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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손병희 [ 孫秉熙 ]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2.길선주 [吉善宙]
3·1운동 때에는 기독교를 대표하여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하여 2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석방된 뒤로는 북간도를 비롯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유고로 ≪말세학≫·≪길선주목사설교집≫ 등을 남겼다.
3.이필주 [李弼柱]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미아리·청파동·용두동·신촌 등의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부설 유치원·소학교·부녀자를 위한 야학 등을 개설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후에 노령으로 서울을 떠나 수원 남양교회에서 교역에 종사하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4.백용성[ 白龍城 ]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이 일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힘쓰고 대처승의 법통계승(法統繼承)을 인정하는 일본의 종교정책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한편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저술에 진력하였으며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각교(大覺敎)를 창설하였다. 1922년 중국 연길에 대각교당(大覺敎堂)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40년 2월 24일 나이 77세, 법랍 61세에 입적하였다.
5.김완규[金完圭]
그는 이 때 민족대표의 1인으로 참여하여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 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도교 도사(道師)가 되어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을 계속했고, 광복 후에는 국민회 재정부장(國民會財政部長)을 지냈다.
6.김병조[金秉祚]
919년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선천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을 피하여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상임이사·임시의정원 평안도 대표·사료편찬위원·상하이거류민단의사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1920년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으며, 1924년 만주 지안현[輯安縣]에서 《대동역사(大同歷史)》 《독립혈사(獨立血史)》를 간행하고, 학교를 세워 청소년을 양성하는 한편 《한족신문(韓族新聞)》을 발행, 독립사상 앙양에 힘썼다. 8·15광복 후에는 조만식(曺晩植)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설하여 반공운동(反共運動)에 투신하였으며, 1946년 반공의거를 위한 비밀결사인 광복단을 조직, 지하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1947년 평양형무소에서 복역중 시베리아에 유형당하여 사망하였다.
7.김창준[ 金昌俊 ]
당시 30세로 33인 중 가장 어린 나이에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그는 독립선언서 발표 모임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1년 12월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이종일, 최린(崔麟), 함태영, 한용운 등과 함께 가(假)출옥하였다. 그 후 그는 서울 감리교 중앙예배당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였다. 목사로 있는 중앙예배당 뿐만 아니라, 서울 상동교회, 성북동교회, 석교교회 등을 돌며 설교 및 강연활동을 계속하였다.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주최의 순회 강연 등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에서 1926년까지 한 때 미국에서 생활하기도 하였다.
광복후에는 공산주의 사상에 몰입하여 좌익활동을 하였고, 1946년 2월에는 좌익계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 및 중앙상임위원직을 수행하였다. 1948년에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직에도 올랐다. 6.25전쟁을 겪은 후 북한을 선택하고 월북하였다.
8.권동진[ 權東鎭 ]
3월 1일 태화관(泰和館)의 독립선언식에 참가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천도교측 15인 중 1인으로 잡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에는 천도교에서 발간하던 잡지 『개벽』의 편집진으로, 또한 신간회(新幹會)의 부회장으로 적극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3월에는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 자택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연합해 민족운동을 전개할 것을 논의하였다. 5월에는 공산당과 급진민족주의자들이 국민당을 조직하여 일대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사전검거로 실패하였다. 당시 그는 공산주의계 인물로 일본 경찰의 주목 대상이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배후 세력으로 신간회는 엄중한 경계 속에서 일대 시위운동과 대연설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학생만세운동의 진상 공개, 구금 학생의 무조건 탈환, 경찰의 학원유린 배격, 포학한 경찰정치 타도 등의 내용으로 강연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 때 연사로 권동진 이외에 허헌·홍명희·조병옥·이관용 등을 내정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사전에 탄로되어 서울 종로경찰서에 검거,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 뒤에는 신한민족당 당수·민주의원 등을 역임했다.
9.권병덕[權秉悳]
그는 이 때 민족대표의 1인으로 참여하여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中央教會 審計院長)ㆍ감사원장(監査院長)ㆍ선도사(宣道師) 등을 역임했다.
10.나용환[ 羅龍煥 ]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천도교 전체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도사(道師)로 활동하였다.
11.나인협[ 羅仁協 ]
1919년 3·1운동 때는 천도교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천도교 도사(道師)로 활동하다가 6·25전쟁 때 병사하였다
12.양전백[ 梁甸伯 ]
3ㆍ1 운동 때는 기독교 대표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다시 3년 간 복역하였다. 그 후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長老會總會長)에 취임하여 일생을 신앙 운동과 애국 운동에 바쳤다.
13.양한묵[ 梁漢默 ]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 선언식에도 참석하였다. 투옥되어 극심한 고문을 받고 그해 5월 26일 56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4.유여대[劉如大]
3월 1일 오후 2시 30분경 의주의 홍서동(弘西洞)에 약 700여 명이 군중을 모아, 찬송가를 부르고 조선독립의 기도를 올린 뒤, 서울로부터 제송된 독립선언서 200매를 배포하고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이를 낭독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다가, 출동한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1920년 경상복심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의주 동교회(東敎會) 목사로 사무하면서 3ㆍ1운동 당시 폐쇄 하였던 양실학교(養寅學校) 재건을 위해 기부금을 모집하는 등 육영실업에 전념하고 민중계몽 운동에도 노력하였다.
15.이갑성[李甲成]
1919년 최연소자로 청년층을 대표하여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민족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의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태화관(泰和館)을 중심으로 한 민족대표의 서명운동과 전단 살포의 중책을 맡아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 YMCA의 이사를 맡아 청년들을 지도하였으며, 1931년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을 지냈다. 같은 해 신간회사건(新幹會事件)으로 상해(上海)로 망명했다가, 귀국한 뒤 1940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 회장을 지냈으며, 1947년 김규식(金奎植) 등과 협력해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당선했고, 1952년 국민회(國民會)의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53년 자유당 최고위원에 임명되었고, 33인유족회장·국산부흥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발기위원을 지냈고, 1965년 광복회장, 이준열사기념사업회(李儁烈士記念事業會) 총재를 맡았다.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80세 이후에는 민족대표 33인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해마다 거행되는 3·1기념행사에 참석하다가 여생을 마쳤다.
16.이명룡[李明龍]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기독교측에서 참가하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2년형을 선고받았다. 옥고를 치른 뒤 계속 종교·산업·교육에 종사하며 민족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만식(曺晩植)과 조선민주당을 조직하여 고문에 취임하고, 사재를 처분하여 평동중학교(平東中學校)를 설립, 정계와 교육계에서 활약하였다.
1947년 공산주의자들을 피해 월남, 1954년 한국반공연맹 이사로서 반공 전선에 앞장섰고, 이듬해 평안북도도민회, 3·1정신선양회, 조선민주당, 이준열사기념사업회 등 각 사회 단체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56년에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회장·오산중학건축발기인회(五山中學建築發起人會) 회장을 지냈다. 철저한 기독교인이며 근면인으로서 평생 동안 성서와 농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근면 절약의 표본으로 1일 2식을 실천한 의지의 생활인이기도 하였다.
17.이승훈[李昇薰]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이 운동의 기독교대표로 참가하였다.
3·1운동으로 종로서에 구속되어 다른 47인과 함께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2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왔다. 이 해 일본 시찰로 견문을 넓히고 오산학교 경영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1924년 김성수(金性洙)의 간청으로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1년 동안 경영을 맡기도 하였다.
이 때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가담했으며, 조선교육협회에도 관여하는 등 활동 범위가 매우 넓었다. 동아일보사장에서 물러난 뒤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 운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죽기 직전 자기의 유골을 해부해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일제의 금지로 실행되지 못하고 오산에 안장되었다.
18.이종훈[李鍾勳]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1922년 7월 천도교인 중심으로 조직된 고려혁명위원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이종일[李鍾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2년 반 만에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조선국문연구회(朝鮮國文硏究會) 회장에 취임, 한글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20.임예환[林禮煥]
3월 1일 신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치다가 출동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하다가 병사하였다.
21.박준승[朴準承]
1919년 3·1운동 때는 손병희(孫秉熙)의 지시를 받고 수교도(首敎徒) 유태홍(柳泰洪)·박영창(朴永昌)·김의규(金衣圭)에게 인쇄된 독립선언서 5,000장을 나누어 주어 장성·남원(南原)·임실(任實) 등 각지에서 궐기하게 하고, 서울로 올라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22.박희도[朴熙道] <변절>
1919년 YMCA 간사로 있으면서 기독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2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 신생활사를 설립, <신앙생활> 주필로 있다가 다시 체포되어 2년여 복역했다. 그 후 변절하여 39년 순일어잡지인 <동양지광(東洋之光)>을 창간, 인정식·김용제·김한경 등을 기용하여 일어상용과 황도문학 보급에 적극 나섰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파로 체포당했다가 석방되었다.
23.박동완[朴東完]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소년부 위원장, 신간회(新幹會) 간사를 역임하였다. 1931년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자 재만동포옹호연맹(在滿同胞擁護聯盟) 재무부장이 되어 현지의 사정을 조사하고, 한중 양국민의 융화에 힘썼다.
1933년 하와이로 망명, 한인교회의 목사로 근무하면서 국내의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와 비밀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사하였다.
24.신홍식[申洪植]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摠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인천(仁川)ㆍ원주(原州) 등지에서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25.신석구[申錫九]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재판 도중 조선인의 행복과 자유가 점점 증가하고 있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조선사람으로서는(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한다 해도 그러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조선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피고는 조선의 국민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독립을 계획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항상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출옥 후에도 감리교 목사로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감리교단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를 행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천안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검거,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에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 교회에 가서 시무하다가, 1945년 2월 이른바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해 용강경찰서에 3개월간 구금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공산당과 대결, 3·1절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基督敎民主黨)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1949년에는 진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피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였다.
26.오세창[吳世昌]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 후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그 후 서화가의 친목기관인 대한서화협회(大韓書畵協會)를 창립,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뛰어났으며 서화(書畵)의 감식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8·15광복 후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서울신문사의 명예사장,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회장, 전국애국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전쟁 중 대구에서 피난 중 사망
27.오화영[吳華英]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고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7년부터 신간회(新幹會) 간부, YMCA 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39년 비밀결사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으로 6개월간 구금되었다.
8·15광복 후 조선민족당 당수, 한중협회(韓中協會) 회장, 반탁(反託)투쟁위원회 위원, 1946년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정무위원·외교협회 이사·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정치학관(政治學館:현 건국대학) 초대 관장과 과도정부 입법의원을 지내고, 1950년 제2대 민의원(民議員)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28.정춘수[鄭春洙] (변절)
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21년 5월 출옥하였다. 1922년 9월부터 1924년 8월까지 개성 북부교회, 1924년 9월부터 1926년 8월까지 개성 중앙교회(中央敎會)를담임하였으며, 1926년 9월부터 1930년까지 남감리교회(南監理敎會) 춘천지방 장로사(長老司)를 지냈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 간사로 선출되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평양 신양리구역 목사로 있다가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서울 동대문교회(東大文敎會)를 맡았다. 이 무렵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신흥우(申興雨)가 조직한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에 참여하였고, 경성(京城) 수표교교회(水標橋敎會)를 담임하였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같은 해 9월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풀려났다. 1939년 9월에는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었다. 1940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基督敎朝鮮監理會聯盟)을조직해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41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해 10월부터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12월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 주최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해 ‘영미인의 종교정책’을 발표하였으며, 『동양지광(東洋之光)』 1942년 1월호에 「응징의 이유 세 가지」, 『국민문학(國民文學)』 1942년 3월호에 「기독교와 신체제운동」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1944년 3월 교단상임위원회를 열어 교회 통폐합과 전투기 헌납을 골자로 하는 「애국기(愛國機) 헌납 및 교회병합 실시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고, 같은 해 7월 개신교를 통합해 조직한 일본기독교조선교단(日本基督敎朝鮮敎團)의 고문을 맡아 일제의 황민화운동에 협력하였다.
광복 후 1947년 2월 감리교에서 일제강점기 감리교 지도자들의 친일 행각을 폭로하는 성명이 발표되어 활동이 제한되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일간 구속되었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피란 중 충청북도 청원에서 1953년 1월 10일 사망하였다.
29.최성모[崔聖模]
기독교 대표로 독립 선언에 가담하여 운동을 지도하다가 체포되어 2년 간의 옥고를 겪었다. 후에 만주에 건너가 펑톈[奉天]을 중심으로 항일 투쟁을 하다가 사망했다.
30.최린[崔麟] (변절)
1919년 3월 조선민족대표의 한명으로 3·1독립선언에 참여해서 일약 사회적 지도인사로 부상했다. 3년간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2월 출소해 1922년 1월부터 천도교 중앙교단에서 서무과·교육과 주임으로 선출되어 교단활동을 시작했다. 6월 1회 조선미술전람회 제1부 동양화부에 「난(蘭)」을 출품해 입선했다. 9월 천도교 종리사(宗理師)로 위촉되었고, 12월 천도교 만화회(萬化會) 창립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9월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東京地方罹災朝鮮人救濟會) 발기인 및 상무위원, 1924년 조선기근구제회 위원으로 활약했다. 1925년 천도교 종리사에서 종법사(宗法師)로 선임되었고, 그해 조선체육회위원, 1926년 조선문헌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7년 6월부터 1928년 4월까지 미국과 유럽 21개국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929년 천도교 교단 최고직인 도령(道領)에 올랐다. 그해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 1930년 7월 전조선수재구제회(全朝鮮水災救濟會)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천도교 교단 고문으로 재임했다. 1931년 단군신전봉찬회 이사, 1932년 나예방협회(癩豫防協會) 발기인, 1934년 1월 조선소작령제정촉진회 발기인, 4월 여자의학전문학교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34년 4월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38년 4월까지 매년 1,8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4년 8월 시중회(時中會) 결성에 참여해 이사로 선출되었다. 1935년 조선총독부의 식민통치 25주년을 기념하여 「민심의 융화가 통치 대근간(大根幹) 장래에의 기대가 더욱 크다」(『매일신보』1935.10.1.)라는 축사를 썼다.
1936년 11월 ‘조선인 징병제 요망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해 조선에 징병제 실시를 촉구했다. 1937년 4월 천도교 중앙종리원 상임현법사(常任玄法師)로 선출되어 시국강연과 집필활동을 통해 천도교인의 전쟁협력을 독려했고, 7월 중추원에서 주관하는 시국강연회 강사가 되어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8월 조선총독부에서 ‘시국인식의 주지철저’를 위한 시국강연회에서 이돈화(李敦化)와 함께 편성되어 7일부터 18일까지 평안북도 일대에서 강연했고, 같은 달 조선신궁에서 거행하려는 국위선양기원제(國威禪讓祈願祭) 준비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위원에 선출되었다. 중일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의 「동양평화의 대정신, 내선일체로 국민적 적성 발휘」(『매일신보』1937.8.15.)와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자」(『신인간』1937.9.)라는 글을 기고했다.
1938년 2월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시국강연을 했고, 조선인징병제가 공포되자 이를 경축하는 조선지원병제도 제정 축하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4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가 주식회사 매일신보사로 전환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해 취체역 사장으로 취임해서 1941년까지 재임했다.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발기인·이사·상무이사, 9월 조선방공협회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하는 제1회 생활개선위원회에서 비상시 국민생활개선위원회 제1부 위원(의식주 부문)으로 선임되었다. 11월에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국민정신 작흥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했고, 12월 인일기념강담회(人日紀念講談會)에서 ‘신앙 보국주의와 신동아건설’을 강조했다. 같은 해 저축장려위원회 위원, 시국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9년 10월 조선유도(儒道)연합회 상임이사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배영동지회(排英同志會) 상담역,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경성과학지식보급회 고문·경성부 육군병지원자 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1940년 중앙협화회(中央協和會) 평위원, 재만조선교육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2월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참석해서 그 소감을 「봉축 황기(皇紀) 이천육백년」(『매일신보』1940.2.11; 2.13.)이라는 글로 밝혔다. 7월 「지원병 10만 돌파 지원명 모매(母妹)에 보내는 글」(『삼천리』1940.7.)과 9월 「대동아공영권 수립과 고도국방」(『삼천리』1940.9.)을 기고해 지원병을 장려했으며, 10월 국토계획위원회 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와 총무부 기획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천도교단에서는 1940년 천도교총부 장로에 올라 1945년까지 재임했다.
1941년 다시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2,400원의 수당을 받았다. 6월 중추원에서 주관하는 부여신궁공사(扶餘神宮工事) 근로봉사에 참여했고, 8월 흥아보국단 상임준비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임전대책협력회에서 ‘애국채권’을 가두에서 판매했고, 9월 조선임전보국단 창립준비위원·발기인과 10월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11월 조선인 지원병수련생 1,232명의 수료식에 참석했고, 「읍소」(『삼천리』1941.11.)라는 글을 통해 전쟁참여를 독려했다.
1942년 조선임전보국단에서 주최하는 각종 징병제 관련 행사에 참석했고 「있는 힘을 다 바치자」(『매일신보』1942.5.10.)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해 정학회 고문으로 선임되어 황도사상 보급에 앞장섰다. 1943년 「양양하다 반도의 앞날, 충효일본(忠孝日本)의 대도(大道)로 나가자, 열혈 청년들」(『매일신보』1943.12.8.)이라는 글을 써서 학병지원을 촉구했다. 1944년 국민동원총진회(國民動員總進會) 고문,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회장에 임명되어 각종 대회를 주도하여 해방 때까지 친일 활동으로 일관하였다. 해방된 후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세 차례 공판을 받았고 그해 4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31.한용운[韓龍雲]
1919년 3·1독립운동 때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崔南善)과 의견 충돌을 하였다.
내용이 좀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 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禪書)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를 탈고하였다.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1930년≪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1933년 55세 때 부인 유씨(兪氏)와 다시 결합하였다. 1935년≪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 黑風>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 後悔>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에 ≪조선일보≫에 <박명 薄命>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다솔사(多率寺)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32.홍병기[洪秉箕]
1919년 2월 25일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 고종의 국장을 배관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천도교대표들과 만나,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계획을 전하여 듣고 찬성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하기로 결심하였다.
27일 재동의 김상규(金相奎) 집에서 오세창·최린(崔麟)·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 천도교 동지와 다시 만나,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서명날인하였다.
이튿날인 28일 밤 재동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제반준비사항을 최종적으로 검토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 붙잡혀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6년 길림성에서 고려혁명당 창당에 참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가 일제에 붙잡혀 신의주 감옥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
33.홍기조[洪基兆]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에 돌아가 천도교의 도사(道師)·장로(長老)를 지내면서 청소년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번 사건으로 궁금증이 생겨 개인적으로 찾아보고 짧게 요약한 자료 입니다.
오류가 있을경우 댓글로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자료를 보면서 느낀 것은 설민석씨의 발언이 심도깊은 생각없는 발언이라는 것입니다.
일단의 자료로는 변절자는 3명에 지나지 않고
옥사로 돌아가신분들 그후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신 분들이 더욱 많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면서 느끼는 감정은 슬픔과 분노입니다..
그분들이 후대에 대접받으려 독립운동을 하신것이 아니지만 목숨을 바쳐 독립과 민족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에 돌아오는게 룸살롱에서 술이나 먹는 것이라뇨
설민석의 행동도 화가나지만 그를 옹호하기위해 33인 전부 거의가 변절자라느니 뭐한것 있느냐느니
하는 사람들의 말이
저를 더 화나게 합니다.
다른 분들의 생각이 저와같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같아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조금 더 알고 이야기 하는것이 나을것 같아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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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민석 본인이 유명 한국사 강사로서 이후 미칠 파장을 생각했다면 자신의 사견을 정설처럼 대중에 소개하는 것을 지양했어야 했는데...
최린 정춘수 박희도...
강사로써 신중하지 못함
말로 흥한 자 말로 망한다고
R G 민족대표 33인
와...결코 쉽지 않았을텐데...
ㄷㄱ
ㄷㄱ
33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