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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백제 토론방 직산위례성설이 있어 소개합니다....
다비도프 추천 0 조회 696 11.04.13 16:42 댓글 2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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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1.04.13 17:12

    첫댓글 지지여부를 떠나 저자가 방송을 통해 알린 내용을 올립니다.....

  • 작성자 11.04.13 17:40

    풍납토성은 도요지였기에 많은 유물이 있던 것이고,
    아직 왕궁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주장자들조차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풍납토성에 왕궁이 있었다면 먼저 왕궁 유적이 확인되어져야 하고,
    서벽의 존재를 입증하여야 하며, 존재하였다면 왜 다른 토성벽들과 달리 없어진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또한, 풍납동은 퇴적지로써 많은 모래가 쌓이는 곳(그래서 도요지가 많았음)이었기에 주변의 흙(뻘흙이라 불리는 흙을 포함)을 올려 판축법으로 만든 것이지, 연인원 백만명을 동원하여 바다에서 뻘흙을 가져다 만든 토성(이 글귀가 이어지는 내용)은 아닙니다.....

  • 작성자 11.04.13 17:40

    풍납토성 학술용역 보고회에서 주장하시는 박사님이 오셨기에 공식적으로 발굴과 발표에 대해 제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말씀해달라 했는데 고개도 못드시더군요.....

  • 11.04.14 04:20

    얼굴을 들수 없었던 이유는 다른것 아닐까요? 제가 알기론 풍납동주민들의 재산권침해문제로 민심이 흉흉하니 비켜선것으로 보이는데, 마치 풍납토성발굴결과발표에 문제점을 시인한것처럼 하면 좀 그렇군요.
    풍납동주민들의 반발때문에 그런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작성자 11.04.14 16:08

    청사죽백님......그 보고회는 광화문에서 열린 관계로 풍납동주민들이 몇명밖에 없었고, 문화재청, 서울시청, 송파구청 직원분들과 주요 관계자의 모임이었습니다.....뿐만 아니라 풍납토성 국제학술대회를 날짜까지 다 잡아놓고 개최한다더니 발언 직 후 사회자는 날짜가 잡혔다, 문화재청은 안 잡혔다 말을 바꾸는 해프닝까지 있었고, 이젠 언제하는지 조차 모르게 되었더군요......그리고, 풍납동 일대에 도요지가 많았던 것은 이 카페회원님이라면 많이들 알고 계시는데,,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 11.04.15 01:47

    도요지가 풍납토성주변에 많이 있다고요...??????????
    다비도프님만 많아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 11.04.14 04:22

    풍납동이 도요지였다고요? 정말인가요? 풍납토성에서 도요지가 발견되었나요??? 처음 들어 봅니다.
    목탄을 사용하였던 직접 나무를 태웠던간에 많은 양의 나무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흙과 나무를 원할히 공급받을수 있는 곳에 위치하는 것이 상례인데 풍납토성내에 있다니 ??

    산성내에 적석총이 있다는 위 글의 주장..아주 재미있군요....
    집안등지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초기적석총(무기단식)의 입지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또 연천등지에서 확인되고, 충주댐수몰지구에서도 발굴조사된 적석총의 입지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산성 내부 즉 산속에 적석총이 발견되었다니... 이것이 사실이면 정말 대단한 발견일것입

  • 11.04.14 09:38

    한쪽에서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는데 위의 논문을 발표한 분은 초기기록을 인정하여 백제의 위례성을 비정하고자 한다.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님의 경우에는 3세기 후반까지 백제와 신라는 삼한 소국의 하나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고고학적으로 그 위치를 판별함이 불가능것으로
    삼국의 초기기록을 인정하고 싶다면 백제 건국초 온조의 위례성의 위치를 알고 싶다면 그 동쪽에 있는 낙랑의 위치는 어디인가 비정해 보아야 한다.

  • 작성자 11.04.14 16:55

    풍납토성에 왕궁이 있었다는 주장은 대체 어느 교수님이 주장하시는 학설입니까?? 신문으로 일치된 의견이니 뭐니 하는데, 정작 주장자들조차 나는 왕궁이 있었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기자가 그렇게 쓴 것뿐이다 라고 하고,, 신동아 기자님이 지면을 할애해 줄 테니 풍납토성엔 왕궁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글을 써보시라 하니, 도망가셔서 황당했습니다 하고....주장하는 학자가 없는 것 같은데, 학계의 일치된 의견이라 하는 것은 그 역시 언론플레이로 보이는 군요.....여러분들 중에 풍납토성에 왕궁이 있었다고 주장하시는 교수님있으시면 꼭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11.04.15 01:50

    석촌동기단식적석총의 피장자는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풍납토성이 전면 발굴되었을까요? 일부 극히 일부만 발굴된 상태에서 왕궁이 없지 않는가..라고 하는 것은 우문이라 판단합니다. 정히 그런 주장을 하려면 파보면 답이 나올것입니다. 그러면 풍납동 주민들은 모두 이사가야 할텐데 다비도프님이 책임질수 있나요? 그많은 보상금을 다비도프님의 생각엔 어찌 만들어낼수 있을까요?

  • 11.04.15 22:10

    제가 알기로는 풍납토성(제가 생각하기에는 토성이라기 보다는 제방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의 가장 중요한 위치, 그러니까 그들(발굴자)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한 토성 내의 가장 중앙부분인 경당부지를 발굴하면서 어떤 해프닝이 있었는지 알고 하시는 말씀인지요, 최초에 연못터(그들의 생각은 왕이 거닐던 인공 연못)라고 했다가 불과 2-3개월 후 목탑터로 바뀌어 언론플레이(이는 그들의 발표내용을 보면 익산 미륵사지터를 거의 유사하게 복사한 것 같은..)를 하면서 권오영 교수가 광분을 했다가 나중에는 우물터로 발표하는 불과 6개월 사이에 두번 번복하는 헤프닝을 벌인 곳입니다.

  • 11.04.15 22:03

    또한 미래마을부지는 현재 90%이상 발굴을 완료했으나 깨진 기와조각 및 돌맹이, 움집 등 원시시대 보통 물가 근처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던 생활터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이 대부분이며 이에 따라 현재 발굴에 따른 발표도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풍납토성 중앙이라고 하는 위치를 두군데 발굴했으나 왕궁터라고 확신할 만한 유물은 보이지 않는데 더이상 무슨 기대를 할 수 있는지요, 그들은 단지 발굴이라는 미명하에 국민의 세금을 탕진하고 있을뿐입니다.
    저는 풍납동에서 미래마을 및 경당부지 발굴을 10년 동안 지켜본 사람입니다.

  • 11.04.15 22:08

    청사죽백님 풍납토성 일부 발굴이라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발굴이 끝난 상황입니다. 그들의 발굴 행태를 보면 국민들의 피같은 세금으로 자기들의 철밥통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생각치않는 집단으로 밖에 보이지 않네요,

  • 11.04.16 10:43

    장군멍군님/ 엄연히 존재하는 한성백제의 유구와 유적 유물을 가지고 어거지식으로 아니올시다하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는 주장일뿐입니다. 아래 다비도프님의 답글에 제가 달아놓은 댓글중 세번째것이 장군멍군님에 대한 답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 11.04.27 00:58

    신동아가 아니고 월간중앙입니다. 제가 월간중앙에 풍납토성은 백제왕성이 아니다라고 쓴글에 대해 반박을 해 달라고 월간중앙 이항복기자가 신희건, 김태식기자, ,,,,,,에게 부탁을 했는데, 거절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 11.04.14 23:18

    참..어이없군요...도요지라서 유물이 많이 나왔다니? 깨진 사기조각이면 다 같은건가요? 도요지란 말도 처음들어보거니와 이글을 쓰신분들은 풍납토성 발굴보고서를 기본적으로 읽어나 보고 쓰신건지 의심스럽군요..직산이 위례라는 설은 기본적으로 증거가 없지않습니까? 뭐 나온 그럴듯한 유물이나 있는건지? 그리고 풍납토성일대를 아직 일부만 발굴할 수 박에 없는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왕궁터가 발견 안됏다는 이유를 들다니? 부여나 공주에서 조차 왕궁텨는 정설이 없는걸루 아는데?

  • 11.04.14 23:20

    풍납토성일대가 위례성이라는 사실은 거의 90%이상 인정되는 사실 아닌가요? 뭐 이건 위례성 왕궁터란 비석이나 푯말이 나와야 인정할 기세군요..ㅉㅉㅉ

  • 11.04.15 01:45

    한성백제 초기에 문자도 모르는 무식한 수준이라고 판단하는것도 문자가 존재하였다는 근거가 없기에 그러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위 님의 댓글을 적용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 작성자 11.04.15 15:06

    위 두분님....먼저 발굴보고서 말씀하셨는데, 주장자들 조차 아직 왕궁이라 볼 수는 없다 하였는데, 그 발굴보고서를 읽으신 분들은 왜 오버되는 건지 참 이상하군요.....그리고 90%이상이라 하셨는데, 풍납토성 <일대>라는 말로 두리뭉실하게 넓히지 마시고, 풍납토성에 왕궁이 있다고 주장하시는 교수님들 명단을 제발 꼭 좀 적어주십시요......어느 분이 남아 계시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 작성자 11.04.15 15:08

    국립문화재연구소조차 왕궁이 있다고 언론에 발표하고, 주민들에게 설명해오던 미래마을부지,, 발굴결과 그 곳엔 왕궁이 없다고 사실상 인정하였습니다.....더 글을 써주시면 문제점들을 더 거론해보지요......그리고 비약적인 말씀부터 하지 마시고, 저의 맨 위 두번째 댓글에 대한 반론부터 먼저 해주시기 바랍니다.....최우선적으로 그것부터 해결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 11.04.16 10:47

    다비도프님 연구소측에서 왕궁이 있다고 언론에 발표하였다고요?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성이라는 설명을 확대해석한것 같은데요... 여기서 갑론을박도 안되는 애기를 거듭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피곤한 일이 될것입니다.

    다비도프님//
    엄연히 존재하는 한성백제의 유구와 유물을 억지로 없다고 아무리 주장한들 존재하는 것을 엎을수 없답니다. 님의 답글에 제가 올린 댓글중 3번째의 댓글로 답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이런식으로 역사나 고고학등 학문을 가지고 논하기보다는 70년대 국유지시절에 개발에 앞서 발굴을 통해 토성을 확인하고도 토성내부가 유적임이 뻔한대도 그 토성내부땅을 일반인에게 불하 분양한 행정ㅊ

  • 11.04.16 10:49

    행정청의 행정행위에 대한 문제를 삼아 나가는 것이 풍납동주민들의 재산권침해문제를 풀어내는 지름길이 아닐까합니다...
    연구소의 학예관이나 연구자들에 대하여 압박하는것으로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을것이오니 좀더 현명한 지혜로운 방법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 작성자 11.04.18 00:59

    청사죽백님, 연구소측에서 왕궁이 있다고 언론에 발표하였다고요?라고 말씀하신 걸로 보니,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물론, 님께서도 현 발굴로는 왕궁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거네요.....논의가 이쯤되면 항상 행정청 탓을 하라 하지요.....문제는 행정청이 문제를 해결하려 해도, 잘못된 내용으로 언론플레이를 해가며, 문제해결에 초를 치시는 분들이 있어, 모든게 난항을 거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건 당연시해도 괜찮다는 것인지.....청사죽백님께서도 다른 학설에 대한 비판을 하시는데,, 학예관이나 연구관들을 압박한다 하시니 쑥스럽군요......

  • 11.04.27 00:53

    미래마을 지도위원회하던날 연구소 소재윤씨가 적심건물을 왕궁이라고 발표하길래 제가 적심건물이 나왔다는 것은 초석이 있었다는 뜻이지만, 왕궁이라고 말하는것은 비약이라고 했었죠. 그런데 현장을 조사해 보니 적심위에 실제로 초석이 놓인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내린 결론은 미래마을의 적심건물은 초석이 없이 적심위에 바로 기둥을 세운 좀은 이해하기 힘든 건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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