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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룻 1:6-14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세 과부가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가는 과정에서 며느리 오르바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 다른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를 끝까지 따릅니다.
유다 베들레헴으로 향함(6-7) 이 구절에서 키워드는 돌아온다는 단어입니다. 나오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식을 주어 그들을 돌보시기 시작하셨다는 새로운 소식을 듣고 즉각 행동합니다. 의지할 데 없던 그녀가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을 멀리한 것이 불행의 시작이라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축복의 시작입니다. 나오미는 그동안 머물던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축복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믿음을 통해 임합니다.
나오미의 강권(8-13) 본 단락은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서로를 애틋하게 배려하는 대화입니다. 두 며느리의 동행이 위로가 되었지만, 나오미는 며느리들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기에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합니다. 이때에 나오미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선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말합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며 베들레헴으로 향하였고, 두 며느리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위로받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두 며느리가 나오미를 계속 따라오자 그녀는 두 며느리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를 말합니다. 먼저 나오미에게는 두 며느리에게 물려줄 기업이 없습니다. 또한 늙은 나오미가 이제 아들을 낳아 죽은 아들들의 이름을 이어줄 대체자를 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아들 없이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다른 형제가 대를 이어주는 고엘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때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룻을 위해 예비하실 고엘을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나오미는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징계만을 생각하고 앞으로 베푸실 하나님의 축복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14) 두 며느리가 함께 목놓아 울었지만 그들의 길이 여기서 갈립니다. 오르바도 나오미를 떠나기 싫었지만, 이 길 끝에 있을 고난과 고향에서 받을 위로를 생각하며 발길을 돌립니다. 하지만 룻은 고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시어머니를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본절의 “붙좇았더라”는 아교로 붙여 결코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적용: 나오미는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약속의 땅으로 향합니다. 현재의 방향이 미래의 결과를 결정합니다. 당신은 현재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구약 성경에 ‘인애’로 표현된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를 번역한 말입니다. ‘헤세드’라는 말은 주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언약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 실패할 수 없는 사랑,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사랑,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루어지게 만드는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영원한 사랑, 하나님께만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께만 합당한 단어입니다. 물론 사람에게도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룻기서에서 룻이 어머니께 베푼 인애, 즉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기로 한 결정입니다.
< 설 교 >
최상의 선택
룻 1장 11-14절 / 문기태목사
고대 아테네가 페르시아 군을 파했을 때 육지를 지키는 군인들과 바다를 지키는 군인들은 페르시아의 재침을 우려하며 각기 자신들의 전력을 증강해 줄 것을 주장했습니다.이 주장이 여론화된 후 아테네 시민들은 깨진 그릇의 뒤편에 반대하는 측의 대장 이름을 적어 내는 「투표」를 하게 되었습니다.그 결과 「육군대장」의 이름이 많이 나와 아테네는 해군을 증강했습니다.10년후 페르시아는 바다를 통하여 아테네에 진격했으나 전력에 밀려 대패하고 말았습니다.아테네 시민들의 바른 선택이 나라를 구한 것입니다.
현명한 선택은 나라를 구하기도 하고 어떤 작은 공동체의 큰 발전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개인의 미래를 밝고 복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쪽을 선택할까 갈등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때 최선의 선택을 위한 어떤 원칙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잘못된 선택을 줄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서 후회가 훨씬 줄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룻기 말씀에 보면 세 가지 원칙에 따라 선택을 하는 세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선택하는 방식은 오늘을 사는 우리와 너무 흡사합니다. 우리는 이들 세 사람의 선택을 통하여 어느 선택이 잘못된 것인지 어느 선택이 잘한 선택인지 살펴보고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겠습니다.
1. 인정에 끌린 선택(11) -나오미
나오미는 흉년을 피해 가족과 함께 모압지방에서 살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이제 객지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두 며느리뿐이었습니다. 때마침 고향에는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하여 이삿짐을 챙겨 고향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다가 따라오는 며느리들을 바라보니 두 며느리들이 불쌍합니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갑자기 남편을 잃고 자식도 없이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된 저 며느리들이 궂이 자신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저들은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여인들이 아닌가? 내가 공연히 늙그막에 외로움을 이기기 힘드니까 저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며느리들을 불러 놓고 말합니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여라."
나오미는 참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습니다. 며느리와 시머니의 관계가 다 이렇게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 대한다면 고부갈등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선택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우나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적입니다. 나오미의 선택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선택은 되지 못했습니다. 며느리들의 육신적인 행복은 염두에 두었지만 영혼은 생각하지 못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인정이 많은 선택은 항상 최선의 선택일 수는 없습니다. 인정에 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영혼의 미래를 내다보는 것입니다. 저는 자녀들에게 때로 인정을 앞세우다가 진실한 신앙의 자세를 단호하게 가르치지 못할 때가 있어 참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육신적인 행복을 집착하다가 영적인 행복을 잊어버리는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목사니까 너희는 목사의 자녀로써 이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한다.' 하다보니까 저의 체면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모순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억지로 반목사를 만들고 싶지 않아 교회생활의 자유를 많이 줍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너무 방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늘 목사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이 피곤하다고 핑계를 대며 교회가기 싫다고 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자녀들이 시험기간이라 공부해야한다고 교회는 빠져야 하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래, 지금은 공부가 중요하니 나중에 대학 가서 열심히 교회다녀라. 교회생활은 너무 열심히 하는 것보다 적당히 하면 된다." 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 인간적인 정에 끌려 그릇된 선택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는 다른 사람이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부추기지는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인정에 끌려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기 바랍니다.
2. 욕구에 끌린 선택(14) -오르바
오르바는 처음에는 베들레헴으로 출발했으나 시어머니의 배려에 감격하여 작별인사를 하고 자기의 고향 친정집으로 돌아갑니다. 물론 그것이 죄는 아닙니다. 누구도 나쁘다고 오르바에게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오르바는 시집을 와서 계속 나쁜 일을 만났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남편이 자녀도 남기지 않고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갑자기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아픈 과거를 털어버리고 새출발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남편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남편의 사랑과 보호를 받으며 잘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버리고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지금 그 시어머니가 등을 떠밀며 돌아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합당한 논리를 펴며 자신은 괜찮으니 신경쓰지 말고 가서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다행이다. 정때문에 발목이 잡히면 평생 외롭게 고생하며 살지 모른다. 냉정하지만 지금 떠나자.' 오르바는 결단을 하고 나오미를 떠나 모압친정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오르바의 선택은 자신안에 내재된 욕구를 위한 선택일 뿐입니다. 당장 주어진 현실을 생각할 때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인 외로움과 가난 그리고 고달픔을 면하기 위해서는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남편을 만나 다시 시작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쉬워보이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욕구를 안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에게는 식욕과 성욕 같은 육체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정서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그외에도 친구를 만들고 같이 어울리고 싶은 사회적인 욕구도 있습니다. 또 인정받고 싶은 욕구, 안전하게 보호받고 싶은 욕구등 여러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이 동기가 되어 움직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순전히 이런 욕구에 끌려서 움직이는 것이 전부라면 동물과 별로 다른 점이 없을 것입니다.
오르바는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으로 시집와서 살다가 지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베들레헴으로 함께 출발하여 나아가는 중에 다시 고향 모압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출발을 하였으나 시험이 오고 환란이 오자 포기하고 세상으로 되돌아갑니다. 예수믿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지만 세상의 쾌락과 화려함을 희생해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 유혹에 끌려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가룟유다입니다. 그는 주님이 자주 십자가를 말씀하시자 주님을 배반하여 팔았습니다. 바울은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하며 섭섭함을 남겼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오르바처럼 하나님앞에 나왔다가도 다시 세상을 선택합니다. 왜입니까? 욕구에 따른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본질적으로 욕구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욕구에 의하여 바라보면 믿음의 길을 걷는것보다 세상적인 방식으로 사는 것이 더 화려해 보이고 더 재미있어 보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줄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혹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노리는 사단의 유혹입니다. 오르바는 아주 귀한 기회를 잡았다가 스스로 놓아버리는 영원히 후회할 잘못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후에 오르바의 이름은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생명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었는데,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축복을 누릴 수 있었는데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여러분은 주님을 따르다가 어떤 시험이 와도 포기하지 않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유혹이 손짓해도 따라가지 말기를 바랍니다. 어려움이 오고 환란이나 핍박이 와도 끝까지 견디며 믿음을 지키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예비하신 영원한 은혜의 복을 포기하는 이가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3. 진리에 따른 선택 (14) - 룻
룻에게도 친정으로 돌아가 다시 시집가고 싶은 욕구가 왜 없었겠습니까? 편안하게 사랑받으며 살 수 있는 쉬운 길을 택하기 위하여 친정으로 돌아가 모압사람으로 살고 싶은 욕구가 올라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룻은 시어머니를 붙잡고 베들레헴으로 따라갔을까요?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때문입니다. 룻은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에 시집와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을 잘 섬길 때 어떤 축복과 은혜가 기다리는지를 들어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평생 잘 섬기며 살려고 했는데 시어머니가 친정으로 돌아가 새출발을 하라는 것입니다. 다 좋지만 그렇게 하면 이제 다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여호와신앙은 접을 수 밖에 없습니다. 모압사람들은 우상을 섬기는데 혼자서 남아 여호와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거듭되는 돌아가라는 권고에도 단호하게 나오미를 붙잡고 분명히 돌아가지 않을 것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어머니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이제 참 신앙을 찾았는데 다시는 잃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신앙을 붙들기 위해서 다른 것을 과감히 포기하겠다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다면 외로와도 좋고 가난해도 좋고 비웃음거리가 되어 살아도 좋다는 자세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여호와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진리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만이 영원하다는 것에 눈을 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룻은 진리를 따르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손해보는 장사입니다. 그러나 룻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왜냐하면 최선의 선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고난과 외로움과 가난을 선택했는데 하나님은 그녀에게 좋은 남편을 주셨습니다.(보아스) 자녀도 주셨습니다.(다윗의 할아버지)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것을 포기하며 하나님을 선택한 룻에게 하늘의 신령한 것과 그녀가 포기한 세상의 좋은 것을 함께 주셨습니다.
오래전에 어떤 두 여인이 같은 시기에 헐리우드의 배우가 되었는데, 한 사람은 콜린 타운센드였고, 또 한 사람은 마릴린 몬로였습니다. 그로부터 몇년 후 타운센드양은 예수를 믿고 헐리우드를 떠나 선교 목사님과 결혼하였으나 마릴린 몬로는 계속해서 섹스의 심벌로 헐리우드에 남아 있었습니다.
어느날 몬로는 타운센드를 만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영화배우가 되기로 했을 때 나는 결심했지. 그래서 꿈을 이루었지만 너무나 비싼 댓가를 치루어야만 했어.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이야"
그후 어느날 밤 몬로는 자살하여 죽었으나 타운센드는 주님을 위하여 지금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살면서 선택의 기로를 만나면 어떤 원칙을 가지고 선택합니까? 인정에 끌려 순간적인 기분에 의해 선택합니까? 욕구에 끌려 육신의 쾌락과 만족을 위해 선택합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값을 지불하게 되더라도 옳고 영원한 것을 선택하십니까?
외지에 난 작가 미상의 시를 소개합니다?
가는 길이 너무 평탄하고 즐거운 곳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얼마 안있어 급류에 휩싸여 떠내려 갈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처음부터 평탄하고 즐거운 곳을 찾아가/
여기가 길이라고 외치고 있다//
가는 길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곳엔 사람들이 적다/
그러나 이 길을 택하는 사람들은 어떤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전진한다/
망설이지 않는 선택과 용기있는 발걸음을 지닌 이 사람들은 영광의 끝에서 미소짓는다
수고 없는 삶
룻 1장 11~14절 / 이정익목사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리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심은대로 거둔다”는 진리입니다. 땅은 아주 정직합니다. 땅은 심은대로 심은 만큼 되돌려줍니다. 더 고생한 사람에게는 고생한 만큼 더 보상해 줍니다. 땅은 놀고 잠을 많이 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줍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진리입니다. 그동안 나오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땅에 가서 살면서 다 잃었습니다. 그리고 빈 몸으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작은 며느리 룻도 함께 돌아옵니다. 룻은 희망이라고는 전무한 시어머니를 좇아서 죽은 남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룻의 동행은 단순한 도리나 윤리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동행이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좇아서 베들레헴에 온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고 인생 전체를 포기하는 동행이었습니다. 룻은 앞 길에 고난도, 배고픔도, 언제 전환이 주어질지 기대도 없는 고난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룻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와 복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룻의 인생은 해피앤딩으로 끝맺음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말씀의 초점을 시어머니를 떠난 큰 며느리 오르바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미나 룻의 이름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오르바의 이름은 4절과 14절에 딱 한 번씩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첫째 며느리 오르바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나오미나 룻에 대해서 설교는 많이 했지만 이 오르바에 대해서는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냥 오르바는 스쳐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룻은 효부였습니다. 어렵지만 가장 인간적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룻은 결정적인 시간에 신의 섭리를 발견한 여인입니다. 그 결과 아주 소중한 순간에 어려운 길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큰 복을 받았고 마지막에는 해피앤딩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큰 며느리 오르바는 그에 대해서 성경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오르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오르바가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르바의 계산
오르바는 룻처럼 모압 여인입니다. 어느 날 한가정이 베들레헴에서 모압지방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 이사 온 집안에는 준수하게 생긴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압지방에 화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모압지방에 사는 처녀들은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 엘리멜렉의 집안의 두 아들이 잘 생겼다면 더욱 화제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침내 모압 여인들 중에서 오르바라는 여인이 큰 며느리로 뽑혔습니다. 오르바는 결혼해서 큰 기대를 가지고 한동안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행복은 길지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시아버지가 죽었습니다. 또 어느 날 남편이 죽었고 또 어느 날 시동생이 죽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죽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행복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행복도 기대도 미래도 희망도 공기가 증발하듯이 한순간에 다 증발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다 늙은 시모와 과부된 동서와 셋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기댈 곳이 없는 허물어져 가는 집안만 눈에 보였습니다. 사람은 이때 고민하게 됩니다. 갈등이 발생하게 됩니다. 미래가 더 암담하게 느껴집니다. 욥의 아내가 그래서 욥을 저주하고 집을 나간 것입니다. 다 잃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오늘 가정을 버리고 도망가는 주부들이 가끔 있는데 그들의 심정이 이랬을 것입니다. 희망의 여지가 남아 있어야 하는데 희망은 싹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리고 남편은 무능하고 시부모는 늙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과 시부모를 놔두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 심정을 이해합니다. 희망 없는 현실을 인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오르바가 고민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집안이 소리 없이 망해가고 있습니다. 남은 시어머니를 보면 기댈 곳이 없습니다. 희망이라고는 싹도 보이지 않습니다. 고민이 컸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내 미래, 내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왜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오르바가 그때 계산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오르바의 선택
오르바가 그렇게 고민하고 계산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가 “너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돌아가서 “개가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오르바는 심각하게 고민 중인데 시어머니가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너무 완강하게 그리고 아주 완곡하게 돌아가라고 강권했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역시 시어머니 나오미는 현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때 또 하나의 다행한 조건이 주어졌습니다. 작은 동서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작은 동서가 어리석게 보였지만 참 다행이었습니다. 작은 동서가 시어머니를 지켜준다면 한결 마음이 편할 것 같았습니다. 작은 동서는 시어머니를 따라가면 미래가 없는데도 함께 가겠다고 우깁니다. 오르바는 작은 동서 때문에 결단 내리는데 마음은 한결 편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동서들이 없습니다. 모두 자기이익 챙기기에 급급합니다. 특히 시댁문제, 시부모문제, 시동생문제는 심각합니다. 늙은 시부모, 무능하고 유산이 없으면 고려가 없습니다. 여기 오르바의 마음속에는 신의 섭리의식이나 인륜이나 천륜같은 의식은 전무합니다. 오로지 현재적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이 부분이 본문에 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르바는 결국 편한 길을 가기로 작정합니다. 집으로 돌아가 개가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오르바가 결국 쉬운 길을 택하여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결국 룻은 어려운 길을 택하여 모험의 길을 택하였고 오르바는 너무 쉬운 길을 택하여 오늘 현재 이익이 되는 길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점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쉽게 살려고 합니다. 쉬운 길을 가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무거운 짐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조금만 부담이 되면 피하려고 합니다. 시부모가 무능하고 늙으면 다 회피하려고 합니다. 남편이 무능하면 헤어질 것부터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노부모들이 거리를 방황대고 부부들 사이가 자꾸만 벌어지는 것입니다. 오르바는 오늘 현대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 약삭빠른 여인 오르바는 현실적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쉽게 살려고 하였습니다. 수고하지 않으려고 쉬운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떤 현상이 나타났습니까.
그것은 곧 잊어짐입니다. 쉬운 길을 선택한 오르바는 이제 룻기서에서 곧 잊어졌습니다. 쉽게 살려고 하면 쉽게 잊어집니다. 본문은 책의 타이틀이 룻기서 입니다. 본문 내용 전체가 룻에 대한 이야기로 장황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룻이 살아간 고난의 모습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고 그가 복을 받는 모습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르바의 이야기는 4절과 14절에서 이름만 나오고 돌아갔다는 짤막한 이야기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이 룻에 대해서는 많은 설교를 하지만 오르바에 대해서 설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쉬운 삶에는 이력도 없습니다. 세상을 쉽게 살면 이력도 이야기꺼리도 없어집니다. 자서전을 쓸 내용이 없습니다. 할 말도 없고 말할 내용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룻기서에서 룻이 주연입니다. 그런데 오르바는 엑스트라급 조연입니다. 저는 군에 가서 참 험악한 곳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저는 나 혼자서 최전방으로 배치되었을 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32명이 같이 훈련을 마쳤는데 왜 나 혼자만 가장 어려운 곳으로 배치되었을까를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원망도 많이 했고 내가 무슨 죄가 그리 많은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어려운 곳에 오게 됨으로 후에 할 말이 많아서 좋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대한 후에 나는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할 말이 많아서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자들끼리 모여 군대 이야기만 하면 저는 신나서 이야기 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 옆에 조용히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은 왜 조용히 앉아 있는가를 한참 후에야 알았습니다. 쉽고 편하게 쉬운 길을 선택하였던 사람들은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쉽게 가는 길에는 쉬운 만큼 쉽게 잊어집니다. 이력도 할 말도 없어집니다.
또한 상도 없습니다. 쉬운 길에는 얻을 것도 없지만 상도 없습니다. 쉬운 길을 가면 오늘은 편한 대신 나중에 주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심는 사람은 온갖 수고를 다 해야 합니다. 땀도 수고도 희생도 해야 하고 오늘 먹을 것도 없는데 투자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후에 얻는 복이 엄청나게 큽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오르바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교회에서 모두들 쉬운 일을 하려고 합니다. 조금 어려운 직책을 주면 불만스러워 합니다. 어떤 분은 노골적으로 불평을 하고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중직자들 부인들도 구역장을 그만두고 싶다고 안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안하면 평안하고 쉽습니다. 매이지 않아서 좋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름이 없어져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 이름이 없어진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추천한 길이 좁은 길이고 좁은 문입니다. 수고와 땀과 희생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주님은 쉽게 전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귀신을 내쫒고 병을 고치는 능력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전도하면 잘 하실 것인데 굳이 우리들에게 어려운 방법을 통해서 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도 쉬운 방법이 있었을 것인데 가장 처절하게 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쉽게 살면 편하기는 하지만 상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뿐 아니고 하늘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기 오르바는 후에 주어진 복이 없습니다. 쉽게 잊어졌습니다.
룻의 고난 길
그런데 룻은 오르바와 대조적으로 살았습니다. 룻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오르바가 넓은 길을 선택하였다면 룻은 좁은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룻은 아무 희망이 없는 곳에서 그는 희망의 끈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오르바는 오늘 현대인의 모형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오늘의 고난이나 수고나 땀 흘림이 미래에 큰 행복을 보장한다 해도 선뜻 선택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현재는 어렵지만 미래에 희망을 보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려고도 않습니다. 오늘의 풍조는 이미 다 익은 열매를 선호합니다, 그래서 오늘 젊은이들이 조건이 성숙해진 연상의 여인들을 배우자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군에 가서 2년 동안만 수고하면 제대한 후에는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는데도 그 2년 동안의 수고를 온갖 방법으로 회피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당장의 고난이나 수고를 다 회피하려고 합니다. 오늘 직장이 없다고들 아우성이지만 명분이 그럴듯하고 폼 나는 직장을 찾다 보니까 일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좀 더 수고하고 땀 흘리는 일터가 왜 없겠습니까. 오늘은 다 쉽게 편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르바는 오늘 현대인들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룻에게서 깊은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좀 더 깊은 의미를 얻는 삶은 한결같이 힘들고 땀 흘리고 수고가 필요한 삶입니다. 때로는 희생이 필요하고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용기도 필요한 삶입니다. 그런 삶은 아무나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엊그제 칠레에서 광부들이 구출되는 장면을 보니까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지하 700미터 밑에서 700톤의 암석에 깔려 69일 동안 생존해 있다가 구출되었습니다. 오늘 칠레라는 나라에서 광부들이 매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모두가 불행한 사건이라고 말해왔는데 이 사건은 결론으로 말하자면 칠레를 구원한 사건이고 이 사건이 없었던 것 보다 훨씬 더 온 세계에 유익을 주고 감동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대목 중에서도 더 감동적인 장면은 서로가 맨 나중에 나가겠다고 말한 대목입니다. 젊은이는 내가 젊으니까, 나이 많은 분은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건강한 사람은 내가 건강하니까 나중에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모두 먼저 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결단이 나오게 된 것은 깊은 삶, 깊은 생각, 깊은 의미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더 희생하고 더 고민하고 더 고생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주장했더라면 불상사도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 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대다수로 생각 없이 살아가는 층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을 꾸려나가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그냥 따라가는 부류입니다. 또 하나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비하고 방해하는 층입니다. 아무리 성숙한 사회라 할지라도 이런 부류는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또 극소수층은 그 시대를 거슬러 살아가는 층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광부들이 갱이 무너지면서 69일 동안 700미터나 되는 깊은 땅속에 묻혀 있었으면서도 서로 나중에 구출되겠다고 나서는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있기에 이 세상에 감동을 주고 그런 이치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새로운 기억들을 되살려 주는 것입니다.
오르바는 너무 쉬운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결과 그의 모습에서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룻은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모습으로는 참 미련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외모에 나타나지 않는 그의 속마음에는 일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깊은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 늙은 시어머니의 모습에서 룻은 자기희생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의지할 것 없는 무일푼의 시어머니를 포기하는 것은 장래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저 깊은 의무를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시아버지와 두 형제의 의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그때 룻은 그 죽음의 모습들을 보면서 뭔가 두려움과 신의 섭리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이 모험의 길을 회피한다면 나에게도 또한 그 신적 노여움이 엄습하리라는 그 뭔가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사코 돌아가라는 시어머니의 강권을 뿌리치고 고집스럽게 흔들림 없는 중심으로 시어머니의 백성이 되겠다고 작정하였을 것입니다. 이 뭔가를 보는 눈이 지혜의 눈입니다. 이 지혜가 올바른 판단을 하고 결단하고 은총의 길을 가게 만듭니다. 룻이라고 자신의 행복을 염려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룻이 오르바와 다른 점이 있다면 룻에게는 뭔가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남들이 가지 않는 이 신앙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길을 고집하는 것도 이 깊은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길을 떠나지 못하고 오늘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오르바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일날이면 산으로 강으로 오락을 위해서 동분서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을 다 뿌리치고 이 길을 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쉽게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에는 상이 없습니다. 쉽게 잊어집니다. 또 한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현재는 가기가 힘든 길이지만 그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후에 상이 주어지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좁은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룻이 가는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오르바가 가는 길을 가고 있는가?” 여러분들이 가는 길 위에 주님의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좋은 선택을 하라
룻기 1장 11-14절 / 이한규목사
< 서로를 행복하게 해 주라 >
본문을 보면 회개하는 마음으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며느리를 최대한 배려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며느리를 단순히 며느리가 아닌 친딸처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며느리 둘이라도 함께하면 훨씬 위로가 되었겠지만 나오미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며느리들의 앞날의 행복을 생각하며 힘든 결정을 했다. 그처럼 서로에게 행복의 문을 넓혀 주라.
어떤 시어머니는 아들이 죽으면 그 재산이 며느리에게 넘어갈까봐 남은 재산을 몰수하고 은밀하게 빼돌린다. 안타까운 모습이다.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행복하게 지냈던 것은 시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유머도 있다. 행복하려면 며느리도 잘해야 하지만 특별히 시어머니가 나오미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가족과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위해 “나 한 사람의 고생이면 족하다. 내가 혼자 어려움을 당할 테니 너희들은 복된 길로 가라.”라고 나오미처럼 말하는 사람이 되라.
한국 사람들은 “너 죽고 나 죽자.”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것은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같이 죽으려면 “나 죽고 너 죽자.”라고 하는 것이 바른 순서다. 나부터 죽어야 한다. 더 나아가 성도는 “나 죽고 너 살자.”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의 표어는 “나 살고 너 죽자.”라는 것이고 제일 행복한 사람의 표어는 “나 죽고 너 살자.”라는 것이다. 내가 죽고 너를 살릴 때 모두가 사는 축복이 있게 된다.
남의 성공과 행복을 질투하지 말라. 질투는 마음으로 이미 살인한 것과 같다. 남을 질투하는 것은 나의 불행을 준비하는 것이고 남을 축복하는 것은 나의 행복을 준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추구할 때 이웃 사랑을 잊지 말라. 나의 이웃 사랑 속에 나의 하나님 사랑이 증명된다. 또한 이웃 사랑을 통해 고통이 넘치는 ‘마라의 삶’은 끝나고 기쁨이 넘치는 ‘나오미의 삶’이 시작된다.
< 좋은 선택을 하라 >
시어머니의 거듭된 배려의 말을 들고 두 며느리는 결국 다른 선택을 했다. 그때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이별을 아쉬워하면서 입울 맞추고 시어머니 곁을 떠났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붙들고 늘어졌다(14절). 그 짧은 순간의 선택과 결정으로 오르바의 인생과 룻의 인생은 전혀 다른 인생이 되었다.
만약 오르바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왔다면 손위 며느리인 그녀가 룻 대신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오르바가 다윗의 조상이 되고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에 그녀의 이름이 올랐을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좌우하고 이름값도 좌우하고 영생도 좌우한다. 오르바가 가장 잘못한 것은 선택을 잘못한 것이었고 룻이 가장 잘한 것은 선택을 잘한 것이었다.
인생의 성패는 상당 부분 선택에 달려 있다. 그 선택의 순간이 매 시간, 매일, 매달, 매년 내게 찾아온다. 결국 인생의 성패를 위해 선택을 잘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인간이 늘 완벽한 선택을 할 수는 없지만 선택할 때 항상 신앙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고려해서 선택하고 현재를 보고 선택하기보다 미래의 약속과 축복을 바라보며 항상 하나님 우선순위의 선택을 하라.
힘든 일이 있고 몸이 고단해도 꾸준히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이 크게 기뻐하신다. 특히 주일에만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하루의 첫 시간을 구별해서 말씀과 기도의 자리를 지키면 이미 큰 축복을 받은 셈이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큰 은혜로 함께 해 주실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선택을 하면 하나님은 나의 바른 선택을 기쁘게 보시고 그 선택으로 인해 손해 본 것 이상의 축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남을 성공시켜 주면서 삽시다
룻기 1장 8-17절 / 이호준목사
오늘 우리는 남을 성공시켜 주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면서 살았던 두 사람을 본문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 두 사람은 나오미와 룻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어떤 관계입니까?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입니다.
저는 오늘 두 사람의 삶을 살펴보면서 “남을 성공시켜 주면서 삽시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1. 나는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면서 살고 있나?(8-10절).
나오미는 본래 유다 베들레헴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흉년이 계속되자 모압 땅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왜 고향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한 것입니까? 지금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모압에서 성공하기 위해 남편을 따라 가족과 함께 모암으로 간 것입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두 아들을 결혼시키고 며느리를 보고 한번 잘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압 땅에서 나오미는 어떤 일을 경험하게 됩니까?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차례로 잃게 되는 기가 막힌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남편은 의지할 대상입니다. 그런 버팀목이 되어준 남편이 죽은 것입니다.
나오미에게 있어서 두 아들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어준 희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희망이 되어준 두 아들이 차례로 다 죽은 것입니다.
나오미는 세상적으로 볼 때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향 베들레헴에 양식이 풍부하게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오미는 남은 생을 고향 베들레헴에 가서 살려고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나오미에게는 슬픔 중에도 큰 위로가 되어준 두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가려고 하자 모압에서 함께 살았던 두 며느리가 따라 나선 것입니다.(7절).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나오미는 며느리들이 자기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하자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자기를 따라오지 말고 모압에 남아 있을 것을 권유합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8절).
나오미는 자신보다도 두 며느리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면서 배려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두 며느리의 축복을 빌어줍니다.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8,9절).
우리는 나오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두 며느리에게 축복을 빌어주는 것을 통해 지금 나오미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잘 알게 됩니다.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죽는 슬픔을 당했지만 나오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은 채 살고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환경과 처지로 인하여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지금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두 며느리를 축복한 것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는 모압 땅에 머물다가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나오미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지금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고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 축복받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생활 속에서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 입술로 범죄하지 말기 바랍니다. 오히려 힘든 가운데서 나오미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분이심을 고백하며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오미는 힘들고 어렵게 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오미는 자신보다도 며느리의 입장과 처지를 먼저 생각해 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자신이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 있을 때 상대방의 처지를 먼저 헤아리면서 생각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에게 남아 있는 두 며느리는 큰 위로와 힘이 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며느리가 자신을 떠나 모압으로 돌아간다면 나오미는 정말로 혼자만 남게 되는 가련한 신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오미는 지금 자신의 입장보다도 며느리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나오미는 자기보다 남을 먼저 배려해 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늙었지만 두 며느리는 젊었고 얼마든지 재혼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두 며느리의 앞날을 열어주려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로부터 섬김을 받으려 하기보다 먼저 며느리의 입장으르 배려하면서 며느리를 섬기려고 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의 중심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예외 없이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왜 갈등이 주어집니까? 상대방의 입장보다 자기 자신의 입장을 먼저 내세우면서 자기의 유익을 먼저 챙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TV 프로그램 중에 며느리와 시어머니, 딸과 친정어머니가 출연하여 각자 가기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제가 ‘시어머니가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였습니다. 참 민감한 주제였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며느리 입장만 내 세우면서 말하고, 시어머니는 시어머니의 입장만 이야기합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의가 상한다 해도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쪽은 아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자식들에게 희생하면서 베풀었는데 그까짓 것을 왜 못주느냐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세대 차이만 느끼게 되고 자기 입장만 내세우면서 서로 평행선만 그리다가 끝나고 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오미의 경우를 살펴보면 며느리보다 더 힘든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며느리는 각각 자기 남편 한 사람만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며느리보다 더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오미는 자신의 입장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힘들고 어렵게 되면 “아니 지금 내 코가 석자인데” 라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지금 나에게는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 더 큰 문제가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 있을 때 오직 자기 자신의 처지만 생각하게 되면 자기연민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래서 우울해지면서 낙심과 좌절의 늪으로 더 깊이 빠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힘들 때일수록 다른 사람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상대방을 도와주면 다시금 삶의 의욕을 얻게 되고 힘든 문제로부터 속히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돌아보면서 살았던 나오미를 통해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너희는 각각 어미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며느리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9,10절)
일반적으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며느리에게 이제는 나가서 살라고 하면 며느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야호, 이젠 자유다. 드디어 해방되는구나. 만세!’ 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며느리 오르바와 룻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헤어지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것일까요?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평소에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존경받을 만한 성품을 가지고 매사에 좋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가 항상 며느리를 먼저 생각해 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모압 땅에 살면서 지금까지 나오미와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고, 재산도 모두 다 잃었습니다. 그렇지만 잃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잃지 않았습니까?
첫째, 나오미는 힘든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은 잃지 않았습니다. 둘째, 나오미는 며느리들로부터 존경받는 모습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성공했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성공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상대방을 성공시켜 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나오미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잃지 않고 살며,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해 주는 아름다운 인격을 잃지 않고 산다면 관계속에서 성공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존경받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도 나 자신보다 먼저 상대방의 유익을 먼저 구하면서 살아갑시다. 상대방을 성공시켜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나로 인해 당신이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이 행복하기를 원합니다.”는 고백을 진심으로 하면서 살아갑시다.
2. 나는 상대방을 배려해 주면서 살고 있나?(11-17절).
시어머니가 나를 떠나 모암으로 돌아가라고 하자 두 며느리는 어떤 반응을 합니까? 두 며느리가 한 목소리로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나오미는 “그래, 고맙다. 그렇다면 같이 가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며느리들이 늙은 시어머니와 함께 가 준다면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오미는 끝까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면서 살았습니다. 나오미는 상대방을 이용하여 자기의 유익을 챙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오미는 자기를 따라가려는 며느리들을 향해 자기를 따라가면 현실적으로 어떤 일들이 주어지게 되는지를 자세하게 말해 줍니다.
나오미는 어떤 선택을 할 때 특정한 관계에 매여서 마지못해 결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단지 정에 치우쳐 섣불리 결정하지 않도록 배려해 줍니다.
나오미는 11절부터 13절에서 자기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서 생활하게 되면 며느리들에게 실제적으로 어떤 일들이 주어지게 되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그 당시 남편을 잃게 되어 과부가 되면 오늘날처럼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과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가장 비천한 신분을 가지고 평생 가난하게 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실제로 나오미와 룻은 베들레헴에서 가서 남의 집에서 곡식을 거두다가 땅에 남겨 놓은 이삭을 주워 먹으면서 끼니를 잇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룻2:7).
그리고 나오미에게는 나에게는 자식이 없고, 설령 지금 자식을 얻는다 해도 그들이 자라기까지는 앞으로 20년은 족히 기다려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나오미는 자기가 성공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성공시켜 주려고 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13절을 읽어보면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방을 어떻게 베려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13절).
나오미는 자신의 처지보다 며느리의 처지 때문에 더 걱정하면서 마음 아파합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 가장 마음이 아픈 사람은 며느리일까요? 아니면 나오미일까요? 며느리가 아니라 시어머니 나오미였습니다.
지금 며느리들은 남편만 잃었지만 나오미는 남편도 잃었고, 사랑하는 두 아들도 잃었고 모든 재산까지 다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나오미는 며느리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며느리들을 위로하면서 저들이 겪는 어려움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면서 저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처럼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보고는 두 며느리는 큰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들도 주어진 힘든 상황 속에서도 먼저 상대방을 생각하면서 배려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러자 14절에서 두 며느리는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14절).
오르바는 어떤 선택을 합니까? 나오미를 따라가겠다고 울면서 고백하였던 오르바였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말을 듣고 나서는 곰곰히 자신의 앞날을 생각해 본 같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를 따라가기로 선택한 것을 바꾸어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춘 후 모압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합니다(15절).
그런데 룻은 어떤 선택을 합니까? 나오미의 이야기를 들은 후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가기로 굳게 결심하는 선택을 합니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14절). “붙좇았더라”는 히브리어로 “다바크”입니다. “다바크”는 본드로 붙여 놓듯이 ‘굳게 결합하다’(창2:24)는 뜻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6,17절)
‘관심’과 ‘헌신’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을 때만 그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헌신’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그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가미가제 전투에 50번 출격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일지는 모르나 그 일에 헌신된 사람은 아닙니다.
오르바는 나오미를 따라가는 일에 관심은 가지고 있었지만 헌신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룻은 나오미를 따라가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에 헌신되어 있었습니다.
오르바처럼 관심만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룻처럼 끝까지 헌신하면서 충성되이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항상 제자들을 성공시켜 주는 섬김을 행하며 사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려고 했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 버리고 도망갔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배려하신 일로 인해 제자들은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면서 살게 됩니다.
남을 배려하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남을 배려하면서 살 때 상대방은 감동을 받고 변하게 됩니다. 서로 행복하게 됩니다.
우리들도 가정에서 서로 배려해 주면서 삽시다. 목장에서 상대방을 배려해 주면서 삽시다. 그럴 때 제일 먼저 내가 변하게 됩니다. 상대방보다 나 자신이 먼저 행복해지게 됩니다.
우리들도 며느리들을 먼저 생각해 주었던 나오미처럼 상대방을 성공시켜주기 위해 먼저 사랑하고 배려해 주면서 서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오미와 룻
룻기 1:6-18 / 이은규목사
지금은 암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이해인 수녀님이 가정을 소재로 쓴 ‘우리집’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우리집이라는 말에선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우리집에 놀러 오세요!"라는 말은 음악처럼 즐겁다. 멀리 밖에 나와 우리집을 바라보면 잠시 낯설다가 오래 그리운 마음... 가족들과 함께한 웃음과 눈물... 서로 못마땅해서 언성을 높이던 부끄러운 순간까지 그리워 눈물 글썽이는 마음... 그래서 집은 고향이 되나 보다. 헤어지고 싶다가도 헤어지고 나면 금방 보고 싶은 사람들... 주고받은 상처를 서로 다시 위로하며... 그래, 그래 고개 끄덕이다 따뜻한 눈길로 하나 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언제라도 문을 열어 반기는 우리집 우리집... 우리집이라는 말에선 늘 장작 타는 냄새가 난다 고마움 가득한 송진 향기가 난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의 가정이 이렇게 늘 그립고... 따스하고...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창 직장생활에 분주한 한 젊은 직원에게 같은 날 저녁에 세 가지 일정이 겹치게 되었습니다. 외국에서 중요한 바이어가 방문해 실무책임자인 그와 만나기를 희망한다는 갑작스런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회사의 가장 큰 고객인데 내일 바로 출국해야하기 때문에 꼭 오늘 저녁에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업무는 자신이 담당해 왔기에 누구를 대신해서 내 보낼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마침 그 날은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의 학예회가 열리는 날이어서 일찍부터 참석하겠다고 약속을 한 터였습니다. 그동안 회사일이 바빠서 몇 번이나 이런 모임에 참석을 못하였는데, 마침 이번에는 딸이 연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꼭 가겠노라고... 새끼손가락까지 걸고서는 다짐을 해 놓은 터입니다.
게다가 그 날은 학창시절의 우상이었던 외국의 유명한 록밴드가 내한 공연을 하기로 한 날이기도 합니다. 하필이면 그 날이 오늘인지... 그는 정말로 그 공연을 보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한동안 활동이 없다가 팀을 해체하기로 하고서, 고별 공연을 한다고 하니... 오늘이 아니면 그의 젊은 날을 사로잡았던 그 밴드의 공연을 영영 볼 수가 없습니다.
그날 저녁 그 젊은 친구는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일이냐 가정이냐... 아니면 자아를 추구하는 일인가? 이 셋 중의 하나의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이것은 서울대의 김난도교수가 쓴 책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서 아마도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것이 콘서트일거라고 그는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그 자리가 그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 직장의 상사나 가족들에게 덜 원망을 받는 선택이라는 것이지요.
문제는 회사를 위하여 예정에도 없던 바이어를 만나는가? 아니면... 회사에서 무슨 소리를 듣더라도... 딸과의 약속과 가족을 위해서 학예회를 보러 가는가? 인데요... 여러분 같으면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의 경우 일보다는 가족이 희생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중요한 바이어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딸의 유치원 학예회를 선택할 아빠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가정만큼 우리의 삶에서 많은 비중과 시간을 차지하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삶을 가정에서 시작하게 되고... 우리가 살면서 보내는 시간 중 가장 오래 동안 머무르는 곳도 가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가족들과의 약속이나... 가정사들은 사실은 다른 중요한 일들이 있을 때에는 밀려나기 쉽습니다. 다음번에 다시금 그런 기회가 올 것을 믿기 때문인가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가족들은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까요?
작년에 참 많이 들었던 공익광고가 있습니다.
‘사원 김아영은 친절하지만, 딸 김아영은...?’
‘꽃집 주인 이효진은 친절하지만, 엄마 이효진은...?’
‘친구 김범진은 쾌활하지만, 아들 김범진은...?’
‘부장 김기준은 자상하지만, 남편 김기준은...?’
여러분들은 이런 광고를 보았을 때에 어떠셨는지요?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참 친절하고... 자상하고...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어 주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가정에 들어가면 어떠신지요?
오래 전, 제가 신학대학에 막 들어갔을 때의 일입니다. 대부분의 교수님들은 대하기가 참 어려웠지만, 여러 교수님들 중에서 우리들에게 정말 다정다감하시고 늘 명랑하신 교수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어느 날 그분의 댁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당신의 늙으신 아버님께는 얼마나 화를 잘 내시고 거칠게 대하시던지...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이것이 단지 그분의 문제만이 아니라... 나의 문제이기도 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게 잘 대해주면서... 정작 가족들...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고... 가장 중요한 것을 함께 하게 되는 가족들에게는 그렇게 관대하거나... 친절하지 못한지...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서 소설가 최인호씨가 다른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작가이니까 아무래도 시간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일찍부터 자가용을 몰고 다녔는데... 집이 강남의 외진 곳에 있어서... 툭하면 아이들이 아빠를 불러 대더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좀 늦던지... 백화점에 쇼핑을 갔다가 물건이 많던지 하면... 어김없이 아빠에게 좀 데리러 나오라는 것입니다. 밤이고 낮이고... 구별도 없이 그럽니다. 그러다보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너희들이 아빠에게 이럴 수 있냐? 아빠가 운전사냐?’고 화를 냈더니... 딸아이가 깔깔 웃으며... ‘아빠잖아... 아빤데...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쩨쩨하게?’ 아주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대답을 하는 바람에 자기도 그냥 웃고 말았답니다. 그러면서 가족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아주 특별하고도 깊은 신뢰와 유대감을 그는 이야기합니다.
최인호씨는 오랜 시간 샘터에 자기의 가족들을 소재로 해서 가족이라는 소설을 쓰고 그것을 여러 권의 책으로 펴낸 가족 예찬론자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가족들 서로가 다치고 껄끄러울 수 있는 일들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족들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유대감이나 신뢰로 극복할 수 있다면.. 이것은 참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가정이 고달픈 현실 생활에 지쳐서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고.. 관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경우도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나오미와 룻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해체되고 무너질 수밖에는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나오미의 가족들이 양식을 찾아서 베들레헴을 떠나서 모압땅으로 이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나오미의 가족은 남편과 두 아들... 이렇게 네 식구였습니다. 그들은 모압에 정착을 하게 되는데... 그만 가장인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두 아들이 그곳 모압의 여성들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유대인이면서 모압 여성들과 결혼을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들은 다시는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않을 마음을 먹은 것처럼 생각됩니다.
하지만... 나오미의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한 십년 쯤 사는 동안에... 두 아들이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남편을 잃은 세 여성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불행한 일이 나오미의 가정에 밀어닥칠 수가 있는 것인지... 나오미는 더 이상 모압 땅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정이 다 떨어지고... 살고 싶은 의욕조차도 다 사라지고 말았겠지요. 게다가 그동안 흉년이 들었던 그녀의 고향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어서 이제는 좀 살만해졌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나오미는 마침내 모압을 떠나서 다시 베들레헴에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세상을 떠난 두 아들이 그곳에서 얻은 두 며느리들이 나오미를 따라 함께 길을 떠나려 합니다. 길을 가면서 나오미는 곰곰이 생각을 하였습니다. 과연 이 아이들이 나를 따라 길을 떠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자기에게는 베들레헴이 고향이어서 모든 것이 편안하고 익숙하지만... 며느리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그들은 도한 유대인들에게 잘 섞일 수 없는 이방인들입니다. 나오미는 나아가서 자기가 겪고 있는 불행이나 아픔을 그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v.13) 이것이 자기가 겪고 있는 불행에 대한 나오미 자신의 생각인데... 그런 불행에 며느리들을 끌어 들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두 며느리를 그냥 이곳에 남겨 두고 혼자만 떠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님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빈다.’(v.8) 그냥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면서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며느리들이 완강하게 같이 갈 것을 고집하자... 나를 따라와 보아야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들을 돌려보내려합니다. 생각해보면 나오미가 이렇게 결정을 내린 것은 그녀로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을 포기하면서 내린 결정입니다. 자기의 가정... 자기의 가문이 희생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면서라도 며느리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려는 마음이 여기에는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룻기를 읽으면서 이런 나오미의 만류를 뿌리치고 끝까지 시어미니를 따라간 룻의 효성을 높이 평가하지만... 불행은 자기만으로 충분하다는... 그러니 각자 자기들의 행복을 찾아서 자유롭게 떠나라고 하는 나오미의 며느리들을 향한 마음도 참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의 관계가 다 그렇지만... 일방적인 관계는 없는 것이지요. 가족들 사이의 건강한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족들 사이에서 지켜야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윤리를 말할 때... 어느 한 편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적절한 마음 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나오미가 가진 아랫사람들을 향한 마음... 그것을 저는 배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비록 남편은 없지만... 베들레헴까지 나를 따라와야 하는 것... 그것을 당연히 요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혼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그래도... 홀로 된 두 며느리를 데리고 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제는 늙어서 제대로 일 할 수 없는 자신의 먹거리를 장만하는 일을 위해서라도... 그래도 가문을 잇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다른 가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당연히 두 여성을 데리고 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한 번 그녀들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들이 자유롭게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격려해 주고... 복을 빌어 주는 것... 이런 나오미의 모습은 참 아름답고 좋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가정이 행복하고... 활기가 넘치는 곳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 그것은 바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껏 살아 보라.’고... ‘어떻게 하라.’고 말하고 강요하는 대신에... 나는 단지 너희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뒤에서 기도해 주고 복을 빌어 주고... 격려해줄 터이니... 어디 한 번 새로운 세상에 나가서 멋지게 살아 보라고... 기회를 열어 주는 것... 설혹 자녀들이 실패하고 의기소침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에라도 용기를 잃지 않도록... 내가 뒤에서 기도해 줄 테니 다시 해보라고 격려하는 어른들이 계시다면... 그런 분의 자녀들은 훌훌 털고 다시금 일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가정에서 나오미처럼 나이가 드신 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랫사람들을 배려해주고... 격려하며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늘 바쁘고 분주하게 살아가는 모든 가족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주고... 뒤에서 기도해주고 축복하며...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는 것...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들을 응원해 줄 때... 그런 분들로 인해서 그 가정은 항상 웃음이 넘치고 활기찬 가정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자기들의 행복을 찾아서 떠날 것을 당부하였을 때... 끝까지 나오미를 따라 나선 것이 바로 룻이었습니다. 룻은 도저히 늙고 힘없는 시어머니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미 나오미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지 못하고 동서인 오르바는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룻은 오히려 시어머니 곁에 더 달라붙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v.14) 나오미도 그냥 물러서지를 않습니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v.15) 자기를 따라오는 것... 그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을 룻에게 일깨워 주는 대목입니다. 부산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를 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다른 민족의 틈바구니에 섞여서 이방인처럼 외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고... 잘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자신의 미래를 의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룻은 시어머니에게 자기는 결코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자기의 다짐을 밝힙니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v.16)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어머니와 함께 하기 위함이라면... 어느 곳에서 누구와 함께 살더라도... 상관없으며, 자기도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겠노라고 이야기합니다.
룻은 거듭해서 어머니를 설득합니다. 아마도 사람이 한 말들 중에서 룻이 어머니에게 한 말들은 참 아름답고 깊은 사랑을 담고 있는 소중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 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v.17) 흔히들 ‘뼈를 묻는다.’고 하지요. 특히 남자들이 무슨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중요한 약속을 할 때에 그런 말을 사용하고는 하는데요... 나오미를 위한 룻의 마음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룻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한 번 맺은 관계를 마치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여기에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따지자면 나오미와 룻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남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들을 이어주던 남편이라는 끈이 이미 죽음으로 끊어져 버렸으니까요. 게다가 혈통도 다르지 않습니까? 민족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신앙도 다릅니다. 서로가 갈라설 이유를 찾는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을 텐데요... 이렇게 어머니 곁에 뼈를 묻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밝히는 것을 보면... 그녀의 마음속에는 한 번 가족으로 연결된 관계에 대한 소중함이 깊게 배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족이란 바로 이런 것이지요. 이렇게 가족들이 끊을 수 없는 유대감으로 이어져 있을 때... 아무리 갈라설 이유가 있다고 하여도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 이것은 서로에게 커다란 격려와 위안이 됩니다. 세상을 떠난 박완서 씨가 쓴 소설 중에 ‘아주 오래 된 농담’이라는 책을 보면 ‘가족의 힘’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 남매가 많은 고생을 하면서 성장하고...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큰 형은 일찍 미국으로 떠나서 거의 연락도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수성가한 기업가가 되어서 모교에 장학금을 기증한다면서 요란하게 귀국을 합니다.
동생은 참 반갑기도 하고... 연락도 없이 지낸 형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형은 우리를 더 이상 생각하기가 싫은 거야...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불행한 고리를 끊고 싶은 거야...’ 형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형을 만나서 사업가로 성공하게 된 비결을 물었더니... 불쑥 하는 말이 바로 ‘가족의 힘’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동안 난 한 번도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적이 없거든. 그건 가족이 구속이 됐다는 뜻이 아니라 힘이 됐다는 뜻이야. 가족으로부터 힘을 받지 못했다면 무슨 수로 살아 남았겠냐.’ 가족이 가진 신비함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구지 말로 표현을 하지는 않더라도... 이미 가족이라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존재인 것이지요.
오늘 우리들이 룻으로부터 배우게 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한번 가족으로 맺어진 사람들은 나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지요. 어머니가 가는 곳을 끝까지 따라 가고 함께 하려 하는 룻의 마음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처음 시작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룻이 혈통이 다른 이방인인 나오미의 가정에 시집을 온 것... 말이지요. 아마도 그 집이 무엇인가 남다른 것이 있어서 한 가족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처음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불행이 온 집안을 감싸고 있습니다. 구지 나오미가 떠나지 않아도 스스로가 먼저 그 집에서 나올 수도 있었지만... 룻은 달랐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끝까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함께 하겠다고 하는 마음... 상황과 조건이 좋고 나쁜 것에 관계 없이... 가족을 정말 소중히 여기고.. 한 번 맺어진 관계를 귀히 여기는 아름다운 마음이 여기에는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룻의 마음이 참 아름답고 좋았던 모양입니다. 베들레헴까지 온 룻은 비록 낯선 곳이지만 어머니를 위해서 양식을 구하러 분주히 움직입니다. 추수를 하고 있는 밭에 가서 사람들이 남겨 놓은 이삭을 부지런히 줍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마침 그 밭은 나오미의 집안의 먼 친척뻘이 되는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이었고... 그는 룻을 잘 대해줍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나오미는 룻과 보아스를 맺어 주려 합니다. 적합한 절차를 통해서 둘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게 됩니다. 룻이 낳은 아들이지만... 시어머니 나오미의 아들이 되어서 해체 되어 가던 가정을 다시 세우게 됩니다.
그 아기의 이름을 사람들은 오벳이라고 지었습니다. 오벳은 이새의 아버지가 되고,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룻기4:17b) 룻은 역사에 길이 남는 여성이 되었습니다. 그녀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다윗이 태어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놀랍고도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름 없는 한 이방의 여성이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한 번 맺어주신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이어가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였을 때... 그녀가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일을 준비하여 주신 것입니다.
룻이라는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에도 등장합니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마태1:5) 정말 사람의 일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늙고 힘없는 시어머니를 위해서 고생을 자초하러 베들레헴으로 떠났던 룻이 이렇게 영광스런 이름으로 기억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요? 하나님도 이런 룻의 마음을 얼마나 기뻐하시고 좋아 하셨는지...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제주도에 가면 사려니 숲이라는 참 좋은 숲이 있는 모양입니다. 한 번 가고 싶은 곳입니다. 도종환 시인이 그곳을 다녀와서는 아름다운 시를 썼습니다. ‘사려니 숲길’입니다. (사려니는 신성한... 거룩한... 이런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어제도 사막 모래언덕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 배 열 배나 큰 나무들이 몇 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종처럼 생긴 때죽나무 꽃들이 오리 십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정은 마치 숲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숲이 오랜 시간을 거쳐 오면서 생겨나는 것처럼 가정도 그렇겠지요.
나이가 많이 드신 어른들은 다섯 배 열 배 큰 나무가 되어서 뜨거운 햇살로부터 우리들을 가려주는 그늘 역할을 하십니다.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은 향기를 발산하는 때죽나무 꽃이 되어서 가족들에게 활기를 선물합니다.
가족들이지만 서로 다르다는 것... 세대차라든지... 생각의 차이 같은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가정이라는 숲을 다양하고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
아주 작고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가정은 회복되고 숲처럼 생명력을 가지게 됩니다. 너를 배려하는 마음을 서로를 향해서 가지는 것... 가족으로서의 너를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우리들의 가정은 울창한 숲처럼... 그렇게 되어 갈 것입니다.
두 갈래 길
룻 1장 6~18절 / 강용규목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가나안 땅의 벧엘에 살았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이 가진 양떼와 소떼의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서로 더 좋은 목초지를 갖기 위한 다툼이 잦았습니다. 보다 못한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불러서 이야기를 합니다. “너와 나는 골육친지인데 초장 때문에 우리가 서로 싸워서 되겠느냐? 그러니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겠다.” 조카 롯이 동서남북을 쳐다보니 동쪽에 펼쳐진 요단 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땅이 마치 에덴동산처럼 보였습니다. 롯은 그 땅을 선택해서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땅은 멸망하는 소돔이 되고 맙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롯이 선택하고 난 나머지 땅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 땅은 헤브론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지가 됩니다. 어떤 땅을 선택했느냐의 결과가 이렇게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오늘 룻기의 말씀을 통해서 두 갈래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 합니다. 룻의 시아버지는 엘리멜렉입니다. 엘리멜렉은 ‘하나님의 떡집’이라는 이름의 베들레헴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가뭄이 들어 기근이 심했습니다. 그 때 엘리멜렉 가문은 모압으로 이주하면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듣습니다. ‘베들레헴에 남을 것인가, 모압 지방으로 이주할 것인가’ 라는 두 갈래 길에서 엘리멜렉 가정은 모압을 선택했습니다. 모압으로 이주한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윤택하게 되었지만 10년 안에 엘리멜렉이 죽고, 함께 갔던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고 맙니다. 거기에서 말론과 기룐은 오르바와 룻이라는 모압 여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시어머니와 두 며느리 모두가 남편을 잃고 홀로 남겨지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 삶에는 언제나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 앞에서 두 갈래 길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 신앙적인 어려운 일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길로 나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떠나 사느냐는 두 갈래 길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룻기에는 두 갈래 길이 다시 나옵니다. 남편을 잃은 나오미는 과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르바와 룻 두 며느리도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나오미가 두 며느리를 불러 각각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오르바는 어머니 나오미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 나에게 떠나라고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고 말하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어머니를 따라 나서게 됩니다. 룻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과 어머니를 따라 나서는 길이었습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쉬운 길이었습니다. 반면 어머니를 따라 나서는 길은 고향을 떠나 낯선 이방 땅으로 가는 길이었기에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쉬운 길이 아닌 어려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은 넓고 평탄하지만, 그 길은 멸망의 길이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그 길은 협착하고 어렵지만, 생명을 얻는 길이다.” 룻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넓고 평탄한 길 보다는 좁고 어려운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룻은 이방여인으로 성경에 기록되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은혜를 끼치고 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어느 누구도 그들을 따뜻하게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기다린 것은 곡식이 아닌 남들이 추수하다 남은 낟알들뿐이었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도 룻은 자신이 선택한 그 길에 대해서 성실한 자세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여러분, 신앙 안에 사는 우리는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일을 하다보면 종종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잘했다고 칭찬받는 일보다는 잘못했다고 비판 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좁은 길을 얼마나 성실하게 걸어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명한 집안의 유명한 사람들을 선택해서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룻을 보더라도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룻은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룻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여인이 되었던 것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을 성실하게 걸어갔기 때문입니다.
에릭 니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 100미터 경주에 영국 선수로 출전했습니다. 그는 예선과 준결승을 거쳐 결승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결승을 포기했습니다. 그것은 결승전을 치루는 날이 주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경기에 출전하지 않은 그를 두고 영국 언론은 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400미터 경주에 출전하기로 한 대표 선수가 갑자기 복통을 일으켜 경기에 출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 때 감독이 에릭 니델에게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그 물음에 응했습니다. 그리고 400미터 경주에 출전해서 예선, 준결승을 거쳐 급기야 금메달을 손에 거머쥐었습니다.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금메달의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좁은 길을 성실하게 걸어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보상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어 온 이방 여인인 룻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좁은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성실하게 걸어가는 룻에게 보아스를 만나게 해 주시고, 그와 결혼해서 오벳을 낳게 하셨습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고, 그 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습니다. 이와같이 이방 여인 룻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일수록 넓은 길이 우리를 유혹해 오지만, 하나님 섬기는 좁은 길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좁은 길을 성실하게 걸어갈 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보상해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 여인
룻 1장 6~18절 / 류영모목사
I. 세 여인의 눈물
사사시대 베들레헴에 큰 흉년이 들었다. 엘리멜렉이란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으로 내려가 잠시 살게 되었다. 이방 땅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 엘리멜렉이 죽고 후에 장가들어 살던 두 아들도 차례대로 죽고만다. 그리하여 시어머니와 두 며느리 - 세 여인만 외롭게 남겨지게 되었다. 이방 땅에서 시어머니가 된 나오미에게 고국으로부터 기쁜 소식이 들려온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양식을 주셨다는 것이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는 절망과 슬픔을 털고 일어나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바로 이 장면을 기록하는 룻기 저자는 문법에 맞지 않는 한 줄 글을 남긴다. “일어나 돌아오려 하였다” 이 문장에서 주어는 분명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 동사를 사용한다. 세 여인은 몸은 셋인데 마음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의미로 정말 일어나 돌아오는 사람은 나오미 하나였다는 것이다. 본래 며느리 룻은 이방인이었으므로 돌아 올 수 있는 자가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였다. 룻기 저자는 이 신비한 의미들을 문법이 맞지 않는 한 문장을 통해 담아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의 줄거리입니다.
죽은 남편들을 묻어 놓고 세 여인이 서로 등을 기대고 살던 마을을 떠나야 했던 만감이 교차하는 상황을 룻기 저자는 참으로 담백하게 표현합니다.
7절 시작하는 말씀입니다. “있던 곳에서 나오고”
“있던 곳!” 미운정 고운정이 배어 있는 곳입니다. 남편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아프고 쓰라린 추억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특별히 함께 따라 나서는 두 자부는 바로 그곳에서 태어나 청년시절을 보내 온갖 정이 묻어 있는 곳입니다. 부모 형제 친구 일가친척이 살고 있는 고국 - 어머니의 땅입니다. 길거리 나무 한 그루 돌맹이 하나까지 정들지 않은 것이 없는 땅입니다. 이 모든 마음을 담아 저자는 “있던 곳에서 나왔다”는 한 마디 말로 표현합니다.
룻이 있던 곳을 떠났다는 이 말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신앙적 결단에 비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나오미는 청상이 된 두 며느리를 데리고 길을 가다가 생각하니 이 일이 젊은 두 자부에게 못할 짓이다 싶었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해 보니 이 아이들에게 무슨 희망을 줄 수 있겠는가?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처절한 가난 고독한 과부의 삶외에 뭐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오미 가족이 흉년을 피해 모압으로 갈 때 하나님이 주신 땅을 팔고 가면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땅과 가산을 몽땅 팔고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땅을 빼앗기지도 말고 팔지도 말라는 것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이 있습니다. 그 땅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어떤 시험이 있어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약속의 땅이 무엇입니까?
어떤 시련이 있어도 신앙의 길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의 길을 떠나는 것은 인생최대의 불행입니다. 하나님을 버리지 마십시오. 교회생활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교회를 버리지 마십시오. 선택하는 교회마다 실망을 했습니까? 한국의 5만교회를 다 옮겨다녀도 믿음의 공동체 교회를 포기하지는 마십시요. 그 신앙의 땅에서 내게 붙여주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십시요.
그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이 은사를 따라 경륜을 따라 내게 주신 사역의 땅이 있습니다. 그 사역의 땅을 팔지 마십시요. 물론 일하지 않으면 시험도 적겠지요. 소그룹의 지도자(목자)가 되어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어떤 작은 사역이라도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사역이 없으면 섬기는 일이 없으면 상급도 없습니다. 우리는 섬기기 위해, 사역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이 땅에 더 살아야 할 이유도, 건강해야 할 이유도, 돈을 가질 이유도 별로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오미 가족처럼 약속의 땅을 팔고 모압으로 떠나지 마십시요!
약속의 땅을 다 팔고 떠났기 때문에 나오미는 두 자부를 데리고 베들레헴에 들어가더라도 돌아올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두 며느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나오미는 유대와 모압 국경에 서서 두 며느리에게 친정 부모 곁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냐 잘못된 일이냐를 떠나서 분명 나오미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생각이었지만 분명 며느리들을 사랑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아가들아,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나를 선대(헷세드)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길 원하노라. 새 남편을 얻어 부디 사랑받고 살아야 한다.” 국경에선 세 여인은 서러움에 서로 얼싸안고 통곡을 합니다.
이 장면에서 성경 연구가들은 왜 나오미가 “아버지의 집”으로가 아니라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을까 고민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여인의 심정적인 문제입니다. 아마 길을 떠나려 할때 친정 어머니들이 남편도 없는 외국으로 떠나는 딸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금 그 어미의 아픔이 나오미에게 전달되어 그 눈물 흘리던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겁니다.
나오미는 인생의 모진 시련과 어려움을 겪어 왔는데 그 마음이 전혀 강퍅해지지 않았습니다. 지독한 인생 풍파를 견디다 그 심성이 삐뚫어질만도 한데 고운 심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사의 어려움을 감당하다가 상처를 받고 거칠어져 있습니까?
세상과 다른 사람들을 정상적인 눈으로 보지를 못합니다. 건강한 인격을 잃어버립니다.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고은 심성이었습니다. 그런점에서 나오미는 참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모압 국경선에서 얼싸안고 한스런 눈물을 통해 내는 세 여인의 울음소리를 듣고 지은 시처럼 상처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의 저자 정채봉 님은 “세상사”라는 시를 읊었습니다.
울지마
울지마
이 세상의 먼지 섞인 바람
먹고 살면서
울지 않고 다녀간
사람은 없어
세상은
다 그런 거야
울지 말라니까
II. 세 여인의 갈림길
고국 땅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 새 인생을 시작하고 잘 살라는 나오미의 말에 두 며느리는 울면서 시어머니와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그때 11절-13절에서 나오미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합니다.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당시에 과부들이 재가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5:5-6 말씀을 따라 계대결혼(Levirate Marriage)을 했습니다. 남편이 죽고 자식이 없을 때 남편의 형제와 결혼하여 남편의 대를 잇게 한 제도입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자신을 따르는 신앙적 결단에 대한 현실적 보상이 아무것도 없음을 설명합니다. 그 대신 가난과 냉대뿐임을 알려줍니다. 그것이 자신을 따르는 댓가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두 자부 룻과 오르바는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먼저 오르바는 베들레헴으로 가지 아니하고 모압 땅 친정 어머니의 집에 남기로 합니다. 현실적으로 지혜롭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또 한편 자신이 시어머니를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오히려 시어머니에게 큰 부담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오르바가 나오미를 떠난 사실을 비난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시어머니 나오미도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안아주고 소리 높여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한 평가를 나오미의 입을 빌어 분명히 하고 넘어갑니다. 15절입니다. “그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간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세 여인의 갈림길을 냉혹하게 선언합니다. 14절입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최고의 감정적 북받침을 표현합니다. 그리고는 얼음처럼 냉정한 선언을 합니다.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오르바는 떠났습니다. 오르바는 그렇게 하여 성경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그 이후로 오르바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자기 신들에게로 돌아간 자에 대해 성경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뜻도 됩니다.
룻은 저 멀리 사라지는 동서의 등뒤를 시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훔치며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떠난 자리를 자신이 다 채우려는 듯 어머니 곁에 바싹 붙어 떨어지질 않습니다.
성경은 룻이 시어머니에게 찰싹 달라붙어 따르는 모습을 참 재미있는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도 재미있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붙좇다”는 우리말은 고유한 우리말이지만 현대어에선 좀처럼 잘 쓰여지지 않는 말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다바크”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① 창2:24에서 남녀가 결혼하여 한 몸으로 합하여 진다라고 할때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② 시63:8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단단히 붙들고 계시는가 할때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③ 신10:20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때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④ 잠언 18:24에서는 형제보다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단어로 다바크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즉 “붙좇다”는 이 말은 룻이 시어머니와 한 몸이 되어 단단히 붙들고 목숨을 함께 걸고 따라 나섰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룻기에서 룻은 나오미를 어머니라 부르고 나오미는 룻은 딸이라고 부릅니다. 인류역사상 이처럼 아름다운 고부관계는 많지 못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김집사님은 아들 딸을 미국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 딸로부터 초청이 왔습니다. 미국에 도착하니 딸이 마중을 나왔습니다. 딸의 집에 가서 며칠을 유하게 되었는데 아침 일찍 사위가 일어나더니 부엌에 들어가 밥을 짓습니다. 밥을 다 먹은 후 설겆이를 합니다. 청소한다고, 어떤 때는 빨래도 한다고 주물럭 거립니다. 얼마나 사위가 기특하게 보이는지, ‘내 딸 시집 참 잘 보냈다’ 사위가 그렇게 이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위 등을 툭툭 두드리고 이쁘다고 칭찬을 잔뜩했지요.
며칠후 아들 집에 가서 머물게 됐습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들녀석이 앞치마를 주섬주섬 챙기더니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밥 짓고 빨래한다고 빨래통을 뒤적거린단 말이죠. 속에서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며느리를 불러다 놓고 “내 아들 그렇게 안 키웠다. 어디서 배워 먹은 벼르장 머리냐?” 그러고 한참을 나무라다 생각해 보니까 자기 꼴이 우습기 짝이 없더랍니다.
여러분, “시어머니” 그러면 머릿속에 긍정적인 이미지가 지나갑니까? 아니면 부정적인 어떤 상황이 스쳐갑니까?
이 시어머니에 관계된 옛 속담을 한 번 찾아보았습니다. “며느리가 미우면 뒷 발축이 달걀같다고 나무란다.” “며느리 자라 시어머니 되니 시어머니 티를 더 내더라.”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나쁜 시어머니 베지 않은 아이 낳으라고 하더라.” 서양 격언에 보면, “어머니는 요람을 흔드나 시어머니는 가정을 흔들 수 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한결같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며느리된 여러분들,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자를 떼 버리십시오. 언어속에도 시아버지 시어머니 떼 버리고요, 우리 의식속에서도 가치관속에서도 ‘시’자를 떼어버려야 됩니다.
제가 결혼주례를 할 때마다 독특한 여러 가지 순서가 있습니다. 그 중에 부부간에 서로 결혼을 서약한 다음에는 반드시 한걸음 내려서서 아버지 어머니를 향하여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신랑이 고백합니다. “이토록 아름답게 건강한 정신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올 수 있도록 이 사람을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제 아내로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내 아내가 두 분을 아버지, 어머니를 섬겼던 것처럼 저도 이제 두 분을 친아버지, 어머니로 공경하고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아버지, 어머니를 바라보게 한 다음 신부가 고백합니다. “아무개씨를 이토록 건강하게, 육체도 정신도 믿음도 튼튼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를 며느리로 받아주시고 이 사람을 남편으로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남편을 위해서 지금까지 기도해 주셨던 것처럼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남편이 두 분을 어버이로 공경하고 섬겼던 것처럼 나의 친아버지, 어머니로 섬기고 공경하겠습니다.” 고백하게 합니다. 이 고백은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도 결혼생활이 벌써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30년동안 살면서 크고 작은 부부관계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우리 어머님이 내 편을 들어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월을 지내놓고 보니 그것이 어머님의 지혜였습니다. 어버이된 여러분들, 내 피붙이 편드는 것 얼마나 추합니까? 얼마나 못나 보입니까? 성숙하지 못한 태도입니까?
시어머니된 여러분, 곧 시어머니가 되실 분들, 아들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입니다. 유교적인 관념보다는 성경적인 교훈을 우리가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오미가 보여준 시어머니상을 보십시다. 나오미는 중요한 가정문제 결정에 며느리의 자유의사를 존중했습니다. 나를 따라 베들레헴까지 갈 필요가 없다. 네가 원하면 너희들이 좋아하는 이곳에서 살아도 좋다. 당시 사회관습으로 볼 때 파격적인 결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또 나오미는 룻을 일컬어 단 한 번도 며느리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내 딸아, 내 딸아”라고 부릅니다. 그 호칭 속에는 이는 어디서 데리고 온 여인이 아니고 내 딸이라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며느리 룻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룻기 3장 1절에 보면,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너의 행복을 나는 내 행복보다 먼저 생각하고 있다. 나와 함께 손잡고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네 행복의 길이 이곳에 있는 것이 네가 행복할 수 있다고 하면, 너는 이곳에 있어도 좋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부관계입니까?
III. 한 여인 룻
나오미는 신앙의 세계를 떠나 모압 땅에 와 살고 있었지만 신앙의 인격과 향기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룻은 그런 시어머니와의 만남을 통하여 야훼를 믿는 신앙세계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룻은 결단합니다. 나는 어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리라. 어머니의 신앙세계를 나도 맛보리라. 나도 어머니의 백성의 일원이 되어 살리라.
룻도 오르바처럼 좋은 남편 만나 사랑 받으며 자식 낳고 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룻은 모압의 백성, 모압의 신들을 등지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룻은 믿음을 얻기 위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하기로 결단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룻처럼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붙좇는 것입니다.
룻은 끊임없이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는 시어머니 앞에 연설을 합니다. 인류 역사상에서 이만큼 위대한 연설을 본 적이 있습니까? 듣는 사람이라곤 오직 한 사람 뿐입니다. 그 연설은 인류를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을 구하라는 거창한 웅변이 아닙니다. 거기엔 잘 꾸며진 화려한 문장도 아름다운 미사어귀도 없는 소박한 신앙고백이 담겨 있을 뿐이었습니다.
16절 - 17절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왕이 없어 사람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제멋대로 살던” 사사시대에 모압 여인의 입에서 어찌 이토록 아름다운 충절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단 말이요.
지금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그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위대한 설교였습니다. 하늘이 감동하고 땅이 기뻐할 만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백부장과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이스라엘 중 그 누구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감탄하신 그 감탄이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합니다.
여러분, 나비효과란 말을 들어보셨지요.
서울에서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이 태평양 저 멀리에서 폭풍이 되어 바다를 뒤덮을 수 있다는 논리 말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룻의 지금 이 날개짓이 훗날 얼마나 어마어마한 태풍으로 휘몰아쳤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없는 여인이 당당히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됩니다. 다윗 왕의 할머니가 됩니다. 그 가문을 타고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십니다.
룻기 안엔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은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동참하는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룻기는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가족이 되어 구원받은 천국 가족이 된 이 사실보다 엄청난 사건, 엄청난 기적은 없습니다.
IV. 헷세드 - 어머니 마음!
지난 룻기 서론 시간에 룻기의 주제는 따뜻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 - 헷세드라고 했습니다.
① 헷세드는 그들의 남편들도 돌볼 수가 없어서 이 땅에 남겨지고 버려진 세 여인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② 헷세드는 홀로된 며느리들을 딸이라 부르며 그들의 아픔을 먼저 헤아리고 배려하는 나오미의 진심어린 사랑이었습니다.
③ 그리고 룻을 통하여 보여준 헷세드는 부드럽고 따뜻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른길 신앙의 길을 얻기 위해 당찬 댓가를 지불하는 결단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큰 소리로 울며 나를 떠나는 것이 오히려 나를 위하는 길이라고 설득해도 룻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나를 죽이지 않는 이상 어머니를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머니를 향한 끈질긴 사랑 그것이 룻이 보여준 헷세드였습니다.
하나님 안에 가득한 아버지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 - 그것이 헷세드입니다. 헷세드를 잃어버린 오르바는 결국 자기 신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 나오미의 헷세드와 며느리 룻의 헤세드가 하나님의 어머니 마음과 어우러져 룻기를 이끌어가고 다윗 왕조를 탄생시킵니다. 메시야 족보를 만들고 이 땅 예수께서 오시는 길을 만들어 갑니다.
병든 자식을 살리고 자신은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가시고기”의 작가 조창인 씨가 쓴 또 다른 감동작 “등대지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 재우는 어려서부터 똑똑한 그의 형과는 엄청다른 차별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도무지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고 그 차별대우를 이길 수도 없어 집을 나와 등대지기가 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형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동생 재우에게 맡겨놓고 이민을 떠나버립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어머니를 맡아 섬긴다는 건 재우에게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등대에 불이 나가서 불을 켜기 위해 나가게 됩니다. 누워 있던 어머니가 자식을 부릅니다. “재우야! 가지마. 재우야 가지마.” 하지만 재우는 어머님께 “어머니, 저는 가야 합니다. 여기 냉장고에 음식이 있습니다.”하고는 등대를 고치러 나갑니다.
등대에 올라가 끊어진 퓨즈를 갈아넣고, 전기를 다시 연결시키는 순간 재우는 감전되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맙니다. 의식을 찾았을 때 그의 내장은 타 들어가는 듯 몸은 오그라들고 있었습니다. ‘아! 이대로 죽겠구나!’ 생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 시간 수 백 계단을 올라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치매를 앓고 있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올라오면 분명 죽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 내려가세요.”소리쳐 보지만 그 목소리엔 힘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가까이 옵니다. 다가와 어머니가 하는 말 - “너 왜 밥 안주고 여기 있어. 밥 줘!” 그리고는 곧바로 “너 힘드니, 내가 너 살려줄게.” 그리곤 무릎에 아들을 눕힙니다. 빗물을 떠서 이 아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빗물이 들어갈 때 타들어 가는 속이 다 식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세요! 여기 있으면 죽어요. 어머니, 돌아가세요.” “아니야.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한 노인 안에서는 치매와 모성본능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옷을 벗습니다. 그 옷을 벗고 속옷을 빗물에 적셔 아들 입에 넣어 줍니다.
나흘 뒤에 구조대가 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살리고 어머니는 죽어갔던 겝니다. 하반신 마비가 되었던 아들 그러나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느꼈기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등대지기를 지키고 있었던 힘은 바로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사랑 - 헷세드였습니다.
룻기 말씀을 먹다보면 하나님의 자애로운 헷세드의 강물이 내게 흘러 들어옵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헷세드가 되살아 납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는 그곳에서 헷세드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행복이 넘치는 가정
룻 1장 6~18절 / 김형준목사
정작 자신은 한번도 가정의 행복을 누려보지 못했던 존 하워드 페인이라는 분이 “home sweet home"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세상에 쾌락과 궁전 가운데로 내가 돌아다닐지라도
나를 언제나 겸손케 하는 것은 내 집 같은 곳이 다시없음이로다.
가정은 하늘로부터 아름다움이 있는 곳
그리고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는 곳
온 세상을 온통 다 찾아보아도 이런 아름다움을 다른 데에서는 찾을 수 없네.
가정! 가장 감미로운 나의 가정 같은 곳은 다시없도다.
정다운 아버지의 미소 짓는 무릎 아래에 앉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
그리고 나를 위로하고 달래시는 어머님의 어루만지심이 얼마나 다정한가.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쾌락을 찾아 배회할지라도
나에게는 나에게는 다만 가정의 즐거움만을 다오.
가정! 가정! 가장 감미로운 내 집 같은 곳은 다시없도다.
많은 근심의 짐을 지고 나는 돌아오리라.
마음이 가장 사랑스러운 위로와 따스함이 거기서 나를 향해 미소하리라.
나는 다시는 그 오두막집을 떠나지 않으리.
그처럼 포근한 내 집 같은 곳은 다시없으리.
가정! 가정! 감미로운 내 가정 내 집 같은 곳은 다시없도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우리 마음속에 묘한 푸근함과 향수가 떠오릅니다. 가정의 어떤 것이 푸근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일까요? 우리 가정이 화려한 궁궐 같은 집이라서 그럴까요? 아니면 식탁 위에 산해진미가 있어서일까요? 아니면 은은한 불빛과 감미로운 음악이 있어서 그럴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언제나 쉴 수 있었던 어머니의 품, 지치고 힘들어도 돌아갈 수 있었던 넉넉한 어머니의 가슴, 한없이 울어버릴 마음의 아픔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머니의 품에 안겨버리고 나면 모든 시름이 사라지고,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는 그 어머니의 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가정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안정과 편안함 가운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기댈 때마다 항상 받쳐주셨고, 폭풍우에 검은 비바람이 몰아치고 길이 막혀도 아버지가 헤쳐 나갔던 그 길 따라 온 식구가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시작되고 우리의 인생이 마감되는 그 곳, 가정! 얼굴을 맞대며 싸우고 울던 형제, 자매들, 형제 때문에 야단맞아도 그렇게 밉거나 싫어 할 수 없었습니다. 부대끼며 짜증나고 힘들더라도 돌아서서 다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기에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맙니다.
그러나 아름다웠던 기억들과는 다르게, 가족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아픔 때문에 생각하면 쓰리고 아픈 마음을 갖고 계신 분들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되어집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향수와 푸근함을 기억하면서도 동시에 그렇지 못했던 어머니, 그렇지 못했던 아버지와 형제들, 원치 않는 가정의 아픔과 다툼과 비극 가운데 불행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에도 많이 있습니다. 따스함과 편안함을 주었던 부모님,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 형제, 자매들이 세월의 흐름 앞에 어느새 나의 짐이 되고 있고, 내 아픔과 고통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엘리멜렉 가정은 단란하고 아름다웠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에 예기치 않은 흉년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흉년을 피해서 삶의 자리를 모압이라는 땅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모압 땅으로 옮긴 엘리멜렉의 가정은 흉년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가장과 갓 결혼한 두 아들이 죽고 세 명의 과부만이 남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에 불어 닥친 흉년이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출발했던 우리 가정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찢어놓고 갈라놓았던 일들은 없습니까? 가족간에 이해와 사랑의 흉년이 들어 미움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소망이 없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흉년 때문에 삶의 자리를 옳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새롭게 살겠다고 시작했던 삶 속에 더 큰 어려움을 만나서 회복할 수 없는 중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어둡고 험난했던 사사시대 가운데서도, 깨어지고 부서져서 실패한 가정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게 구원 사역을 준비해나가고 계신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서진 가정을 통해서 조차 하나님의 역사 무대에 존귀하고 아름답게 이뤄 가심을 보여줌으로 인해, 가정 때문에 희망을 잃어버린 아픈 우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없었던 세 명의 과부만이 남은 이 가정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가정이 되었을까요? 더 나아가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가정의 풍요로움, 그 풍요로움을 지키고 누릴 수 있는 삶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나오미와 룻이라는 한 가정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희망의 메시지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다리고 있던 그 메시지가 아니겠습니까?
이 가정이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고 복되게 살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오미가 자기와 자기 가정 속에 닥친 불행과 어려움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생각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20절에서 21절을 보면 「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고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 룻기 1장에 보면 ‘돌아가다’라는 단어가 8번씩이나 나옵니다. 나오미가 말할 때마다 "돌아가야 된다, 돌아가야 된다." 이야기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자신의 인생과 가정에 불어 닥친 어려움의 원인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떠난것에서 원인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은 하나님 백성이 당신의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신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나오미는 흉년이라는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가르치시기 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를 듣는 것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고통과 아픔을 피하여 쾌락과 즐거움을 선택했던 자신의 삶과 자기 가정의 선택이 잘못 되었음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육체적인 것에 더 관심이 있었고, 또한 자기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후손들로 기르는 것보다는 모압의 이방인들과 결혼시킴으로 하나님의 백성들과는 상관없는 백성으로 살아가게 만들 정도로 무감각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보다는 내 편안함과 편익을 쫓아서 선택했던 나의 태도가 오늘 내 삶 속에 이러한 불행과 어려움을 불렀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삶을 돌아보는 나오미는 하나님 앞으로 다시금 돌아가고자 믿음을 선택하여 자기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나오미의 홀로서기의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특히 여인들은 더 합니다. 여인들은 평생 세 남자를 의지하고 산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 젊어서는 남편, 나이 들어서는 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상황은 더욱 더 심각합니다. 나오미의 이런 모습을 토머스 풀러(Thomas Fuller) 라는 분은 풀핏주석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보다 연약한 존재이며, 여자 중에서도 노년기의 여자는 더욱 약하다. 그 중에서도 과부는 더 불쌍하며 거기에 가난한 과부는 더더욱 측은하다. 나아가 가난한 노년기의 과부 중에서도 자식이 없는 사람은 더욱 처량하며 그곳도 먼 타국에서 객이 된 자식 없는 가난한 노년기의 과부는 실로 가련하며 불쌍하다. 진정 욥이 남자 중 가장 많은 고난을 겪었다면, 나오미는 여자 중 가장 처량한 지경에 빠진 여자」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재기할 힘도 나이도 돈도 가족들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남은 두 사람, 며느리들을 돌려보내려고 합니다. 신체적으로 연약하기에 며느리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연령이지만 홀로 서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남편 의지하고, 내 돈 의지하고, 내 자식 의지했던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삶의 결단이 며느리들도 돌려보내며 홀로 하나님 앞에 돌아서겠다는 행동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원치 않은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뒤돌아 볼 때 후회하고 원망하고 계십니까?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만큼 섬세하게 살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 내 삶이 있다고 믿는다면, 내 삶에 문제의 원인을 어디서부터 찾아야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으라고 명하신 그 자리와 나에게 살라고 명하신 삶의 모습들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 즉 하나님 백성답게 살라하시는 메시지를 져버리고 편리한 대로, 유익한 대로, 육신의 보이는 대로 선택하여 살아왔던 내 삶을 돌이키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나오미의 모습처럼 우리의 모습도 그러해야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 그것이 회복과 쓰임의 첫 번째 걸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오늘 내 삶을 진정으로 회복시키시고 내 가정을 다시 회복시키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고, 그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길 밖에 없다고 살아온 인생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돌아보며 새롭게 정립하는 나오미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을 의지하셨습니까? 남편과 아내를 의지하셨습니까? 그럴 줄 몰랐다고 울고 있다면 진작 알았어야 할 내용입니다. 자녀도, 남편도, 아내도, 물질도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하거나 평안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이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다시 시작하리라는 그 결단, 그것은 오늘 나의 삶 때로는 희망 없어 보이는 내 가정에 새로운 생명의 출발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부서지고 깨어지고 희망이 없던 이 가정이 회복되고 존귀하게 쓰임 받은 이유는 남아 있는 세 식구 속에 남다른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겨진 세 과부는 각자 인생 속에 다가온 불행을 받아들이면서 더 심각한 불행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불행을 사랑으로 극복하는 놀라운 사랑이 남아있는 세 식구 속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보면 “함께” 라는 단어가 무려 5번 정도 나옵니다. 고통과 환난이 닥치면 가족들 간에 원망하고 원인을 다른 가족이나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게다가 남편과 두 아들들을 잃어버리고 자손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생애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우리 집안 망쳤다고 원망할 것입니다. 두 며느리 입장에서 살펴보십시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어버렸다면, 부모의 죄 값으로 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부모를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남편이 아팠을 그 때 부모가 조금만 더 다정하고, 더 적극적으로 보살펴 주었다면 남편이 살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서운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남편을 잃어버린 여인의 마음은 이미 멍들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서운합니다. 섭섭합니다. 상처가 됩니다. 동시에 이제는 혼자 살아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인생의 거추장스러운 것은 다 떨쳐버리려고 합니다. 신경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신문과 TV에 한 여인이 나와서 울면서 호소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내 자녀를 찾아달라고, 내 자녀를 잃어 버렸다” 그런데 며칠 뒤에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는데, 아이를 죽인 범인은 바로 그 어머니였습니다. 아이를 죽인 이유는 새로 사귄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니, 남자가 아이가 있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아이를 자동차 속에 두고 호수 속으로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내 인생을 출발할 때 거추장스러운 것은 자녀라도 떨쳐버리려고 하는 시대의 풍조 그것이 그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 이혼하는 가정 가운데에서 자녀를 서로 양육하려 하지 않겠다고 하는 모습 속에서도 곧잘 발견하게 됩니다. 버려져서 고아원으로 가는 자녀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은지를 특별히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세 과부가 함께 일어납니다.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심지어는 어머니가 가는 유대 땅 베들레헴까지 동행하겠다고 두 며느리는 이야기합니다. 문화가 다릅니다. 그리고 풍속도 다릅니다. 언어도 다릅니다. 종교도 다릅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익숙한 것과는 결별하는 선택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니면 두 아들과 남편을 잃은 저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알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어머니와 동행하고자 하는 두 며느리를 보게 됩니다.
신명기 23장 3-4까지 보면 암몬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가도 이스라엘 회중에 들어가지 못하는 주변인의 신세로 전락할 것이 뻔한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니면 저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위로할까’ 헤아리며 따라가는 며느리들의 눈물겨운 사연들을 보십시오.
동시에 어머니 나오미의 모습을 보십시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진실된 사랑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7절, 8절 말씀에 「있던 곳을 떠나고 두 자부도 그와 함께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하다가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노라」 ‘선대한다’는 히브리 단어 “헷세드” 의 원래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상황과 조건의 변화에 상관없이 일정한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는 그 마음을 헷세드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너희들이 정말로 나와 내 가족들을 변함없이 진실로 사랑해준 것을 내가 알고 있다. 고맙다. 그런 사랑을 베풀었으니 하나님도 너희를 축복하기를 원한다. 이제는 되었다. 나도 내 삶에 너희들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기에는 나는 너무 늙고 희망이 없고, 이제는 너희들의 삶을 살아서 나가” 라고 이야기합니다. 젊은 며느리들에게 그들 자신을 위한 삶이 있어야 하는 것을 이해하는 어머니와 함께 붙들고 우는 두 며느리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눈물은 사랑의 눈물입니다. 서로의 처지와 형편을 이해하는 가족들을 하나님은 결단코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러한 이해와 사랑이 있는 가정이 망하는 것을 저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아무리 좋은 가정도 이 사랑이 없으면 부서집니다.
가정생활 하면서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부모님들이 아닙니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우리 어머님들이 아닙니까? 어느 곳을 지나가다가 시판에 적힌 어느 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심순덕님이 지으신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입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 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쳐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그 엄마의 사랑. 그러나 당연하게 받아들인 엄마의 인생 그 뒤안길에 한 여인이 느끼는 슬픔과 눈물, 한숨과 탄식을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한 가족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가정에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 형편과 내 상황에 따라서 편안하게 생각하고 내 중심적인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가정입니까? 이런 가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어떤 시어머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분은 아들을 결혼시키기 전에 27살에 혼자가 되어서 아들을 길렀습니다. 둘만 살았기 때문에 며느리를 맞이한다는 것이 너무나 기다려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친구들은 식구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래, 내 아들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6개월 정도만 같이 살다가 따로 살게 해 주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몇 번인가 다짐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이야기하면 화를 내고 역정을 내면서 ‘나는 어머니를 떠나서는 살수가 없어요. 그럴 수는 없어요.’ 라고 이야기 하던 아들이 결혼하고 나서 1주일 뒤부터 눈치가 이상해졌습니다. 자신은 며느리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몰래 새벽에 일어나서 밥을 하고, 일도 없이 밖에 나가서 하루 종일 배회하고 놀다가 저녁에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서 며느리 오기 전에 밥을 해 놓고 기다리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들 내외는 4개월 만에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이제 혼자구나 라는 생각, 의지하고 있던 기둥이 뚝 부러지는 듯한 허탈감과 서러움 때문에 이사하기 전 날 어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사하는 날 아침 따뜻한 밥을 준비해서 이제는 이것이 마지막 식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야기 하면서 먹으려고 했는데, 아들 부부는 이사 가는 집 이야기를 하며 들떠서는 마음으로 울고 있는 엄마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전화 한 통 오더니 그 다음부터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아! 30년 동안 돌아오던 아들이 이제 나보다 더 편안하고 좋아하는 곳으로 갈 곳이 있구나. 생각 하니 혼자 남은 외로움이 그 뼈 속을 파고들었습니다. 비가 오면 정신 잃은 사람처럼 우산을 들고 정류장에 가서 아들을 맞이하러 갈 때도 많았고, 혹 아들이 저녁을 먹으러 올까 밥을 많이 해 놓고 기다렸다가 밥 늦게 식은 밥을 몇 숟가락 먹은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어머니 마음을, 한 여인의 마음을 모른다면 우리는 한 가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편리와 우리의 이익과 유익을 찾아서 판단하며 우리의 필요를 따라서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라면 이런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회복할 사랑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의 아픔의 소리를 듣습니까? 얼마 전 나온 책 중에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요」부모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던 자녀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결국은 증오감 때문에 부모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한 아이의 절규가 책으로 나온 것입니다. 가족간의 대화가 없고 서로의 아픈 마음을 알아 줄 수도 함께 눈물을 흘릴 수도 없는 가정이라면 그 가정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이 가정이 다시금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하나님의 역사 무대에 아름답게 쓰임 받았던 세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가정에는 하나님을 믿는 나오미와 룻의 공동 기도 고백과 신앙 고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같은 신앙 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이 가정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신앙이 하나 된다는 것은 단순한 일치감이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그러합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가 자기의 자부들에게 자신들의 갈 길을 가라고 권고할 때에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붙좇았더라’라는 히브리어로 ‘다브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굳게 결합하다. 붙들고 늘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연상해 보십시오. 며칠 전에 일본 영사관 창살을 붙들고 자기 딸은 창살 안에서 보고 있는데, 끌려가지 않으려고 이 창살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중국 공안원들에게 끌려가는 한 여인의 처절한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이것이 창세기 2장 24절에서는 아담과 하와와 ‘결합하다’라는 단어와 동일하게 사용되었고, 시편 63장 8절에서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런 고백이 16절,17절에 나옵니다.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며,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니 어머님이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장사될 것이라.」라고 고백합니다. 엘로힘!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이 룻의 신앙 속에는 이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이방 여인인 룻이 어디에서 그 신앙을 본받을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부들에게 이야기할 때, 여호와 혹은 전능자라는 단어를 1장 속에 무려 7번이나 사용합니다. 대화의 주어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7번이나 사용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남편이 죽을 때에도, 자신의 큰아들이 죽을 때에도, 둘째 아들이 죽을 때에도 죽음 앞에서도 철저하게 신앙 고백을 했던 그 나오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희망이 없어 좌절하여 주저앉아 울고 싶을 그 순간에 절망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내 삶이 하나님께 있노라. 내 운명이 하나님께 있노라. 내 축복이 하나님께 있노라.’ 고백하며 인생의 거친 길을 걸어가는 모습 속에서 룻은 하나님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어머니, 아버님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절망스러운 일이 오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낙심하는 모습이 아니라, 나의 삶은 하나님께 있노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노라고 고백하며 툴툴 털고 기도의 자리에 서는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에서 천금으로도 살 수 없는 신앙의 아름다운 유산이 자녀들에게 물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며,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신앙이 전달될 때, 하나님은 나오미와 룻을 통해서 메시야의 조상으로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각각 가정에 고난과 어려움이 올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나타낼 중요한 시기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도우시는 주님을 최악의 상태에서도 신실하게 믿고 오히려, 다른 가족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부모님들이라면 말로만 물질로만 그리고, 인간적인 교양으로만 전달하는 삶의 영향과는 분명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원망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이혼율이 30%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고통과 다툼 그리고 무너짐의 소리들이 여기저기 들려집니다.
로마제국 멸망사를 기록했던 에드워드 기본이라는 역사가는 로마제곡의 멸망이 바로 가정의 타락에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급속한 이혼율의 증가와 또 한 가지는 종교의 타락이었습니다. 절대성을 상실한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 쾌락과 상황이라는 것에 도전을 받을 때, 튼튼했던 철의 나라 로마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가시고기라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쓴 등대지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님을 두고 삼 남매 사이의 심리적인 갈등과 다툼을 그린 이야기였습니다. 결국 어머님을 요양원으로 보내기로 했던 삼 남매의 결정 그러나, 어머님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에 막내아들이었던 재우라는 형제는 자기가 있던 외딴 섬 등대에 어머니를 보시게 됩니다.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남다르게 느껴보지 못했던 이 아들에게 어머니는 짐에 불과했습니다. 날마다 밥을 내놓으라고 하고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어머니, 자신의 삶의 리듬을 깨뜨리는 어머니를 모신다는 것은 그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등대에 불이 나가서 불을 켜기 위해 나가게 됩니다. 가만히 있던 어머니가 여러 번 부릅니다. “재우야! 가지마. 가지마.” 하지만 재우는 어머님께 “어머니, 저는 가야합니다. 여기 냉장고에 음식이 있습니다.”라고 하며 갑니다. 등대에 올라가서 끊어진 퓨즈를 갈아 넣고, 전기를 다시 연결시키는 순간 재우는 감전되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맙니다. 의식을 찾았을 때 그의 내장은 타 들어가는 것 같고 몸은 오그라들고 있었습니다.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 이대로 죽겠구나!’ 그렇게 자신을 포기하고 있을 때, 수 백 계단을 올라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치매를 앓고 있던 자기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올라오면 분명 죽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 내려가세요.” 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는 힘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가까이 옵니다. 어머니가 또 이야기를 합니다. “너 왜 밥 안주고 여기 있어. 밥 줘!” 그러면서 동시에 “너 힘드니, 내가 너를 살려줄게.” 그리곤 무릎에 아들을 눕힙니다. 빗물을 떠서 이 아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빗물이 들어갈 때 타들어가는 속이 다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세요! 여기 있으면 죽어요. 어머니, 돌아가세요.” “아니야, 나는 네 곁에 있을 거야.” 치매에 걸려 정신도 오락가락하는 한 노인 안에서는 동시에 모성본능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옷을 벗습니다. 속옷을 벗고 속옷을 빗물에 적셔 아들 입에 넣어 줍니다. 나흘 뒤에 구조대가 왔을 때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살리고 어머니는 죽었던 것입니다. 하반신 마비가 되었던 아들 그러나 잊혀져서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느꼈기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의 이러한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이 오늘날과 같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 이야기는 불행과 갈등 다툼과 고독을 다루고 있지만, 진정 행복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족이 무엇인지 아니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떠하십니까? 진정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도 행복할 수 있다
룻 1장 6~18절 / 조상호목사
시중에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서점에 들어와서 한참 동안 책을 고르다가 갑자기 책을 놓아두고 나가더랍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알아보았더니 그 여인은 어느 가정의 며느리인데 시집을 사기 위해 책을 들었다가, 시집 겉 표지에 쓰여있는 "시"자에 놀래서 책도 사지 않고 그냥 나왔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여인은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떨더랍니다. 알고 보니 그 여인도 어느 가정의 며느리인데, 대화하는 가운데 "시"자가 나오자 그녀는 말하기를 자기는 "시"자만 들어가도 닭살이 돋는다고 하더랍니다. 오늘날 가정을 위기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의 큰 원인은 이와 같은 '고정관념'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이나 시어머니를, 시댁 식구를, 아무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며느리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심리학자는 "오늘날 많은 며느리들의 불행은 시어머니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에 대한 자기의 생각 때문에 온다"고 지적합니다. 또 요즈음은 '시집살이'란 말보다 '며느리살이'란 말이 더 실감난다고 합니다. 수년 전에 서울시내에 거주하는 50~70세 된 500명의 어른들 가운데 64.8%가 자녀들과 같이 살지 않고, 따로 살겠다고 대답을 할 정도로, 자녀들과 함께 사는 것을 불편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가정에서는 자녀들과 사는 것이 그냥 불편할 정도가 아닙니다. 며느리에게 맞는 것을 피해서 시어머니가 가출을 했다고 하는 신문 기사도 보았습니다. 경찰에서 가출한 시어머니를 집으로 데려다 주려고 하자, 집에 돌아가지 않으려고 해서 경찰이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며느리 이야기만 꺼내도 눈물 흘리는 시어머니가 부지기수로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고부갈등은 영원히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일까요? 과연 성경은 고부갈등에 대해서, 부모자식간의 갈등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인 룻기 말씀은 고민과 갈등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우리네 가정들에게 '그래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면서 부모 자식간의 문제,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를 바랍니다.
지금으로부터 3,100년 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직 왕이 없었으므로 각기 자기 소견대로 행하여 문자 그대로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거기다가 흉년이 들자 먹고 살기가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인 베들레헴을 떠나 오늘날의 요르단 지역인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가장인 엘리멜렉이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내 나오미는 두 아들을 데리고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두 아들을 키워 모압 여인들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이제 좀 살만해지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한 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불행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은 한 아들마저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압 땅에서 이민 생활을 시작한지 10년만에 세 번씩이나 줄초상을 당한 것입니다. 결국 한 지붕 세가족이 아니라, 한 지붕 세 과부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편들 다 떠나보내고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관계라고 하는 시어머니와 두 며느리가 한 지붕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 얼마나 불행한 가정입니까? 누가 보아도 저주받은 가정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누가 보아도 소망이 없는 가정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가정은 결코 불행한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은커녕, 오히려 4장 15절에 의하면 며느리 룻을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롯은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마태복음 1장 5절부터 6절을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이 누구입니까?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조상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룻은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엄청난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가정은 불행할 수밖에 없는 가정이었지만, 결코 불행한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축복 받은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어떻게 해서 불행할 수밖에 없는 조건 속에서도 행복했을까요? 무슨 이유로 갈등할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도 우리에게 모델 되는 가정이 되었을까요?
1) 이해하고 사랑하라
사실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는 다른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정에는 이해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본문 6절 이하에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는 남편을 잃은 며느리들의 고독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과부가 되었으니 너희들도 혼자 살아야 한다. 너는 이제 우리 집으로 시집 왔으니 이 집 귀신이 돼야 한다"고 고집하는 그런 시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이방 출신의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고향에 가서 살자면 얼만 힘들까, 젊은 며느리들이 평생을 과부로 살아가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하는 이해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나오미는 물귀신 작전으로 며느리들을 붙잡아 그들로부터 섬김을 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며느리들의 앞길을 위해 살길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것도 인사치레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11절과 12절을 보면,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두 며느리에게 "내 딸들아 돌아가라. 내 딸들아 너희 어미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며 각자의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며느리들을 향해서 뭐라고 불렀습니까? "내 딸들아"라고 불렀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를 딸로 부를 정도로 며느리를 딸처럼 사랑했습니다. 또한 나오미는 자기의 불행을 며느리에게 전가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심한 시어머니 같으면 "너희 두 며느리가 잘못 들어와서 시아버지 죽이고 두 아들 죽였다"고 난리법석을 일으킬 수도 있을 텐데, 13절을 보면 나오미는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신 것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가들아, 내 탓이란다. 나 때문에 이러한 불행이 우리 집에 찾아온 거란다. 결코 너희들 때문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이해심이 많은 시어머니입니까?
그런데 시어머니만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며느리들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그들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하자, 며느리들이 뭐라고 합니까? 9절과 10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두 며느리들은 소리를 높여 울면서 "아닙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있겠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며느리들도 최선을 다하며 부모님을 사랑하며 공경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오미 가정은 이해와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이해하고 사랑하는 가정이 아니라, 며느리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부모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었습니다. 섬김과 공경이 넘치는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네 가정은 어떻습니까? 아마 이 자리에 나오미 가정처럼 다른 민족출신의 며느리를 두었거나, 다른 나라 출신인 시어머니를 모신 분들은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네 가정은 언어도 같고, 관습도, 문화도 같지 않습니까? 믿는 가정이라면 종교까지도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네 가정의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혹시 말로만 이해하고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옛날부터 내려오는 고부간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집 간 딸이 친정에 돌아오면 친정 어머니에게 "시어머니 빨리 죽었으면"하는 이야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친정 어머니가 아주 지혜롭게 대답을 했습니다. "연세 많은 어른은 무엇이든지 과식을 하면 빨리 죽는 법이야. 뭐든지 많이 한번 드려보렴." 이 말을 듣고 시집으로 돌아온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뭐든 많이 드렸습니다. 밥도 많이 드리고, 하루 세끼 밥 외에도 중간 중간에 세 번씩 떡과 과일까지 갖다 드렸습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났습니다. 시어머니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구박하고 못살게 굴던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점점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시어머니는 그 며느리를 아주 잘 대해 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때부터 며느리의 마음도 달라졌습니다. 시어머니가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스럽게 보이고 효도하고 싶은 그런 애착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결국 며느리는 "사랑은 말로써가 아니라, 몸으로써 하는 것이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네 가정은 어떻습니까? 이해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저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는 사랑을, 다시 말해서 몸으로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몸을 움직이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들을 이해하는 이해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이해가 무슨 뜻입니까? 영어로 Understand라는 말로 원래 Under라는 단어와 Stand라는 단어가 합해진 단어로서, '누구 누구 밑에 선다'는 의미입니다. 이해란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 아래에 들어가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은 자녀들의 입장에서 자녀들의 심정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는 부모님 입장에서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남편은 황제처럼 군림하지 말고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는 속 좁은 아낙네의 생각이 아닌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야기되는 많은 문제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부터 내고, 내 생각과 다르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기 때문에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분열과 아픔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한 가정은 서로서로 이해하고 서로서로 사랑하는 가정인 줄로 믿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이해하고 아내가 남편을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애쓸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이해하고 자녀가 부모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애쓸 때, 우리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줄로 믿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이해와 사랑이 넘치는 가정인 줄로 믿습니다. 이해와 사랑이 넘치는 곳에 행복한 가정과 행복한 교회와 행복한 사회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서로 서로 이해하십시오. 그리고 사랑하십시오.
2) 연합하여 나아가라
나오미의 가정은 이해와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었을 뿐 아니라, 연합하여 살아가는 가정이었습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무슨 말입니까? 룻은 어머니께서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방향을 같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또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함께 유숙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숙'이라는 말은 단지 같은 곳에서 '함께 기거한다'는 말일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같은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삶을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살아가는 가정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불행하게도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있지만,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가정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같은 식탁을 대하지만, 식구들의 생각이 각자 다릅니다. 가족들 간의 연합은커녕, 가족간의 대화조차 사라졌습니다.
미국에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자상한 가정의 경우, 하루에 서로 대화하는 시간이 고작 10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아마 자상한 가정이 가족간에 10분밖에 대화하지 않는다는 이 조사결과를 듣고 의아해 하며 "목사님, 무슨 말입니까? 우리 가정은 하루 종일 대화하는데요. 우리 부부는 함께 가게에서 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대화하는 걸요? 우리 집은 아이들 학교 갔다오면 저녁 먹을 때까지 이야기 하구요, 남편 직장에서 돌아오면 잠잘 때까지 이야기해요"라고 말씀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대화를 나누느냐라고 물어보면 그렇지 않은 가정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렇습니다. "여보, 배고프다. 빨리 밥 먹자. 오랜만에 골프를 쳤더니 피곤하다. 오늘은 빨리 자자. 얘야, 오늘은 숙제 없니?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여보, 그거 처리했어? 전화세 어떻게 했어요?" 우리들이 하고 있는 대부분 말들은 대화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정보를 주고받는 정보공유 수준에 불과합니다. 사실은 진지하게 마음속에 쌓여있는 고민과 아픔들을 드러내놓는다든지,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는다든지 하는 대화가 우리들 가정에서 사라졌습니다. 본문에서 '함께 유숙한다'는 말은 같은 지붕 밑에서 산다는 의미 뿐 아니라, 가족이 함께 인생을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가정이 하룻밤 잠시 머물다가는 여인숙이 아니라, 밥만 먹고 잠만 자는 하숙집이 아니라, 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또 17절을 보겠습니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은 가족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시어머니가 죽는 날 며느리도 함께 죽는다는 집단 자살의 의미는 아닙니다. 가정이 운명을 함께 한다는 것은 함께 죽는다는 말이 아니라, 운명을 함께 할 정도로 '연합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룻이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시어머니와 연합된 삶을 살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6절을 자세히 보면 유대 땅 베들레헴에 하나님께서 풍년을 들게 하여 양식을 풍성하게 주셨다는 소문을 듣고 모압 땅에서 다시 고향으로 역 이민을 가려고 한 것을 보면, 나오미 가정에는 과부 된 며느리에게 상속해 줄 유산도 마땅히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모님을 부양할 책임이 룻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런데도 룻은 가족과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연합하여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주위를 보십시오. 가족들이 따로 국밥처럼 따로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남편은 남편대로 비자금 구좌가 있고 부인은 부인대로 비상금 보관창고가 있고,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에게 재산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한쪽에 숨겨놓은 재산이 있고, 자식은 자식대로 유산을 한 푼이라도 더 타내려고 빈털 털이 통장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한 가족이라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여러분! 행복한 가정을 꿈꾸십니까? 그렇다면 모든 가족이 연합하시기 바랍니다. 부모 자식간에 물질과 상관없이 하나되시기 바랍니다. 부부간에 같은 침대에서 다른 꿈을 꾸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나오미의 가정처럼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가정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물질은 풍족하지 못해도 여인숙으로서의 가정이 아니라, 하숙집으로서의 가정이 아니라, 함께 삶을 영위해 가는 가정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믿음으로 살아가라
나오미의 가정은 이해와 사랑이 넘치며, 함께 연합하여 살아가는 가정 뿐 아니라, 신앙이 일치된 가정이었습니다. 사실 시어머니와 두 며느리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어머니는 유다 사람인 반면, 며느리는 어디 사람입니까? 요단 동편의 모압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도 달랐습니다. 그리고 관습도 문화도 먹는 음식도 달랐습니다. 처음에는 종교도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고부갈등을 중재해 줄 수 있는 시아버지나 남편도 없습니다. 처음에 이러한 고부관계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모압 땅에서 살아가는 나오미 가정의 어려움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호주에 살 때, 같은 교회에서 봉사하던 박모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남부럽지 않은 가정이었습니다. 1남 1여를 두고 행복하게 살아가던 가정이었습니다. 사업도 잘해서 물질을 많이 벌었습니다. 또한 그 분은 번 돈을 아무렇게나 쓰지 않고 멋지게 쓰던 분이셨습니다. 교회의 대소사에, 특별히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헌금을 하여 2세들의 교육에 대단히 열정을 기울이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결혼을 앞둔 아들이 아버지이신 박 집사님께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했습니다. 안 그래도 여동생이 먼저 시집 간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결혼을 한다는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될 아가씨가 한국인이 아니라, 레바논 출신 아가씨라는 것입니다. 박집사님은 오랫동안 고민을 했습니다만, 아들이 좋다는데 결국은 허락을 해서 결혼식을 초일류로 성대하게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였습니다. 제가 그분 아드님이 결혼식을 마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그 분 댁을 방문했을 때,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조집사(제가 평신도 때입니다), 우리 며느리가 얼굴도 이쁘고 마음씨도 곱고 착하긴 한데, 시아비로서 아쉬운 것이 한둘이 아이야. 물론 며느리가 다른 외국인들과 달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기는 해. 커피도 잘 타오고 애교도 있고, 아이는 참 좋은데, 그래도 섭섭해.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님 안녕히 주무셨어요?'라고 공손하게 인사하지 않고 'Good morning, Mr Park'라고 말하며 내 볼에 와서 '쪽'하며 키스를 하는데, 내가 아무리 현대 사람이라 할지라도 너무 섭섭해. 또 내가 아무리 커피를 좋아해도 그렇지 하구 헌 날 커피와 샌드위치는 싫어. 때때로 며느리가 만든 따끈한 된장국과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해."
저는 8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 분의 말이 귀에 생생합니다. 저는 국제결혼으로 외국 며느리를 본 시어머니, 시아버지들이 겪는 고통을 많이 보았습니다. 쥐어박지도 못하고 말도 통하지 않고, 가슴앓이만 하고 있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물론 저는 청년들에게 외국인과는 결혼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주안에서 하나임에 분명합니다. 외국인과도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여 평생동안 외국인 배우자를 스스로 감당할 수 있고, 부모님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전까지는, 그 결혼을 유보하십시오. 외국인과의 결혼생활은 본인에게 뿐 아니라 부모님이나 친척들에게도 쉽지 않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도 서로 다른 배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엄청난 간격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떻게 하나될 수 있었습니까?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문화적인 차이나 민족간에 차이나 세대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신앙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롯이 시어머니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한번 16절을 보겠습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아마도 이 고백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드렸던 가장 감동적인 고백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원래 롯은 모압의 신을 섬기던 이방 종교를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집을 와서 새로운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어머니의 신실한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마침내 "어머니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위에 보면 고부갈등에 휩쌓여 있는 가정들 가운데 교회의 직분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교회 권사인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겠다고 하는 며느리도 있습니다. 집사 며느리 꼴 보기 싫어 교회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시어머니도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시어머니 나오미 처럼 신실한 모습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크리스챤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과 14절을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직적으로는 죄인인 인간이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고, 수평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사이를 하나되게 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다면, 십자가의 진리를 확실하게 믿고 있다면 저는 고부간의 갈등과 부모 자식간의 갈등은 치유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가족의 어려움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온 가족이 진정한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 어떠한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극복될 줄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책에서 읽은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일학교를 갔다 온 아들이 어느 날 자기 아버지에게 "아빠, 천국은 어떻게 생겼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신실한 크리스챤인 아버지는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아들아, 천국은 말이야. 우리 집 갔단다." 저는 그 아버지의 "천국은 우리 집 같다."는 고백을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과연 우리 집은 어떠한가, 우리 집은 천국과 같은가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천국과 같습니까? 아니면 지옥과 같습니까?
누가 돌아온 자들인가?
룻 1장 6~14절 / 박용규목사
오늘 현대인들의 성인병을 ‘생활습관병’이라고 합니다. 서구화된 식생활, 스트레스, 운동부족에 의해서 고혈압, 당뇨, 비만 등, 성인병의 70% 이상이 잘못된 생활습관 때문에 발생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들이 평균 약을 4가지 이상을 복용한다고 합니다.
"습관을 바꾸면 120세까지 살 수 있다"는 책의 저자 김양규 한의원장은 기독교인입니다. 그는 한의학을 전공하면서 동양철학의 사상에 기초한 한의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성경을 60독이나 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모든 인간들은 습관의 존재입니다. 한 사람의 생활습관, 생활방식은 그 사람이 반복한 수많은 행동의 결과입니다.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은 그 사람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반영하게 됩니다" 라고 했습니다.
좋은 신앙의 습관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영적인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작은 일부터 신앙적인 판단과 사고를 해야 합니다. 영적인 좋은 습관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영적인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행동을 만들고 잘못된 행동이 잘못된 습관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소식을 듣고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 며느리와 나눈 대화의 내용입니다.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셨는데 그분이 여호와 하나님, 다시 말해서 언약의 하나님,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임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떠났던 나오미는 10년 동안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먹고 살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예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백성들을 돌보셨음과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음을 기억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돌아오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은혜 나누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다시 돌아올 수 있다.(6-7절)
고통과 절망 가운데 살았던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룻기 1장 6절은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결단을 내리게 되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보심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돌보시사(히브리어, 파카온)"는 단순히 돌보다라는 뜻이 아니라 "주의 깊게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났다고 합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오랜 생활을 청산하고 원래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났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영적각성을 선포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사야 60장 1절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오미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보시사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일어났을 때, 신앙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을 채울 자가 누구이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권고하심으로 양식을 주셨기 때문에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을 떠난 후 스스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을 부르시고 이끌어 주셔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이방 땅에서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 며느리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오미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나오미를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베들레헴입니까? 모압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움직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과 아무런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과 경험, 욕심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있습니까? 영적인 눈을 뜨고 있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있는 곳은 모압 땅입니다. 그곳에는 화려한 조명은 있지만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땅입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장 5절에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고 기록합니다. 세례요한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을 해도 영적으로 장님인 그들은 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눈을 뜨게 하셔야만 볼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우리에게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셔서 구원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영적인 눈을 뜨지 않고는 예수를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 들리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영접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이 자리에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들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믿음을 주시고 진리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제트기를 타고 미친 듯이 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 축복을 보여주시고 확인시키시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시고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신 백성들에게 돌이킬 수 있는 때에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남보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구원의 은혜와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이킬 때, 말씀을 듣고 깨우침을 받을 때 알게 하십니다.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자신이 이 세상에서 집착하고 추구하고 붙잡고 있는 것이 헛된 것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미련하고 고집스러운가 하면 대부분 자신이 죽을 때,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때 가서 후회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인류역사가 증명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만큼 미련하고 고집스러운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 속에 나타난 인간들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알고 그분의 뜻과 계획을 발견하여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도리어 거꾸로 반응할 때가 더 많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열심히 봉사하고 있으니, 이 세상에 고난, 환난을 면케해달라는 것입니다. 이정도 수준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충분히 살 수 있는 육의 양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라는 것은 "하나님! 오늘도 먹을 양식을 주세요. 스테이크로 주시든지, 한식으로 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을 보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주시지 않았습니까?
만나는 저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일매일 거두는 것입니다. 많이 거두어도 하루 지나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더 가지고 더 채우려는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하루하루 하나님을 의존하는 믿음의 삶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 항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끊임없이 말씀으로 설득하시고 돌이킬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믿음은 도박이나 확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헌신하고서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간섭하셔서 자발적 순종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이번 폭우로 피해를 입은 오송역 지하도 참사로 인해서 많은 생명을 잃었습니다. 가족을 잃고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시고 있겠습니까? 버스에 물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그때 화장을 고치는 어리석은 여성이 있겠습니까? 화장을 고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빨리 탈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모압땅에 있어서는 안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나오미처럼 약속의 땅을 향해서 떠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십자가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과 고통의 땅에서 자유와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온갖 멸시, 수모를 겪으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있다면 주저함 없이 말씀이 들릴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언약의 하나님을 굳게 붙잡으라(14절)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일어나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며느리들에게 "너희 각기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라" 고 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이 있겠지만 두 며느리에게 자신들의 고향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연민의 정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향에서 재혼을 해서 새로운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룻기 1장 9절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라고 말씀합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의 미래를 많이 걱정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고향을 향하여 돌아가면서 모압땅에서 성공해서 금의환향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실패자가 되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룻기 1장 13절은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라고 말씀합니다. 남편과 두 자식을 잃고 혼자도 아니고 두 명의 이방 며느리들을 데리고 간다는 것이 나오미에게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나오미는 고향 사람들에게 받을 시선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룻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룻기 1장 14절은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시어머니의 거듭된 간청에 큰 며느리 오르바는 나오미와 입을 맞추고 결국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방여인이 베들레헴에서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은 오르바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 신앙의 삶이란 우리의 상식과 지성을 뛰어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룻기 1장 14절은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시어머니의 간청을 받아들인 오르바의 선택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룻의 행동을 가리켜 "그를 붙좇았더라" 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어로 ’다바크‘는 "달라 붙어있다. 굳게 잡고 늘어지다" 라는 뜻입니다.
룻에게도 시어머니를 따라 가려고 하면 자신의 가족들과 이별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이제 그녀는 이방 여인이기 때문에 재혼의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룻은 그를 붙좇았습니다. 오늘 롯의 고백은 자신의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겠다는 고백입니다. ’붙좇았더라‘라는 단어는 창세기 2:24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라고 기록된 "합하여" 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룻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는 길을 선택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나오미는 모압에서 며느리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소개를 한 것 같습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룻의 고백에 자신을 따르지 말라고 간곡한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룻은 룻기 1장 16절에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라고 언약의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룻은 베들레헴으로 가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자신의 미래도 불투명합니다. 그러나 룻은 삶의 환경보다 시어머니가 섬겼던 언약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잡았습니다. 결국 룻은 보아스를 통해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고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오시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통로가 된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이 죄악된 세상 속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영적인 축복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약을 이루시는 선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결코 떠나서는 안됩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반드시 언약의 하나님께 꼭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잠언 16장 25절은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필경"은 영어번역으로 it’s end, 그 길의 끝이란 뜻입니다. 사망은 한번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죽는 것, 지옥이다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가는 길이 옳은 길, 옳은 삶인 줄 알고 평생 살아왔는데 자기 앞에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나 황망스럽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자기 중심, 생각,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길은 진리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에서 요한복음 15장 4-5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영적인 싸움은 자신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어야 생명을 공급받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룻은 이방 여인이었지만 시어머니를 통해서 언약의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진정으로 여호와께 돌아온 여인은 나오미가 아니라 룻입니다. 룻기 2-4장에서 그녀를 부를 때마다 ‘모압에서 돌아온 여인’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모압땅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흔들리지 말며 날마다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때 선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채우시는 은혜가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룻의 의리
룻 1장 6~18절 / 이종철목사
예루살렘으로
오늘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이나 하나님 말씀이 아닙니다. 이 둘은 부차적이고 여성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 주된 메시지입니다. 주요 모티프는 귀향입니다. 나오미가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두 며느리 중 하나인 오르바는 고향인 모압으로 돌아가고, 룻은 나오미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룻에게는 귀향이 아니라 새로운 땅으로의 여행입니다.
‘돌아간다’는 단어가 1장에서만 12번이나 사용됩니다. 히브리어로는 ‘수브’인데 이 단어는 보통 ‘여호와께로 돌아간다’는 말로 신앙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회개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경우는 신앙적 돌아감이 아닙니다. 6절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에서처럼 먹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부들에게도 돌아가라는 이유 또한 그들의 생명 때문입니다. 그곳이 더 안전하고 생명을 보존하기에 용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나오미의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란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신앙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나오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룻도 함께 했습니다. 이곳에서 결국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들의 돌아옴을 신앙적 사건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결국은 은혜입니다. 내가 현명해서도, 아니면 내가 어리석어서도 아닙니다. 미래를 누가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각자는 최선을 다할 뿐이고 좋은 결과가 나왔다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결과가 좋지 못하다면 다른 어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다음 일을 기대하면 됩니다.
이 여인들에게 신앙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삶이나 생존이 먼저고 신앙은 이를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나오미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8)란 말에서 매우 신앙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사용하는 말을 보면 여호와는 신이나 운명처럼 상투적인 이름일 뿐입니다. 그랬던 나오미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해가는 것이 룻기의 과정입니다. 어찌 되었든 이들에게는 가장 급선무가 생존입니다. 신 또한 생존을 위해서 필요할 뿐입니다. 생존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를 용납하십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들의 운명은 남성들보다 더 가혹했습니다. 룻기는 고대 여성들이 당한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과부 세 명만 남았습니다. 이들은 지금 생존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이들에게는 신앙이나 동족이나 핏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존에 유리한 것이 선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셋이서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나오미가 두 자부를 돌려보내려 합니다. 고향에 가면 자기 한 몸이야 살 수 있겠지만 이방인인 둘의 생존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자기들 고향으로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돌려보내려 했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형사 취수법
두 자부는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합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여성들의 운명이 어떠함을 잘 보여줍니다. 고대 여성들의 삶은 남편이나 그 아들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자기가 줄 수 있는 씨가 없다고 합니다. 늙은 나이에 결혼할 수도 없고, 설사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도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당시 생활풍습이 형사취수법입니다. 레비레이트란 불리는 이 제도를 신명기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신25:5-6) 형사취수법은 죽은 자의 이름을 잇게 해주려는 목적입니다. 또한 이는 가문의 재산을 보존하거나, 홀로 남은 여성을 보호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룻기는 이 형사취수법이 주요 소재가 되어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룻기에서는 형사취수법의 의무조항이 친척에게까지 확대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룻과 나오미는 자신들의 생명줄인 보아스를 붙잡았습니다. 악착같은 생명의 의지로 보아스와 결혼합니다. 좀 부정적으로 묘사하면 두 나오미와 룻 두 여자가 작당하여 보아스란 남자를 홀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문에 다윗의 혈통이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생명의 힘이 결국 구속사나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도구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척박한 현실에서 악착같이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유사한 운명이 창세기에 등장하는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이야기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맏며느리였습니다. 그런데 연이어 두 아들이 죽자 유다는 다말에게 형수를 취하는 형사취수법을 남은 자식에게 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에 다말은 창녀로 분장하여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여 임신을 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다가 분노하여 며느리 다말을 죽이려 하자, 다말이 바로 당신의 씨라고 밝힙니다. 이때 유다가 다말에게 했던 말입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창38:26) 옳도다는 단어는 ‘체다카’입니다. 의롭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의롭습니까?
동양사회에서는 패륜적인 행동이 의롭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다말은 이를 통해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 이들을 통해 유다 가문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유다 아들의 이름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구원사를 이어가게 했습니다. 윤리에 앞서는 것은 생존입니다. 다말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룻과 나오미는 하나님 말씀을 이용하여(?) 생존을 도모했고,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룻의 결단
이 상황에서 오르바는 고향으로 돌아갔고, 룻은 끝까지 나오미와 함께하기로 결단합니다. 이후의 결과가 잘 되어서 그렇지 오르바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돌아서지 않고 중도까지 따라온 것으로 그의 의리를 잘 보여줍니다. 오히려 자신이 짐이 된다고 생각 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도 이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빛나는 것은 룻의 선택입니다. 룻은 나오미와 함께 하겠다며 16-17절의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결혼식에서 상대방에게 하는 유명한 고백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대신 ‘예수님’을 넣으면 이 또한 대단한 신앙고백이 됩니다. 영화에 버디 무비라는 것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주인공이 된 영화입니다. 주로 남자 둘이나, 여자 둘이 그렇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한마음이 되어 한 몸처럼 어려움을 헤쳐 나갑니다.
14절에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는 단어의 사용이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결합에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여기 ‘합하여’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퀴어비평에서는 이것을 성관계까지 염두에 두었다고 해석하는데 이는 지나칩니다. 그만큼 둘이 우정으로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생존의 위기가 둘을 강하게 연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필요합니다. 인간은 홀로 설 수 없습니다. 함께 있으면 없던 힘도 나고 위기도 견딜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들은 기독교의 교리나 예수님 말씀은 좋은데 기독교인들이 싫어서 교회를 멀리합니다. 그래서 혼자 기도하고 말씀 읽으며 나홀로 신앙생활 하겠다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공언과는 달리 신앙을 조만간에 버리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홀로 떨어진 고고한 영혼은... 홀로 타는 석탄과 같다. 그 불길은 이제 식는 일만 남았다. 더 이상 뜨거워지지 않을 것이다.” 신앙은 세상의 가치관과 악한 영들과의 투쟁입니다. 서로 모여 기도하며 찬양하며 격려할 때 지치지 않고 싸울 수 있습니다. 내가 힘들 때는 옆 사람이 기도로 도와줍니다. 내가 풍족하면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돕습니다. 서로 격려할 때 신앙이 불이 붙습니다.
어찌되었든 룻의 결단은 대단합니다. 룻은 실상 민족도, 종교도, 고향도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친척, 아비집을 버리는 결단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결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고 했기에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룻의 결단은 이보다 더 대단합니다. 어떤 약속도 받지 못한 채 다만 의리로만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룻에게 복은 주신 이유는 이 의리 때문입니다.
나오미에게 선대(헤세드)를 베푸는 룻을 하나님께서 선대(헤세드) 하셨습니다.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8) 우리에게는 헤세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헤세드를 베풀면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헤세드를 베푸십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선의 씨앗을 뿌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가정 (룻기 1장 6-10절)
< 섬겨주는 믿음을 추구하십시오 >
한 신실한 어머니가 아들이 입대할 때 말했습니다. “아들아, 군대에 가면 힘들 때가 많다. 그때마다 기도해라.” 그 아들이 전역 후 선원이 되어 먼 바다로 출항할 때 말했습니다. “아들아, 군대보다 바다에서 더 힘들 때가 많을 것이다. 매일 기도해라.” 그 아들이 나중에 결혼할 때 말했습니다. “아들아, 결혼하면 군대나 바다에서보다 더 힘들 때가 많을 것이다. 늘 기도를 앞세워 살아라.”
가정은 세심하게 돌봐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계가 있기에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성도에게 가정과 교회 중에 어느 곳이 소중한 곳일까요? 어려운 질문 같지만 어렵지 않습니다. 가정이 더 소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의 가정은 일차로 섬겨야 할 ‘작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는 ‘큰 가정’입니다.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섬김입니다.
저는 두 딸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 미리 틈틈이 교육합니다. “얘야, 엄마의 식사 준비를 도우면서 틈틈이 요리도 배워라. 남편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할 줄도 알아야지. 남편에게 가급적이면 설거지 시키지 말고 네가 하도록 해라.” 그러면 어떤 사람은 오해합니다. “목사님은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것 같다. 남녀평등 시대에 딸 입장도 생각해주시지.”
언뜻 보면 남의 딸을 매우 생각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의 두 딸은 그런 말에 대해 가부장적인 아빠가 구시대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전혀 반발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딸들이 비판의식이 없고 순종적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빠의 그 말이 “남편을 잘 섬겨주라는 말이구나.”라고 여기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믿음교육, 인성교육, 가정교육을 하는 것인 줄로 알고 기쁘게 웃으면서 받아들입니다. 남을 생각해주는 것도 잘 생각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통전적인 사고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제가 딸에게 남편을 섬기도록 교육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사고가 아니라 가족을 섬겨주라는 성경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교육입니다. 만약 제게 이들이 있었다면 당연히 이렇게 교육했을 것입니다. “얘야, 너는 네 아내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아내가 힘들어하면 네가 요리나 설거지도 하면서 힘써 도와주어라. 무엇이든지 아내가 힘들어하면 적극 나서서 아내를 힘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섬겨주어라.”
왜 그렇게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이 성경적인 믿음 교육과 섬김 교육을 합니까? 무조건 희생해야 된다는 희생 콤플렉스를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행복의 핵심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희생과 섬김을 강요하면 가정이 불행해지지만 내가 희생과 섬김을 작정하면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왜 나오미 가정이 남자들이 연쇄적으로 죽는 줄초상의 비극을 극복하고 후일에 다윗을 배출하는 왕가의 뿌리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녀의 가정 저변에 흐르고 있던 ‘섬겨주는 믿음’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가정 >
본문에는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나오미 가정의 얘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얘기에는 감동적인 장면이 많고 하나님이 어떤 가정을 축복하는지 여러 교훈도 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가정을 축복하실까요?
1. 사랑으로 함께 하는 가정
본문에는 유난히 ‘함께’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모압 지방에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6절). 두 며느리도 나오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출발했습니다(7절). 그때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각자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남편을 얻으라고 한 후 하나님의 축복까지 빌어주며 두 며느리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8-9절).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사랑과 배려에 감격해서 큰 소리로 울면서 말했습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10절).” 그 장면을 보면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모압 출신 며느리들이 베들레헴에 가면 이방인으로 온갖 멸시를 당할 가능성이 컸지만 그래도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딸도 아닌 이방인 며느리가 자기 남편들이 죽은 상황에서 돈이 한 푼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와 함께 하겠다고 결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복이 없겠습니까?
어떤 분야든지 크게 쓰임 받는 인물들은 대개 가족 사랑이 많습니다. 가족 사랑이 없는 사람은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려면 최소한 싸움만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생명체는 다 사랑이 있습니다. 식물도 암술과 수술의 사랑이 있고 벌레의 울음소리도 사랑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새는 하늘에서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사랑이 있기에 번성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 열매 맺는 생명은 없습니다. 가정도 번성하는 복 받는 가정이 되려면 늘 사랑으로 함께 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2. 서로를 배려하는 가정
나오미는 두 며느리까지 자기 곁을 떠나면 의지할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지만 두 며느리가 그들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힘들 때 서로 함께 하면서 힘을 모으면 자기는 좋지만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을 생각해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며느리들은 그런 시어머니의 배려에 감격해 울었습니다. 그처럼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불행은 곧 끝나고 행복의 길이 펼쳐진 것입니다. 배려하는 마음을 받을 때 삶은 감동이 되고 인생은 행복해집니다.
저는 목회 초창기에는 사모가 새벽기도에 한번이라도 빠지면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런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새벽기도를 빠지면 아내가 먼저 스스로 미안해하면서 최선을 다하는데 속으로라도 화를 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그때를 아내를 배려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여줄 좋은 기회로도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내도 고맙게 생각하면서 더 최선을 다하면서 저에 대한 대접도 좋아집니다. 그 날에는 식사도 더 잘 차려줍니다. 무조건 인상만 쓸 일이 아닙니다. 배려하면 감동해서 더 잘하려고 합니다.
저는 결혼하고 아내가 식사를 잘 차려주는 것이 늘 고마웠습니다.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그 일을 저는 못할 것 같은데 아내는 잘합니다. 그래서 늘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가끔 며칠 동안 계속 같은 반찬만 해줘도 좋다고 합니다. 진짜 좋아서가 아니라 아내가 수고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 배려하는 마음을 받고 아내가 “그래, 남편 요구대로 같은 반찬을 계속 해주자.”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잘해줍니다. 배려하는 마음을 받으면 배려하는 마음을 돌려줍니다.
도로에서 정신을 놓고 전화하면서 너무 천천히 운전하는 것도 배려가 없는 태도입니다. 그러면 경적을 눌러 주의를 줍니다. 그러나 <초보운전> 딱지를 붙인 차가 나타나면 많은 차들이 배려 모드로 들어가서 그 차를 왕처럼 대접하고 경적도 안 울립니다. 갓난아이에게 왜 빨리 걷지 않느냐고 호통 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배려가 없는 것은 악해서가 아니라 대개 교양의 부족 때문입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말씀을 통해 잘 배우고 실천해야 할 삶이 배려하는 삶입니다. 최고의 배움 중의 하나가 배려입니다. 서로 배려할 때 공동체에 축복도 넘치게 됩니다.
3. 서로 축복해주는 가정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배려해서 그들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을 뿐 아니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면서 두 며느리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오미 가정을 쓰셨을까요? 극심한 고난 중에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서로 아껴주고 축복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남 잘 되기를 빌어주면 자신이 더 축복받습니다. 사촌이 땅을 살 때 배가 아프면 결코 축복받지 못합니다. 남이 부당하게 잘살면 안타깝게 생각하고 정당하게 잘살면 인정하고 존중해주십시오. 가족과 교우와 친구가 잘 되면 배가 아프게 되지 않고 오히려 소화가 잘되는 마음을 훈련하십시오. 많은 사람을 축복하되 가족은 더욱 축복하십시오. 서로 축복해주는 가정에 하나님이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축복의 말 한 마디가 중요합니다. 교인을 교회에 잘 정착하게 하는 것은 정교한 프로그램이 아니고 믿음과 칭찬과 축복의 말입니다.
교우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꿈을 심어주고 열심히 칭찬해주십시오. 교회와 교우를 자랑하고 교우의 단점을 변호해주십시오. 초신자나 교회 정착을 고려하는 성도가 “저가 왜 저래요?”라고 하면 “나도 잘 몰라요. 꼴 보기 싫지요?”라고 동조하면 마음이 통해 잘 정착할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잘 정착하지 못합니다. 그런 말이 들리면 이렇게 변호하십시오. “그분 스타일이 조금 달라서 그래요. 그분에게 다른 좋은 장점도 많은데 한번 사귀어보세요.” 그러면 듣는 사람도 이해심이 커지고 교회도 잘 정착합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이 그토록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예언을 좋아해서 예언자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자기가 일종의 예언자이고 자기 말이 일종의 예언입니다. 성경은 “네 말한 대로 된다.”고 곳곳에서 말씀한 것은 자기 말이 ‘예언 자체’보다 더욱 능력 있는 ‘예언 성취’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늘 믿음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말하면서 패배자의 언어가 아닌 승리자의 언어를 가지십시오. 그러면 생각과 기분이 달라지고 마음과 태도도 바뀌고 결국 미래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의 말에는 부분적인 창조적 능력이 있습니다.
<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십시오 >
예전에 한 여성이 심신이 너무 병든 상태에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습니다. 말할 수도 없었고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곧 죽을 날만 기다리며 병원에서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녀의 오빠가 목회자였습니다. 그가 여동생의 소식을 듣고 그녀의 집으로 가서 그녀가 누운 어두운 침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에게 어떤 깨달음이 생기면서 갑자기 창으로 가서 커튼을 열어젖히고 말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 이 방에 임재하소서!”
곧 그가 동생에게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어 강하게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습니다. “메리! 일어나 걸어라!” 그 말이 메리의 내면에 잠재해있던 믿음을 촉발시켰습니다. 그때 여동생이 정말로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기적적으로 그 다음부터 그 여동생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졌습니다.
나중에 그가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메리! 어떻게 그렇게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게 되었니?”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때 일어나 걸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그가 말했습니다. “아냐! 메리!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말했어.” 그녀가 말했습니다. “아녜요. 내게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어요.” 그가 또 말했습니다. “아냐! 정말로 내가 말했어.” 그녀가 또 말했습니다. “절대 아녜요.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다리와 몸에 힘이 생겼고 기력과 정신도 돌아오면서 보고 걸을 수 있었어요,”
성도의 입은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는 통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축복과 격려의 말을 해주면 그 말이 상대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집사님! 힘내세요.”라고 하면 그 한 마디가 단순히 위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믿음과 비전의 불씨를 새롭게 점화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평범한 말도 하나님의 음성이 섞여 들려지면 그 말이 기적적인 능력을 일으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말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아십시오.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가장 위대한 것은 축복의 말입니다.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너는 할 수 있다. 더 나은 미래가 네게 준비되고 있다. 네가 너무 사랑스럽구나. 사랑한다.”라고 해주십시오. 그런 말을 가족과 교우에게 해주면 그 말에 하나님의 음성이 섞이면서 말한 대로 되고 치유가 일어나고 나쁜 집착이 끊어지고 위대한 미래가 펼쳐질 수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가족과 교우가 해야 할 가장 큰 의무와 책임은 그런 믿음의 말을 많이 해주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한 가족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 하에 이뤄진 만남입니다. 서로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말해주십시오. 약점보다 장점을 많이 생각하고 많이 말해주십시오. 상대는 그런 말에 많이 굶주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십시오. 가족은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교사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선교지는 바로 가정입니다. 교회와 가정에서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공동체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살다보면 가정에 어려운 일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말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부모나 교회 리더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자녀와 교인에게 오래 좋은 기억으로 남는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것입니다. 그런 신앙 교육이 있을 때 우리 자녀와 교우 중에도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위대한 인물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가정
룻 1장 6-10절 / 이한규목사
< 섬겨주는 믿음을 추구하십시오 >
한 신실한 어머니가 아들이 입대할 때 말했습니다. “아들아, 군대에 가면 힘들 때가 많다. 그때마다 기도해라.” 그 아들이 전역 후 선원이 되어 먼 바다로 출항할 때 말했습니다. “아들아, 군대보다 바다에서 더 힘들 때가 많을 것이다. 매일 기도해라.” 그 아들이 나중에 결혼할 때 말했습니다. “아들아, 결혼하면 군대나 바다에서보다 더 힘들 때가 많을 것이다. 늘 기도를 앞세워 살아라.”
가정은 세심하게 돌봐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계가 있기에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성도에게 가정과 교회 중에 어느 곳이 소중한 곳일까요? 어려운 질문 같지만 어렵지 않습니다. 가정이 더 소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의 가정은 일차로 섬겨야 할 ‘작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는 ‘큰 가정’입니다.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섬김입니다.
저는 두 딸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 미리 틈틈이 교육합니다. “얘야, 엄마의 식사 준비를 도우면서 틈틈이 요리도 배워라. 남편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할 줄도 알아야지. 남편에게 가급적이면 설거지 시키지 말고 네가 하도록 해라.” 그러면 어떤 사람은 오해합니다. “목사님은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것 같다. 남녀평등 시대에 딸 입장도 생각해주시지.”
언뜻 보면 남의 딸을 매우 생각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의 두 딸은 그런 말에 대해 가부장적인 아빠가 구시대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전혀 반발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딸들이 비판의식이 없고 순종적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빠의 그 말이 “남편을 잘 섬겨주라는 말이구나.”라고 여기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믿음교육, 인성교육, 가정교육을 하는 것인 줄로 알고 기쁘게 웃으면서 받아들입니다. 남을 생각해주는 것도 잘 생각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통전적인 사고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제가 딸에게 남편을 섬기도록 교육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사고가 아니라 가족을 섬겨주라는 성경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교육입니다. 만약 제게 이들이 있었다면 당연히 이렇게 교육했을 것입니다. “얘야, 너는 네 아내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아내가 힘들어하면 네가 요리나 설거지도 하면서 힘써 도와주어라. 무엇이든지 아내가 힘들어하면 적극 나서서 아내를 힘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섬겨주어라.”
왜 그렇게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이 성경적인 믿음 교육과 섬김 교육을 합니까? 무조건 희생해야 된다는 희생 콤플렉스를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행복의 핵심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희생과 섬김을 강요하면 가정이 불행해지지만 내가 희생과 섬김을 작정하면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왜 나오미 가정이 남자들이 연쇄적으로 죽는 줄초상의 비극을 극복하고 후일에 다윗을 배출하는 왕가의 뿌리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녀의 가정 저변에 흐르고 있던 ‘섬겨주는 믿음’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가정 >
본문에는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나오미 가정의 얘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얘기에는 감동적인 장면이 많고 하나님이 어떤 가정을 축복하는지 여러 교훈도 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가정을 축복하실까요?
1. 사랑으로 함께 하는 가정
본문에는 유난히 ‘함께’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모압 지방에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6절). 두 며느리도 나오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출발했습니다(7절). 그때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각자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남편을 얻으라고 한 후 하나님의 축복까지 빌어주며 두 며느리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8-9절).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사랑과 배려에 감격해서 큰 소리로 울면서 말했습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10절).” 그 장면을 보면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모압 출신 며느리들이 베들레헴에 가면 이방인으로 온갖 멸시를 당할 가능성이 컸지만 그래도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딸도 아닌 이방인 며느리가 자기 남편들이 죽은 상황에서 돈이 한 푼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와 함께 하겠다고 결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복이 없겠습니까?
어떤 분야든지 크게 쓰임 받는 인물들은 대개 가족 사랑이 많습니다. 가족 사랑이 없는 사람은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려면 최소한 싸움만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생명체는 다 사랑이 있습니다. 식물도 암술과 수술의 사랑이 있고 벌레의 울음소리도 사랑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새는 하늘에서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사랑이 있기에 번성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 열매 맺는 생명은 없습니다. 가정도 번성하는 복 받는 가정이 되려면 늘 사랑으로 함께 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2. 서로를 배려하는 가정
나오미는 두 며느리까지 자기 곁을 떠나면 의지할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지만 두 며느리가 그들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힘들 때 서로 함께 하면서 힘을 모으면 자기는 좋지만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을 생각해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며느리들은 그런 시어머니의 배려에 감격해 울었습니다. 그처럼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불행은 곧 끝나고 행복의 길이 펼쳐진 것입니다. 배려하는 마음을 받을 때 삶은 감동이 되고 인생은 행복해집니다.
저는 목회 초창기에는 사모가 새벽기도에 한번이라도 빠지면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런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새벽기도를 빠지면 아내가 먼저 스스로 미안해하면서 최선을 다하는데 속으로라도 화를 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그때를 아내를 배려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여줄 좋은 기회로도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내도 고맙게 생각하면서 더 최선을 다하면서 저에 대한 대접도 좋아집니다. 그 날에는 식사도 더 잘 차려줍니다. 무조건 인상만 쓸 일이 아닙니다. 배려하면 감동해서 더 잘하려고 합니다.
저는 결혼하고 아내가 식사를 잘 차려주는 것이 늘 고마웠습니다.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그 일을 저는 못할 것 같은데 아내는 잘합니다. 그래서 늘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가끔 며칠 동안 계속 같은 반찬만 해줘도 좋다고 합니다. 진짜 좋아서가 아니라 아내가 수고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 배려하는 마음을 받고 아내가 “그래, 남편 요구대로 같은 반찬을 계속 해주자.”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잘해줍니다. 배려하는 마음을 받으면 배려하는 마음을 돌려줍니다.
도로에서 정신을 놓고 전화하면서 너무 천천히 운전하는 것도 배려가 없는 태도입니다. 그러면 경적을 눌러 주의를 줍니다. 그러나 <초보운전> 딱지를 붙인 차가 나타나면 많은 차들이 배려 모드로 들어가서 그 차를 왕처럼 대접하고 경적도 안 울립니다. 갓난아이에게 왜 빨리 걷지 않느냐고 호통 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배려가 없는 것은 악해서가 아니라 대개 교양의 부족 때문입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말씀을 통해 잘 배우고 실천해야 할 삶이 배려하는 삶입니다. 최고의 배움 중의 하나가 배려입니다. 서로 배려할 때 공동체에 축복도 넘치게 됩니다.
3. 서로 축복해주는 가정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배려해서 그들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을 뿐 아니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면서 두 며느리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오미 가정을 쓰셨을까요? 극심한 고난 중에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서로 아껴주고 축복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남 잘 되기를 빌어주면 자신이 더 축복받습니다. 사촌이 땅을 살 때 배가 아프면 결코 축복받지 못합니다. 남이 부당하게 잘살면 안타깝게 생각하고 정당하게 잘살면 인정하고 존중해주십시오. 가족과 교우와 친구가 잘 되면 배가 아프게 되지 않고 오히려 소화가 잘되는 마음을 훈련하십시오. 많은 사람을 축복하되 가족은 더욱 축복하십시오. 서로 축복해주는 가정에 하나님이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축복의 말 한 마디가 중요합니다. 교인을 교회에 잘 정착하게 하는 것은 정교한 프로그램이 아니고 믿음과 칭찬과 축복의 말입니다.
교우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꿈을 심어주고 열심히 칭찬해주십시오. 교회와 교우를 자랑하고 교우의 단점을 변호해주십시오. 초신자나 교회 정착을 고려하는 성도가 “저가 왜 저래요?”라고 하면 “나도 잘 몰라요. 꼴 보기 싫지요?”라고 동조하면 마음이 통해 잘 정착할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잘 정착하지 못합니다. 그런 말이 들리면 이렇게 변호하십시오. “그분 스타일이 조금 달라서 그래요. 그분에게 다른 좋은 장점도 많은데 한번 사귀어보세요.” 그러면 듣는 사람도 이해심이 커지고 교회도 잘 정착합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이 그토록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예언을 좋아해서 예언자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자기가 일종의 예언자이고 자기 말이 일종의 예언입니다. 성경은 “네 말한 대로 된다.”고 곳곳에서 말씀한 것은 자기 말이 ‘예언 자체’보다 더욱 능력 있는 ‘예언 성취’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늘 믿음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말하면서 패배자의 언어가 아닌 승리자의 언어를 가지십시오. 그러면 생각과 기분이 달라지고 마음과 태도도 바뀌고 결국 미래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의 말에는 부분적인 창조적 능력이 있습니다.
<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십시오 >
예전에 한 여성이 심신이 너무 병든 상태에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습니다. 말할 수도 없었고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곧 죽을 날만 기다리며 병원에서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녀의 오빠가 목회자였습니다. 그가 여동생의 소식을 듣고 그녀의 집으로 가서 그녀가 누운 어두운 침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에게 어떤 깨달음이 생기면서 갑자기 창으로 가서 커튼을 열어젖히고 말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 이 방에 임재하소서!”
곧 그가 동생에게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어 강하게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습니다. “메리! 일어나 걸어라!” 그 말이 메리의 내면에 잠재해있던 믿음을 촉발시켰습니다. 그때 여동생이 정말로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기적적으로 그 다음부터 그 여동생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졌습니다.
나중에 그가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메리! 어떻게 그렇게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게 되었니?”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때 일어나 걸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그가 말했습니다. “아냐! 메리!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말했어.” 그녀가 말했습니다. “아녜요. 내게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어요.” 그가 또 말했습니다. “아냐! 정말로 내가 말했어.” 그녀가 또 말했습니다. “절대 아녜요.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다리와 몸에 힘이 생겼고 기력과 정신도 돌아오면서 보고 걸을 수 있었어요,”
성도의 입은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는 통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축복과 격려의 말을 해주면 그 말이 상대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집사님! 힘내세요.”라고 하면 그 한 마디가 단순히 위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믿음과 비전의 불씨를 새롭게 점화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평범한 말도 하나님의 음성이 섞여 들려지면 그 말이 기적적인 능력을 일으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말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아십시오.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가장 위대한 것은 축복의 말입니다.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너는 할 수 있다. 더 나은 미래가 네게 준비되고 있다. 네가 너무 사랑스럽구나. 사랑한다.”라고 해주십시오. 그런 말을 가족과 교우에게 해주면 그 말에 하나님의 음성이 섞이면서 말한 대로 되고 치유가 일어나고 나쁜 집착이 끊어지고 위대한 미래가 펼쳐질 수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가족과 교우가 해야 할 가장 큰 의무와 책임은 그런 믿음의 말을 많이 해주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한 가족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 하에 이뤄진 만남입니다. 서로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말해주십시오. 약점보다 장점을 많이 생각하고 많이 말해주십시오. 상대는 그런 말에 많이 굶주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십시오. 가족은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교사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선교지는 바로 가정입니다. 교회와 가정에서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공동체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살다보면 가정에 어려운 일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말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부모나 교회 리더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자녀와 교인에게 오래 좋은 기억으로 남는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것입니다. 그런 신앙 교육이 있을 때 우리 자녀와 교우 중에도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위대한 인물이 나올 것입니다.
선택을 잘한 사람
룻 1장 6~14절 / 조상호목사
톨스토이의 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3형제가 청년의 나이가 되어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가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3형제는 함께 마을길을 따라 나오다가 세 갈래의 갈림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로 갈까하고 한참 동안 망설이던 세 사람은 각자 다른 길로 가기로 했습니다. 첫째는 오른쪽 길로, 둘째는 가운데 길로, 셋째는 왼쪽 길을 택해서 각자의 길로 떠났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어느 도시에서 한 강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강도가 가게에 침입하여 주인을 해치고 돈과 물건을 도둑질한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는 곧 붙잡혔습니다. 강도와 가게 주인이 함께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강도와 가게 주인은 오래 전에 헤어졌던 형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재판하던 재판관도 알고 보니 3형제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각기 다른 길을 선택하여 떠났던 3형제가 재판관과 강도와 가게 주인이 되어 법정에서 다시 만난 것입니다.
왜 이 세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달라졌습니까? 무엇이 3형제의 인생을 이렇게 다르게 만들었습니까? 재수가 없어서 입니까? 아니면 행운이 따라주지 않아서 입니까? 아닙니다. 인생에는 우연이란 것은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은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선택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어느 분은 우리의 인생을 'B to D'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B는 'Birth(태어남)'이고 D는 'Death(죽음)'을 의미합니다. 즉 인생은 태어나서 죽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B와 D사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 B와 D 사이에 무슨 스펠링이 있습니까? C가 있습니다. C는 'Choice(선택)'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난 후부터 이 땅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적으로 무언가를 선택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 태어나는 것 빼고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유치원, 학교, 직업, 배우자, 주거지, 자동차 등을 선택해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죽고 나서도 어떻게 장례를 치러야 하는지, 어느 장지에 묻혀야 하는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 누구를 선택하느냐,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한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고 더 나아가 가문의 운명을 좌우하고, 역사까지 바꿔놓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룻기는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면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베들레헴에 살았던 엘리멜렉은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먹을 것을 찾아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기근을 피하기 위해 잠시 동안 머무르려고 했던 모압에서의 삶은 오랜 시간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압에서 타향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고 말았습니다. 남편을 잃은 나오미는 두 아들 기룐과 멜론을 차례로 장가를 보냈지만, 모압 땅에 거주한 지 10년 쯤 되었을 때 두 아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모압으로 이민을 갔던 나오미에게 돌아온 것은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뿐이었습니다. 잘 살려고 모압으로 이민을 갔다가 가장인 남편을 잃고, 사랑하는 두 아들까지 잃어버리는 비극을 겪은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오미는 ‘복된 소식’을 듣게 됩니다. 고향 땅인 베들레헴에 기근이 끝나고 먹을 양식이 풍족하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난 후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는 일련의 길을 선택합니다. 오늘 본문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세 사람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씩 살펴보겠습니다.
1) 나오미의 육신적인 선택
나오미는 육신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6절을 보면,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고향 땅인 베들레헴에 은혜를 베푸셔서 기근이 끝나고 먹을 양식이 풍족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선택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 잃고 떠나 온 지 10년 만에 빈털터리로 가면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나오미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눈총이 아니라, 먹을 것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먹을 양식이 풍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먹고 살기 위해 다시 베들레헴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인간적인 선택’, 혹은 ‘육신적인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선택을 할 때, 무엇보다도 육신적인 것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래서 모압 땅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 갈 것을 결단한 것입니다.
또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한 내용을 보아도, 그녀가 육신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두 며느리와 함께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갑자기 두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야훼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야훼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8~9절) 나오미의 이 선택은 ‘인간적인 선택’, ’육신적인 선택’입니다. 이 선택은 인간적으로는 아주 잘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영적으로 볼 때, 잘못된 선택입니다. 15절에서,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두 며느리를 과거의 우상숭배 신앙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나오미가 두 며느리의 육신의 행복을 위해 선택한 것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훌륭한 시어머니입니다. 육신적인 눈으로 볼 때, 며느리들이 유대 땅에 가서 평생 동안 과부로 사는 것보다 그냥 모압 땅에 눌러 앉아 새로운 남자를 만나 재혼을 하고, 친정식구들과 친구들과 함께 사는 것이 며느리에게 있어서는 더 바람직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육신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저는 나오미가 육신의 행복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혼의 행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선택은 영혼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어느 글에 보니까 꿩을 키우는 꿩 사육업자들은 공중에 그물도 치지 않은 채 꿩을 기르는데도 꿩들이 날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물을 치지 않으면 다 날아서 도망을 쳐야 하는데도 꿩들은 멀쩡한 날개를 갖고 있음에도 하늘로 날아가기는커녕, 날아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육업자들이 꿩들에게 조그마한 모자를 만들어 꿩의 눈을 살짝 가려놓기 때문입니다. 꿩들은 아무리 튼튼한 날개를 갖고 있어도, 하늘이 보이지 않으면 결코 날아오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파란 가을 하늘이 펼쳐져 있는데도, 날아갈 수 있는 튼튼한 날개가 있는데도, 수백 마리의 꿩들은 주인이 던져 주는 모이나 주워 먹으면서 살만 찌우다가 결국은 음식점에 팔려가는 신세 된다고 합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꿩처럼 저 멀리에 있는 것은 보지 못한 채 눈앞에 있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나오는 롯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육신적 것만을 기준 삼아 요단 동편의 물이 넉넉한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조카 롯은 육신적인 선택을 했지만, 아브라함은 영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과 달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축복의 땅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육신적인 선택을 했던 조카 롯은 이방인들에게 포로로 잡혀갔고, 물이 넉넉한 요단 동편에 있는 소돔과 고모라 땅은 불과 유황으로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선택을 했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과 복의 근원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선택을 할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처럼 눈에 보이는 육신적 것을 기준 삼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영적인 것을 기준 삼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나 본문에 나오는 나오미처럼 육신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나오미는 육신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2) 오르바의 실용적인 선택
오르바는 실용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11절부터 13절을 보겠습니다.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야훼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신명기 25장에 의하면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다른 형제가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인들에게 별다른 사회적 보장이 없었던 때,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허용하셨던 보호방편이자, 가문을 이을 수 있게 하는 승계방편이라고 할 수 있는 관습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아들을 다 잃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들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설령 나오미가 다시 결혼하여 아들들을 낳는다 할지라도, 두 며느리가 그 아들들을 남편으로 맞이하기에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에게 고향인 모압 땅으로 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오르바가 어떻게 했습니까? 다같이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작별의 키스를 하고, 떠났습니다. 물론 7절에서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처음 얼마 동안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따라서 유대 땅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허락을 하자, 처음 오르바는 다른 며느리 룻과 함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10절)로 말하며 유대 땅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나 오르바의 마음은 바뀌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두고 떠날 마음이 없었습니다. 고생스러워도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늙은 과부 시어머니를 따라 가면 고생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자기도 늙어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시어머니처럼 과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도 없이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고생고생하며 사는 것보다, 고향에서 좋은 사람 만나 새롭게 인생을 출발하는 것이 훨씬 더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중에 모압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오르바를 향해 무조건 이기주의자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고 친정으로 돌아갔지만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가 말하려고 하는 요점은 그녀의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실리’ 즉 이익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르바의 선택은 ‘실용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녀는 ‘명분’보다 ‘실리’를 선택했습니다. ‘신앙’보다 ‘이익’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난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같이 15절을 보겠습니다.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이 말씀은 오르바가 단순히 그의 시어머니의 품을 떠난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을 떠나 모압 사람들이 섬기는 그모스나 바알브올 신을 섬기는 우상 땅으로 돌아간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자기 종족들이 섬기는 신을 버리는 것은 고향이나 친척이나 아비 집을 떠나는 것 이상으로 극히 어려웠습니다. 특별히 부족국가를 이루며 살던 당시에는 부족 신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흔하지 않았으므로, 추측컨대 오르바는 하나님 신앙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우상을 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든지 사실이 아니든지 오르바의 이름은 성경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조용히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실용적인 선택때문입니다. ‘명분’보다 ‘실리’를, ‘신앙’보다 ‘이익’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전에 몇 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1620년 9월6일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미국 동부를 향하여 출발하였을 때,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 호를 타고 남미로 간 청교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부류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배를 탔습니다. 남미로 간 사람들은 Gold를 얻기 위해 매스터 호를 탔습니다. 남미에서 엄청난 양의 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새로운 대륙에 가서 새로운 기회를 잡아 부자가 되겠다는 목적으로 매스터 호를 탔습니다. 반면에 북미로 갔던 사람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메이플라워 호를 탔습니다. 영국 국교도들의 핍박으로 인해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자, 마음껏 찬양을 부르고 마음껏 기도를 하고 마음껏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메이플라워 호를 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매스터 호를 타고 남미로 간 사람들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북미로 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돈을 찾아 남미를 선택한 사람들은 신앙도 잊어버리고 돈도 벌지 못했습니다. 지금 남미 지역의 나라들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어렵습니까?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등의 나라들은 인플레이션과 반복되는 경제 불안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찾아 북미를 선택한 사람들은 신앙의 르네상스를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물질의 풍성함도 누리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영화, 과학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물질을 쫓아가면 물질을 얻지도 못한 채 망하지만, 신앙을 쫓아가면 신앙 뿐 아니라 물질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익을 쫓아가는 사람들입니까? 신앙을 쫓아가는 사람들입니까? 로마 제국의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았고, 또 부인으로부터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이 예수 대신 흉악한 강도였던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소리를 지르자, 민심이 동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수님을 버리고 바라바를 택하였습니다. 그는 양심을 버리고 대세의 흐름을 따랐던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의 이름은 2,000년 동안 저주 받은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보다 실리를 선택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익보다 중요한 믿음을 더 사모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익을 얻는 자리보다 은혜 받는 자리를 더 사모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르바는 이익을 위해 실용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3) 룻의 신앙적인 선택
룻은 신앙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사실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면 남은 인생동안 시집살이를 계속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이나 있으면 남편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시집살이를 해도 억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이미 세상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 고향인 모압 땅을 떠나 유대 땅으로 이사를 가면 친정 부모님이나 형제들이나 친구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또 유대 땅에 가면 이방 여인이라는 이유로 괄시를 받게 될 것이 뻔합니다. 또 시어머니가 허락을 해주지 않으면 새로운 남자를 만나 재혼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이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다시 한 번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작별의 키스를 하고 떠났지만, 룻은 시어머니 나오를 붙좋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붙좋았다’는 말씀을 NIV 영어성경에 보면, ‘Cling’의 과거 ‘Clung’이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이 말은 붙잡고 늘어지다, 들러붙다, 고수하다, 집착하다는 의미로 끝까지 좇는 것을 말합니다. 룻은 나오미를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그녀가 어떤 고난과 역경이 와도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하겠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남편과 아들도 없이 혼자된 시어머니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심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16절과 17절에 그에 대한 답이 나옵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야훼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그녀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따랐던 이유는 단순한 동정심 때문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믿고 있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룻은 실용적인 선택을 했던 오르바와 달리, 신앙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즉 ‘이것이 나에게 이익이 될 것인가, 손해가 될 것인가’를 생각하기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인가‘를 더 생각했습니다. 룻의 선택은 ’신앙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결국 신앙적인 선택을 했던 룻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보아스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립니다. 전 남편이 죽고 나서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았던 그녀는 보아스로부터 위로와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보아스 사이에서 오벳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룻은 이스라엘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보다 더 귀한 복은 그녀의 이름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에 오르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다 어떠한 고난과 어려움도 감수하고 신앙적인 선택을 한 결과입니다.
실용주의가 판을 치는 이 시대에 룻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이나 외교가들이 실용주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명분도 좋지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빨리 발을 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업가들은 반드시 이익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이 실용주의가 판을 치다보니 사람을 사귈 때도 먼저 이익을 생각합니다. 이익이 되면 사귀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멀리 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만나고 손해 볼 것 같으면 멀리합니다. 여러분, 이 실용주의와 이기주의가 때때로 기독교의 최대의 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실용주의자들은 다른 사람이 물에 빠졌든지, 강도를 만났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실용주의자들은 지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바누아투에 미전도 부족이 있든지 상관하지 않고, 우리 교회만 부흥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오르바의 생각입니다. 오르바는 실용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룻은 달랐습니다. 룻은 실용적으로 생각하던 오르바와 달리 신앙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손해도 감수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오르바와 같이 실용주의자가 되지 말고, 룻과 같이 신앙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를 생각하기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룻은 믿음으로 신앙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이제 미국에 사는 어느 부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 여인은 서울에서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신앙을 키웠고 대학 3학년 때부터 교제하던 남자친구와 함께 같은 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서로 간에 비전도 비슷하고 호감이 깊어지면서 결혼까지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두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했고, 너무 교회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두 가지만 빼면 나무랄 데 없는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한지 9개월 되던 어느 날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백마 탄 왕자를 만났습니다. 재벌의 첫째 아들에다 미국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공부가 끝나면 아버지 회사로 돌아와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될 사람이었습니다. 단점이 있다면 그 남자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두 남자를 놓고 고민하다가 현실적으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결혼한 후 그 남자를 예수 믿게 하면 될 것이고, 돈 많은 부자와 결혼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라고 여기고, 그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곧바로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들어가 샌프란시스코 근교에 신혼살림을 꾸렸습니다. 그런데 미국으로 들어온 지 5년 만에 두 가지 문제가 터졌습니다. 하나는 IMF 사태로 남편 부모님의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남편이 결혼 전에 깊게 사귀던 여자 때문에 날마다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부자와 결혼해 호화롭게 살겠다던 꿈은 산산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이 자리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앞둔 청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앞둔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에서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결혼을 앞두고 있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선택을 해야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은 다섯 가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➊ 눈앞에 있는 것보다 멀리 있는 것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➋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➌ 순간보다 영원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➍ 자신의 이익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➎ 자신의 기쁨보다 하나님의 기쁨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룻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룻은 육신적인 기준으로 선택했던 나오미와 실용적인 기준으로 선택을 했던 오르바와 달리,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보아스를 만나 행복한 삶을 살았고,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여러분, 신앙적인 기준으로 선택을 했던 룻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룻과 같이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는 것을,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자신의 기쁨보다 하나님의 기쁨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축복의 손길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