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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21
오늘은 영표형네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고 왔어요. 자주 가냐고요? 신혼집인데 어떻게 제 마음
대로 가겠어요. 형수님(이영표의 아내)이 불러주시면 콧노래 흥얼거리며 달려가는 거죠.
음식 맛도 좋지만 서로 어울려 식사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아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혼자 먹으면 영 맛이 안 나거든요.
오늘은 ‘스포츠 스타의 빛과 그림자’라는 다소 거창한 주제로 일기를 써볼까 해요.
스포츠 스타로 살면서 ‘빛’을 느낀다면 많은 축구팬들이 박지성이란 선수를 좋아해 주고 열렬한 응원을 보내준다는 사실이죠.
반면 ‘그림자’라고 하면 가끔 절 축구선수가 아닌 남자로 대하는 여자분들을 만날 때예요.
전 성격상 그런 반응을 접할 때마다 당황하거나 쑥스러워지거든요.
운동선수는 경기장에서, 연예인은 카메라나 무대 위에서 제일 좋은 ‘플레이’를 선보일 때 팬들의 사랑을 받는 거잖아요.
제가 만약 축구를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한다면 절 선수로 좋아하든, 남자로 좋아하든, 그 팬들이 계속해서 절 좋아해 줄까요?
남자 박지성이 아닌(사실 별로 잘생긴 얼굴도 아니고 유머가 많은 것도 아니고 정말 남자로만 평가한다면 그리 후한 점수를 못받을 것 같네요) 축구선수 박지성으로 좋아해줬으면 고맙겠어요.
제 일기 담당 기자 누나가 한 얘기인데 이번에 21연승으로 세계 최다 선발승을 차지한 정민태 선수의 배우자 조건이 ‘매니큐어도 안 칠하고 전화하면 항상 집에 있고 긴 치마만 입는 정숙한 여자’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그분 결혼하셨냐고. 세상에 그런 여자분이 있나봐요.
만약 제가 결혼할 때쯤 그런 조건을 내세우면서 배우자를 찾는다면 이상한 소리 많이 들을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그런 현모양처형의 여자가 있으면 당장 결혼할 것 같아요.
요즘 저의 고민 중 하나가 오른쪽 무릎에서 여전히 빠질 줄 모르는 ‘물’입니다.
의사 말에 따르면 저절로 빠질 때까지 지켜봐야 한다는데 아직 통증은 없지만 눈에 보이고 만지면 물컹거리는 그 부분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에요. 마치 비닐 봉지에 물이 차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오른쪽 다리가, 멀쩡한 왼쪽 다리처럼 물도 다 빠지고 온전하게 될 날은 과연 언제일까요.
무더운 여름도 지나고 지금 이곳은 언제 여름이 있었냐는 듯 을씨년스럽게 추워요.
곧 추석일텐데 몇 년 동안 외국에서만 생활하다보니 사실 추석에 뭐하고 지내는지조차 잊어버렸어요. 보름달이 뜨면 달 보면서 소원 비는 거 아닌가요? 하여튼 민속 명절인 만큼 즐겁고 화목하게 보내시길 바라고요, 남는 송편 있으면 지성이한테도 좀 보내주시고 그러세요.
여기선 송편 구경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니까요.
9월5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22
한가위 잘 보내셨나요? 전 영어 선생님이 독일에서 공수해 온 송편을 얻어먹는 걸로 추석을 대신했습니다. 부모님도 안 계시고 한국 사람도 거의 없는 이곳에서 명절을 느끼기란 불가능한 일이지만 송편을 먹다보니 한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꽉 차오르더군요.
특히 어머니께서 수술을 받고 요양중이시라 마음이 더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에서 축구를 한다는 어느 팬이 이런 걸 물어보더라고요.
유럽의 훈련 프로그램과 한국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전 비교할 만한 자격이 못돼요.
한국의 프로팀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죠. 일본에서부터 프로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인데 일본은 대부분 유럽의 축구 시스템과 유사한 부분이 많아서 지금 제가 있는 네덜란드의 훈련 프로그램과 큰 차이가 없어요.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훈련하는 횟수죠. 이곳은 게임이 많아서 그런지 연습량이 적어요. 따라서 놀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놀면서 운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죠. 그러나 프로 선수가 ‘무대뽀’식의 여흥을 즐기기란 어려운 일이에요. 정신없이 놀다보면 ‘방’을 빼야 하는 설움을 겪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저한테는 이곳 시스템이 잘 맞는 것 같아요.
특히 히딩크 감독의 훈련 방식이 월드컵 때 했던 내용들과 한치의 오차(?) 없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적응하기가 수월했는지도 몰라요.
후회되는 일이라면 학교 다닐 때 공부 안하고 축구만 하는 생활에 너무 만족한(?) 나머지 영어공부를 소홀히 했던 사실입니다. 어렸을 때만 해도 제가 해외에서 뛰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안해봤거든요. 만약 그때 외국에 나갈 줄 알았더라면 영어책만은 품고 다녔을 거예요.
프로팀 입단을 목표로 뛰는 후배들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기량 향상 외에 반드시 외국어 공부
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겁니다.
영어의 필요성을 간과했던 제가 지금 이곳에서 겪는 고통은 여러분들이 상상을 못할 정도예요.
특히 네덜란드어는 제 인내의 한계와 아이큐를 테스트하는 심정으로 배우는 중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가 네덜란드어가 아닐까 싶을 정도니까요. 그래서 가끔은 히딩크 감
독이 존경스러울 때가 있어요.
독일에서 생활하는 (차)두리와 가끔 전화 통화를 하는데 동료들과 말이 통한다는, 더욱이 독일인 친구들과 재미있게 생활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땐 부러움의 극치를 달립니다.
다음주(한국시간으로 9월18일 새벽)부턴 챔피언스 리그가 개막됩니다.
네덜란드 리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인지 벌써부터 긴장감이 감도네요.
출전 자체를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월드컵 이상의 기대와 목표를 가지고 에인트호
벤 팀에서 박지성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도록 제대로 한번 뛰어보겠습니다.
많은 응원 보내주세요.
9월13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23
어제(17일) 챔피언스리그 1차전을 치르고 오늘 오전 회복훈련을 마친 뒤 선수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챔피언스리그 데뷔전을 치렀기 때문에 아직까지 얼떨떨하면서도 아쉬운 감정을 지울 수가 없네요.
월드컵 8강전에서 만난 스페인 대표 출신 모리엔테스가 속한 AS 모나코는 탄탄한 조직력이 돋보이는 팀이었어요. 막강한 수비를 뚫기가 힘들었고 공격 쪽에서도 부진한 바람에 결국 1-2로 지긴 했지만 후반전에 조금만 더 분발했더라면 무승부를 이룰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 팀은 AS 모나코와의 경기를 앞두고 홈에서 열리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전날 합숙을 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철저히 했어요. 히딩크 감독의 ‘정열적인’ 설명이 곁들여지는 비디오 분석을 통해 작전도 짜고 맡은 역할에 대해 복기를 거듭하는 등 모처럼 진지하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팀워크를 다져갔습니다.
문제는 제 자신입니다. 아직까지도 경기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거든요. 이상하게도 연습할 때는 펄펄 날다가도 본 게임에만 들어가면 몸놀림이 굳어지는 거예요. 적응력 부족이라는 판단을 내렸는데 문제는 뾰족한 해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시간과 경험만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어요. 공언하건대 앞으로 한 달 내에 몸 만들기서부터 적응력까지 ‘풀코스’로 해결해 보려고 해요. 아마도 올 초 무릎 부상으로 리그를 쉬었던 게 아직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아요.
21일은 (송)종국이형이 소속된 페예노르트와의 원정 경기가 열립니다. 챔피언스리그에서 당한 수모(?)를 라이벌팀인 페예노르트와의 경기에서 만회하고자 총력전을 펼칠 예정이라 아마도 경기가 재미있어질 것 같아요. 물론 이 글이 독자 여러분에게 읽힐 때면 이미 그 결과가 나와 있겠지만요.
좀 더 침착하고 자신있는 플레이를 하고 싶어요. 제 단점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면서도 실전에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자주 되풀이돼선 안되겠죠.
외국 선수들과 생활한다는 것, 감독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아무리 떨치려고 노력해도 사라지지 않는 ‘외로움’ 등이 ‘짬뽕’이 돼 제 발을 자꾸 무겁게 하는 것 같아요.
여러분의 눈에 제 발놀림이 가벼워 보일 때가 있다면 ‘박지성이 드디어 네덜란드 리그에 적응
을 했구나’ 하고 축하해주셔도 될 것 같아요. 그날이 빨리 오길 진심으로 바라면서….
9월18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24
얼마 전 국내 신문에 제가 네덜란드에서 골프를 즐긴다는 내용의 기사가 소개된 적이 있었죠? 사실 골프를 치긴 하지만 이곳에서 골프장에 가본 적이 딱 두 번밖에 없습니다. 혼자서 한번, 영어 선생님 남편 분이랑 함께 골프를 치러 간 것 외에는 골프장은 자주 갈 수가 없었어요.
사실 골프는 월드컵 이전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했어요. 우연히 아버지 따라서 골프장에 갔다가 재미를 느꼈고 그 후 시간 날 때마다 골프채를 잡았던 것 같아요.
이곳은 골프를 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지만 오자마자 부상으로 ‘환자’가 되는 바람에 감히 엄두를 낼 수도 없었죠.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골프로 조금이나마 달래볼 생각은 있습니다.
어젠 죽마고우라고 할 수 있는 친구 K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어요.
지난번 페예노르트 경기에서 제가 부진해 보였다며 걱정을 담아 보냈더라고요. 정말 제 플레이가 그렇게 형편없어 보였나요? 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경기 내용도 좋았고 제 자신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느꼈는데 한국팬들한테는 그렇게 비치질 않았나봐요.
풀타임 주전으로 뛰고 안 뛰고는 저한테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단 10분을 뛰더라도 얼마만큼 좋은 내용의 플레이를 펼치느냐가 훨씬 더 큰 의미를 담고 있거든요. 곧 좋아질 거예요.
여유를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꼭 보답할게요. 참, 친구 K는 L과 함께 죽마고우라고 할 수 있는 단짝이에요. 두 사람 다 고등학교에서 저랑 같이 축구를 했던 친구들인데 지금은 샐러리맨이 되어 사회에 봉사(?)하고 있죠. 그 중 K는 정말 재미있는 친구입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K와 5분만 대화를 나누면 안 친해질 수 없을 만큼 유머와 재치가 돋보입니다.
K와 같이 있으면 우울하고 힘든 일도 모두 잊어버리게 돼요. 그래서 귀국할 때마다 만나달라고
(?) 제가 먼저 조르죠.
오랜만에 만나도 시간의 흐름을 못 느낄 만큼 허물없는 친구들, 인간 박지성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친구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갑자기 무지 보고싶어지네.
최근 (고)종수형이 제가 있었던 교토 퍼플상가에서 퇴출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선 정말 기분이 꿀꿀했어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축구를 이끌어갈 ‘천재’로, 최고의 인기 스타로 군림했었는데 제대로 뛰어보지도 못하고 일본 생활을 접어야 했던 상황들이 너무 안타까웠던 거예요.
전 지금도 종수 형이 실력이 없어서 일본을 떠나온 것은 아니라고 봐요. 분명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겁니다. 사실 소식을 듣고 종수 형한테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하지 못했어요.
하루빨리 마음 추스르고 예전의 축구 잘하고 씩씩한 종수 형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제 간절한 마음을 지면을 통해서 꼭 전하고 싶어요. 형! 힘내세요!!
9월25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25
챔피언스리그 16강 진출의 꿈이 암울해졌습니다. 여러분도 소식 들어 아시겠지만 지난 1일 스페인 데포르티보 전에서 0-2로 패하는 바람에 에인트호벤이 C조 최하위를 기록했거든요. 개인적으론 시합을 할 때마다 자신감을 조금씩 회복하고 있어 계속 이 감각을 유지하고 싶지만 글쎄요, 히딩크 감독이 절 계속 믿고 출전시켜주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벌써 한국에는 팀 내 제 위치가 불안하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왔다면서요?
그동안 이곳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해 그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아직까진 한국에서 보는 것처럼 위기의식을 느낄 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닙니다.
히딩크 감독의 장점 중 하나라면 선수를 신뢰한다는 사실이에요. 한번 밀어주기로 한 선수는 이변이 없는 한 계속 내보내주시는데 모든 건 선수 하기 나름이죠. 오늘은 저랑 한솥밥을 먹는 에인트호벤팀 선수들에 대해 소개를 하려고 해요.
한국에 가장 많이 알려진 선수가 ‘득점 기계’로 유명한 마테야 케즈만이죠. 케즈만은 ‘한성깔’하는 선수로 악명 높습니다. 불평 불만이 장난 아니에요. 특히 패스와 관련해선 목소리를 낮추지 않아요.
연습 때는 잠잠하다가도 정작 시합에만 들어가면 볼을 자기한테 주지 않는다고 큰 소리를 치는데 하도 그런 일이 많아 다른 선수들의 반응은 ‘그러려니’ 입니다.
반 봄멜은 무척 시끄러운 선수예요. 괴성을 지를 때가 많거든요.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깜짝깜짝 놀라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죠.
말할 때 제스처가 워낙 커서 주변 선수들은 한 발짝 떨어져서 이야기를 들을 정도예요.
그리고 저랑 가장 친한 스커프는 장난꾸러기입니다. 스커프는 로벤과도 절친한데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에다 친화력으로 동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고 있죠.
에인트호벤의 ‘물건’ 중 ‘물건’이라면 이천수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요한 블랑떼르라는 선수일 겁니다. 스위스 태생인데 예전 소속팀에서 경기에 졌는데도 동료들과 웃고 떠들다가 감독한테 혼난 적이 있을 만큼 좌충우돌, 천방지축(이건 ‘박지성 일기’의 타이틀인데)의 대명사입니다.
어린 나이의 외국 생활이 여러 가지로 힘들겠지만 내색하거나 기죽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요. 쳐다보고만 있어도 절로 기분 좋아지는 그런 친구죠.
그 선수를 볼 때마다 (이)영표형과 나는 ‘천수랑 똑같다’는 감탄사를 연발한답니다.
얼마 전에 부모님이 한국에서 들어오신 덕분에 요즘 제 생활은 한마디로 활짝 폈습니다.
청소, 빨래, 식사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니 여간 ‘해피’한 게 아니에요.
그 행복함을 그라운드에까지 연결시키도록 거듭 노력하겠습니다.
10월2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26
네덜란드에서 생활한 지 벌써 9개월이 지났네요.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요즘 저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인터넷입니다. 지난번 군 입대와 피스컵 대회 참석차 네덜란드를 떠났다가 인터넷 요금이 연체됐었나봐요. 집에 와 보니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더라고요. 밀린 요금을 지불하고 다시 개통 신청을 한 지 3개월이 다 돼가는데도 아직 감감무소식입니다.
답답해서 전화를 하면 ‘원래 그런 거니까 기다리라’는 대답만 들려올 뿐이에요.
(이)영표형이 결혼하기 전에는 형네 집에 가서 ‘인터넷 동냥’을 자주 했었는데 지금은 형수님이 계셔서 인터넷 핑계로 들락거리기가 좀 미안해지더라고요. 한국 소식도 친구들과 전화 통화를 해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니…. 에인트호벤은 저녁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기 어려울 만큼 암흑의 도시입니다. 한국(특히 서울)의 밤거리에 익숙한 사람은 여기에서 하루 이틀 견디기도 어려울 겁니다. 어둠이 내리면 마치 모든 게 정지된 듯한 기분이에요. ‘어둠의 도시’에서 정보 부재의 갑갑함을 느끼다보면 마치 저 혼자 무인도에 표류해서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이 들 때도 있어요.
요즘 전 골에 대해 초연해지기 위해 무척 노력중입니다. 골에 집착하다보면 게임이 더 안 풀린다는 걸 느꼈기 때문에 득점에 대한 부담을 떨쳐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어요.
그동안 저한테 익숙한 포지션은 미드필더였어요. 에인트호벤에서 맡고 있는 처진 스트라이커와는 좀 차이가 있죠. 이전에는 골보다 어시스트에 주력했다면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이니까요. 아직은 포지션에 제대로 적응이 안된 것 같아요.
익숙한 플레이를 버리고 새로운 것에 절 맞춰야 하는데 조금씩 나아지곤 있지만 아직도 제 스타일을 확 바꾸진 못했거든요.
사실 골이 안 터질 때의 답답함을 당사자 아니고는 잘 모르실 거예요. 관중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훈수’를 두며 선수의 플레이에 잘잘못을 따질 수 있지만 직접 경기를 뛰어보면 결코 바람대로 흘러가지는 않거든요.
지난 월드컵 이후 한국 축구가 침체를 겪고 있다는 안타까운 비판의 소리가 이곳에도 들려왔어요.
아시안컵이든, 올림픽이든, 태극마크를 달고 있는 대표팀 선수들이라면 유럽의 어느 선수들과 비교해도 개인 능력이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단 대표팀 운영 시스템과 감독 전술을 얼마만큼 이해하느냐에 따라 성적이 달라지겠죠.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꾸준히 유지하고 선수들을 단단하게 결속해 이끌어간다면 박지성이 빠지든, 이천수가 빠지든 대표팀의 모양새는 크게 변하지 않을 거라고 봐요.
쿠엘류 감독의 능력을 인정해서 믿고 뽑았다면 그분이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낼지 조용히, 그러면서 주의 깊게 지켜봐줘야 할 겁니다.
10월9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27
초등학교 때의 일이었어요. 공놀이하는 걸 좋아해서 축구선수를 꿈꿨고 진짜로 유니폼에다 축구화를 신고 축구부 선수로 출발했을 때만 해도 전 세상의 모든 걸 다 얻은 듯한 행복감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너무나 큰 차이가 났어요. 동네 골목에서 공놀이하던 수준의 축구와 선수로 뛰는 축구의 세계는 엄연히 달랐던 거죠.
어린 마음에 가장 큰 상처로 남았던 게 코치님이나 감독님의 구타였습니다. 운동부뿐만 아니라 학교생활에서도 선생님들의 체벌이 종종 있던 터라 크게 동요하진 않았지만 마치 밥을 먹듯 생활화돼 있던 체벌은 어린 시절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한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때의 일입니다. 어느 순간부턴 맞는 게 두려워졌어요. 무슨 무슨 대회에 나갔다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결과에 대한 자아성찰보다 ‘이번에는 어딜 맞을까’ 하는 생각에 오금이 저릴 정도였으니까요. 고등학교 때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체벌의 주체가 감독님에서 선배들로 옮겨진 정도라고나 할까.
한번은 선배들의 구타에 못 이겨 단체로 숙소 탈출을 계획했다가 발각된 적도 있었어요. 왜 계속 맞고 지냈냐고요? 당시엔 훌륭한 축구선수가 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믿었어요. 그걸 견뎌내야 대단한 선수가 되는 줄 알았죠. 동기들 중에는 이런저런 부담으로 중도에 축구부에서 탈퇴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죠. 희한하게도 전 단 한번도 축구를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맞아도 축구공은 제 분신 같았으니까요.
일본 J리그 진출 후 절 쇼킹하게 만든 건 일본에는 구타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어요. 유치원생은 물론 초·중·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마치 놀이를 하는 것처럼 축구를 즐기고 사랑
했습니다. 선수들도 마찬가지였고요. 네덜란드는 일본보다 더욱 자유스럽고 개방된 축구문화로 인해 축구가 가족들의 레저문화처럼 생활화돼 있어요.
우리나라처럼 어려서부터 억압된 분위기에서 축구를 배워온 선수들과 즐겁고 재미있는 축구를
배워온 외국 선수들과 성인이 됐을 때 과연 어떤 차이점이 나타날까요.
FIFA 랭킹을 살펴보면 그 해답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얼마 전 전국체전에서 가혹한 체중감량에 어린 레슬링 선수가 그만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서글픈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저 또한 몇 년 전에는 그 선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왔기에 남의 일로만 치부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축구의 재미와 즐거움을 배우고 깨달았더라면 지금 제가 처한 현실이 좀 덜 힘들고 덜 괴로웠을 거예요. 그래서 더 안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10월16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28
처음엔 장난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실이더라고요. 한국이 베트남과 오만에 연달아 패하면서 대한축구협회는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정신이 없다고 하더군요.
경기를 직접 보지도 못했고 현재 뛰고 있는 대표팀 선수들과 전화통화를 해보지 않아 정확한 상황 판단은 잠시 미뤄둬야 하겠지만 축구팬들이 갖는 참담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 이야기를 해볼게요. 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대회에서 프랑스와 경기를 가졌던 상황,
혹시 기억나세요?
그때 우리팀은 프랑스에 0-5로 허무하게 지고 말았잖아요. 솔직히 경기 전부터 걱정이 많았어요.
워낙 강팀이라 선수들 모두 긴장한 분위기가 역력했죠. 사실 앙리, 지단 등 이름만 들어도 지레 겁을 먹게 하는 스타 플레이어가 어디 한둘입니까?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주눅들지 말고 자신있게 상대하라고 주문하시더라고요. 급기야 경기는 시작됐고 초반부터 프랑스의 파상 공격으로 우리는 어떻게 손을 써볼 틈도 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상대의 득점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여주질 않더라고요. 솔직히 그때 무슨 생각이 있었겠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거죠. 프랑스와의 경기는 육체보다는 정신적으로 완패한 경기였습니다.
월드컵을 앞두고 벌어진 빅 매치에서 ‘오대빵’이라는 결과는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히딩크 감독님과 선배들이 침체된 선수단 분위기를 잘 잡아 주셨어요.
하루 빨리 ‘악몽의 경기’를 잊게끔 여러 가지 장치들을 마련하셨고 다음 시합에서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 최선을 다하자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됐었죠.
그 이후부터 멕시코,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등과의 평가전에서 좋은 내용의 경기를 펼쳤다는 건 이미 다 아시는 사실이고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어느 팀이나 시련의 나날은 있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지금 쿠엘류 감독님이 이끄는 대표팀에 원색적인 비난의 화살을 보내는 것보다는 이성적인 판단과 잣대로 대표팀을 평가하고 앞으로의 과제를 어떻게 해결해 가야 할지에 대한 조언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우리보다 몇 수 아래의 팀을 상대하다보면 선수 입장에선 약간 ‘여유’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혹시 알아요? 이번 일이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지. 그리고 박지성에 대한 걱정도 많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는 없었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하고 있어요. 아직까지 시간은 있고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거든요.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를 통해 좋은 소식을 많이 전해 드리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해서 항상 미안한 마음이에요. 여러분,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실 수 있죠?
10월23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29
드디어 여러분에게 기다리고 고대하던 골 소식을 전해 드리네요.
박지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분이라면 지난 2일(한국시간) NAC 브레다와의 원정경기서
2골을 성공시켰다는 내용쯤은 잘 알고 계실 거예요. 경기 후 그동안의 체증이 싹 가시는 것처럼 아주 홀가분한 마음이었어요. 주전에서 점차 벤치 신세로 밀려나는 상황에서도 제 몸 상태는 크게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한 건’ 하리라고 자신은 했거든요.
하지만 이곳 현지 분위기보다도 국내 언론의 시각들이 점차 부정적으로 변하는 걸 보면서 묘한 기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가장 고마운 분이 히딩크 감독이에요. 여러 가지로 팀 사정이 좋지 않은 데도 불구하고 저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잃지 않으셨거든요.
최근 한국에서 일고 있는 쿠엘류 감독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도 선수에 대한 감독의 신뢰처럼 감독에 대한 선수, 협회, 국민의 신뢰가 보태진다면 감독 입장에선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전 쿠엘류 감독에 대해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에요. 그 분 밑에서 게임을 한 번도 뛰어본 적이 없거든요. 단 재신임을 결정한 만큼 쿠엘류 감독이 그 믿음에 보답을 해주리라 믿습니다. 지난 베트남전과 오만전의 결과를 두고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전 좀 다른 생각입니다. 대표선수들이라면 경기장에서 엄살 피우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을 거예요. 어느 누가 게임에서 지는 것을 원하겠어요. 물론 상대팀을 얕잡아 봤을 경우에 조금은 느슨한 플레이가 나올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기자 분이 이런 질문을 하더라고요. 월드컵을 치른 후 혹시 환상이나 우쭐한 기분에 사로잡힌 적이 없었느냐고.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월드컵이 세계 축구선수들의 최고의 축제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월드컵에 출전하지 않아도 세계에는 너무나 잘 뛰고 테크닉 좋은 훌륭한 선수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1월18일 불가리아와 A매치가 있더라고요. 그날은 팀 일정도 없고 해서 한국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랜만의 귀국길이라 조금은 설레는데 그 전에 더 좋은 소식 안고 금의환향할 수 있도록 더욱
신나게 달려볼게요.
11월3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30
지난주에 터진 ‘2골 대박’이 6일(한국시간) 에인트호벤 홈에서 치러진 챔피언스 리그 3차전에까지 이어지길 바랐지만 아쉽게도 그냥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네요. 그래도 우리 팀이 2-0으로 승리하는 바람에 본선 진출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돼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오랜 가뭄 끝에 터진 골 덕분에 자신감은 많이 회복됐어요. 그런데 축구는 90분 동안 하는 경기인데 도중에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갑자기 컨디션 난조에 빠지곤 해요. 실수했다고 해서 긴장하지 말라는 주문도 있는데 정말 제가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달리 뭐라 설명 드리기가 어렵네요. 사실 때때로 자신감이 오락가락하거든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정신적인 문제가 플레이하는 데 영향을 미치다보니 여러분이 보시기엔 박지성이 좋았다 안 좋았다 하는 것처럼 비칠 거예요.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으라고요? 하하 아직 그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빠지진 않았답니다.
이제 곧 한국에서 여러분을 뵐 수 있을 거예요. 10일에 귀국할 예정이거든요.
좋은 모습으로, 값진 열매 안고 돌아간다면 제 발걸음도 가볍겠지만 그렇지가 못해 조금은 찜찜한 생각도 들어요. 그래도 월드컵 이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빌 것이라는 기대에 밤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뭔가 상황이 꼬이고 어려울 때 대표팀에 들어갔다 나오면 금세 컨디션이 회복되고 경기력이 되살아나는 경험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도 간절한 마음으로 이전의 ‘전철’을 꼭 밟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참 <일요신문> 6백호, 축하드릴게요. 제가 뭔가를 선물하고 싶은데 어떤 게 좋을까요? 이전 창간 기념호 때 했던 삼행시를 다시 한번 해볼게요.
최근 이런저런 구설수에 올랐던 ‘대표팀’을 주제로 운을 띄워보겠습니다.
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축구 대표팀입니다.
표: 표류하고 있는 대표팀이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갖고 기다린다면
팀: 팀을 구성하는 코칭스태프, 선수들 모두 축구팬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희망을 보여드릴
겁니다. 대~한민국 파이팅(100% 박지성 작품임. 너무 근사하죠?)!
11월7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31
안녕하세요. 여러분! 제가 이렇게 큰 목소리로 인사를 드리는 이유는 여러분을 만나고 있는 이곳이 한국이기 때문이죠.
18일 불가리와의 평가전을 위해 지난 10일 귀국해서 오랜만에 친구들도 만나고 특별훈련도 받아가면서 금쪽 같은 시간을 ‘다이아몬드’처럼 쓰고 있습니다.
어제(16일)는 불가리아전을 앞두고 임시 숙소로 쓰고 있는 타워호텔에서 참으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월드컵 때 동고동락했던 형님들과 동료 후배들까지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방마다 돌아가며 이야기꽃을 피웠거든요.
며칠 전에는 일본에서 같이 생활했던 (안)효연이형과 속칭 ‘김남일 패밀리’로 불리는 형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는데 패밀리의 ‘대부’ 격인 남일이형이 지리적인(전남 광양) 여건으로 참석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답니다.
제 일기를 담당하는 기자 누나(‘이모’라고 불러야 될 것 같은데)가 룸살롱에 가봤냐고 물어보시네요. 허, 참. 우리나라 축구선수 중에 룸살롱에 안가 본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룸살롱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전 일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그런 곳이 가끔은 편할 때도 있어요.
요즘 언론에서 메이저리거인 김병현 선수의 폭력 사건에 대해 연일 뜨거운 관심을 쏟아내고 있는 걸 유심히 지켜봤어요.
혹시 이런 얘기 들어보셨어요? 프로야구에 김병현이 있다면 프로축구엔 박지성이 있다고. 즉 저도 기자분들과의 관계가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거든요. 아마 눈치 빠르신 분이라면 네덜란드에서 귀국할 때 공항에서 (이)영표형과 함께 찍은 사진 중에 제가 웃고 있는 장면은 단 한 컷도 없다는 사실을 아실 거예요.
전 솔직히 김병현 선수의 입장이나 기분에 대해 공감하는 편입니다. 찍기 싫은 사진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촬영할 때는 조금씩 기분이 나빠지기도 해요. 그러면 전 금세 얼굴 표정이 굳어져요. 아마 저 같은 선수들이 많으면 기자분들은 일하기 힘드실 거예요. 너무 재미없잖아요. 그런 면에서 (이)천수는 저한테 고마워해야 해요. 절 만난 다음 천수를 만난 기자분들이 모두
그런다고 해요. “넌 어쩜 그렇게 말을 재밌게 잘하냐”고.
서로가 서로의 직업과 인격을 존중해준다면 김병현 선수 사건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은 발생하
지 않았을 거예요.
그 일 때문인지 요즘 기자분들이 절 만나면 꼭 이렇게 물어보시더라고요. “박지성 선수, 안녕하세요. 전 ○○신문의 아무개입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잠깐 인터뷰 좀 해도 되겠습니까?”
11월17일 아침, 서울 타워호텔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32
지금 제가 있는 곳은 인천국제공항 3층 출국장입니다. 어제(18일) 불가리아전을 마치고 수원집으로 갔다가 아침 일찍 서둘러 이곳에 나왔어요. 비행 시각은 오후 1시30분인데 아버지께서 워낙 급하게 움직이시는 바람에 공항에 도착하니 오전 11시밖에 안됐네요.
그래도 여유있게 출국 전 일기를 올리고 돌아갈 수 있어 마음은 한결 편안합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까 예상대로(?) 불가리아전을 놓고 아주 다양한 평가와 지적들을 해놓으셨더라고요. 신문 제목만 보고 일부러 내용은 안 읽어봤어요. 골을 넣지 못했기 때문에 그다지 기분 좋을 만한 기사가 없을 것 같아서요.
첫 골을 낼 수 있었던 전반 초반의 상황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겁니다. 골키퍼와 1대1 상황에서 어떻게 공을 차야 성공확률이 높을지 찰나에 판단해 킥을 했는데 골키퍼가 잘 막은 건지 제가 찬 볼이 위력적이지 못해서인지 정말 머리를 칠 만큼 안타까웠답니다.
불가리아전에서도 마음에 담아둘 만한 몇 가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그러다보니 패스할 때 자신감이 떨어졌고 그 영향은 패스 미스 등의 에러로 나타나곤 했어요.
주위에선 자신감 회복이 우선이라고 지적하지만 정말 이 부분은 부단한 노력과 시간밖에는 이렇다할 해결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요. 첫 골만 들어갔더라면… 어쩌면 모든 게 자연스럽게 해결됐을 텐데 말이죠. 대표팀의 ‘연습량 부족’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K-리그에서 뛰던 선수들이 곧바로 합류해서 다음날 2시간 정도 발을 맞춰봤는데 솔직히 훈련이라기보다는 컨디션 조절밖에 할 수가 없었어요. 유럽의 경우에도 보통 이틀은 운동하고 하루는 컨디션 조절을 할 수 있게끔 스케줄이 짜여지거든요.
어쩜 이렇게 촉박하고 다급하게 리그 일정과 A매치 대회 일정을 잡는지 솔직히 이해가 안 돼요.
만약 이런 식의 스케줄이 반복된다면 결국엔 축구팬들이 원하는 수준의 경기와 결과는 보여줄 수 없을 겁니다. 외국에선 A매치 대회 때 리그 일정을 잡지 않아요. 물론 협회나 연맹의 고충과 말 못할 속사정이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요.
수익 창출과 홍보 등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선수와 좋은 경기를 보고 싶어하는 팬이라고 생각해요. 그 두 가지 부분에 역점을 두고 일정을 잡는다면 이번과 같은 ‘살인적’이고도 무모한 스케줄은 나오지 않을 거라고 봐요. 지금 네덜란드로 돌아가면 전 정말 ‘죽습니다’.
22일(이하 한국시간) 네덜란드 정규리그 NAC와의 원정경기를 시작으로 26일 AS 모나코(모나코)
와의 유럽 챔피언스리그 경기, 그리고 29일 정규리그 FC 즈볼레전 등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다음 일기에서 어깨에 힘주고 큰소리칠 수 있도록 열심히, ‘천방지축’ 달려보겠습니다.
11월19일 인천공항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33
챔피언스리그 C조에 속해 있는 우리 팀이 요즘 ‘벼랑 끝 승부’를 펼치고 있습니다.
지난 26일 새벽(한국시간)에 벌어졌던 챔피언스리그 5차전, AS 모나코와의 원정경기에서도 스페인의 간판 골잡이로 유명한 모리엔테스의 선제골에 일격을 당한 뒤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후반 헤셀링크의 동점골로 간신히 16강 탈락의 위기를 모면했거든요.
현재 에인트호벤은 2승1무2패로 3위를 기록하고 있어요. 만약 데포르티보(스페인)와의 마지막 6차전에서 2점 차 이상으로 이기지 못하면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하고 ‘헛품’만 팔고 말 거예요.
마지막 경기가 홈에서 벌어지는 터라 약간의 기대는 하고 있지만 그 게임을 망치면 ‘꿈’이 날아가기 때문에 벌써부터 잔뜩 긴장하고 있답니다. 한국에서 돌아온 뒤 처음 치렀던 NAC와의 경기부터 줄곧 원정을 다니느라 사실 체력적으로는 ‘힘들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예요.
그래도 한국에 다녀온 후 기대했던 대로 정신적인 면에서 한층 여유가 생겼고 자신감도 많이 회복이 됐어요. 정말 한국에는 박지성의 부족한 부분을 채울 만한 어떤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다음 주에는 동아시안컵대회가 일본에서 열리잖아요. 저야 팀 사정상 참가할 수 없지만 대표팀 선수들이 좋은 내용으로 알찬 수확을 거둘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한국대표팀은 분명 일본을 제치고 우승할 만한 저력과 실력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거든요.
많은 기자분들이 저한테 히딩크 감독과 쿠엘류 감독의 차이점을 아주 ‘쉽게’ 물어보세요. 솔직히 선수 입장에서 ‘감히’ 감독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박지성의 일기에서는 조금은 솔직히 두 분을 비교해 보기로 할게요.
히딩크 감독이 선수들의 조직력을 중요시한다면 쿠엘류 감독은 공격적인 면에서 감독의 지시보다는 선수들의 능력을 최대한 믿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즉 선수들이 각자의 장점을 살려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를 읽을 수 있거든요.
또한 히딩크 감독은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전술을 구사하는 반면 쿠엘류 감독은 큰 골격을 갖고 그 틀 안에서 선수들의 능력을 풀어가는 스타일이에요. 두 분 중 누가 더 능력이 뛰어난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부분은 저도, 팬도, 기자도 아닌 성적만이 말해주는 거니까요.
그러나 쿠엘류 감독이 포르투갈 대표팀을 이끌고 유로2000에서 4강에 올랐다는 부분 만큼은 제대로 인정받았으면 합니다. 아무리 포르투갈 대표팀 멤버들이 화려하다고 해도 감독의 능력 없이는 4강까지 오르기엔 한계가 있거든요.
너무 쿠엘류 감독에 대해 비난만 하지 말고 쿠엘류 감독의 선이 굵은 축구가 우리 선수들과 자연스레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힘과 용기, 그리고 지지를 보내주길 바랍니다.
여러분 쿠엘류 감독과 한국 대표팀에게 월드컵 때처럼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비스무레하게’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11월27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34
지난 11월30일 FC 즈볼레와의 원정경기에 대한 소식 들으셨나요? 물론 에인트호벤이 4-0으로 대승을 거뒀지만 전반 24분에 터진 첫 골이 좀 기묘하게 나왔거든요.
우리 선수의 코너킥을 문전에 서 있던 제가 비호같이 날아올라 헤딩을 했는데 상대 선수 무릎을 맞고 골인이 된 거예요. 솔직히 처음엔 제가 골을 넣은 줄 알았어요. 손을 쳐들고 좋아하면서 동료들과 ‘하이 파이브’를 하는 등 나름대로 골 세리머니는 제대로 했거든요.
그런데 알고보니 상대의 자책골이라는 거예요. 얼마나 민망하던지. 김은 빠졌지만 제가 한 헤딩골이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라 상당히 기분은 좋았답니다.
얼마 전 히딩크 감독님이 네덜란드의 축구 관련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영표형과 저에 대한 한 축구기자의 공격성 질문을 받았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그 기자분에 따르면 ‘두 명의 동양인 선수들이 에인트호벤팀을 위해 크게 한 일이 없다’는 거죠.
영표형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전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에요. 그분의 지적대로 별로 보여준 게 없으니까요. 하지만 하루하루, 한 주 한 주, 한 해 한 해의 성적에 연연했다가는 이곳에서 목숨(?) 부지하며 오래 버틸 수가 없어요.
때로는 기자들의 지적을 애써 무시하기도 하고 기사를 읽고도 못 읽은 척하며 무관심으로 대해야 흔들리지 않고 생활할 수 있답니다. 그런 점에선 네덜란드어를 잘 모르는 게 때론 다행이기도 해요.
요즘은 가끔씩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봐요.
특히 한국문화에서만 볼 수 있는 선후배 관계가 여기처럼 위계질서 없이, 나이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모두가 친구인 분위기에서는 그리울 때가 있어요. 전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는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예전에 비하면 훨씬 자유스러워졌지만 그 뿌리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어요. 오랜만에 대표팀에 소집돼 선배들과 만나면 그리웠던 정이 새록새록 생기는 것 같아요. 이곳에서는 저 혼자뿐이잖아요.
아파도 혼자 견뎌내야 하고 힘들어도 혼자 이겨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럴 때마다 누가 절 좀 이끌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선배한테 기대하고 충고를 듣고 또 따르는 선후배 문화가 그리운 거죠. 연말이라서 그런가. 괜히 정들었던 사람들이 자꾸 보고 싶어지네요.
12월4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35
지금 쓰는 이 일기는 데포르티보와의 챔피언스리그 조별 마지막 경기를 치른 뒤 집에 돌아와서 나름대로 차분히 제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사실 말이 ‘차분히’이지 속은 부글부글 들끓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 경기는 네덜란드 진출 후 최악의 졸전이라고 말해도 항의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형편이 없었거든요. 물론 팀은 3-2로 승리를 거뒀지만 골 득실 차로 데포르티보에 밀려 아쉽게 16강 진출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변명 같지만 오늘은 유난히 몸이 무거웠어요. 우리 팀이 모두 3점 차 이상으로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위축된 플레이를 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고요. 전반전 끝나고 나오는데 팬들로부터 엄청 야유를 들었어요. 그 야유의 대상자가 저인지 아니면 다른 선수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모든 소리가 다 저를 향해 퍼부어지는 것 같아 정말 괴로웠습니다.
축구가 왜 이렇게 어렵기만 할까요.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게 당연하다고 하지만 너무 어렵네요.
사실 축구를 시작한 이유가 재미있었기 때문인데 이렇게 힘들고 사람 피 말리는 운동이었다면 아예 하지 말 걸 그랬나 봅니다(진짜 마음 약한 소리하고 있네요). 이렇게 심한 자책을 하다가도 골이 한번 터지면 그 희열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죠. 그 때는 ‘아, 내가 축구하기를 정말 잘했구나’ 하는 생각도 당연히 할 것이고요.
요즘에는 경기장에 서 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요.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가슴이 답답하고 아득해질 때도 있습니다. 한때는 축구를 즐기면서 한 적이 있었어요. 힘든 생활도 즐기는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했죠. 지금은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요. 솔직히 즐기기보다는 이 사태를 어떻게 모면해나가야 할까 하는 고민이 훨씬 큽니다. 올 시즌은 솔직히 박지성이란 축구 선수의 성장을 느낄 수가 없어 답답합니다. 퇴보했으면 퇴보했지 나아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오늘 일기는 참으로 우울하네요.
이렇게 힘들게 경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잠이 오질 않아요.
게임도 하기 싫고 책도 보기 싫고, 아버지의 잔소리를 피해 방으로 들어와선 멀뚱멀뚱 천장만 쳐다보고 누워 있곤 합니다. 좀 더 뻔뻔해져야 할 것 같아요. 좀 더 오버도 해야 될 것 같고. 실수를 탓하지 말고 자신을 존중하는 자기 사랑도 배워야 할 것 같고요. 어느 때보다도 제 속마음을 많이 보여 드렸네요. 아마 내일 일어나서 일기 내용을 보고 후회할지는 몰라도 지금 이 순간은 마치 발가벗은 심정이 돼 여러분을 찾아가는 중이니까요.
12월10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36
어쩜 이번 주 제 일기를 기다리셨던 독자분들이 많았을 것 같네요. 왜냐고요? 얼마 전 한 스포츠 신문 1면 톱으로 난 제 기사 때문이죠. 내용이 올 한 해 제가 부진했던 이유가 세 살 연상의 여자와 헤어진 후유증이라는 스토리였어요. 글쎄요. 이 자리에서 그 기사의 진위 여부는 말씀드리고 싶지 않아요. 이미 기사가 나온 상태에서 진짜다, 거짓말이다 운운해봐야 기차 떠난 뒤에 손 흔드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지난주엔 ‘위’의 일을 포함해서 기자들로부터 전화를 많이 받았어요. 지난번 ‘천방지축 일기’가 꽤나 자극적이었나봐요. 제가 다시 읽어봐도 팬 여러분들이 걱정 많이 하실 만큼 심각하게 씌어져 있더라고요. 제가 힘들어하는 부분에 대해 정말로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했던 것뿐인데 그 일기로 인해 괜한 심려를 끼쳐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 전 그렇게 나약한 놈은 아니에요. 만약 나약한 정신으로 네덜란드에서 생활했더라면 일찌감치 보따리 싸들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거예요. 순해 보이는 이면에 강단도 있고 자존심도 강하고 욕심도 남 못지않죠. 어쩌면 그런 욕심과 자존심 때문에 올 한 해가 나한테 큰 짐을 지어준 것처럼 힘들고 또 힘들었을 거예요.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자락에 와 있네요. 정말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걸 실감하지만 저한테는 긴 한 해이기도 했어요. 그리 오래 산 인생은 아닌데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 중에서 가장 기억하기 싫은 해가 바로 2003년일 겁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축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축구가 안 되니까 다른 일마저 꼬이고 얽히고 설켜 버렸어요. 올 한 해를 결산하는 해외파 선수들 중에서 저에 대해 혹평을 하는 기사도 읽었어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만든 거니까요.
한 가지만 밝힐 게요. 지금까지 축구에 영향을 미친 사적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적인 문제로 인해 축구가 안 되거나 힘든 적도 없었고요. 더 자세하게 말씀드릴게요. 전 이 나이가 되도록 여자를 사랑해본 적도 없고 짝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해보지도 못했어요.
물론 자랑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진의 원인을 사적인 데서 찾은 기사는 정말 절 슬프게 했어요.
새해에는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출발하고 싶어요. 송년 인사 드릴게요.
지난 한 해 동안 박지성의 일기를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너무 안 좋은 이야기가 많아서 실망하신 분들이 많으셨을 거예요. 그 부분은 저 또한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새해에는 어둡고 좋지 못한 소식 대신 밝고 기쁜 소식들로만 가득 채워질 수 있도록 정말 열심히 노력할 겁니다. 아쉽지만 저에 대한 끈을 놓지 마시고 기다려주신다면 그 배려와 사랑에 꼭 보답하는 박지성이
되겠습니다.
12월18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37
2년 만에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고 3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연말을 보내게 되는군요.
크리스마스날 뭐했냐고요? ‘남자’들과 어울려 재미없게 보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뜻 깊은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었지만 현재 애인이 없는 관계로(이 멘트는 진짜입니다.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친구들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어요.
요즘엔 친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좋은 사람 소개시켜 달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반응이 ‘있는데 없는 척한다’는 그런 표정들입니다. 정말 없는데 말이죠. 여자친구의 존재는 어느 순간부터 저의 ‘희망사항’이 됐습니다. 물론 그동안 이런저런 인연으로 알게 되거나 만난 사람도 있어요. 그런 관계가 지금까지 지속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해외에서 선수 생활을 하는 저만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운동 선수 자체가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가 어려운 데다 남들처럼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1년 열두 달 중 10개월 반 정도를 외국에서 지내다보니 정이 붙으려고 하다가도 안보는 사이에 관계가 소원해지는 아픔을 반복하게 되는 거죠.
요즘엔 결혼한 선배님들을 보면 존경을 넘어 감동 직전에까지 이릅니다. 어느 선배가 저한테
‘사랑하는 여자와의 결혼을 부모님이 반대할 경우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보더군요.
솔직히 아직 생각 안해봤어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 부닥칠 경우 매우 심각하고 힘든 일이 될 것 같다는 짐작은 할 수 있죠.
대부분의 어른들은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할 경우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만약 부모님 외에 주위의 가까운 분들까지 반대하는 결혼이라면 한 발 물러서서 생각을 정리해 볼 겁니다.
그런데 웃기네요. 여자도 없으면서 별의별 상상을 다하고 있는 제가.
연말이라 그런지 유난히 이런 부분들이 제 가슴에 와 닿습니다. 2004년 새해가 앞으로 딱 5일 남았어요. 정말 태어나서 이렇게 각오를 새롭게 한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2003년의 모든 아픔을
훌훌 털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싶어요.
지금보다 더한 부진은 없을 것이라고 믿어요.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고요.
사랑하는 부모님, 한 해 동안 저 때문에 무던히 속을 끓이셨는데 새해에는 그 보답 꼭 해드릴게요.
여러분도 새해 건강하시고 부∼자 되시고요, 그리고 축구 많이 사랑해 주세요!
12월26일 한국의 수원 집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38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어요. 무슨 날이냐고요? 겨울휴가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출국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네요.
휴가를 기다릴 땐 하루하루를 손꼽을 만큼 한국을 그리워하고 사람들이 보고 싶은데 이렇게 달콤함을 만끽하고 돌아가는 순간엔 새로운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물밀 듯합니다.
지난 1월1일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년 벽두에 ‘가출’을 하는 잊지 못할 경험을 했어요. 부모님이 허락하셨냐고요? ‘정보’에 따르면 그 시간에 우리 부모님도 집에 안 계신 걸로 아는데 ^^.
잘 아는 커피숍에서 아는 형들과 이야기하며 보냈다면 믿으실까요? 제가 워낙 주변머리가 없어서 무슨 무슨 날 여자친구와 데이트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또 여자 타령이네요).
한국에서 외출할 때 어떻게 다니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대부분 직접 차를 몰고 가거나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동해요. 하지만 거리를 다닐 땐 완벽한 ‘변장’을 합니다. 모자와 옷으로 적당히 커버를 하거나 거리를 거닐면서 절대로 앞사람과 얼굴 마주치지 않기 등등의 방법으로 다니다보면 예상치 못한 사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아요.
솔직히 제가 좀 평범하게 생겼잖아요. 최근에는 웃으면 연기자 류승범씨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 정도는 과찬이시죠. 평범해서 굳이 제 존재를 숨기지 않아도 되지만 행여 저로 인해 주위가 소란해질까봐 최대한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출국 후엔 곧바로 태국 전지훈련을 떠날 것 같아요. 그리고 25일부터 본격적인 후기리그가 시작되고요. 갑자기 네덜란드를 생각하니까 긴장이 팍 되네요. 박지성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사실 그동안 한국에선 애써 네덜란드를 잊었어요. 어차피 고민하고 걱정한다고 해도 해결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네덜란드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점들은 에인트호벤에 그대로 남겨두고 홀가분하게 한국으로 들어왔거든요.
출국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네덜란드에 도착한 이후부터 제가 펼쳐가야 할 축구인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네요. 그라운드를 아름답고 벅찬 환희들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좋은 ‘작가’가 돼 볼게요. 어느 정도 자신도 있고 더 이상 떨어질 바닥도 없기 때문에 저한테는 무조건 전진만 있을 뿐입니다.
팬들의 사랑과 지지와 성원에 거듭 감사드리며 그분들의 마음을 가득 담고 네덜란드로 향하렵니다.
1월2일 수원 집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39
지금 일기를 쓰고 있는 곳은 에인트호벤 선수단 버스 안입니다.
오늘(한국시간 9일)은 후기리그 전초전으로 NEC 나이메헨과의 연습경기가 NEC 홈구장에서 벌어
졌어요. 경기가 끝난 후 에인트호벤으로 이동중인데 게임을 이겨서인지 선수들의 기분이 한층 ‘업’된 상태입니다. 한국 대표팀에선 대개 경기 결과에 따라 버스 안 분위기가 달라지잖아요.
그런데 이곳은 경기에 져도 선수들 대부분이 경기장을 나오면서 모두 잊어버리는 스타일이라
버스 안에서도 전과 다름없이 시끌벅적하게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치는 등 크게 달라지는 게 없어요.
지금 제 옆에는 (이)영표형이 앉아 있어요. 제가 말도 붙이지 않고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으니까 눈을 감고 있는데 아마 잠깐 졸고 있을 거예요.
저나 영표형도 다른 선수들처럼 ‘왕수다’를 떨고 싶지만 의사소통의 문제로 둘이서만 소곤거리는 형편입니다. 오늘 경기는 비록 친선경기였지만 전기리그 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선보였고 몸이 한층 가벼워진 것 같아 다시 한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어요.
저는 후반에 투입되는 바람에 딱 반절만 뛰었지만 이전에 숱하게 지적돼 왔던 불안한 요소들이 자취를 감춰버렸답니다.
봄멜이 제게 넘겨준 패스를 데 용에게 크로스해 팀의 세 번째 골을 만들어내면서 3-2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고요. 다 한국에서 잘 쉬고 온 덕분인 것 같아요. 한 살 더 먹어서 어른스러워진 면도 없지 않겠지만 아직 떡국을 먹지 않아 그렇게 달라져 보이진 않아요. 단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한국에서 보낸 시간들이 굉장히 소중했던 모양이에요.
반복되는 악순환 속에서 뭔가 탈출구가 필요했는데 때마침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여러 사
람들을 만나며 축구에 대한 열정과 목표를 새롭게 다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버스 안에는 모두 22명의 선수가 타고 있어요. 정규리그 때는 16명에서 18명이 정원인데 오늘은 친선 경기라 엔트리 숫자가 좀 많아졌네요. 이 버스에 탈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며 네덜란드에 있는 동안 ‘행운의 버스’에 탑승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에인트호벤 유니폼을 입고서도 버스 ‘티켓’을 끊지 못하는 선수들이 의외로 많거든요. 11일부터 터키로 일주일간 전지훈련을 떠나요. 순전 따뜻한 날씨를 찾아가는 거죠. 다음 일기에선 전지훈련지에서 벌어진 재미난 에피소드를 소개해 드릴게요.
어? 그새 ‘우리 동네’에 도착했네요.
1월9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40
방금 FC 그로닝겐과의 원정 경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후기리그의 시작을 알리는 개막전이라 이런저런 관심을 많이 받았는데 주전으로 출전하지 못해 조금 아쉬움도 남네요.
우리 팀이 2-0으로 앞선 상태에서 후반 29분쯤 욘 데 용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교체 투입됐거든요. 골 찬스를 놓친 것도 아깝고요. 수비수 뒤로 빠져 들어온 스루패스를 한 템포 늦게 때리는 바
람에 골키퍼의 벽을 넘지 못했어요. 논스톱으로 그냥 찰 수도 있었는데 정확한 슈팅을 위해 템포를 조절한다는 게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만 거죠.
하지만 오늘 제 플레이에 대해서 큰 불만은 없어요.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진다고 생각하니까요.
일주일 동안 치렀던 터키 안타리아 전지훈련 중에 히딩크 감독님과 실로 오랜만에 ‘독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에 대해 이런저런 구설수가 많아 감독님이 좀 걱정을 하셨나봐요.
한국 언론에 제가 터키에서 벌어진 친선 경기 중 PK를 실축해 위기를 겪고 있다든가, 또는 팀
동료인 반 봄멜이 어느 네덜란드 축구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저와 영표형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
다는 기사들이 소개됐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거죠.
감독님은 다소 짓궂어도 되니까 동료들과 장난도 치고 적극적으로, 또 편하게 팀 생활을 즐기라는 부탁을 하셨어요. 그리고 홈관중들의 야유에 대해서도 크게 개의치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지금은 팀에서 최고의 플레이어로 인정받는 케즈만이나 롬메달도 초보’였을 때는 홈팬들의 야유에 적잖이 당황했고 마음고생을 했으며 잘 이겨낸 덕분에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설명도 덧붙여 주셨죠. 저에 대한 감독님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절감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우리 팀의 반 봄멜이 저와 영표형에 대한 불만 중 ‘말 좀 배우라’는 충고를 전했는데(물론 이 내용은 봄멜이 한 말과 신문에 보도된 내용과는 큰 차이가 있지만) 사실 네덜란드어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언어가 네덜란드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축구 다음으로 절 힘들게 하는 부분이긴 해도 언어를 배우지 않고 배짱을 퉁길 만큼 강심장은 아니거든요. 앞으로 주중 두 차례씩 경기가 벌어지는 빡빡한 일정의 연속입니다. 바쁜 스케줄만큼 몸과 마음도 지치고 정신 없는, 그러면서도 해피한 후기리그가 되길 바라며, 여러분께 인사를 전합니다.
1월26일(한국시간)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41
올해는 한국과 네덜란드 또는 제3국을 바쁘게 오가는 정신없는 나날이 될 것 같아요.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온 짧은 인생 중 ‘가장 비행기를 많이 탔던 해’로 기록될지도 모릅니다.
왜냐고요? 올림픽대표팀과 성인대표팀에 발탁되는 바람에 네덜란드 ‘본가’와 ‘처가’(?) ‘외가’를 경기 중요도에 따라 열심히 오가야 할 테니까요.
사실 작년엔 부상으로 제일 한가한 시간을 보냈잖아요. 김호곤 감독이 이끄는 올림픽대표팀에는 처음 합류하는 거라 사실 좀 걱정이 돼요. 발 한 번 맞춰 보지 않은 선수들과 조직력을 극대화시키며 좋은 플레이를 보여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더욱이 (이)천수와 제가 들어가면 올림픽대표팀이 달라질 거라는 기대가 굉장히 부담스럽네요.
그래서 나름대로 양쪽 ‘집안’에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고 잘 굴러갈 수 있는 박지성의 생존 방법을 연구해봤어요. 올림픽대표팀에선 제 존재를 보여주기보다는 팀에 적응하는 걸 우선 목표로 삼았습니다. 처음 보는 선수들과의 인간관계는 물론 코칭스태프와도 제대로 호흡을 맞춰 가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성인팀은 서로 훤히 꿰고 있는 형들이 있어 오히려 부담도 덜 되고 마음도 편해요. 그래서 적응이 아닌 저의 베스트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성인팀에서 제 플레이가 살아나야 네덜란드 리그 경기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뛰겠습니다.
참, 올림픽에서 뛰던 선수들이 성인팀에 합류하면 본의 아니게 선배들 눈치를 본다는 지적이 있는데 그건 겪어보지 않고는 그 심정 모를 거예요. 저 또한 성인팀에 처음 발탁됐을 때는 이런저런 일로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마사지를 받기 위해 의무실에 누워 있으면 형들이 뼈있는 농담을 던졌거든요.
“야, 네가 마사지 받는 걸 보니까 오늘 운동 많이 힘들었나보다”하고 말하는데 배짱 좋게 누워 있을 후배는 아마 없을 거예요. 해외에선 그런 ‘위계질서’는 찾아볼 수가 없어요.
이곳 에인트호벤팀은 나이 많은 고참들이 식판 들고 돌아다녀도 ‘쫄다구’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앉아 먹던 밥을 다 먹을 수 있답니다. 신기한 것은 한국만 들어가면 제 몸이 저절로 위계질서에 동참하게 된다는 사실이죠. 연이은 국제대회에서 한국의 성적은 물론 개인 성적까지 잘 챙길 수 있는
‘현명한’ 박지성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하며 이만 인사드립니다. 조만간 한국에서 뵐게요.
1월30일 에인트호벤에서
[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42
오늘(8일 현지시간) 제 일기를 담당하는 기자 누나가 근심 어린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선 어렵게 말문을 여시네요.
“지성씨, 괜찮아?” 암스텔담에서 치러진 아약스와의 원정경기에서 1-2로 패한 뒤였고 전 세 경기 연속 벤치만을 굳건히 지키고 있던 상황이라 상대방 입장에선 전화하기조차 부담스러웠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전 정말 괜찮습니다. 물론 90분 내내 감독의 ‘콜’ 사인만을 기다린 채 그라운드를 응시하고 있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상이라도 당한 상황이라면 애써 위로해보겠지만 몸은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뛰지 못하니 그 좌절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한 일주일 전인가요. 에인트호벤 2군 선수들과 훈련할 기회가 있었어요.
1군과 2군이란 어쩌지 못하는 타이틀로 인해 훈련 첫날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는데 연습경기를 하면서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신바람 난 축구를 하며 참으로 오랜만에 ‘오랫동안’ 그라운드를 뛰어다녔습니다. 그때 비로소 ‘마음을 비운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어요. 전 네덜란드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슬럼프’란 단어조차 모르고 살 만큼 상승가도를 달렸습니다.
축구를 잘한다는 자만심에도 사로잡혔고 팬들의 찬사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겉멋이 들기도 했죠.
월드컵 때의 기세를 몰아 네덜란드 리그에서도 저의 진가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착각’했습니다. 요즘엔 ‘기다림’ ‘인내’라는 단어가 참 가슴에 와 닿아요. 누구한테나 찾아오는 슬럼프를
얼마나 잘, 슬기롭게, 또 끈질기게 버티며 극복해 가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는 생각
이 들어요. 이번에 잘 이겨내면 두 번째, 세 번째 슬럼프가 와도 크게 헤매지 않고 잘 이겨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생기고요.
상황이 좋지 않다보니 한국에선 J리그 복귀설도 나돌더군요. 이전 소속팀인 교토는 물론 다른 팀에서 제의를 받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깨지고 부서질지언정 네덜란드에서 좀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은 게 솔직한 생각이에요.
지금의 팀 사정상 제가 하루아침에 주전으로 발탁되거나 코칭스태프나 홈 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엔 다소 어려울 수도 있어요.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 경기에 출전하면서 실력이나 자신감 등을 한층 업그레이드시켜 설령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네덜란드에서 반드시 인정받는 선수가 될 겁니다. 제가 겪고 있는 과정들이 당시엔 두 손 들어 항복하고 싶을 만큼 어려운 것이라 해도 밖에서 보는 것처럼 크게 슬프지도, 힘들지도, 불행하지도 않다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아직 전 어리고 앞으로 더 많은 기회들이 찾아올 거라 확신하거든요. 지성이가 철 좀 들었죠?
2월8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43
어제(14일) 오만전에서 5-0 대승을 이룬 까닭인지 오늘 회복훈련하는데 선수들의 얼굴이 상당히 밝아보였습니다. 저 또한 참으로 오랜만에(?) 기자분들은 물론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니까 기분은 좋지만 솔직히 어제 제 플레이는 그리 만족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결정타는 골키퍼와의 일 대 일 상황에서 찬 공이 골문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비껴갔다는 사실이죠. 만약 그때 팀 상황이 무승부였거나 지고 있는 절박한 상황이었더라면 제 실수는 죽어 마땅할 만한 엄청난 실수였어요. 솔직히 경기 중의 제 컨디션은 그리 좋거나 움직임이 가벼운 편은 아니었어요. 상대방에게 쉽게 보이지 않으려고 빈 공간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뛰어다녔고 다행히(?) 오만 선수들이 추위에 주눅 들었는지, 시차 회복이 안됐는지, 아니면 원래 실력이 그것 밖에 안됐는지, 하여튼 인상적인 경기를 펼치지 못한 덕분에 전후반 내내 우리가 경기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설)기현이형도 그런 얘길 했다고 하던데 저 또한 오만 선수들과 경기하면서 지난번 아시안컵 예선에서 우리가 1-3으로 패한 원인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왜 졌을까? 어웨이 경기였고 팀의 전체적인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가끔 그런 일이 벌어지긴 하지만 왜 1-3의 스코어가 나게 됐는지 좀 이해가 안됐습니다.
선수들 분위기가 지난해와는 약간 차이가 나는 것 같아요. 올해는 중요한 국제대회들도 잇따라 열리는 까닭에 목표의식이 좀 더 확실해졌다고나 할까?
생기가 넘쳐나고(물론 나이 어린 선수들의 영향도 있겠지만) 개성도 장난 아니면서(각양각색의 헤어스타일이 이걸 증명하죠) 훨씬 재미있게 축구를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들이 지난해보다는 한층 업그레이드됐다고 생각해요.
헤어스타일 얘기가 나와서 하는 건데 제 머리스타일에도 좀 힘을 줬거든요.
귀국하자마자 단골 미용실로 달려가 머리에 ‘바람’을 넣었는데 (최)성국이 머리를 보니까 기가 죽더라고요. 그 용기와 대범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어요. (이)천수가 말을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전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스타일은 절대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수요일엔 월드컵 예선전으로 치르는 레바논전이 수원에서 열립니다. 이전의 평가전과는 그 내용이 정말 다르겠죠. 자칫 잘못해서 지기라도 하면 나중에 감당하기 어려울 만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죠.
물론 우리보다는 한 수 아래의 팀이에요. 그렇다고 방심은 절대 금물! 저녁 7시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립니다. 팔짱 낀 채 TV로만 보지 마시고 직접 오셔서 열렬히 응원해 주신다면 아주 큰 힘이 날 것 같습니다.
2월15일 울산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44
지난 18일 레바논전이 끝나자마자 숨 쉴 틈도 없이 네덜란드로 날아온 덕분에 이제야 조금 시차적응도 되고 호흡도 고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한국에서 대표팀 선수로 생활하는 동안 정말 오랜만에 행복함을 만끽했어요. 최근 소속팀에서 주전으로 풀타임을 뛴 지가 까마득하기 때문에 대표팀의 출전 자체가 행운이었고 소중한 또 다른 경험으로 작용했어요.
2001년, 2002년 월드컵을 위해 참으로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던 선수들과 눈빛만으로 모든 언어가 전달되는 그라운드의 빠른 전개 상황 속에서 절묘한 패스로 연결되는 플레이들이 짜릿한 흥분을 안겨주었거든요.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어요. 이번에 대표팀에 합류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축구팬이나 대표팀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보다는 대표팀 경기를 통해 내 자신을 추스르고 자신감을 회복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고 급박하다는 조금은 개인주의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만큼 경기장에 서는 게 절실했고 또 그리웠어요. J리그 교토 퍼플상가의 끈질긴 구애를 물리치고 에인트호벤으로 올 때만 해도 주전 자리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그저 내가 가고 싶었던 훌륭한 팀에서 뛸 수 있다는 사실에 모든 초점을 맞췄었죠. 어떤 형태로든 유럽 축구의 맛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었던 거예요. 선수들 개개인의 능력은 아시아나 유럽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비슷한 수준인 것 같으면서도 유럽 선수들한테는 우리가 갖지 못한 ‘뭔가’가 있더라고요.
결론은 어렸을 때부터 접하는 축구 환경이었어요. 흙과 잔디, 스파르타식 훈련과 자율훈련, 수동과 능동적인 축구 환경이 결국엔 성인이 됐을 때 ‘뭔가’가 있고 없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정말 안타까운 심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환경 탓만 하며 포기하고 있다면 그 또한 바보나 마찬가지겠죠. 환경은 부럽지만 타고난 환경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노력과 끈기 외엔 달리 방법이 없을 것 같더라고요.
축구가 노력만으론 되는 운동이 아니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게 노력이기도 해요.
그래서 다른 재능이 없어도 ‘한노력’하고 ‘한끈기’하는 전 자신이 있습니다.
앞으로 12경기를 마치면 후기리그가 끝나요. 그 시간이 지나면 박지성의 앞날도 가닥이 잡히리라고 봐요. 그 가닥이 꿈을 이어가는 가닥일지, 아니면 잠시 후퇴해서 돌아가는 방향이 될지는 두고 봐야겠죠. 제발, 부디, 전자이길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면서 펜을 놓습니다.
2월22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45
‘헉헉.’ 숨차는 소리 들리시나요?
29일 오후 2시30분(현지시간) 경기를 마치고 지금 공항으로 뛰는 중이거든요.
필립스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로다 JC전을 마치고 에인트호벤에서 런던으로 날아가 이곳 시각으로 밤 9시 비행기를 타면 한국에 3월1일 오후 5시에 도착해요.
도착 즉시 바로 파주 트레이닝 센터로 들어가 올림픽 대표팀과 처음으로 조우를 하는 정말 정신없는 스케줄이죠. 이번 주에는 지난 27일 이탈리아로 건너가 원정경기까지 치른 터라 비행기 타는 게 공포스러울 정도입니다.
이탈리아에선 예전에 (안)정환이 형이 있던 페루자와 UEFA컵 3라운드 원정 1차전을 치렀어요.
드디어, 비로소, 마침내, 12경기 만에 풀타임으로 출장해 감회가 남달랐지만 결과는 아쉽게도 0-0으로 비기고 말았어요. 그래도 ‘박지성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조금은 보여준 것 같아 기분 좋은 경기였습니다. 한국 언론에선 저와 (이)영표형이 정환이형의 복수를 대신 한다느니 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는데 솔직히 그런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상대팀이니까 무조건 이겨야 했지 페루자라고 해서 특별한 느낌은 없었거든요. 아, 페루자 홈구장에 들어서면서 ‘여기가 바로 정환이형이 뛰었던 곳이구나’란 생각은 했어요.
2002월드컵 때는 이탈리아 선수들의 경기가 상당히 거칠고 무섭다고 생각했어요.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 프로생활을 했기 때문에 유럽 축구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이탈리아처럼 ‘한성질’하는 선수들을 상대하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부대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네덜란드에서 축구생활을 하다보니 이탈리아 선수들 정도의 ‘거칠기’는 이미 유럽에선 보편화된 현상이었어요.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 감독으로 오신 뒤 자주 하셨던 말씀이 ‘한국선수들은 너무 얌전하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전 처음에 그 말을 이해 못했어요. 한국선수들의 수비도 장난 아니게 터프하거든요. 그런데 이곳에 와서 그 말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유럽 선수들은 그라운드의 컨트롤 능력이나 근성, 기본기 등이 항상 절대치를 이루고 있어요.
기복이 거의 없는 편이에요. 그런 상태에서 상대에 대해 강한 압박을 가하거나 공을 뺏고 돌진하는 능력이 더해지니까 대단한 파워를 뿜어내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3일 서울에서 벌어지는 중국전은 여러 가지로 부담스런 경기입니다. 우리팀 선수들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딱 하루만 발을 맞춰보고 들어가는 셈이니까요.
경기 결과에 따라 역적이 될 수도, 해결사로 칭찬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동안 대표팀에서 쌓은 노하우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끔 정말 애써보려고 해요.
그래도 걱정되네…. 선수들 이름은 알고 들어가야 하는데 말이죠. 10일 만에 돌아가는 한국의 하늘은 그동안 어떻게 변해 있을까?
2월29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46
인천공항이에요. 어제(3일) 중국전을 마치고 네덜란드로 출국할 준비를 하고 있는 틈을 이용해 여러분께 인사를 드립니다. 어제 경기는 잘 보셨나요? 날씨가 추워서 관중들이 적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래도 많은 축구팬들이 응원을 보내주셔서 정말 큰 힘이 됐어요.
올림픽 최종 예선 첫 경기라서 그런지 선수들이 초반엔 좀 긴장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했어요. 전반을 0-0으로 비기고 라커룸으로 들어가서 선수들과 다시 한번 뭉쳤어요.
‘꼭 이기자’, ‘홈그라운드에서 중국한테 점수를 내줄 수 없다’는 등등의 ‘당연한’ 이야기를 나누며 전의를 북돋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개인적인 아쉬움은 이런저런 이유들로(무슨 이유인지는 여러분도 잘 아시죠?) 몸이 무겁다보니 좋은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몸만 가벼웠더라면 더 많이 뛰어다니며 상대방의 두터운 수비진을 흔들어 놓았을 텐데 말이죠.
솔직히 중국팀은 예상보다 약팀이었습니다. 거칠고 억세기만 했지 섬세함이 눈에 띄지 않았어요.
특히 중국의 공격진들은 그다지 위협적이질 못했어요. 올림픽 대표팀과는 정말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물론 경험 부족으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기는 했어도 또래 선수들 특유의 파이팅과 투지가 ‘어른들 팀’에선 맛보지 못한 부분들인 것 같아요. 전 이번처럼 앞으로의 경기에서도 ‘조율사’ 역할을 담당할 듯합니다. 아마도 국제대회 경험이 많기 때문에 김호곤 감독님께서 그런 중책을 맡겨주신 것 같아요. 이번 경기에 만족은 못하지만 선수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고자 열심히 했다고는 자부합니다.
요즘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몸은 괜찮냐?’는 근심 어린 질문을 많이 해주세요. 아마도 여기저기를 오가는 빡빡한 일정 때문일 거예요. 현재 몸 상태는 좋은 편이에요.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만 있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네덜란드로 돌아가면 훈련 끝나고 무조건 잠만 잘 겁니다.
3월17일 대망의 이란전이 기다리고 있네요.
소속팀 일정이랑 겹치질 않아 저도 합류하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선수들이 좀 더 적극적이고 자신감 있는 플레이로 임한다면, 그리고 불필요한 실수를 줄일 수만 있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기대해 봅니다. 지난 중국전을 통해 우리 선수들이 하지 말아야 할 패스 미스나 판단 착오 등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 부분이예요. 이 점은 경험 외엔 왕도가 없다고 생각해요.
중국전에서 많은 응원을 보내주신 국민 여러분! 이란전에도 그 뜨거운 응원이 지속되길 바라면서, 오랜만에 이거 한번 해볼까요? 대∼한민국 ^^*
3월4일 인천공항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47
7일, 12일, 14일, 그리고 17일. 이게 무슨 숫자냐고요? 지난번 중국전 이후 네덜란드와 프랑스, 그리고 다시 네덜란드와 이란을 오가며 치렀거나 치르게 될 경기 날짜입니다.
그 전의 경기도 연속적으로 이어져 왔던 터라 일주일에 보통 2게임을 뛰는 게 일상이 돼 버린 생활이 반복돼 솔직히 지치고 힘든 게 사실이에요.
요즘엔 에인트호벤 동료들이 자주 제 어깨를 두들겨 줘요. '힘들겠다’ ‘고생한다’는 격려의 제스처겠죠. 외국팀에선 저와 같은 케이스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거든요. 아마도 그들 눈에는 ‘홍길동’처럼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는 제가 좀 신기해 보였을 거예요.
참, 여러분들이 정말 좋아해주셨다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제가 지난 7일 FC 위트레흐트와의 리그 경기에서 시즌 4호골을 넣었잖아요.
팀이 2-0으로 이기고 있었기 때문에 팀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거나 하는 등의 드라마는 없었지만, 그리고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골에 대한 스트레스나 부담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베리 굿’이었어요. 제 플레이에 대한 만족보다는 그동안 박지성의 ‘우울한 나날’을 인내를 갖고 지켜봐 주신 <일요신문> 독자 여러분과 그리고 제 팬 여러분께 약간의 ‘선물’을 안겨 드린 것 같아서요. 이 골이 시작도, 끝도 아니기 때문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아요. 지난해보다 제 몸 상태나 컨디션이 상당히 좋아졌다는 데에 짜릿한 행복함을 느끼고 있다고나 할까요….
이란전에 대해 이런저런 걱정과 주문이 많은 것 같아요. 고지대에서 뛰다 보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에요. 그러다보면 체력적인 소모가 훨씬 크죠.
한순간의 방심이 큰 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순 없지만 그렇다고 살살하고 싶진 않아요. 지금 이 일기를 쓰는 곳은 에인트호벤 홈구장 부근의 한 호텔이에요. 원정경기 왔냐고요?
그런 건 아니고 내일(14일) 페예노르트와의 홈경기가 펼쳐지는데 아약스나 페예노르트와 경기를 하게 되면 비록 홈구장이라고 해도 반드시 경기 전날 합숙을 하는 게 이곳 규율이죠.
그만큼 라이벌간의 대결이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어요.
전 그 경기 마치자마자 곧바로 이란으로 날아갑니다.
3월13일 에인트호벤에서
※ 박지성은 페예노르트전 이후 왼쪽 무릎의 통증악화로 이란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페예노르트와의 경기가 워낙 격렬한데다 그동안 계속된 출장으로 부상이 심해진 것.
박지성은 15일(한국시각) 에인트호벤 구단 지정병원에서 정밀검진을 받고 있다.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48
오늘부터(18일)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나마 다행이죠. 별다른 치료 없이 다시 뛸 수 있게 됐으니까.
아직까지 온전한 몸 상태는 아니지만 수술을 하는 등의 ‘최악의 시나리오’는 비켜갔다는 안도감이 잠시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합니다. 왼쪽 무릎 부상은 지난 7일 FC 위트레흐트전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당시만 해도 크게 아프거나 뛸 수조차 없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팀 닥터와 상의 후 계속 게임에 출전했던 거예요.
참았던 증상이 14일 페예노르트전 이후 악화됐고 결국 왼쪽 무릎에 또 물이 차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 거죠.
MRI(자기공명영상)검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했어요.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지난해 오른쪽 무릎 수술 이후 혹독한 재활 훈련 끝에 간신히 ‘지푸라기’를 잡았다고 잠시 안도했던 제 자신을 돌이켜 보기도 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기사 검색을 해보니까 히딩크 감독이 팀 전력 누수를 방지하고 이란행을 막기 위해 일부러 저의 부상을 확대 보도했다는 내용의 글이 눈에 띄더라고요. 이거 정말 아닌데…. 아니라는 건 여러분도 잘 아시죠?
그동안 상당히 힘든 스케줄을 소화했고 그 여파로 경미한 부상 부위가 더욱 크게 진행된 것이었어요. 어쨌든 한국 올림픽 대표팀이 ‘적지’ 이란에서 1-0의 귀중한 승리를 거둔 것은 그 어떤 일보다도 기쁘고 행복한 소식이었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 하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올림픽 대표팀에서 뛰어 보니까 선수들의 능력이 아시아권 어느 팀과 붙어도 전력상 뒤질 게 없다고 여겨졌어요.
현재 조 1위로 좋은 위치를 선점해 놓은 상태라 남은 게임에서도 전력질주한다면 본선 진출은
‘당근’ 아닐까요?
요즘 에인트호벤이 여러 가지로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리그 1위팀인 아약스와 승점이 너무 크게 벌어져 역전에 대한 희망을 불태우기가 조금은 힘들어요.
그렇다고 2위 자리를 안심할 수 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3, 4위팀과 불과 6, 7점 차이밖에 안 나거든요.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으로 인해 히딩크 감독님도 상당히 예민해지신 것 같아요.
다행히 제 부상이 생각보단 경미한 터라 21일 NAC브레다전이나 다음주(26일) 홈에서 열리는
옥세르(프랑스)와의 결전에는 출전할 수 있을 겁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난 한 달 동안 한국에 두 번, 이탈리아와 프랑스 각각 한 번 등 경기하느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어요. 경기의 흐름을 읽는 리듬감은 상당히 좋아졌지만 체력이 떨어진 건 사실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 다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고 체력을 온전한 상태로 회복시켜놓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에요. 제가 ‘얼짱’ ‘몸짱’은 안되는데 ‘체력짱’은 좀 되거든요.
앞으로 그 ‘명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3월18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49
한국은 한창 꽃소식이 만발한 봄날이겠네요.
이곳 에인트호벤에서도 한국처럼 봄꽃의 여운을 느낄 정도는 아니지만 지리한 겨울을 보내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은 하루하루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달 정도를 더 보내면 네덜란드 후기리그도 막을 내리게 되겠죠.
정말 시간이 참으로 빠르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요즘 한국 기자분들한테 조금 삐쳤어요.
지난번 왼쪽 무릎 부상을 두고 계속해서 ‘꾀병 의혹’ 운운하며 미확인 보도를 하셨는데 그 기사를 쓴 분에게 꼭 묻고 싶어요. 직접 네덜란드에 오셔서 제가 뛰는 경기를 보셨는지를.
구단 관계자나 제 주변 사람을 통해 인터뷰한 걸 두고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상상해서 기사를 쓰는 건 글 쓴 분의 자유의사겠지만 그 기사를 통해 마음에 상처를 받을 당사자를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셨나요? 히딩크 감독 입장에선 물론 제가 대표팀에 합류하지 않기를 바라셨을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듯이 팀 전력에 한두 군데의 구멍이 생긴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감독님이 보내주셨다고 해도 제가 힘들었을 거예요. 왼쪽 무릎에 물이 찬 상태에서 출전했더라면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행여 지금까지도 그런 의심을 갖고 계신 분이라면 더 이상 오해하지 마시라고 꼭 부탁드리고 싶어요.
선수는 말이죠. 자기가 뛰어야 하는 경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게임이라면 몸이 망가지거나 부서져도 꼭 뜁니다. 물론 경기 후의 부상 악화가 걱정될 수도 있겠죠. 그래도 현장에 서면 통증도, 고통도 자취를 감추고 오직 뛰고 싶은 열망만이 존재하거든요.
이천수가 경기 전 부상에도 불구하고 이란전을 뛴 걸 보면 잘 알 수 있잖아요. 아마 저도 같은 상황이었더라면 부상을 감추고 뛰었을 거예요. 제가 갈 수만 있었다면.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요, 요즘 에인트호벤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에인트호벤 관중들이 더 이상 저에 대해 야유를 보내지 않는다는 거죠. 엄청난 격려와 응원의 함성을 보내며 좋아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당황할 정도예요.
역시 운동선수는 실력밖에 없어요. 잘 생기지 않아도, 인간성이 그리 좋지 않아도, 여자한테 인기가 많지 않아도, 운동만 잘하면 ‘짱’이거든요.
‘얼짱’ ‘몸짱’보다 더 좋은 게 ‘실력짱’이라는 거 잘 아시죠?
그래서 전 축구를 하고 선수로 뛰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감사드립니다. 축구를 안했더라면 제가 과연 여러분의 사랑을 받을 수나 있었겠어요? 여드름이 제 철 모르고 피어나는 얼굴임에도 그것마저 귀엽다고(?) 봐주시는 팬들이 있기 때문에 박지성의 오늘도 있는 겁니다. ^.^
3월27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50
이번 주엔 지난달 31일 몰디브전 소식으로 우울하게 시작할까 했지만 그래도 4월3일(현지시간)
발바이크와의 네덜란드 리그 경기에서 제가 시즌 5호골을 터트렸다는 내용으로 여러분과 인사를
나누고 싶네요. 사실 4-0으로 이긴 경기라 골의 감흥이 크진 않았어요. 그래도 페예노르트와 2위 자리를 놓고 1점 차 승부를 벌이고 있는 터라 후기리그 6경기를 남겨 놓은 상태에선 승부도, 골득실도 여간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고무적인 일은 부상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동료 선수들이 하나 둘씩 다시 그라운드에 나오고 있고 팀 분위기도 전열을 새롭게 가다듬으며 긴장감을 내뿜고 있어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 연승을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을 가져봅니다.
몰디브전 이야기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겠네요.
이상하게도 2002월드컵 이후 개인적으론 베트남, 오만전에 이어 이번 몰디브전까지 일명 선수들의 ‘지뢰밭’이라 불리는 치욕스런 게임에는 묘하게 피해 가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당시 게임에 출전한 선수들보다는 그 후유증이 덜하겠지만 결국 ‘한솥밥’을 먹는 입장에선 저 또한 경기 결과에 대한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영표형이 몰디브전에 뛰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몰디브전 주심이 스리랑카 출신이었다고 하더군요. 몰디브와 스리랑카는 언어도 같고 위치상 아주 가까운 나라라고 하던데 어떻게 몰디브전에 스리랑카 심판이 배정받을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또 상황이 그렇게 됐는데도 불구하고 축구협회에서 안일하게 대응한 것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상대팀이 몰디브였기 때문에 경기 주변 상황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 또 아무리 심판이 ‘봐주기식’으로 몰고 가더라도 우리 선수들이 골만 잘 넣었더라면 이런 얘긴 나오지도 않았겠죠. 아무리 그래도 혹시나 하는, 최악의 상황은 대비했어야 하는 게 ‘윗분’들의 할 일이 아니었
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경기 결과가 나쁠 때마다 반복되는 문제점들이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언론에선 감독의 자질 문제와 선수들의 정신력 해이 문제 등이 매번 거론되는 것 같아요. 우린 감독이나 선수의 변화에 따라 팀 전체가 받는 영향이 상당히 큰 편입니다. 유럽의 경우 감독이나 선수가 바뀌어도 그 틀은 크게 변하지 않거든요. 중요한 건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죠.
오는 7월에 있을 아시안컵을 앞두곤 가장 긴 대표팀 소집 기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쿠엘류 감독님과 선수들이 어떤 모양새를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평가는 또 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도록 모두가 노력할 겁니다.
4월4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51
오늘(11일)은 에인트호벤 필립스 스타디움에서 FC 그로닝엔과의 홈경기가 열렸어요.
낮 경기로 치렀는데 다행히 우리팀이 5-0으로 대승을 거둬 지금 일기를 쓰는 기분이 약간 붕 상태예요. 우리와 1점 차로 접전을 벌인 페예노르트가 아약스와의 경기에서 패하는 바람에 승점이 3점으로 벌어졌거든요. 앞으로 남은 5경기에서 한 게임 정도는 져도 2위는 유지할 수 있을 것 같고 리그 1, 2위한테만 주어지는 챔피언스리그 출전 티켓도 거머쥘 수 있을 것 같네요.
요즘 제가 하는 플레이를 보고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저도 지금은 외국에서 공 찬다고 생각하질 않거든요. 마치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뛰는 것처럼 마음이 편하고 자연스럽고 부담이 없어요. 아마도 지난 2월 유럽축구연맹(UEFA)컵 32강전에서 맞붙은 이탈리아 페루자와의 경기 때부터 이런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요.
이전에는 마치 남의 유니폼을 입고 뛰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는데 지금은 맞춤 유니폼을 입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뛰고 있으니까요. 올해 목표가 ‘무조건 많이 뛰자’였는데 다행히(?) 소속팀이나 대표팀 경기 일정이 빡빡해 소원 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참, 꾸준히 개인 교습을 받고 있는 영어와 네덜란드어 실력도 많이 늘었어요. 의사소통이 되고 있으니까. 네덜란드어를 처음 배울 때의 막막함을 떠올리면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따로 없는 거죠.
전 이곳에서 죽었다 깨어나도 네덜란드어는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오죽했으면 네덜란드 사람들이 말을 하는 걸 보고 들으면서 엄청 신기해하고 부러워했을까.
드디어 한국에서도 K-리그가 막을 올렸네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경기장을 찾는 축구팬들이 많아야 한다는 사실이죠. 팬들이 경기를 외면하면 축구는 살아남을 수가 없어요. 제가 여기 와서 가장 부러워했던 게 축구문화였어요.
에인트호벤 인구가 10만 명 정도라고 해요. 그런데 홈경기가 열릴 때는 3만5천 명의 관중이 꽉 들어차거든요. 라이벌팀인 아약스와 맞붙든 꼴찌팀과 경기를 하든 관중 수는 변함이 없어요.
경기 시작 전엔 음악에 맞춰 어깨동무도 하고 춤도 추는 등 난리법석을 떨다가도 플레이가 시작되면 경기에 집중해요.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와 관중이 일심동체가 되는 그런 기분, 그건 직접 느껴보지 않고는 모르실 겁니다. 전 에인트호벤에서 다른 건 부럽지 않은 데 딱 한 가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축구문화가 너무 부러워요. 한국에서 뛰는 용병들이 한국의 축구문화를 부러워하고 자랑할 수 있도록 한국에도 축구가 붐을 이뤘으면 좋겠네요.
4월12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52
혹시나 했는데 결국 쿠엘류 감독님이 물러나게 됐네요. 멀리서 한국 사정을 지켜보는 입장에선 그저 안타깝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어요. 1년 넘게 선수와 감독으로 인연을 맺으며 크고 작은 경기를 치러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감독님이 그만두신다니까 마음이 착잡해 집니다.
여러 가지 평가들이 있지만 좋은 감독님이 한국 대표팀을 맡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갖고 있는 장점을 다 배우지 못하고 이렇게 끝나는 게 참으로 허탈하네요.
제 기억으론 쿠엘류 감독님은 상당히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추구하셨던 것 같아요.
편안한 환경에서 선수의 능력이 극대화된다고 믿으셨어요. 하지만 대표팀 선수들마다 제각각의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감독님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이해하지 못했다고 봐요.
사실 전 아무리 멤버가 화려했다고 해도 유로2000에서 포르투갈 대표팀이 4강에 오른 건 감독님의 능력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유능한 감독과 그 감독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준 협회와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이 당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이번 쿠엘류 감독님의 중도하차는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남네요.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감독이 지는 거지만 다른 곳에선 문제가 없었는지 한번쯤 더 찬찬히 살펴보는 계기도 필요했다고 보거든요.
외국에서 생활하며 자주 느끼는 부분이지만 유럽과 한국은 축구 문화도 다르고 축구를 배우는 과정이나 그걸 실전에서 행하는 방법도 너무나 달라요. 스파르타식 지도에 익숙해져서인지 조금만 여유를 주고 재미있게 운동을 하면 선수들이 긴장을 안하는 경우도 있거든요.
만약 우리의 축구 문화가 유럽처럼 개방적이었다면 쿠엘류 감독님이 이렇게 선수들 얼굴도 보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앞으로 어떤 분이 그 자리를 이어가실지는 모르겠지만 떠나는 분에 대한 비난과 새로 오실 분에 대한 기대만 늘어놓기보단 남아 있는 사람들의 자기 반성과 성찰이 더 필요하다는 ‘주제 넘은’ 생각을 해봅니다.
4월19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53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2주 동안 일기를 쓰질 못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았을 거예요.
네덜란드 리그와 중국에서 치러진 올림픽 예선전을 뛰느라 경황이 없었어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해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번 주도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됐네요. 오늘(9일) 덴하흐와의 홈경기에서 제가 시즌 6호골을 터트렸거든요. 팀도 3-2로 승리했고요. 경기장에서 직접 응원을 하신 어머니는 오늘 제 플레이가 지금까지 네덜란드에서 뛴 경기 중 최고의 ‘작품’이었다고 말씀하시며 비행기를 띄우셨어요.
요즘 한국에선 대표팀 감독 선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선수들 입을 통해 ‘누구 누구 감독이 적임자’라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는데 제가 히딩크 감독 같은 스타일을 원한다고 말했다는 기사도 눈에 띄더라고요.
전 감독 이름을 거론한 적이 없어요.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입장이 아니거든요.
단,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감독이 오더라도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새 감독과 호흡을 맞춰가는 게 중요해요. 아무리 유명한 감독이 오면 뭐합니까. 각자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섞이질 않는다면 명장이든, 용장이든, 덕장이든 아무 소용이 없는 거잖아요.
쿠엘류 감독님이 임기 전에 한국을 떠난 가장 큰 이유는 대표팀의 분위기가 어수선했기 때문입니다. 월드컵 4강 진출 자체는 대단한 업적이지만 선수들이나 한국팀은 그렇게 대단한 팀은 아니었어요. 4강의 ‘후유증’이 길고 크다보니 선수들 자체가 정체성을 잃을 만큼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
졌죠.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감독님이 오셨고 새 감독님 밑에서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하려다보니 더 더욱 어수선해졌고 선수들마저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결국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어느 감독님이든 현 대표팀의 정리되지 않은 들뜬 분위기를 잡아주고 이끌어준다면 한국팀의 위기는 곧 기회로 되살아날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오는 16일이면 네덜란드 후기 리그의 마지막 경기가 벌어집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한마디로 ‘후딱’ 지나온 것 같아요. 다행히 에인트호벤이 정규리그 2위를 결정짓고 2004~2005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등 유종의 미를 거둬 모처럼 행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 일기를 통해 부상의 시름을 전하던 때가 엊그제 같기만 한데 말이죠.이젠 제 일기도 종착역을 향해 내달리고 있습니다. 다음호가 마지막이기 때문이죠.
마지막 일기를 전하는 소감은 다음호로 미룰게요.
여러분의 응원과 격려가 있기에 박지성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세요.
5월9일 에인트호벤에서
달려라, 천방지축!] 박지성의 네덜란드 일기 - 54
드디어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네덜란드 1부리그) 후기리그가 ‘쫑’을 쳤습니다.
오늘(16일) AZ팀과의 원정경기를 4-2로 이긴 후엔 에인트호벤으로 돌아와 새벽까지 한 나이트클럽에서 파티를 열고 시즌을 마친 만족감, 해방감 등을 만끽했어요.
오랜만에 동료들과 어울려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 보니 새벽 2시.
몸과 마음은 피곤에 지친 상태이지만 여러분과 일기로선 마지막 만나는 이 시간이 마냥 아쉽기만 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방을 둘러봅니다. 훈련이 없는 날 방에서 달리기를 하며 몸을 풀 만큼 제법 큰 평수의 방엔
제가 네덜란드에 와서 처음 장만한 카페트에다 장롱, 침대, 오디오 등이 자기 자리를 찾아 가지런히 놓여 있어요. 신혼살림을 장만할 때도 그런 기분이 들까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손으로 직접 가재도구를 구입하며 결혼해서 사랑하는 여자랑 같이 산다면 정말 기분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해봤거든요. 제가 보기엔 털털해 보여도 의외로 꼼꼼하고 세심한 면이 있다는 거 잘 모르시죠? 갑자기 웬 ‘방타령’이냐고요? 요즘 들어 이 방이 더 더욱 넓어 보이기만 하거든요. 한마디로 말해서 옆구리가 시린 거죠.
타의에 의해 이미 두 차례의 스캔들이 스포츠 1면을 장식한 주인공으로선 영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 여전히 ‘여자친구 급구’를 외치며 친구들에게 SOS를 치는데
‘관리 능력 부족’이란 이유로 대부분 소개시켜주기를 거부한답니다.
제가 있는 곳이 한국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여자친구를 소개받아도 자주 만나거나 연락을 수시로 하는 등의 기본적인 ‘연애 수칙’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할 거라는 판단 때문인 거죠.
지난번 <일요신문>의 ‘취중토크’를 보니까 (김)영광이가 여자친구를 자주 못 본다며 하소연했더라고요. 그래도 한국에 있으면 하루만 시간을 내면 가능하지만 전 하루 동안 비행기를 타야 하는 신세이니 언감생심일 따름입니다.
솔직히 저도 이런 상황에선 자신이 없어요.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고요. 남자는 스물다섯이 넘어야 여자 보는 안목이 생긴다고요. 지금 같아서는 그 나이 돼도 안목은커녕 여자를 만날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지난 1년 동안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동시다발적으로 느낀 시간들이었어요.
오늘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제야 (네덜란드 리그에) 적응이 됐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부상 등으로 힘겨웠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이젠 에인트호벤이 마치 대표팀처럼 편안하고 홈 관중들의 응원도 한국 팬들의 응원처럼 열렬하고 자연스러워 예전 슬럼프 때 축구공이 무서워서 경기장 나서기가 두려웠던 시간들이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축구선수가 축구공이 무섭다? 정말 그랬어요. 당시 ‘내가 만약 일본에서 계속 뛰었더라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번민과 갈등까지 생겨 꽤 속앓이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갖고 있는 실력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기다리다보면 반드시 기회는 올 것이라 믿고, 암울한 시기를 잘 극복한 덕분에 이렇게 웃으며 한 시즌을 마무리한 것 같아 제가 조금은 기특해 보이네요.
‘천방지축 일기’를 1년 넘게 진행하면서 <일요신문> 독자 여러분께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솔직히 경기가 잘 풀리지 않거나 부상으로 실망스런 모습을 보일 때는 여러분 뵙기가 힘들었어요.
그러나 이렇게 좋은 결과로 시즌을 마무리하고 일기도 마감하게 돼서 서운하면서도 행복합니다.
박지성이란 선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고 기다려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면서
다음엔 일기가 아닌 좋은 인터뷰로 다시 <일요신문> 가족들과 만날 것을 약속드립니다.
곧 한국에서 뵐게요.
5월17일 에인트호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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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느라 수고하셨어요 ^^ㅋㅋ
박지성 선수 참 기특하고.....존경스럽고 막 그르그든요^.^
출처 ttp://blog.naver.com/candyly?Redirect=Log&logNo=130005485691
첫댓글 정말 그러네요 / 더욱 존경하겠습니다 지성씨이~ / 그런데 확실하게 솔직해지세요 "별로 잘생긴 얼굴도 아니~" 고가 아니고오~ "잘생긴 얼굴도 아니~" 잖어유 ^ ^ / 하지만 당신은 미남자이십니다 / 마음이 더욱 / 지성씨 홧팅!!!!! .......... / 언제나 응원하겠습니다 /// 완소바나나킥님 고맙게 잘 봤습니다
휴~ 다읽엇어요^,^ 지성씨 최고최고 ~ ~
잘 읽었습니다. 감사요!
요고 늦게 발견해서 잘 읽고 갑니다 ~ 지성선수 언제나 파이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