 내각수도이건 천리밖에서 온 외국의 사신이건.
그는 더 이상 상소문을 읽지 않았다. 지방의 자연재해에 관한 것이건 변방의 화급한 전쟁에 관한 것이건.
황제는 이렇게 침묵을 선택한다. 그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소실"된다.
대신들의 질책, 욕설, 분노, 심지어 애걸에도 황제의 내심에는 조그만치의 파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30여년에 걸친 태업행동은 명신종 주익균의 문관들에 대한 가장 가혹한 보복이었다.
너희가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고? 그럼 앞으로 대명천하는 너희가 마음대로 해보아라.
너희는 나를 대신하여 결정을 내리고 싶어하지 않느냐? 그렇게 해라. 방대한 제국의 모든 일은 너희에게 맡길테니 알아서 해라.
너희는 너희가 조정의 법도에 충성을 다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나를 거기에 반드시 굴복시키려고 하지 않았느냐?
좋다. 좋다. 이제부터 나는 아무 말도 듣지 않겠고, 아무 일도 관여하지 않겠고, 아무 일도 신경쓰지 않겠다. 나는 이 제국이라는 침중한 댓가를 가지고, 대명의 관리들을 징벌하겠다. 너희들의 마음이 영원히 편안하지 못하도록.
그러나, 기실 만력제 본인의 내심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고, 그는 오히려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대명의 천자로서, 제국의 주인으로서, 왕조의 통치자로서, 그는 여하한 사람이든지 생사화복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깰 수가 없는 곤경이다. 만력제는 반항해 보았고, 분투해 보았고, 노력해 보았다. 그러나 결국 그는 운명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생활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육체가 생명을 가질 때부터 벗어날 수 없는 객관적인 조건이다.
주익균, 주익균! 결국 너도 깨달았을 것이다. 이 세계는 이렇게 잔혹하다.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금성의 지는 해는 묵묵히 먼 산줄기로 떨어지고 있다. 만력48년, 1620년, 황제는 늙어서 죽을 때, 그의 머리 속에는 아마도 여러해전 자신이 천하에 군림하기 위해 처음 황제에 올랐던 그 날의 오전을 떠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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