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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하까이 1,15ㄴ─2,9
복 음 : 루카 9,18-22
18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9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20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22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찬미받으소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 책을 선물 받는 순간,
책 제목이 좋아 이 제목을 강론 제목으로 삼아야겠다고 내심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 묘해서 긍정적인 말이나 글에도 마음은 곧 밝아지고 생기가 돕니다.
찬미란 말 역시 듣기만 해도 찬미의 기쁨이 피어납니다.
바로 이것이 말의 힘, 글의 힘입니다. 구체적으로 한 예를 듭니다.
아주 오래전 배꽃 만발할 때 써놓은 ‘평생 한 번 만이라도’라는 자작시가 있습니다.
-아, 이건 하늘향한 사랑의 고백이다.
온 땅을 새하얗게 덮은 배꽃들
순결한 사랑
평생
한 번만이라도
하늘 임 향해
이런 사랑
활짝 꽃 피어 본 적 있다면
두 말할 것 없이
그 인생 성공이다.-
원래는 ‘활짝 꽃피어 본 적 없다면, 두 말할 것 없이 그 인생 실패다’였는데,
시적감각을 지닌 어느 분의 충고로 부정적 용어를 긍정적 용어로,
즉 ‘없다면은 있다면’으로, ‘실패는 성공’으로 바꾸니 마음도 힘이 나고 밝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며칠 전 제 강론 제목 ‘자유의 여정-평화와 기쁨’이란 글자만 보고 위로 받았다는 분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시편은 물론 오늘 하까이 예언서의 말씀도 얼마나 긍정적이고 힘이 있는지요.
말도 글도 밝고 긍정적인 게 좋습니다.
시편이 만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도 생명과 빛, 희망에 넘치는 긍정적 용어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찬미받으소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애송, 애창하는 ‘태양의 찬가’입니다.
그대로 아름다운 찬미의 고백 같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명쾌하고 해박하고 현실적인 책입니다.
생태영성에 깊은 통찰을 제공하는 책입니다.
‘찬미받으소서’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고백입니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 찬미의 평화입니다.
‘찬미의 기쁨’, ‘찬미의 맛’으로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인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찬미와 감사는 영혼의 양 날개입니다. 우리의 공동전례도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로 요약됩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며 정화하고 성화하며
하느님 중심으로 내외적 일치를 이루어줍니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줍니다.
오늘은 고백의 중요성에 대해 나눕니다. 사랑하면 저절로 고백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의 표현이, 하느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바로 찬미입니다.
하느님 사랑에서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하느님 찬미가 우리를 더 큰 하느님 사랑으로 이끕니다.
찬미의 고백이 인생관과 운명을 바꿉니다.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을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으로 바꿉니다.
희망을 절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줍니다.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축일 아침기도 때마다 두 번째 나오는 긴 다니엘 찬미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 청년이 주님과 함께 바빌론 유배 시 활활 타오르는 불구덩이 속에서 피조물과 함께 바친 찬미가입니다.
지옥 같은 오늘의 현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살기위하여 바쳐야 할 찬미가입니다.
지옥을 천국으로 바꿔주는 찬미기도입니다.
‘살기위하여’ 제가 수년전부터 즐겨 쓰는 절박한 말마디입니다.
왜 매일 강론을 쓰느냐, 왜 매일미사에 성무일도를 바치느냐, 물으면
저는 지체 없이 ‘살기위하여’라고 대답합니다.
우리 역시 ‘살기위하여’ 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찬미의 사랑 고백만 있는 게 아니라 믿음의 고백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로 사랑을, 믿음을 고백할 때 사랑도 믿음도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무디어진 영적감수성도 깨어납니다. 성서의 예언자들처럼 우리 역시 사랑의 신비가, 시인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물으며 제자들을 믿음의 고백으로 이끕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의 멋진 고백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노파심에서, 사전에 오해를 예방하고자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정체를 명쾌하게 해명해 주십니다.
불편하고 부담스러워도 분명히 알아야할 그리스도의 참 신원입니다.
바로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의 주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사도신경은 물론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가 바로 파스카의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고백입니다.
오늘 하까이 예언자의 말씀은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하까이 예언서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켜주는 것이 바로 고백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즈루빠벨아, 이제 용기를 내어라. 주님의 말씀이다.
여호차닥의 아들 예수야 대사제야 용기를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용기를 내어라.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이 일을 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이 집의 새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 내가 이곳에 평화를 주리라.”
바로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온통 생명의 빛과 희망으로 가득한 하까이 예언자의 긍정적이요 고무적인 용어들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다
하여 곧장 용기가 나는 것도,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도, 평화가 증진되는 것도 아닙니다.
평상시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기도를 통한 고백의 생활화, 습관화와 더불어
저절로 사라져가는 두려움과 불안이요, 용기와 평화의 열매입니다.
이 또한 파스카의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찬미와 감사로 사랑을 고백하는 우리 모두를
당신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주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시편145,15).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꿈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번쩍 손을 들더니 말합니다.
“재벌2세가 꿈입니다. 그런데 아빠가 노력을 안 해요.”
선생님께서는 정말로 기가 막혔지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이 아이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전해주었지요.
그러자 이 아버지 역시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나도 재벌 아빠가 꿈인데, 아이가 노력을 안 해요.”
사실 옛날 우리나라는 너무 가난해서 교육의 기회를 갖기가 힘들었지요.
그러나 그 가난의 고리를 끊기 위해 자신은 배우지 못했어도 자식들을 교육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교육 받은 자녀들은 가난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를 했고, 실제로 가난에서 벗어나 보다 더 풍요롭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문제는 요즘 시대에는 워낙 자녀를 조금 낳다보니 모두가 다 고등교육까지 받게 되지요.
또한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해봐야 부모보다 더 잘 살 것이라는 확신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무능함을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부모가 왜 부자가 아니어서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느냐는 것이지요.
자녀는 부모 탓, 부모는 자녀 탓으로 돌리는 시대가 아닐까요?
그러다보니 서로에 대해 감사하기는커녕 불신만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남 탓으로 돌리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보다는 내 자신을 바라보고, 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분명히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대뜸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 한 분이라는 소문을 이야기하시지요.
이 소문이 맞는지 틀리는지 이야기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소문이 완전히 틀린 것임을 간접적으로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목하신 ‘너희’라는 단어에 오랫동안 머물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소문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대꾸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곧 세상의 견해에 휩쓸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하시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함을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정답을 말한 베드로,
아마 모든 제자 역시 ‘하느님의 그리스도’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말씀해주시지요.
즉,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우리,
거짓 없는 참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우리,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자신 있게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나라의 신비를 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다시 살게 하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선물로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는 건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생명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생명과 죽음 또한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생명을 깊어지게 하는 건 고통이었습니다.
고통 또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죽음은 결코 생명을 훼손할 수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아버지 하느님을 신뢰하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분명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는 생명을 씻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과 배척 죽임을 당하셨다가
우리 가운데서 부활하십니다.
하느님을 잃어버린다는 건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생명을 만드시는 하느님 사랑을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이루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예언자 중의 한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하느님나라에 관해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받은 것에 상응하는 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가9,20)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이’ 라는 이 말은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야61,1.)
베드로의 고백은 완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그에 걸 맞는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어야 합니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수녀님은 연필을 잡은 주님 안에서 기뻐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백하지 말고 내 신앙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야53,4).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받은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야 53,3).
‘그는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이사 53,8). 그러나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이사53,11-12).라고 선언한 이사야 예언의 말씀이 주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주님,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의 기쁨으로 다시 오신 주님,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저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기쁨이 더욱 커지시기를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 할 일 다 하고 짬이 나서야 그분을 생각하는 처지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먼저 감사하고,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의 거처를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묵시21,3).
주님께서는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를 찾고 계십니다.
내가 그분을 찾기 훨씬 전부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조욱현 토마스 신부
복음: 루가 9,18-22: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신다.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8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중이었고,
예루살렘에는 십자가의 길이 그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예수님은 이제 머지않아 십자가를 지셔야 하며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셔야 하는 중요한 때였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올바로 보고 있는지 물으신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19절)
예수님께서는 이 소문에 대해 무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왜? 그 소문은 언급할 가치도 없이 틀린 소문이기 때문이다.
그 답에 즉시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20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혼란을 겪지 않도록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대하신다. 그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그리스도라고 불린 사람들이 있었다.
더러는 임금으로 혹은 예언자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의 그리스도이신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20절)라고 정확하고 올바르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여기서 제자들은 그 기적에 놀랐고,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않도록 칭송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분부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길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당하는 길로써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길이기에
그리스도를 다른 뜻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함구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까지도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믿기 어려워하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걸을 때, 우리도 영광을 입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함구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선포해야할 내용 가운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수난과 육신의 부활을 선포해야 했다.
제자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을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잘못하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를 올바로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선물 같은 교황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해외 출장 중에 아메리카 대륙을 순방 중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든 프란치스코 교황님 열풍이 대단합니다.
지구촌 방방곡곡 모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그분의 소탈하면서도 파격적인 행보,
그리고 그분의 용기 있는 발언 하나 하나에 환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민감한 지역인 쿠바의 심장부 아바나 광장에서 그것도 쿠바 공산 혁명을 주도한
체게바라의 대형 조형물이 내걸린 장소 아래서도 교황님의 말씀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아직도 이념에 죽고 이념에 사는 사람들 앞에서도
교황님께서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으시고 이념보다 더 상위의 것이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이념에 봉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봉사합니다. 봉사는 절대로 이념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목숨 걸고 국경을 넘었지만 적법성의 결여라는 일방적인 잣대를 내세우는
매몰찬 미국 앞에 교황님께서는 거의 애걸하다시피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관용을 촉구하십니다.
“미국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조국인 미국 역시 이민자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저 역시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 가정의 아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약자, 특히 이민자,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차별을 거부하고 관용과 포용의 사회를 건설해주길 부탁합니다.”
홍콩 살레시오회 본부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은퇴한 노인 수도자들이 머무는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홍콩 관구장 신부님의 소개로 가에타노란 노인 신부님 한명을 만나 뵈었는데, 올해 연세가...100세시랍니다.
그분의 머리맡 탁자에는 최근에 찍은 사진이 한 장 놓여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알현했을 때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공동체에서는 신부님에게 10O세 기념 선물로 교황님을 알현하는 깜짝 선물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진은 볼수록 감동적이었습니다.
연세가 100세시니 당연히 홀로 서실수가 없었습니다.
후배 사제가 휠체어에 앉은 신부님을 교황님 가까이 밀고 갔습니다.
당시 교황님께서는 그분의 상황을 즉시 눈치 채시고 100세 신부님이 앉아 있는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통상 교황님 알현 때에는 사제가 교황님의 반지에 친구하는 것이 기본인데,
사진을 가만히 보니 교황님께서 거의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백세 신부님 손에 친구를 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감동이 너무나 컸던 100세 할아버지 신부님은 당시의 사진을 크게 인화해서
당신 침대 머리맡에 세워두셨습니다.
교황님과 당신이 찍은 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그렇게 당신의 여생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겸손입니다.
한 사목자의 겸손한 행보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하루는 홀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나서서 큰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이십니다. 결국 왕 중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 왕은 권세와 힘의 왕이 아니라 겸손의 왕이요 희생의 양, 사랑의 왕이십니다.
최근 계속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파격적인 행보와 신선한 발언을 통해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서 풍겨 나오는 진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온 세상에 진동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프란치스코 교황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우리 인류 모두에게 선물 같은 교황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