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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海露梁忠武李公廟碑文 - 宋時烈/宋子大全卷一百七十一
南海之露梁。有廟三間。中設位牌。以祀故忠武李公者也。神宗皇帝萬曆紀元。倭酋秀吉弑其君。擧國來寇。公先在北邊。屢立奇功。而人不甚知。辛卯二月。擢授全羅左水使。公至則日修戰具。撫循士卒。遂與賊戰。敗之於玉浦。敗之於露梁及唐浦。敗之於蛇梁。斬其貴將。又敗之於唐項浦。撞破其四十餘船。皆以少擊衆。上下書褒之。陞其資級。至永登浦敗之。至見乃梁。誘賊敗之。腥血漲海。又戰於安骨浦。燒其船四十餘。遂進戰於釜山。又破其船百餘艘。遂置陣閑山島。積粟整師。以爲迎駕龍灣之計。朝廷爲置三道統制使以處之。賊畏甚行間。以愚我諸將。元均又嫉構之。朝廷兩信之。公遂被追栲。有大臣言。上亦念公功。只削職從軍以責效。時母夫人卒。公便道奔哭。卽行曰。吾一心忠孝。到此俱喪矣。軍民擁馬號泣。遠近嗟惋。元均代爲統制使。爲賊所誘。軍敗走死。而閑山遂陷。賊遂由西海進陷南原。朝廷遂以公復爲統制使。公以十騎馳入順天府。稍收亡卒。遂戰於於蘭島碧波亭。皆大破之。捷至。上欲陞公崇品。有言公爵秩已高。遂止。止賞將士。天將楊公鎬亦送銀段以慰賞。而奏聞天朝。公之名遂得聞天下。時公猶食素寢苫。上特賜諭旨。且送草木之滋。公涕泣勉從。上念公舟師單弱。欲令前却以觀勢。公馳啓曰。臣一去港。則賊必登岸長驅矣。時天將陳璘,劉綎水陸來會。公接應有方。俱得歡心。公進據古今島。募民耕作。以便公私。南民繈屬歸之。賊將行長亟謀撤歸。求道甚恭。兩天將中其賄。皆欲許之。公諷刺甚至。行長又遣使于公。遺以銃劍。公以讎賊不可通使。嚴辭却之。將士勇氣自倍。行長計窮。遂引泗川屯賊以自援。一夕大星隕海中。軍中畏之。戊戌十一月十九日。公與陳公迎戰于露梁。賊大挫衄。公忽中丸而絶。陳公被圍急。公從子莞有膽略。不發哭。督戰自如。遂解陳公圍。而行長僅得遁去。旣發喪。我師與天將兩陣皆號哭。聲殷海中。自南海至牙山。迎柩哭奠。千里不絶。亦有喪之三年者。僧徒處處設齋。皆曰活我命復我讎者公也。公內有篤行。貞介自守。意有不可。雖達官要人。必據義媿屈之。發謀制事。擧無遺策。奮勇決機。前無堅敵。軍政簡而有法。不妄殺一人。而三軍一志。莫敢違令。至其擧大義斥倭使。使中賂者顏騂。主和者顙泚。則張忠獻,岳武穆蔑以加矣。以故當積衰諱兵之餘。遇天下莫強之敵。大小數十戰。俱以全取勝。蔽遮東南。以基中興之偉烈。至蒙皇上寵命。錫以印符。則一國之人。雖家尸而戶侑。不爲過矣。況此露梁者。旌纛之所臨。喑啞之所被。其精爽之可畏者。固將億萬年不泯。蹴山噴海。風怒雲屯。常有跐馬島擣江戶之氣。則嚴奉之擧。尤在所先也。舊有廟。觕隘下窄。不足以妥公之靈。故統制使鄭榏。圃隱先生之耳孫。感公忠義。卽改而新之。又伐大石以爲牲繫。而因閔學士鼎重俾余書其事。文旣粗成。判書洪公命夏以事聞。孝宗大王亟徵草本。特賜乙覽。亦豈拊髀頗牧之意歟。只今仙馭上賓。陵柏蕭森。公之毅魄。重亦飮泣於九原矣。因幷記此。以備始末。俯仰疇昔。爲之抆血也。公諱舜臣。字汝諧。德水人。時崇禎辛丑十月日也。
今上癸卯。賜祠額曰忠烈。至是而崇報無憾矣。碑役前後相之者。統制使朴公敬祉,金公是聲也。是年七月日追刻。
남해 노량(露梁)의 이충무공(李忠武公) 묘비문(廟碑文) - 송시열/송자대전171권
남해의 노량에 삼간(三間)의 사당이 있으니, 그 안에 위패(位牌)를 설치하고 고(故) 이 충무공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신종황제(神宗皇帝) 만력(萬曆) 기원(紀元)에 왜추(倭酋) 수길(秀吉)이 그 임금을 시해하고 온 나라의 병력을 일으켜 침략해 왔는데, 공이 먼저 북변(北邊)에 있을 때 자주 기공(奇功)을 세웠으나 사람들이 전연 알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신묘년(1591, 선조24) 2월에 공을 발탁하여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에 제수하였다. 공은 부임하자마자 날마다 전구(戰具)를 수리하고 사졸(士卒)들을 사랑으로 보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왜적(倭賊)과 싸워서 옥포(玉浦)에서 패배시키고, 노량(露梁) 및 당포(唐浦)에서 패배시켰으며, 사량(蛇梁)에서 패배시켜 그들의 귀장(貴將)을 베었고, 또 당항포(唐項浦)에서 패배시켜 그들의 전선(戰船) 40여 척을 부수었는데, 이것은 모두 적은 수로 많은 무리를 친 것이다.
그러자 상이 교서(敎書)를 내려 칭찬하고 그의 자급(資級)을 올려 주었다. 영등포(永登浦)에 와서도 그들을 패주시키고, 견내량(見乃梁)에 이르러서도 왜적을 유인하여 패배시키니, 성혈(腥血 비린내 나는 피)이 바다에 창일하였다. 또 안골포(安骨浦)에서 싸워 그들의 배 40여 척을 불지르고 마침내 부산포에 진전(進戰)하여 또 그들의 배 1백여 척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진영(陣營)을 한산도(閑山島)에 설치하고는 군량을 비축하고 군사를 정돈하여 어가(御駕)를 용만(龍灣 의주(義州)를 말함)에서 맞이할 계획을 세웠는데, 조정이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를 새로 설치해서 공을 임명하므로 왜적이 매우 두려워하여 간첩을 놓아서 우리 제장들을 우롱하였고, 원균(元均)이 또 공을 시기하여 무함하니, 조정에서 이 두 가지를 믿었으므로 공이 마침내 추고(追栲)를 받았는데, 대신의 말이 있었고 상도 공의 공을 생각하여, 관직만을 삭탈하고 종군시켜 죽을힘을 다할 것으로 책임지웠다. 그런데 때마침 모부인이 졸(卒)하므로 가는 길에 분상(奔喪)하여 통곡하고, 즉시 떠나면서 말하기를,
“나의 일편단심은 충(忠)과 효(孝)뿐인데, 지금에 와서 모두 상실하였다.”
하니, 군민(軍民)이 말[馬]을 둘러싸고 울부짖었고, 원근 사람들이 탄식하고 슬퍼하였다.
한편 원균은 공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었으나 적의 꾐에 빠져 군사가 패하자 달아나다가 죽었고, 한산도는 마침내 적에게 함락되었다. 왜적이 드디어 서해(西海)로부터 진격하여 남원(南原)을 함락하므로, 조정에서 마침내 공을 다시 통제사로 삼으니, 공이 10기(騎)로 달려 순천부(順天府)에 들어가서 도망한 군졸 약간을 수집하여 마침내 오란도(於蘭島)와 벽파정(碧波亭)의 싸움에서 모두 적을 대파(大破)시켰다. 승첩의 소식이 조정에 이르자, 상이 공에게 높은 품계로 승진시키고자 하니, 공의 관작과 품계가 이미 높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므로 드디어 중지하고, 장사(將士)들에게만 상을 내렸다. 그리고 천장(天將 명 나라 장수를 말함) 양공 호(楊公鎬)도 은자(銀子)와 필단(匹緞)을 보내어 위로의 상(賞)으로 내리고 이어 천조(天朝)에 아뢰니, 공의 이름이 마침내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에 공은 아직도 반찬 없는 식사를 하며 거적자리에서 잠을 잤는데, 상이 특별히 유지(諭旨)를 내리고 또 군량(軍糧) 등 군수품을 보내니, 공이 눈물을 흘리며 애써 따랐다. 상이 공의 수군(水軍)이 고단(孤單)하고 나약함을 염려하시어 후퇴해서 형세를 관찰하게 하고자 하니, 공이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한 번 이 항(港)을 떠나면 적이 반드시 상륙하여 승승장구(乘勝長驅)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에 천장(天將) 진린(陳璘)과 유정(劉綎)이 수로와 육로로 와서 회합했는데, 공이 그들을 접응(接應)하는 데 방도가 있어서 모두에게 환심(歡心)을 얻었다.
그리고 공이 고금도(古今島)에 나아가 웅거해 있으면서 백성을 모집하여 농사를 경작하게 하되 공사(公私)간에 서로 편리하게 하니, 남방의 백성들이 아이를 업고 가족을 거느리고 따라오므로 적장 행장(行長)이 급히 철군하여 돌아갈 길을 열어 주기를 요구하되 매우 공손한 태도로 하였다. 그런데 두 천장(진린(陳璘)과 유정(劉綎))이 그들의 뇌물을 받고 모두 그들의 요구를 허락하고자 하므로 공이 그들을 매우 풍자하였다. 적장 행장이 또 공에게 사신을 보내어 총과 칼을 주자, 공이 수적(讎賊)과 통사(通使)할 수 없다 하고 엄한 말로 물리치니, 장사(將士)들의 용기가 저절로 배나 용솟음쳤다.
적장 행장은 계획이 궁박해지자, 드디어 사천(泗川)에 주둔한 적(賊)을 이끌어 자기를 구원하게 하였다.
하루저녁에는 큰별이 바다 가운데로 떨어지므로 군중(軍中)이 두려워하였다. 공이 무술년(1598, 선조31) 11월 19일에 진공(陳公 진린(陳璘)을 말함)과 더불어 노량(露梁)에서 적과 싸워 적을 크게 무찔렀는데, 공이 갑자기 적의 총탄에 맞고 절명하니, 진공이 포위를 당하여 위급하였다. 공의 조카 완(莞)은 담력(膽力)이 있었는데, 발상(發喪)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싸움을 독려하여 마침내 진공의 포위를 풀어 주었고 행장은 겨우 도망갈 수 있게 되었다.
이윽고 발상(發喪)을 하니, 우리 군사와 천장(天將) 두 진영(陣營)이 다 부르짖어 통곡하여 그 소리가 바다에 가득하였다. 남해(南海)에서 아산(牙山)에 이르기까지 영구(靈柩)를 맞이하여 통곡하면서 제전을 올리는 백성들이 천 리 길에 끊이지 않았고, 또한 삼년상(三年喪)을 입은 자도 있었다. 승도(僧徒)들은 곳곳에서 재(齋)를 설치하고 다들 말하기를,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고 우리의 원수를 갚아 준 분은 공이시다.” 하였다.
공은 안으로 독행(篤行)이 있어 곧은 절개를 스스로 지켰고, 뜻에 옳지 못함이 있으면 비록 달관(達官)이나 요인(要人)일지라도 반드시 의(義)를 의거하여 굴복시켰고 꾀를 내어 일을 할 때는 전혀 실책(失策)이 없었으며, 용기를 내어 기회를 결단하면 앞에 굳센 대적이 없었다. 군정(軍政)이 간결하되 법도가 있었고, 한 사람도 망녕되이 죽이지 않으므로 삼군(三軍)이 한뜻이 되어 감히 군령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대의(大義)를 들어 왜사(倭使)를 물리침에 이르러서는 뇌물을 받은 자로 하여금 얼굴이 붉어지게 하였으며, 화친(和親)을 주장한 사람으로 하여금 이마에 진땀을 흘리게 하였으니, 장 충헌(張忠獻)과 악 무목(岳武穆)도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나라가 극도로 쇠약하고 병화(兵禍)가 일어난 때에 천하의 막강한 적을 만나,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싸움에서 모두 전승(全勝)을 거두어 동남(東南)의 적로(賊路)를 차단하여 국가 중흥(中興)의 위대한 공을 세웠고, 황상(皇上)의 총명(寵命)을 입어 인부(印符)를 내려 주기에 이르렀으니, 온 나라의 백성들이 비록 집집마다 신주를 모시고 제향을 올린다 할지라도 지나칠 것이 없다. 더구나 이 노량은 공의 깃발[旌纛]이 임한 곳이며 호령(號令)이 닿은 곳으로, 그 정령(精靈)의 무서운 기세가 진실로 억만년이 흘러가도 산을 박차고 바다를 내뿜으며, 바람이 성내듯 거세고 구름이 모이듯 웅장하여 항상 대마도(對馬島)를 짓밟고 강호(江戶 일본 동경의 옛 이름)를 공격할 기세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엄히 받들기를 더욱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옛날의 사당이 있으나 비좁고 허술해서 공의 신령을 봉안할 수 없으므로 통제사(統制使) 정익(鄭榏)이 포은 선생(圃隱先生)의 이손(耳孫 현손(玄孫)의 손자를 말함)으로, 공의 충의(忠義)에 감동하여 즉시 이 사당을 고쳐 새롭게 하고, 또 큰 돌을 다듬어 빗돌을 세워 놓고서 학사(學士) 민정중(閔鼎重)을 통하여 나에게 그 사실(事實)을 쓰게 하였다. 그리하여 글이 대충 이루어지자, 판서(判書) 홍공 명하(洪公命夏)가 그 일을 보고하므로, 효종대왕이 급히 초본(草本)을 거두어들여 특별히 을람(乙覽)을 해 주셨으니, 또한 어찌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그리워했던 뜻이 아니었겠는가. 지금은 효종대왕이 승하하시어 능소(陵所)의 잣나무만 쓸쓸할 뿐이니, 공의 굳센 혼백이 거듭 구원(九原)에서 슬퍼할 것이다. 이를 여기에 아울러 기록해서 시말을 갖추고 옛일을 생각하면서 피눈물을 닦는다. 공의 휘는 순신(舜臣), 자는 여해(汝諧)인데, 덕수인(德水人)이다. 숭정 신축년(1661, 현종2) 10월 일에 쓴다.
금상(今上 현종을 가리킴) 계묘년(1663)에 사액(賜額)을 내리시기를 ‘충렬사(忠烈祠)’라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숭보(崇報)에 유감이 없게 되었다. 비(碑)의 역사를 전후하여 도운 사람은 통제사 박공 경지(朴公敬祉)와 김공 시성(金公是聲)인데, 이해 7월 일에 추가하여 새겼다.
泛海錄 - 許穆/記言別集卷之十五
十六年九月。余遊海上。辛亥。宿於三千舊鎭。乘早潮入海。海上月高數丈矣。海中舟人。西指露梁。其南岸有忠愍祠。前有南海大戰碑。又北岸有萬曆中皇明征倭將士題名。蓋水兵都督陳璘。嘗駐兵於此云。
曉泊昌善島。於是曙氣始白東方。一星二星漸稀。而曉望皆漁火鹽煙。島有兩岸。東曰興善。西曰昌善。山木多松椒。太僕置監。牧畜馬於此。島中土沃多穰。於田畔皆樹柵。令毋害禾穀。遇馬群。多騂驪文騮。而入山者多駿云。或曰。有神馬。往往雲霧間時見云。夕復登舟。泊南海之梯嵒。其人以舟爲室。善沒海取蠔。鶉衣而極貧。此臝蟲誌所謂蜒蠻。其性變譎。
明朝過榧子堂西。距南海縣二十里。海岸山木皆榧。其上有神祠。有右老傳。新羅世有王子入海島。死而爲神。至今海中多祀之。作迎享神詞。
微雨。至錦山。環山周以石築。舊遠不知其年。而古時蓋畜馬於此。其傍有曲浦權管舊壘。於山下賞橘。
薄晩晴。山中入深松。水淸石白。間有石壁潭水。沿溪深入無路。過石梁從陰崖石逕。至顚海中。九月霜。不殺草木葉不凋。上有煙臺。其下刻石。由虹門上錦山六字。又刻嘉靖壬辰。前翰林學士周世鵬景遊,李鷹翰之,尙州浦權管金九成同登。其他石剝。落不可見。煙臺北層石上平。可梯而登最高。常有煙霞。命曰霞石臺。絶頂西有古祠。南海之人。事聖祖神師。而有巫祝主之。
黔魅以西海岸。沮洳水濁。以東爲碧海。煙霞以外。濁氣不及其外。爲溫海與天無垠。天極於蒼蒼。水極則黑。此天與海之辨也。海中多洲島。間有煙臺,戍壘。如巨濟,閑山,蛇梁,赤梁,黔魅,娜羅。其外外洋。煙霞蓐芝。在外洋。蠻夷所泊。東南望日本。西則耽羅而海遠常多暗。一歲再三見。見則大雨。其南則海外諸蠻夷。測其方。如羽民,沙菙,瓜蛙,琉球,麻羅奴。外夷誌。皆在海中。天下之東南。作南海中感懷詩二首。絶頂南石壁下。憩菩提佛宇。其前又石壁。石壁上。觀石浮圖。其下。蛟龍窟在石壁間。又其傍少下。聲音窟。吾入其中。擊石鼓。響滿谷。有同遊子儀。好狂氣舞於石下。又其前石壁下。穿出石竇。乃下海曰虹門。菩提下石峯間。稱山氣積處。世傳太祖微時。從無學祭山靈云。欲往觀。子儀不從。神祠南石峯最奇。曰捨身巖。或曰九井峯。上有九井。無獸蹄鳥跡。山出海上。多怪石奇巖。吾南遊至此極矣。山在南海中。去京都千餘里。海中多蟲蛇怪氣。山出蔘,苓。夜宿聖祖祠。曉起觀星辰。乍有雲曀。在東南。俄而海陰大風。朝從九井下憩其陰。有浮屠煕克。贈我躑躅杖。作古詩一首酬之。
朝雨。下山乙卯出海。宿百泉寺。同遊叔挺,子儀,雲程,少年生金南老。叔挺。出海歸海莊。
금상 16년(1638, 인조16) 9월, 바다를 유람하였다
신해일, 옛 삼천진(三千鎭)에서 숙박하고 새벽 밀물을 이용해 바다로 들어가니 바다 위로 두어 길 정도 높이에 달이 두둥실 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뱃사람이 서쪽으로 노량해협(露梁海峽)을 가리키면서 남쪽 해안에는 충민사(忠愍祠.충렬사를 말함)가 있고 그 앞에 남해대전비(南海大戰碑)가 있으며, 또 북쪽 해안에는 만력(萬曆) 연간에 왜군을 정벌한 명나라 장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이 이곳에 주둔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새벽에 창선도(昌善島)에 정박하였다. 이때에 새벽 기운이 부옇게 밝아오기 시작하면서 동방에 별이 하나둘씩 희미해져 갔다. 날이 밝은 뒤에 바라보니 이 모든 것이 고기잡이배의 횃불과 소금 굽는 연기였다. 섬은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 동쪽의 섬은 흥선도(興善島)라 하고 서쪽의 섬은 창선도라 하였다. 산에는 소나무와 산초나무가 많이 자라며, 태복시(太僕寺)에서 이곳에다 감목관(監牧官)을 두어 말을 기르고 있다. 섬 안의 땅은 비옥하여 수확이 잘되었고 밭두둑에는 모두 울타리를 쳐서 말들로 인해 곡식이 해를 입지 않도록 방비하였다.
무리를 지은 말 떼를 만났는데 각종의 훌륭한 말들이 많이 보였고, 산속으로 달아난 말 가운데에도 준마가 많이 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그 가운데 신마(神馬)가 있어 운무(雲霧) 사이로 왕왕 그 모습을 보인다고도 하였다.
저녁에 다시 배에 올라 남해의 제암(梯嵒)에 정박하였다. 그곳 사람들은 배를 집 삼아 살고 잠수를 잘하여 조개를 잡아 생활하는데, 누더기 옷에다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이들은 《나충지(臝蟲誌)》에서 이른 단만(蜒蠻)에 해당되는 미개인들로서 그 성질이 변덕스럽고 간사하다.
다음 날 아침 비자당(榧子堂)을 방문하였다. 서쪽으로 남해현(南海縣)과는 20리 떨어진 거리에 있으며, 해안의 산목(山木)들이 온통 비자나무였다. 그 위에는 신사(神祠)가 있는데, 고로(古老)들이 전하는 말로는 신라 때에 어떤 왕자가 섬으로 들어와 죽어서 신이 되었는데 오늘날까지도 바다 가운데서 제사를 지내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영향신사(迎享神詞)〉를 지었다.
가랑비 속에 금산(錦山)에 도착하였다. 산 주위로 석축(石築)이 쌓여 있는데 오래되어 어느 해에 쌓은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옛날에 이곳에서 말을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 곡포 권관(曲浦權管)의 옛 보루가 있다. 산 아래에서 귤을 감상하였다.
어스레한 황혼에 맑은 날씨였다. 산에 올라 깊은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물은 맑고 바위들은 하얗게 빛나는데 간간이 바위 절벽과 깊은 연못이 보였다.
계곡을 따라 깊이 들어가자 길이 끊기고 없었다.
그래서 돌다리를 건너고 그늘진 벼랑 아래 바윗길을 타고 산꼭대기로 간신히 올라갔다. 바닷가의 9월 서리는 초목을 죽일 정도는 아니어서 잎들이 아직은 시들지 않았다. 산꼭대기에는 연대(烟臺.봉화대)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글씨를 새겨 놓은 바
위가 있었는데, ‘홍문을 지나 금산에 오르다〔由虹門上錦山〕’라는 여섯 자와 또 ‘가정 임진년(1532, 중종27)에 전 한림학사 주세붕 경유, 이응 한지, 상주포 권관 김구성이 함께 오르다.〔嘉靖壬辰前翰林學士周世鵬景遊李鷹翰之尙州浦權管金九成同登〕’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밖에 돌에 새겨진 글들은 깨어져 나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연대의 북쪽 층석(層石)은 위가 평평하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었고, 가장 높은 곳은 안개와 노을이 늘 감돌고 있어 하석대(霞石臺)라 불렀다. 산꼭대기 서쪽에는 오래된 사당이 있는데, 남해 사람들이 성조신사(聖祖神師)를 섬기는 곳으로서 무당을 두어 제사를 맡아보게 하였다.
검매도(黔魅島) 서쪽은 해안이 저습하고 바닷물이 혼탁하며, 동쪽은 푸른 바다〔碧海〕이다. 연하도(烟霞島) 바깥으로는 혼탁한 기운이 미치지 않으며 그 바깥은 따뜻한 바다〔溫海〕로서 하늘과 그 경계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 끝은 푸르고 물 끝은 검기 때문에 이로서 하늘과 물을 구분할 수 있다.
바다에는 섬이 많고 그 가운데 거제도(巨濟島), 한산도(閑山島), 사량도(蛇梁島), 적량도(赤梁島), 검매도, 나라도(娜羅島) 등에는 연대(烟臺)와 수루(戍壘)가 있다. 그 섬들 바깥은 외양(外洋)에 해당하는데, 연하도(烟霞島)와 욕지도(蓐芝島)가 외양에 있으며 오랑캐들은 이곳에 와서 정박한다. 동남쪽으로 멀리 일본(日本)이 있고, 서쪽으로는 탐라(耽羅)가 있다. 바다 멀리 있어 보이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고 1년에 고작 두세 번 보이는데, 보이게 되면 큰 비가 내린다.
그 남쪽에는 해외의 오랑캐 국가들이 있는데, 그 나라들을 살펴보면 우민(羽民), 사화(沙華), 과와(瓜蛙), 유구(琉球), 마라노(麻羅奴) 등이며, 《외이지(外夷誌)》에는 이들 나라가 모두 바다 가운데 있으며 천하의 동남쪽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남해중감회시(南海中感懷詩)〉 2수를 지었다.
산꼭대기에서 남쪽으로 석벽을 타고 내려와 보리암(菩提庵)에서 휴식하였다. 보리암 앞에 또 석벽이 있는데, 석벽 위에 돌부처가 보였다. 그 아래로 교룡굴(蛟龍窟)이 석벽 사이에 있고, 또 그 곁에서 조금 내려가면 성음굴(聲音窟)이 있다. 내가 그 속에 들어가 돌 북을 쳤더니 북소리가 온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함께 유람 간 자의(子儀)는 광기(狂氣)를 잘 부려 바위 아래에서 춤을 추었다.
또 그 앞의 석벽 아래에 바위구멍을 뚫어서 바다로 내려가게 해 놓았는데 ‘무지개문〔虹門〕’이라 하였다.
보리암 아래 바위 봉우리 일대를 산의 기운이 쌓인 곳이라고 하는데,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는 태조가 왕이 되기 전에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따라와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가서 구경하려고 했으나 자의가 따라 주지 않았다. 신사(神祠)의 남쪽에 있는 바위 봉우리가 가장 기이한데 사신암(捨身巖)이라고 한다. 혹은 구정봉(九井峯)이라고도 하는데, 꼭대기에 아홉 개의 우물이 있고 짐승이나 새의 발자국조차 없었다.
산이 바다 위에서 솟아난 탓에 기암괴석이 많아 나의 남쪽 유람 가운데 이곳이 최고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산이 남해 가운데에 있어 서울과의 거리가 천여 리나 된다. 바다 한가운데 섬지방이라 벌레나 뱀이 많고 기운이 괴이하며, 산에서는 삼(蔘)과 복령이 난다.
밤에 성조사(聖祖祠)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 별을 구경하는데 갑자기 동남쪽에서 구름이 일더니 얼마 뒤 바다가 어두워지고 바람이 크게 불었다.
아침에 구정봉에서 내려와 그 아래 음지에서 쉬고 있는데 희극이란 스님이 나에게 철쭉으로된 지팡이를 주기에 고시(古詩) 한 수를 지어 보답하였다.
아침에 비가 오는 가운데 산에서 내려왔다. 을묘일에 바다에서 나와 백천사(百泉寺)에서 유숙하였다.
함께 유람 간 사람은 숙정(叔挺), 자의(子儀), 운정(雲程), 소년 김남로(金南老)이며, 그 가운데 숙정은 바다에서 나오자 자신의 바닷가 별장으로 돌아갔다.
歸去來辭(귀거래사) / 陶淵明(도연명 365-427)
歸去來兮 귀거래혜
자, 돌아가자!
田園將蕪胡不歸 전원장무호불귀
고향의 전원이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지금껏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노라.
奚惆悵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어찌 슬퍼하여 서러워만 할 것인가.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이미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음을 깨달았다.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앞으로 바른 길을 좇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그리 멀지 않았다.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이제는 깨달아 바른 길을 찾았고,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舟遙遙以輕颺 주요요이경양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흔들리고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바람은 한들한들 가볍게 흔들리고,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길손에게 고향이 예서 얼마나 머냐 물어 보며,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새벽빛이 희미한 것을 한스러워한다.
乃瞻衡宇 내첨형우
마침내 저 멀리 우리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載欣載奔 재흔재분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갔다.
僮僕歡迎 동복환영
머슴아이 길에 나와 나를 반기고
稚子候門 치자후문
어린 것들이 대문에서 손 흔들어 나를 맞는다.
三徑就荒 삼경취황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松菊猶存 송국유존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
携幼入室 휴유입실
어린 놈 손 잡고 방에 들어오니,
有酒盈樽 유주영준
언제 빚었는지 항아리엔 향기로운 술이 가득,
引壺觴以自酌 인호상이자작
술단지 끌어당겨 나 스스로 잔에 따라 마시며,
眄庭柯以怡顔 면정가이이안
뜰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웃음 짓는다.
倚南窓以寄傲 의남창이기오
남쪽 창가에 기대어 마냥 의기 양양해하니,
審容膝之易安 심용슬지이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집이지만 이 얼마나 편한가.
園日涉以成趣 원일섭이성취
날마다 동산을 거닐며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門雖設而常關 문수설이상관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이 없어 항상 닫혀 있다.
策扶老以流憩 책부노이류게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발길 멎는 대로 쉬다가,
時矯首而遐觀 시교수이하관
때때로 머리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 나오고,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날기에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올 줄 안다.
影翳翳以將入 영예예이장입
저녁빛이 어두워지며 서산에 해가 지려 하는데,
撫孤松而盤桓 무고송이반환
나는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있다.
歸去來兮 귀거래혜
돌아왔노라.
請息交以絶遊 청식교이절유
세상과 사귀지 않고 속세와 단절된 생활을 하겠다.
世與我而相違 세여아이상위
세상과 나는 서로 인연을 끊었으니,
復駕言兮焉求 복가언혜언구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는가.
悅親戚之情話 열친척지정화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며 즐거워하고,
樂琴書以消憂 낙금서이소우
거문고를 타고 책을 읽으며 시름을 달래련다.
農人告余以春及 농인고여이춘급
농부가 내게 찾아와 봄이 왔다고 일러 주니,
將有事於西疇 장유사어서주
앞으로는 서쪽 밭에 나가 밭을 갈련다.
或命巾車 혹명건차
혹은 장식한 수레를 부르고,
或棹孤舟 혹도고주
혹은 한 척의 배를 저어
旣窈窕以尋壑 기요조이심학
깊은 골짜기의 시냇물을 찾아가고
亦崎嶇而經丘 역기구이경구
험한 산을 넘어 언덕을 지나가리라.
木欣欣以向榮 목흔흔이향영
나무들은 즐거운 듯 생기있게 자라고,
泉涓涓而始流 천연연이시류
샘물은 졸졸 솟아 흐른다.
善萬物之得時 선만물지득시
만물이 때를 얻어 즐거워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感吾生之行休 감오생지행휴
나의 생이 머지 않았음을 느낀다.
已矣乎 이의호
아, 인제 모든 것이 끝이로다!
寓形宇內復幾時 우형우내복기시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이 그 얼마이리.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어찌 마음을 대자연의 섭리에 맡기지 않으며.
胡爲乎遑遑欲何之 호위호황황욕하지
이제 새삼 초조하고 황망스런 마음으로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돈도 지위도 바라지 않고,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죽어 신선이 사는 나라에 태어날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懷良辰以孤往 회양진이고왕
좋은 때라 생각되면 혼자 거닐고,
或植杖而耘耔 혹식장이운자
때로는 지팡이 세워 놓고 김을 매기도 한다.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동쪽 언덕에 올라 조용히 읊조리고,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잠시 자연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이 생명 다하는날 돌아갈지니,
樂夫天命復奚疑 낙부천명복해의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일소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