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 그루지아 공화국
위치 : 아시아 북서부
수도 : 트빌리시 (Tbilisi)
언어 : 그루지야어
기후 : 아열대성기후
종교 : 동방 정교(83.9%), 이슬람교(9.9%)
아르메니아 사도교(3.9%)
경위도 : 동경 43° 30", 북위 42° 00"
면적(㎢) : 69700
해안선(㎞) : 310
종족구성 : 그루지야인(83.8%), 아르메니아인(5.7%),
러시아인(1.5%), 아제르바이아인(6.5%),
기타(2.5%)
독립일 : 1991년 04월09일
국가원수 : 사카쉬빌리(Mihail Saakashvilli)
정체 : 공화제
정부형태 : 대통령 중심제
통화 : 라리(Lari)
홈페이지 : www.government.gov.ge
인구(명, 2008) : 4,630,841
인구밀도(명/㎢, 2008) : 66
평균수명(세, 2008) : 76.51
출산률(명, 2008) : 1.43
실업률(%, 2007) : 13.6
GDP(2007) : 103억불
1인당 GDP(2007) : 2,355
수출 규모 : 21억 430만불(철합금, 철강, 땅콩류)
수입 규모 : 49억 7,650만불(석유 · 가스, 자동차, 의약품)
자원 : 천연가스, 석유 등
1) 국기
지난 그루지아 왕국시대인 9세기경부터 2003년 12월까지 사용된 국기는 갈색 바탕의 왼쪽 위에 검정과 하양 띠가 직사각형 형태로 들어 있다. 갈색은 국가 전통 색깔이며, 검정과 하양은 비극적인 과거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징한다. 기 전체의 가로세로 비율은 5:3이고 색깔별 세부 비율은 가로가 11:14, 세로가 3:3:9이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의 붕괴에 따라 1918년 5월 26일 그루지야 독립국이 형성되면서 3년간 국기로 사용하였는데 당시는 비율이 지금과 달랐다. 1922년 소련에 흡수된 후에는 사용하지 못하다가 1990년 11월 14일 독립을 선언하면서 다시 제정하였다.
2004년 1월 새로운 국기가 제정되어 현재에 이른다. 지난날 그루지야 왕국의 국기를 새롭게 부활 시킨것으로, 하얀색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를 새기고, 그 십자가 주변에 또다른 4개의 빨간색 십자가를 넣은 국기이다. 하얀색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는 성 게오르그의 십자가(St. George's Cross)를 사용한 것이다.
2) 그루지아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이루는 카프카즈산맥 상에 위치한 그루지아는 남쪽으로 터키·아르메니아, 남동쪽으로 아제르바이잔, 북쪽으로 러시아와 접하며, 서쪽으로 흑해에 면한다. 교통과 교역의 접경지로서 역사 초기부터 주변국들의 침략과 점령이 끊이지 않았지만, 산악지형으로 인하여 분열과 통일을 거듭하면서도 오늘날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1918년 5월 26일 제정러시아로부터 독립하였으나 1921년 볼세비키 붉은 군대의 침공으로 구소련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991년 구소련의 몰락과 함께 독립하여 오늘에 이른다.
3) 그루지야 역사
흑해와 카스피해의 지협인 아시아와 유럽의 중간에 위치해 오랫동안 각 방향에서 온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세계에서 가장 혼란스런 인종분포를 보이는 곳이다.
그루지아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와 함께 카프카스 지역 국가에 속해 있으며 신생국가이다.
3개국이 처음으로 통일된 것은 10-13세기였으나 해체됐다가 18세기에 들어 재편성다.
그루지야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로 서 그루지아가 처음으로 침략 받은 것은 기원전 8세기 그리스로부터 였다.
터키의 아나톨리아 족은 1세기 후 동부지역으로 옮겨와 리베리아 왕국을 건설했다.
기원전 550년에서 300년 사이에는 페르시아 제국, 마케도니아 왕국, 셀레우코스 왕조의 침략을 받다가
189년에 로마 제국이 셀레우코스 왕조를 물리치고 독립 아르메니아를 건설했다.
백 년 후 동부의 로마 제국은 카스피해에서 중부 터키까지를 차지해 현재 그루지야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00년경에는 서아르메니아와 서그루지야가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지배를 받았고
리베리아의 동부는 7세기 중반 무슬림 아랍의 지배를 받기 전까지 페르시아 제국이 점령하고 있었다.
아랍과 비잔틴의 다툼은 1060년 아르메니아를 점령한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끝나고 투르크의 지배를 받는다.
다수의 우수한 그루지야 기독교인들이 피난을 갔는데 이 당시는 그루지야가 리베리아란 이름으로 결합해 있던 시기다.
1122년 아랍제국에 의해 트빌리시가 회복되던 시기는 그루지야의 황금시기로 아제르바이잔의 서부와 터키의 동부까지 영토가 확장돼 있었다.
안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 후 800년간 몽골, 페르시아 사파비,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관할했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대제의 군대를 이끌고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던 그루지야 서부지역으로 이동해 왔고 1870년에는 터키로부터 그루지야의 완전한 통치권을 빼았았다.
그루지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자 운동은 제1 그룹, 제2 그룹, 제3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고 가장 진보적인 제3 그룹은 요세브 주가슈빌리(Ioseb Jughashvili)가 속해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이름을 철의 남자로 바꾼 스탈린이다.
자카프카스는 1918년 모스크바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바로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리됐고
그루지야는 1920년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해 점령돼 주변국가들과 함께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ranscaucas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TSFSR)으로 소련의 일부로 편입된다.
스탈린은 그루지야 민족주의자 십 만 명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1936년 자카프카스 공화국이 해체돼 그루지야는 그루지야의 국명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소련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철의 장막이 걷히면서 1990년 여러 당이 참여한 선거가 실시됐고 압하지야(Abkhazia)와 남 오세티아(South Ossetia) 지역에선 소련의 유지를 원하며 독립 다툼이 일어났고 1992-92년의 내전 기간은 무정부 상태를 야기하기도 했다.
소련의 외무장관 출신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Shevardnadze)가 1997년 정부를 안정시킨 그루지야는 경제 회복 중에 있다.
4) 행정 및 일반
행정구역은 9개 주(mkhare), 9개 시(k'alak'i)로 구성되고 수도는 트빌리시(Tbilisi)이다. 남오세티야 공화국과 압스니 공화국, 아자르 공화국 등 세 개의 자치 공화국이 있다.
주민의 상당수는 그루지야인(83.8%)이다. 그 외에도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 아제르바이잔인, 오세트인, 압하지아인, 기타등이 있다.
공용어는 그루지야어이다.
그 외에도 러시아어 터키어, 우크라이나어, 아르메니아어, 아제르바이잔어 등이 사용되고 있다.
종교는 그루지야 정교회가 75%, 이슬람교(터키인과 아제르바이잔인)가 11%, 기타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나라는 민족이 복잡하기 때문에 종교 분쟁이 심각하다.
5) 문화
4세기에 문자가 만들어졌고, 5세기부터 그루지야 특유의 문학이 나타났다.
그루지야인·그리스인들에게 수사학을 가르친 고대의 고등교육 기관이 그루지야 중부의 콜치스에 있었으며,
중세에는 중세 최초의 고등교육 기관인 이칼토·겔라티의 학당들이 12세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전파했다.
12세기에는 그루지야인의 민족 정신을 잘 표현한 시인 쇼타 루스타벨리의 민족 서사시 〈표범 가죽을 입은 기사 Vepkhis-tqarsani〉가 나왔다.
그 후 18세기에 작가 술칸-사바 오르벨리아니, 소설가·시인·극작가 일리아 차프차바제 등이 나타났다.
19세기에는 극작가 기오르기 에리스타비가 근대 그루지야 연극을 확립했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서정시인 아카키 체레텔리, 카프카스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카즈베기,
자연시인 바자 프샤벨라 등이 활동했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그루지야 출신인 스탈린이 소련을 통치하고 있을 때 많은 작가들이 수난을 당하는 가운데 소설가 미헤일 자바히슈빌리, 시인 티치안 타비제가 처형되고 시인 파올로 이아슈비리는 정부의 비판을 받고 자살했다. 1987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텐기즈 아부라제 감독의 영화 〈후회 Repentance〉는 당시의 억압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그루지야는 연극과 건축 문화의 전통을 자랑한다. 그루지야 연극은 유럽과 기타 지역의 연극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쳐 온 왔으며, 아르메니아 건축과 더불어 비잔틴 양식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그루지야의 건축문화는 오늘날 많은 수도원·교회 등의 대형 건축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많은 신문·정기간행물이 그루지야어로 발행되고 있으며 라디오 방송은 그루지야어와 몇몇 소수민족 언어로, 텔레비전 방송은 그루지야어와 러시아어로 이루어지고 있다.
6) 경제
2006년 현재 그루지야의 산업구성은 농업 17.7%, 제조업 27.5%, 서비스업 54.8%로 농업의 비율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서부의 따뜻한 지대에서는 차·잎담배·포도 등이 재배되고 양잠이 성하다. 또한 옥수수·벼·차·감귤류·사과·복숭아 등이 재배된다. 구소련 연방의 일원이었던 시절에는 소련의 차 생산량의 90%가 그루지야에서 생산되었다.
근래에는 유전이 개발되어 석유가 산출되고 석탄, 철광석, 망간, 구리 등 지하자원이 풍부해 광업이 발달하였다. 흑해 연안을 따라 경치가 아름답고 기후가 온난하여 관광업 및 휴양산업도 발달하였다. 휴양도시로는 수후미·보르조미가 유명하다. 캅카스산맥을 넘는 도로와 카스피해 연안을 따르는 철도에 의하여 러시아 및 유럽과 연결된다. 트빌리시·수후미 등 주요도시는 항공기로 모스크바와 연결된다. 바투미와 포티는 각각 석유제품과 망간의 적출항이다.
압하스와 남오세티아 분쟁의 영향으로 경제가 위기상황에 직면했으나 내전이 진정되면서 1995년부터 성장세로 회복되었다. 1994년 수천%에 달했던 인플레이션도 18%로 억제되었고 재정적자도 1996년 6.2%, 1997년 3.6%로 감소하는 추세이다. 1995년 독자통화인 라리화(貨)를 도입하였고, 소규모의 기업들은 사유화되었고 중·대기업들도 사유화가 진행중이다. 1998년 중반에 러시아 경제위기의 영향을 받아 경제상황이 위축되었으나 1999년 이후 점차 회복하고 있다.
2004년 대외채무 20.4억달러이었다. 수출은 17억 6100만 달러, 수입은 33억 2000만 달러(2006년)이다. 주요 수출품은 비금속, 가공식품, 광물제품, 수입품은 광물제품, 기계설비, 가축·축산물, 식물제품 등이고, 주요 수출국은 러시아 18.1%, 터키14.3%, 아제르바이잔 9.8%, 투르크메니스탄 8.9%, 불가리아 5%, 아르메니아 4.7%, 우크라이나 4.4%, 캐나다 4.2% 등이다. 수입국은 러시아15.4%, 터키11.4%, 아제르바이잔9.4%, 우크라이나 8.8%, 독일 8.3%, 미국6%(2005년) 등이다. 2003년 그루지야 중앙은행 총재인 마나가제(Managadze)는 그루지야가 외채 상환능력이 없다며 지불유예 가능성을 시사하였으나 서방 국가들의 원조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7)사회
구소련의 일원이었던 시대에 러시아로의 동화정책이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루지야인들은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현대에 일어난 몇 차례의 폭동이 이를 말해준다. 1956년 일어난 반(反)러시아 폭동은 보안군에 의하여 진압되었지만 독립을 위한 저항의 일면이었다. 또한 1978년 개정 헌법에서 그루지야어의 위상이 하락한 것에 분개하여 그루지야인들은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였다.
오늘날 그루지야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그루지야 내부의 민족분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루지야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독립을 주장하였지만 그루지야 내부에 존재하는 다른 민족의 분리 독립은 허용하지 않고 있다. 남오세티아와 아브하즈에서 1989년 이후부터 분리주의가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남오세티아 자치지역의 오세티아인들은 러시아 자치공화국 북(北)오세티아와 통일을 시켜줄 것을 그루지야인에게 요구하면서 반정부 내란을 일으켰다. 또한 아브하지아 자치공화국 주민의 18%를 구성하는 아브하즈인들도 독립을 요구하면서 그루지야 정부에 대항하였다. 아브하즈나 남오세티아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아자리아 자치공화국도 민족분규가 있다. 아자르인들은 원래 그루지야 계통의 사람들이나 이슬람교를 신봉하는데, 이슬람교도인 아자르인과 그리스도교도인 그루지야인 간에 갈등관계가 표출되고 있다.
또 다른 사회 문제는 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난 부패문제이다. 2000년 초 그루지야 정부는 '부패 방지를 위한 국가의 기본 방침"을 공표하여 부패추방에 힘쓰고 있다.
그루지야는 구 소비에트연방국가 중 최고 수준의 의료체계를 갖추었으며 온천이 유명하다. 중등교육까지 무상 의무교육이 이루어진다. 그루지야어로 펴내는 신문·정기간행물이 많이 발행되며 텔레비전 방송국은 12개이다.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는 5개, 안터넷호스트수는 10,752개, 이용자수는 175,600명(2005년)이다.
8) 최근 정세
그루지야는 1990년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러시아에서 독립한 신생국가다.
그러나 독립 직후 그루지야 내 남오세티아가 그루지야와의 전쟁 끝에 자치권을 확보하면서 양측간 군사적 분쟁이 시작됐다.
민족적으로 그루지야와 완전히 다른 남오세티아가 완전한 분리 독립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 7만명의 남오세티아는 1991년 러시아에 속한 북오세티아 공화국과 통합하기 위해 그루지야로부터 독립을 선언, 18개월 간 정부군과 내전에 들어갔고 1994년 러시아 평화유지군 주둔을 조건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그러나 친미 성향의 미하일 사카쉬빌리가 그루지야 대통령이 취임 직후 영토 통합을 추진하면서 그루지야와 남오세티아는 갈등을 빚기 시작했고 지난 2월 코소보 독립에 자극받아 본격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다.
이에 대해 그루지야로서는 남오세티아와 또 다른 자치 영토인 압하지야의 독립 움직임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만일 압하지야가 완전 독립하거나 남오세티아가 러시아의 북오세티아와 합병할 경우 영토적 손실은 물론 흑해와 카스피해의 석유 등 풍부한 자원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8일 러시아와 그루지아의 전면전이 일어났었다.
원인은 그루지아의 남오세티아 공격하여 자국민이 희생당했다는 이유도(남오세티아에는 러시아 평화 유지군이 주둔해 있고, 남오세티아 주민의 80%이상이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다) 있지만, 러시아의 NATO와 그루지아를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견제의 의미가 이유라고 본다.
러시아의 가스관, 주변 국가의 송유관등이 그루지아, 남오세티아를 경유하기 때문에 친미성향이 강한 그루지아의 남소세티아 병합을 견제하여 미국의 영향력을 억제하여 자신들의 석유, 천연가스 수출을 원활히 하려 하는 이유인 것 같다.
러시아-그루지아의 전쟁은 내면을 들어다 보면 미국과 러시아의 힘겨루기 라고 생각한다.
러시아-그루지아의 전쟁은 러시아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그루지아가 사실상 항복을 하면 끝이 났지만, 후일에도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장담은 못할 것이다.
러시아는 친미성향이 강하고 NATO에 가입하려는 그루지아를 꾸준히 견제 또는 자신들의 영향권 내에 두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9) 한국과 관계
수교 : 1992년 12월 14일
통상(2007) - 수출 : 350만 5,000불(섬유, 알루미늄)
- 수입 : 3,984만 9,000불(화학제품, 자동차)
체류자(명, 2007) : 20
대사관 : 우크라이나 대사관 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