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모리악의 '독사뭉치'라는 소설에 결혼생활의 마지막 수십년을 아내와 떨어져 바룻바닥에서 지내는 한 노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관계의 틈은 30년전 5살난 딸이 아팠을때 남편이 충분한 관심을 보였느냐 아니냐를 두고 일어납니다. 남편도 아내도 먼저 화해를 위해 나서지 않은 채 밤이면 서로가 먼저 다가와주기를 기대하며 잠을 청하지만 무려 30년동안이나 상대방이 머넞 다가와 화해의 손을 내밀기를 기다리며 지루한 자존심 싸움을 합니다. 용서 없는 삶은 단절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이야기입니다.
몇 년전에 상영되었던 밀양이란 영화에서 한 젊은 어머니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어린 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한 범인을 교도소로 찾아갑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분노가 들끓었지만 신앙심을 가지면서 진심으로 범인이 뉘우친다면 용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교도소에서 만난 범인은 아주 평온해진 얼굴로 '나는 예수 믿고 평안해졌으니 당신도 평안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의 태도에 엄마는 격노하면서 종교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용서란 주제를 깊이 생각하게 만든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만든 이창동 감독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를 자기의 시각으로 그려냈습니다. 그가 이해한 기독교의 용서는 단지 하나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단순한 사실뿐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복음의 진리인 우리가 용서받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눅15장의 아버지의 재산을 거덜내고 가문에 먹칠을 했던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 다시 아들의 대접을 받으면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지나간 일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뻔뻔하게 행동한다면 아버지의 용서는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삶과 인격의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성경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 용서받은 자로서의 삶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그 삶은 용서해준 은혜를 잊지 않는 삶인 것입니다.
마18:21절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형제가 내게 범죄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베드로가 고민한 문제는 오늘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도대체 저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하고 받아들여주어야 할까요? 횟수가 정해진다면 그 다음에는 용서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참아준 횟수가 채워주기를 기다립니다. 그런 태도는 단절을 위해서 참아주었을뿐 진정한 용서로 나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나름대로 대단한 횟수를 제시합니다. '일곱번 용서하면 되겠죠?' 사실 일곱 번씩 같은 혹은 다른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일만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들어서 용서를 설명하십니다.
한 주인에게 1만달란트를 빚진 자가 있었는데 주인이 용서해주었다. 여기서 1만달란트는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 동료에게 준 100데나리온을 갚지 않는다고 자기 동료를 잡아 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이 소식이 주인에게 들어가자 주인이 대노하면서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맡겼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받은 자는 자신이 엄청난 빚을 용서받은 사람인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무지는 기독교를 비인격적인 종교처럼 그려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영화속의 살인자처럼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란 근본적으로는 관계의 회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잡아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악된 행위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못한 삶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자녀로서 모든 은총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앞에 나아가는데 불편했던 모든 장애물이 예수님 때문에 사라졌습니다.
엡2: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분리되었던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용서의 의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용서는 이웃과의 관계의 회복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 자신의 용서가 만나는 사랑의 장소입니다. 아이를 살해한 범인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면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의 용서를 구한 것처럼 그 어머니에게도 동일하게 죄의 용서를 구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용서의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을 찾아가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받기 위해 기도하셨습니까? 그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게 될것입니다.
먼저 용서란 비은혜의 사슬을 끊고 고통의 악순환을 멈추게 하는 능력입니다. 용서가 관계를 회복시키는 능력이라면 십자가위에서의 용서는 가해자의 용서가 아닌 피해자의 용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피해자로서 십자가위에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도 우리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면 용서는 참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됩니다. 복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죄의 값을 치러야한다는 생각을 갖기 때문입니다.
나치의 학정을 경험한 신학자인 헬무트 틸리케는 '용서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좋아, 상대가 잘못을 알고 용서를 빌기만 한다면 용서하고 싸움을 끝내지. 우리의 대부분은 용서를 상호교환으로 생각하고 '저쪽에서 먼저 시작해야돼'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상대방을 관찰한다. 그의 표정이나 말에 정말 사죄하는 표정이나 의미가 있는지 그러면서 나는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먼저 용서하지는 않는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나 옳기 때문이다.' 틸리케는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은 저기 죄를 용서하사 다기 기회를 주신 사실을 깨닫는 것이 유일한 답이라고 말합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은 27년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지독한 고문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되고난 뒤 보복대신 용서를 택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흑인과 백인으로 나뉘어 오랜 세월 증오와 원한으로 살아왔던 나라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는 용서의 길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든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지난 세월 백인들의 인종차별 정책 아래서 행해진 그 어떤 잔혹한 범죄에 대해서도 스스로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원칙아래서 가해자와 피해자들을 하나가 될 수 있게 했습니다. 만델라는 인종차별이라는 악순환을 끊어내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정의의 원칙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만델라는 나라의 새출발을위해서는 은혜의 삶, 무조건적인 용서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가 갖고 적용했던 원칙은 성경 마6:1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성공을 유산으로 남기는 법이란 책에서 폴 마이어는 성공하는 인생의 열쇠 19번째가 용서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용서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을 자유인으로 살게 하는 힘이 용서에서 오기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용서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그 상처는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당신의 마음과 정신을 사정없이 좀먹는다. 나는 언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관한 일화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가 자신의 역작 <최후의 만찬>을 그리고 있을 때다. 그는 자신의 숙적의 얼굴을 그림 속 유다의 얼굴로 그려 넣으려고 했었다. 자신의 작품 속에서 그의 숙적을 영원히 부도덕한 사람으로 만들고 은근히 즐기려 했던 것이 명백했다. 그러나 유다의 얼굴을 그리고 난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림의 마지막 부분인 그리스도의 얼굴을 도저히 완성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 숙적을 용서하고 그의 얼굴을 지워 버리고 난 그날 밤에서야 비로소 그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
용서는 우리를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주님과 연합하여 살게 하고, 증오와 파멸로 가득찬 복수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시작입니다.
용서가 가진 두 번째 힘은 가해자가 겪는 죄책감의 중압감을 벗겨주는 것입니다. 뮤지컬로 만들어진 라미제라블에서 빵을 훔친 죄로 19년의 중노동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던 장발장은 감옥에서 아주 거친 죄수가 됩니다. 마침내 출소하는 날, 전과자를 아무도 받아주지 않자 그는 성당을 찾아가 신부의 자비로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밤 그는 찬장을 뒤져 가족은잔을 훔쳐 도망칩니다.
이튿날 아침 3명의 경찰이 장발장을 끌고 신부의 집문을 두드립니다. 은잔을 훔친 범인을 잡아온 것입니다. 문이 열였고 사태를 눈치챈 신부가 먼저 말을 합니다. '다시 오셨군요. 참 다행입니다. 여기 촛대까지 드린 걸 잊어버린 모양이죠? 깜빡 잊고 가셨나 보네요.' 신부는 장발장이 도둑이 아니며 은잔은 자신이 준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신부가 말을 하는 동안 이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던 거친 장발장의 몸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신부는 가만히 그의 떨리는 손에 촛대를 쥐어주며 '그 돈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데 쓰기로 약속하신 것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잊으시면 안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장발장은 자신의 입으로 약속하지 않았지만 신부는 그가 자신의 인생에 스스로 약속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습니다. 신부의 행동은 장발장의 무거운 짐을 벗겨주었습니다. 자유가 무엇인지를 그는 출옥이 아닌 신부의 용서를 통해서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루이스 스미즈는 용서의 기술이란 책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영적수술의 과정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서 그 잘못을 도려내는 것과 같다. 그 사람에게서 상처 입힌 행위를 떼어내어 그 사람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전에는 상대를 가해자로 못박았으나 이제 그런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고 내 기억속에서 가해자는 거듭난다. 이제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자로 보인다. 나를 밀쳐낸 자가 아니라 나에게 속한 자로 느껴진다. 전에는 상대를 강한 자로 알았으나 이제는 도움을 청하는 약자로 보인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있습니다. 자기에게 쏟아지는 조롱과 모욕을 들으면서, 몸으로는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느낍니다. 우리가 볼때는 선한자를 십자가에 못박는 포악한 로마군인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에게 당신이 필요한 존재라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용서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싫어 밀쳐낸 자들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끌어안아야 할 사람들로 비쳐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들의 무지를 아뢰며 용서를 빕니다. 용서란 생각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그것은 머릿속의 개념이 아니라 삶의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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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도사는 그 부족의 원수였습니다. 그들 부족을 잡아 노예로 팔던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그 부족들에게는 하루아침에 가족이 해체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전한 복음이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더 많이 배웠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용서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미 갚을 수 없는 무거운 죄의 짐을 용서받은 자임을 알았기에 그들은 멘도사의 무거운 짐을 끊어내어 그를 자유하게 합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필립 얀시는 겟세마네 기도를 묵상해보면 하나님께도 용서란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할만하시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러나 다른 길이 없었고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위에서 저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로마군인들, 종교지도자들, 어둠속으로 달아난 제자들, 여러분과 나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분의 용서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 된 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와 같은 인간의 약함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아침 여전히 우리의 어깨위에 놓여진 용서하지 못한 무거운 짐, 용서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짊어지고 살아온 무거운 짐을 주님의 십자가로 끊어내고 자유함을 맛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