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창한 늦가을 한낮, 한적한 산 밑 오솔길 따라, 아내와 손잡고 걷기 운동을 나섰다.
바로 옆에는 맑디맑은 강물이 넘실대고 그 속엔 모래 속에 반만 묻힌 다슬기, 돌에 찰싹 붙어 숨바꼭질 놀이가 한창인 다슬기, 흐르는 물 따라 오르내리는 크고 작은 붕어와 이름 모를 물고기 떼가 분주하고, 주변엔 사람 키보다 더 큰 갈대들이 살랑대는 바람결에 목을 까딱까딱 장단 맞추며, 높고 낮은 홀씨 음표들을 파란 하늘 위로 흩는 고요 속에, 흐드러진 들국화는 기우는 햇볕을 온몸에 휘감고 사랑놀이 한창이다.
가던 걸음 멈추고 불어오는 짙은 송향(松香)에 아내의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려는 찰나 바로 옆에서 푸드덕, 푸드덕, 꿩 두 마리가 날아가는 바람에 너무 놀라 아내가 주저앉고 말았다. 놀랠 예고의 기미(幾微)도 주지 않고 날아갔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먼저 와 있던 그놈들을 놀래준 응보(應報)가 이토록 빨리 왔음을 생각하며 그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단 말같이 길 위에 나란히 앉아 쉬면서 얼굴 서로 보며 하하, 호호, 이렇게 티 없이 웃어본 것도 얼마만이었던가! 아무튼, 놀램과 웃음을 주고 달아난 응보(應報)의 선물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일이다.
나는 농촌에서 자란 촌사람이라 어렸을 적부터 꿩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아내와 같이 놀래긴 했지만 주저앉을 만큼 놀래진 않았다. 어려서부터 그놈들과는 너무 친숙한 사이가 되어있어 모처럼 그놈들을 보는 마음은 놀람보다는 반가움이 더 컷음이 사실이지만 아내에게는 이실직고할 수 없어 웃고만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5월이 되면 갈잎 헤치며 꿩 알 찾아다니던 아련한 기억, 눈 내리는 겨울에 콩알을 파서 싸이나(청산가리)를 넣고 양초 녹여 입구를 막고 꿩이나 비둘기들이 자주 오는
양지쪽에 놓아두면, 그것을 먹고 날아가다 죽고, 몇 발짝 기어가다 죽어 주위를 다니며 죽은 꿩을 주워서 고기를 즐기던 추억과, 늠름한 자태와 화려한 색상의 장끼를 특히 좋아해서 우렁차게 울어댈 때면 우는 곳을 찾아 헤매기도 했든 어렸든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 큰형수님은 바느질하시면서 나를 옆에 앉히시고 도배 초배지를 오려서 실로 꿰매어 공책을 만들어, 연필도 없어 숯검정으로 한글을 깨우쳐 주셨고, 덧셈 뺄셈까지 익숙하도록 깨우쳐 주셨다.
초등학교 입학하여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은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 것들뿐이어서 공부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집에서도 책 한번 볼 생각을 않고 놀기만 했다.
비가 몹시 내리던 어느 날 큰형님이 집에 계시면서 보니 동생이 책 한번 보는 일이 없이
놀기만 하는지라 옆에 붙들어 놓으시고 받아쓰기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부르시는 대로 일필휘지로 답을 썼다.
이를 보신 형님께서 이번 문제도 답을 맞히면 공부하란 말 하지 않겠다. 하시며 “꿩이 꿩꿩 웁니다.”를 써 보라신다.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듣도 보도 못한 글자여서
얼굴 빨개서 고개 숙이고 있는데, 형수님이 윗방에서 오시면서 “쌍기역 밑에 우자를 쓰고 이응을 지우고” 리듬을 만들어 노래를 부르시며 밖으로 나가셨다.
귀가 번쩍 띄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쌍기역이 도대체 뭐지? 기역은 알겠는데!”
“쌍둥이, 쌍기역....“쌍 자 들어가는 말을 생각했다.”
“ 쌍둥이란 둘이 함께 태어난 모습도 같은 애들 일 텐데.....”
“그렇다면 같은 기역이 2개의 쌍둥이?"
“아 그거구나!” 신바람이 나서 자신 넘치게 썼다. [ㄲㄲ]. 일단 커닝을 해서 쌍기역 두 개는 썼는데..... 우 자 에서 이응을 지우고....?
“그러면 우자를 한 개 써야 되나 아니면 두 개를 써야 되나? 쌍기역이 두 개인데.... 머리가 복잡해지네!”
형님은 다그치지 않으시고 밖으로 담배를 태우러 나가시고 혼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대로 써 보자 [우우]에서 이응을 지워라!” [꾸꾸]!
여기까지는 대 성공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뭐라 읽어야 되나?”
“꾸꾸?” 고개가 갸웃해 진다. “꾸꾸 이 꾸꾸 웁니다?”
“아닌데! 꿩이 꿩꿩 운 다라 했는데?”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형수님이 밥을 지으시려고 쌀을 가지러 오시다가 그것을 바라보시더니
“오른편에 어자 쓰고 이응을 떼어서...” 한마디 하시는 중에 형님이 들어오시어 말을 끝맺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셨다. 얼굴에 미소가 스미며 자신이 생겼다.
“그거였구나!” 꾸자 오른편에 어를 쓰고 이응을 지우면 [꿔], [꿔꿔이 꿔꿔 웁니다.] ‘떼어서’를 ‘지워서’로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써 놓고도 읽기가 쉽지 않고 어색하기 그지없다.
“첫 번째 꿩은 한자인데 나는 왜 두 자가 됐지? 아하 쌍기역은 두 번 쓰는 게 아니고 기역(ㄱ)이 두 개, 쌍기역(ㄲ) 이구나!” [꿔이 꿔 꿔 웁니다] 안도의 한숨 쉬면서 숙제의 완성을 의기양양하게 형님 앞에 보여 드렸다.
형님이 보시더니 허허 웃으시면서 “참 잘 썼다. 그런데 꿩이라 했는데 너는 꿔라고 썼네?”
형수님을 부르시면서 “여보, 얘 귀가 이상한가 봐! 꿔이 꿔꿔 운대!”
“내일 병원에 데리고 가서 진찰받아봐!”
선생님(형수님)이 가르쳐 주셔서 커닝까지 했으니 백 점을 자신했는데 귀가 이상하다?
형수님이 오시더니 “벌써 답을 보여드렸군요!” 마지막 단계를 가르쳐 줄 기회를 엿보셨던 형수님은 형님이 한눈팔 기회를 잡지 못하셔서 잠깐 부엌에 나가셨을 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저녁이 되어 온 식구가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가 식탁에 올라 아버님이 한 말씀 하셨다. “모르는걸. 배워서 익히는 게 공부야!” “너 이제는 꿩 자 쓸 수 있지?”
부끄럽고 창피해서 얼굴만 수그리고 있었다.
사실은 그때까지도 정답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형수님께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시면서 형님께 핀잔을 주셨다. “시험이란 상대에 맞게 문제를 내야 지,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은 좋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해요!” 형님이 응수하셨다.
“부르는 대로 다 쓰는데 책잡을 게 없으니 그랬지!”
그때의 무안함과 꺼져버린 자만심이, 오랜 세월이 흘러도 또렷이 가슴에 남아 ‘아는 체’를 두려워하여 확실히 알지 못하면 아예 모른다고 말하는 버릇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밑에 붙이면” 시험 마지막에 듣지 못하고 짐작으로 치렀던 받아쓰기의 일화는 우리 집안에 신선한 웃음을 선물해 줬고, “이응을 떼어서 밑에 붙이면” 완성을 (100점) 뜻하는 말로 ‘좋은 생각을 떼어서 풀리지 않는 곳에 붙이면’ 이란 뜻으로 내가 종종 쓰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이 말을 생각하는 동안은 어떤 결정을 할 때, 좋은 생각을 떼려고 숙고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강산이 7번이나 변한 옛이야기이지만 꿩을 보면 지금도 그 기억이 반갑게 나를 맞는다.
첫댓글 그 옛날의 추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늦게모심 죄송합니다.
까마득한 옛날얘기
지금도 엊그제처럼 생생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