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12월(109회) 씨알순례길 취지 및 안내"]
2020년 12월 씨알순례길은 특별하게 다사다난한 한 해를 마무리 하는 북한산 자락의 씨알송년회를 포함하여 함석헌기념관, 몽양여운형선생 묘소참배, 의암손병희선생 묘소참배 및 봉황각을 가고자 합니다. 1. 함석헌기념관
함석헌기념관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권 운동가로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고 시인, 교육자, 사상가, 인권운동가, 언론인, 역사가로서의 삶을 살았던 함석헌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마지막 여생을 보내셨던 도봉구 쌍문동 집을 보존, 리모델링하여 작은 기념관 형식으로 건립한 것입니다. 바보새 함석헌(1901~1989)은 1901년3월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하였으며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으며, 그 후 오산학교를 들어가 인생의 스승인 유영모를 만나게 된다. 오산학교 졸업 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귀국 후 에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계우회 사건, 성서조선 사건, 신의주 학생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였으며, 1947년에 월남하였다. 월남 후 종교 강연활동을 하였으며, 1956년에는 [사상계]를 통해 활약하였고 1958년에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발표하여 당시 정부 정책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1970년에는 시사평론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으나 2호를 내고 등록이 취소되었다. 1971년 9월에 복간되었으나 1980년 군사정부의 탄압으로 다시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8년 12월에 복간되었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펼치면서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하였다. 1987년에는 제1회 인촌상(동아일보사)을 수여받았고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 평화대회 위원장으로서 ‘서울평화선언’을 제창하였다. 말년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결국 건강이 악화되어 1989년2월4일 서울대학병원에서 별세하였다. 그 후 ‘이달의 문화인물’(문화관광부)과 독립 유공자로 선정되었으며 묘소는 대전 현충원에 위치하고 있다.(애국지사 제3묘역 329호)
2. 몽향 여운형선생 묘소참배
몽향 여운형(1886-1947)선생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었다. 1920년대부터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 및 외무부 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5년 8월에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같은 해 9월부터 1946년 2월까지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하여 좌·우익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이를 반대하는 좌·우익 양측으로부터 십여 차례 테러를 당하였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저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여운형의 묘소는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에 안치되었는데 위치는 강북구 수유동에서 멀지 않은 솔밭공원 근처이다. 현재 선생의 묘소에는 망석과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은 상단부에 쌍룡 문양을 장식하였으며 ‘몽양여운형선생지묘(夢陽呂運亨先生之墓)’라 적혀 있다. 여운형은 항일독립운동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본 묘소는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릴 수 있는 상징적 장소로서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높다. 2013년 2월 21일 국가등록문화재 제530호로 지정되었다.
3. 의암 손병희선생 묘소참배 및 봉황각
의암 손병희(1861-1922)선생은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3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늑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62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의암 손병희(孫秉熙 1861∼1922)선생의 묘역은 2012년 10월 19일 등록문화재 제515호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북한산 자락의 봉황각(의창수도원)에서 약 50m 떨어진 언덕에 있다. 묘는 곡장(曲牆; 능·원·묘 등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에 둘러싸여 있으며, 봉분에는 화강암 호석(護石)으로 띠가 둘러져 있다. 호석 중앙에는 천도교를 상징하는 표시가 새겨져 있으며 묘 좌우에는 망주석 1쌍이 서 있다. 묘역 오른편에 의암손병희선생묘(義菴孫秉熙先生墓)라고 적힌 묘비, 왼편에 독립선언서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묘역으로 진입하는 길과 묘역 주변은 노송들로 덮여 있다. 묘역 아래쪽에 있는 봉황각(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2호)은 1912년 손병희선생이 지은 누각으로 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이라고도 하는데 이곳은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교육한 수련장이었다. 손병희선생은 이곳에서 1919년의 3·1운동을 구상하였다 한다
4. 씨알순례길은 참가하는 모든 회원,단체들이 더불어 함께 만들어 가는 친목연대 모임이다. 제109회를 맞이하는 12월 씨알순례길에 많은 씨알님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해 어울림 속에 씨알 생명 평화사상이 나비효과처럼 전파되고, 활기찬 기쁨이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체험의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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