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은 경산, 대구, 영천, 군위, 칠곡 등 시ㆍ군이 많이 접해있고 넓은 범위를 갖고있는 곳이다. 팔공산 하면 가장 유명한 부처님이 바로 지극정성으로 빌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갓바위(관봉석조여래좌상:보물 431호)일 것이다.
이번 답사 길은 영남대학교를 출발하여 환성사, 불굴사, 은해사 거조암, 은해사를 둘러보는 일반적인 답사 코스로 정했다.
먼저 학이 춤을 추는 모습과 흡사하다하여 춤출'舞'자에 학'鶴'자를 써 무학산이라 칭한 무학산 계곡에 위치한 천년고찰 환성사를 찾아 나섰다.
가는 길은 아직도 멀고도 험하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환성사 들어오는 입구길이 비포장 도포라 가기가 힘들었으나 지금은 꽤 많은 부분이 포장이 되어 한결 수월해진 편이나 그래도 먼 길이다. 아직도 그다지 많은 사람이 찾지 않아서인지 자연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맑고 깨끗한 어느 사찰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 환성사 내경
제법 깊은 곳으로 들어간 산에 위치한 경산시 하양읍 사기리에 환성사는 신라 흥덕왕 10년(835)에 심지왕사가 처음 지었으나 고려 후기에 화재로 불타버렸다고 한다. 조선 인조 13년(1635)에 신감대사가 다시 지었으며, 광무 원년(1897) 항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 환성사 일주문
들어가는 입구에는 화재로 소실돼 현재 자연석 초석 위에 4개의 돌기둥만 남아 있는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주문 돌기둥이 남아있다.
이 일주문 기둥은 전국 사찰 가운데 돌기둥으로 된 일주문 중 규모가 가장 크고 건축학적 측면에서 높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돌기둥이 각각 둘레 240㎝, 높이 280㎝ 크기인 점으로 미뤄 건립 당시 일주문은 높이 5m, 폭 10m에 이르는 웅장한 규모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2003년 1월 17일 한 신문에 문화재청은 조만간 문화재위원들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환성사 일주문 모형을 만든 뒤 이를 바탕으로 설계를 해 본격적인 복원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라고 기사화 한 적이 있으나 아직은 건립사업이 진행 중에 있지는 않았다.
환성사가 절에 불탄 사연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절이 날로 번창하여 매일 수백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밥해대기도 힘든터에 이 절에서 대선사가 나 그 기념으로 일주문을 세우고 대웅전 앞에 연못을 파 누각을 짓고 이름을 '수월관'이라 했다. 그리고 만약 이 못을 메우면 절이 쇠락할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그 후 이 절에 게으른 노주지승이 오게 되었는데, 사람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귀찮게 여겨 어느 거지 객승의 말을 듣고 연못을 메우니, 메우자마자 절에 불이 나서 절이 타버리고 그 후 찾아드는 신도도 없고 절도 쇠락하게 되었다 한다. 경산시 문화원에서 발행(1996)한 {경산문화유적총람}에는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전해진다.
'수월관'관 앞의 연못을 보며 "만일 이 연못을 메우면 이 절의 불기가 쇠하리라. 하고 예언하였으므로 역대 주지 스님들이 이 연못을 소중히 관리하였다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러면서 수백년이 지나니, 이 이야기를 아는 이가 적어지고 마치 전설처럼 희미한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절 입구에는 큰 거북 바위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너무 거북이와 닮아서 붙인 이름이다. 심지왕사가 이곳에 터를 잡을 때 이 바위를 보고서 이 바위가 있는 이 절은 쇠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는데 이 또한 희미한 기억 속의 전설이 되었다.
조선 초에 불교를 심하게 나라에서 억압했으나 환성사만은 하루도 신도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한 스님이 이곳에 주지로 있으면서 젊어서는 큰 덕으로 불자의 숭앙을 받았으나 늙어서는 게으름이 늘어 손님이 많은 것이 귀찮게 되어 혼자 곰곰이 생각한 끝에 사람을 시켜 절 입구의 거북바위의 목을 자르게 했다.
거북 바위의 목을 정으로 깨뜨리니 갑자기 연못의 물이 붉게 변하여 이것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절이 오히려 더 소란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거지 같은 객승이 찾아와 묵고 가기를 청하니 주지가 이를 귀찮게 여기며 구석진 골방을 주고 음식 접대도 제대로 하지 않자 이튿날 객승이 길을 떠나면서 "이 절에 사람이 많은 것은 저 연못 때문이니 저것을 메워 버리시오"라고 말했다.
주지는 이 말을 듣고 즉시 마을 사람들을 불러 연못을 메우게 했다. 그런데 흙을 한 삽 퍼붓자 갑자기 연못 속에서 금송아지 한 마리가 날아 오르더니 슬피 울고는 산넘어 동화사쪽으로 날아갔다 한다. 동네 사람들은 겁을 먹고 더 이상 메우려 하지 않자 주지는 절의 사람들을 동원해 메우게 했다. 꼬박 백일이 걸려 연못을 메우고 마지막 한 삽 흙을 퍼붓자. 갑자기 온 절이 불에 붙기 시작하여 그 웅장하던 건물은 모조리 불에타고 겨우 대웅전과 수월관만 남았으나 이후로는 절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다.({경산문화유적총람} pp.388~389, 경산시문화원, 1996)
→ 환성사 수월관
일주문 돌기둥을 지나면 수월관이 나오고 대웅전이 보인다.
→ 환성사 석탑(왼쪽), 석탑 세부(오른쪽)
→ 환성사 석탑 앞 석등부재
대웅전 앞에는 보기에도 이상한 탑 하나와 노주대(爐柱臺) 혹은 정료대(廷燎臺), 또는 요거석(燎炬石)이 있다. 이것은 절에서 각종 야간 행사를 할 때 어둠을 밝히기 위해 장작불을 올려놓기 위해 만든 돌로 다듬어 높이 만든 기둥으로 불을 받치는 받침대이다. 오랜 세월을 반영이나 한 듯 이끼가 많이 베어 있다.
→ 환성사 대웅전
대웅전(보물 562호)은 환성사의 중심 건물로 정면 5칸ㆍ측면 4칸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 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은 가운데만 굵고 높거나 크지 않고 건물의 앞면과 옆면 길이가 거의 같기 때문에 매우 안정된 비례를 이루고 있다.
→ 환성사 대웅전 내 삼존불
→ 환성사 대웅전 내부 윗부분
내부에는 뒤쪽으로 화려한 불단이 있는데 목공예적인 장식으로 아름답다. 1976년 낡은 목재를 갈아내고 단청 무늬와 퇴색된 색채에 비슷하게 보수하였으며, 바깥쪽 단청은 새로 칠하여 옛 것과 새 것의 색이 섞여있다. 건물의 구조나 단청이 대체로 옛스러움을 지니고 있는 건축물이다.
→ 환성사 대웅전내 수미단
내부 수미단에 조각된 문양들은 볼만한데 특히 경전 속에 원숭이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이야기를 표현 한 듯 과일을 이고 가는 원숭이가 수미단 왼쪽 측면에 있는데 조각이 가장 볼 만하다.
→ 환성사 심검당
심검당(경상북도 유형문화재 84호)은 대웅전 옆에 있는 강당으로, 처음 지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 건물은 1976년에 해체하여 수리한 것이다.
심검당의 '심검尋劒'이란 모든 번뇌를 베어 버릴 수 있는 지혜의 보검을 찾는다는 뜻으로 날카로운 지혜의 칼로써 중생의 근본 무명無明을 베어내는 수행의 목적을 단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앞면 3칸ㆍ옆면 3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집이다. 앞쪽에는 겹처마이고 뒤쪽은 홑처마의 구조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간결한 주심포양식이다. 순조 24년(1824)에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참고로 구룡사, 월정사, 마곡사, 개심사등에 심검당이 있다. 심검당 뒤로 산령각이 있다.
→ 산령각
환성사의 수미단을 보고 오던 날 밤 잠을 설쳤습니다. … 중략 …
일주문 아래 길을 만들며 절을 찾아다닙니다 몸에 길이 새겨집니다 시인 조용미의「환성사 행」부분
내려오는 길에 입구 일주문 돌기둥 맞은 편에는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와 원구형 부도 통일신라 후기로 보이는 약사여래불 그리고 석탑 부재들이 있다. 놓치기 쉬우니 보고 가는 게 좋겠다.
→ 환성사 입구 석탑부재(왼쪽), 약사여래불(오른쪽)
→ 환성사 입구 부도들
→ 환성사 입구 석종형 부도
환성사는 조용하고 아담하며 주변 경치가 빼어나 한 번 다녀가면 마음이 편해진다 와촌면 강학리에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원효굴과 신라삼국통일의 성업을 이룩한 김유신장군이 17세 때 이 곳의 석굴에서 심신을 연마했다는 설과 화랑의 수련장이었다는 구전이 남아있는 불굴사를 찾았다.
→ 불굴사 적멸보궁 전경
불굴사는 신라 신문왕 10년(690)에 창건되었고,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50여채의 건물과 12암자 등을 갖춘 큰 절이었다고 전해진다. 일부 책과 사찰에서는 문무왕 때 창건되었다고도 한다.
경내는 1988년에 준공한 삼층석탑 뒤에 적멸보궁이 있는데 1996년에 입적하신 원조스님께서 본래의 대웅전 위치를 찾아 건립했으며 이 속에 삼층석탑을 조성하여 인도에서 봉안해온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시고 있다. 당연히 법당내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지 않다.
→ 불굴사 삼층석탑(왼쪽), 약사보전 앞 석등(오른쪽)
적멸보궁 앞에 삼층석탑(보물 429호)은 불굴사에 가장 오래된 유적이다.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올린 형식으로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넓고 긴 돌로 탑의 구역을 마련하고, 바닥돌은 사방으로 하나씩 4장의 돌을 붙여서 짰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은 꽤 두꺼운 편이며, 돌의 가운데에 2단의 괴임돌을 두었다. 위층 기단의 가운데돌에는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을 새겼으며, 맨윗돌은 얇지만 그 아래에 윗돌과 반듯하게 한 단을 붙여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들을 각각 하나의 돌로 짰는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모두 4단씩으로 줄어들었고 추녀밑은 반듯하지만 마무리 부분에서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 역시 완만한 경사를 보이다가 마무리부분에서의 치켜올림이 상당히 크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으로 보인다.
→ 불굴사 약사보전 내 석불
바로 옆에는 약사보전에 석조입불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401호)이 모셔져 있는데, 동북을 향해서 있으며 전각은 정동쪽으로 건립되어 있어 특이한 점을 보이고 있는데 약사여래불로서 영험도 크다고 한다. 송광사 노승이 현몽을 받아 산사태로 매몰된 것을 발굴한 불상이라 전한다.
땅 위에 있는 화강암의 바위에 받침대를 조각하고 그 위에 불상을 세운 형태로 받침대는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단은 네모난 형태이며 각면에 안상을 새겨 놓았고, 윗단은 둥근 형태로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았다. 머리부분이 몸에 비해 다소 크게 조각되어 있다. 머리에는 굵고 둥근 육계가 솟아있고, 머리모양은 별 장식이 없는 민머리 형태이나 얼굴과의 경계는 뚜렷하게 구분 지었다. 얼굴의 입, 눈, 코, 귀는 훼손되어 큼직한 얼굴에 맞게 다시 새겼고, 굵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양어깨에 걸쳐 입은 옷이 발목까지 덮고 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은 손바닥이 앞으로 향한 모습이나 왼손은 없어져서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불상의 뒷면에도 옷주름이 뚜렷하게 표현되었고, 목 아래쪽과 머리쪽에 큰 구멍이 있어 광배를 부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는 갓바위 부처님은 남자이고 불굴사의 약사불은 여자로 부르기도 하는데 팔공산이 양(陽)이면 안산인 불굴사의 산세는 음(陰)이라고 한다. 약사여래입상은 화강석으로 자연상태의 예측불이라고하여 얼굴부분에 땀이 나고 온몸이 젖으면 태풍이나 폭우가 쏟아진다고 한다. 산아래 음양리가 있는데 갓바위 쪽의 마을을 양지리라하고 불굴사쪽의 마을을 음지리라하니 이는 음양조화가 원만한 지형이라 할 수 있다.
약사보전 앞에는 통일신라시대로 보이는 석등도 하나 있는데 현 위치가 원래의 위치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네모난 기단위에 8엽의 복련 넣었고 그 위로 괴임을 두어 간주석을 받치고 있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일부가 파손되었고 화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평범한 석등이라 하겠다.
불굴사는 또한 약수로 유명한데 약수 한바가지를 마시면 온갖 시름과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 무거운 짐 등이 다 사라지고 속세로부터 떠나는 듯 마음 또한 평온함을 느낀다. 김해 은하사 대웅전에 새겨진 물고기와 같은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경산시를 벗어나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에 있는 은해사 거조암으로 간다. 거조암은 원래 거조사라 하여 은해사 보다 먼저 지었지만, 근래에 와서 은해사에 속하는 암자가 되어 거조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를 한 횃불의 도량이며, 본심미묘진언과 극락왕생 참법 수행처로 유명한 나한 기도 성지 도량이다.
→ 거조암 오백나한
→ 거조암 오백나한
→ 거조암 오백나한
→ 거조암 영산전 석가모니불
돌계단을 오르는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소박하고 간결하게 잘 지은 영산전(국보 14호)은 거조암의 중심 건물이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처음 지었으며, 석가모니불상과 각기 다른 표정의 526분의 석조나한상이 있다.
→ 거조암 영산전 전경
→ 거조암 영산전 측면
→ 거조암 영산전 주심포양식
→ 거조암 영산전 세부
앞면 7칸ㆍ옆면 3칸 크기의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부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영산전은 고려말ㆍ조선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영산전 앞에는 거조암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04호)이 서 있는데 2중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영천시청 홈페이지에는 단탑(單塔)으로서 단탑기단에 삼층석탑을 올린 형식이라 되어 있다.
→ 거조암 영산전 앞 삼층석탑(왼쪽), 영산전 내부 나한들(오른쪽)
위층 기단의 네 면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갔고, 밑면에 계단모양의 받침을 새겨 두었다. 옥개는 제1, 제2옥개에서 5단, 제3옥개에서 4단의 받침을 각출했다.
이 탑의 건립시기에 대해서는 문화재청 문안에는 삼국시대, 사찰관련 서적은 통일신라 후기(말기), 또는 고려초기, 최완수 명찰순례 2권에는 고려후기 등 각기 시대를 달리 표현해 설명하고 있다. 거조암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마음의 안식처로 유명하다.
거조암에서 나오면서 영천시민건강생수를 잠시 덜렸다. 물 맛이 깨끗하고 특히 당뇨병에 좋아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요즘은 피부도 좋아지고 변비에도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더욱 더 알려져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개방하며 물 1말당 500원의 이용료를 받고 있다. 산 위로 멀리 장군봉이 보이며 이 곳에서 김유신 장군이 수도하였다고 관리자 할아버지는 이야기하신다. 주변의 계곡 물이 참 맑아 야유회나 모임 장소로 이용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 은해사 입구 부도
이제 은해사로 향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는 사실 그다지 볼 건물은 없다. 하지만 사찰입구부터 이어지는 숲길은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한다. 아직 조수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심심치 않게 청솔모가 아닌 산 다람쥐가 보인다. 또한 계곡의 맑은 물은 병풍처럼 두른 바위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 대소인 하마비
입구를 조금 지나면 담장안으로 일렬로 늘어선 부도와 공덕비, 갑오갑 유공비가 보인다. 그리고 사찰에서 흔히 보이는 하마비가 있는데 ‘대소인하마비’이다. 하마비는 즉 지위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비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은해교를 넘어서면 2층 누각의 보화루가 나를 맞는다.
은해사는 신라 헌덕왕 1년(809)에 해안사라는 이름으로 혜철국사가 지었다. 조선 명종 1년(1546)에 천교화상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우면서 은해사로 불렀는데, 그 뒤 여러 차례 화재로 건물이 많이 소실되었다. 1919년 크게 넓혀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화루, 심검당, 설선당 등의 건물이 있다.
예전 과거의 가람배치는 사천왕문(四天王門)과 보화루(寶華樓), 대웅전(大雄殿)이 축상에 배치되면서 좌우에 강당인 설선당(設禪堂)과 심검당(尋劍堂), 종무소(宗務所)가 중심영역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사천왕문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중층루각이 자리하고 있다.
→ 보화루 현판 추사친필
→ 은해사 보화루
가장 먼저 맞는 보화루는 현판 글씨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로 유명하다. 보화루를 들어서면 종각과 종무소 선원 심검당 등이 있고 대웅전과 지장전 단서각 그리고 산령각이 있다.
→ 은해사 대웅전
대웅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367호)은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19세기 중엽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일부 책에는 헌종 15년(1849)에 다시 중창한 건물이라 한다. 앞면 3칸ㆍ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 은해사 대웅전 현판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것이라 전한다. 내부에는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 보살이 있고 본존으로 아미타불이 봉안된 아미타 삼존불이 있다. 예전에는 좌우 협시 없이 단독으로 봉안되어 있어고 전각이 대웅전이라 석가모니불을 모셔야 한다는 것을 원칙삼아 석가모니불로 표현한 책도 있다. 그러나 아마도 화재로 인해서 아마타여래가 모셔진 듯 하다.
→ 은해사 대웅전 내 삼존불
삼존불 뒤로 있는 후불탱화 및 삼장탱화(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42호)는 조선 영조 26년(1750)에 조성되었는데, 군도식이 아닌 삼존만의 입상으로 입상 형식인 것이 특이하다.
대웅전 안에 봉안되어 있었던 극락구품회탱은 1750년에 성청(性淸)과 옥련(玉蓮)이 그린 뛰어난 작품이나 수년 전 도난사건을 겪은 후 따로 보관하고 있다.
삼존불 위로는 단순하면서도 간결한 닫집이 설치되어 있고 내부에는 금고(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07호)가 있는데, 금고는 절에서 사용하는 도구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데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타악기이다.
이 금고는 조선 후기에 많이 쓰였던 재질인 청동으로 되어 있고, 표면의 공간은 큰 동심원을 그린 다음, 금고를 두드리는 자리인 당좌의 원과 안쪽 원, 바깥쪽 원으로 나누었다. 당좌는 3중의 연꽃무늬를 돌을 새김하였고, 안쪽 원에는 봉황무늬 3개와 구름무늬 3개를 배치하였다. 바깥쪽 원에는 연꽃무늬 5개와 이중의 연꽃무늬 5개을 교대로 배치하여 장식하였다.
→ 은해사 대웅전 앞 괘불걸이 명문
금고 뒷면에 새긴 명문을 통해 인조 24년(1646)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고, 무늬의 각종 표현이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문양과 그 배치가 금고의 변화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대웅전 앞 괘불 걸이에도 명문이 있어 주목된다.
→ 은해사 지장전
대웅전의 동쪽편에 새로이 지어진 건물로 보이는 지장전이 있고, 대웅전의 서북쪽편으로는 단서각이 있다. 단서각 뒤로는 작은 건물의 산령각이 있다.
이외 산내 암자로는 극락전 수미단으로 유명한 백흥암, 서운암, 운부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일명 돌구멍절이라 불리고 가장 깊은 화장실을 자랑하는 중암암 등이 있다.
팔공산은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함께하는 수 많은 절들이 있기에 그 명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팔공산 자락의 답사기는 대구 동화사를 기점으로 부인사, 북지장사, 파계사, 칠곡 송림사, 군위 제2석굴암, 인각사, 경산 환성사, 굴불사, 선본사, 영천 은해사 등 많은 사찰들을 둘러보는 사찰 기행코스로도 각광을 받고 있어 언제 찾아도 항상 가벼운 마음이다. 넉넉한 마음으로 시간을 두면서 둘러보는 것이 가장 좋은 이 코스 답사 방법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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