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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의건국과 이세민의 등장]
3차에 걸친 고구려원정 이 모두 참담하게 끝나며 수양제 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졎다 이미 그의말은 무시되기 시작하였으며 국가는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할수있는것은 애첩과 술이나 마시는게 전부였다. 취하면 아무데나 쓰러지고 깨어나면 또마시고,,
그러던 어느날 애첩과 목욕탕에 있다 반란군의 손에 살해되니 (618) 제국은 멸망하고 군웅할거상태가되었다.
서북방 에는 이궤 (李軌) , 설거 (薛擧) , 양사도 (梁師都) 가 있었고. 하북에는 두건덕 (竇建德) 이 하(夏) 나라를 세우고 있었고, 강남에는 소선 (蕭銑) 과 두복위 (杜伏威), 보공석 (輔公 )이, 동부 낙양에는 왕세충(王世充)이 정(鄭)나라를 자칭하고있었다. 이연은 태원의 유수를 맡고 있었다.
북쪽으로 돌궐과 인접하고 남쪽은 장안과 낙양에 연결되는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이연은 돌궐과 싸워 패배만 거듭했다.
책임을 물어 극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617년 차남 이세민의 강권을 받은 이연(당고조)은 수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세민의 눈부신 활약으로 그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고,
11월 장안에 입성했다.
장안의 상황은 이연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는 장안에 근거지를 둔 무천진 군벌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장안을 상처 하나 없이 점령했다는 사실은 중요했다. 장안은 서위에서 북주, 수나라로 이어지는 3 왕조의 수도였다. 여기에는 유형무형 의 귀중한 축적이 있었다.
관청의 창고에는 재화 ㆍ식량 ㆍ무기가 저장돼 있고, 조정에는 거의 완전한 관료진과 전투부대가 갖춰져 있었으며, 그들을 곧바로 동원할 수 있었다.
왕세충은 서역 출신 외국인으로 지략이 뛰어나고 아첨을 잘해 양제의 눈에 들어 졸지에 출세한 자였다.
이밀을 격파한 뒤 그가 사기충천해 곧바로 낙양의 관료들에게
수황제에 옹립된 양동을 폐하고 스스로 천자의 제위에 올라 국호를 정(鄭)이라고 했다. 아무리 무기력한 낙양의 관료라고 해도 젊은 외국인에게
황제의 자리가 찬탈당한 것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즈음, 이세민은 유무주와 송금강을 개휴 (介休) 에서 격파하고
왕세충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향했다.
두군웅은 충돌하고,, 이세민에게 패한 왕세충은 낙양성에 숨었고, 하북(河北)에 근거지를 둔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두건덕은 군대를 이끌고 낙양을 향했다. 기회가 있으면 낙양을 손에 넣고 확고한 근거지로 삼으려는 희망을 품었다.
그는 이세민과 왕세충이 싸우는 틈바구니에서 어부지리를 얻고 싶었다. 두건덕이 멀리 하북에서 낙양으로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세민은 낙양에 보루들을 쌓아 철저히 포위하고 본대를 이끌고 두건덕을 맞이한다.
둘간의 대치상태가 두 달 동안 유지되는 가운데 멀리서 온 두건덕 군대는 식량이 떨어져 갔다.
이렇게 되면 운명을 하늘에 걸고 결전을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다. 두건덕은 전군을 투입해 이세민 진영을 육박했다.
당군은 충분히 휴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용기백배하였고 이세민은 기병의 선두에 서서 적진을 돌파해 배후에 나타나 앞뒤에서 공격을 가했으므로 두건덕은 패하고 말았고, 낙마해 그의 군대 5만과 함께 포로가 됐다. 이세민은 왕세충이 보라는 듯이 두건덕을 밧줄로 묶어 낙양성 아래를 끌고 다녔다.
압도된 왕세충은 단념하고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7월 9일 이세민은 당당하게 장안으로 들어왔다. 화려한 승전 개선식이 벌어졎고 북중국은 이세민의 영향아래 놓이게되었다.
[2. 현무문 사건]
621년 당 고조가 이세민 에게 낙양을 중심으로 중원 동부의 문무 행정을 담당하게 하자 이세민의 군사력을 두려워한 황태자, 형과 동생 원길이 암살 음모를 꾸몄다.
명성은 세민이 단연 높았고, 형은 동생이 자신을 몰아낼까 두려워했다. ‘자치통감’은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4일 이른 아침이었다 .
이세민의 형인 태자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이 심문을 받기 위해 궁중의 현무문으로 들어섰다. 함께 온 정예병 2000명은 문 밖에 남겨둔 채였다.
경비가 엄중한 궁성에 복병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임호전까지 와서야 비로소 이상한 공기를 느낀 두 사람은 서둘러 말을 되돌리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이세민이 말을 타고 나타나 둘을 불렀다. “건성 형! 원길 동생! 어디로 가시는지요.”
그러자 이원길이 이세민 에게 활을 쏘려고 했다.
하지만 놀라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시위가 당겨지지 않았다. 두세 번 더 시도했는데도 그러했다.
이세민이 활을 쏘았다. 태자인 형은 말에서 떨어졌고, 바로 즉사했다.
이세민 휘하의 위지경덕이 이원길을 향해 활을 정조준했고,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화살은 이원길 등에 정통으로 꼽혔고,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병사를 보내 이건성의 다섯 아들과 이원길의 다섯 아들을 남김없이 죽여 후환을 막았다. 이세민이 혈육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감금하며
황제(당 태종)의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이 초원에 퍼졎다 태종의 상황을 간파한 동돌궐의 힐리가한은 10만 기병을 이끌고 장안 부근까지 진격해 왔다.
장안성 안에 동원할 수 있는 장정은 겨우 수만에 불과했다. 힐리가한 은 위수 (渭水) 의 편교까지 진출한 후 사신을 성안으로 파견했다. 당시 정황은 압도적으로 동돌궐이 유리한 상태였다. 당 태종은 어떠한 굴욕이라도 참고 전쟁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는 장안성에 있는 금은 비단 등 재물을 모두 끌어 모아 힐리가한에게 바치고
화의를 요청했다. 출중한 남자의 황제로서의 첫 출발은 이렇게 처참하고 초라했다.
[3,초원을 평정한 이세민]
627년 초원에 자연 재앙이 밀어닥쳐 돌궐에 기근이 찾아왔고, 정치적 문제가 발생했다. 초원에서 힐리 칸의 통제력이 급격히 와해되고 있고,
그 휘하의 여러 부족도 흩어지고 있었다. 신강성 동북부와 몽골 북부에 철륵(鐵勒) 이라고 통칭되는 15개의 부족이 있었다.
그 선조가 흉노(匈奴)였던 그들은 남북조시대 후기에 돌궐에 복속됐다. 돌궐은 다시 동,서로 분열되엇는데 설연타와 회흘 2개를 비롯한 여러 부가 서돌궐의 힘이 약해지자 동돌궐의 힐리 칸 휘하에 들어갔다. 힐리 칸은 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징수했다. 폭설의 자연 재해가 닥쳐 생산량이 급감했는데도 역시 그렇게 했다.
불만이 팽배했고, 627년 설연타와 회흘 두 부가 주동이 되어 철륵 여러 부가 힐리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는 와중에 거란족 일부가 당나라에 투항했다.
그러자 힐리 칸이 제안을 해왔다. 투항해 온 거란족을 달라는 것이다. 냉철한 당 태종은 그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당에 투항해 온 유목민 부족을 돌궐에 인도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초원의 모든 부족들에게 당 황제의 신용도가 하락할 것이며,
향후 누구도 당에 투항해 오지 않을 것이다. 태종은 신용을 잃는다는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 잘 알고 있었다.
돌궐의 북방 변경에 사는 여러 부족이 힐리 칸에게 등을 돌리고 설연타의 추장 이남 (夷男) 에게 붙었다. 동쪽으로 만주에서 서쪽으로 서돌궐 접경지대까지
산재한 대부분의 유목 부족이 설연타부의 아래 뭉쳤다. 629년 11월 23일 힐리 칸의 세력이 현저히 약해지자 태종은 초원으로 10만 대군을 파견했다.
630년 정월 총사령관 이정 (李靖) 의 기병부대 3000명이 정양(定襄: 내몽골 허린킬) 에서 안개가 자욱한 새벽무렵 힐리 칸의 군대를 급습했고,
추격해 음산(陰山)에서 격파했다.
10만을 참수했고, 힐리를 따르던 추장들과 그 수하 5000명을 포로로 잡았고, 가축 수십만 마리를 노획했다. 사로잡힌 힐리가 5만의 포로들과 함께 장안으로 들어왔다. 당 태종을 끊임없이 조여 왔던 돌궐이 제거됐다. 그것은 고구려에 재앙이었다
[ 4.당나라 서토마저 정벌하다]
토욕혼 (吐谷渾) 은 몽골계 유목민인 선비족(鮮卑族)이 세운 국가다. 그들은 장성(長城) 지대에 살다가 티벳 고원의 동북부로 쫓겨나
현지인을 제압하고 국가를 세웠다.
북위(北魏) 때부터 실크로드의 주요 통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국제 중계 무역은 토욕혼의 주요한 재원의 하나였다.
당시 북위의 사절은 토욕혼의 중계에 의하지 않고서는 서역으로 갈 수 없었다.
당태종은 634년 이정 (李靖·571∼649) 을 시켜 토욕혼에 대한 대규모 정벌을 감행했다.
이정은 수 왕조에서 오랜 관직의 경력을 갖고 있었다. 당 왕조가 북중국을 통일한 이후 이정은 강남의 여러 반란 정권을 평정했고,
629년 말에는 동돌궐 과의 전투에 참전했다. 이정은 토욕혼 원정에 설만철 이 동행할 것을 청했다. 설만철은 기병전의 명수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돌파해
상황을 역전시키는 카리스마 넘치는 무장이었다. 하지만 당군이 토욕혼의 본거지에 들어가는 데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토욕혼이 들의 모든 풀들을 불태워서 당군의 보급품 현지 조달이 어려워졌다. 군사들이 주리고 마초가 부족해 말들이 파리해져 갔다.
청해호 로 흐르는 대비천으로 물러나 더 진격해야 될지를 놓고 회의를 했다. 반대하는 장군들도 있었지만 진격해 적지로 깊숙이 들어갔다.
설만철은 경기병 수백을 이끌고 토욕혼군을 향해 선봉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토욕혼 기병 일부가 말에서 내려 장창 (長槍) 을 나란히 세운 보병 대열을 만들었다.
그것은 양군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와중에 이뤄진 순간적인 기병의 보병 전환이었다. 설만철 이하 기병들이 빽빽한 창들의 가시밭에 부딪쳤다 .
뒤따라 오던 당의 기병들도 차가 밀리듯 밀려 정체됐다. 당나라 기병이 순간적으로 기동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측면과 후면으로
토욕혼의 또 다른 기병이 몰려왔다. 당군은 포위된 상황에서 말에서 내려 희망 없는 보병전투를 치러야 했고 , 60∼70%가 전사했다.
설만철 은 토욕혼의 기병이 갑자기 장창보병으로 전환할지는 꿈에도 몰랐다. 설만철은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돌궐인 계필하력이 수백기병을 이끌고 적진을 뚫고 들어갔고, 이로써 설만철은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결국 이정과 그의 군대는 불모의 땅을 수천 리 행군한 지 5개월 만에 토욕혼의 주력을 따라잡았다.
청해호 동북쪽 황하의 수원지 근처였다. 몇 차례의 전투 끝에 이정은 토욕혼을 궤멸시키고, 많은 토욕혼 귀족과 수십만 마리의 가축을 노획했다
. 토욕혼이 불안정한 주된 이유는 당의 공격을 받고 약체화된 토욕혼은 휘하 부족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고, 오히려 토번 (吐藩:Tibet )이 팽창하면서
그들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당군의 공격을 받고 이미 박살이 난 토욕혼은 파편화돼 갔다.
당은 이후에도 다른 서역의 많은 국가들을 공격해 그들의 군대조직과 시스템을 파괴했다.
그것은 당이 논갈이를 해 팽창하는 토번 에 부드러운 토양을 만들어 주는 꼴이 됐다. [이렇게 세력을 확대한 토번 은 훗날 당나라와 충돌했다. 청해호 부근은 실크로드 경영권을 놓고 당과 토번이 벌인 150년 전쟁의 주요 무대였다. 이 전쟁이 동방의 한반도를 지배하려던 당의 발목을 잡게된다.]
[5. 연개소문 정권을장악하다 ]
가을이 무르익어 들판의 곡식을 추수할무렵인 642 년 음력 9월 어느날밤,, 한사나이가 달을 응시하며 마음을 다지고있었다.
사람들은 풍년이다 어쩌다 하며 곧다가올 10월 동맹 (東盟) 행사를 즐겁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사내는 심란한 마음 을 추스리고 있었다
이밤만 지나면 내일은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된다 자신의 칼을 빼어본다 달빛에 비추이는 칼이 울부짖는 듯하다.
이윽고 날이새고 ,,,, 고구려의 수도 장안성 남쪽에서 성대한 축하행사가 벌어졎다 아침부터 음식을 조리하는 냄새가 진동했다.
술을 가득 담은 큰 항아리를 실은 수레들이 연이어 도착했고, 시종들이 분주하게 오가면서 술과 음식을 날랐다. 축제 분위기가 완연한 가운데 백성들은 들떠 있었다.
점심 무렵 멀리서 대신들을 실은 호화찬란한 수레들이 줄지어 오고 있었다. 대신들은 도착하는 즉시 천막 아래의 잘 차려진 자리에 앉았다.
관등의 서열별로 지정된 자리였다. 100여 명의 대신들이 착석한 가운데 대낮부터 술판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초대자가 모두 참석했음을 확인한 사나이는 부하들에 신호를보냈다 그러자 일순간에 부하들이 뛰쳐나와 대대로 (大對盧), 고승 (高勝), 대사자 (大使者), 연태수 (淵太秀) 등 을 비롯한 108명의 대신 들을 참살 해버렸다. 그리곤 조금도 머뭇 거림없이 궁중으로 뛰쳐들어가 영류태왕을 시해해 버렸다,
이것은 정변 (政變) 이었다
[연개소문 을 영웅시한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모든 대신이 연개소문의 열병식장에 이르러 유량히 울려 퍼지는 군악 아래 인도돼 군막안에 들어 자리에 앉았다. 술이 두어 순배 돌았을 때 연개소문이 갑자기 반적(反賊)을 잡아라! 하고 외치고, 주위에 대령했던 장사들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칼ㆍ도끼ㆍ몽둥이로 일제히 외치니, 참석한 대신들도 다 백전노장 이었지만 겹겹이 포위됐고 게다가 수효가 너무도적어 벗어날 도리가 없었다.”]
연개소문은 왕과 대신 100여 명을 한 순간에 몰살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그의 성공적인 쿠데타는 치밀한 계획과 꺾이지 않는 투지의 결과였다.
모든 것을 떠나 쿠데타 그 자체의 완결성만 본다면, 연개소문 만한 행동의 천재는 역사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다.
626년 당태종의 현무문 쿠데타를 능가하는 것이다 .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연개소문은 영류태왕의 동생 대양왕(大陽王)의 아들 보장(寶臧)을 국왕으로 추대하였다
[6. 문명의충돌 ]
고구려 문명 이란 존재는 중화문명의 존립근거인 중화주의 ,황제주의에 늘상 대치 되었다.
고조선, 부여로 이어지는 인식의 틀을 계승,,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보는 사고관 이다 이는 광개토태왕의비 에도 잘 나타나있다.
고구려가 세상의 중심 이고 천하의 질서를 지켜 나가는 주인공이며 고구려 통치자의 태왕(太王)은 하늘의자손 (天孫) 이라는 것이다 .
이는 팽창주의를 지향하며 유일한 황제국임을 천명하는 떠오르는 신흥강대국 당(唐) 과는 같이 할수없는 운명 이었다.
양국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643년 6월 고구려에 사신으로 다녀온 태상승 등소 가 이세민에 고구려를 공격할것을 주청했다 .
641년 진대덕이 사신 으로서 후한 대접을 받았던것과는 달리 (영류왕시절) , 그는 연개소문에게 냉대와 멸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6 43년말 당나라 사신 상리현장 이 다시 사신으로 왔다. 그는 고구려에서 살벌한 겨울을 보냈다. 전쟁이 임박한 것을 직감한 고구려인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전마 (戰馬) 들이 국가의 목장에 집결되고, 동원령이 내려졌고, 군구 (軍區) 별로 병사들이 모여 훈련을 받았다. 군수물자들이 산성창고 로 옮겨지느라 모든 간선도로는 북새통 이었다. 이듬해 정초쯤 평양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왜 하필 자신이 연개소문에게 최후통첩을 했고, 태종에게 결전을 결심하게 하는 말을 전하게 됐는가,,,
허지만 한번의 사신이 더왔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사신 으로 온 장엄(藏嚴)을 굴속에 갇아 버렸다. 전쟁준비 상황을 발설할 우려 때문이다.
천자 가 다스리는 나라 라 굳게믿는 그들 이지만 그 믿음이 통하지 않는 나라가 고구려 였다 .
누가 봐도 戰士국가 고구려 와의 전쟁은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저수량이 당 태종에게 완곡하게 간언했다. ‘신당서’ 저수량전은 이렇게 전한다. “폐하께서 깃발을 휘둘러서 가리키자 중원의 깨끗하고 편안해졌으며 ,
돌아 보니 사방에 있는 이적 (夷狄) 이 두려워해 복종하고 위엄과 바라는 바가 큽니다. 지금 마침내 바다를 건너서 멀리 가서 작은 오랑캐를 정벌하다가
만약에 기한을 정해놓고 이긴다면 오히려 좋겠습니다만, 만일에 차질이라도 생긴다면 위엄과 바라는 것이 손상됩니다.
한번 싸워서 승리하지 못하면 필시 다시 군사를 일으킬 것이며, 분한 마음으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분병 (忿兵) 을 일으키면 승리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구당서’는 저수량의 말을 들은 태종의 마음이 흔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자 군부의 수장인 이세적이 입을 열었다. ‘구당서’는 이렇게 전한다. “병부상서 (兵部尙書) 이세적이 말하기를 최근에 설연타 가 변경을 침범했을 때 폐하는 필시 추격하고자 했으나, 그때 폐하가 위징의 말을 들어 기회를 잃었습니다.
만약 폐하가 계책대로 했다면 설연타 놈들은 하나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며,
50년간 변방은 무사했을 것입니다.” 당 태종이 말했다. “그렇소. 위징의 실수였소. 짐은 후회했소.
” 이세적의 말 한마디는 당 태종이 고구려와 전쟁 결심을 굳히는 데 큰 힘이 됐다.
당제국은 팽창과정 에서 이미 체질이 육식동물 과 같이 변해 있었다. 태종의 젊은 시절 국내 할거 세력을 평정하는 통일전쟁으로 시작해서
사상 유례가 없는 성공적인 북방 이민족 지배를 실현하는 데 이어 서역으로 토욕혼, 고창국 정벌 등 이제껒 성공적 으로만 이어졎다.
이런것이 가능한것은 당태종 부터 정복군주 체질 이었다.
장기로 치면 명인급 장기를둘수있는,, 뛰어난 지략가이며 배짱이있는 카리스마넘치는 지도자였다.
인재를 볼줄 알았으며 신하의 말에 귀 기울일줄아는 지도자였고 주변상황을 꿰뚤어 볼줄아는 혜안도 가졎다.
그의 주변엔 능력있는 인물들로 넘쳐났다. 또한 평원의 기마전사 돌궐도 그의 편이였다.
이제껏 모든 전장에서 승리만 맛봐온 그를 따르는 무리들도 사기가 하늘을 찌를것같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듯 대신들을 모아놓고
당 태종이 고구려 전쟁에 자신이 직접 종군하겠다고 선언하자 분위기가 일순 싸늘해졎다. 그리고 이소식은 바람을타고 온세상에 퍼져나갔다
[7.전쟁속으로 ]
644년 2월 당나라는 선전포고를 하였다. 허지만 실제 시작은 7월이었고 이사이 고구려군 이 먼저 움직였다.
이것은 수나라와의 전쟁당시 영양태왕이 2만의 병력을 이끌고 영주를 선공한적이있다. 영주주변의 군사기지를 공격한것이데 이를 모방한것이다.
허나 첩자가 붙잡히며 계획은 취소되었다.
唐군이 움직였다. 그해 7월 영주 (현, 요령성 조양시) 도독부의 도독 장검(張儉)에게 선제 공격의임무가 맡겨졌다.
당태종은 소수의 병력으로 공격하여 어떻게 고구려군이 움직이나 그동태를 살피기 위함 이었다.
장기판에서 의 응수타진인 셈인데 아무런 지원 없이 단독으로 요택을 넘는것도 힘든 일이지만 넘어가더라도 사나운 고구려 군대를 만나면 전멸을 의미한다.
장검(張儉)은 자신이 불운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황제의 명인데 거역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
장검은 휘하병력과 함께 비가 내리는 가운데 요하의 부근에 도착했다.
회원진(懷遠鎭) 부근 요택(遼澤)은 아득히 넓은 갈대 평원이었다. 남북으로 300리, 동서로 200리에 펼쳐진 늪지로 된 평원에
거미줄 같은 하천망이 밀집해 있고, 수초들이 무수히 자라는 진펄이었다. 비가내리며 물이 불어나자 장검은 엄두도 나지않았다.
같이온 일행들의 눈빛도 달라져있었다. 요택이 무엇인가! 한세대전쯤 수나라 군사들이 때죽음당한곳이 아니던가! 수십만의 선배들의 공동묘지인 셈이다.
장검은 자신이 버림돌로 씌여진다는것이 섭섭하기도 하였다. 벌써 여러날을 요택부근서 서성거렸다. 이대로 개죽음 당하는것이 너무나 서글펏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또 여러날이 지났다 장검에게 좋은 묘책이 떠오른것이다. 장검은 즉시 파발을 띄였다.
비가 많이와서 요택지역이 범람하여 건널수없는 상황이라하였다 . 이세민은 전령의 전언을 듣고 장검이 두려워서 건너지 못했을거라 짐작을 하고
그를 소환하였다.
황제를 만난 장검은 한장의 그림을 꺼냇다. 그것은 요택 부근을 묘사한 지도 같은거였다. 그리고 장검이 아뢰길 우리 윗세대가 그곳서 수십만이 죽었읍니다.
그것은 그곳의 상황을 몰라서 그랬던겁니다. 황제께서 대군을 친솔하고 그곳을 건느실텐데 과거의 전철을 밟지말라는 의미로
여러날을 허비하며 요택의 지도를 만들었던겁니다,, 당태종이들으니 정말 일리가있는 말인것같다.
그가 용의주도한 인물로도 느껴졎다. 장검은 총관으로 임명되었다. (현, 사단장급에서 군단장정도로 승진)
장검의 묘책이 통한것이다. 이곳 요택은 19세기 청나라 말기 대안현이 설립될 때까지 1600여 년 동안 요택 지역에는 현과 주(州)가 없었다.
줄곧 사람들에게 포기된 그냥 황량한 지대였다.
644년 11월 2일 낙양에 도착한 당 태종은 원정군을 편성했다. 이세적을 요동도행군 대총관에 임명하고 이도종을 부대총관에 임명하였다.
휘하에는 보병과 기병 6만이 배치됐다. 평양도행군(해군) 에는 장량을 대총관에 임명하였다 (전함 500척, 4만의군사).
돌궐의 기마부대는 2개군으로 편성되었고 계필하력과 아사나미사 가 총관에 임명되었다.
여기에 이세민이 이끄는 친정군병력13만과 추가병력 을 합하면 30만정도라하나 실제론 40~60만정도 일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이세적의 당 육군 주력이 영주를 출발해 요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말들이 일으키는 짙은 먼지가 황사에 더해져 들판에 자욱했다.
요택의 방대한 지역 곳곳에 잠복한 고구려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폭이 넓은 여러 강 기슭에도 고구려군들이 당군의 도하를 저지하기 위한 준비를 완료했다.
당군이 거대한 먼지를 일으키며 가까이 다가오면서 긴장감도 더해져 갔다.
그러나 회원진 으로 향하던 이세적군은 방향을 틀어 북동쪽 통정진으로 내달렸다.
이세적의 기만술에 속은 고구려군은 그들이 무사히 요하를 건너는것을 지켜볼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군은 이미도하한 이세적군을 상대해야됬기때문에
이세민이 이끄는 친정군의 도하를 을 막을 병력이없었다. 이젠 요동에서의 격전은 피할수없게됬다.
이세적이 이끄는 당군의 첫 번째 희생물은 유서 깊은 현토성이었다.
당나라 대군의 위용에 놀란 현토성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에 들어갔다. 성의 함락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현토성은 전국시대(戰國時代 : B.C. 403~B.C. 221) 연나라가 조선을 견제하기 위해 건축한 요새에서 출발,
한무제가 조선을 멸한 후 한사군을 세우고 현토군의 치소가 됬던곳이다.
현토성 다음은 신성이다. 당군의 입장에서 봤을 때 신성은 너무나 덩치가 커 공략이 여의치 않았다. 이세적은 신성을 건너뛰기로 했다.
대신 신성에 있는 고구려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 뒤통수를 치지 못하도록 그 앞에 상당한 병력을 주둔시켜 견제했다.
그리고 좀 더 만만한 개모성에 병력을 집중하기로 했다. 요하를 이제 막 건너온 당군에게는 일단 여장을 풀어 놓을 집과 그 창고에 있는 식량이 필요했다.
‘신당서’ 고려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막리지(莫離支)가 가시 사람 700명을 개모성에 보내 지키게 했는데 이세적이 그들을 포로로 잡았다.
” 그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었던 연개소문이 원군을 겨우 700명밖에 보낼 수 없었던 사실은 적의 접근로 판단의 오류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말해준다.
회원진 부근의 요하에 집중된 고구려 군대가 현실에 맞게 재배치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전까지는 요동에 병풍처럼 늘어져있는 성들은 독자적 힘으로
이세적군과 싸워야했다. 작으마한 개모성에 이세적의 당군이 에워쌓고 4월26일 열하루의 치열한 전투끝에 개모성이 함락되었다.
한편 장량이 이끄는 당나라 해군은 645년 5월 2일 비사성 에 당도하였다. 비사성은 발해만과 인접한 요동반도 끝자락에있다. 고구려의 해군기지로써 매우중요한곳이다. 하지만 어쩐일인지 고구려 주력해군은 보이질않았다. 당군은 비사성공략을 시작힌다.. 관문채 골짜기는 죽음의 냄새로 자욱했다.
많은 사람이 돌과 화살에 맞아 전사했고, 살아남은 나머지는 유혈의 골짜기를 뒤로한 채 아래쪽으로 퇴각했다.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정명진은 시야가 확보되는 주간전투는 고구려군의 직사 화기에 노출돼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많은 피를 흘린 후에야 그는 야간공격을 하기로 했다.
황제가 요하를 건너 고구려 땅으로 들어오고 있는 지금 비사성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해군제독 장량도 그 아장인 정명진 자신도 무사할 수 없었다.
황제가 도착하는 순간 식량도 고구려 땅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밤이었다.
관문채 성문에서 돌과 화살을 발사하는 고구려 군대는 고정돼 있지만 기어 올라가는 당군은 그래도 자신의 위치를 골짜기에서 약간이나마
수정할 수 있었다. 피아가 보이지 않는 상태는 당군에 유리했다. 그래도 많은 병사가 희생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당군들은 줄줄이 쓰러졌지만 지속적으로 기어 올라갔다. 고구려 군인들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만큼의 강한 기세였다.
결국 관문채 성문 앞에 도착한 당군은 파성추를 가져와 성문을 부쉈다.
‘책부원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부총관 왕문도가 앞장서고 사졸들이 계속하여 진격하니 성중(城中)이 무너졌다.
” 장량은 정명진과 왕문도를 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해 비사성을 지키게 하고 항만의 수비를 강화했다.
동시에 곧바로 함대를 재정비해 출항시켰다. 목표지는 압록강이었다.
고구려 함대가 집결돼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당 수군의 입장에서는 언제 고구려군 수군이 나타나 전투가 벌어질지 몰랐다.
압록강 입구에 도착했지만 고구려 수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전력의 손실을 어떻게 해서라도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온전하게 보존된 수군의 존재 자체가 당에 억제력을 주는 힘이었다.
[ 여기서 연수영 (淵秀英, ?~?)예기를 해야겟다.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으로 1차고당전쟁시( 편의상 연개소문과 이세민이 맡붙었던 전쟁)
고구려의 해군을 지휘하였던걸로 야사 나 묘비에 나온다. 최초의 여전사인셈이다.] ------ 이에대해 소설가 황원갑씨가 쓴글을 소개한다.------
연수영이란 존재를 우리 학계가 주목한 것은 2003년 6월에 중국 측이 청석관 유적지를 유네스코에 등록한 것이 계기였다.
그 동안 국내에선 연수영이건 연개소정이든 그 이름 자체도 인정하지 않다가 비로소 최소한의 관심이나마 표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국이 유네스코에 등록한 설명문 가운데 연개소문과 연수영에 관련된 전설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당의 해전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심지어는 연수영의 사당까지 모셔놓은 곳이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국내 학자 가운데 학술논문을 통해 연수영의 이름을 거론한 사람은 서길수 박사가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벽류하 유역의 고구려 산성」 중
‘석성?위패산성’ 부분에서 소장루(梳?樓)에서 발견된 비문과 관련해 일부를 인용한 것이 그것이다.
이 내용도 원래 비문이 아니라 근래 중국인들이 만들어 세운 안내판에서 발췌한 것이다.
서 박사는 ‘현지에서는 연개소문의 여동생이 쓰던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현장에 설치한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고 한 뒤 이렇게 그 내용을 소개했다.
- 소장루는 길이와 너비가 모두 5m인 2층 누각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연개소문이 자기 누이 개수영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원래 있던 누각은 없어졌고 지금 있는 것은 원래대로 고친 것이다. 연개수영은 여자 장수라 다른 장수들과 내성에서 함께 살수 없기 때문에
홀로 이 누각에서 산 것이다
연개수영은 군략 무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으뜸 장수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소장루도 날마다 군무를 처리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梳?樓是一座長寬各五米的二層樓閣 相傳是盖蘇文爲其妹盖秀英所建 原樓閣不存 此爲復修 因是女將 不與其他將領同住內城 獨住此樓 盖秀英 文□武略武藝超凡 爲守城主將 故此梳?樓也是處理日常軍務之要地) -
그리고 이어서 ‘소장루는 여자가 화장하던 누각이라는 뜻으로 여자 영웅이 등장하는 전설이다.
이와 같은 전설적 소장루는 위패산성에도 남아 있어 흥미롭기는 하지만
정사(正史)에 연개소문의 누이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장루 설은 전설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고 결론 내렸다.
소장루는 석성뿐 아니라 이웃 오고성에도 있었지만 정사에 나오지 않으므로 연수영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중국 측의 관보 자료와 유네스코에 영문으로 기재된 등재자료의 내용을 살펴보자.
- 청석관 유적은 개주 현장이었던 신광서가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발굴 탐사하여 고려(고구려)의 관문임을 확인했다. 그곳에선 우물?난간?봉화대 등에서
이곳의 관문을 지켰던 연개수영(연수영)과 연개소정(연수진)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는 석각(비석, 금석문)이 발견됐다.
청석관은 고려 개모성의 배후를, 건안성의 전면을 방어하는 곳으로 고려가 멸망한 뒤인 668년부터 개주라고 불렀다가,
발해왕 대무예가 차지하여 진주라고 불렀다. 그 뒤 요가 차지하여 개주라고 불렀으며, 청조에 이르러 개평현으로 개칭했다가 다시 개주가 됐다.
유네스코 등록 작업을 위해 고구려 최고의 수군 요충이던 비사성도 박작성처럼 중국식 성벽으로 개조 중이라고 한다.
일부는 이미 유네스코에 등재됐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비사성의 유래 소개에 이어,
‘고려의 해군 장군 연수영이 645년 8월 15일에서 29일까지 약 보름간 장산군도에서 대 해전을 벌여 당군을 이겼다’는 내용이라고 전한다.
당군은 10만 명 또는 7만 8,000명으로 묘사했고, 고구려 수군은 1만 8,000명에서 2만 5,000명으로 설명했다고 한다.
한편, 장해도의 석성(성산산성)도 현재 유네스코 등록 절차를 밟고 있는데, 성벽은 이미 등록이 완료됐다고 전한다.
중국학자들이 무슨 까닭에 이처럼 고구려의 대승과 당군의 참패를 인정하고 나올까.
고 구려는 ‘중국 변방의 지방정권’이고, 고구려인들은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이기에
이런 기술(記述)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하는 해양공정의 정체다. 사정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실증주의의 탈을 쓰고 일제 식민사관과 중화 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사학자들은 중국의 역사왜곡과 탈취 기도에 여전히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또 아직도 한국사의 영역이 압록강·두만강 이남에 국한된다느니, 이제 민족이란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느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내뱉는 민족적 자존심도 주체성도 없는 일부 사학자가 여전히 강단에서 활개 치는 사실도 참으로 개탄스럽다.] --- 황원갑씨의 글중 ---
645년 5월 3일 당태종과 그 휘하의 군대는 요택(遼澤) 서안에 이르렀다. 갈대의 바다 요택은 입을 벌리고 누워 있는 죽음의 신(死神)이었다.
당나라 병사들은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밤이면 갈대 사이로 인을 뿜는 해골의 광채가 보였고,
얕은 물속에서도 걸레 같은 시신들이 홍수에 떠내려 온 나무토막처럼 쌓여 있었다. 습지에서는 시체가 잘 부패하지 않는다.
‘구당서’는 당시 당태종의 한탄 어린 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지난날 수나라의 군사가 요하를 건널 적에 때를 잘못 타서 종군한 사졸들이 모두 죽어 해골이 온 산야에 널렸으니 참으로 슬프고 한심하다. 해골을 덮어 주는 의리가 무엇보다 우선돼야 하니 그들의 뼈를 거둬 묻도록 하라.
” 5월 3일 출발한 군대는 요택 시작 지점에서부터 5월 9일 요돈(遼頓)에 이르기까지 단 1주일 만에 주파했다. 하늘도 그들을 도왔다.
‘책부원구’를 보면 요돈에서 요하 본류를 건너는 날 저녁에 강 수위가 3척이나 내려갔다고 한다. 하늘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느낀 병사들은 기뻐했다.
하지만 그들을 진정으로 도운 것은 행군을 방해하는 고구려 군대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군은 요하 북로를 주파한 이세적의 군대와 남로로 들어온 장검의 군대를 막아내느라 초기에 철통같이 지키던 요하 중로를 완전히 비웠다.
한편 645년 5월 8일 당태종은 고구려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턱인 요하의 본류 교량건설 바라보고 있었다
. 10일 도하가 완료되자 당태종은 전 병사를 다리를 바라 볼 수 있는 위치에 도열시키고 다리를 철거시켰다. “이제 고구려 땅이오. 돌아갈 다리가 없소.”
당태종은 병사들 마음에 남은 미련을 끊었다. 승리하지 못하면 고구려 땅이 그들의 무덤이 될 터였다.
‘책부원구’는 “교량을 철거시킴으로써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했다”라고 했다.
[요동성전투]
요동성은 평지성이라 산성보다 공성기 사용이 용이했다.
성벽이 모두 인공적으로 다듬은 돌로 쌓았기 때문에 투석기의 공격으로 손상을 입기 쉽고, 한번 파손되면 보완도 어려웠다.
대신 요동성의 성벽 바로 아래에는 깊고 넓은 해자가 있었다. 전투 직전 분위기를 다졌지만 공격은 바로 시작되지 못했다.
이번에도 전투보다 삽질이 먼저였다. 해자를 메우기 위해 막대한 막일이 필요했다. 그 광활한 곳을 일일이 흙으로 메우는 것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당 태종이 흙을 많이 짊어진 병사의 그것을 일부 받아내 자신의 말 위에 올리고 흙을 날랐다. 그러자 따라온 병사들은 다투어 흙을 져다 해자에 뿌렸다.
그리고 제1군의 총관 장사귀(張士貴)에게 명하여 관중(關中)의 정예병을 이끌고 요동성의 서쪽을 공격하게 했다.
공성기를 이끌고 성벽을 직접 공격하는 중국인 보병들이었다. 부대총관 이도종이 관중 출신의 경기(勁騎)병을 이끌고 가서 그들을 호위했다.
성문을 열고 나온 고구려 기병이 중국인 보병들을 도살할 수도 있었다. 성을 포위 공격하는 데는 안팎으로 보병에 버금가는 많은 기병의 수가 필요했다.
요동성 외곽의 물웅덩이들이 거의 다 메워지면서 당군의 공격은 본격화됐다.
고구려인들은 거대한 돌을 멀리 쏘는 당나라 투석기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실감했다. 20∼25㎏짜리 돌들을 300m 이상 날려 보냈다.
돌을 맞은 성벽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구당서’는 전한다. “우리에게 포차(抛車)가 있어 300근(?)의 돌을 1리(300보) 밖까지 날린다.”
‘무경절요’(武經節要)에서는 중국의 투석기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가로 놓인 축에 긴 장대의 중간 부분을 꿰어 돌릴 수 있게 하고
그 한쪽에 돌을 놓고 다른 쪽에는 줄을 매달아 여러 사람이 갑자기 잡아당겨서 돌을 날려 보내게 돼 있다.
” 서양의 그것이 거대한 추를 달아 그 반동을 이용했다면 중국인들은 풍부한 인력을 투입했다. 기계적으로 볼 때 중국의 그것이 간단했고, 분해해 운반하기에도 좋았다. ‘구당서’는 요동성의 고구려인들이 그에 대응하는 조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소문을 듣고 매우 두려워한 나머지 성 위에 전루(戰樓)를 쌓아 날아드는 돌을 막았다.”
투석기로 인해 성벽이 계속 무너지자, 밧줄로 만든 그물을 치기도 했고 나무기둥을 두 겹으로 박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돌이 날아와도 무너지지 않게 했다.
석포가 성벽을 많이 훼손할수록 나무로 보강되는 부분이 많아졌다. 투석기가 포격하는 사이에 당군은 공성탑(攻城塔) 조립을 완료했다.
공성탑 높이는 요동성의 성벽보다 조금 높았다. 철판으로 외부를 보호하고 있어 고구려군의 직사화기 공격에도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이 그것을 알고 성벽 위에 목책을 올려 더 높은 전루를 쌓았다. 그것은 날아드는 돌의 방패이자 공성탑에 대항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군은 탑에서 활을 쏘아 고구려 궁수들을 견제해 엄호하는 사이 전투공병들을 투입시켜 중요한 포인트에 있는 성벽 밑 해자를 메우려 했다.
하지만 고구려의 전루가 더 높아 효과적인 엄호를 할 수 없었다. 많은 중국 병사가 요동성을 감싸고 있는 해자에서 매립작업을 하다가 전사했고, 공성탑에서 성벽으로 접근하다 떨어져 죽은 시신까지 그곳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당나라 군대에 포위된 요동성은 시신 더미에도 포위돼 있었다.
후텁지근한 여름에 파리가 끓었다. 벌판에 버려진 시신들도 이슬이나 비를 맡고 나면 그 썩은 시체에서 나오는 냄새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하다.
해자의 물에 떠서 부패해 가는 시체는 말할 것도 없었다. 퉁퉁 불은 시신들이 물 위에 겹겹이 떠 있었고,
이미 뼈가 드러난 상태에서 부패해 가는 살에 구더기가 버글버글 했으리라. 그 지옥과 같은 불길한 시체의 늪에 빠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죽는 것보다 참기 힘든 일이었다.
‘책부원구’는 당나라 군사들의 심리를 짤막하지만 압축적으로 전하고 있다.
“해자에서 뼈가 구르고 있고(轉骨深溝), 병사들은 그 도탄에 빠지는 것을 걱정했다(愍其塗炭).”
물론 당군의 엄청난 희생으로 요동성의 해자와 성벽도 많이 파괴됐다. 하지만 전투가 이대로 진행된다면 얼마나 더 많은 전사자를 낼지 몰랐다.
병사들을 죽음의 수렁으로 더 이상 밀어 넣을 수 없었던 당 태종은 다른 방안을 내놓았다. 당군의 손에는 무기보다 삽과 흙자루가 들려 있는 시간이 많았다.
‘책부원구’를 보면 “성을 포위하고 땅굴(지도)로 아홉 곳으로 공격하였다(於是雲羅四合, 地道九攻)”라고 하고 있다.
엄청난 희생자를 내는 해자 매립을 중지하고 수없이 많은 곳에서 터널이 굴착됐다.
성벽 밑에 굴을 판 후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직사각형의 버팀목 ‘ 지도(地道)’가 여기에 사용됐다.
그러나 요동성은 물이 많은 곳이었다. 지하 수십 미터 아래의 암반층을 굴착하지 않은 이상 누수는 피할 수 없었고, 터널 공사는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동성의 굳게 닫힌 철문은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았다. 병사들은 지쳤다.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자 당 태종은 마지막 방법을 썼다.
성안 고구려 사람들의 불안감은 깊어 갔고, 신앙에 기대려고 한 것 같다.
주민들은 주몽을 모신 신사(神祠)에 소를 잡아 제사를 행하여 예쁜 여인을 단장해 주몽신의 부인으로 삼으면서 성의 안전을 빌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성안에는 주몽의 사당(朱蒙祠)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령되이 말하기를 전연(前燕)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가 급해지자 미녀를 치장하여 여신으로 만들어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여 성은 꼭 안전할 것이다”라고 했다.
북치고 춤추는 무당의 말이었다. 무당을 통해 자신들의 애타는 바람을 신에게 전하고 얻고 싶은 신의 약속을 전해 받은 한판의 굿이 행해졌다.
바람이 불자 당 태종이 화공(火攻)을 생각해냈다. ‘책부원구’는 “성루의 불을 지르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여러 곳에서 불이 꺼졌다(聊命縱火, 數處潛然)”라고 기록돼 있다. 비온 직후라 물기를 먹은 나무들이 타지 않았던 것 같다.
전쟁의 천재 당 태종은 그 순간에 집요하게 생각했다. 풍향도 요동성 쪽으로 바뀌었다. 하늬바람을 맞은 절호의 기회가 왔다.
이 순간을 놓치면 요동성 함락은 어려워진다.
그는 비에 젖지 않은데다 성 외부에서 바람을 등질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았다. 요동성의 서남쪽 전루였다. 지붕이 있어 목재가 젖지 않았다.
당군 공성기의 공격에 살아남은 그 전루가 고구려군에 재앙이 될지는 몰랐다.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있는 시점에
당 태종은 소수의 정예 병사들을 선발해 높은 공성탑인 충간(衝竿) 꼭대기 공간을 채웠다. 그들은 불화살을 서남쪽 전루 내부로 집중사격했다.
당군의 불화살 세례를 받고 나서야 그것이 장작더미가 돼 있었다는 것을 고구려 병사들은 실감했다. 전루에 발화된 불길은 바람을 타고 건물들이 밀집한 성 내부로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자 사람들은 아우성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아비규환의 혼란이 벌어지자 성벽에 있던 고구려 병사들의 전열도 흩어졌다.
거대한 연기기둥과 함께 처절한 소리가 요동의 광활한 들판을 뒤덮고, 불길은 담장에 갇혀 도시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요동성민들을 집어삼켰다.
물(水)의 요새 요동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불(火)로 결정타를 맞았다. 싸움의 결과를 ‘신당서’는 이렇게 전한다.
“당군 사졸들이 성벽에 오르자 고구려 군대가 방패를 들고 창으로 찌르며 저항했다.
석포에서 발사된 투석(投石)이 비처럼 쏟아지면서 성이 드디어 무너졌다.
여기서 군사 1만과 호구 4만 명을 포로로 잡고 군량 50만 석을 노획하고 그 땅을 요주(遼州)라 하였다.
[주필산전투]
645년 6월 대대로 고정의가 이끄는 고구려 말갈 15만 대군이 안시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책부원구’ ‘전당문’에 당태종의 장면 묘사 기록이 남아 있다 . “그 군대가 일으킨 먼지가 수십 리에 걸쳐 가득했다 연개소문의 ‘황제사냥’이 본격화됐다.
7세기 중반 이렇게 강력한 대군을 보유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당 이외에 고구려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기병 전력에 있어 고구려는 당에 뒤지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이번에 거의 모든 가용자원을 다 쏟아부었다. 천보(天寶 742~756) 연간 유속(劉?)이 찬술한 ‘수당가화(隋唐嘉話)’에는
“고구려와 말갈군이 40리에 뻗친 것을 보고 당태종의 얼굴에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행군하는 고구려군에 당군이 첫 도발을 감행했다
아사나사이가 이끄는 돌궐기병들을 출격시켰고, 고구려군은 말갈 기병대를 선두에 세위 이를 요격했다고 ‘책부원구’는 기록하고 있다.
안시성에서 16㎞ 정도 떨어진 곳 잡초가 무성한 광대한 구릉지대였다. 여름 그 넓은 만주벌판에서 기병들이 서로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만주평원의 찬란한 햇빛 아래 초원 전사와 숲속 사냥꾼의 살벌한 기병전이 벌어졌다.
서로 상대편 진용으로 바짝 달려가 돌궐기병과 말갈기병이 활을 날렸다.
기마의 속력과 화살이 지면에 떨어질 시간을 감안해 발사했다. 키 자란 풀들은 금세 수천의 말발굽에 짓밟혔고, 대기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했다.
결과는 말갈기병의 우세로 기울고 있었다. 많은 돌궐기병들이 말갈기병들의 화살에의해 땅에 떨어졌고, 기세에 밀려 퇴각 했다.
하지만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고연수,고혜진이 이끄는 36000의돌격대는 본진에서 분리되나와 이세적군과 정면충돌했다. 불꽃을튀기는 대접전이 벌어졎고 평원은 피냄새로 자욱하였다.
시간이 지나며 이세적군이 몰리는 상황에 처하게되였다.북쪽 높은 산봉우리에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던 당 태종은 장손무기의 군대가 나타나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시선은 그들이 나타날 남쪽 길목에 고정돼 있었다. 그들이 다가오면서 일으키는 먼지가 보였다.
장손무기의 군대가 남쪽에서 나타나 서진하자 당 태종이 숨겨뒀던 수많은 깃발들을 들었다. 그리고 호각을 불고 북을 쳐댔다.
고 구려 군대는 그의 등 뒤를 향해 달려오는 장손무기의 병력보다 소리가 나는 방향의 황제 깃발을 먼저 보았다.
한참 이세적군을 학살하고 있던 고구려 군대의 일부가 산 아래로 내리꽂히는 당 태종의 군대를 막기 위해 나아갔다.
이세적 군대를 북쪽에서 압박하던 병력이 빠지자 포위가 일부 풀리기 시작했고, 고구려의 공세도 누그러졌다.
새로운 적의 출현 방향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고 낮은 지대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는 고구려 군대가 한발 늦었다.
장손무기가 이끄는 당군과 황제가 이끄는 친정군 그리고 몰리던 이세적군에게 역포위가 되버린것이다.
포위된 채로 이틀을 버티다 고구려 본진의 지원군이 도착하며 3만의 병력이 빠져나갈수있었다.
허지만 고연수,고혜진을 비롯한 수천의 병력이 당군에 생포가 된것이다.
주필산 전투까지만해도 모든것이 당군의 바램대로 순조롭게되었다. 허지만 이후 당군은 꼬이게되는데,,,,. .
[역포위의 또다른 역포위]
개모성,비사성,요동성,백암성이 줄줄이 떨어졎다. 더우기 요동성, 주필산 전투의 결과는 고구려 에 당혹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고구려 백성들은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하였고 특히인접한 곳은 더욱그랫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에보면 "고려는 온나라가 크게놀라 후왕성과 은성의 백성들이 도망가니 수백리의인가에 밥짖는 연기를볼수없었다." 라고 기술하였다.
(고구려 말기엔 고려라고 불리웠었다.)
아무튼 이시기 당태종도 고구려軍을 무찌르고 항복을 받아 낸것에대해 매우 의기양양 했었던것같다. 편지를 띄어 태자에게 자랑까지하였는데.
" 어떠냐? 짐이 장수노릇한게 이정도다."
그리고 고구려군을 포위하여 격퇴한것을 기리기위해 그산이름을 주필산(駐?山) 이라 명명하였다. 허지만 기쁨도 잠시 뭔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당군전부는 고연수,고혜진이 이끄는 고구려 36000의 돌격대와 접전을 치루느라
고정의가 이끄는 고구려 본진이 슬금 슬금 주필산을 포위하는것을 놓친것이다. 이미 요소요소 마다 고구려군이 길목을 지키고있었다.
뒤늦게 이사실을 알아차린 당태종은 어쩌질뫁하고 주필산에서 머무르다
열흘이지나서야 유일하게 평지와 연결되있는 서쪽통로를 집중공격하며 겨우 빠져나왔다. 이제까지 여러성을 함락시키며 승리했다하지만
요동성을 제외하면 고만고만한 성들이다 규모가있으며 핵심적인 신성과 안시성은 물론 건안성도 건재하다.
수군의 본거지라할수있는 비사성도 고구려 수군의 핵심이 모두 없는상황에서의 점령이었다. 이제까지의 승리는 작은 승리이다.
고구려 해군도 건재하고 육군도 건재하였다.
뭔가 대책을 세우지않으면 안되었고 이세민은 여러제장 들을 불러모으고 작전회의를 열었다. 병법의 귀신들이라 일컬어지는 이세민,이세적,이정등 을비롯
모든제장이 모여 회의를하였다. 결론은 안시성을 치자는데 의견이 모아졎다.
안시성,신성을 놔두고 천산산맥을 넘어 고구려 내지로 들어서는것은 불가하다는데 의견이 모아진것이다.
사실 이럴경우 앞에는 고구려본진이, 뒤에는 안시성과신성에서 10만의 고구려군이 쏟아져나와 뒤통수를친다면
좋은결과를 도출하기가 어려워질것이다.
[안시성전투]
안시성을 공략하기전 이세민은 장량에게 건안성을 함락시킬것을 주문했다. 허지만 장량은 건안성 고구려군의 맹렬한기세에 오히려 크게패하고
비사성 으로 도주해버린것이다.
더우기 장량이 이끄는 당의 해군은 압록강 어귀로 진군해 나갓다가 女戰士 연수영이 이끄는( 추정) 고구려수군에게 장산군도 부근서 치명타를 당하고
재해권을 뺏긴상태였다. 이는 본토에서 병사들의 식량수송이 불투명해졎다는 예기다,
초기에 가져간식량하고 고구려성을 함락시키며 빼앗은 식량으로 해결해야한다. 이세민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은셈이다.
안시성을 공략하여 성공하면 그것을 발판으로 고구려 내지로 쳐들어가는것이고 실패하면 철군해야하는것이었다. 안시성은 마지막 희망이었던셈이다.
6월20일 요동도행군 제1군 사령관 장사귀가 선발대를 이끌고 안시성에 도착한걸 시작으로 속속 여러제장들이 집결했다.이윽고 당태종 이세민이 도착하며 안시성 공략준비를 마쳦고 항복을 권하는 사신을 보냈다.
[ 安市城戰鬪 ]
사신이 가져온 밀서의내용은 이러했다.
[ 짐이 친히 수레에올라 요동을 정벌하고 그대의나라를 친정하는 뜻은 그대나라의 강신(强臣)이 국왕을 시해한고로 문죄하러온거지 다른뜻은없다.]
양만춘은 그들을 포박케하고 지시를내렸다. 그들은 결박당한체 말위에 올라 성내를 돌았다.
많은 성주민과 군인들이 그들을 조롱하며 침을 뱉고 또 그보다 더한행위도 하였다.
돌아온 사신에 이소식을 접한 이세민은 분기가 탱천하여 말도 제데로 뫁할지경이였다.이를악물고 참으며 겨우 말을 이어갔다.
"안시성을 함락시켜 복속시킨다면 남자들은 단한명도 살려두지않고 여자들은 모두 노비로 팔아넘길것이며
어린아이들은 팔다리를 잘라 불구로 만들어 버릴것이다."
이윽고 당군의 공격이 막 시작될즈음 고구려군이 성루에올라 욕설을 퍼부었다. 욕설의 내용은 이세민에대한것이다.
사실 이세민은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건 형,아들과 그의식솔들을 몰살시켰으며 아버지를 연금하였고.
또한 그의 제수되는사람을 연모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황후에 봉하려고하다 위징의 간언으로 그만둔적도있다.
그는 역대 다른 왕들과 비교하는 질문을 신하에게 묻고는 그답을듣는걸 즐기곤하였다. 또한 자신이 어떻게 평가되는것에대해 예민했던것같다.
그의 평을적은 기록을 갇고오게 명 하기도 한것이다. 역대 어느누구도 그런행위는 금기시 되었던것이다.
그는 최초로 중국의군주로서 자기기록을 본사람이다. 물론 담당자는 새로작성된20권의 기록서를 바쳐야했으며.(울나라서는 연산군이 그랬던거같다,)
욕설의 내용을 들은 이세민은 더욱더 분기가 탱천하며 공격명령을 내렸다.
먼저 장거리 포부대라 할수있는 공포의 투석기 공격이 먼저였다. 그러나 안시성은 인공적으로 벽돌을 쌓아올린 요동성과는 달리 山城이다.
삼면은 깍아지른듯한 절벽이고 한쪽은 토산을쌓아올렸다. 수박덩어리만한 돌을 날려봐도 천연山은 별피해가 없었다.
토산쪽이라해도 흙이 좀 허물어지는 정도였다. 다만 건물의 파괴나 인명의 피해가 좀 있을뿐이다.
흙이 허물어지면 병졸들이 그때그때 나와 목책을 세운다는지 약간의 보수공사를 하곤했다. 투석기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뫁했다.
여러날의 공세에도 별효과가 없었던것이다.
고심하던 전쟁의천재 이세민은 土山을 생각해냈다. 이번에도 당군의 삽질이 시작된다.
무려 50만명이 동원되었다하는데 안시성 주변은 돌산이라 흙을 구하는것이 쉽지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마치 금이라도 캐듯 정성껏 흙을모았다. 50만의인원이 무려 60일만에 안시성보다 두길(사람의 두배정도) 정도높은 토산을 쌓은것이다.
총책임자 이도종은 뿌듯하였다. 그리고 시험삼아 토산위에서 안시성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그것은 안시성으로선 재앙이었다. 높은곳서 안을 들여다보며 정밀타격하는 투석용 포차는 공포의대상이엇고
공성용보루를 저지하는 성곽의 고구려군들은 높은곳에서 날아드는 화살땜에 그소임을 할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것이다.
더우기 바람이 서서히 서풍으로변하였다.
이세민은 회심의 미소를지었다. 요동성에서 재미를 본 불공격이 떠올랗기때문이다. 이도종에 적절한시기 불공격을 명령했다.
토산위에있던 이도종은 이제 수확하는 일만남았다 여기고 측근들과 술파티를 벌인다.
안시성 안에서도 이젠 모든것이 끝났다체념하는 분위기였다. 다만 양만춘 휘하 고원부가 돌격대를 이끌고 토산을 점령하겠다며 양만춘에 3000의 군사를 요구했다.
허지만 수십만의 당진용을 뚫고 간다는것은 너무도 무모해보였다.
양만춘은 기다려보라며 답을 회피하고. 그날저녁 어두움이 찾아오면서 전혀 뜾밖의 상황이 연출된다. 폭우가 쏟아진것이다.
내리는 폭우에의해 토산이 안시성쪽으로 허물어졎고 그토산이 안시성과 연결 되버린것이다.
이때를 놓치지않고 고원부는 3000의군사를 이끌고 토산쪽으로 뛰쳐나가 당군을 참살하고 토산을 점령 해버린것이다.
뒤늦게 이사실을 안 이세민은 이도종을 대신해 부복애를 직접 참수해버렸다 ( 이도종은 이세민과 가까운 친척간이어서 차마 뫁하였던거같다.)
또한 급보가 날아든다. 비사성을 고구려군에 빼앗겻다는것이다. 또한 고구려 대군이 안시성쪽으로 몰려온다는 전갈이었다.
이젠 식량문제도 그렇고 더는 지체할수가 없다. 날이새면 토산도 되찾아야하고 마지막 총공격 뿐인것이다.
이윽고 날이밝자 당군은 맡은데로 마지막 공격을 감행하였다. 황금갑옷에 붉은전포를걸친 이세민이 앞장서 부하들을 독려할때이다.
양만춘이 때를 놓치지않고 활 시위에 화살을 얺고 이세민을 향하여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섬뜩한 바람소리 를 일으키며 이세민을 향해 곧장날라가 그의 왼쪽눈에 명중하였고
이세민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곤두밖질쳦고 그것으로 모든게 끝났다.
[추격전]
급히 철수하는 당군을 양만춘은 7000의 군사를 성에 남겨두고 ,기병4만 보병2만을 이끌고온 연개소문과 함께 맹렬한 추격전을 개시하였다.
해군이 이미 고구려 군에 장악당한뒤라 해로는 불가능 했다. 요하를 건널수도 없었다. 건너오며 도하장비를 불살랐기 때문이다.
북방쪽으로 우회하는건 너무멀다. 고구려 기병대 에의해 전멸당할 가능성이 매우높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도망갈때는 빠른길로 빨리 빠져나가는 것만이 최선이다. 자신들의 영토로 빨리 빠져 나갈수있는곳,,,,, 유일하게 "요택" 인셈이다.
자신들의 부모이자,삼촌, 큰형뻘되는,, 30여만의 해골이 묻혀있는곳,,,,
후퇴는 진격할때보다 더어려운 법이다. 대량학살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고구려군은 마치 풀을베듯 뒤쫒으며 셀수도없이 많은 인원을 참살해버렸다.
고구려군 에 죽은 숫자보다 도망가며 서로의 말발굽등에 밟혀죽은 수가 더 많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에선 당시의 급함을 예기한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일을 도왔다. (권제21)
또한 당으로 돌아간자가 7만이라 하였다. ( 권제21) ]
이세민은 이후유증으로 4년도 못살고 사망한다. -結-
[총보]
초기엔 당군의 진격로를 예상뫁한 고구려군의 고전이었다. 현실에 맡게 재배치 될때까지 여러 성들이 함락 되었으며 고구려군의 피해도 컷던건 사실이다.
또 중국 사서나, 울나라 사서 모두가 문제이다. 중국사서는 주로 당태종이 승리한부분까지만 기록되있다.
또한 병력,포로 등의 숫자에대해 너무 현실성이 없는것들뿐이다.
주필산 전투서 당군이 포로로 잡은 고구려군이 신당서는 36000명, 구당서는 15만6000명이라한다. 15만? 그렇다면 고구려군 본진이 모두 포로가 되었단말인가?,,,
(그럼 전쟁이 거서 끝났어야지!) 더웃기는건 말갈족(3300) 을 제외하곤 모두 풀어줬다는것이다.신,구당서 (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적군을 모두풀어주다니!)
코메디는 계속된다. 1차 고,당전서 죽은 말들은 70~80%라고 하는데 ( 기마병 한명이 보통 말4필을 이끈다.) 그러니 수십만의 말들이 죽은것이다.
그런데 전사한 당군은 고작 2000명이라한다. (고구려군은 당군과 싸운게아니라 말들과 싸웠나?)
원정의 패배는 인정하며 숫자는 너무 현실성이 떨어진다. 중국이 자신들에 불리한건 빼고 유리한건 과장되이 하는건 유명한데 좀 너무한겄같다.
해전도 그렇다. 처음 비사성에서 주력을 뺀것은 초기에 많은 당군의 전력을 정면 승부하는것은 좋지않다여겨 뺏을것이다.
중국의사서는 해군이 4만 이라 하였으나( 울나라 사서는 기록이 전혀없어 중국의 사서를 따랏음)
묘비에 나온것을보면 당해군은 78000~에서 십만정도 인것같다. 반면 고구려 해군은 2만에서 2만5천 정도로 추정된다.
그리고 제해권을 상실당했다면 해전에서 일방적으로 당했음을 의미 할것이다.
허나 중국이나 울나라나 사서들이 침묵을 하고있다. 심지어 고구려 해군을 이끈 장수 이름도 모른다. 참으로 어이 없는 노릇이다.
1차 고당전 승리의 원동력이된 안시성성주 양만춘이란 이름도 몰랐으니 ,,,뭐~
그나마 조선중기때 송준길, 박지원등에 의해서 알게된 사실이다.
안시성성주 양만춘 이란이름이 첨등장하는것은 조선중기 송준길(宋浚吉)의 [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 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다.
안시성 성주 이름을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이라고 하고 있다.
열하일기서 양만춘이 이세민의 눈알을 맞췆다는 내용의 글을썻고
[千秋大膽楊萬春, 箭射규髥落眸子]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정관음貞觀吟'이란 제목으로 지은 시에 이런내용도있다.,
독 안에 든 쥐로만 생각했더니 흰 깃에 검정 꽃 빠질 줄이야.
[爲是囊中一物爾, 那知玄花落白羽]
'검정 꽃<玄花>'이라고 함은 눈알을 이름이요, '흰깃<白羽>'이라고 함은 화살을 말한다.
이부분의 삼국사기 기록은 참으로 실망스럽다.
[논컨데 ,당태종은 거룩하고 총명하신군주다.난을평정하는 능력은 탕무(湯武)에비할수있고,이치에는 성강(成康)에 버금가고,군사를부릴때는 기이한 꾀가 무궁하여
막아나설자가없었다.그러나 이번 안시성 전투서 패한것을보면 안시성주는 보통사람이아닌 호걸인것같다.그러나 史記에 성명을 잃었으니 참으로 애석한일이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중국사서에 안시성 성주 이름이나오질 않는데
그이유는 자신들의 위대한 무패의 황제에 치욕스런 패배를 안겼고 더우기 눈알마저 뽑아버린 불경스런 인물인까닭이다.
김부식이 양만춘이란 이름을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여러명의 전문 사관과 함께하였는데 몰랐을리가 없다.
조선중기에도 양만춘이란 이름을 알고있었는데도 말이다.
더우기 승리한 양만춘이 패배한황제에게 비단을 받고 엎드려 절하고 배웅까지했다는 중국사서를 그대로 인용한것은
힘들게 우리땅을 지키신 조상님들에게 면목없는 낮부끄러운 짖일게다.
참고로 연개소문을 소개한 환단고기 고구려본기 에선
단재선생은 이세민이 안시성싸움에 열중일때 연개소문이 고구려군을 이끌고 북경윗쪽 상곡지역을 공격 했다한다.
추격전서 양쯔강 북부 간쑤성 지역까지 추적 했다하는데 그곳에 몽롱탑의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한다.
연개소문에 쫒기다 우물속에 숨어 간신히 목숨 부지했다는 전설, 고려군에 죽은 당군의머리가 산처럼 쌓여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전쟁승리의 주역은 본군을 이끌면서 적절한 압박작전을 펼친 고정의, 고구려해군 을 이끌며? 이순신장군을 연상케했을 활약을 보인 여전사 연수영( 추정),
3개월에 걸친 당군의 총공세를 물리친 양만춘과, 안시성군,민들일것이다.
--- -終-퍼온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