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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 사람들은 이 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색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노랑은 이방인이요, 무국적자다. 또한 사람들이 경계하며 불명예스럽다고 여기는 색이다. 노랑 하면 빛바랜 사진, 쓸쓸히 스러지는 낙엽, 배신자가 떠오른다. 노랑은 유다의 옷 색깔, 화폐 위조범의 집 문에 칠해지던 색깔, 강제 수용소행 유대인들이 달아야 했던 '별'의 색깔이었다. 확실히 노랑은 역사가 아름다운 것도, 평판이 훌륭한 것도 아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노랑의 비밀을 따라가 보자. |
노랑의 역사적 상징과 인식의 변천사
노랑에 대한 의문점들 | 사회적 현상 및 이유 등 | |
노랑은 유럽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색임 |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노란색은 높이 평가받음, 아시아나 남미 같은 비유럽 문화권에서도 훌륭한 대접을 받음 -중국에서는 오직 황제만이 노란 옷을 입을 수 있었음. 중국인들에게 노랑은 언제나 좋은 것이며, 권력과 부와 지혜를 상징함 -서양에서는 선호하는 색 조사를 하면 노란색은 맨 꼴찌임 | |
노란색에 대한 비호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 -노랑이 비호감이 된 것은 금색과의 경쟁에서 노랑이 패배했기 때문임. 세월이 흐르면서 노랑의 긍정적인 상징(태양, 빛, 열기, 생명, 에너지, 환희, 권력 등)은 금색이 모두 가져가버림 금색: 반짝이고, 빛이 나며 암흑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주고, 열기를 가져다주는 색으로 여겨짐 노란색: 긍정적인 면을 다 내어준 채 식어가는 색, 흐릿하고 슬픈 색이 됨. 가을, 쇠퇴, 질병 등을 상기시키는 색, 배반의 색, 협잡과 거짓을 상징하는 색이 되고 맘 | |
노란색의 부정적인 특성이 드러난 예 | -중세 시대의 판화에 천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이 종종 노란색 옷을 입은 채 괴상한 모습을 하고 나타남 -프랑스 무훈시의 대표작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배신자 가능롱은 노란색 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됨 -예수를 판 유다는 머리색이 붉은색으로 칠해졌고, 12세기부터 노란색 옷이 입혀지고, 왼손잡이로 묘사됨으로써 자신의 부정적 이미지에 마침표를 찍음(성경에는 전혀 언급이 없는 모습임) -중세 문헌에서 노란색은 배신자의 색으로 나타남(화폐 위조범의 집 문을 노랗게 칠하고, 그에게 노란색 옷을 입힌 다음 화형대로 끌고 가는 과정이 적혀 있음. -19세기에는 바람난 아내를 둔 남편을 노란색 옷차림으로 희화화하거나 노란색 넥타이를 매게 하는 등 괴상한 치장을 하게 함 | |
왜 노랑은 거짓의 색이 된 걸까? | -그 이유는 아무도 모름 -염료제조 교본이나 다른 문헌에 노랑에 대한 언급이 매우 적음 | |
유대인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노란색 | -가톨릭교회는 13세기부터 공식적으로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결혼을 금지했으며, 유대인들에게 식별의 징표를 달게 함. 초기에 그 징표는 끝이 뾰족한 노란 모자, 둥근 헝겊 조각, 모세의 율법 판 형태를 본뜬 형상, 오리엔트를 상징하는 별 모양 등. 색깔도 노란색과 빨간색이 배합된 것이었음. -독인 나치스가 유대인을 구별하기 위해 노란 '다윗의 별'을 가슴에 붙이도록 함. 중세의 상징물에서 노란 별을 꺼내 와 차별의 도구로 사용한 것임. (유대인의 노란색은 특히 회색, 검은색, 갈색, 진청색의 옷이 주조를 이루던 1930년대에 사용되면서 유난히 눈에 띄었음) | |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차별의 정서는 종교개혁의 시기에도 계속 이어짐(프랑스의 칼뱅파 신교도 지역에서 자행된 비기독교인과 이단 종파에 대한 배척운동이 한 예임) | ||
르네상스 시대의 노랑의 위상-큰 변화가 없었음 | -고대 동굴 벽화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작품에는 노랑이 분명히 등장함 -16-17세기 서양 회화의 색채에서는 노란색이 눈에 띄게 감소함 -스테인드글라스:12세기 초까지는 노란색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러다가 주조를 이루는 색이 청색과 적색 계통이 됨 -그 이후 노란색은 배신자나 반역자를 가리키는 색으로만 등장했으며 노랑의 가치 하락은 인상파가 활동했던 시기까지 지속됨 | |
노란색의 가치 상승의 계기(19세기 말) | -추상미술: 다색 배합이나 명암 차이를 덜 사용함. 이런 변화의 시기에 예술은 과학을 표방하면서 파랑, 빨강, 노랑의 세 가지 원색을 구분하게 되고, 수많은 화가들이 이 원색으로만 작업하는 상황까지 이어짐. 그 결과 초록과 달리 노랑은 이 시기에 느닷없는 가치 상승을 경험하게 됨 -전기의 발달도 노랑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데 한몫함. | |
-색은 사회와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변화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변화에 순응하기도 함. 그를 통해 새로운 취향을 이끌어 내고, 필연적으로 상이한 상징적 관점을 생겨나게 함. -성인들의 색 취향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사회적 관계 구조에, 직접적으로 문화적 전통에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음 | ||
마침내 등장한 투르 드 프랑스의 "노란 셔츠 maillot jaune"-노란색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일대의 사건이었음 | -투르 드 프랑스: 매년 7월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프랑스 일주 사이클 대회 -투르 드 프랑스 주최사의 종이 색은 엷고 흐릿한 노란색이었음. -구간별로 선두를 달리는 선수에게 노란색의 셔츠가 수여됨. -이후 '노란 셔츠'라는 어구는 다른 스포츠 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권에도 널리 퍼짐 -이탈리아에서는 경제계의 리더를 지칭하는 데 이 어구를 사용함 -이후 노란색은 예술과 스포츠 분야에서 현대적 가치를 부여받음 | |
노란색의 불명예스러운 표현의 예 ☆색과 관련된 어휘나 표현은 생명력이 강해서 웬만해서는 없애기 어려움 | -노란 자:파업 방해꾼 -노란 웃음: 마지못해 짓는 웃음(노란 색소로 유명한 샤프란은 다량으로 복용하면 광기 같은 것을 불러일으키고 억제할 수 없는 웃음을 유발함) -노란 얼굴빛: 급성 간 질환 | |
노란색을 상징색으로 쓰는 경우의 예 | -프랑스 우체국: 원래는 초록색이었다가 노란색 시트로엥 자동차를 공식 차량으로 도입하면서부터 노란색이 상징색이 됨. 노랑이 눈에 잘 띄었고 빨간색은 이미 소방서에서 사용하고 있었음 -독일이나 스위스의 우체국도 노란색 | |
오늘날의 노랑의 사용, 상징 | -오늘날의 노랑은 빨강의 기능을 반쯤 수행하고 있음. - 축구 경기에서 심판이 레드카드를 꺼내기 전에 경고의 표시로 옐로카드를 내보임 -노란색은 더 이상 금색과 경쟁하지 않아도 됨. 북유럽에서는 금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음(20세기부터는 금색은 평범한 색이 됨) -오늘날 노랑의 진정한 경쟁자는 기쁨과 활력, 비타민C를 상징하는 '주황'임 -오직 어린아이들만 노란색 태양을 지지함. -노란색은 각종 스포츠의 셔츠나 엠블럼에 자주 쓰이고 있음 |
☆노랑에 대한 파스투로의 마지막 제언
'동물의 꼬리를 자기 입속에 넣고 있는 미치광이', 가야르 데 물랭의 [사료로 보는 성서]에 수록된 채색 삽화(부분),1411
중세 시대에 노랑은 단독적으로, 혹은 초록과 함께 광기를 상징하는 색으로 여겨졌다. 많은 그림들 속에서 광대나 미치광이들이 노란색 옷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이런 상징체계를 갖게 된 이유는 당시 많이 사용하던 유황이라는 광물질에서 노란색을 얻었기 때문인 듯하다. 사람들은 유황 연기를 마시면 미치광이처럼 웃어대거나 발광을 하게 된다고 믿었다.
<디아나>, 폼페이 유적지의 빌라 아리아드네에서 발견된 프레스코화
로마의 화가들은 여러 가지 안료를 사용해서 다양한 노란 색조를 만들어 냈다. 황토에서 추출한 노랑은 내구성이 뛰어났지만 피복성에 문제가 있었고, 산화납의 일종인 마시콧은 시간이 지나면 바랜다는 단점이 있었다. 석웅황 또는 웅황이라는 광물에서는 황토보다 훨씬 선명한 노랑을 얻을 수 있었지만 독성이 매우 강했다. 염색 부산물을 이용해 물푸레나뭇과의 식물에서 추출한 것과 유사한 노란색 래커를 만들기도 했다. 중요한 곳을 채색하기 위해 소량의 사프란에서 추출한 값비싼 노랑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쟁이진 사내에 대한 유머러스한 그림엽서, 1905
19세기와 20세기에 부정적 의미의 노랑은 그 범위를 넓힌다. 속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속임을 당하는 사람. 특히 다른 사내와 바람이 나서 도망간 아내를 둔 남편에 대해서도 노란색 옷차림으로 희화화했다. 특정 인물을 꼭 집어 나쁜 노랑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기만, 협잡, 사기 등과 관련되는 모든 영역에서 노란색을 사용했다.
앙드레 쥐카, ,파리 리볼리 거리>,1942
'노란 별'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이미 중세 말에 서유럽의 몇몇 도시는 유대인들에게 식별의 징표를 달게 했다. 둥근 헝겊 조각, 오리엔트를 상징하는 별 모양, 고리, 모세의 율법 판 형태를 본뜬 형상 등 모양은 다양했으나 색깔은 항상 노랑이었다.
조토 디본도네, <유다의 입맞춤(부분)>,1303-1306
중세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유다는 역사상 가장 사악한 배신자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의 신체나 옷차림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의 모습은 후대의 기록이나 그림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중세 말의 판화에서는 종종 짐승같이 야비한 얼굴, 붉은색 머리카락, 배신을 상징하는 노란색 옷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시모네 마르티니, <수태고지(부분)>, 성 안사노 제단화, 1333
중세의 상징체계에서 태양, 빛, 열기, 생명, 권력, 재산 등 노란색의 긍정적인 상징은 모조리 금색이 가져가 버렸다. 반면에 노란색은 배반, 거짓, 협잡, 질병 등 부정적인 의미를 상징하는 색이 되고 말았다.
피터르 더 호흐, <어머니>, 1661-1663년경
17세기에 '나폴리 노랑'이라는 새로운 안료가 시장에 들어왔다. 안티모니산염을 합성해 만든 것으로, 납 성분이 포함되어 독성이 강했지만 매우 아름다운 노란색을 만들어 냈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제한적이지만 능숙하게 나폴리 노랑을 사용해서 빛의 반사나 굴절, 분산 등을 그림에 표현했다. 피터르 더 호흐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는 이 새로운 안료를 훌륭하게 사용하여 노란색을 얼마간 신비스럽게 했다.
일간지 [레퀴프]가 1949년에 출간한 <투르 드 프랑스와 노란 셔츠의 역사> 표지
1919년에 열린 투르 드 프랑스에서 구간별 선두 주자에게 수여했던 노란색 셔츠는 애초에 신문사가 벌인 광고 활동과 관련된 것이었다. 경기의 주최사인 '로토'는 값싼 노란색 종이에 신문을 인쇄했는데, 신문의 지면 색인 노란색을 부각하여 신문 판매를 늘리고자 했다. 한편 '노란 셔츠'는 이후 자전거 경기뿐만 아니라 다른 스포츠 분야에도 리더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이를 통해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던 노랑은 예술과 스포츠 분야에서 새롭게 평가받았다.
벵자맹 라비에가 그린 '래핑 카우'광고 데생, 1930년경
중세의 세밀화든 20세기 광고 포스터에서든 노란 얼굴은 병든 사람의 상징으로, 붉은색 얼굴은 건강이 좋은 사람의 상징으로 쓰였다.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 로버트 칼슨 연출의 파리 샤틀레 극장 공연 모습, 2015
선원들이 입는 레인코트에는 노란색이 아주 잘 어울린다. 노란색 레인코트가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1920년경 덴마크, 독일, 네덜란드에서였던 듯하다. 18세기 중엽부터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고래잡이 선원들이 입던 짤막한 외투 모양의 노란색 방수복이 그 기원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