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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성 제68차 총회
지방회장ㆍ총무 수련회 참관기
1. 기하성 지방회임원 수련회에 참석하다
지난 2019년 9월 30일부터 1박2일간 오산리 영산수련원에서 기하성 지방회장 및 총무 수련회가 열렸다. 나는 지방회 서기로 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이 행사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분들이 강사로 나서서 말하는 것을 들었다:
* 첫날 오전: 조용기 목사(늦게 도착하여 볼 수 없었다)
* 첫날 오후: 콩히 목사
* 첫날 저녁: 이영훈 목사
* 둘째 날 새벽: 정동균 목사
* 둘째 날 오전: 엄진용 목사
국민일보는 이 행사를 간단한 기사로 소개했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00432&code=23111113&cp=du
2. 수련회에서 들은 메시지를 다시 생각해 보다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 콩히 목사(싱가포르 시티하베스트교회, CHC)는 설교의 후반부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조용기 목사를 통해서 배운 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질문이 마음에서 일어났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기적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인가,
아니면 달리 해석해야 하는가?
전통적으로 우리 교단은 신유의 복음을 가르치고 믿어왔다. 콩히 목사도 예수님의 기적을 강조하며 설교를 했다. 그런데 그 강조가 하도 지나쳐서 다음의 구절을 오해하기도 했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요한복음 6:21
콩히 목사는 이 본문에서 ‘곧’을 ‘눈깜짝할 사이에’로 이해했다. 축지법(縮地法)과 같이 예수님이 배에 오르실 때 순식간에 그들이 가려던 땅에 도착했다고 설교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 ‘곧’은 immediately는 ‘곧 바로, straightforward’의 의미이다.
다른 곳에서 사용된 동일한 단어의 용법을 보자: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마태복음 13:5
여기서 사용된 단어 ‘곧’은 위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하다. 영어성경 NIV에서는 quickly로, NASB는 immediately로 번역했다. 그런데 싹이 곧 나온다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눈깜짝할 사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어째서 이런 해석적 오류를 범할까? 그것은 예수님의 기적을 따라야 할 모범이며,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도록 기대하고 바라야 할 사건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오해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기적을 표적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30~31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표적(sign)은 예수님이 바로 특별한 분이라는 표시(mark)였다. 그것은 독자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의도로 기록되었다. 이것이 성경의 설명이다.
3.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요한복음에서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시다. 헬라어로는 쎄메이온(se:meion)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했다. 요 3:16, 요 1:12, 요 5:24을 보면 예수를 믿고,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사람이 영생을 얻고 생명이 그 안에 있다.
이 때 생명(헬. 조에 zo:e:)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에도 ‘이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는 고백을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으로 소개한다. 물론 마태복음 16:16에서 베드로의 고백도 그처럼 중요하다. 예수를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초대교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여기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로서, 새 시대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대리인, 통치자, 구원자, 하나님의 생명에 동참하게 하는 분, 새 일을 행하시고, 새 삶을 주시고, 새로운 세상을 여시는 분, 그래서 새로운 삶에 들어가게 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과 사귀어 살 수 있게 하시는 분이다. 그런 삶을 영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한다.
오늘 콩히 목사는 사망의 권세라는 말에서 사망을 실패(失敗)로 규정했다. 파산(bankruptcy)은 재정(finance)의 죽음이요, 이혼(divorce)은 결혼(marriage)의 죽음이라고 했다. 그런데 성경은 생명과 사망이라는 말을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는가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를 보내시는가? 왜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가?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소개한다(요 5:24).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다. 사마리아 여인도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고 기대를 나타냈다. 여기서 생명(조에)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과 함께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요, 새로운 세상의 삶이다. 그것은 심판에 이르지 않는 삶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삶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현실 인식은 어떤 것인가?
우선,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그리고 그리스도 밖에서 사는 삶은, 심판 아래 있고, 사망 가운데 있으며, 어둠 가운데 있다. 그래서 인간은 멸망 받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
그러므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번째 표적을 본 후에 제자들이 비로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시작했으며,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된 후에 그녀의 삶은 이전과 매우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인생, 영생이 그에게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다시 태어난 사람으로 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로 표현된다. 거듭난다는 말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물은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비유하는 언어다. 믿는 자에게 임하는 성령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는 것과 같다(요 7:38).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영광과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6:28). 그들은 그 나라를 보고 그 나라에 들어가 새로운 삶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생(헤 조에 아이오니온, he: zo:e: aio:nion). 이는 문자적으로 ‘오는 세상의 삶’(the life of the age to come)이라는 뜻이다.
4.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말이다. 마치 수렵채집을 하던 시절에 물물교환을 하며 살던 사람들에게 지폐는 의미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없는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무의미하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는 1세기 유대인들이 느꼈던 의미와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죄인의 신분을 그토록 강조했나 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죄인이 아니라면 누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있을까? 죄와 심판, 사망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인간 상태의 필수 조건이다. 여기서 대속교리(代贖敎理)도 탄생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복음이 기쁜 소식인 까닭은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그 기다림의 목적이 충족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기다리고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 있다. 바울은 그것을 썩어짐의 종 노릇 하는 데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피조물이 그것 때문에 탄식한다고도 했다. 그것이 사망의 다른 이름이며, 심판과 멸망의 다른 이름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로마서 8:19~23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며, 그들을 기다리는 피조물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전한 소식은 그들의 청중이 기다리고 고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간절히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을 바울은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 즉 탄식하며 고대한다고 했다. 그 까닭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더 큰 힘을 가진 이에게 눌려서 굴복하여 사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피조물의 현재 상태가 아닐까? 비록 메시아 대망사상이 없을지라도 모든 사람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바로 허무한 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데서 해방되는 것이다. 여기서 허무한 상태(헬. 마따이오떼스, mataiote:s)는 무익함(inutility), 덧없음(transient-ness), 도덕적 타락상태(morally depravity)를 가리키는 말이다. 즉, 사망의 다른 표현이다. 무의미하고 덧없고 타락한 삶이 바로 사망의 상태다. 이런 상태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해방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사모할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는가? 그것은 예수께서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를 모신 사람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진리를 받은 사람이요,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길을 찾았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왕 같은 제사장처럼 사는 삶이 아닐까? 즉, 썩어짐과 허무의 종노릇이 곧 사망의 상태라면, 생명은 하나님의 영광의 아들들로 자유를 누리며 사람답게 사는 삶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소임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삶이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삶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생을 맛보는 삶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켜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다(롬 14:17).
그런 점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를 해방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며, 그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하셨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은혜의 날, 해방의 날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자유요 해방이요 용서요 충만이다.
5. 자유와 해방의 새로운 삶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고 주는 선물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모든 피조물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게 하고, 우리의 양심을 좨쳐대는 능력이며, 탄식함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는 영이다. 그렇게 지금도 하나님은 뭇 영혼들을 부르시고 또 찾으신다. 우리는 그처럼 찾으시고 살리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 애굽의 종살이 하는 피조물을 해방하여 우리가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도와주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것은 내게 자유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삼대 사역인 가르침, 선포, 병 고침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들에게 ‘뒤따를 것’이라고 성경은 약속한다(막 16:15~20). 여기서 중요한 것은 표적이 ‘뒤따르는 것’(parakoloutheo:)이지 ‘바라보아야 하는 것’(blepein, to see-롬 8:24)이 아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속량(the redemption of our bodies)이다.
나는 금년에 병 고침과 신앙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한 바 있다:
http://cafe.daum.net/Wellspring/Vnnc/5
우리는 피조물들과 함께 고난을 겪고, 함께 영광을 누린다(롬 12:15). 동족과 고통을 함께, 수치를 함께 한 모세처럼(히 11:24~26) 낮은 자들과 함께 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이렇게 나아갈 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증거를 사실로 입증하시려 표적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주님의 동역자가 된다. 그것이 바로 영광스런 사역자의 임무요 본분이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만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과 믿음을 기반으로 열방에게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선포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의 질서였다. 그것을 하나님 나라 또는 영생, 그리고 새 시대, 새로운 삶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변화된 삶은 이전과 비교해 볼 때, 다시 태어난 것과 같아서 중생(重生)이라 부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았다.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였으며 철학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리고 그 길에 기적이 따랐다.
그 복음은 새로운 삶이었고 새로운 길이었으며 삶에 희망을 주는 기쁜 소식이었다. 세계 어느 민족 어느 누구에게다 삶은 허무와 덧없음 그리고 무익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용기 목사를 따라 콩히 목사는 그것을 실패로 보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담과 그리스도교 복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새 희망과 새로운 삶, 그리고 절망을 이기는 본질적인 능력이 무엇인가? 다단계 성공담 나눔장에 일어나는 열기와 번영신학이 선포하는 복음이 만들어내는 열광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의(大義)다. 자본주의적 성공담에는 소의(少義)가 있고 그것은 매우 자기본위적이다. 그러나 복음은 보편적이며 이타적이며 세계적이다. 그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고 한다. 만인을 한 백성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는 것이 ‘순수한 복음’이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 곧 천국복음이라고 한다.
6. 교회의 진정한 소망은 부흥인가?
이번 기하성 교단의 핵심 지도자들의 수련회인 지방회장과 총무 수련회에서 가장 강조된 단어는 ‘부흥’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흥은 ‘교회성장’을 의미한다. 사실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것도, 신유를 강조하는 것도 모두 결국 교회성장이라는 부흥을 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까지도 우리 교단의 최고 가치는 부흥에 있다. 수적으로 ‘부흥’한 교회를 이끄는 목사는 성공한 목사요, 그가 하는 말은 선하고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수적으로 ‘부흥’을 이루어내지 못한 목사는 성공에서 먼 목사요 실패한 목사요 그가 어떤 발언을 할지라도 그것은 들을 가치가 의심된다.
순복음교회의 신학을 ‘번영신학’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우려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선도해 나가는 정신적 지도력을 나타내기보다 수적 우세를 통하여 뭔가를 증명하려는 태도를 지향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회가 기독교 신앙을 가장 바르게 나타내는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부흥 즉, 교회성장이라는 염원이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게 되면 차분히 앉아서 기독교 신앙의 정수(精髓)를 탐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현재 우리 교단을 이끌어가는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를 미래로 이끌어갈 수 있는가? 아직도 부흥이 우리의 핵심가치가 되어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리스도교의 가치가 오로지 부흥에 있는가? 부흥의 의미를 오로지 수의 증가에 두는 현실이 암담하기만 하다.
시대를 이끌어갈 정신을 가지지 못한다면 공동체는 시대정신에 대하여 인식지체현상에 빠지게 되고 그로 인하여 그 공동체는 퇴보하기 마련이다. 오늘날 기독교회는 공룡의 멸종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공룡은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쥐라기의 세상을 지배했지만 지구적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하고 말았다.
지금 우리 교단의 지도자 수련회에서 공공연하게 선포되는 바는 축자영감설이다. 그리고 문서설을 배격하며 모세오경의 모세저작설에 의문을 가진 어떤 주장도 용납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가르침이 독일계 신학의 시류라고 규정하고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담장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신학교의 문턱을 넘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듣게 되는 기초적인 지식마저 저버려서야 되겠는가! 요새는 일반 신도들 중에도 그런 지식을 접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그런 지식은 소화해야 할 단단한 음식이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신앙의 초보를 벗어나 마땅히 갖추어야 할 선생이 되고 장성한 아비가 될 것이다. 길을 안내하는 사람은 학생가 아니라 선생이며 아이가 아니라 아비들이다.
젊은 목회자들을 세우고, 다음 세대를 일으킬 교단이 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젊은 목회자들이 뛰어 놀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과 비전을 나누고 토론하고 정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여 그 속에서 발견한 진리로 다음 세대를 밝힐 등불처럼 높이 쳐들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강조하는 ‘성령충만’이 과연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질문과 의심의 불을 통과하지 않은 진리는 허약하고 불분명하며 결코 보편적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주장은 해가 저물어 가면 어두워가는 황혼처럼 힘을 잃고 말 것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성령충만을 가장 강조한 목사 중 한 사람은 지금 감옥에 가 있는 전 총회장 목사다. 그는 우리 교단의 총회장을 했던 목회자로서 입만 열면 성령충만, 성령운동을 외쳤다. 그러나 미국의 초창기 방송설교가들처럼 도박으로 교단의 공금을 횡령 탕진하고 법원의 판결에 따라 지금 복역 중이다. 우리 교단 목회자들이 외치는 ‘성령충만’이 과연 무엇인가 되물어 보지 않을 수 없다.
7. 다음 세대를 어떻게 준비할까?
가장 시급한 과제는 우리가 믿는 바를 바르게 정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서로에게 질문하고 토론하여 근본을 다시 다지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어 우리의 생각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사람들을 초청하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오랫동안 우리가 믿는 바만을 붙들었고 외쳤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진정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되묻지 않았다. 이의제기와 질문이 금기 시 되는 모임은 곧 도태될 것이다.
우리 민족이 절대가난에 시달리던 때에 세운 신학을 지금도 되풀이하여 금과옥조처럼 받드는 이 상황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지금은 지구촌이 공동으로 다가오는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시기요,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비전과 대안을 제시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이런 때 한기총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정신은 우리 사회의 갈등조정자라기보다는 갈등유발자가 되고 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는 내세천국을 가리키는 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인가? 진리를 좇는 구도자들인 신앙인들이 자유로운 질문과 토론 없이 어떻게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는가? 자신이 찾지 않은 대답을 주입 받아서 앵무새처럼 되풀이 할 때 어떻게 다양한 인생의 문제들을 풀어나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맹신이며 타협을 모르는 열광주의가 아닌가!
세상에 평화를 위해 말씀과 직분을 받은 교회는 이렇게 다양한 인종과 종교로 이루어진 시대에 그 소임을 감당할 수 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모든 종교가 굴복하는 그런 세상인가? 아니면 이 세상이 속히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서 비로소 얻게 되는 그런 평화인가?
애굽에서 파라오에게 억눌려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주셨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소임을 맡기셨다. 교회는 지금 새 이스라엘이며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우리 교단의 명칭 하나님의 성회는 곧 장자들의 총회(히 12:23)가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의 대적은 다른 종교가 아니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미움과 배타성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차별과 배제로 나타나며 그 가장 큰 원인은 경직된 교리와 문자적 성경해석, 그리고 반지성주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단은 이 세 가지를 함께 견지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미스바 집회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앙을 일깨우고자 했다. 우리 선배들은 여의도 광장에서 미스바성회를 열어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그리고 오늘 21세기 우리들은 새로운 형태의 미스바성회를 열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를 멈추지 않는 일이다. 느후스단을 깨트려야 신앙의 개혁을 이룰 수 있다(왕하 18:4). 모세가 만든 놋뱀이 아무리 영험하더라도 그것은 놋 쪼가리(Nehushtan = a thing of brass)에 지나지 않는다. 새 시대를 이끌어갈 용기와 기백을 가진 참신한 히스기야들이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기를 고대한다. <끝>.
병 고침에 대한 성경의 기록,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doc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