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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의 첫 서울은 직산지방이다
- 오 세 창 -
1. 문제의 제기
우리들이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 지켜야 하는 것은 그럴만한 분명한 근거가 없는 한 사료(史料)의 내용을 변경할 수는 없다. 그리고 역사는 사료에 따라 복원되는 것이므로 절대로 임의로 만들어질 수도 없고 추상적인 체계에 맞추어 사료의 내용이 변경될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료는 역사를 복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한다.(문헌사료나 유물 ․ 유적사료, 무형의 사료를 총괄) 더구나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유물(遺物) ․ 유적은 문헌에 따른 고증에서 간혹 일어나고 있는 혼란 또는 왜곡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사료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와 같이 유물이나 유적의 고증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문헌이 고증하여 역사를 바로 잡아주는 경우가 많다. 이와는 반대로 문헌상의 문제를 유물이나 유적의 사료가 입증하여 주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문헌과 사적이 뚜렷하게 일치하면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이런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제부터 전개하려는 직산위례성이다.
문헌에도 뚜렷하게 하남위례성이고 사적의 이름도 위례성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사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원로학자들에 의하여 일정한 곳이 비정되었다고 하여 그것이 절대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료에 의해서 다시 복원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최근 외국인이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는 사례가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말썽을 불러일으키는 일도 있지만 때로는 우리들 자신이 왜곡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바로잡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더욱 신중하게 연구되어야 한다.
더구나 고대사가 재조명되고 최근에는 고조선사(古朝鮮史)가 활발하게 연구되어 고대사 부분의 재편찬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이 마당에 본 위례성의 연구는 매우 뜻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전개하려는 위례성에 대한 조사는 문헌상에 나타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기록과 우리들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것들과 손으로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을 통해서 밝혀 볼까한다.
하나의 국가가 건국되면 그에 따라서 수도 즉 도읍지가 설치되는 것은 필수다. 선사시대(先史時代)에도 인류가 서식하면 그들이 모여 살았던 모듬살이 터가 있듯이 민족과 국가와 수도(首都)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삼국(三國) 중에서 가장 먼저 건국이 되었다는 신라는 건국에서 멸망까지 동일(同一)지역(地域)이 수도였으므로 초도니 천도를 논할 필요가 없으나 고구려와 백제는 그렇지가 않다. 고구려는 졸본지방(卒本地方)에 건국하고(BC 37) 그로부터 4년뒤인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축조한 사실이 밝혀져 있으며 그 지역이 혼강 유역의 환인지방이라고까지 밝혀졌고 이미 그 도성 승골성에 대하여는 많은 조사가 된 것으로 학계의 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그렇지 못하다. 백제의 첫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이 아직도 어디인지 밝혀지지 않아서 혹왈혹설하고 있다.
그 한 예를 들어보면 서울 강동구의 방이동에 있는 호석식 백제고분을 문화재관리국이 복원하고 그 입구에 관리사무소 측이 세운 안내판의 내용을 보면 “백제는 한강의 남쪽인 어디에선가 건국을 하고.... ”라는 글이 우선 백제의 첫 서울이 어딘지 확실치 않음을 밝혔고 아직은 그곳이 여기다라고 뚜렷하게 밝혀진 곳은 없다는 뜻이다.
경기도 광주(廣州)지방을 비정한 학자가 있는가 하면 서울의 올림픽공원을 중심으로 한 방이동 일대를 가리키는 학자 또는 충남의 직산지방을 가리키는 학자도 있다.
이제까지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또 잘못 알고 있는 백제의 첫 서울 하남위례성을 바르게 밝힐 필요를 느껴 현재의 직산면, 입장면, 성환읍, 목천면, 성거읍, 안성의 서운지방, 평택의 남쪽 지방과 그 주변의 여러 지역을 두루 살펴보고 실제 답사하여 보고 느낀 것을 향토의 여러분에게 밝혀 관심 있는 향토인이 더욱 많이 모여서 이에 대한 연구는 물론 여러 방향의 협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기를 바라며 본 연구의 문제를 제기하는 바다.
2. 연구의 현재
백제국의 시조 온조가 하남위례성에서 개국 건도한 것은 BC 1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보다 더 오래되었거나 같은 때의 기록이 없으므로 이에 대하여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역사서적인 삼국사기의 백재본기 중에서도 처음의 기록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으며 온조왕조의 연구에 따라 그의 행적은 물론 가계(家系)를 살피기 위하여는 고구려 본기 동명왕조도 고찰되어야 하며 넓게는 백제 초기의 건국 과정에서부터 한성도 종말인 개로왕까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였으며 좁게는 건국연도인 BC 18년에서 ‘한성’으로 천도한 BC 4년까지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기재된 지리적(地理的)인 사실 즉 지형지세에 대한 조사도 또 조사에 따른 유물 ․ 유적의 확인을 하기 위하여 현장답사와 고고학계의 석학과 문헌연구가들의 고증도 참고하였으며 오랫동안 이 고장에서 살아왔고 같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촌로들의 고담을 수집하고 동제나 산제를 찾아 그 형태를 관찰하였으며 지명이나 도로, 고개 등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있으며 현재도 진행 중에 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백제의 첫 서울 ‘하남위례성’에 대한 그 설이 분분하다. 위례성 초도설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 등에 실려 있으며 그 중에서도 직산설(稷山設)은 삼국유사나 동국여지승람, 문헌비고, 조선지지 등 몇 가지 책에 실려 있어 그것은 문헌연구의 자료로 하였으며 기타의 문헌도 참고하였으나 책명은 논술 후면에 게재키로 한다.
여러 문헌상에 나타나는 지명(地名)과 지세(地勢)를 살펴보기 위하여 경기의 광주(廣州)지방과 아산, 남양, 인천, 북한산, 풍납동, 석촌동, 암사동 등지를 주로 살폈다. 그리고 위례성의 핵심지역인 천안시의 입장면(笠場面), 성거읍, 성환읍, 북면 일대와 경기도의 안성, 평택 등 인접지역에 대한 조사도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위례산성이 있는 현지를 답사하고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는 지세와 비교도 하여 보았다. 위례성을 중심으로 산재되어 있는 여러 가지 유적과 유물에 대하여 사계(史界)의 석학을 초빙하여 고증을 받았으며 토의와 협의를 통하여 많은 참고가 되었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지형지세가 삼국사기의 기록과 동일하며 동국여지승람은 물론 삼국사기의 기록을 답습한 것이지만 문헌과 사실이 일치된다.
직산위례성은 백제건국 당시의 잠정적인 도읍이었음을 시사하는 사료(유물 ․ 유적)가 많이 남아 있다. 성채나 우물, 적석총의 무리, 성문석은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여 연구 자료로서 매우 훌륭하다. 앞으로 방대한 지표조사가 실시되면 많은 자료가 나타날 것을 기대하며 현재의 연구과정을 밝혔다.
3. 위례성 지역에 대한 조사
위례성은 현재의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의 동남부 지역과 천안군 북면 일대를 가리키며 현존하는 위례산 성지(城址)는 입장과 북면에 길게 걸쳐있다. 성채(城砦)나 토성의 앞면이 입장과 직산 방향으로 향하고 있고 답사하기에도 북면쪽보다는 입장방면에서 오르는 편이 편리하여 일반적으로 입장위례성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현재의 입장면 일대는 예부터 직산현(稷山縣)에 속해 있던 영지(領地)로 옛 문헌에는 모두 직산위례성으로 기재되어 있다.
직산은 동국여지승람에도 ‘온조’의 ‘백제건국지’로 기록이 되었고 ‘삼국유사’에도 ‘하남위례성’은 직산이라고 못박아 실었다. 옛 직산의 영역을 살펴보면 오늘날의 ‘성환읍’의 전 지역과 ‘성거읍’의 전 지역 그리고 ‘입장면’과 ‘직산면’일대다.
임진왜란의 직산전투에 소사전투(素沙戰鬪)의 기록이 남아 있다. 여기의 소사(素沙)라는 지명은 지금의 직산 관할을 넘어 선 경기도 평택의 일부다. 이것으로 보아 직산의 범위가 멀리는 안성천(安城川) 밖의 경기도의 일부까지로 볼 때 옛 직산현은 오늘날의 그 읍, 그 면과 경기도 지방의 일부까지를 포함하였다.
직산이라는 지방은 고려 초에 명명되었던 것이며 삼국이 힘겨루기를 하던 정립의 시기에는 사산성(蛇山城)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 : 413~491)이 당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공취하고 한강 이남을 차지하면서 사산이라고 하였다.
사산 또는 사천(蛇川)을 순수 우리말로 하면 ‘뱀산’, ‘뱀내’라고 부른다. 뱀산이란 천안군 성거읍 천흥리의 진산(鎭山)인 뱀산(현재 천안시 출신 전몰군경 위령탑이 세워졌음)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본다. 성거읍사무소에서 천흥리 부락을 향하는 도로의 오른편에 솟은 산으로 비록 낮으나 산의 근원은 성거산(570m)인지라 산 모습이 수려하고 오묘한 맛이 풍기는 산이다. 성거산의 한 갈래가 서북으로 뻗어 달리다가 뱀산 머리를 만들고 이곳에서 끝을 맺었다.
고려 초에 세워진 천흥사 대웅전의 뒷산이 된다. 뱀산 너머에는 대웅전이 불타 없어지고 5층석탑만이 남아 있다. 촌로(村老)들의 말을 빌리면 먼 옛날부터 뱀산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장수왕은 사산지방(직산)을 공취하고 더욱 남하하여 백제와의 경계를 오늘날의 연기군 북쪽에 두었음을 이곳의 지명으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직산을 사산이라 한 장수왕 이전에는 무엇이라고 불렀을까? ‘동국여지승람’의 ‘직산조’에 ‘본시(本是) 위례성’이라고 밝힌 것으로 보아 ‘사산성’ 이전에는 ‘위례성’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城)이라고 함은 돌이나 기타의 물질로 책(柵)을 쌓아 올려 외적으로부터 방어와 보호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성(城)은 도시(都市)를 가리키는 옛말이다. 시군읍면(市郡邑面)을 뜻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안성(安城), 개성(開城), 홍성(洪城)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위례성을 하나의 시읍으로 본다면 이는 ‘직산현’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현재 위례산의 정상 부분에 쌓여 있는 성은 바로 이 위례성이 가지고 있었던 산성(山城)으로 생각된다.
직산현의 진산(鎭山)은 성산(城山)이다. 오늘날의 구직산 지방과 ‘당고개’와 성산을 돌아 쌓여진 성을 사성(蛇城)이라고 하며 이것은 옛날 위례부락의 외곽을 둘러쌓았던 읍성(邑城)이다. 전쟁이나 내란으로 인하여 읍성이 위험에 닥치면 산성으로 그 주민(住民)을 옮겨 백성을 보호하고 방어의 수단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쟁의 방법이다.
그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임진왜란의 삼대첩지인 진주(晋州)는 하나의 읍성이 있고 진주산성(晋州山城)은 따로 있다. 더 구체적인 예는 한성(漢城)의 산성으로 이용되었던 것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이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다. 이런 논로 볼 때 현존하는 ‘위례산성’은 ‘위례성’에 속해있던 산성이며 축성연대도 위례성과 같거나 조금 늦은 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이것을 복원하여 보면 ‘위례성’은 오늘날의 구직산 천안군의 북부지방이고 그 곳을 둘러쌓았던 성이 읍성인 위례읍성이다. 장수왕이 공취하고 ‘사산성’이라고 고쳐 불렀다. 그 위례읍성의 주민을 보호하고 외적으로부터 방어의 목적으로 쌓았던 것이 위례산성이다. 그것이 오랫동안 위례성이 없어지고 산성만이 남아서 산성이란 낱말은 떨어져 없어지고 옛 읍성인 위례성이라 불리운다.
역사지리학자 우락기씨는 그 저서 ‘역사지리’의 한국역사 지리편에 위례성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1) ‘위례성’이 한수(漢水)남방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으나 그 위치는 명백하지 않다.
(2) 온조왕 13년의 기록에 한수 남쪽으로 천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위례성이 여기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3) 그의 위치를 설명할 수 있는 아무런 역사적 사료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또 그는 덧붙여서 말하기를 ‘직산위례성’설을 구설이라하고 경기도 ‘광주’지방설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작은 반론(反論)을 제기하면서 ‘직산위례성’설을 고집하여 본다.(물론 다음의 문헌연구편에 구체적으로 다시 밝힌다)
우락기(禹樂基)의 주장인 (1)은 위례성이 한수(漢水) 이남이라고 하면서 그곳이 어딘지 분명치 않다고 하였다. 그 분명치 않다는 말은 조사나 고증이 부족하였다는 말과 같으며 그것으로 매듭짓고 더 이상 조사 발굴을 해보겠다는 말은 없었다. 필자는 그가 분명치 않다고 말한 그곳이 직산 위례성이라고 본다.
‘위례’라는 말의 뜻은 즉 어원을 여러 가지로 풀이하고 있으나 풀이할 필요 없이 위례라는 지명 그대로 쓰이고 있는 곳이 직산지방이다. 한반도 내의 어느 곳에서도 위례라는 지명을 가진 곳은 이곳을 제외하고는 없는 것으로 본다. 산 이름이 위례산이고 성의 이름이 위례성이다. 욱리(郁李)의 변성이니 어라(於羅)의 변음이 위례 이전의 말이라고들 하나 삼국사기 편찬 이전에도 위례는 오늘날도 위례다. 울타리니 위리니 책(柵)이니 하는 말도 있으나 한자가 전래된 이후에 약간의 변음은 있었겠지만 아득한 옛날부터 위례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한자가 전래된 후에 위례인지 한자 전래 이전부터 위례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한자전래 이전의 위례가 그대로 한자로 표기만 한 것으로 본다.
(2) 온조왕 13년에 천도한 것으로 보아 위례성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온조왕 13년은 BC 5년으로 건국한지 13년만에 도읍을 옮기는 일이며 위례성을 경기도 광주로 비정하였는데 한산(漢山)으로 천도하였다면 광주도 한산인지라 광주에서 광주로 옮겼다는 말이다. 더구나 온조왕은 BC 5년의 천도를 그 전해인 BC 6년에 마한(馬韓)왕에게 백제의 강역을 통고하면서까지 같은 지역으로 옮겨갔을까 한다. 예를 들면 광주군 서부면 춘궁리 이성산선에서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까지 옮기는 일인데....
BC 6년 온조왕이 마한왕에게 통고한 내용을 삼국사기에서 옮겨보면
遺使馬韓(유사마한)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告遷都(고천도)도읍지를 옮길 것을 알리고
遂劃定疆域(수획정강역)강역을 정했는데
北至狽河(북지패하)북쪽은 패하(예성강)에 이르고
南限熊川(남한웅천)남쪽은 웅천(안성천)에 한정하고
西窮大海(서궁대해)서쪽은 대해에 접했으며
東極走壤(동극주양)동쪽은 주양(춘천)에 이르렀다.
위와 같이 넓은 국토를 소유하였으면서 천도의 사실을 마한왕에게 통고한 것은 직산으로부터 한산으로의 천도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위례성을 광주로 본다면 동일지역 내의궁성을 옮기는 작업인데 굳이 사신까지 파견하면서 경계를 확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더구나 구월(九月) 입성궐(入城闕)이라는 대목을 보면 구월에 이미 도성을 세운 것으로 보아 그로부터 천도까지 5개월의 긴 기간이 필요하였다면 이도 분명히 직산으로부터 한산으로의 천도라고 보아야겠다.
(3) 위례성의 위치를 구명할 아무런 역사적 자료가 없다고 말했다. 이는 아주 잘못된 지적이다. BC 18년부터 BC 5년까지 불과 13년 그것도 만주에서 직산까지의 남천과정을 몇 년 빼면 약 10년간의 도읍지에서 지표상의 자료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모르겠다. 직산을 둘러쌓은 토성이 사산성이다. 사산성의 명칭 이전에는 위례성이다. 또 위례산성의 성채가 사료다. 분명히 백제 초기의 석성이며 토성과 더불어 길게 뻗어 있는 둘레는 엄청나게 크고 길다. 적석총의 군락지며 사각으로 된 층단식 돌무덤 등이 소중한 자료이고 성문석이 사료이다. (자료에 대하여는 다음 유적 ․ 유물 편에 다시 논술하겠음)
4. 문헌에 나타난 위례성
(1) 위서(魏書)와 북사(北史)
우리나라 역사 속에 백제의 건국이 중국의 여러 문헌에 소개가 되어 있지만 그 중에도 지금부터 약 1300년 전의 ‘위서’와 ‘북사’에 기재된 내용을 살펴보면 ‘위서’에 기록된 백제전은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에 모두 옮겨 실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북사 백제전이 첫머리에 백제의 건국을 [始立國于 帶方故地(시립국우 대방고지)]라고 밝히고 있다. 즉 백제는 대방땅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뜻이다.
대방(帶方)이란 BC 108년 한(漢)의 무제(武帝)가 설치했던 진번군(眞番郡)이 있었던 지방으로 지금의 멸악산맥 북쪽 자비령 이북의 땅이다. 대방의 남한계선이 어디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일반적으로 황해도 남쪽까지로 끌어내려 한강(漢江) 이북까지를 말하고 있으므로 다산(茶山)도 백제의 첫 서울인 위례성을 한강 북쪽인 서울 정릉동에 비정한 사실이 있다.
이 시대는 중국 본토에서 밀려오는 한문화의 영향이 한반도에 전파되고 현존하는 기록은 없어도 이미 한문이 도입되어 여러 가지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믿어진다. 예를 들어보면 대방태수(帶方太守)의 명(銘)이 있는 묘비(墓碑)가 황해도 사리원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도 당시의 한자 사용의 척도를 어느 정도는 알 수있다.
대방은 BC 82년 이후 요동지방의 실력자였던 공손씨(公孫氏)가 동방의 여러 군현을 장악하고 있을 때 지금의 황주이남의 땅을 나누어 대방이라고 이름하였다. 이때는 한사군이 설치된 지 오랜 뒤이므로 주변의 여러 부족들이 저마다 결속되어 한의 세력에 저항하기로 하고 어느 경우는 한의 막강한 세력에 붕괴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이 중국의 세력이 한반도의 서북지방에 뿌리를 박고 있을 때 더구나 그들 세력이 강하게 미치는 지역이었던 대방의 땅에서 백제가 건국하였다. 그것도 동일지방의 부족이 아닌 북방 부족의 무리가... 과연 주변의 부족들은 그대로 보고만 있었을까?
백제가 건국된 해는 BC 18년이다. 이 무렵의 황해도 지방은 어떠했을까. 한사군(漢四郡)의 종주국인 전한(前漢)이 멸망한 것은 AD 4년이므로 백제가 대방고지에 건국한 것은 한나라의 멸망보다 22년 앞서는 일이다.
한동안 강성했던 한나라도 이제는 서서히 그 세력이 약해지고 있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주변의 토착세력이 강력하게 결속되어 저항을 할 때라고 보면 먼 북쪽의 졸본지역에서 이곳까지 남하하였던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일행은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며 임진강과 예성강을 건너 다시 남쪽으로 옮겨 온 것이다. 이때 한강의 남쪽에는 강력한 마한 세력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육로(陸路)보다도 바다를 통하여 강화해협을 빠져나와 서해안의 어딘가에 올라 ‘직산위례성’에 이른 것으로 본다. 그리고 몇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백제가 대방고지에 건국을 하고 그 해인 BC 18년에 곧바로 남쪽으로 떠난 것인지 아니면 황해도의 일각에서 수년을 머무르다가 옮겨온 것인지는 뒤의 역사의 복원(復元)편에서 밝히고자 한다.
(2) 삼국사기
‘서력기원 전 후라는 시기는 우리나라로서는 굉장한 태고(太古)이며 아직 무슨 석기시대에 있었던 것 같이 생각을 가지는 수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당치도 않은 것이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삼국의 건국연대에 관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할 이유는 하나도 없으며 당시의 일반적인 정세나 고고학(考古學)적 자료 특히 풍납동(風納洞)의 토성 발굴에서 나타난 백제초기의 문화 수준이나 토기상으로 보아 삼국의 건국은 BC 1C나 AD 1C경으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우리들은 삼국사기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임을 버리고 사료로서 다시 한번 과학적인 검토를 해야 한다’
이상의 글은 김원룡 박사의 ‘삼국시대 개시에 관한 일 고찰’의 일부다. 백제가 건국된 BC 18년을 아득하게 안개 속에 묻혀 있는 태고의 원시사회(原始社會)로 보고 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쓴 글이라고 본다. 앞에서도 짧게 밝혔지만 이때는 한자(漢字)가 이미 들어와 상류층에서는 이미 사용의 폭도 넓었을 것이며 언어와 문자의 활용이 활발하게 일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일행은 거주지(居住地)가 만주이다. 중국의 발달된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한반도에 들어오는 문화의 관문구실을 하는 곳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미 중국문화에 젖어 있었고 한자의 사용도 하였을 것으로 보아 태고의 신비(神秘)처럼 바라보아서도 안될 것으로 본다.
1145년에 편찬이 완료된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이를 주도하여 엮어 가면서 방대한 서적을 참고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견문을 들었으며 실제 답사도 하였으리라고 믿는다. 이와 같이 편찬된 삼국사기에 영향을 끼친 책자가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1145년 이전의 작품이다.
그것은 통일신라 때의 사서(史書)이거나 지지서(地志書)이다. 삼국사기 첫머리에 나타나고 있는 ‘위례성’은 이것으로 보아 고려 이전의 기록에 이미 적혀 있었다고 본다면 현존하는 책자가 없을 뿐이지 위례성에 대한 기록은 이미 3국이나 통일신라시대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현존하는 사서(史書)에 위례성을 논한 것은 삼국사기가 가장 먼저이다. 여기에 삼국사기 권제23 백제본기의 시조조(始祖條)를 실어서 백제의 건국과정과 위례성이 우리고장의 직산 지방이었음을 확인하여 본다.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惑云朱夢 (백제시조온조왕 기부추모 혹운주몽)]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는 추모이고 또 주몽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의 건국 설화가 모두 전설적이다. 그러나 백제의 건국시조는 그렇지 않으며 계통이 뚜렷하게 밝혀져 있다. 고구려나 신라의 건국설화는 란생설(卵生設)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백제의 건국설화는 그와는 다르다. 뚜렷하게 부계(父系)와 모계(母系)를 밝혔다. 이와 같이 온조와 비류의 아버지 계통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우리는 두 가지 내용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겨와서 살았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남쪽으로 옮겨온 그들은 고구려의 영토권 내에서 벗어나 그보다도 훨씬 남쪽에 건국한 사실이다.
이들이 북방계의 부족임을 증명할 만한 사실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서울 강동구 석촌동에 있는 층단식 적석총의 구조 형태가 압록강 부근의 즙안지방의 적석총 형태와 같다. 이들 고분은 모두 북방식 고분 형태로 남쪽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 고구려에서 벗어난 사실은 그들 일행이 건국을 위한 이동이 아니고 부왕인 주몽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태자로 책봉되지 못한 사실 때문에 일종의 망명행각이라고 본다. 망명의 행각중에 대방의 고지에 그들이 세운 백제도 낙랑과 마한 사이였을 것으로 보며 많은 북방의 이동 민족과 한사군에 항거하는 토착세력과 이들이 합세하여 강력한 해양국가를 건설하고 주변과 투쟁하면서 성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지역에 뿌리를 박고 있던 기성세력의 반발로 국경분쟁을 일으키고 드디어는 물길을 통하여 남하한다.
[遂與烏干馬黎等 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수여오간마려등 십신남행 백성종지자다)]
비류와 온조는 오간, 마려 등 십신과 더불어 남쪽으로 길을 떠났고 따르는 백성들도 많았다는 뜻이다.
일행과 함께 남하했던 열사람의 신하들은 온조를 포함한 십제공신(十濟功臣)을 말한다.
열사람의 신(臣)을 정확하게 밝히면 온조(溫祚), 오간(烏干), 마려(馬黎), 을음(乙音), 전섭(全聶), 조성(趙成), 해루(解婁), 흘우(屹于), 곽충(郭忠), 한세기(漢世奇) 등이다. 이중 왕족인 비류, 온조는 부여씨(扶餘氏)로 오늘날의 서씨(徐氏)의 시조가 되었고 나머지 아홉분의 성씨 중에 다섯분의 성씨는 현재에 전해지고 나머지 네분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중도에 변성이 된 것으로 본다.
현전하고 있는 다섯 성씨 중에 전섭(全聶)과 조성(趙成)도 온조와 함께 남하했다가 이곳 직산지방에서 백제건국에 큰 공적을 남기고 인근 지방에 낙향하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제 개국공신 조성은 경양군(慶陽君)에 피봉되었고 전섭은 환성군(歡城君)에 피봉된 것을 보면 경양과 환성은 모두 직산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지방명이다. (경양은 경양포로 오늘날의 아산만의 일각이고 환성은 천안의 옛 지명이기도 하며 천안시에서 서남향에 있는 풍세면 일대를 이른 말이다.)
온조를 보필하고 백제건국에 큰 공을 세운 조성은 명문가인 직산조씨 시조로 백제대장군이며 개국공신의 수공신(首功臣)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직산지방에 머물러 살았으며 그의 묘소는 직산의 성산 사동(蛇洞)에 있다고 한다. 1985년 직산조씨의 문중에서 신도비(神道碑)를 시조가 정착했다는 직산면 군동리에 세운 바 있다.
앞에서 밝힌 직산지방이 위례성이었다는 사실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한편 천안 전씨(全氏)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는 전섭(全聶)은 관계에서 물러나 지금의 천안군 풍세면에 우거하며 살았다고 하며 그의 후손들이 지방에 군거하고 있으며 세계(世系)를 62세(世)로 백제건국과 연대를 거의 같이 하면서 시조의 신도비를 이곳에 세워 그의 온조왕 보필의 공적과 백제건국의 공훈을 높이 찬양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씨와 전씨 양가의 시조가 이곳에 머물러 누대를 살아왔으며 봉군의 작위를 받은 사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과 위례성의 관계를 더욱 확실하게 하고 있으며 ‘위례성’이 백제의 첫 서울임을 의심할 바 없게 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 직산 조씨의 시조 경양군 조성과 천안 전씨의 시조 환성군 전섭의 봉군에 관해서 알아본다. 봉군(封君)이란 국가가 공신이나 훈신에게 내리는 작위의 하나로 대개 봉군을 받는 사람이 사는 지방명을 붙이거나 아니면 특수한 업적에 따라 짓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 두 분의 봉군은 지명을 따라 내려진 것으로 오늘날의 경양포와 천안지방이다. 십신이 온조와 더불어 백제건군의 작업을 할 때에는 BC와 AD가 교체되는 아득한 시기이다. 약 2000여년 전에 과연 봉군이라는 제도가 있었을까 하면서 걱정하는 이가 없지 않다. 허나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김원룡 박사의 말을 다시 빌려 추려보면 “삼국의 초기를 신비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비류와 온조가 많은 부족을 이끌고 남하하기 이전의 생활 근거지는 분명히 중국의 영향을 받던 지역이다. 즉 만주의 졸본강 유역을 가르킨다. 그것도 중국문화가 펼쳐진 곳이다. 중국의 만리장성 안에서는 고도의 문화가 발달하였고 그 주변에도 그것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때다. 전한(前漢)이 건국되어 한참 전성을 누리다가 이제 멸망의 사양길을 걷는 때인지라 공(公)과 공(公)이 숱하게 많이 봉해졌음을 사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지역에 살던 그들이 봉군한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 그들이 건국하기 수백년 전부터 중국의 영지 안에서는 봉군 행각이 있었음을 덧붙여 둔다.
또 한편으로는 봉군의 작위는 후손들이 국가에 주청해서 얻어지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 역사에 나타나는 봉군행각은 고려시대에 와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천안(天安) 전씨(全氏) 전섭(全聶)의 후손이나 직산(稷山) 조씨(趙氏)의 후손들이 려조(麗朝)에 와서 국가에 주청해서 얻어진 것으로 보는 이도 있음을 아울러 밝혀 둔다.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수지한산 등부아악 망가거지지)]
그들(비류와 온조 일행)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山)에 올라 가히 살 수 있는 땅을 바라보았다는 뜻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조(溫祚王條) 앞의 글에서 이미 대방고지 입국우(帶方故地 立國于)가 밝힌 바와 같이 이미 건국하였다는 백제인지라 남쪽으로 내려와서 두 번째의 도읍지를 구하는 일이 되었지만 첫 번째의 도읍지는 황해도(黃海道)지방의 어느 곳에서 남하(南下)하여 오는 과정에 건국을 표방한 것으로 보아 일정한 지역을 도읍지(都邑地)로 정하고 머물렀거나 정부를 구성할 만한 힘이 있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새로운 도읍지인 위례성은 삼국사기의 위에 적힌 구절(句節)로부터 시작된다.
한산(漢山 : 오늘날의 서울, 경기 지역)땅에 다다른 비류와 온조일행은 안성천변(安城川邊)을 타고 부아산(負兒山)에 올라서 도읍지로 적합한 땅을 찾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부아악(負兒嶽)을 조선시대의 초기 석학(碩學) 서거정(徐居正)이나 경서에 밝았던 조선후기의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또 경기도 광주지방을 백제의 첫 서울이라고 주장하는 여러분 모두가 하남(河南 : 한강남쪽)에서 부아산(負兒山)을 찾은 것이 아니고 한강의 북쪽 하북의 북한산(北漢山)에서 찾았다. 즉 삼각산(三角山)의 인수봉(仁壽峰)을 삼국사기의 기록인 부아산(負兒山)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같은 사실을 모든 문헌이 그렇게 실었다.
“부아산(負兒山)은 인수봉(仁壽峰)의 옛 이름이라고” 또 한산(漢山)에는 부아산(負兒山)이라는 산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위의 말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부아산에 대한 결론부터 말하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용인군에 부아산이 존재한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부아산은 용인군의 기흥읍(器興邑) 지곡리(芝谷里)와 남리와 서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역사는 사료에 의하여 복원되는 것이므로 절대로 마음대로 만들어질 수도 없고 또 사료의 내용이 변경될 수도 없는 것이다. 또 새롭게 개척되어 가고 발굴되어 잘못된 옛것을 바로 이끌어 가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도리이다. 부아악(負兒嶽)을 인수봉(仁壽峰)에 비해서야 되겠는가. 서거정(徐居正)도 정약용(丁若鏞)도 잘못된 학설을 말했다.
간단한 반론으로 만약 삼각산(三角山)의 인수봉(仁壽峰)이 부아악(負兒嶽)이라면 한강이 인수봉의 북쪽에 있어야 된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삼국사기에 남한은 한강의 남쪽을 가리키는 말이고 또 [북대한수(北帶漢水 : 북쪽으로 한강이 띠를 둘렀다는 뜻)]가 남대한수(南帶漢水)로 고쳐써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한산(漢山)의 중심지는 경기도 광주다. 삼국사기지지에 보면 “한산군 금광주 영현이금이천현 금용구현 (漢山郡 今廣州 領懸二今利川縣 今龍駒縣 : 한사군은 오늘날의 광주다. 광주에는 두 고을의 속현이 있는데 하나는 ‘이천현’이고 또 하나는 ‘용구현’이다. 이 구절로 보아 용인이 한산땅에 있는 부아산(負兒山)이 틀림없다.
만주지방의 고구려 땅을 남쪽으로의 길을 떠났던 비류와 온조는 건국공신인 구신과 더불어 대방고지를 떠나 해로(海路)를 통하여 미추홀(아산군 인주면 밀두리)에 도착하여 경기도와 충청남도의 경계가 되는 안성천(安城川)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서 이곳 부아산에 올라와서 사방을 두루 살펴보고 도읍으로 정할 곳을 찾은 것이다. 그들이 찾은 곳이 바로 위례성(직산지방)이다.
삼각산의 인수봉이 부아악이라고 주장하였던 서거정은 약 600년 전의 사람이라 한산땅에 부악악이 있었던 것을 몰랐다.
하지만 오늘날의 석학이며 사학계(史學界)의 원로(元老)들이 아직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974년 ‘학술원지’에 발표한 ‘위례성고(慰禮城考)’에 한산땅에서 그런 산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고 잘라 말한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역사지리학자인 우락기는 ‘역사지리’의 ‘백제위례성고’에서 위례성의 위치에 대하여 부아악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그러면서 위례성은 경기도 광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만 하였다.
사학계의 원로나 석학들이 용인에 부아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광주 위례성설을 주장하지 않았으리라고 보며 이제 부아산을 찾아 나서 본다.
용인군의 부아산 위치를 정확하게 말하면 용인민속촌을 들어서는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지곡천(芝谷川)이라는 작은 내가 흐른다. 지곡천은 민속촌의 중앙부를 흘러내리는 산간 계곡의 물로 신갈쪽으로 서남간에 이른다. 이 내를 건너는 지곡교를 넘어 지곡리를 향하하여 약 6km가량 남쪽으로 버스길을 따라 가면 지곡리의 상동부락인 ‘사기막골’에 이른다. 부락의 동쪽 끝에 서서 앞을 바라보면 약 1km쯤에 높이 솟아 있는 아기 업은 모습의 부아산이 보인다. 아기 업은 모습 그대로 부아산이다. 산의 정상에는 20~3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앉을 수 있는 펑퍼짐한 곳이 있고 오르는 경사는 비교적 완만하다. 지도상으로 보면 동경(東經) 120° 10′ 북위(北緯) 37° 14′의 지점이다. 동쪽으로는 용인읍 남리이고 서쪽으로는 기흥읍 서리이다. 이곳 부아산에서 안성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거리다.
안성읍의 서운(瑞雲)과 공도(孔道) 지방까지를 위례성의 범위 속에 속했다고 보면 십신(十臣)이 올라 도읍지를 찾았다는 부아악은 분명히 이곳이다. 또 부아산이라는 엄연한 명칭이 붙어있는 산이 있는데 여기서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을 찾지 않고 하북(河北)땅의 북한산의 제1봉인 인수봉을 터무니 없이 부아산에 비정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필자는 이곳 부아산을 올라서 멀리 남쪽을 바라보고 눈 끝에 펼쳐지는 경기평야의 넓은 들을 바라보면서 삼국사기의 기록이 옳았다고 몇 번이고 되새겨 보았다.
경기도 안성과 이웃하고 있는 용인 이동면(二東面 : 부아산의 남쪽 기슭)에서는 수년 전에 많은 백제 초기의 토기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을 촌로들의 입을 빌어 들었다. 또 부아산 서쪽 지곡리쪽에서 오르다가 옛 도요지를 발견하고 ‘사기막꼴’이라는 동이 이름을 새삼스럽게 하였다.
북한산의 인수봉을 부아산이라고 처음 밝힌 사람은 서거정이다. 그는 한강에서 이백리나 떨어져 있는 ‘직산위례성’이 백제의 첫 서울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두에 직산위례성이 백제의 첫 도읍지라고 수정하였음.) 그 설을 그대로 이어 받았던 정약용은 ‘인수봉’ 근처인 서울의 북동쪽(정릉일대)을 위례성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최근에는 많은 학자들이 서울의 세검동이나 면목동 등지를 가리키고 있다. 모두가 타당치 않은 주장이다. 이제 부아산의 위치와 지명을 확실히 밝힘으로써 삼국사기의 기록인 한산부아악(漢山負兒嶽)이 용인의 부아산임을 증명하였고 아울러서 비류와 온조 일행이 십신과 더불어 바라고보 도읍지로 정했다는 위례성은 틀림없는 ‘직산위례성(입장)’인 것을 다시 한 번 못박아둔다.
① 북대한수(北帶漢水)② 동거고악(東據高嶽)
③ 남망옥택(南望沃澤)④ 서조대해(西阻大海)
북쪽으로는 한강이 띠를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자리하고 남쪽으로 기름진 들이 펼쳐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 나타나는 직산위례성에 대한 지형을 방향별로 기록한 것이다. 온조왕을 보필하던 십신이 위와 같은 말을 한 곳은 부아산의 정상에서이다. 도읍지로 지목된 직산위례성(입장)으로 그들은 자리 옮겨 도읍지를 만들면서 위와 같은 지형지세를 논한 것이다.
①의 북대한수는 지리적으로 타당한 말이다. 동으로는 험산준령(險山峻嶺)이 연속하여 높은 봉우리를 만들어 솟아 있는 “남으로는 평택평야와 안성평야로 이루어지는 경기평야가 펼쳐지고 서쪽으로 남양만엣 아산만에 이르는 큰 바다에 박혀있다.” 이와 같은 글이 쓰여져 있는 삼국사기가 편찬된 것은 1145년의 일이다.
그러므로 백제본기가 완성된 것은 그보다 2~3년쯤 앞당겨 볼만하다. 또 편찬자인 김부식이 자기 스스로 ①②③④의 글을 쓴 것인지 아니면 참고했던 많은 고서(古書)에서 얻은 글을 옮겨 쓴 것인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묘청의 난이 평정된 10년이나 뒤의 일인지라 김부식은 재상의 지위에 올라 있었으므로 밖의 출입을 함부로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아 눈이나 손으로만 쓴 글이지 결코 발로 쓴 글은 아니다.
[북대한수(北帶漢水)]
십신(十臣)이 온조에게 위례성의 지형지세를 설명하고 도읍지로 알맞은 곳이라 주장한 말 중의 첫 번째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 하고 개국을 하였다가 후에 백제로 국호를 고쳐 불렀다.
삼국사기의 기록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윗글 북대한수다. 물론 광주를 백제의 첫 서울이라고 비정하고 있는 설에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지만 직산위례성을 초도(初都)로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말이다. 이때까지 일반적으로 사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은 앞서 밝힌 부아악을 북한산으로 볼 때 북한산에서 직산까지는 2백여리나 되는데 어떻게 그곳이 도읍지로 알맞은 곳이라고 하였는가?
다시 말해서 바라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곳을 어떻게 망하거지지(望河居之地)라고 하였는가, 그러므로 북한산에서 바라보아 살기 좋은 곳이라고 보았다면 경기도 광주라는 주장이다. 경기도 광주가 북대한수로 알맞은 곳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주장하는 사람들이 광주를 위례성으로 비정하고 있는 학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통설이다.
6백년 전에 직산에 와서 제원루(濟源樓 : 옛날 지금의 직산초등학교 자리에 세워졌던 누각)의 루기(樓記)를 썼던 서거정은 처음에는 직산위례성을 부인하다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할 때에 많은 서적을 읽고 참고해 보니 역시 직산이 온조왕이 세운 백제의 첫 서울임에 의심할 바 없다고 처음의 고증을 뒤엎고 새롭게 직산 위례성설에 생각을 함께 하였다. ‘서거정’의 처음 주장을 살펴보면 부아산을 북한산으로 확정지어 놓고 볼 때 의심이 가는 점이 많아서 그렇게 고증한 것이요 뒤에 방대한 서적을 두루 살펴보고 광주위례성설을 부정한 것은 문헌에서 고증을 얻었기 때문으로 본다. 다시 말해서 앞의 것은 지형학적 고증이요, 뒤의 것은 문헌에서 얻은 고증이라고 하겠다.
사료는 역사를 복원하는 귀중한 것이다. 더구나 문헌에서 얻은 사료는 귀중한 것이어서 거의가 믿을 만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두계 이병도 박사는 그이 논문 ‘위례고(慰禮考)’에서 서거정의 주장을 이렇게 평하였다. 서거정은 “정당하게 의심을 일으켰다가 마침내 전래의 구설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서거정같은 대석학이 전래되는 전설에 혹(惑)하여 자기의 고증을 반복할 까닭은 없다. 그가 두루 읽고 참고하였던 방대한 서적이 무엇무엇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전하지 않는 책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제 총독부는 우리나라의 역사서적만 20만권을 불태워 없앴다.)
이와 같이 서거정은 직산이 백제의 수도였음에 의심이 없다고 하였으나 조선 말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은 서거정의 직산위례성설을 논박하면서 서울의 동쪽 오늘날의 정릉지방을 위례성리고 주장하였으나 이것 또한 두계선생에 의해서 잘못 비정되었음이 밝혀졌고 또 밝혀진 그 학설도 요즘에 많은 공박을 받고 있다.
비류와 온조를 따라 남쪽으로 옮겨 왔던 9공신이 간한 ‘북대한수’는 부아산을 기점으로 하여야 옳다고 보낟. 직산위례성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온조에게 주청한 말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용인에서 한강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또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위례성을 기점으로 보았을 때) 천안시 입장에서 안성을 거쳐 이천까지는 생각보다도 가까운 곳이다. 이천을 옆으로 끼고 도는 강이 바로 한강이다. 북한산에서 광주를 바라보고 북대한수라고 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광주(廣州)를 첫 서울로 주장하는 광주군 신장읍 지방을 잠시 살펴본다.
이곳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많이 합일되는 지방이다. 특히 북대한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이다. 이성산성(二聖山城)이 뚜렷하고 그 밑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궁궐터는 분명히 백제왕궁의 옛터로 확인되었다.
궁지(宮趾)로는 너무 협소한 듯 하지만 금단산을 진산으로 춘궁리 앞에 펼쳐지는 작은 들(광주군 신장읍)은 한 나라의 수부(首府)로는 알맞은 곳이다. 눈앞에 흘러가는 한강이 수로교통을 돕고 동쪽으로 높이 솟은 준령들이 자연의 방패로 인간 활동에 매우 알맞은 곳이다.
더구나 남한 산성쪽에서 흘러 내려온 크고 작은 내는 농사에 알맞고 지금도 논과 밭에서는 많은 기와 조각이 출토되어 농사에 불편을 줄 정도라는 말로 보아 백제의 서울이었던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수부(首府)를 지키기 위하여 이웃에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을 쌓은 것을 보아도 백제의 수도였음에는 이론이 없다.
그러나 이곳이 위례부락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위례라는 말은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백제가 처음 수도로 정했다는 위례성은 아니다.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BC 5년에 서울을 옮겨 갔다는 한산(漢山)이다. 옮긴 뒤에도 옛 서울(직산 위례성)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위례라는 말은 맞지 않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경기도 광주군의 백제 도읍지는 직산위례성에서 옮겨진 두 번째의 도읍지로 개로왕 때까지의 수도라고 보아야 옳다.
[동거고악(洞據高嶽)]
삼국사기 백제본기 중에서 위례성의 지형지세를 설명한 것중에 두 번째 일컫는 말이다. 위에 밝혔던 경기 광주지방이나 충남 직산이 모두 이글에 꼭 알맞은 지형들이다. 우리나라의 지형지세가 일반적으로 동고서저(東高西低)의 현상이라 어디서나 나타나는 형세이지만 직산위례산 인근 지방은 윗글 동거고악에 맞추어 만들어 놓은 지형과 같다.
한반도의 척추산맥인 태백산맥에서 한가닥의 지맥이 갈려 영서지방을 이루고 그 줄기가 뻗혀서 꾸불꾸불 감돌다 충주의 탄금대를 만들고 서쪽으로 더욱 뻗어 안성 지방에 이른다. 뭉쳐진 산의 기세가 주먹같이 솟아올라 청룡산을 이루고 다시 남쪽으로 달리다 위례산을 만든다. 앞으로는 망망대해 아산만과 경기평야를 굽어보며 뒤로는 내륙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를 그리면서 그 남쪽에 다시 불끈 솟은 성거산을 빚었다.
그리고 그 남쪽에 목천(木川)의 진산인 흑성산이 독립기념관을 품고 있다. 이와 같이 태산준령이 이어진 위례산의 서쪽 기슭에 도시를 세우고 백성들은 생업에 종사했다. 위례산의 서쪽에 펼쳐지는 광활한 평야는 가히 한나라의 도읍이 들어설 만한 당이다. 여기가 바로 위례성이다.
온조가 세웠다는 하남 위례성이다. 이 위례성에 살던 백성들에 의해서 쌓아진 것이 ‘위례산성’이다. 평지에서 생활하던 백성들이 갑작스러운 적의 침입을 받으면 산성으로 들어가 항진하였던 곳이다. 직산지방(위례성)은 그럴 수밖에 없는 지형임을 설명한다. 이곳은 동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평야다. 남서북의 어느 쪽에서 적군이 침입하여도 피할 곳은 오직 동쪽뿐이다. 북쪽은 경기도 오산에서부터 직산까지는 산을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낮은 야산은 있으나 이렇게 낮은 구릉에 전쟁을 수행하는 성을 쌓을 수는 없기 때문에 먼 동쪽의 위례산을 택한 것이라고 보아야겠다. 서쪽으로도 마찬가지다. 아산만까지 이어지는 평야에는 위례성민에게는 바다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낮은 언덕과 같은 산지는 있어도 성민이 웅거할 만한 성지는 없기 때문이다.
백제는 300m 이상의 고지대에 성을 쌓는 일은 없다.
다시 말해서 “300m 이상의 산지에는 백제성이 있지 않다.”고 어느 학자가 주장한 사실이 있다. 경사가 급하게 올라선 산이라 산의 중턱에 성을 쌓고 적군과 싸울 수는 없다. 식량과 전쟁물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산의 정상에 쌓을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또 전쟁에 패전하여 백성들이 도망을 친다하더라도 산너머의 도로를 이용하였다고 보면 위례성이 산의 정상부분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동거고악이라는 위례성 지방의 지세 설명은 아주 정확하게 타당한 구절이라고 본다.
[남망옥택(南望沃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위례성을 지형으로 설명한 세 번째의 글이다.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이 펼쳐졌다는 뜻이다. 직산을 지나 남쪽으로는 경기평야의 남단이다. 잠시 윗글과 경기도 광주의 이성산성 지방의 춘궁리와 비교를 해보자. 춘궁리의 남쪽은 남한산성이다.(경기 광주를 백제의 첫 서울이라고 주장하는 대목 중 가장 맞지 않는 글이다.) 신장의 남쪽은 험한 산지다. 더 남쪽으로는 용인 지방으로 연결되어 산지가 연속된다.
즉 광주산맥의 중심부분이다. 그런 것을 어떻게 남망옥택이라고 하겠는가. 옥(沃)은 기름진 옥토, 즉 넓은 평야지대를 말함이요, 택(澤)은 소택(沼澤)을 말함이니 풍부한 물을 가르킨 말이다. 그러나 광주의 어느 곳에서 보아도 남쪽으로 펼쳐지는 들은 없다. 굳이 옥택(沃澤)을 찾는다면 지금의 성남시와 잠실쪽을 가리키는 이는 서망(西望)이나 북망(北望)이지 남망(南望)일 수는 없다.
광주산맥이 연속되는 낮은 구릉사이로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작은 들은 볼 수 있어도 넓은 들은 볼 수 없다. 그러나 부아산의 남쪽이나 직산의 남쪽에 펼쳐지는 들은 참으로 넓다. 여주와 이천을 빠져나온 들이 다시 내려가 아산 땅으로 이어지는 광활한 평야는 가히 일국의 도읍지로 이보다 더 적합할 수는 없다. 택(澤)은 못으로 물을 뜻함이니 오늘날의 평택지방이다. 동쪽의 태산준령으로부터 흘러내린 물이 한데 모여 큰 못을 이루어 농사짓기에 알맞음을 나타낸 말로 직산위례성설을 더욱 굳게 하여 주고 있다.
[서조대해(西阻大海)]
삼국사기의 위례성의 지세를 설명한 것 중에서 마지막의 구절이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우리나라의 지형은 어디서 보아도 서조대해다. 서쪽으로는 넓은 바다에 막혔다는 뜻이다. 이 구절을 직산지방이나 광주 춘궁리지방 모두 공통된 지형이다. 그러나 광주지방보다 직산지방이 더욱 실감이 나는 것은 위례산의 산성에 서서 서쪽을 보면 멀리 서해(아산만)가 한눈에 든다. 성환 북쪽을 지나는 안성천이 평택들을 지나 아산만으로 연결되는 것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바라다 본 그대로 서조대해다. 광주의 남한산성이나 이성산성에서 서해까지는 백여리를 가야 하는 것으로 본다면 직산위례성쪽에 삼국사기의 글에 훨씬 접근하고 있다.
지금까지 삼국사기 백제본기 서문(序文)에 나타난 위례성의 위치를 찾기 위하여 지형 및 지세와 지명에 대하여 부설(附設)하였다.
다음은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위례성에 대한 모든 기록을 찾아보면서 ‘직산위례성’이 백제의 첫 도읍지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 BC 17년(온조왕2 조에)
말갈연아북경 모인용이다허 의선병적곡위단수지계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許 宜繕兵積穀爲担守之計
말갈은 우리의 북쪽경계에 연하여 있으며 그 사람들이 용맹하고 꾀가 많으니 마땅히 군사를 정비하고 양곡을 저장하여 이들을 막는 계책을 세워야 하겠다.
말갈족에 대한 경계는 건국 초기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북쪽에 말갈이 국경을 접하고 있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BC 17년경 백제의 북쪽(오늘날의 황해도와 경기도의 남쪽)은 말갈족의 거주 지역은 아니다. 아직도 한(漢)의 세력이 영향을 받던 지역으로 건국한지 1년이 지나지 않는 백제가 그 지역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으며 동북쪽의 강원도 지방으로 오늘날의 영서지방과 영동지방이 말갈의 거주지역으로 본다. 그들이 직산지방에 침입할 수 있었던 길은 대략 두 가지로 하나는 직산의 북쪽인 원주쪽에서 안성지방으로 오는 길과 또 하나는 원주지방으로부터 오늘날의 충북의 영서지방을 거쳐 진천, 죽산 지방으로 오는 길이다. 이와 같은 길로 삼천여의 말갈족이 직산에 침입하여 온 기록으로 타당하다. 만약에 말갈의 위치를 삼국사기 그대로 북쪽으로 본다면 예성강 이남까지 영향을 끼쳤던 낙랑과 대방의 세력은 무엇인가? 위 기록에 나타나는 위례성은 분명 직산이다. 온조왕이 건국하고 아직은 천도를 하기 이전의 사건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 BC 11년(온조왕8 조에)
말갈적삼천래위위례성 왕폐성문불출 경순 적량진이귀 왕간예졸 추급대부현일전극지
靺鞨賊三千來圍慰禮城 王閉城門不出 經旬 賊糧盡而歸 王簡銳卒 追及大釜峴一戰克之
살노오백여인
殺盧五白余人
말갈족 삼천여명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포위하므로 왕은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니 10일이 경과하자 적은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왕은 정병을 뽑아 거느리고 대부현까지 추격하여 이기고 오백여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위의 기록은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으로 나타나는 위례성에 대한 기록이다. 또 3천여의 말갈족이 침입한 곳은 광주지방이 아니고 직산 위례성이다.
□ BC 6년 (온조왕13 조에)
왕도노구위남 오호입성 왕모훙 년육십일세
王都老嘔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위례성에 늙은 암여우가 남자로 변시하였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도성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 소서노(召西奴)가 61세로 돌아갔다.
백제의 도성인 직산위례성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아마도 외침인 전쟁이나 아니면 내란이 아닌가 한다. 이 같은 사건으로 왕은 서울을 한산(광주지방)으로 옮기고자 그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을 한산으로 이사시킨 사실이다.
□ BC 6년 (온조왕13 조에)
추칠월 한산하립책 이위례성민호
秋七月 漢山下立柵 移慰禮城民戶
칠월에 한산 아래에 나무로 울타리를 세우고 위례성 사람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5개월 전에 직산위례성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서울을 한산으로 옮긴 사실이다. 윗글에서 광주지방을 위례성으로 보았다면 위례성에서 위례성으로 옮기는 사실인데 굳이 한산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 BC 2년 (온조왕17 조에)
낙랑래침 분위례성
樂浪來侵 焚慰禮城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는 삼국사기의 세 번째 기록이다. 위의 사실은 BC 5년에 한산으로 천도한 뒤의 사건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례성은 직산위례성이다. 서울을 옮긴지 3년만에 있었던 사건으로 서울을 옮기느라 분주했던 틈을 타서 쳐들어 왔던 사건이다.
윗글에서 말갈이 아니고 낙랑이 침입한 사실은 온조왕 재위 기간에 없었던 일이다. 이는 지극히 타당한 글로서 백제의 북쪽에는 낙랑이 있었던 사실을 알아두어야겠다. 낙랑이라 하면 한사군의 하나로 지배계층은 한족이고 피지배계층은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낙랑이 쳐들어온 사건은 한족이 침입한 사실로 말갈족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전국에 위례라는 말이 있는 곳은 직산지방 뿐이다. 위례산, 위례성 등지가 바로 그곳이다. 필자는 여러 차례 광주의 남한산성 근처와 이성산성 지방 그리고 한강변의 방이동 또 가락동, 풍납동 등지로 위례의 흔적을 찾았으나 어디서도 찾지 못하였다. 다만 최근에 지은 위례초등학교니 위례마을로 가는 길이니 하여 교명이나 길이름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직산 위례성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부터 위례다. 그보다 이전에 이미 위례라고 하였을 것이다.
□ AD 18년 (온조왕36 조에)
추칠월 축탕정읍성
秋七月 築湯井邑城
윗글로 보아서 탕정이란 오늘날의 아산군 탕정면을 이르는 말로 오늘의 온양온천을 가리키는 말이다. 직산 위례성과 탕정성의 거리는 약 10km로 매우 가까운 거리다. 온조왕은 직산위례성을 견고하게 하기위해 서남간에 있는 탕정성을 탄탄하게 쌓은 것으로 안다.
□ AD 23년 (온조왕41 조에)
발한인동북제부락 십오세이상 수영위례성
發漢人東北諸部落 十五歲以上 修營慰禮城
한강 동북쪽의 여러고을 사람으로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축하였다.
이상의 기록도 한산으로 천도한 이후의 사실이나 한강 남쪽의 어디에서도 위례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충청남도 연기군의 향토사학가 김재붕(金在鵬)씨는 AD 371년(근초고왕26)의 기록에 ‘이도한산(移都漢山)을 들어 백제가 직산위례성으로부터 광주지방으로 옮겨 간 것은 이때이며 온조가 건국한 BC 18년부터 AD 371년(근초고왕 때)까지 389년 동안 직산이 백제의 수도였다고 주장하며 지금도 계속 지표조사에 여념이 없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위례성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은 8대 책계왕의 기록이다.
□ AD 286년 (책계왕)
왕징발정부 즙위례성
王徵發丁夫 葺慰禮城
왕은 장정을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
김재붕씨의 학설대로라면 위에서 지적한 위례성이 틀림없다. 그러나 꼭 그렇게 생각을 굳힐 까닭은 없다. 직산위례성이 수도(首都)였던 기간이 BC 18년에서 AD 371년까지 389년간이나 계속되었다면 약 400년의 정치도시로서의 어느 정도의 면모는 갖추었을 것으로 본다. 아무리 아득한 옛날이라고 하지만 400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다. 더구나 문물제도가 완벽치는 않다 하더라도 그들(상류계급)은 북쪽에서 옮겨온 발달된 문화 속에서 살다온 사람들이다. 더구나 왕권이 절대시 되던 때로 약간의 제도적인 구색이 맞았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도성의 성곽이나 성문 또 궁궐은 있었을 것으로 보며 제단이나 종묘 등 부대시설에 있어서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약간의 흔적은 남아 있어야 하지 않는가. 더구나 한나라의 수부(首府)였다면 몇 천의 인구가 살았으며 많은 가호(家戶)가 있었을 것으로 보아 당시의 와당이나 초석 등 아니면 거주지의 일부라도 발견될 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직산위례성의 400년설에 첫째가는 의심이다. 현재 지표상에 몇 가지 사료가 나타나 있는 것은 필자의 소견으로는 BC 18~BC 5년까지의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은 지표조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나 그간 수거된 사료가 매우 드물다.
기원을 전후한 이때는 이미 철기문화가 크게 발달되었던 때이며 아울러 수도작문화(水稻作文化)가 많은 발전을 가져왔고 때로는 정복사업도 활발하게 일어났으므로 많은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어야 옳다고 본다. 허나 그렇지 않다. 앞으로 지표조사가 활발하게 전개되리라고 생각되며 이미 충남대학이나 영남대학에 의하여 1차의 지표조사가 끝났다. 발굴결과가 지면을 통하여 발표가 되었으나 확실한 고증은 없다. 성곽의 일부를 찾아내고 사산성곽(蛇山城郭)이니 목지국(目支國)의 성곽이니 하여 임의대로의 발표는 있었어도 아직은 정확하지 못하다 계속된 지표조사가 있을 것으로 본다.
위위 즙위례성(楫慰禮城)은 이와 같은 주장으로 직산위례성이다.
(3) ‘한국사(韓國史) 및 진단학보(震檀學報)
위례성으로 확정되고 있는 직산지방은 현재의 천안시 직산면 일대와 성환읍 그리고 성환읍에서 북쪽으로 약 5~6km 지점까지 또 동쪽으로 성거읍과 입장면에 이르는 2개읍과 2개면의 광활한 지역을 마한(馬韓)의 읍락국가(邑落國家)이며 진(辰)의 맹주국인 목지국(目支國)의 옛터로 한국사 및 진단학보에 발표되었던 두계(斗溪)의 논문(삼한문제의 신고찰)에서 직산위례성과 관계되는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직산은 전설상 백제초기의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으로 일러오는데 직산위례성만은 근세 이래 선비들의 비판거리가 되어 지금은 대개의 학자가 부인한바 되었으며 나도 역시 백제의 위례성은 실상 지금의 직산이 아니라 한강유역의 땅으로 최초의 것은 한강 이북의 서울 부근 강남으로 천도한 이후의 도읍지는 광주군 구천면 성내리의 땅이라고 생각되니 나의 견해의 기초는 다산(茶山)의 ‘위례성고(慰禮城考)’에 있으므로 그것을 읽어 주기 바란다. 이와 같이 직산은 백제의 고도 하남위례성의 소재지가 아니라면 그 전설은 후세에 와전 혹은 만들어진 이야기로 볼 수밖에 없으나 거기에는 반드시 어떠한 곡절이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그러나 곡절은 단순하다고 생각된다. 직산지방이 백제의 첫 서울이 아니더라도 백제이전 오랫동안 역사를 가지고 있던 한강이남 제1의 옛도시로 저명하였던 것이 뒷날 그곳이 백제에 공취되어 주객이 전도된 것을 후세에 와서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남(河南) 제1의 고국(古國)을 든다면 진국(辰國.마한)에 비할 나라가 없으니 직산지방은 옛 진국의 정치적 중심지(마한 전기의 수도)로 추정함에 가장 적당한 곳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단, 주의할 것은 오늘날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직산은 충남 천안시의 일개 면명 또는 일개 지명으로 밖에 남아 있지 아니하나 옛날에는 직산면을 비롯하여 성거읍, 입장면, 성환읍을 포함한 하나의 현(縣)이었으니 여기서 말하는 직산은 옛 직산현을 말한 것이다.)
진국(辰國 : 백제건국 이전 한강 남쪽에 성립되었던 부족국가)의 정치적 중심지가 해안지방에 있었던 것 같다. 이 직산지방이야말로 실로 이 사실에 해당되는 곳이다. 지금 그 지리를 살펴보면 직산 및 그 부근의 땅은 동남으로 성거산을 등지고 서북으로 성환과 평택의 큰 들을 바라보면서 서해에서 가장 깊은 아산만에 임하고 성거산 및 안성지방에서 시작되는 여러 갈래의 물길은 이 평야에 모여들어 서쪽으로 흘러서 시작되는 여러 갈래의 물길은 이 평야에 모여들어 서쪽으로 흘러서 아산만에 드니 소위 안성천이 이것이다. 안성천의 하류 쪽은 비교적 땅이 넓어서 선박의 통행이 성황 하였음이 고금을 통하여 변함이 없고 평택 동쪽으로는 내폭이 좁아 배가 다니기에 어렵겠지만 옛날에는 그 동쪽까지 선박의 출입이 있었던 모양이다.
진국의 도읍이 직산지방의 어느 지점에 해당되는지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성거산에는 위례성의 성지가 남아 있고 직산 고을에는 사산성의 유적이 남아 있으나 이들은 모두 삼국시대 혹은 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 쌓았던 것일뿐더러 확실히 난시에 필요했던 산성이요 평시에 사람들이 살던 도성이 아니므로 지금 생각하는 대상의 문제가 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직산에서 북쪽으로 4km쯤 되는 곳에 도하리(都下里) 혹은 도감리(都監里)라는 부락과 여기에서 서북쪽으로 약 1km되는 곳에 안성천이 합류되고 그곳에 안궁리(安宮里) 혹은 궁리(宮里)라는 마을이 있고 또 평택군 진위면 부용리에 평궁리(坪宮里), 신궁리(新宮里) 등의 마을 이름으로 보아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부락에서 아직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부락명은 필연 심상치 않으며 아주 오래된 유래와 역사를 가진 듯하니 안성천 유역이 진국시대인 마한의 궁궐이나 도시가 있던 곳이 아닌가. 그래서 오늘까지 ‘도(都)’자나 ‘궁(宮)’자가 붙어 있는 마을이 많은 것으로 본다.”
이상은 진단학보에 발표된 논문 중의 일부분이다.
여기서 위 논문의 일부분을 들어가면서 직산위례성과 관계있는 부분을 다시 재론하여 볼까 한다. 감히 한국의 석학들의 논문을 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내고장 향토사와 관계되는 부분이기에 의견을 밝혀볼 뿐이다.
먼저 위 논문 중에 위례성은 삼국시대나 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의 축성이라고 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으로 본다. 한 개의 성채를 놓고 삼국시대에서부터 고려 초까지로 연대측정을 하였으니 약 1000년의 연대를 고증한 셈이다. 심하게 말해서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뜻이 아닌가한다. 역사 이전의 유물이나 유적 같으면 1세기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하겠지만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것을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위례성의 축성에 대하여는 필자의 사견을 말하기보다는 86년 10월에 문화재 관리국에 계시는 우리나라 고고학계 거장이 위례성을 장시간에 걸쳐 답사를 마치고 백제초기의 축성법에 의하여 조성된 성임을 밝혔다. 전문가에 의하여 고증된 것이므로 위례성의 축성 연대에 대하여는 재론을 하지 않기로 하고 뒤에 유물, 유적 편에서 다시 밝히기로 한다.
또 위례성은 난시에 필요한 산성이요 평시에 사람들이 살던 읍성은 아니다. 고로 위례성은 백제의 도성과는 관계가 없고 고려(考慮)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고 하였다. 이 문제는 앞에서 밝혔다. 현재 남아있는 위례산성은 위례성에 속해 있던 산성이다. 필자도 두계의 논리와 같다. 500여미터나 되는 산위에 도읍을 두엇을 까닭이 있겠는가. 두계 선생께서도 북한산성(北漢山城)을 논한 논문에서도 똑같은 논평을 하였다.
직산지방을 사산성(蛇山城)이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장수왕에 의하여 백제의 서울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면서부터다. 이때 불리어진 사산성 이전에는 위례성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직산위례성에 대하여 연구나 조사를 하였다면 읍성이니 산성의 이야기보다는 좀 더 발전시켜 읍성과 산성의 거리가 그렇게 멀 수가 있겠는가에 착안을 했어야 옳다고 본다. 성으로 바뀐 뒤에도 바뀌기 이전의 위례성으로 불리었을 뿐이고 처음부터 산성은 아니었다.
또 안성천 주변에 흩어져 있는 ‘도(都)’자 ‘궁(宮)’자가 붙어 있는 동명은 마한초기의 중심지로 비정되어 오늘날까지 지배적인 학설로 등장되어 있으나 이것도 필자의 억설일지 모르나 백제초기(BC18~BC5)에 이루어진 동명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정시대 중추원의 촉탁으로 있던 오하라(大原利武)씨는 다음 두 가지 고증으로 된 학설을 내놓았다. 하나는 위략(魏略)에 ‘승대선 입진한(乘大船 入辰韓)’의 구절로 보아 오늘날 황해도의 한 모퉁이에서 큰 배를 타고 경기만의 서해를 통하여 아산만으로 들어서 진(辰)의 서울이었던 지금의 직산지방으로 들어온 것을 말한 것이며 한군현의 하나였던 낙랑과 진국의 교역의 중심지로 보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발달된 낙랑문화와 진의 후진문화가 교차되는 곳으로 꼽았던 것 같다.
두 번째로 직산지방을 진국의 수도로 본 오하라씨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명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도하리, 안궁리, 신궁리 등이 있으며 안성천의 대하(大河)가 이들 마을을 관통하여 수운(水運)에 편리하고 수리(水利)에 인간 활동이 편한 곳임을 들었다. 그러나 이런 고증으로 직산지방이 목지국의 도읍지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만약에 위에서 밝힌 두 가지가 모두 절대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다만 추측이라면 직산지방과 여건이 비슷한 곳은 서해의 남부지방에는 많다. 그 첫째가 광주다. 한강을 통하여 큰 배가 드나들 수 있고 지명도 궁자나 도자가 붙은 곳이 많다.
예를 들어보면 춘궁리, 성내리, 이성산성, 한산성 등이다. 전북의 익산지방도 그렇다. 금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큰 배가 진한에 들 수 있고 넓은 들과 낮은 구릉은 인간 활동에 매우 편리하고 문물의 교역지로도 알맞은 곳이다. 뿐더러 고분이나 유물 등이 더욱 고증을 두텁게 하고 지명도 왕궁리(王宮里), 고도리(古都里) 등으로 보아 진국의 수도로서 손색이 없는 곳으로 본다. 또 예산의 삽교지방이다. 무한천과 삽교천의 수운을 이용하여 예당평야에 이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볼 때 진국의 맹주국인 목지국의 수부(首府)로만 보아오고 비정했던 직산을 백제의 첫 서울로 바꾸어 봄직도 하다. 진국의 성립과 백제 건국의 연대 차이는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성천 주변에 산재해 있는 옛 마을은 백제가 이곳(위례성)에 건국하고 난 뒤의 이름으로 보아도 좋다고 본다. BC 4~3C경 한강 이남에 살던 사람들이 자생적으로 모여 작은 부족국가를 이루고 살고 있는 곳에 북방의 발달된 문화를 지닌 이동집단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발달된 언어와 문자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생각해 봄직도 하다. 또 예로부터 바닷가나 냇가에 인류가 생활한 사실은 기본적인 이야기이며 발달된 철기문화를 받아들이던 한강남쪽의 부족사회에 북쪽에서 한패의 무리가 들어와 남쪽에서는 볼 수 없는 문자를 사용하면서 고도로 발달된 철기를 사용하며 이곳에 정착하면서 하나의 국가를 건설했다고 보겠다. 이상은 한국사와 진단학보에 게재된 위례성과 관계되는 논문 ‘삼한문제 신고(三韓問題 新考)’를 살펴보면서 작은 생각을 밝혔다.
여기 참고삼아 위례성에 관심을 가진 동학(同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첫머리를 한자로 적고 한글로 풀어 두겠다.
백제시조온조왕 기부추모 혹운주몽 자북부여도난 지졸본부여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惑云朱夢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 아비가 추모 혹은 주몽이라고 한다. 그는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는데
부여왕무자 영유삼여자 현주몽 지비상인 제이녀처지
扶餘王無子 兄有三女子 見朱夢 知非常人 第二女妻之
부영왕은 아들이 없고 다만 딸이 셋이 있어 근심 중에 주몽을 보고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 둘째 딸로서 그 아내를 삼게 했다.
미기부여왕훙 주몽사위 생이자 장왈비류 차왈온조
未幾扶餘王薨 朱夢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얼마 아니하여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왕위를 잇고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요 작은 아들은 온조다.
혹운주몽도졸본 취월군녀 생이자
惑云朱夢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서 월군녀를 아내로 얻어 두 아들을 낳았다는 설도 있다.
급주몽재북부여소생자래위태자 비류온조공위태자소불용
及朱夢在北扶餘所生子來爲太子 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
그런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았던 아들이 와서 태자로 삼으려하자 비류와 온조는 그들이 태자로 용납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여
수여오간마려등십신남행 백성종지자다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드디어 오간과 마려 등 십신과 더불어 남쪽으로 떠나니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수지한산 등부아악 망가거지지 비류욕거어해빈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그들은 드디어 한산땅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수 있는 땅을 바라보았는데 비류는 해변으로 가서 살고자 하였다.
십신간왈 유차하남지지 북대한수 동거고악 남망옥택 서조대해 기천험지리 난득지세
작도어사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嶽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地勢
作都於斯
십신이 간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 한수가 띠를 둘렀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이 펼쳐있고 서쪽은 큰 바다에 막혔으니 그 천험의 지리를 이루어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일으키는 것이 좋지 않으리까 하였더니
불역의호 비류불청 분기민 귀미추홀이거지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역시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나누어 가지고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
온조도하남위례성 이십신보익 국호십제 시전한성제홍가삼년야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십신으로 보익을 삼으니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는데때는 전한 성제임금의 홍가3년이다.
비류이미추토습수 부득안거 귀견위례도읍정정 인민안태
沸流以彌鄒土濕水 不得安居 歸見慰禮都邑鼎定 人民安泰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가 없으므로 위례성에 돌아보니 도읍이 잘 정해지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고 있으므로
수참회이사 기신민계귀어위례 후이래시 백성락종 개호백제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 百姓樂從 改號百濟
드디어 부끄러워하며 뉘우치고 죽음으로써 그 시민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부터 백성들이 즐겁게 따르므로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기세계여고구려동출부여 고이부여위씨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그 세계는 고구려와 같으므로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성씨를 부여로 삼았다.
이상은 온조왕을 시조로 한 백제본기의 서문이며 같은 서문 속에 비류를 시조로 하는 이설이 있는바 이제 그 이설을 원문대로 싣고 그것을 풀이하여 덧붙인다.
일운시조비류왕 기부우태 북부여왕 해부루서손 모소서노
一云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 解扶婁庶孫 母召西奴
또는 말하기를 시조는 비류왕이고 그 부친은 우태로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고 그 어머니는 소서노로
졸본인연타발지녀 시시귀우우태 생자이인 장왈비류차왈온조
卒本人延陁勃之女 始是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次曰溫祚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고 그가 처음 우태에게로 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이고 작은 아들은 온조다.
우태사 과거우졸본 후주몽부용어부여 이전건소이년춘이월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夢不容於扶餘 以前建昭二年春二月
우태가 죽음으로 과부가 되어 졸본에 와서 살았고 뒤에 부여에서 주몽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전한 건소 2년 2월에
남분지졸본 입도호고구려 취소노위비 기어개기창업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奴爲妃 其於開基創業
남쪽인 졸본지방으로 달아나서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이어 주몽은 서소노를 아내로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그 창업의 기반을 열었다.
파유내조 고주몽총접지특후 대비류등여기자
頗有內助 故朱夢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가세가 기울 정도로 내조가 있었으므로 주몽은 그를 총애하고 특별히 후대하며 비류 등도 자기의 아들과 같이 하였다.
급주몽재부여소생예씨자유유래 입지위태자 이지사위언
及朱夢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그런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리가 와서 그를 세워 태자로 삼고 드디어는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어시비류위제온조왈 시대왕피부여지난 도귀지차
於是沸流謂弟溫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이때 비류는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고 도망하여 이곳에 이르렀으므로
아모씨경가재조성방업 기근로다의 급대왕압세 국가속어유유
我母氏傾家財助成邦業 其勤勞多矣 及大王壓世 國家屬於孺留
우리 어머니는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 나라의 기업을 조성하는데 힘썼는데 대왕이 돌아가자 나라는 유리에게 돌아갔다.
오등사재차 울울시우췌 불시봉모씨남유복지 별립국도
吾等徙在此 鬱鬱始疣贅 不始奉母氏南遊卜地 別立國都
우리들은 헛되이 여기에 울적하게 근심하며 있는 것보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수여제졸당류 도구대이수 지미추홀이거지
遂與弟卒黨類 渡具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드디어 아우 온조와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패수와 대수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여기서 살게 되었다.
북사급수서개운 동명지후유구태 독어인신 초립국우대방고지
北史及隨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북사나 수서가 모두 이르기를 동명의 후예 구태가 있었는데 그는 인심이 독실하였다. 그는 처음에 나라를 대방의 고지에 세우니
한요동태수공손도이여처지 수위동이강국 미지숙시
漢遼東太守公孫度以如妻之 遂爲東夷强國 未知熟是
요동태수 공손도는 그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았는데 드디어 동이가 강성하게 되었다. 아직 어는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4) 삼국유사
속세를 떠난 스님이 사문 밖의 글을 써서 책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우선 궁금한 일이다. 9살에 출가하여 84살까지 72년간을 선사에만 매달린 그가 살아온 과정을 보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은 30대의 장년시절에 몽고의 병란을 겪으면서 불교서적이 병화에 불타서 없어지는 것을 목격했고 고려인이 주체성을 잃고 몽고풍속에 휩쓸려서 오랑캐 옷 입기를 즐기고 몽고식 머리 깎기를 유행처럼 따라 하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했으며 민족적 주체의식을 되찾게 하려는 안간힘으로 사문 밖의 글을 썼으리라고 본다.
삼국사기는 왕명에 의하여 편찬된 것으로 국가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며 비교적 그 체제와 문장이 정열하여 삼국의 내력을 밝힌 정사(正使)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그와는 다르다. 일연국존의 사사로운 개인 의사에 의하여 편찬되었고 일사(逸事), 유문(遺文), 전기(傳寄) 등을 설화식으로 나열하였으나 정사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과 빠진 것 또는 고의로 누락시킨 것들을 수록하였으며 우리나라 양대사서(兩大史書) 중의 하나로 한국의 고대사 연구에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사서이다.
저자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하면서 백제의 첫 서울 위례성에 대하여 그 사실을 빠짐없이 기재하였다. 삼국유사 왕력편(王曆編) 백제시조란에
제일온조왕 동명왕제삼자 이운제이 계묘립 재위사십오 도위례성일운사천금직산 병진이도한산 금광주
第一溫祚王 東明王第三子 一云第二 癸卯立 在位四十五 都慰禮城一云蛇川今稷山 丙辰移都漢山 今廣州
첫 번째의 온조왕은 동명왕(주몽)의 셋째 아들이며 또는 둘째 아들이라고 한다. 계묘년(BC 18)에 나라를 세우고 45년간을 왕위에 있었으며 도읍은 위례성이다. 또는 사천이라고 하며 오늘날의 직산을 말함이다. 병진년(BC 5)에 한산으로 도읍을 옮기니 오늘날의 광주이다. 위와 같이 삼국유사에 위례성을 사산으로 못 박고 그것도 부족해서 오늘날의 직산이라고 굳혀 말했다. 앞의 삼국사기에서 부아산에 대해서 많은 의견을 밝힌 바와 같이 용인의 부아산을 삼국사기의 부아악으로 볼 때 위례성은 직산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직산이 위례성이라면 삼국사기의 미추홀도 인천이 아니라는 논증이 선다. (미추홀에 대하여는 별도로 논술하겠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위례성을 미상지명으로 하였고 일연이 저술한 삼국유사에는 위례성을 직산이라고 하였다. 비류백제(沸流白濟)와 일본고대국가의 기원에서 저자 김성호(金聖昊)씨는 일연마저 알고 있던 직산위례성이 방대한 사서와 지지(地誌)가 동원되었던 삼국사기에 미상지명(未詳地名)이라 한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추측컨대 직산과 백리도 되지 않는 아산(牙山) 인주(仁州)를 인천(仁川)으로 비정함으로써 직산과 이백리 이상의 거리로 떨어지게 되자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서 거짓 비정의 내막이 폭로될 것을 우려하여 직산위례성을 아예 미상이라고 하여 버린 듯하다. 삼국유사가 삼국사기보다 합리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아울러 직산과 부아악을 종합하여 보면 미추홀의 위치가 아산의 인주이어야 함이 더욱 분명해 질 것이다.
이와 같이 밝힌 내용으로 보아 김성호씨는 ‘부아악’을 용인으로 보았을 때 백제의 첫 서울은 직산이라야 된다는 설이다. 또 삼국유사의 기록내용이 현지전승과 일치됨은 영남대학교 부설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실제로 조사 확인되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문신(文臣)이다. 그는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하고 고려조정의 정권을 좌우하던 권신(權臣)이다. 그가 방대한 서적을 참고로 하였겠으나 실제로 직산위례성을 답사하거나 현지 실측이나 아니면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지도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편찬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나 주장을 반영하기도 하였고 자기의 의견도 약간은 삽입되었으리라고 본다. 또는 편찬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저자로서의 명의만 올렸을 뿐이고 백제위례성의 기록은 다른 편찬위원의 손에 의하여 저술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고기(古記)의 기록을 비판이나 주관 없이 옮겨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일연의 경우는 다르다. 아홉 살에 남해(南海)에서 출가(出家)하여 전국의 방방곡곡을 편력(遍歷)한 승려인지라 직산지방의 왕래도 몇 번이나 하였을 것으로 본다.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天興里)에 천흥사지가 있다. 정확한 사기(寺記)는 없지만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천흥사 종(鍾)의 표기(表記)에 의하면 고려 목종 5년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며 지금은 소실되어 절터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보물로 지정된 5층석탑과 당간지주가 있다. 이 당간지주의 설립자 즉 시주자가 일연스님이라는 말이 오랜 옛날부터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이 비록 전설이기는 하나 일연과 같은 승려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전설이 사실이라면 일연은 직산위례성을 실제로 답사하였고 그것에 대한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성거읍 천흥리는 옛 직산현의 영지(領地)로 백제 초기에는 위례성의 영역에 속해 있던 곳이고 또 위례산성 밑에 있는 큰 마을이다. 지금 남아있는 절터나 탑 또는 범종의 제작으로 보아 대단한 거찰(巨刹)이다. 도 만일암(晩日庵) 등 작은 암자를 몇 개씩 거느리며 지금 남아있는 장대석(長大石)이 그 위용을 입증하고 있다. 이토록 훌륭한 사찰을 일연이 다녀가지 않았을 까닭이 있겠는가. 한해 겨울의 안거(安倨)나 한마디의 설법을 하기 위해서라도 왔었음 직하다. 추상적이기는 하나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앉아서 눈과 손으로 쓴 글이요 일연은 눈과 발로 쓴 글이라고 볼 때 직산위례성은 일연 쪽의 주장이 타당성 있다고 보면서 아울러 직산위례성이 백제의 첫 서울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해본다.
(5) 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조선조 최고의 인문지리서이다. 여기에도 백제의 위례성에 대하여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자는 물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참작하지 않았을 까닭은 없겠지만 위례성에 대하여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직산현의 건치연혁(建治沿革)에
본위례성 백제온조왕 자졸본부여남분 개국건도우차 후고구려취지위사산현 신라인지 위백성군현 고려초개금명 현종구년속 천안부
本慰禮城 百濟溫祚王 自卒本扶餘南奔 開國建都于此 後高句麗取之爲蛇山縣 新羅因之 爲伯城郡縣 高麗初改今名 顯宗九年屬 天安府
본시 위례성으로 백제의 온조왕이 졸본부여로부터 남쪽으로 옮겨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에서 이 땅을 빼앗아 사산현으로 고쳐 부르고 신라 때도 그대로 사산현으로 하고 백성군의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지금의 이름(직산)으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천안부에 소속시켰고...
이상의 기록 중 첫머리에 나타나는 위례성의 지명은 직산을 가리키는 것이며 위례성이니 사산성이니 하는 것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참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서 위례성, 사산성 등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여지승람이 편찬된 500년쯤 전에는 그와 같은 서적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서적을 참고하였고 한 개 지방의 역사와 유래를 귀 기울이며 엮었으리라고 본다. 또한 여지승람 편찬에 종사한 사람들은 지지학보다는 역사학에 밝았던 것이 사실이라고 볼 때 만약 이들의 의견이나 논술이 윗글과 같지 않았으면 위례성이니 백제 온조왕이니 하는 따위의 기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들이 직산위례성을 잘 몰라서 옛날의 기록을 그대로 옮겼다면 문장의 끝부분에 삼국사기와 같이 미지숙시(未知熟是)라고 하였을 터인데 그런 구절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또 직산현의 형승(形勝)에 북대한수, 동거고악, 남망옥택, 서조대해의 지세 해설은 삼국사기에서 옮겨진 것으로 보며 당시 직산 고을 어디엔가 온조왕묘(온조왕의 사당)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지금 어딘지 분명치 않다. 백제가 세운 첫 서울인 위례성을 현재의 서울 근교로 또는 경기도의 광주로 비정하고 있음은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보아도 잘못된 비정임을 알 수 있다.
또 여지승람의 광주조에 보면
본백제 남한산성 시조온조왕십삼년 자위례성이도지 근초고왕이십육년 우이도남평양성
本百濟 南漢山城 始祖溫祚王十三年 自慰禮城移都之 近肖古王二十六年 又移都南平壤城
광주(廣州)는 본래 백제의 한산성이다. 시조 온조왕 13년에 위례성으로부터 이곳에 도읍을 옮겼고 근초고왕 26년에 또 도읍을 남평양(지금의 서울)으로 옮겼다.
이상의 기록 중에서 가장 주목할 곳은 온조왕 13년에 위례성으로부터 이곳에 옮겨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옮겨오기 이전의 위례성이라고 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분명히 직산지방이다.
동국여지승람의 편찬내용이 삼국유사에 어긋남이 없도록 배려하면서 편찬하였겠지만 온조왕 14년(BC 5)에 춘정월(春正月)의 천도(遷都)라는 말과 일치한다.
다만 여지승람에는 천도의 연대가 13년으로 되었고 삼국사기는 14년으로 되어 1년의 차이는 있으나 출발이 정월이라 하였으니 불과 1~2개월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다.
5. 유적과 유물로 본 위례성
하나의 학설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분명한 사료가 증거로 제시되어야 하는 것과 같이 직산위례성이 백제의 첫 서울이었음을 증거로 하는 사료를 다음과 같이 엮어본다. 유물이나 유적은 그 나라의 국사요, 국민의 것이며 국민은 모두가 그것을 바르게 알 권리가 있으며 향토사를 하는 우리들은 향토에 사는 모든 이에게 옳고 바른 향토의 역사를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어 여기에 1989년에 실시한 간단한 지표조사의 내용을 소개한다.
□ 기간 5월 19일 ~ 5월 28일
5월 19일부터 5월 28일까지 10일간에 걸쳐서 실시되었던 직산위례산성(현 입장면 호당리와 북면 운용리에 있는 산성)의 지표조사는 KBS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팀과 현지에 있는 단국대학 역사학과 학생들 및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방의 향토사학가들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금번 실시된 지표조사가 가지는 뜻은
(1) 첫째로 이제까지 문헌에만 나타나고 있는 백제의 초도 직산위례성이 얼마만큼 이곳과 사실에 접근하고 있으며
(2) 둘째로 산성이 가지고 있는 성격을 규명하고(축성방법, 축성년대, 성의규모)
(3) 셋째로 보존상태와 앞으로의 발굴방법 및 보존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연구하며 문화재로서의 가치판단 기준을 설정하는 데 있다.
백제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피해 갈 수 없는 첫 관문인 직산위례성 초도설은 그동안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진가위가(眞可僞可)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고문헌인 삼국유사나 동국여지승람, 직산현지, 목천현지 등에 기록되어 있는 하남위례성 직산설은 다산이나 두계에 의하여 인정되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심지어 어느 학자는 직산위례성의 백제초도설은 위전이라고까지도 하였다. 또 전설상의 산성이며 나대(羅代)나 여대(麗代)에 축성된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앞에서 밝힌 옛 기록은 무엇이냐 말이다. 고인(古人)들이 할 일 없이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눈여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물론 옛 기록이라고 전폭적으로 믿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눈으로만 보고 위전(僞傳)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BC 18년에 건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건국의 연대가 대방고지인지 한강변에서인지 또는 직산지방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후에 서해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며 나아가서는 고대 문화를 일본에 건네주는 스승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던 백제의 초도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서울의 강동구 올림픽경기장 앞에 대형의 길 안내판을 세우고 ‘위례성길’이라고 쓴 까닭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밝혀지지도 않은 곳에 사실처럼 위례라는 길을 만들어 놓고 많은 시민이 더구나 배우는 학생들이 오가는 길목에 세워진 까닭은 무엇인지..?
그길로 아무리 가도 위례성은 없다. 위례성이라는 도읍 명칭이나 위례산성이라는 성명(城名)이나 위례산이라는 산명(山名)은 이곳 직산지방 밖에 없다. 위례성이 옛 문헌에 직산으로 밝혀진 것은 삼국유사가 처음이다. 이미 800여년 전의 일이다. 일연이 800여년 전에 장난삼아 지은 이름이 아님을 더욱 힘주어 말하는 바다. 고구려의 졸본지방을 떠나온 온조 일행은 삼국사기의 기록 그대로 대방고지에서 잠시 머물다가 주변의 토착세력에 못 견디어 뱃길로 남하하여 서해안을 통하여 안성천을 거슬러 올라와 직산지방에 이르러 개국건도(開國建都)하고 BC 6년에 변란을 치르고 난 뒤에 다음해인 BC 5년에 경기도 광주지방으로 도읍을 옮기는 사실이 모든 문헌상의 기록으로 고증이 충분하다고 본다.
고문헌에 위례성으로 기록되어 있음은 오늘날의 직산지방을 말함이요, 위례산에 쌓여진 성은 산성이다. 500m가 넘는 산의 정상 부분에 거성(居城)이 있을 까닭은 없다. 이 부분은 두계선생이 한국사에서 밝힌 바와 동감이다. 산성(山城)은 전쟁용이요, 방어용이다. 거성의 읍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여진 것이다.
위례산성은 토성과 석성의 혼성으로 여지승람에는 길이가 1690척(尺) 높이가8척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금번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그보다 훨씬 크고 긴 성임이 밝혀졌다. 몇 개의 망루(望樓)가 있었음은 출토된 백제와당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수성(守成)하던 군사들이 머무를 수 있었으며 때로는 전란이나 내란으로 옮겨왔던 도성민(都城民)이 장기간 군거(群居)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산성의 내부는 약 10만평 가량이나 그 중 5천평 가량의 평지가 있어 인간활동에 편리하였고 성내에 큰 우물이 있어서 수백명의 사람이 물을 이용하게 되었으며 성문도 이번 지표조사에서 나타난 것은 두 곳이다. 북문과 동문이며 북문은 세전(世傳)되어 내려오는 문다라니 고개(현문령 : 懸門嶺)이고 동문은 부소무이 고개(부소문령 : 扶蘇門嶺)이다.
문다라니 고개에 있었던 북문은 입장 호당리에서 북면 운용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대단한 험로이며 성문에서 군졸이 지키면 일당백(一當百)의 요새 중의 요새이다. 이곳의 이름은 문다라니 고개로 불리운 까닭은 문을 달아 놓았기 때문에 문다라니 고개이다. 한편 동문은 부소문이 고개로 북면 납안리에서 입장면 양대리로 통하는 고개로 이곳에는 동문로이면서 망루로 이용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 터가 이번 지표조사에서 나타났다. 동문터는 위례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현재 건설부에서 방향표식판이 세워져 있다.
금번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얻은 큰 성과는 토성의 성격을 찾아냈다는 데 있다. 대개의 백제토성은 평지에 판축으로 이루어진 성이나 위례산성은 높은 산의 정상부에 있기 때문에 판축이 어려웠던지 밑넓이가 6m나 되는 토성 속에 두 줄로 석심(石心)을 박아 산성의 표토(漂土)가 경사면으로 쏠려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지 않은 축성법이다.
석성은 성의 원초적인 방법으로 축성되어 크고 작은 자연석을 혼성(混成)하여 큰 돌은 아랫부분에 작은 돌은 윗부분에 배치하였으며 열(列)과 면(面)을 맞추지 않았다. 토성을 길게 쌓고 급경사가 된 곳이나 만곡(彎曲)부분을 석성으로 연결시킨 희귀한 성이다. 나대(羅代)나 여대(麗代)에 쌓여진 것이 아니고 백제 초기의 성임이 확인되었으며 전문가의 말을 빌리면 평양 부근에 있는 고구려의 성인 대성산성(大城山城)의 축조법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백제 초기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으므로 위례산성은 백제초기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아야 하겠다.
더구나 금번 실시한 지표조사에 성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성돌과 돌 사이의 구멍에서 백제 때의 것으로 보이는 회색연질토기편(灰色軟質土器片)이 발견되어 백제초기에 축조된 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성에 trench를 걸고 절개(切開)작업을 하다가 성의 최하단부에 아토부분(亞土部分)에서 승석문토기(繩蓆文土器)편이 오, 육점 출토되었다. 이는 금번 실시되었던 지표조사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승석문토기의 사용 연대와 성의 축조연대가 비교되기 때문이다.
승석문토기는 대체로 중국의 주대(周代)에서 한 대(漢代)에 결쳐서 널리 제작 사용되던 토기로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가 열리는 BC와 AD가 갈리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때에 발달하였던 토기로 기면(器面)을 굳고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승석(繩蓆)과 같은 것으로 그릇의 표면을 두들겨 굳혀서 만들었기 때문에 노끈이나 자리때기 무늬가 남게 된 것이다. 승석문토기 사용의 하한연대(下限年代)가 언제까지인지 정확하지 않아도 4C경 까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으로 보아도 직산위례산성의 축조연대는 4C 이전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고 보아 이제까지의 주장보다는 연대(年代)가 상회(上廻)하는 백제 초기의 것임이 증명되었다고 보겠다.
승석문토기가 출토된 약 50cm 가량의 원토층(原土層)에서 초기 철기시대에 사용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철창과 철겸(쇄낫)이 출토되었다. 창은 무기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고 낫도 수확용의 농기구로 보기보다는 전쟁용의 무기로 보는 편이 좋을 듯싶다. 이와 같이 승석문토기나 철제무기류는 모두 초기철기 시대의 것으로 따라서 직산위례산성이 백제초기에 쌓아졌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라 하겠다.
산성의 남쪽산 기슭에 백여기(百余基)의 석곽적석묘(石槨積石墓)가 발견되었다. 시굴(試掘)한 결과 백제의 묘제임이 확인되었다. 토광을 깊이 파고 광벽을 돌로 곽을 쌓아 뚜껑돌을 올려놓았으며 뚜껑돌 위에 크고 작은 돌을 쌓아 묘임을 표시하였다.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발견되지 않은 묘지로 특이한 묘제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백여기의 군락(群落)을 형성하고 있음은 전란으로 인한 전사자를 같은 시간에 매장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BC 6년에 있었던 전사자의 무덤인 듯하다.)
이때까지 문헌상으로만 밝혀졌던 백제의 초기 위례성이 고고학의 뒷받침을 받았다. 문헌과 유물이 합치된 셈이다. 직산지방이 백제의 초도로 틀림없다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더 확대된 종합발굴이 실시되어 더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이것에 대한 편년과 아울러 고고학적 연구가 절실히 요구된다. 설(設)이 설(設)로만 끝나지 말고 하루속히 정설(定說)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 지표조사의 일정표
▷ 1989년 4월 23일
문화재 관리국 김기웅 박사의 위례산성 답사
▷ 4월 25일
KBS 보도부 권혁부 기자 및 보도팀 답사
▷ 5월 19일
서울대학교 박물관장 임효재 박자 위례성 답사
▷ 5월 21일
서울대학교 박물관팀 도착(4명). 시굴장소 선정
▷ 5월 22일
A지구(문지석 장소), B지구(망루 장소) → trench 가설, 시굴
※ A지구에서 : 백제와당, 백제토기편, 승석문토기편, 철창, 철낫 출토
※ KBS 9시 News에 백제초도 위례성은 직산지방일 가능성 발표
※ MBC 9시 News에 지표조사 상황 발표
▷ 5월 23일
C지구(남문지), D지구(동문지) → trench 설치. 백제와당 및 토기편 출토
▷ 5월 24일
산성재조사. 성문지 발견. 석성에 대한 정밀조사. 출토품에 대한 종합 검토. 적석묘 2기 시굴.
▷ 5월 27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문헌조사
▷ 5월 28일
김기웅 박사 초청 적석묘 시굴.(백제의 묘제임이 확인되었음.) 지표조사 완료.
▷ 6월 4일
KBS에서 백제초도 위례성에 대한 방영(르뽀 60에서)
□ 유물유적에 대한 분석
① 와당(瓦當 : 기와)
대체로 몽촌토성이나 석촌동 고분지역에서의 출토품과 흡사하다. 고려 이전의 와당이 지니고 있는 특징과 같이 기와의 내면에 마포문(麻布紋)이 새겨져 있고 색깔이 황토색이며 다른 기와에 비하여 매우 얇다.(일반적인 기와 두께의 1/3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표면은 파문(波紋)이 세로로 여러 개 있어서 빗물이 흘러내리기에 알맞게 만들어졌다. 이와 같이 백제 초기 와당은 지표부분에서부터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토성은 백제초기에 쌓여진 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② 철겸(鐵鎌 : 쇠낫)
토성의 아토 층에서 출토되었다. 쇠 낫은 수확용이라고 보기보다는 전쟁의 무기로 이용되었으리라고 본다. 토성 내에서 농사를 지었을 까닭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긴 자루에 낫을 꽂아 산성에 기어오르는 적을 무찔렀던 전쟁무기다.
③ 철창(鐵槍 : 쇠창)
순수 전쟁용의 무기다. 역시 아토 층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축성 당시의 병사들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끝이 뾰족하고 창의 한편이 날카롭다. 초기 철기시대의 창은 양쪽으로 사용하게 되어 있어서 땅에 짚는 쪽도 예리하게 뾰족하며 앞뒤로 사용하게 되었다. 본 토성에서 출토된 것은 어느 쪽의 것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뒤의 것에 가깝다.
④승석문토기편(繩蓆文土器片)
중국의 주(周)나라 때에 시작되어 한 대(漢代)의 중기(中期)에 소멸된 토기다. 중국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져 철기시대에 없어졌으나 우리나라에 전래되기는 초기 철기시대에 들어와 AD 4C경에 소멸되었다. 그릇에 표면은 4~5단으로 나누고 노끈이나 새끼의 문양을 그릇의 표면에 박거나 두들겨서 그릇을 단단하게 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것은 7C이다. 승석문토기가 우리나라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AD 4C경이라고 볼 때 위례산성은 백제 초기에 쌓여진 성이 분명하고 위례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워진 산성이다.
⑤성채(城砦)
동국여지승람 직산현조에 위례성의 기록을 살펴보면 위례성의 둘레는 1,690척(자)로 약 460m나 되는 장성이다. ㄱ자나 ㄷ자의 형이 아니고 원형의 성이다. 높이는 8자로 약 2.4m 정도이고 흙으로 쌓은 토성으로 기록은 되었으나 사실은 토성과 석성의 혼성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석성은 두 곳으로 북쪽의 것은 28m 길이에 높이가 약 3m 정도이고 남쪽의 것은 길이가 22m 높이가 3m 정도다. 성채도 두께 20cm 정도의 돌을 포개서 쌓아 올렸고 큰 돌 사이에 작은 돌을 괴어가며 쌓았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성채로는 지극히 원시적인 형태로 되어 있으며 백제초기의 축성임이 수차에 걸쳐서 밝혀졌다.
백제 축성의 대부분이 토성으로 쌓는 예가 많으며 본 위례성도 토성을 길게 쌓아 가다가 갑자기 굽어져 만곡(彎曲)을 이룬 부분은 돌로 곧게 쌓고 돌 뒤를 흙으로 메꾸어 토성을 연결시켰다.
성돌은 자연석 그대로를 사용하였고 인공을 가한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석질은 대개 화강암이며 두 곳의 석성을 제외하고는 전체가 토성으로 되었으며 이천년이 지난 지금은 나무가 우거지고 토사가 밀려 간혹 허물어진 곳이 있지만 아직도 성곽의 대부분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적의 침입방향인 북서쪽(입장쪽)에서 볼 때 지금도 선명하게 토성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반대편인 동남쪽(북면쪽)에서는 정상부분까지 경사가 완만하여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현재 토성부분에 무성하게 자란 나무를 제거했을 경우에는 토성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1983년과 1986년에 국립지도원에서 발행한 1 : 25,000의 지도에 위례성의 성지가 뚜렷하게 항공사진으로 촬영되어 지도상에 성곽의 표식으로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토성과 석성은 연결되어 원형을 이루면서 위례산의 정상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성내의 넓이도 약 10만평이나 된다 하니 가히 장성임을 짐작한다. 여지승람의 1,690자는 현재의 지도에 표시된 부분의 1/5만 기록되었을 뿐이다.
이 성채에 대한 연구는 매우 흥미로운데 몇 가지만 살펴보면
첫째는 이제껏 주장한 것과 같이 백제의 첫 서울이며 온조왕에 의하여 축성된 성으로 백제의 건국연대와 그 연대를 함께하는 백제 최고의 성으로 주장하는 설이 있으며
둘째는 백제 20대 개로왕(AD 475) 때 고구려의 장수왕의 침입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고구려 세력이 한강 이남으로 진출하면서 문주왕(개로왕의 아들)이 웅진으로 천도할 때 백제군의 최북단(最北端)의 성으로 웅천(熊川 : 안성천)을 중심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대치하고 있을 때 백제의 요충지(要衝地)로 주장하는 설이 있고
셋째는 삼국의 항쟁시 신라군과 백제군의 전투지역으로 알려진 도살성(道薩城)의 위치가 바로 지금의 위례성의 위치로 현재 천안시 북면 납안리와 도촌(都村) 등을 중심해서 있었던 성지로 주장하고 있다. 즉 도살성이 위례성이라는 주장이다.
위와 같이 세 가지 주장이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타당성 있는 것은 첫 번째의 주장이다. 그 이유는
▷ 성채 자체가 BC 1C ~ AD 1C의 작품으로 볼 수 있고
▷ 축성 당시부터 위례산성이다. 위례산에 쌓았다고 해서 위례산성이 아니라 당시의 도시 이름이 위례성이며 지금은 도시 이름은 간 곳 없고 산의 이름만이 위례산으로 남았을 뿐이고 위례성의 성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있었던 위례산성이다.
되풀이해서 말하거니와 위례라는 이름은 간데 없고 산의 이름만이 위례산이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사산성(蛇山城 : 직산)은 토성으로 둘레가 2,984자이고 높이는 13자라고 하였다. 이것도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산성 이전에 위례성이다.
본시 위례성이었던 것이 고구려에게 공취당하고 난 뒤에 사산성이 되었으며 오늘에 이어져 직산이 되었다. 마을(도시)의 이름은 바뀌었어도 산의 이름과 산성의 이름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전국에 위례라는 낱말이 존재하는 곳은 여기뿐이다. 아주 소중한 이름이다. 최근에 와서 서울의 강동구에 위례성 가는 길이라는 새로운 도로 명칭이 붙었고 위례마을이니 하는 터무니 없는 이름을 마음대로 쓰고 있다. 위례마을 가는 길이 닿는 곳이 어딘가. 아무리 가보아도 위례마을은 없다. 그러나 우리 고장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위례산 가는 길로 가면 분명히 위례산이 있고 위례성 가는 길로 가면 위례산성이 있지 아니한가. 억지로 꾸미고 가꾸지 말았으면 한다.
몽촌토성이 있다고 그 앞의 마을이 위례마을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위례성과 사산성은 같은 것으로 옛날에는 위례마을의 이름이요, 또 그 마을을 둘러쌓았던 성이다. 사산성은 현재의 직산면사무소로 쓰고 있는 관아의 뒷산 즉 성산(城山)의 정상부분을 둘러 마을 둘레에 쌓고 남쪽의 부엉바위(남산바위)까지를 말한다. 백제의 축성이 거의가 토성이며 사산성도 예외는 아니다.
86년 여름에 충남대학교에 의하여 이 사산성의 일부가 발굴되었으나 신문에서는 이것을 목지국의 관청벽이라고 고증 발표한 사실이 있다. 필자의 소견에는 그렇지 않다. 분명히 사산성이고 그보다 옛날에는 위례성이다. 분명한 성곽과 성채가 있는데도 백제의 첫 서울을 한강변이니 금강변이니 해서야 되겠는가.
⑥ 적석총(赤石冢)
위례산성의 서북쪽으로 약 20m되는 성 아래에 위례성 우물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 약 20m 지점에 원시의 덤불 속에 장방형의 돌무지가 눈에 띈다. 길이가 5m 20cm 넓이가 3m 80cm 땅 위에서 높이가 1m 10cm의 적석총이다. 한강변 지금의 강동구 석촌동에 있는 대형 적석총의 축소판이다. 마치 침대 형으로 되어 위쪽이 약간 높고 아래쪽이 낮다.
우리나라 역사의 기록으로 보아 적석총이 만들어진 것은 청동기 시대로 되었으나 남부지방에서는 그 후까지도(철기시대의 초기) 나타나고 있다. 원시의 숲속에서 발견된 것이므로 원형은 과히 훼손되지 않았다고 보겠으나 최근에 그 모습이 많이 바뀐 것 같다. 바뀐 이유는 민간신앙(Shamanism)을 하는 부녀자들과 무녀들에 의하여 산신제를 지내는 제단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1986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본 돌무지를 답사하고 이것이 적석총이라고 분명하게 고증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이 돌무지는 민간신앙의 제단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적석총인 확률이 50%정도라고 하였으니 이 문제는 가까운 시일 내 발굴하여 확인 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것을 민간신앙의 제단용 돌무지나 성황당의 돌무지로 보기에는 몇 가지 의심스러운 곳이 있다.
첫째 성황당(城隍堂)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나 고개의 마루턱에 자리잡는 것이 보통의 예이다. 그리고 서낭은 반드시 당의 뒤쪽에 신수(神樹)가 있어야 한다. 헌데 여기의 돌무지는 길가도 아니고 고개도 아니다. 해발 500m나 되는 높은 산의 9부 능선이다. 그리고 길이 없는 계곡의 바로 옆이다. 여기까지 오르면 어느 곳과도 통하는 길이 없다. 나무꾼이나 사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난 길이 아닌 길이 있을 뿐이다. 또 최근에 산성 조사 관계로 오르내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발자국 정도 남긴 길이다. 이토록 비탈지고 궁벽한 곳에 서낭을 두었을 까닭이 없다.
둘째로 인공적이라는 것이다. 서낭의 돌무지는 던진 돌이어서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것이 그 예이다. 이 돌무지는 그렇지 않다. 떡의 켜를 쌓듯 하였고 사다리꼴로 올린 것이 예사 돌무지와는 다르다. 돌무덤의 머리 부분이 쌓여진 것을 볼 수 있다.
적석총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아도 오늘날까지 잘 보존된 것을 보면 덩굴에 가려서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은 점도 있겠지만 특별한 어느 인물의 무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김성호씨는 저서 ‘비류백제의 일본 국가의 기원’에서 백제 초기의 적석총으로 보고 온조의 어머니(동명왕 주몽의 두 번째 부인) 소서노(召西奴)의 무덤인 듯하다고 하였다.
⑦ 석곽적석총(石廓積石塚)의 군락지
위례산성의 뒤쪽 천안시 북면에는 앞서 말한 적석총과는 약 500m 떨어진 산비탈에 규모가 좀 작은 적석총이 수십기 군락(群落)을 이루고 있다. 크고 작은 돌로 지표를 누르고 있으며 거의 타원형으로 되었고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곳에 시신을 땅에 묻고 그 위를 흙으로 덮고 많은 돌로 쌓아놓은 일반적인 적석총 형태다. 숱하게 많은 적석총으로 보아 필시 어느 전화에 피해를 입고 전사한 사람들의 무덤인 듯하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BC6년의 여러 가지 사건 노구화위남(老嫗化爲男)이니 오호입성(五虎入城) 등이 그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앞으로의 발굴을 기대하여 본다.
전란에 희생된 군인들이 함께 묻힌 백제의 국군묘지와 같다.
※ 참고적으로 가필하여 둘 것은 지금까지 많은 사서(史書)에 위례성에 대하여 논하였고 논문이나 연구보고서가 나왔으나 적석총이나 돌무지에는 한 마디의 논술이 없었음을 실어 둔다.
⑧ 위례산성 우물
동국여지승람에 위례성내 유일정금양퇴(有一井今羊頹)
위례산성 안에는 우물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반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지가 약 500년 전으로 볼 때 그때 이미 반이 허물어졌다는 글로 보아 세월이 흐른 지금쯤은 전폐돼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사실과도 다르다. 우물가에 잡초가 우거지고 낙엽이 떨어져 물속에서 부패되어 물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서 반폐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우거진 풀을 베어버리고 부패된 낙엽을 긁어내면 되는 것이다. 현재도 우물은 완전한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여지승람을 편찬한 학자들이 위례성에 올라서 우물을 직접 확인하고 쓴 글이 아니고 직산고을 사람들에게 들었거나 아니면 어느 고서(古書)에 있는 그대로를 옮겨 썼을 가능성이 높다.
1985년 여름 필자는 우물을 직접 퍼내고 인부들과 함께 우물 내부에서부터 조사하였으나 반폐도 전폐도 아니다. 최초의 모습 그대로 보존상태도 지극히 양호한 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우물을 퍼서 밥도 짓고 하였는데 최근에 와서 오염이 심하여 사용하기가 어렵다. 오염의 원인은 산제나 용왕제(우물제)를 지내고 제물을 우물에 던져 부패되기 때문이다.
우물의 넓이는 지름이 2.8m의 원형으로 길이는 약 2.2m정도이나, 퇴적되어 쌓인 흙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어도 밑바닥의 돌을 쌓기 시작한 지점은 찾지 못했지만 대개 약 15cm 정도의 돌을 15~16개 포개서 쌓아 올렸다. 일명 용(龍)샘으로 불리기도 하며 가뭄이 심할 때도 마르지 않는 것이 용샘의 특징이다. 수백 명의 군사들이 취사 용수로 사용할 수 있음은 물론이지만 음료수로 사용을 하여도 그 양이 남을 정도이다. 지금도 깨끗하게 가리고 정수를 해서 사용하면 식수로 사용해도 별다른 지장이 없을 정도이다.
최근 천안시 공보실의 배려로 우물가에 사적의 표시로 비석을 세워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도록 하였음을 부언한다. 명주실 꾸러미를 몇 개를 풀어도 밑이 닿지 않는다는 전설과 우물 밑의 구멍이 부여 백마강에 통한다는 많은 전설을 지닌 위례산성 우물은 산의 정상부분에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예부터 산성 속에는 우물이 있는 것이 필수로 되었고 그 우물은 먹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적의 침입이나 포위로부터 장시일간 견디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 보겠다. 그러나 어느 산성이나 우물은 비교적 낮은 곳이나 산골짜기를 막아 이용하였으나 위례산성의 우물은 산의 정상부분에 그것도 해발 400m나 되는 곳이라면 우리나라의 여러 산성중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⑨ 망대(望臺)
토성과 석성으로 섞여 쌓여진 위례성은 길이가 약 2500m로 산의 정상부분을 둘러쌓았고 가다가 우뚝 솟은 봉우리를 만나면 봉우리를 뭉겨서 펑퍼짐하게 만들어 멀리 서북쪽을 바라볼 수 있는 망대를 만들었다. 지금 찾아 볼 수 있는 망대는 여섯 군데다. 망대에서 서북쪽을 바라보면 멀리 아산만이 한눈에 들고 경기평야의 남쪽 끝인 소사평야(素沙平野)가 성환읍에 연결되어 남쪽으로 치닫는다.
눈 아래에는 직산 옛 고을과 입장이 손에 잡힐 듯하며 산 아래 호당리에서 직산의 성산까지는 낮은 구름조차 볼 수 없는 평야지대이며 엽돈령(葉沌嶺 : 입장에서 진천으로 가는 고개)에서 근원이 되어 흐르는 물과 성거산을 수원으로하는 한천(寒川)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안성천(安城川)의 대하가 도도히 흘러 백석포에 잠긴다. 서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은 이곳 망대 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7~8km 전방에서 식별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높고 전망이 좋은 곳이다. BC 6년(온조왕 13년)에 있었던 오호입성의 사건을 하나의 전쟁으로 볼 때 아마도 그때에 사용되었던 전망대라고 본다. 네 번째까지의 망대는 성보다 약간 높게(2~3m) 대를 쌓았으며 망대겸 전투 지휘소로 사용한 듯 보인다. 망대의 뒤편에는 움집(땅을 파고 거적을 두른 집)을 지었던 자취가 지금도 우묵하게 파여 있다. 망대를 지키던 병사들이 번병제로 교대하기 위하여 쉬었던 곳임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
1989년 5월에 실시한 지표조사 당시 앞의 ①~④에서 백제 초기의 와당이 많이 출토되었다.
성문석(구숫돌)
위례성 정상 부분인 해발 524m에 구숫돌이 두 동강이 나서 부러진 반쪽이 남아 있다. 제3의 망대나 움집터 어디에서 옮겨진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황폐한 모습 그대로 뒹굴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약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완전한 구수 모양의 돌이었으나 그 후에 두 개로 갈라져서 그 반쪽만이 남아있고 반쪽은 간 데 없다고 한다. 반쪽도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그 근처 땅속에 묻힌 것으로 보이나 찾을 길이 없다. 원형 그대로 있다면 무게가 약 1t 가량의 화강암이다. 일반 농가에서 소나 말의 먹이를 담은 구숫통과 같다하여 근처의 주민들은 구숫돌이라고 부른다. 5백여m나 되는 산의 정상에 인공으로 가해진 돌이 있음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넓은 장방형의 돌을 구수모양의 흠을 정(釘)으로 쪼아냈다.
이 돌에 인공이 가해진 시대는 찾을 길이 없으나 위례성 쌓았던 당시의 작품으로 본다면 약 2000년 전의 작품이다. 1986년 가을에 있었던 문화재관리국의 답사시에 조사된 결과에 의하면 이 돌의 용도가 석문석이라고 하였다. 성문(城門)을 세우기 위하여 문기둥의 아래에 받혔던 돌이다. 성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려면 기둥 아래에 홈이 파여져야 하고 그 홈에 기둥의 아랫부분이 박혀서 돌아가면서 성문이 열리고 닫히는 돌이다. 문화재 관리위원의 말에 의하면 돌은 하나가 아니고 몇 개 또 있어야 한다고 하나 아직껏 지상에 노출된 것은 하나뿐이다. 앞으로의 발굴에 기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성문석은 실제 성문을 열고 닫는 밑받이 돌인지 아니면 용도가 전혀 다른 데 있었던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후세에 누가 묘지에 쓰기 위하여 만든 것인지...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토성이나 석성을 쌓고 성내에 고인 물을 밖으로 빼내기 위하여 성채 밑에 놓았던 물받이 돌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돌이 있는 북쪽으로 약 300m쯤에 입장면 양대리와 북면 운용리를 잇는 부소문(扶蘇門) 고개가 있다. 지금은 고개 이름만이 있을 뿐이고 아무도 이 길을 걷는 사람은 없다. 만약 이것이 분명히 석문석이면 이 부소문이 고개에 있었던 문에 쓰여진 돌이 아닌가 한다. 전설에서 다시 밝히겠지만 오랜 옛날에는 부소문 고개에 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이 돌의 주변에는 그리 많지는 않아도 약간의 돌이 있으나 모두 불에 그슬린 검은 흔적이 있다. 아직도 풀 수 없는 몇 가지 의문이 이 돌에 남아 있다. 5백여m나 되는 산정에 이런 돌이 있다는 점, 인공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는 점, 용도가 무엇인지 아직도 완전하게 풀리지 않은 점 등이다.
제원루지(濟源樓址)
직산객관 동쪽에 있다. 서거정(徐居正)이 영남지방에 사신으로 갈 때 직산을 지나게 되었다. 직산객관 동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좀 쉬다가 주인에게 묻기를 이 누각의 이름이 무어냐고 하였더니 주인은 알지 못한다고 하여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손들은 제원이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서거정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이라고 하는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백제의 시조 온조는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아들로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던 곳인데 사서(史書)에 쓰기를 온조가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만한 곳을 찾다가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정했으니 이곳을 세상에서 직산이라고 한다. 서거정이 지난해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읽고 상고하여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지였던 것은 의심할 바가 전혀 없다고 하면서 제원루에 오르니 감개를 이기지 못하여 시를 한 수 지었다.
백제유허초자평 아래감개일상정
百濟遺墟草自平 我來感慨一傷情
백제의 옛 터에 풀이 절로 우거졌는데 내 여기 오니 감개하여 마음이 상했네
오룡정파천안부 쌍봉명잔위례성
五龍淨罷天安府 雙鳳鳴殘慰禮城
다섯 용이 천안부에서 싸워 파하고 봉황새 한 쌍이 위례성에서 울었네.
시조사심홍수합 성거산옹벽운횡
始祖祠深紅樹合 聖居山擁碧雲橫
시조의 사당은 깊은 단풍나무에 가리워졌고 성거산이 옹위했는데 푸른 구름 비꼈어라
등루다소추풍사 하처취잔철적성
登樓多少秋風思 何處吹殘鐵笛聲
누각에 올라 가을바람에 나는 생각 어디서 쇠피리 소리만 들려오는가
이상은 제원루에 대한 서거정의 시다. 제원루는 지금의 직산초등학교 교정에 있고 이곳에는 당시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長大石)이 흐트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온조왕 묘
직산 고을 동북쪽 3리에 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세조11년(1465년)에 세웠고 봄과 가을에 국가에서 향(香)과 축(祝)을 내력서 제사 지내게 하였다. 온조왕 묘는 조선 선조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에게 소실되고 순조18년(1818년)에 현감 이의선(李義先)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신사년(1881년)에 허물어졌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와 같이 온조 묘나 제원루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초도는 천안시 직산지방임에 틀림없는 것으로 본다.
6. 위례성 주변의 전설
유물이나 유적이 있는 곳에는 그것에 따르는 전설이 있게 마련이다.
원래 전설이란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것이라서 전혀 믿기 어려운 내용이 많고 귀담아 듣기 싫은 때도 있으나 할머니 무릎에 누인 손자를 잠재울 때나 깊은 겨울밤 사랑방 노인들이 한담거리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요건이다. 또 유적이나 유물은 실제 조사함에 있어서 먼저 이루어야 될 것은 현지에 전해오는 전설의 청취다.
현지에서 전설을 듣다 보면 그곳의 유물이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있으며 또 유적의 내력은 어떠한가 하는 등 문헌 조사에도 나타나지 않는 내용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때는 문헌과 유적과 유물 그리고 전설 등이 일치하는 경우가 있어 우리나라 모든 기록의 신빙성을 재평가하게 되고 현지의 유물이나 유적의 고증에 더 크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전설 1>
옛날 백제군과 고구려군이 싸워 피비린내 나는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백제의 임금은 용왕의 아들이라 조화를 잘 부려서 고구려 군사를 잘 물리쳤다. 백제 임금은 낮에는 용으로 변신하여 웅진(공주)에서 위례성의 용샘까지 땅 속으로 뚫린 물줄기를 타고 단숨에 달려와 위례성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하여 고구려 군사들과 전쟁을 하고 밤에는 용샘으로 들어가 웅진에 있는 왕궁으로 돌아가서 모든 정치를 처리하였다.
그러던 중 임금 자리를 탐내던 처남이 임금이 용왕의 아들임을 알고 제비를 낚시 미끼로 하여 용샘에서 돌아오는 왕을 낚아채어 죽여 없앴다. 백제 임금이 죽은 후 백제군은 전멸 당하였으며 위례성 주변에 있는 모든 산은 위례성을 향하여 울었다고 한다.
<전설 2>
위례산은 백제군이 고구려군에게 패하여 울었다고 해서 위례산이라 하였다. 울다와 위례를 같은 음으로 보았고, 울다가 변해서 위례로 된 것으로 전한다.
위례산 부근에는 지금도 옛날 백제의 서울을 말해 주는 성이 있는데 그 산 위에는 용이 놀았다는 용샘이 있고 이 용샘은 서해까지 이어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메워져서 바닥이 드러나 보이지만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또 비가 많이 와도 넘치는 일이 없다. 명주실을 몇 타래씩 풀어도 끝이 닿지 않고 비가 오는 날에는 용들이 놀아서 이곳에 와서 놀고 많은 조화를 부렸다고 한다. 용들이 놀아서 산 위에는 언제나 오색의 무지개가 떠 있고 위례성 주변을 지나던 역대의 제왕들은 꼭 산신제를 지내고 갔다고 한다.
<전설 3>
옛날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에는 백제라는 이름을 가진 남매가 살았는데 오빠 이름도 백제이고 동생이름도 백제였다. 동생 백제가 위례성에서 “나는 여기서 도읍을 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오빠 백제가 여기는 “물이 없어서 안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생 백제가 말하기를 “여기 참 직산이 금방석”이라고 하는데 만인이 깔고 앉으면 만인이 쓸 수 있는 물, 즉 자연수가 되기 때문에 “여기에 도읍을 정해도 무방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빠 백제는 “언제든지 용상지지(임금이 앉을 땅)가 앉으면 수만명이 모여 살게 되며 모여 살려면 그 물은 웅수(금강) 뿐이다. 그러므로 부여 백마강을 끼고 도읍을 정하거라” 하고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동생 백제가 “안됩니다. 나는 여기서 언제고 도읍을 할 것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해야 삼국통일이 됩니다. 왕후지지(王侯之地)가 여기입니다.”라고 간곡히 권했으나 오빠 백제는 물을 끼지 않아서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동생 백제는 하는 수없이 오빠의 말에 따라 부여 백마강을 끼고 부여에 가서 도읍을 정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언짢았다. 그의 마음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였으나 오빠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 이곳 부여까지 왔으나 낮에는 백마강이 있는 부여에서 지내다가 밤에는 용으로 변하여 백마강에서 위례성의 용샘까지 와서 이곳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자 오빠 백제는 부여 사람들이 임금 없는 백성이요 장군 없는 군졸인지라 나라의 백성들이 아우성치는 것을 볼 수가 없어 동생에게 “밤낮 이곳에만 있으라”고 하였으나 동생은 듣지 않고 위례성 도읍을 계속 고집하였으며 듣지 않고 위례성 밖에는 없다고 하면서 부여와 위례성 왕복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오빠는 동생을 죽일 결심을 하고 제비 한 마리를 잡아 구워서 낚시의 미끼로 하여 밤새 굶고 돌아오는 동생을 꼬여 제비고기를 먹도록 하여 낚시로 낚았다. 동생 백제는 낚이어 죽어가면서도 통일천하를 이룰 도읍지는 위례성 밖에는 없다고 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전설 4> 도영지와 천석군
옛날 중국 땅에는 농사를 짓고 살다가 추남이라고 해서 쫓겨났던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를 정도로 얼굴이 기묘하게 생겼으며 머리는 한쪽이 절벽이며 몸 여기저기에 털이 나서 사람인지 동물인지 모를 정도로 얼굴이 이상하게 생겼었다.
그는 중국 땅에서 쫓겨나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우리나라로 우연히 들어와 남쪽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마침 지금의 직산지방에서 자리를 잡고 들에서 야생식물을 먹고 살다가 넓은 들을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나무를 깎아 연장을 만들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는 질퍽거리는 곳에다 논을 만들고 메마른 곳은 밭을 만들었다. 들에는 물이 흔하고 풀이 흔하고 풀이 썩어서 땅이 기름져 있었다. 그는 논과 밭을 만들었지만 그곳에 심을 곡식이 문제였다. 그는 그의 고향인 중국 땅으로 달려가서 고향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곡식의 씨앗을 얻어 등에 지고는 강과 산을 넘어 직산 땅에 돌아와 정신없이 씨를 뿌렸다.
그는 농사 이외는 아무것도 몰랐다. 생업에만 착실히 종사할 따름이다. 그 넓은 들을 차지하고 착실하게 전답을 일구다 보니 자기 혼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넓은 경작지가 되어 이곳에 흘러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고 반타작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직산의 이곳저곳에 사람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들이 거의 농경지로 변하자 도적들이 가끔 몰려 들어와서 괴롭히므로 그들은 마을을 지키는 협동체를 구성하기로 하고 서로가 창과 활을 만들어 도적들을 대적하기로 하였다.
자기 땅을 경작하는 소작인들은 무슨 말이든 잘 들었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풀리지 않는 불행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무도 자기에게 시집을 오겠다는 여자가 없었고 그뿐 아니라 여자들이 자기만 보면 짐승이라고 모두 도망갈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오십이 넘도록 혼자였고 가장 쓸쓸한 생활을 하는 큰 지주였던 것이다.
그는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나이를 들수록 외로움에 사무치게 되었다. 그가 심한 고통 속에 삶의 의욕을 잃고 있을 때 자기 마을의 북쪽에 많은 군사들이 찾아왔다. 군사들은 그를 보고 말하기를 우리들은 남쪽에 나라를 세웠는데 우리들의 왕은 온조라고 하며 앞으로 많은 협조를 해달라고 하였다. 그는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하고 있다가 하는 말이 “나는 도적이 아닌 사람은 누구든 좋습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아내를 얻어 살고 싶습니다.”고 하소연 비슷한 말을 군사들에게 하였다. 군사들은 그 딱한 사정을 알아차린 듯 머리를 끄덕거리더니 그길로 달려가서 다음날 아침에 한 여인을 데리고 왔다. 그 앞에 나타난 여인은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그를 보고 놀라지도 않고 싫다는 표정도 없이 동거하는 것을 좋아하는 듯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주었으며 아내는 그 많은 곡식을 백제의 온조왕에게 헌납을 했다.
산성에 도읍을 정하고 군사를 이끌고 나라를 지켜가던 온조는 그로부터 많은 곡식을 헌납받고는 크게 나라의 세력을 늘릴 수 있어 그에게 벼슬까지 주었다.
그러나 그는 새로 아내를 맞이하여 아내를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했던 그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과 온조가 보낸 군사들이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 주었다. 그가 묻힐 때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는 점점 세차게 내리고 천둥과 비가 요란하더니 하늘이 쪼개지는 듯하고 땅이 갈라지는 듯하며 마치 천지개벽을 하는 듯하였다.
이틀 동안을 그렇게 큰 비가 오고 무서운 천둥이 치더니 사흘 만에 날이 들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는 동안 꼼짝도 못하던 사람들이 비가 개이자 그를 파묻었던 묘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묘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묘는 간 데 없고 큰 바위가 섰고 바위 모양이 죽은 그를 닮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죽어서 바위가 되었다고 말하였고 그의 아내는 그 위에 매년 제사를 지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하나 그가 죽은 뒤에는 매년 여기만 비가 오지 않고 흉년이 계속 되었다. 땅이 기름져서 부자 부락으로 통했던 이 부락이 이제는 오랫동안 가난에 허덕이는 마을이 되었다.
그렇던 세월이 흘러 고려 때에 도사 한 분이 이 마을에 들러 말하기를 “흉년이 드는 까닭이 저 바위가 한 해에 4천석의 곡식을 먹어치우니 가난할 수밖에”하였다. 그리고 나선 바위 아래에 못을 파서 바위가 마을을 쳐다보지 못하고 연못에 그 모습이 비치면 다시 부자 마을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못을 파기 시작하였다. 못을 넓고 깊게 파서 바위의 모습이 연못에 비추게 하였다. 그 해부터 이 마을에도 풍년이 들기 시작하였다. 바위가 못생겨서 부엉바위라고 불렀고, 못생긴 바위가 남산에 있다 해서 ‘남산바위’라고 부르는데 이 바위 아래에 팠던 연못은 바위가 거꾸로 보이게 하는 연못이라고 하여 도영지(倒影池)라고 한다. (천안실록)
<전설 5> 유왕(留王)골과 온조왕(溫祚王)
목천면 덕전리에서 북쪽으로 좀 더 오르면 유왕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의 시조 온조가 남쪽으로 옮겨와 위례성에 도읍을 하였을 때 봄과 여름이 되면 이 마을에 머물면서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들을 안위하였다 하여 유왕골이라고 부른다. (韓國地名總覽)
<전설 6> 세성산(細城山)과 온조
천안군 성남면 화성리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약 200m의 낮은 산이다. 산 위에 성터가 있고 성채는 흩어져 있고 동학혁명때 수백 명의 교도들이 이곳에서 죽어 일명 시성산(屍城山)아라고도 한다. 삼한시대에 사람이 살았다는 농성(農城)이 있는 곳이며 산의 동쪽에는 방어책으로 된 바위가 두 개 있는데 이 성에 옛날에 사람이 살 때에는 쌀을 찧던 곳이라고 한다.
백제의 시조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하였을 때 처음 한참 동안은 마한에 속해 있다가 온조가 농경에 세심한 관심을 두면서 새롭게 나라가 형성되어 가는 것을 보고 백제를 따라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백제를 따르게 된 마한의 성이다.
※ AD 396년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략해서 58개의 성을 공취한 기록이 광개토왕비문에 나타나는 바 그 58개의 성 중에 세성이 들어 있어서 이 지방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더욱 필요하며 그것이 밝혀지므로 해서 광개토왕비문 연구가 가일층 선명하게 될 것으로 본다.
7. 위례성 주변의 지명
지명은 옛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말해진 언어의 옛 자취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고 보며 문자가 정착하기 이전의 사실을 가장 잘 보존하고 옛말 그대로를 대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현재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에 남아있는 위례산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지명을 조사하여 백제의 첫 서울 하남 위례성이 우리 고장임을 주장하는 뒷받침으로 할까 한다.
□ 입장면(笠場面)
▷ 도하리(都下里)
글자 그대로 도읍 밑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도아리, 돼리, 도야리, 도감말 등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본래는 직산현의 이북면(二北面)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지형이 물동이 밑에 바치는 또아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삼동면의 하리(下里)를 합쳐서 도하리라고 하였다. 이곳을 중심으로 인근에는 도(都), 궁(宮), 성(城)자가 붙은 마을이 많은 것은 옛날 부족사회 때 진(辰)국의 수도가 있었던 곳, 즉 사학계에서 말하는 목지국(目支國)의 자리로 관련지어 발표하였으나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본다. 위례성이 있었던 곳으로 그 성 밑의 마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 구시랑동(九侍郞洞 : 구시랭이)
백제 때 아홉 사람이 살았다고 해서 구시랑동이다. 백제 때에는 구실향(救實鄕)이라고 하였고 향가에도 소개된다고 전한다.
백제는 처음 건국할 때에 아홉 사람의 신하들로부터 보필을 받아 온조가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칭한 것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건국공신이 된 아홉 사람의 신하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고 해서 구시랭이다. 이로 보아 위례성 내에 있었던 한 개의 마을로 백제 첫 도읍지와 관계를 지어 봄직하다.
▷ 도장골(道場里 : 도장리)
시장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위례산성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백제가 건국되는 초기에 여기에서 많은 군사들이 훈련을 하였다는 도장이 있다고 하여 도장골이 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온조가 만주의 고구려에서 남하할 때의 기록에 보면 많은 백성이 그를 따랐다고 하였고 군대를 이끌고 온 것으로 되었으니 이곳이 바로 그들이 머물렀던 곳으로 본다.
▷적정(赤井 : 불그물이)
입장면 용정리에 있는 마을로 마을 복판에 큰 우물이 있어 이 우물 이름이 붉은 우물(불그물)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에는 이 우물의 둘레를 구리로 만들어 붉게 보였기 때문에 붉은 우물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백제가 이곳에 처음 나라를 세울 때 물맛이 좋아 나라의 임금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구리로 우물의 테를 둘러 보존하고 일반 서민들은 먹지도 못하였으며 임금(온조왕)만이 먹었다고 한다.
▷국수골
입장면 양대리에 있는 골짜기로 국사봉 등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국수(國首)는 나라의 우두머리 즉 임금을 가리키는 말로 백제의 시조 온조가 이곳에서 머물렀고 위례성을 세운데서 그 까닭이 왔다고 한다.
▷ 배삼딩이(배삼고지)
입장면 유리다. 옛날에는 배를 매던 곳 또는 배를 만들던 곳으로 오늘날의 말로 조선소다. 바로 그 조선소가 있었던 곳이다. 조선 말기 때까지도 아산만의 조수가 안성천까지 밀려들어왔다 하니 이곳에 배를 매던 곳이라는 말은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니다. 배삼고지의 고지는 조(祚)와 같은 뜻으로 포(浦)나 진(津)과 같은 것으로 본다.
□ 북면(北面)
▷ 도촌 소학동(道村 巢鶴洞)
성거산 뒤편(북면쪽)에 있는 마을. 성거산에서는 가장 산 속 깊이 있는 마을로 흔히들 하늘 아래 첫 동리라고 하며 소학동(학이 둥치를 트는 곳)이라고 부른다. 도촌(都村)이 변해서 도촌(道村)이 된 것 같다. 도(都)는 도읍지를 말하는 것으로 백제의 서울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 삼국이 서로 항쟁을 계속할 때 도살성(道薩城)이 바로 이곳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곡간리(曲干里)
백제 건국 당시에 군량미를 쌓아 두었던 곳이라고 전한다. 창고를 옛날에는 곡간이라고 불렀다. 대평리에 있는 마을로 지금도 양곡을 감추어 두기에는 가장 적당한 곳으로 천안시에서는 가장 깊은 산골인 오지다.
▷양곡리(陽谷里)
벼장골 또는 벼당골로 부르고 있으며 양곡(陽谷)을 양곡(糧穀)으로 바꾸어 쓰면 바로 알 수 있듯이 군량미와 관계를 지어보면 된다. 북쪽으로는 입장으로 동쪽으로는 충북 진천으로 통하는 산간의 교통요지다. 산간계곡으로 비교적 넓은 들이 펼쳐져서 농사 등이 활발한 곳이다.
▷대치동(袋治洞 : 댓골)
대평리 앞 길가에 있는 마을로 큰 대장간이 있었다고 한다. 백제 때에 많은 무기를 제조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 근방 목천 땅에 철이 생산되었음을 관계 지어 봄직하다.
▷사창(社倉 : 사창골)
명덕리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사창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사창이란 국가의 곡식을 보관하기 위해서 설치한 창고가 있는 마을을 말하는 것으로 백제 건국 초기에 설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문다라니 고개
한자로 쓰면 문현현(門懸峴)이다. 문다라니 앞에 있는 고개로 목천읍지(木川邑誌)인 대록지(大麓誌)에는 진장자(陣長者) 남매가 이곳에 살면서 이 고개에 문을 달고 행인들이 여닫고 다니게 하였다고 한다.
▷부소문령(扶蘇門嶺 : 부소무니 고개)
북면 운용리에서 입장면 양대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 백제 건국 때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하였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다 하며 현재는 서낭당이 있다.
부소(扶蘇)라는 고어가 무엇을 뜻하는 지는 상세치는 않아도 부(扶)는 부여를 뜻하는 것이며 소(蘇)는 산을 뜻하는 것으로 부여의 산이란 뜻으로 본다.
□ 성거읍(聖居邑)
▷사산(蛇山)
성거읍사무소의 사거리에서 천흥부락쪽으로 약 1km 지점에 있다. 성거산의 줄기가 뻗어 뱀산머리를 만들고 직산 쪽을 바라보고 있다. 위례성을 뒷날 사산성이라고 부르게 된 근거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본다. 이 뱀산은 위례산성의 바로 아래에 있는 산으로 백제의 첫 서울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본다.
▷남창(南倉)
읍사무소가 있는 곳으로 남쪽으로 약 1km 지점에 있다. 위례성이 설치된 남쪽으로 부족국가 때부터 있었던 마을로 백제 초기에는 많은 곡식을 쌓아 두었던 창고가 있는 마을이라 남창이라고 하였다.
동서남북에 각기 한 개씩의 창고가 있어서 곡식을 보관하였다. 이중 남창만 있고 동서북창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저리(苧里 : 모시울)
행정구역 명칭으로 천안군 성거읍 저리다. 이곳의 토속지명은 모시울로 불리고 있으나 모시는 일반적으로 옷감에 쓰이는 우리나라 한산지방의 특산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동리의 명칭으로 사용된 모시는 저(苧)가 아니다. 모신다, 뫼신다, 뫼시는 울로 쓰여진 것이 최근에 저로 변자된 것으로 본다.
더욱 그럴만한 사실은 이 지방에는 산이 없다. 다만 낮은 구릉이 있을 뿐인데 저리의 마을 뒤에 약 50mWma 되는 둔삼각형의 산이 있어 옛날 백제가 건국되던 때나 부족사회 때에 있었던 천군(天君)의 치소(治所)였던 소도(蘇塗)의 터가 아닌가 한다.
▷천흥사지(天興寺址)
고려 초기에 세워진 사찰이다. 소실된 연대는 정확치 않으나 조선 초기의 일로 전해지고 있다. 소실된 원인은 알 수 없어도 대단히 큰 거찰로 그 터와 유물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유물은 불에 타지 않는 것으로 보물 354호의 오층석탑과 99호의 당간지주가 남아있을 뿐이다. 당간지주는 매우 훌륭한 작품으로 당초문이 양각된 거대한 석물이며 충렬왕 때의 고승 일연국사의 시주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송남리(松南里 : 소댕리)
성거읍 송남리를 부르는 별칭으로 소댕리라고 한다. 이것은 소댕리가 아니고 쇠당리의 변음으로 소댕리가 되었다. 이 마을에는 쇠로 만든 당간지주가 섰거나 아니면 쇠로 만든 솟대가 있으므로 이루어진 동명이다.
□ 성환읍(成歡邑)
▷안궁리(安宮里)
성환에서 가장 북쪽인 경기도와의 경계에 위치한 마을이다. 넓은 들 옆으로 안성천이 흐르고 한 개의 도읍이 들어설 만한 자리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부족사회, 즉 진(辰)의 도읍지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100년 전만 하더라도 인가가 없는 황무지였다고 한다.
안성천의 제방이 만들어진 것이 40여년 되었고, 그 이전에는 비만 오면 범람하는 지역으로 도시의 성립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천년 이전에는 안성천의 하상이 낮아서 변화가 있었겠지만 아산만의 조수가 이곳까지 역류되어 들어오니 농지로 사용은 불가했을 것으로 보며 다만 조수를 타고 들어오는 배로 문물의 교환은 있었을 것으로 본다.
▷학정리(鶴井里). 대정리(大井里). 독정리(獨井里). 용정리(龍井里)
직산 북부지역에는 정(井)자가 붙어 있는 마을이 많다. 학정리, 대정리, 용정리 등은 신라의 군사단위였던 정(停)의 변음이라고 생각된다.
▷거먹다리
성환읍 안궁리에서 평택 유천리로 넘어가는 안성천에 놓여있는 다리 부교와 같이 일년에 한번씩 다시 놓아야 된다고 한다. 여름 장마에 쓸려 내려가면 늦은 가을에 다시 놓고 다음해 여름에 장마가 없으면 2년는 쓸 수 있었다고 한다.
거먹다리의 뜻은 나무의 밑둥 즉 기둥의 아래쪽 땅속으로 들어가는 부분을 불에 그슬려 썩지 않게 하였기 때문에 다리의 색깔이 검게 보였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나 지금은 그 다리가 놓아졌던 지방의 마을 이름이 되었다. (고대사회의 다리 놓기와 관계 지어 봄직하다.)
□ 호당리 동제(虎堂里 洞祭)
위례산성 아래에 있는 호당리에서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동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아무도 그 시초를 모른다고 한다.)
동제는 정월에 지내지고 있으며 초하루에서 보름 안에 지내지고 있으며 제일(祭日)은 동리의 축제일이다. 행사도 다채롭고 매우 엄숙하다. 부정한 일을 본 사람이나 당한 사람은 제사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동리에 부정(不淨)한 일이 생기면 날을 따로 가리고 제주는 삼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근신하며 그 날을 맞는다.
제수(祭需)도 대단히 풍성하여 통돼지를 쓰고 제순에 따라서 축관(祝官)이 축문을 읽는데 축문의 내용이 백제건국과 시조 온조왕과의 관계 등 더구나 이 지역이 건국하였던 위례성의 옛터임을 알려주는 내용들로 쓰여져 있다. 본시 제문(祭文)이나 제순(祭順)은 한자로 기록된 것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한문을 모르는 세대들의 제사라 한자를 한글로 대신 써서 읽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제문 내용을 아래에 적고 이것을 다시 한자로 고쳐 써 본다.
유세차○○ ○월 ○○삭 ○일 ○○유학 ○○○감소고우 산지령왈
온조구국 용천수석 복축우자 세치풍양 예성유허 호계촌려
노소감안 사무간난 소제질위 백상감화 유신소우 제상보세
구수재해 일촌형태 기다차대 근구비의 신기래격 길일양진
상 향
維歲次○○ ○月 ○○朔 ○日 ○○幼學 ○○○敢昭告于
溫祚舊國 龍泉水石 卜築于玆 歲値豐糧 禮城遺墟 虎溪村閭
老小減安 事無艱難 消除疾危 百祥感華 維神所祐 齊詳報歲
駒遂灾害 一村亨泰 旣多且大 僅具非儀 神其來格 吉日良辰
尙 嚮
앞의 축문 속에 보이는 온조구국 예성유허(溫祚舊國 禮城遺墟 : 온조가 세운 옛나라 위례성 옛터)는 이 지방이 백제건국과 첫 도읍지 위례성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8. 역사의 복원
BC 37년 북부여를 탈출한 주몽(朱夢)이 졸본지역에 이르러 고구려를 건국하고 졸본지역의 족장(族長)인 연타발(延陁勃)의 딸 소서노(召西奴)를 비(妃)로 삼아 두 아들을 두었다. 그 큰 아들이 비류(沸流)이고 둘째가 온조(溫祚)다.
졸본지역에 살던 족장 연타발은 재산을 많이 가진 부호(富豪)로 그가 죽은 뒤에 딸 소서노는 많은 재산을 기울여 주몽의 고구려 건국과 국세 확장에 힘썼다.
그러나 북부여를 탈출하기 이전에 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을 모시고 있으면서 부인 예씨(禮氏. 松妃)를 맞았다. 그 후 예씨부인은 아들(유리)을 낳고 남편인 주몽이 부탁대로 북부여 땅을 탈출하여 모자가 졸본지역의 아버지를 찾아온다.
그러나 아버지인 주몽은 이미 재혼하여 소서노와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으나 첫 부인 예씨는 더 우대하고 송비(松妃)로 하는가 하면 그가 낳은 아들 유리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이에 불만스러운 졸본가족 즉 소서노와 두 아들은 고구려를 떠나 망명행각인 남유(南遊)의 길을 떠나 남쪽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내려와 대방고지(帶方故地)에서 백제를 건국한다.
여기까지를 잠시 분석해 보면,
지금까지 복원하려는 역사는 삼국사기 백제건국편의 온조왕조에 이설(異說)을 중심으로 하겠음
주몽의 생애는 BC58년에서 BC19년까지 이므로 40세를 살았다고 보면 그가 졸본지역에서 고구려를 건국할 때의 나이는 21세가 되던 해다. 그러므로 북부여 땅에 어머니와 아내를 두고 탈출했을 때의 나이도 그와 같은 21살 때로 보아야겠다. 망명하던 그 해에 졸본지역에 와서 고구려를 건국하고 소서노를 비로 맞아 아들을 두었다 하더라도 그 후 주몽의 통치가 19년간 이었으므로 온조의 나이가 18~19세였다. 그렇다면 비류는 더 많은 나이였을 것으로 보아 이는 주몽이 낳은 생자(生子)로 볼 수 없어 삼국사기 서문에 소서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본다.
소서노는 처음 우태(優台)라는 사람에게 출가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고 우태가 죽어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와 있다가 주몽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주몽은 북부여에서 온 초취(初娶)인 송비(松妃)와 아들 유리를 더욱 중히 여겨 각각 비(妃)와 태자(太子)로 하니 이에 불만스러웠던 소서노의 가족은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대방땅에서 처음으로 백제를 건국하였다.
대방고지에서 백제를 건국한 그들은 낙랑과 말갈의 공격에 견딜 수 없고 국가의 보위가 어려워 더욱 남쪽으로 내려온다. 그들은 대방고지를 떠나 예성강과 임진강을 건너고 여기서 해로(海路)로 경기만을 거쳐 아산만의 밀두리에 이른다. 그들은 조수를 타고 안성천을 거슬러 올라 배를 대고 이곳에서부터 내를 타고 도보로 아홉 명의 신하와 더불어 용인 부아산(負兒山)에 오른다.
부아산에 오른 이들은 주변의 지형과 지세를 살펴보고 그곳에서 얼마 덜어지지 않은 직산지방을 도읍지로 적당하다고 정한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의 성환, 입장, 성거, 직산과 안성의 외곽과 평택의 남부지역이다. 그들이 이 지역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위례성이다. 중심지역인 직산은 넓은 평야가 펼쳐 있고 안성천이 대하가 흘러 낮은 구릉조차 없다. 인간 활동에는 편리해도 전쟁과 내란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할 자연의 방패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읍성(邑城)인 위례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북면 위례산에 산성을 쌓고 국가와 백성을 보위하게 된다. 이 산성이 바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위례산성이다.
그 후 온조는 십신(十臣)의 보필을 받으면서 위례성에서 시정(施政)을 하다가 BC 6년에 뜻하지 않은 전란을 맞아 산성으로 백성들을 옮겨 항전하고 어머니 소서노를 잃고 많은 전사자를 내면서 전란이 멎자 BC 5년 정월에 한산(漢山)지방으로 서울을 천도한다.
이상이 직산 위례성의 역사를 간추려 본 내용이다.
□ 백제의 천도 과정
▷직산 위례성(BC18~BC5 : 온조왕). 직산지방(13년간)
▷한산(BC5~AD371 : 온조왕~근초고왕). 광주지방(376년간)
▷북한산(AD371~AD475 : 근초고왕~개로왕). 서울지방(104년간)
▷웅진(AD475~AD538 : 문무왕~성왕). 공주지방(65년간)
▷사비성(AD538~AD661 : 성왕~의자왕). 부여지방(123년간)
9. 결 론
이상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백제의 첫 서울은 우리 고장 북부의 직산, 입장, 성환, 성거지방으로 보며 더 확대하여 안성의 남단과 평택의 남쪽까지로 본다. 아직은 위례성의 옛터에서 건국 당시의 유물이 나오지 않았으나 이것은 이곳에 대한 집중적인 발굴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당연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현재 노출되어 있는 유적이나 유물로도 밝혀낼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앞으로의 연구는 발굴과 자료채집에 전력을 다하여야겠다.
문헌에 다시 몇 군데를 찾아보면 동국여지승람 광책목(廣冊牧)의 건치연혁(建治沿革)에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십삼년 자 위례성 이도지(十三年 自慰禮城 移都之)라고 했다. 다시 풀이하면 온조왕 13년에 위례성으로부터 이곳으로 서울을 옮겼다는 뜻이다. 그 위례성 즉 광주로 옮기기 전의 위례성 그곳이 바로 우리 고장이다.
일인(日人)학자인 금서(今西 : 이니마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에서 계왕(契王 BC18 ~ AD346)까지는 전혀 믿을 수 없는 글이라고 하였다. 이때의 기록은 모두 꾸미고 가꾸어진 것이며 억지로 역사의 체제를 기록한 듯 하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AD 346~375의 근초고왕 때 와서야 백제의 이름이 일본서기에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말이다. 일본의 역사기록에 없다고 그 역사를 부정한다면 한국사는 일본의 주변(周邊)국사(國史)란 말인가.
또 문헌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우리나라의 기록을 믿으려 하지 않고 고고학적(考古學的)인 입장만 내세워 고기(古記)를 믿지 않고 신화화하고 전설화하는 것도 금서(이니마시)의 주장과 다를게 없다고 본다.
물론 삼국사기라고 전폭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터무니없이 배타적으로만 나가면 우리나라 초기역사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믿을 수 있는 부분은 듬뿍 믿어주고 믿을 수 없는 부분은 더욱 연구하여 받아들여 보았으면 한다.
이제 간단한 지표조사도 끝났다. 여기에서 많은 소득도 얻었다. 승석문토기나 초기 철기시대의 쇠낫이나 쇠창도 얻었다. 이제까지 문헌에만 의지하던 위례성 연구가 고고학의 뒷받침을 받았다. 다시 말해서 문헌과 유물이 일치한 셈이다.
이웃 중국에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를 실사(實史) 속에 편입하고 요순(堯舜)의 고사(古事)를 역사 속에 삽입하고 있다. 우리도 믿는 쪽으로 기울여보자.
삼국유사에 밝힌 바와 같이 위례금직산(慰禮今稷山)이다. 고로 백제의 첫 서울은 우리 고장이다.
후 기
우리는 오늘 이 시점에서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 살펴보고 먼 훗날을 바라보는 역사의식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또 향토사 연구에 디딤돌이 될까 하여 여기 위례성에 대한 글을 썼다.
학술적인 논문도 아니고 탐구보고서도 아니며 다만 향토역사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고 동학(同學)을 위하여 눈에 뜨인 그대로 귀에 들린 그대로 모아 썼을 뿐이다.
인용된 책자
삼국사기(1145.김부식), 삼국유사(일연), 동국여지승람(1432), 문헌비고(1770.홍봉한), 역사지리(1961.우락기), 아방강역고(정약용), 위례고(1974.이병도), 직산현지, 목천현지(안정복), 삼국시대 개시에 대한 일고할(김원룡), 백제구도직산산고(1974.김재붕), 한국사(1965), 국사대사전(1962.이홍직), 천안군지(1984), 비류백제와 일본고대국가 건국(김성호), 광개토왕비문, 진단학보(1934)
첫댓글 지지여부를 떠나 저자가 방송을 통해 알린 내용을 올립니다.....
풍납토성은 도요지였기에 많은 유물이 있던 것이고,
아직 왕궁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주장자들조차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풍납토성에 왕궁이 있었다면 먼저 왕궁 유적이 확인되어져야 하고,
서벽의 존재를 입증하여야 하며, 존재하였다면 왜 다른 토성벽들과 달리 없어진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또한, 풍납동은 퇴적지로써 많은 모래가 쌓이는 곳(그래서 도요지가 많았음)이었기에 주변의 흙(뻘흙이라 불리는 흙을 포함)을 올려 판축법으로 만든 것이지, 연인원 백만명을 동원하여 바다에서 뻘흙을 가져다 만든 토성(이 글귀가 이어지는 내용)은 아닙니다.....
풍납토성 학술용역 보고회에서 주장하시는 박사님이 오셨기에 공식적으로 발굴과 발표에 대해 제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말씀해달라 했는데 고개도 못드시더군요.....
얼굴을 들수 없었던 이유는 다른것 아닐까요? 제가 알기론 풍납동주민들의 재산권침해문제로 민심이 흉흉하니 비켜선것으로 보이는데, 마치 풍납토성발굴결과발표에 문제점을 시인한것처럼 하면 좀 그렇군요.
풍납동주민들의 반발때문에 그런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사죽백님......그 보고회는 광화문에서 열린 관계로 풍납동주민들이 몇명밖에 없었고, 문화재청, 서울시청, 송파구청 직원분들과 주요 관계자의 모임이었습니다.....뿐만 아니라 풍납토성 국제학술대회를 날짜까지 다 잡아놓고 개최한다더니 발언 직 후 사회자는 날짜가 잡혔다, 문화재청은 안 잡혔다 말을 바꾸는 해프닝까지 있었고, 이젠 언제하는지 조차 모르게 되었더군요......그리고, 풍납동 일대에 도요지가 많았던 것은 이 카페회원님이라면 많이들 알고 계시는데,,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도요지가 풍납토성주변에 많이 있다고요...??????????
다비도프님만 많아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까??????????!!!
풍납동이 도요지였다고요? 정말인가요? 풍납토성에서 도요지가 발견되었나요??? 처음 들어 봅니다.
목탄을 사용하였던 직접 나무를 태웠던간에 많은 양의 나무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흙과 나무를 원할히 공급받을수 있는 곳에 위치하는 것이 상례인데 풍납토성내에 있다니 ??
산성내에 적석총이 있다는 위 글의 주장..아주 재미있군요....
집안등지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초기적석총(무기단식)의 입지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또 연천등지에서 확인되고, 충주댐수몰지구에서도 발굴조사된 적석총의 입지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산성 내부 즉 산속에 적석총이 발견되었다니... 이것이 사실이면 정말 대단한 발견일것입
한쪽에서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정하는데 위의 논문을 발표한 분은 초기기록을 인정하여 백제의 위례성을 비정하고자 한다.
경북대학교 주보돈 교수님의 경우에는 3세기 후반까지 백제와 신라는 삼한 소국의 하나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고고학적으로 그 위치를 판별함이 불가능것으로
삼국의 초기기록을 인정하고 싶다면 백제 건국초 온조의 위례성의 위치를 알고 싶다면 그 동쪽에 있는 낙랑의 위치는 어디인가 비정해 보아야 한다.
풍납토성에 왕궁이 있었다는 주장은 대체 어느 교수님이 주장하시는 학설입니까?? 신문으로 일치된 의견이니 뭐니 하는데, 정작 주장자들조차 나는 왕궁이 있었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 기자가 그렇게 쓴 것뿐이다 라고 하고,, 신동아 기자님이 지면을 할애해 줄 테니 풍납토성엔 왕궁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글을 써보시라 하니, 도망가셔서 황당했습니다 하고....주장하는 학자가 없는 것 같은데, 학계의 일치된 의견이라 하는 것은 그 역시 언론플레이로 보이는 군요.....여러분들 중에 풍납토성에 왕궁이 있었다고 주장하시는 교수님있으시면 꼭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석촌동기단식적석총의 피장자는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풍납토성이 전면 발굴되었을까요? 일부 극히 일부만 발굴된 상태에서 왕궁이 없지 않는가..라고 하는 것은 우문이라 판단합니다. 정히 그런 주장을 하려면 파보면 답이 나올것입니다. 그러면 풍납동 주민들은 모두 이사가야 할텐데 다비도프님이 책임질수 있나요? 그많은 보상금을 다비도프님의 생각엔 어찌 만들어낼수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풍납토성(제가 생각하기에는 토성이라기 보다는 제방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의 가장 중요한 위치, 그러니까 그들(발굴자)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한 토성 내의 가장 중앙부분인 경당부지를 발굴하면서 어떤 해프닝이 있었는지 알고 하시는 말씀인지요, 최초에 연못터(그들의 생각은 왕이 거닐던 인공 연못)라고 했다가 불과 2-3개월 후 목탑터로 바뀌어 언론플레이(이는 그들의 발표내용을 보면 익산 미륵사지터를 거의 유사하게 복사한 것 같은..)를 하면서 권오영 교수가 광분을 했다가 나중에는 우물터로 발표하는 불과 6개월 사이에 두번 번복하는 헤프닝을 벌인 곳입니다.
또한 미래마을부지는 현재 90%이상 발굴을 완료했으나 깨진 기와조각 및 돌맹이, 움집 등 원시시대 보통 물가 근처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던 생활터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이 대부분이며 이에 따라 현재 발굴에 따른 발표도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풍납토성 중앙이라고 하는 위치를 두군데 발굴했으나 왕궁터라고 확신할 만한 유물은 보이지 않는데 더이상 무슨 기대를 할 수 있는지요, 그들은 단지 발굴이라는 미명하에 국민의 세금을 탕진하고 있을뿐입니다.
저는 풍납동에서 미래마을 및 경당부지 발굴을 10년 동안 지켜본 사람입니다.
청사죽백님 풍납토성 일부 발굴이라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발굴이 끝난 상황입니다. 그들의 발굴 행태를 보면 국민들의 피같은 세금으로 자기들의 철밥통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생각치않는 집단으로 밖에 보이지 않네요,
장군멍군님/ 엄연히 존재하는 한성백제의 유구와 유적 유물을 가지고 어거지식으로 아니올시다하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는 주장일뿐입니다. 아래 다비도프님의 답글에 제가 달아놓은 댓글중 세번째것이 장군멍군님에 대한 답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신동아가 아니고 월간중앙입니다. 제가 월간중앙에 풍납토성은 백제왕성이 아니다라고 쓴글에 대해 반박을 해 달라고 월간중앙 이항복기자가 신희건, 김태식기자, ,,,,,,에게 부탁을 했는데, 거절한 것으로 들었습니다.
참..어이없군요...도요지라서 유물이 많이 나왔다니? 깨진 사기조각이면 다 같은건가요? 도요지란 말도 처음들어보거니와 이글을 쓰신분들은 풍납토성 발굴보고서를 기본적으로 읽어나 보고 쓰신건지 의심스럽군요..직산이 위례라는 설은 기본적으로 증거가 없지않습니까? 뭐 나온 그럴듯한 유물이나 있는건지? 그리고 풍납토성일대를 아직 일부만 발굴할 수 박에 없는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왕궁터가 발견 안됏다는 이유를 들다니? 부여나 공주에서 조차 왕궁텨는 정설이 없는걸루 아는데?
풍납토성일대가 위례성이라는 사실은 거의 90%이상 인정되는 사실 아닌가요? 뭐 이건 위례성 왕궁터란 비석이나 푯말이 나와야 인정할 기세군요..ㅉㅉㅉ
한성백제 초기에 문자도 모르는 무식한 수준이라고 판단하는것도 문자가 존재하였다는 근거가 없기에 그러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위 님의 댓글을 적용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위 두분님....먼저 발굴보고서 말씀하셨는데, 주장자들 조차 아직 왕궁이라 볼 수는 없다 하였는데, 그 발굴보고서를 읽으신 분들은 왜 오버되는 건지 참 이상하군요.....그리고 90%이상이라 하셨는데, 풍납토성 <일대>라는 말로 두리뭉실하게 넓히지 마시고, 풍납토성에 왕궁이 있다고 주장하시는 교수님들 명단을 제발 꼭 좀 적어주십시요......어느 분이 남아 계시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조차 왕궁이 있다고 언론에 발표하고, 주민들에게 설명해오던 미래마을부지,, 발굴결과 그 곳엔 왕궁이 없다고 사실상 인정하였습니다.....더 글을 써주시면 문제점들을 더 거론해보지요......그리고 비약적인 말씀부터 하지 마시고, 저의 맨 위 두번째 댓글에 대한 반론부터 먼저 해주시기 바랍니다.....최우선적으로 그것부터 해결되어져야 하기 때문에.......
다비도프님 연구소측에서 왕궁이 있다고 언론에 발표하였다고요?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성이라는 설명을 확대해석한것 같은데요... 여기서 갑론을박도 안되는 애기를 거듭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피곤한 일이 될것입니다.
다비도프님//
엄연히 존재하는 한성백제의 유구와 유물을 억지로 없다고 아무리 주장한들 존재하는 것을 엎을수 없답니다. 님의 답글에 제가 올린 댓글중 3번째의 댓글로 답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이런식으로 역사나 고고학등 학문을 가지고 논하기보다는 70년대 국유지시절에 개발에 앞서 발굴을 통해 토성을 확인하고도 토성내부가 유적임이 뻔한대도 그 토성내부땅을 일반인에게 불하 분양한 행정ㅊ
행정청의 행정행위에 대한 문제를 삼아 나가는 것이 풍납동주민들의 재산권침해문제를 풀어내는 지름길이 아닐까합니다...
연구소의 학예관이나 연구자들에 대하여 압박하는것으로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을것이오니 좀더 현명한 지혜로운 방법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청사죽백님, 연구소측에서 왕궁이 있다고 언론에 발표하였다고요?라고 말씀하신 걸로 보니,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물론, 님께서도 현 발굴로는 왕궁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거네요.....논의가 이쯤되면 항상 행정청 탓을 하라 하지요.....문제는 행정청이 문제를 해결하려 해도, 잘못된 내용으로 언론플레이를 해가며, 문제해결에 초를 치시는 분들이 있어, 모든게 난항을 거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건 당연시해도 괜찮다는 것인지.....청사죽백님께서도 다른 학설에 대한 비판을 하시는데,, 학예관이나 연구관들을 압박한다 하시니 쑥스럽군요......
미래마을 지도위원회하던날 연구소 소재윤씨가 적심건물을 왕궁이라고 발표하길래 제가 적심건물이 나왔다는 것은 초석이 있었다는 뜻이지만, 왕궁이라고 말하는것은 비약이라고 했었죠. 그런데 현장을 조사해 보니 적심위에 실제로 초석이 놓인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내린 결론은 미래마을의 적심건물은 초석이 없이 적심위에 바로 기둥을 세운 좀은 이해하기 힘든 건물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