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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스님이 <화쟁코리아> 백일 순례를 한다고 했을 때 "그러나 보다." 생각하다가
행사 준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일도 많을까.." 팔자를 한탄하며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和諍'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짬짬히 가져보며 저의 최근 간절한 질문들이 해결될 길이 있지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드디어 4월 5일 도법스님과의 화쟁코리아 순천편 ~~
9시 30분 팔마운동장 여순사건 위령탑 앞에서 모여서 여순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묵념을 하고 헌화합니다.
대한민국은 왜 이런 역사의 질곡을 지나와야 했을까...
묵념하는 아이들~무얼 먹어 이토록 진지한지~~
죽도봉에 있는 현충탑 앞에서 여순사건 유족회 장준표 회장님이 헌화합니다. 현충탑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분이 이번에 처음에 현충탑에서 와서 자기 부모를 죽인 경찰과 군인의 무덤에 하얀 국화꽃을 헌화합니다. 세살 때 부모을 잃고 평생을 한으로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지만.. "이제는 이런 아픔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며.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여순사건 유족회 최정수 어르신~몇번이고 우리에게 "이렇게 해 주어 고맙다." 는 말씀을 거듭합니다.
여순 사건 유족회 최정수 어르신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찌그락 짜그락 싸워봐야 뭐 할 거요?
죽도봉 현충탑 앞에서 만난 여순 사건 유족회 최정수 씨는 “지난 일인데, 지금 갈등할 필요가 뭐있어? 죽은 사람은 이미 갔는데. 니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그런 이야기 하면 안 된다. 역사로 기억하고 국민이 화합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그는 “커 나온 것은 말로는 표현을 못하게 살아왔다. 엄마, 아부지 다 없으니 기가 막힌 세월이었다.”며 말을 꺼냈다.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여섯 살에 어머니는 재가하고 할아버지는 그를 초등학교 입학 시키고 돌아가셨다. 노트도 한권 못 사보고, 학교만 왔다 갔다 하다가 열두살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했다는 그는 배운 것이 없으니,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남의 집 살이를 하면서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물두살까지 남의 집 살이 만 했다. 철이 들면서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스물두살 때 서울로 올라가 노가다를 했단다. 힘든 노동일이었지만 우선 자유를 얻으니 더없이 좋았다는 그의 하루 일당으로 500원, 600원이었다. 혼자 집도 없이 살면서도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만으로 이것이 인간이 살 길이다 싶었다. 은행의 ‘은’자도 모르고, 숫자도 몰라서 돈을 벌어도 예금할 줄 몰라 포켓에 넣고 다니는데, 옆에 사람들이 보통예금을 하라고 해서 예금도 시작했다. “머리는 안돌아가도 하루도 안 놀고 부지런 했다.”고 말하는 그는 서울에서 시작된 노동일을 몇 년 하면서 다시 농사를 짓고 싶어져 그 돈을 찾아 낙안에 돌아와 논을 샀다. 논을 사려는데, 계약서를 쓸 줄 몰라 옆에 사람에게 써달라고 했더니 찬찬히 보면서 “젊은 사람이 저런 것도 못 쓰나.” 하는 눈치였다. 논을 사놓으니 기분이야 말할 수가 없이 좋았다. 하도 외로우니 가정을 이루고 싶어서 일단 오두막집을 하나 샀다. 오두막을 사던 날 “내가 혼자서 집을 샀구나. 나도 집이 있네? 나도 새르문을 열고 들어갈 집이 있구나..” 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그 기쁨이 지금도 생생한 얼굴이다. 원체 없이 살다보니 살아오면서 단계단계 기분 좋은 것을 느꼈다며 미소 짓던 그는 말을 하라면 끝도 없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결혼 전 약혼을 하고 오두막에서 혼자 겨울에 밥을 해 먹는데, 큰 솥단지에 산에서 나무를 해 와서 불을 때고 밥을 해 먹는데 추운 방에서 홑이불 하나로 생활하면서 몸이 얼어서 그런지 피똥을 싸는 병에 걸렸다. 피똥을 싸면 죽는다는데 결혼도 못해보고 죽는구나 싶었다. 결혼 1주일 전에서야 피가 멈추어 겨우 결혼식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형편에 아무 기탄없이 와서 살아준 안 사람이 엄청 고마워요. 그 고마움을 다 쓸라믄.. 아이구~~” 하며 말을 접었다. 가장 아픈 기억 또한 가족이었다. 여수, 순천을 다니면서 여순사건 유족회를 만든다고 분주히 다닐 때 장인어른이 한마디 던진 것이 커다란 상처가 됐다. 장인어른이 “느그 아부지 나쁜 짓 했구나,” 라는 말을 했을 때 최종수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아픈 역사 속에 세상을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을 그렇게 말씀 하시다니..’ 장인어른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장인어른께 항의를 하면 자기 가정이 깨질 것 같아서 한마디도 못하고 돌아섰다. “말 대답을 하면 내 가정이 무너진다. 내가 먼저 죽는다. 긍께 딱 접어 분거제.” 하지만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족에게서 들은 그 말이 한이 된다고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사람들의 그런 말과 편견이 얼마나 상처가 됐던지 그는 말하는 중간 중간 몇 번이나 “여러분들이 이렇게 위령제도 지내주고, 우리말을 들어준께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며 인사를 거듭했다.
그가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아버지 최행순 씨는 좌익활동을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낙안에서도 아주 골짝 마을에 사셨는데, 당시 토벌작전이 하도 심해서 마을 젊은 청년들이 시달리니까 큰형님하고 순천에 나오다가 경찰서에 잡혀서 끝내 못 나왔다고 한다. 당시 상사지소에 잡혔는데, 경찰이 몽둥이로 때리면서 다그치니까 놀래서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에게 밥해준 것을 이야기했고 반란군으로 타겟이 됐다. 좌익 활동을 했으면 즉결처분을 받는데 드러난 좌익 활동을 한 일이 없으니 상당히 오래 경찰에 잡혀 있다가 다시 광주교도소로 넘겨져서 사형을 당해 시신도 찾지 못했다. 어머니는 돈만 가져다주었으면 나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했었다. 제일 원한이 된 것이 광주교도소에 안 넘기고 그대로 있었다면 시신이라도 수습했을 텐데 시신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결혼 후 혼백장이라는 무덤을 만들고 잔을 붓지만 그 한을 대신할 수 없다. 최 씨는 “그것이 엄청 가슴 아프다. 어찌 생각하면 국가도 원망스럽고, 시체라도 되돌려 보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개죽음으로 만들었다.” 며 한스럽게 말했다. 그런 한을 간직한 그가 죽도봉 현충탑에서 헌화하며 말했다. “그런 것은 하나의 역사로 삼아야 지요. 지금 찌그락 짜그락 싸워봐야 뭐 할 거요? 그것은 지난 간 것으로 생각하고 국민이 하나로 뭉쳐 남북통일이 돼야 합니다.” 고 단호하게 말했다.
장대공원에서 기독교, 원불교, 불교 각 종단 지도자들이 종교의례를 하며, 여순사건 피해자 위령제를 마치고
국민통합 문화제~~ 불교합창단의 공연과 사랑어린 합창단의 공연..
철도협동조합에서의 야단법석
화쟁 그 길을 묻다
첫 번째 이야기 마당-철도협동조합 카페 ‘기적소리’ 2층에서
오후 4시 30분~6시10분까지
세상이 조용하면 여기 안와도 될 텐데 아우성 소리가 들리니 외면할 수 없었다. 실상사 옆에 매동이라는 마을에 원불교 수련원을 짓는다고 공사를 했다. 절차를 받고 허가를 얻고 공사를 진행하는데, 공사 진행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70-80 먹은 노인들이 다른 것을 할 수 없으니, 공사를 못하도록 길을 막았다. 그 마을에 사는 분들이 절에 자주 오는 분들이라 우리 동네에 사는 분들이 죽네, 사네, 애타하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나? <산내면 민원수습대책위원회>를 꾸려서 대응했다.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 첨예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이들 자살과 폭력 왕따 문제다. 한국사회에서 우리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부작용의 한 현상으로 보여 진다. 그런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불교라는 것이 왜 이 세상에 있어야 하나? 불교의 존재이유, 가치가 무엇인가? 사람들을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 평화롭고, 행복하게하기 위해 불교는 존재한다. 모든 경전에 나온 내용이다. 불교를 하는 사람으로서 불교를 제대로 하려면 현장을 떠나서는 불교에 있을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고통 받고 불행해서 시름하는 곳을 떠나서 불교가 이 세상에 있을 필요가 없다. 인간으로서, 불교 수행자로서 인간답게 불교 수행자답게 살기 위해 세상의 고통과 불행의 소리를 듣고 고통과 불행을 벗어나서 사람들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응답해야 하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일이고,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시대마다 화두가 있었다. 식민지 시절에는 독립이 화두였고, 산업화와 민주화 시절을 지나 20세기 마감되고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자연과 생태’의 가치가 등장했다. 결국 사람의 문제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사람이고, 문제를 풀어내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의 문제로 좁혀보면 지금 시대의 화두는 뭘까? 결국은 ‘상극과 상생’이다. 상극은 서로를 극복대상으로 보는 것이고 함께 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20세기는 상극의 논리로 세월을 살아왔다. 21세기는 상극을 넘어 상생의 시대다. 함께 살아야 할 대상으로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시대적 화두다. 불교 용어로 말하면 ‘화쟁과 화통의 길’ 이고 일반 언어로는 ‘상극과 상생’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진실과 화해의 길’이다. 왜 우리 시대의 화두가 상극을 넘어 상생인가?
20세기를 잘 표현한 백가지 사진들을 모아 낸 책이 퓰리쳐 상을 받았다. 한국판으로는 <죽음으로 남긴 20세기 증언>이다. 목숨을 걸어서 찍은 전쟁사진이 대부분이었다. 20세기가 물리적으로 풍요로워 지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었지만 그것이 진행되는 과정은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비인간적인 결과를 낳았다. 전쟁을 통해 고통을 겪었으면 다시는 전쟁을 치르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게 많은 전쟁을 하고도 또 다시 전쟁을 하려한다. 미래의 전쟁은 더 위험한 것이다. 어쩌면 현대사회는 전쟁이 일상화되는 판이다. 만인과 만인의 전쟁이다. 20세기는 세계관, 가치의식, 삶의 방식이 상극이었는데, 그런 방식으로 변화발전을 해서 더 풍요로워지고, 더 편리해진다면 인류의 문명이 파멸로 갈지 모른다는 전문가의 조언이 많다. 자연생태계의 재앙, 사회양극화, 상대적 소외감, 상대적 박탈감..그런 언어들로 정리되고 있다.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이 300조, 갈등으로 인한 법적 소송이 630만 명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이유로 편이 갈리고 나뉘어져 싸움의 주체가 되어있다. “너 죽고 나 살자.” 그런 과정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 애정, 함께 살려는 따뜻함은 깨지고, 오히려 서로 불신하고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일상화되고, 우리 삶이 왜곡되고 황폐화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져 있는데 보수진영에서도 그런 소리가 나온다. 보수진영에서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선진문화재단 박세일 씨가 “대립의 문제를 통합하는 흐름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선진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 다툼을 화해 시켜 더불어 함께 살 길을 열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마침 가까운 역사에 진실과 화해의 길을 열고자 한 남아공 만델라의 사례가 있다. 불교계가 원효의 화쟁 사상으로 종단에서 마음을 내고 이 시대에 ‘화쟁’ 이라는 화두를 던져보자고 한 것이다. ‘진실과 화해의 길’ ‘화쟁과 화통의 길’ 어떻게 해야 더불어 함께 살아갈 길이 가능할까? 원효는 진실에 토대해서 화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에 토대하지 않고는 또 다른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우리가 불편하더라도 다양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강정마을의 예를 들면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다. 해군기지 문제를 또 다른 문제로 접근해보자는 이야기를 해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정부도 해군도 또 다른 해법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이편 아니면 저편의 진영논리다. 어느 것이 국민의 목소리일까? 건강한 상식, 보편적 사고로 문제를 다룰 수 없다. 진영끼리 맞서서 힘겨루기 싸움을 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불신이 거대한 힘으로 꿈틀거리고 있어서 문제를 풀기 어렵다. 다양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하면 좋겠다.
부산 순례를 하며 현해탄에 피맺힌 아픔이 있다면 대마도를 가자고 해서 다녀왔다. 그곳에서 처음 본 꽃이 제주도에서 본 꽃이었다. 부산에서 본 나무였다. 우리나라에서 들은 까마귀소리였다. 자연에는 국가도 민족도 없다. 더불어함께 살아야 할 생명이 있을 뿐이다.
일제청산도 수십년 붙잡고 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친일 청산이 안돼서 이렇다고 계속 그 이야기만 하고 있다. 식민지가 되지 않았어도 친일, 반일이 생겼을까? 식민지는 민족의 상처였다. 식민지가 됐기에 친일도 반일도 있었다. 식민지가 됐다는 사실이 문제의 원인이다. 민족적 상처를 풀어내는 것이 과제다. 민족의 상처를 두고 친일 문제를 청산한다고 하는데 회의가 들었다. 국민적, 민족적, 지혜와 뜻을 모아 길을 찾아 나서자. 우리 민족이 좌우대립이라는 이념의 광폭에 휘말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누가 잘못하는 건가? 민족적 관점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면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민족적 지혜와 뜻을 모아 바람직하게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박정희 생가를 순례하면서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데, 진실이 뭔가 생각했다. 경상도 사람은 박정희 좋아하고 보수 쪽은 높이 평가한다. 전라도 사람은 김대중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한다. 그것이 진실일까? 좋기만 하고 훌륭하기만 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망상, 착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죽음이 일상화되고 있는 반복적인 상황을 미래세대로 떠넘길 수 없다. 해서는 안 될 짓이다. 그것이 어른이 할 짓인가? 종교가 할 짓인가?
화쟁은 복잡하지 않다. 진실을 제대로 드러내고,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나쁜 놈이다. 진실을 부정하고 거부하면 나쁜 놈이다. 진실을 인정하면 화해가 일어나고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화해가 일어날 수 없다.
한 인간에게는 왼손과 오른손이 있고, 몸통으로 이어져 있다. 몸통이 골병들고 있는데 왼손과 오른 손이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민심을 어떻게 형성하고 어떻게 우리 사회의 중심이 되게 할 것인가? 싸움은 말리면서 흥정은 붙이면서 길을 찾아보자.
질문-철도 파업 때 나름대로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려는 노력을 하셨는데, 화쟁을 통한 성공 사례는 있나요?
=철도파업 때 제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조계사에 찾아왔기에 최소한의 노력을 한 것이다. 화쟁의 대화같은 자리에 앉았는데, 효과적인 것 아니었다. 성공사례는 없다. 불교계 내부에서는 봉은사 문제 풀어냈다. 매동마을 문제도 몇 년이 걸렸다. 시청, 원불교, 지방유지, 마을 분들을 모두 설득해야 했다. 마을 공동체가 깨진 것 꿰매지 못했다. 일 자체는 합의해서 해결했다. 싸움을 말리고 흥정을 붙이려면 지혜, 힘이 있어야 한다. 시민사회가 이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미 한편이 돼 버렸다. 우리 시대에 진실과 화해를 위한 일을 누가 할 수 있는가? 정부는 이미 싸움 당사자다. 정치는 분쟁을 역이용해서 이득을 본다. 종교계가 이 시대의 화두를 던지고 그 역할을 하면 좋겠다. 쌍용차 문제를 사회 통합적으로 바라보고 문제를 풀어가자고 했을 때 해고자 쪽에서 “뭐하는 짓이냐? ” 냉소적이었다. 회사만나고, 정부를 만나고 했는데, 관계 당사자 모두가 서로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갖고 있다. 불신과 두려움을 놔둔 채 힘 싸움을 하고 있다. 재판을 통해 결론 나는 것은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다. 사이가 좋아져야 문제가 풀린다. 종교계가 투철한 문제의식을 갖고 시기에 맞게 역할을 했으면 쌍용차문제 매듭지었을 텐데, 그 역할을 종교가 못했다. 종교계의 역할이 부정되었는데, “강하게 싸웠던 것보다 의미있게 진전된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강자가 딴 짓을 하는데 해 봐야 무슨 소리냐고 하는데, 적어도 싸움을 말리고 흥정을 붙이려면 지혜도 있고, 힘도 있으면 가능하다. 현실적으로 지혜도 부족하고 힘도 부족하다.
-국가권력이 자연을 파괴하고 개발하는 것처럼 지역도 마찬가지다. 신도심을 개발하며 원도심 공동화 문제, 자연파괴 모두 행정과 정치가 일으키는 문제다. 얼굴을 보는 사이라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은 소수다. 지역문제는 더 첨예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모르겠다.
=화쟁적 사고방식, 화쟁적 방법론으로 확실하게 풀어내는 경험은 중요하다. 우리 사회는 총체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에 쉽지 않다. 21세기는 새로운 판이다. 21세기 세계관, 가치관, 삶의 방식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20세기까지는 죽임의 역사를 살아온 것이기 때문에 미래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크다.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세계관으로 삶의 방식을 모색하자. 기본을 하지 않고 사안 하나만 다루는 것은 어렵다. 우리도 끊임없이 진실을 이야기 해왔다. 그들이 말한 것이 진실인가? 우리가 추구한 것이 진실인가? 본직적인 진실을 묻는 작업을 간과했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놓치고, 나타난 현상, 사실만 붙잡고 싸웠다. 진실을 간과하고 사실만 붙들고 거짓말한 진실을 응징하겠다는 것이 현상이다. 좀 더 근원적인 진실은 뭘까? 죽으나 사나 함께 살아야 할 세상이다. 죽으나 사나 함께 살아야 할 존재다. 죽으나 사나 함께 살아야 할 민족 구성원이라는 대전제에 투철하지 못한 거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엄연한 진실에 투철하다면 진실에 투철하다면 그 다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놓쳤다.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선가는 풀어야 한다. 좀 더 침착하게, 좀 더 냉정하게 근원적 진실을 드러내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길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지역의 문제 쉽지 않다. 우리집 문제라 더 어렵다. 문화적으로 풍토적으로 흐름을 만들어가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대화 풍토다. 누군가 먼저 철든 사람이 그 판을 만들어 가야 한다. 맞아 본 사람, 아파본 사람이 철든다. 억울하지만 문제를 낫게 풀어가려면 수준 높은 역할을 할 마음가짐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
-답은 알고 있지만 정리되지도 실천되지도 않는다. 진실과 화해 어떤 식으로 해야 하나?
=개개인이 생명평화적 사유방식을 익혀가는 것이 필요하다. 근본적인 진실을 드러내는 대화를 많이 하면 좋겠다. 진보든 보수든 합리적인 사람들이 첨예한 의제를 공론의 장에서 이야기 하는 것, 객관적이고, 합리적이고, 근원적 진실을 드러내면서 불합리한 지점은 드러내 주기도 하고, 합리적으로 정리된 내용을 공론화하고 주문하는 역할을 어른들이 해주어야 한다. 순천지역에 ‘진실과 화해의 길을 열어가는 100인 위원회’ 같은 것이 만들어져 첨예한 의제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서 이야기 하면 좋겠다.
그리고 도법스님과 언론협동조합 조합원들 간담회(?)
사랑어린 학교에서의 <생명평화 도시 순천을 꿈꾸다> 즉문즉설을 마치고
다음날 까지 끙끙 앓다가 여러가지를 배웁니다.
별 볼 일 없는 저 같은 인간이 '화쟁' 이라는 커다란 화두를 잡고 살 수 있는 것도 커다란 행운이고 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잘 배우겠습니다.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첫댓글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나의 삶부터 화쟁의 정신으로 가꾼다면 우리 세상도 금세 화쟁의 문화를 갖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모두 애들 쓰셨습니다.
정말로 그것을 깊이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인연들~고맙습니다.
경숙씨의 최선을 다한 애씀이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매번 느끼는거지만 행사스케치나, 인터뷰 정리를 정말 잘하는거 같아요
인터뷰 한거 잘모았다가 "경숙이가 만난 사람들" 이란 제목으로 책으로 엮어보세요^^
ㅋㅋ 우린 평생 인연일 것 같아요~~제가 화쟁의 정신으로 달라지는 모습을 잘 봐 주셔요~~^^
나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의문이 생겼지.
과연 무엇이 이들을 이 자리에 있도록 한것인가.
분명 나와는 달랐다.
우리들 안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모순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아파만 하지 않았고 변화를 모색하였고 그것을 위해 발걸음을 내 딛었다.
변화를위해 행동 했다.
아름다운 그대들, 앞서 실천하는 그대들의 발걸음이 쉬 가벼워 지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너도 아프지 않고 나도 아프지 않았음 좋겠다.
세상의 아픔을 공감하며 사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는데,
도법스님을 보면서 온전히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삶의 결과가 얼마나 다른 것임을 배웠어요.
저는 아마도 앞으로 완전 더 멋있어질것 같아요. ㅎㅎ
기존안으로는 안되는 것을 알자.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좀더 큰 가치를 찾아내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는 것! 이 시대는 "화쟁"과 "화통"의 시대이다. 시민의 공감과 지지를 형성해 내서 민심이 반영되는 힘을 갖자. 오늘도 계속되는 순례길 35일차? 100일 순례길을 함께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참 대견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기적소리에서 사랑어린학교를 동행하면서 메모했던 몆가지입니다.
오늘은 36일차~~
우주의 질서 속에서 인연이 된, 특별히 화쟁으로 더 깊은 인연을 맺은 우리는 특별한 사이~~
경숙씨의 요런 힘이 이제 여수까지 흘러흘러~~~ 우리도 행사 무난하게 치뤘답니다. 수고했어요!
여수가 정말 멋지게 했을것 같아요. 여수에 참석 못한것이 아쉬워요. 컨닝 좀 하고 배웠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