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성보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김영환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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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자락에 위치한 천년 고찰 해인사에는 대한민국의 국보이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인 『고려대장경』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각 또한 뛰어난 과학적, 친환경 건축물로, 별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고려대장경』이 정식 명칭이지만, 팔만 장이 넘는 경판으로 이루어져 있어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불립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영구 보존하기 위해 아시아 각국에서 만들어진 대장경은 총 30여 종입니다. 『고려대장경』은 그 가운데 유일하게 원본 목판이 온전히 남아 있는 세계 유일의 완본 한역 대장경이며, 동시에 가장 방대하고도 정확한 대장경입니다.
대장경판 한 장의 두께는 4cm인데, 8만 1,258장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 그 높이는 320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2,744m)보다 높습니다. 또한 새겨진 글자 수는 약 5200만 자인데, 한문을 막힘없이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하루에 4~5천자씩 읽는다고 할 때 전체를 다 읽는데 30년이라는 세월이 걸립니다.
『고려대장경』은 그 방대함뿐만 아니라, 내용의 포괄성, 정확성, 판각한 서체의 아름다움 등으로 보았을 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성보 문화재 중 하나입니다. 먼저, 『고려대장경』은 편찬할 때, 여러 나라에서 조성된 대장경을 참고했기 때문에 그 내용이 매우 풍부하여,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은 중국 『촉판대장경』의 내용도 『고려대장경』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그 전대나 후대에 만들어진 대장경에도 전해지지 않는 불전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거대한 양의 불교 전적들이 많이 사라진 오늘날, 『고려대장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중요한 지혜의 창고이자,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티베트 및 몽고의 불교사를 이해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입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750년의 세월동안 잘 보존되어 오던 이토록 소중한 성보 문화재가 한 때 모두 소실될 위치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6.25 전쟁 때의 일입니다.
1951년 8월 17일부터 9월 18일가지 해인사 지역을 포함한 지리산 일대에 대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할 당시, 공군 제 1 전투비행대전대장이었던 31세의 김영환 대령은 “지리산 토벌대에 쫓겨 가야산에 숨어든 인민군 900여 명을 소탕하기 위해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편대를 이끌고 출격한 김영환 대령은 폭탄 투하 지점이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해인사라는 점을 알게 되자 “빨치산 몇 명 죽이기 위해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불태울 수 없다”며 항명한 채 폭격하지 않고 기수를 돌렸습니다. 특히 자신의 허락 없이는 해인사 지역을 폭격하지 못하도록 금지함으로써 국보인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해인사 경내외의 허다한 문화유적들을 지켜낸 것입니다.
당시 전투기마다 230킬로그램짜리 폭탄 2개, 로켓탄 6개, 기관총 1800발씩을 장착하고 편대장은 250 킬로그램짜리 네어팜탄까지 무장했었으니, 만약 그대로 폭격이 이뤄졌다면 팔만대장경은 잿더미가 됐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시(戰時)였습니다. 항명은 이적행위로 간주돼 현장에서 처형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팔만대장경을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폭격을 거부한 채 비행전대를 이끌고 기지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기지로 귀환한 후 상부에 호출당한 김영환 대령은 당당하게 “영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빨치산 잡겠다고 이것을 불태울 수는 없었다”고 소명했습니다. 결국 그의 소명은 받아들여졌고 결국 그의 용기와 소신이 극적으로 팔만대장경 판본들을 지켜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고 김영환 장군은 1948년 공군을 창설한 일곱 명 중의 한 명입니다. 서울 출생으로 일본 간사이대 항공과와 조선경비대 보병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그는 제7대 국방부 장관을 지낸 고(故) 김정렬 장군의 친동생이기도 합니다. 1946년 미 군정청 정보국에 근무할 당시 유창한 영어로 김정렬 장군과 함께 미군에 한국 공군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해 공군 창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김영환 장군입니다.
그는 1950년 6.25가 발발하자 T-6 훈련기를 조종해 저공비행으로 적 전차와 차량에 폭탄과 수류탄을 던지는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 전공을 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6.25 전쟁 발발 나흘 뒤인 6월 29일 일본으로 건너가 F-51 무스탕 전투기를 인수해 탑승한 채 사흘 만에 한국에 돌아와 첫 출격을 감행한 10인의 전투기 조종사 중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 후 김영환 장군은 1953년 초대 제 10 전투비행단장에 추임해 휴전할 때까지 공군의 최일선 지휘관으로 F-51 무스탕 출격 작전을 지휘했습니다. 휴전 이후에도 그는 전투기 조종사 양성 등 공군 전력 향상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준장으로 진급한 지 두 달 뒤인 1954년 3월 5일 F-51 무스탕 전투기를 조종해 사천에서 강릉기지를 향하던 중 악천후로 추락해 순직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 34세였습니다.
김영환 장군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위대한 유산, 조상들의 혼과 얼이 담긴 소중한 유산을 목숨을 걸고 지켜낸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는 짧은 생애를 살다 갔지만, 그의 고결한 용기와 결단력은 보살행의 한 표본으로 역사 속에, 그리고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