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는 그리 친숙한 얼굴이 아니지만 발리우드 스타 다르멘드라가 인도 뭄바이에서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영국 BBC의 24일(현지시간) 기사는 빠뜨리지 않아야 할 것 같다. 14억 인도 인구의 비중을 생각할 때도 그만큼 사랑 받은 배우를 기억하는 일은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 총리 나렌드라 모디는 배우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의 별세가 "인도 영화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자신을 "단순한 사람"이라고 자주 묘사했던 다르멘드라는 수천만 팬들로부터 비범한 애정과 충성심을 얻었다.
1975년 블록버스터 영화 '숄레이'에서 사랑스러운 경범죄 범죄자 비루 역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30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해 많은 히트작을 기록하며 수십 년간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가 참여한 곡들은 차트 1위를 차지했고, 헤마 말리니와의 로맨스와 결혼 소식은 언론의 화제가 됐다.
"발리우드의 원조 히맨(He-Man)"이자 "가람(핫) 다람"으로 불린 그는 전성기 때 전 세계 '가장 잘생긴 남자' 명단에 자주 이름을 올렸고, 여성 팬들은 그의 사진을 베개 밑에 두고 잠들기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발리우드 스타들도 그의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배우 마두리 딕싯은 그를 "내가 스크린에서 본 가장 잘 생긴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묘사했고, 슈퍼스타 살만 칸은 다르멘드라를 "가장 아름다운 남자"라고 했으며, 배우 자야 바흐찬은 그를 "그리스 신"이라고 불렀다.
다르멘드라는 항상 자신의 잘생긴 외모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부끄러움"을 느꼈으며, 그것을 "자연, 부모님, 그리고 유전자 덕분"이라고 돌렸다.
1935년 12월 8일 펀자브 루디아나 지구 나스랄리 마을에서 중산층 자트-시크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다람 싱 데올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2018년 BBC 힌디 인터뷰를 통해 그는 아버지가 공부하길 원했지만, 어릴 때부터 영화에 빠져 영웅이 되고 싶어 했다고 말했다.
"나는 9학년 때 첫 영화를 봤는데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천국은 어디일까 궁금해했다. 나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내 것이고 내가 그들에게 속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가족에게 말했을 때, 그들은 경악했다.
"어머니가 '넌 우리집 장남이라 가족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매우 슬펐다. 그래서 필름페어(Filmfare) 잡지가 개최한 전국 탤런트 콘테스트 소식을 듣고 기뻐 '좋아요, 지원서를 보내세요'라고 했다. 내가 뽑힐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회에서 우승한 그는 봄베이(현재 뭄바이)로 이사했고, 그 뒤 흔히 말하듯 역사가 됐다.
1960년 '딜 비 테라, 훔 비 테레'(마음은 네 것이고 나도 그렇다)로 데뷔한 후 30년 동안 그는 발리우드를 지배하며 매년 여러 히트작을 선사했다. 다르멘드라는 비말 로이 감독의 1963년 영화 '반디니'로 처음 명성을 얻었으며, 죄수에게 빠지는 교도소 의사를 우아하게 연기해 찬사를 받았다.
그는 곧 누탄, 미나 쿠마리, 말라 신하, 사이라 바누 같은 최고의 여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로맨틱 히어로가 되었다. 1966년에는 '풀 아우르 파타르'(꽃과 돌)에서 첫 액션 역할을 맡았지만, 1971년 히트작 '메라 가온 메라 데시'(나의 마을, 나의 나라)가 그의 액션 영웅으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키가 크고 탄탄한 체격의 다르멘드라는 종종 자신의 액션 신을 직접 연기했으며, 대담한 스턴트와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다. 로맨스와 액션 외에도 그는 스릴러와 코미디에서도 재능을 한껏 발휘했다. 평론가들은 1975년 유쾌한 영화 '춥케 춥케'에서 그의 '완벽한 코믹 타이밍'을 칭찬했다.
다르멘드라는 70명의 여주인공과 함께 했지만, 가장 성공적인 스크린 파트너는 헤마 말리니였으며, 그녀는 나중에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됐다. 두 사람은 1965년 영화 시사회에서 처음 만났고, 헤마 말리니는 다르멘드라에게 곧바로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2017년 전기에 그녀는 다르멘드라가 동료 배우 샤시 카푸르에게 펀자브어로 "Kudi badi changi hai"(그 소녀는 꽤 예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썼다.
그들의 로맨스는 1970년대 '시타 아우르 기타', '라자 자니', '숄레이' 같은 대히트 영화들을 통해 꽃피웠으며, 다르멘드라는 이미 첫 번째 부인 프라카시 카우르와 결혼해 자녀를 둔 상태였다.
언론은 헤마 말리니 가족이 결혼에 반대했다고 보도했으나, 두 사람은 1980년에 결혼했다. 일부 보도에서는 그들이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했으나, 다르멘드라는 나중에 부인했다.
배우이자 프로듀서는 정치에도 손을 댔다. 그는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라자스탄 비카네르 지역구 BJP 국회의원으로 한 임기를 지냈다. 하지만 그는 의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영화 촬영이나 농장 일을 하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호해 정치에 진지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
몇 년 뒤 TV 프로그램 '아프 키 아달랏' 인터뷰를 통해 그는 자신이 정치 부적응자임을 인정했다. "정치는 감정적인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두꺼운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 5년은 나에게 매우 힘들었고, 정말 힘들었다."
그는 생애 거의 마지막까지 일하며 두 아들 써니, 바비 디올과 함께 연기하고, 리얼리티 쇼를 심사하며, 소셜 미디어를 통해 팬들과 소통했다.
그는 평생 많은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지만, 그가 영원히 기억될 역할이 있다면 1975년 블록버스터로 일종의 문화적 현상이 된 '숄레이'에서의 비루 역일 것이다. 아미타브 바흐찬, 헤마 말리니, 자야 바흐찬이 주연을 맡은 이 다인연 영화에서는 다르멘드라와 바흐찬이 사랑스러운 악당에서 구원자로 변해 무서운 도적과 싸우기 위해 자원한다. 이 작품은 컬트 클래식이 됐고, 많은 팬들이 다르멘드라를 '숄레이의 영혼'이라 부르게 했다. 그 역시 최고의 역할이라며 "비루보다 더 좋은 역할을 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수십 편의 히트작을 선보였는데 다르멘드라는 발리우드에서 딜립 쿠마르, 라제시 칸나, 아미타브 바흐찬 같은 동시대 배우들에게 밀렸으며, 권위 있는 필름페어 시상식에서는 여러 차례 탈락했다.
마침내 1997년 필름페어는 힌디어 영화에 대한 그의 공로를 인정해 평생 공로상을 수여했고, 2012년에는 인도 정부가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파드마 부샨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다르멘드라는 자신의 스타덤을 가볍게 여기며 경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업계에서 1등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한 인터뷰를 통해 "나는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한 적이 없고, 명성은 일시적이니까. 내가 원했던 건 오직 사람들의 사랑뿐이었다"면서 "나는 오직 이 사랑 을 위해 여기까지 왔다. 모두가 다르멘드라를 사랑하고 저는 그 점에 감사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사망 소식에 소셜 미디어에는 애도의 물결이 일고 있다. 배우 악샤이 쿠마르는 "어릴 적 다르멘드라는 모든 소년이 되고 싶어 하는 영웅이었다"고 돌아본 뒤 "세대를 고무시켜줘 감사하다. 당신의 영화와 전하는 사랑을 통해 계속 살아갈 것"이라고 기렸다. 모디 총리와 마찬가지로 "한 시대의 종언"이라고 표현한 감독 카란 조하르는 "업계에 큰 구멍을 남겼다... 누구도 채울 수 없는 공간... 항상 단 한 명뿐인 다르멘드라가 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