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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經 大講座
靑潭說法
<제목차례> 2
송구스럽고 조심스럽다. 3
간 행 사 4
일 러 두 기 6
解題 - 경제목 해설 8
法會因由分 第一 (법회가 열린 인연)
善現起請分 第二 (선현이 법을 청하다)
大乘正宗分 第三 (대승의 바른 종지)
妙行無住分 第四 (묘행은 머물지 않음)
如理實見分 第五 (바른 도리를 실답게 봄)
正信希有分 第六 (바른 믿음은 희유하다)
無得無說分 第七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음)
依法出生分 第八 (법에 의하여 출생함)
一相無相分 第九 (하나의 상도 상이 아님)
莊嚴淨土分 第十 138 (장엄한 정토)
無爲福勝分 第十一 (무위복이 수승함)
尊重正敎分 第十二 (바른 가르침을 존중함)
如法受持分 第十三 (법답게 받아지님)
離相寂滅分 第十四 (상을 떠나서 적멸함)
持經功德分 第十五 (경을 받아 지니는 공덕)
能淨業障分 第十六 (능히 업장을 깨끗이 함)
究竟無我分 第十七 (끝까지 나 없음)
一體同觀分 第十八 (한 몸으로 동일하게 봄)
法界通化分 第十九 (법계를 다 교화하다)
離色離相分 第二十 (색과 상을 떠나다)
非說所說分 第二十一 (설함과 설하여 질 것이 아님)
無法可得分 第二十二 (법은 가히 얻을 것이 없음)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함)
福智無比分 第二十四 (복과 지혜는 비교할 수 없음)
化無所化分 第二十五 (교화하되 교화하는 바 없음)
法身非相分 第二十六 (법신은 상이 아님)
無斷無滅分 第二十七 (단멸이 없음)
不受不貪分 第二十八 (받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음)
威儀寂靜分 第二十九 (위의가 적정함)
一合理相分 第三十 (한 덩어리의 이치)
知見不生分 第三十一 (지견을 내지 말라)
應化非眞分 第三十二 (응화신은 진신이 아님)
<송구스럽고 조심스럽다>
큰스님의 설법을 책으로 대하여 뵈온지도 스님 입멸 후 몇 년 만이던가?
한때 불교에 대한 알음을 얻으려 닥치는 대로 서점가에서 스님들의 수필집을 구하여
읽기도 해는 넘겼으니 좀 되는 분량이었을 거다. 허나 어렴풋한 이해이었을 뿐 .......
그러다 우연히 접하게 된 청담스님의 이 설법을 책으로 얻어 나를 조금은 이해하기 시작하고
부처님의 교시를 조금이나마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이 된 이 법 은혜를 어찌 사람 된 나의
소견과 말과 글로 그 고마움을 다 표현할 수가 있을까.
물론 그간의 스님들의 글들이 나의 마음을 청량하게 이끌어 주신 바를 어찌 모를까 만은
원체 하근기의 이 중생은 그토록 청량한 법의 단비에 시원함을 그때그때 느꼈을 뿐, 나의
죄가 크지만 다행한 것은 그저 나를 불타의 울타리 안에 생각들을 안주하게 하는 그런
것이었음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그러다 이렇게 나와 같이 우둔한 하근기 중생들을 위하여 자상히 그리도 어렵고 이해가
가지 않던 금강경을 고구정령히 일러주시는 이 설법집의 법우가 7년 대한의 감로가 됨은
어찌 말로 그 때의 감격을 다하리까
이렇듯 소중한 설법집을 덮어놓고 가까이 모시지 못한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으나 이를
이제 나 혼자 가지고있기에 너무나 아쉬워 어떠한 날벼락을 맞을 지라도 일자 삼배의 마음
으로 한자 한자 불동에 올려보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러면서 이렇듯 큰스님의 육성 법문을 책으로 엮어 장기간 수고를 아끼지 않고 법보시
하여주신 분들께 정말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한 마음을 드리고 싶다.
이 분들의 청담 큰스님의 크나큰 법애를 모든 중생들에게 고루 뿌리고자 하신 그 높으신
뜻에 은혜를 입은 한사람으로서 이 글을 읽는 분들을 통하여 나의 감사한 마음을 도선사의
이혜성 스님께 전하고 혜성스님의 뜻은 책 첫머리의 간행사를 소개함으로서 천백억분의 일
이라도 법보시에 대한 보답이 될지도 모른다는 나의 건방스러운 마음에 용서를 구한다.
읽는 분들의 번거로움을 피하여 지극히 이해를 필요로 하는 어휘와 경문을 제외하고는
한글 음역을 기초로 하여 올린다..
불동에 올라오는 단편들에 감질남을 느끼시는, 구법(求法)에 갈증을 느끼시는 분들은
조계사부근의 불구(佛具)들을 취급하는 서점가에서 구해 보도록 하세요..
제 희미한 기억으로 85-87년도 경 (이 후 89년에도 구입한 적이 있음) 이 곳에서 구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청담스님께서 생전에 도선사에 주석하시었으니 그 사찰에서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목 : 금강경대강좌
저 자 : 이 청 담
발행자 : 신 성 철
발행처 : 보성문화사 (서울 종로구 관철동 19-21)
성불 하십시오. 나무관세음보살
<간행사>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는 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다"하셨고, 또 이르시기를 "이 경 가운데 네 글귀(四句偈)만이라도 지송
(持頌)한 공덕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서 보시한 복보다 몇 만 배나 수승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이 중국에서 번역된 뒤에 그 주해를 낸 것이 팔백여종이나 되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운 승속남녀의 수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이 경이 전해 온 뒤에도 원효대사 . 태현법사의 주석이 있고 고려 보조국사는
도속에게 금강경 지송을 적극 권장하였으며 그 뒤로 한국불교도의 필수교과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는 바 그 판본(板本)도 수십 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만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본 이어서 그 경문을 맹인 독경식으로 읽고
외는 이는 많지만 그 깊은 뜻을 참으로 이해하는 이는 극히 드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은사 청담 큰스님께서는 평소에 금강경에 대한 특수한 조예가 깊으셨고 선과 교를
함께 체득하시어 항상 말씀하시기를 "이 경은 최상승의 심지법문(心地法門)으로 삼공(三空)
의 진리를 확철(廓徹)하여 금강불괴의 구경지(究竟智증)를 증오(證悟)케 하는 성불작조(成佛
作祖)의 비전(秘典)이며, 무상보리의 보장(寶藏)이라고 찬탄하셨고 또 대중을 위해서 여러 번
강설하셨습니다.
정화불사의 원만성취를 기원하는 사부대중의 청으로 금강경 대법회를 열어 삼칠여일 동안
사자후를 친설(親說)하셨고 , 거금(去今) 칠, 팔년 전에 조계사 대법당에서 약 일년여 오십여
회의 금강경 강설을 하셨는데 그때마다 스님은 현하준령(懸河峻嶺) 같은 무진변(無盡邊)과
자재무애하신 요설방편(樂說方便)으로 현현묘묘(玄玄妙妙)한 심지법문을 가장 평이하고 자미
있게 호호진진(浩浩津津)하게 풀어 내셨으며, 소납(小衲)등은 그 법문을 길이길이 보전하기
위하여 이를 빠짐없이 녹음하였던 것입니다.
그 뒤에 수년을 지나 큰스님께서는 제행무상의 법칙을 따라 타계로 옮기셨지만 "육신은
가도 법신(法身)은 상주한다"는 법문과 같이 스님의 법신은 그대로 녹음반(錄音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광음이 흘러 갈수록 스님의 법음이자 육성인 음반에 귀를 기울이는 불자가 늘어나게
되어 그것을 다시 만인 앞에 널리 공개하기를 갈망하는 이가 많으므로 그 법음을 다시 문자로
옮겨 엮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편찬위원으로서 趙明基박사 李鐘益 박사 金觀護 선생 沈載烈 선생을 비롯한
인사로 구성하고 그 법음을 푸는데 주역은 性眞 심재열거사가 전담하고 그 고증역은
法雲 이종익박사와 소납이 담당하여 오면서 춘풍추우 오년의 성상을 쌓아 육천여장의 원고가
정리되었으며, 다시 보성문화사에서 그 활자화의 작업을 맡아 온 지 약 일년의 광음이 흐른
뒤에 비로소 이 "금강경대강좌"가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유교경에 이르시기를 "나의 육신은 사라져도 나의 법신은 불멸하리라"하셨고 열반경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나의 몸이 인연따라 허물어진다 이르지 말라. 여래는 금강불괴신을
증득하였나니 , 그것은 곧. 무상(無常).괴로움(苦).무아(無我).더러움(不淨)의 네 가지 뒤집힌
관념(四顚倒)을 여의고 참다웁고 영원한 것(眞常), 참다운 즐거움(眞樂), 참나(眞我), 참다운
거룩함(眞淨), 이 네 가지 인연을 성취한 상주법신 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래의 설법이 큰 법신이며 또한 범부의 덧없음(無常). 괴로움(苦).나 없음(無我). 더러움(不淨)의
육신을 여읜 것이 금강불괴의 법신입니다. 청담스님께서도 세속 인연따라 출현하셨던 육신은
인연따라 숨으셨지만 그 법음의 법신은 이 금강경강좌의 한 권과 함께 그대로 금강불괴신이며
그대로 금강불괴지혜도피안의 영원한 이상계입니다.
소납 다행히 큰스님을 모실 인연이 있어 이 세상에서 그 육성의 법음을 친승훈목(親承薰沐)
하였고, 또 타계하신 뒤에 그 법신의 음반을 활자화 하가 되니 한편으로는 무한히 슬프기도
하고 또한 기뻐하면서 그 전후전말과 이 경의 무진공덕을 서술하여 간행사에 가름하는 동시에
이 법음의 편찬에 심혈을 다하신 편찬위원 제위와 법음의 녹음보존에 공이 큰 송만덕화보살님
유재호거사님 그리고 활자화에 적극 협조해 주신 출판사 측에 감사하여 마지않습니다.
이 인연공덕으로 이 한 권 법문을 수지독송하고 신행수증(信行修證)하는 불자는 물론이요,
경의 말씀과 같이 "이 경이 있는 곳이면 곧 부처님 탑묘가 있는 곳처럼 팔부선신이 수호하므
로 백가지 재앙이 다 소멸되고 만가지 복이 일어날 것이며, 모든 마귀떼가 물러나서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중흥의 성업이 성취될 것을 믿고 기원하면서 스스로 경찬하는 바입니다
불멸기원 제 이천오백이십일년 불탄기원 제 이천일년
삼각산 도선사 주지
<일러두기>
이 책은 청담스님의 금강경 법문을 다음과 같은 요령으로 정리하여 엮은 청담 설법집 이다.
1. 청담스님의 금강경 설법은 제세하신동안 여러차례 거듭하셨는데 그 가운데 1955년 전국
승려대회 때 근 사. 칠일 동안 연일 설법하신 금강경대법회와 열반하시기 일년 전 1969년
1970년의 두 해에 걸쳐 매주 토요일에 하신 설법만이 완전 녹음되어 있었으므로 이 두 녹음
설법을 원본으로 하여 정리 편찬했다.
2. 문자주석에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생생한 마음의 소리인 스님의 설법을 문자화함에 있어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 염려하여 스님의 독특한 설화체의 특성을 살리는데 힘썼다.
3. 스님의 설법 가운데 경상도 방언 같은 것은 그 설법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범위에서
표준말로 고쳤다.
4. 편찬체제에 맞추기 위해 편의상 법문의 순서를 바꾸어 엮은데가 있다. 예컨대 꿈에 때한
스님의 설법은 서론으로 법문 첫머리에 말씀하셨지만 편찬체제상 경 제목 해설과 [구라마습
삼장에 대한 말씀만을 서론으로 엮고 꿈에 대한 설법은 제32분으로 돌려서 경 전체설법의
결론으로 삼은 등이 그것이다.
5. 금강경은 오조 홍인대사와 육조 혜능대사 이래 마음을 깨치는 심지법문으로 널리 수지
독송되어 왔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원효대사, 고려의 보조국사 이래 구산선문과
오교제종의 초종파적 소의경전으로 필수신앙화 되어 온점을 감안하여 독송의 편리를 위해
한국출판사상 처음으로 특별대활자에 의한 특수조판을 시도했다.
6. 금강경은 업장소멸의 공덕이 특히 커서 설사 죄업을 많이 지은 업보중생이라 하더라도
생전에 금강경을 수지독송한 인연만 있으면 염라대왕이 지옥으로부터 즉시 방면한다는
불가사의한 과보의 위신력을 지니고 있음에 비추어 ,경의 품위를 더욱 높이기 위해 4.6배판의
대형판형과 1호.2호.3호.4호.12포인트.9포인트 등의 활자를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이 금강경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법보시 하여 생존한 이나 사후인을 위해 큰 복전을 짓고자 하는 불자
에게도 최적의 경판이 되도록 배려했다.
7. 이 책에 체제는 대개 다음의 여덟가지 점을 착안하여 짜도록 했다.
1) 스님의 본문강좌는 소명태자의 삼십이분법의 과목분류에 따라 설법하셨으므로
전편 삼십이장으로 나누어 엮었다.
2) 본문강좌 첫머리에는 2호 한자에 음토와 현토를 하였고 이어서 한글직역을 다시 더하여
원문의 경건함을 표했다.
3) {이십칠단의론} 경을 연구 해독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경의 전문의 내용을
따라 분석 구분하는 일인데, 금강경연구에 제일 귀중한 과제가 바로 이 무착보살의
[이십칠단의]를 파악하는 것이므로 청담스님 과태설법 상단 첫 머리에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이 이십칠단의론을 충실히 소개하고자 했다.
4) {육조구결} 육조대사의 금강경구결은 역대 금강경 주석 가운데 으뜸가는 직설법문인데
청담스님의 설법 또한 이 육조 구결과 크게 상통하고 있어 뒷사람이 대조하여 함께
공부하면 금강경의 종지를 터득하여 심지를 깨닫는데 다시없는 龜鑑이 될 것으로 믿어
삼가 그 상단에 육조구결을 빼지 않고 다 실었다.
5) {과해} 소명태자의 삼십이분법은 금강경을 입문적으로 이해하는 데 좋은 구분법으로
전해오는 바, 각 분장마다 과해란을 두어 그 요의를 간략하게 풀이했다.
6) {원문} 본문의 한 구절 한 구절의 뜻을 자세히 소개하기 위해 각 분장의 경문을 다시
소분단으로 세분하여 다루었다.
7) {해의} 문구 하나 하나의 뜻을 자세히 풀이하고 소분단의 원문을 광의적으로 말씀하신 설법.
8) {설의} 삼십이분의 악장에 들어있는 숨은 뜻을 철저히 밝히기 위해 기타의 자재무애한
이론이나 자미있는 설화로 이끌어 변증하신 설법.
9) {함허설의} 함허득통선사는 금강경 주석을 완성한 한국이 낳은 지보적 선지식인 바,
주석란을 통해 그 중요한 일부를 소개했다.
10) {주} 어려운 낱말이나 금강경을 연구하고자 하는 이에게 도움이 될 내용을 자전적으로
소개했다.
9. 큰스님 설법의 깊은 뜻을 편찬자가 미쳐 바로 알지 못하여 잘못 옮긴 점이 발견되면
판을 거듭하는 데 따라 시정하도록 독자 제위의 편달을 바라며 끝으로 본 설법집을
편찬하면서 참고에 자한 중요한 경론 주석서를 다음에 소개한다.
<解題> - 경제목 해설
불법 전체의 핵심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은 생략하여 [금강경(金剛經)]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께서
40년 동안 소승경을 비롯한 많은 경을 설법하신 뒤에 말씀하신 중요한 최고의 경입니다.
그러니 당시 부처님 제자들은 금강경을 말씀하시기 전에 부처님을 사십년 동안 모시고 다니며
아함경 . 방등경전등 금강경을 제외한 다른 대반야경을 다 들은 이 들이었으므로 금강경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기초 법력(法力 : 지식과 수도력)을 갖춘 이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은 마음을 깨달아 큰 지혜를 밝힌 십대 제자와 천이백 대중을 비롯한 많은 대중이었
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본래 설법을 하실 적에 국민학교로부터 대학원 과정까지의 순서를 따라 불법의
깊은 진리를 체계 있게 설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마음의 법문을 49년간의 교육 기간
을 통해 다 설파하시는 가운데 아함경은 국민하교 과정으로 12년간 걸렸고, 방등부는 중학교
과정으로 8년 걸렸으며 반야육백부는 고등학교. 전문학교 과정으로 21년간이나 걸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8년 동안에는 법화열반부라고 하여 대학의 최고학부에 해당합니다. 그 가운데
금강경은 육백부의 반야사상뿐만 아니라 불교의 전체 사상의 골수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조사님들도 이 금강경을 특히 존중해 왔던 것입니다. 말과 문자를 버리고 교 밖에서
직접 마음을 깨치려는 선종에서까지 존중하는 경전이 금강경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법하시는 가운데 그 반이나 되는 시간을 기울여 반야경을 말씀하신
것은 이 반야사상이 불교 정신의 핵심이며 중심이 되기 때문인데, 특히 그 가운데 금강경은
반야경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대문으로서 반야육백부를 거의 다 말씀하신 577부째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금강경은 반야사상의 핵심을 결론적으로 천명하신 경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깨치는 요체로서 중생이 이것을 의지하여 마침내 불타의 지혜인 반야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보다 강한 것은 없다 -- 金剛>
금강이란 요새 말로는 다이어먼드입니다. 다이어먼드는 모든 자연 물질 가운데서 가장 강한
물질입니다. 쇠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옛날에는 돌로 연장과 무기를 만들어서 사용했는데,
그것은 돌이 흙이나 나무보다 더 강했던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쇠가 발견되면서 부터는 쇠가
돌을 대신하게 됐으니 쇠가 돌보다 훨씬 강했던 때문입니다. 또 쇠를 자르는 강철이 나오면서
부터는 강철이 더 강한 것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쇠나 강철보다 더 강한 물질이 있는데
그것이 금강석입니다. 금강석에 의해서 깨지지 않는 물질은 없고 다이어먼드를 당할 물질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현대에 와서는 금강석보다도 더 강한 물질을 만들
수 있겠지만 그러나 자연물질 가운데서는 그 이상 굳센 물질은 없으므로 금강은 강한 것 중에
가장 강한 것을 뜻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진리는 인류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서 제일 완전하고 가장 강하여 다른
어떤 지혜에 의해서도 견줄 수 없는 진리이므로 여하한 물질에 의해서도 부서지지 않는
금강석을 부처님 법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자리가 물질도 허공도 아니므로
불로 태울 수도 없고, 원자탄이 터져서 온 지구가 녹아 없어진다 해도 우리 마음자리에는
변화가 있을 수 없는 때문입니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 물질. 허공. 에너지 등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우리의 생각. 감정까지도 다 변하지만 오직 우리의 마음자리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임을 강조하는 뜻에서 금강이라 하고 금강경(金剛經)이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금강은 물질 가운데 경도가 가장 강한 최고의 강철로 된 철퇴(鐵槌)를 뜻합니다.
어떤 물건이든지 이것에 맞으면 다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떤 물건으로도 이 금강은
부술 수가 없는 것이므로 금강을 우리 마음자리에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자리는 온 우주
모든 현상계를 창조한 근본 바탕이고 동시에 우주를 다 거두어 들여서 없앨 수도 있습니다.
금강 철퇴와 같은 이 마음자리는 내가 지금 말하는 이 마음자리이고 여러분이 듣고 있는
그 마음자리인데, 자기 스스로나 남이 부술 수도 없는 영원 불멸의 존재이면서 우주 만유에
자유자재하는 그런 거룩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육체 그 자체를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금강처럼 이렇게 위대한 실재인 자아를
망각해 버려서, 웬만큼 설명을 들어 봐도 이런 마음자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자신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부처님의 금강경 법문을 통해 이런 마음자리가
확실히 있다는 것을 말하고 듣게 되었으니 다시없는 공덕이라 할 것입니다.
<마음 밝으면 반야--般若> 1
금강경을 자세히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하는데, 반야는 지혜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세상에서 생각하는 지혜와는 크게 다른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간의 지혜와
구별하기 위해 번역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간의 지혜는 객관세계에 대한 지식, 논리와
개념에 의한 지식, 이런 것들을 분별하는 지혜를 말하지만, 반야의 지혜는 마음을 깨쳐서
육체가 <내>가 아니고 시간 공간이 벌어지기 이전, 주관 객관이 나누어지기 이전, 곧 마음의
근원에 돌아간 지혜를 말합니다.
<마음>은 곧 <나>입니다. 허공도 물질도 배설하는 기계인 이 육체도 내가 아니고 <나>는
오직 순수한 <나>라는 생각까지도 아니며, 글자도 아니고 생각도 아니며 내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면서 살아 있어서 얘기할 줄 알고 얘기를 시켜 놓고 그것을 다시 비판도 하는, 이 만사의
주체, 생각의 주체, 우주의 핵심이 곧 <나>입니다. 이것이 생각을 내서 과학. 철학. 종교를
만들고 그것을 마음대로 뒤집어엎기도 합니다. 이것보다 앞서는 사건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고 물질도 몸뚱이도 아닌 <나>, 일체가 다 아닌 <나>,
이것이 우주의 핵심이고 실재이며 곧 우주와 인생의 근본을 아는 것이 지혜이고 반야 지혜
입니다. 그런데 또 아무 것도 아닌 이 <내>가 자유자재로 온갖 생각을 내서 과학도 만들고
철학도 만들고 현상 세계, 즉 꿈속 세계의 모든 것을 만들고 다 압니다.
그런 걸 <반야>라 합니다.
가령 "신심명을 들었다" "금강경을 듣는다" 또 "경을 듣는 이걸로 해서 부처님 말씀을 배운다"
하는 것은 결국 내 마음을 설명 듣는 것이 되고 내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듣는 것이 되는 데,
그래서 그 법문을 듣고 <나>를 확실히 깨쳐 <마음>이 열리면 이때는 전체가 <반야>의 지혜
입니다. 내 마음을 어떻게 깨칠는지 정신 바짝 차리고 금강경 법문의 핵심을 그대로 들어서
따라가 보면 결국 마음을 깨치게 되고 반야를 얻게 됩니다.
부처님의 많은 제자 가운데 마음 깨친 법을 가장 정통으로 이어받은 분이 우두머리 제자이신
마하가섭존자입니다. 또 이 어른의 마음 법을 정통으로 전해 받은 분이 이조(二祖) 아란존자
이고, 이렇게 내려가서 二八대의 조사가 되는 분이 바로 유명한 달마대사입니다.
이 달마대사는 중국에 오셔서 선종의 초조(初祖)가 되셨고 마음 깨치는 법을 혜가(慧可)스님
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에 부처님의 마음 깨치는 법을 크게 일으키신 분이 육조 혜능대사(六祖
慧能大師) 이신데, 이 어른이 본래 글도 모르는 무명의 나무장수였습니다. 육조 스님이 마음을
처음 깨치게 된 동기가 바로 이 "금강반야바라밀경"에 있습니다. 시장에 나무를 팔고 돌아가는
길에 어느 스님에게 금강경 가운데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란 경문을 듣고
마음을 활짝 깨쳐서 반야지혜를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뜻은 본문을
해설할 때 자세하게 소개되겠지만, 그 대의를 우선 알기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 싫다 . 좋다 . 내 것이다 . 주관이다 . 객관이다 . 나쁘다 . 착하다 하는 분별심을 버리고
본연의 마음 자세 그대로의 마음을 지니고 오직 중생제도를 위해 살라. ]는 뜻입니다.
하나 더하기 둘은 셋이 된다는 수학의 기본원리를 두살 세살된 어린애들은 해결 못하지만
어른들은 듣자 마자 알게 됩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는 하나 둘을 들어도 곧 잊어버릴 정도로
지혜가 아직 밝아지지 못했기 때문이고, 나이가 들어서 곧 알게 되는 것은 지적 능력이
열리고 지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을 많이 넓히려면 설법을 듣고 경전을 많이 익혀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널리 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참 지혜는 말과 글을 따라 뜻을 파악했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말과 글 밖에 나에게 있는 마음을 바로 깨쳐야만 반야지혜를 성취하게 됩니다.
그 동안 신심명 . 반야심경을 들었으니 여러분들은 짐작으로나마 [ 아 , 이런 것이 마음이로
구나. 마음의 불생불멸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 하고 판단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야지혜>가 지식이며 판단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며 이것은 인식할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어떻게 인식합니까.
<싫다 좋다 없어야-- 般若>2
<마음>의 반야지혜는 일반 경전을 읽거나, 과학이나 철학을 알고 객관의 원리를 짐작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일반 지식은 객관을 아는 것이고 논리와 개념을 세우는 것이지만,
이 마음은 주관이니 객관이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고 듣고 옷입고 밥먹고 싸우고 좋아하는
것이 다 내 <마음> 이 하는 것인데, 그 마음이 어디 있느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이 <마음>
곧 <나>(我)를 어떻게 찾느냐. 그 해명을 먼젓번에 우리가 공부한 "신심명(信心銘)" 첫 구에서
잘 풀이해 주었습니다.
[ 지도는 무난이니 유혐간택 ( 至道無難 唯嫌揀擇 )이라 지극한 도, 곧 <마음>을 깨쳐서
부처가 되는 길이 어렵지 않다. 쉬운 일 가운데 가장 쉬운 일이다. 밉다 곱다 싫다 좋다 하는
간택만 없으면 된다. ]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이 가리키는 속뜻은 무엇인가.
그 말의 조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말의 조리를 놓치기 때문에 그 속뜻이 막연해지고
확실히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서 부처가 되는 길이 어렵지 않다는 말은 다름이 아닌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남성도 여성도 아니고 선악도 아니며 , 지식이거나 사상은 더욱
아니고 예술도 정치도 물론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이것은 수정보다도 더 깨끗하고 망상과
잡념이 없는 순수한 상태로 살아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이것이 천당 가려면 천당 가고 지옥
가려면 지옥가고 사생육도를 돌아다닙니다. 알듯알듯한 소리입니다.
이것을 더 쉽게 말하기 위해 " 네 마음을 깨쳐 부처 되기란, 곧 생사 해탈하기란 제일 쉬운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쉬운 일이 왜 쉽지 않은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꼭 마음을 깨쳐서
부처가 되어야하겠다고 하는 그 생각 때문이다. 그것이 장애가 되어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다"
고 삼조 승찬 ( 三祖 僧璨 )스님께서 간절히 일러주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눈을 껌벅껌벅하다 깨칠 일이고 ,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도 쉬운 일입니다.
이 <마음>이 모든 생각의 주체이고 학문의 주체이며 온 우주의 주체요 인류문화의 주체
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깨쳐 부처가 되고 생사를 초월하여 우주에 자유하기란 참 쉬운 일
가운데 쉬운 일입니다. 이 깨치려는 마음만 집어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신심명>의 一四六
구절이 다 이것을 되풀이한 것입니다.
신심명은 계속해서 [단막증애 (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니라]했습니다. [이것은 좋고
다른 것은 나쁘다는 이 분별만 내버리면 툭 트이어 환히 명백해진다. ]는 것입니다. 깨치려는
마음 이것이 최후의 장애이니 이것만 버리면 진짜 마음 밖에 남을 것은 없습니다.
눈을 세 번 만 깜짝깜짝하면 탁 드러날 텐데 그것을 또 바라면 틀립니다. 그래서 옛날 도인
들이 선지식 (善知識)을 찾아다닌 것도 전부 이 때문입니다. 알듯알듯한데 알 수 없으니
선지식을 천명 만명 찾아다니며 무슨 말 한마디 눈짓 손짓 한 번의 가르침 가운데 깨치려는
것입니다.
<선재동자(善財童子)--般若> 3
화엄경( 華嚴經 )의 선재동자가 五三 선지식을 찾아다닌 것도 구경(究竟)은 이 소식을 모르기
때문에 어린것이 맨발로 수백 수천리를 찾아 다녔던 것입니다. 한 선지식을 만나 한 가지를
배우고 또 물으면 다른 선지식을 가르쳐 주면서 거기 가면 백천 삼매를 얻는 다고 합니다.
그 선지식을 또 찾아가서 온갖 지식을 더 배워 보면 마음 생김이나 부처님 법을 좀 더 깨닫게
되는 데 그러나 아직은 무엇인지 미진한게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찾아다닌 선지식 가운데는 음녀 탕녀도 있고 사람을 하루에도 몇 명씩 죽이는
폭군도 있고 목사도 있고 신부도 있어서 선지식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운 행세를 하는 이가
많았습니다. 또한 선지식을 찾아 배우고 깨달음을 얻고 나면 한결같이 그 선지식은 나는
아는 것이 이것뿐이다, 그러니 어디어디 가서 아무 선지식을 찾으라는 것이었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 스님 세분을 만났고 마지막으로 五三번째 선지식을 만났을 때, 문수보살을 만나
깨달음을 성취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을 깨달으면 그때 밝은 지혜가 생기는 데 그 지혜가 <반야>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깨달으려면 깨치고 싶어하는 생각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은 따져서 알 수
있고 언어로 통할 수 있지만 생각을 내는 모든 생각의 주체인 마음, 곧 자성 ( 自性 )은
이렇게 해서는 이해할 수 없고 따져볼 길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법문이 금강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반야를 성취하는 법이 금강경에 자주
되풀이해서 설명됩니다. 부처님의 반야 지혜는 객관적인 사리는 지식이거나 지식에 의한 그런
지혜가 아니고 모든 지식의 주체인 이 마음, 아무 생각이 아닌 청정본연한 내 본마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열반이니 보리니 반야니 화엄이니 법화니 하는 온갖 이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반야지혜는 청정한 자기 마음의 경계, 부처도 중생도 다 끊어져서 일체를
상대하지 않는 주객이전(主客以前) 피아(彼我)의 대립 이전의 밝은 지혜 그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반야는 금강석처럼 파괴되지 않는 지혜이고 영원불멸하는 광명이며 본래 마음 그대로의
고향이며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내버리고 자가본래의 낙원에 돌아온 지혜입니다.
<알 줄 아는 마음자리--般若> 4
육신은 기계와 같고 자동차와 같으며 마음자리는 운전수와 같고 기사와 같으며, 몸뚱이가
옷이라면 말하고 듣는 마음자리는 옷을 입은 사람 몸에 비유됩니다. 그러므로 알 줄 알고
말할 줄 아는 이 마음자리인 나는 육체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걷어 치웠을 때나
변하지 않습니다. 중생놀음하는 범부 시절에도 마음자리는 조금도 덜 함이 없이 제 성능을
다 하고 있으며, 이 다음에 성불해서 부처가 되었을 때도 무엇을 알 줄 아는 그 힘은 더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소금을 입에 집어넣어서 짠맛을 아는 것은 아기 때나 학사
박사 때나 변함없이 똑같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알 줄 아는 이 성품은 분별을 하는 생각과는 다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바닥에 거울을
엎어놓으면 아무 그림자도 없이 깨끗한 거울의 바닥뿐이지만 바로 젖혀서 물건을 갖다 대면
무엇을 대하든지 그대로 다 나타납니다. 만일 빨간 옷감을 대면 거울 전체가 빨갛게 물든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거울이 실상 빨갛게 물든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거울은
빨간 헝겊을 댔을 때나 아무 물건도 안 비췄을 때나 깨끗해지고 더러워 질 것이 없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 마음자리도 말하고 듣고 죄를 짓고 선을 행하고 온갖 짓을 다 하지만
알 줄 아는 마음자리는 항상 그대로입니다.
육체는 산채 그대로 송장입니다. 눈동자가 무엇을 볼 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지각성(知覺性)을 가지지 못한 그것이 생리적(生理的)으로 체계(體系) 있게 조직이
되어 있다고 해서 알 줄 아는 능력이 물질에서 나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볼 줄 알고
귀가 들을 줄 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범부였을 때는 눈을 빌어서 보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사람이 뚫린 창구멍으로 밖을 내다보고 사진기의 렌즈를 통해서 사진을 찍듯이
사람이 창구멍으로 비치는 것들을 내다보고 알고 렌즈에 찍혀 나온 물건을 보고 느끼고 아는
것이지, 창구멍이나 렌즈 그 자체가 알 줄 아는 것은 아닌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코가 냄새 맡는 것이 아니라 알 줄 아는 마음자리가
직접 보고 냄새 맡고 듣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허공 그것이 무엇을 보고 듣고 할 수 없고, 물질이 본래 원자 전자 시대부터,
에너지 시대부터, 그 이전부터 무엇을 지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알 줄 아는 능력이
본래 없는 무정물질(無 情 物 質 )로 조직된 이 육체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알 줄 아는 마음
자리를 성품(性品)이다, 불성(佛性)이다, 보리(菩리)다, 진여(眞如)다, 한물건(一物)이다 하지만
제일 가깝게 말하면 <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 줄 아는 힘이 있는 성품을 유정(有情)이라
하고 동물(動物)이라 하는데, 돼지 . 고양이 . 개의 형상을 뒤집어쓴 몸뚱이가 유정이란 뜻이
아니고 그것을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다니는 운전수를 동물이라 하고 유정이라 합니다,
몸뚱이는 하나의 물질이고 말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는 무정물(無情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알아지는 인식의 대상이 있고 아는 자신, 곧 주관이 있어서 아는 것은 분별심으로
아는 망상이고 , 있다 없다 하는 생사법(生死法)입니다. 산을 보고서 높은 줄 알고 물을 보고
깊은 줄 아는 그 자리, 생각 아닌 자리, 생각을 일으키기 전의 온전하고 오롯한 자기 마음자리
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자리에서 보면 과학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심지어는 발심(發心)
하느니 성불(成佛)하느니 생사를 해탈(解脫)하느니 하지만 다 잡된 생각입니다. 본 마음자리를
미(迷)해서 생사(生死)의 보(報)를 받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런 생각을 하긴 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다 부처가 되기 전, 내 마음을 돌이키기 전의 일이고 제 정신을 똑똑히 제대로
찾은 사람에게는 일체의 생각을 다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불해야 하겠다. 생사를 해탈해야 하겠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무상(無常)하다"고
하지만 이것도 모두 다 쓸데없는 생각일 따름입니다. 부처가 된다는 생각도 없어지고, 그것이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없어졌다는 생각도 없어져서 온갖 생각이 없어진 자리에 들어가면
"성품(自性)이 이렇구나, 내가 견성(見性)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누구나 한번 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 아차! " 하고 곧 그 생각을 돌려서 저절로 끊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구나" 하는 생각도 망상(忘想)이기 때문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다 버리고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객관대상(客觀對象), 곧 산보고 높은 줄 알 듯이 객관의 사물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저를 알 때는 아는 걸로 아는 것이 아니고 다만 객관세계를 보고 잘못 안 지식을
정리해 버리는 것이므로 아무 생각 없고 아무 허물없는 알 줄 아는 마음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알았다는 생각도 저절로 없어집니다.
일체 생각이 아닌 이것이 온갖 사상이 되고 인과(因果)의 업(業)을 지어 육도(六道)에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데 이 한 놈이 한 짓이고 이 한 놈은 절대적인 초절대의 실재(實在)이고
실상(實相)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마음자리 이것이 있다는 것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란
경 제목의 해설을 들음으로써 짐작이라도 하게 되는 것은 마치 담 너머 쇠뿔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확실히 담 너머에는 소가 있겠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들
자신에게도 시방제불(十方諸佛)이 깨치신 도리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짐작하는 것을 경학
(經學)에서는 해오(解悟)라 합니다. 깨달아서 그 경지에 들어가서 아는 게 아니고 생각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알 줄 아는 이 마음자리는 지혜라고 할 수도 없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초 절대(超絶
對)도 아니고 하나조차도 아닌 자리입니다. 굳이 말하자니 실상(實相)이라 하고 반야라 하는 데
이것이 금강반야입니다. 그런데 반야에도 그 내용을 몇 가지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중생들이
이 반야의 본성이 미(迷)해서 종소리 하나를 가지고도 한국 사람은 땡땡으로 듣고 일본 사람은
강강으로 듣고 서양 사람은 딩동으로 들으니 이것은 다 업보중생(業報衆生)이기 때문입니다.
업에 따라서는 지옥을 천당으로 보고 천당을 지옥으로 보고 사바세계를 극락으로 착각하며
온갖 고생을 하기 마련인데, 이것도 지혜이므로 반야는 반야입니다. 그러므로 반야에도
바른 반야, 잘못된 반야가 있고 깊은 반야도 있고 얕은 반야도 있습니다.
<세 가지 반야--般若> 5
앞에서 말한 마음자리인 나 자신을 깨달은 것을 실상반야(實相般若)라고 했는데, 부처님께서
실상반야를 깨달으신 뒤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아함경, 방등, 반야, 열반 등의 초, 중, 고,
대학 같은 과정의 체계를 세우셨는데 이것은 부처님이 아니면 하나님도 공자님도 구상할 수
없는 내용이고 체계입니다. 이런 지혜를 관조반야(觀照般若)라고 합니다. 실상반야가 체(體)이고
관조반야는 용(用) . 작용(作用) 곧 활용(活用)입니다. 비유하면 실상반야는 물이고 관조반야는
수분(水分)의 작용(作用)인 이슬 . 파도 . 얼음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관조반야는
무엇을 따져보고 아는 것이 아니고 실상반야로 대보면 그냥 알아집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대상물이 그대로 나타나듯이 연구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상을
보고 높다고 직관적으로 아는 것처럼 환하게 전지전능하게 다 아십니다.
발심수행(發心修行)을 해서 참선을 하든지 염불 . 진언을 하든지, 경을 보든지 기도를 하든지
용맹정진하다가 견성한다 해도 번뇌의 깊은 밑바닥까지 뿌리째 뽑아 없애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바다에 파도가 없을 때에도 육안으로 보이진 않지만 아주 미세하게 잔잔한 물결이 남아 있어
서 이것이 모여 가지고 어느 땐가는 큰 파도가 됩니다. 이와 같이 최후의 잠재의식인 제팔장식
(第八藏識)도 정신을 통일해서 닦아 들어가면 차차 없어지고 자기 마음 하나 실재만 오롯하게
나타납니다. 본래 아무 것도 없고 정신 마음 하나니까 그렇게 되는데 이런 정도만 되어도 오래
있으면 신통(神通)이 납니다. 그러면 내가 이제 견성해서 부처가 다 된 줄 알고 아무런 행동
이나 해도 괜찮고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해도 좋다고 하다가 잘못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지식을 못 만나면 이 몸뚱이가 없는 것인데 불을 지른다고 탈것이냐, 도끼로 친다고 부서
질 것이냐 하면서 계율을 안 지키고 육바라밀을 안 닦아서, 만행공덕을 쌓는 거룩한 대승의
보살도를 게을리 하게 됩니다.
경을 자세히 공부하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 참선하다 이렇게 잘못 되면 그 사람 말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마음이 영특해져서 한마디 들으면 열 . 백을 알기는 아는데 자기가
부처가 다 된 줄 아는 고집이 생겨서 남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에
큰 도인 못 만나면 잘못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능엄경 같은 데에 이런 잘못을 경계하는 부처님의 말씀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야에도 젖먹이 아기 정도의 반야가 있고 유치원 정도의 반야, 국민학교 . 중학교
정도의 반야, 대학교 . 석사 . 박사정도의 반야가 있어서 견성을 해서 반야가 열렸다 해도
번뇌의 깊은 뿌리까지 뽑혀진 완전무결한 실상반야의 경계를 참선하기 전에 다 배워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이런 반야를 중생에게 정도에 맞추어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시기 위해 팔만대장경
을 자세히 말씀해 주셨고 육백부의 대반야경을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 금강경은 대반야의 六백부 경을 총결산한 반야의 핵심 경으로서, 앞에서 말한 아공(我空) .
법공(法空) . 구공(俱空)의 도리를 잘 설파(說破)한 경이므로 이것을 공소식(空消息)이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 금강경의 공소식을 말씀하셨을 때는 이미 四十년 동안이나 인과(因果)의
도리를 말씀하셨고 계행(戒行)과 바라밀법(波羅蜜法)과 대 .소승의 온갖 수행법을 말씀하시고
난 뒤였으므로 그 당시의 천 이백 대중은 이 공의 도리를 잘못 이해할 이치가 없겠지만,
이런 도리를 전혀 모르고 불교 사상이 이것뿐인가 보다, 이만하면 부처가 다 된 것이로구나
하며 구경각(究竟覺)에 도달하지 못했으면서 굵은 번뇌망상(煩惱妄想)만 없어진 것을 가지고
다 된 줄 잘못 알고 방심하여 마음을 풀어서 술 . 고기 먹고 오입하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다
보면 깊은 잠재의식 속에 미세한 허물이 차차 도로 일어나서 마지막에는 태산을 무너뜨릴
큰 파도로 됩니다. 언제 그렇게 됐는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四九년 동안 인과(因果)의 도리 삼법인(三法印) . 사제법(四諦法) . 삼칠조도품(助道品.) .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과 육바라밀(六波羅蜜) . 반야경(般若經)등의 말씀을 하신 것은
이런 잘못이 없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실상반야와 관조반야에 대해 부처님의 이런 말씀을 문자반야(文字般若)라고
그럽니다. 실상반야의 그 자리는 말이나 글로 표현될 수 없지만 문자 반야는 중생으로 하여금
마음을 닦아서 실상반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안내서로서 말과 글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정말 부처가 되려고 원을 세운 사람이면 경을 자세히 봐서 반야가 어떤 것이고 어떤 것이
정말 견성이라고 하는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촌사람 금강산 구경하듯이 해서는
안 됩니다. 금강산 구경을 제대로 하자면 적어도 일 년은 걸려야 하는데 촌사람이 남 따라
갔다가 바쁘다고 二 . 三일 둘러보고 오면 누가 물어 봐도 " 아아 , 굉장하더라. "하는 소리
밖에 못 합니다. 이런 식으로 연구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공부해서는 자기가 정진해서 얻은
정도가 어디쯤 왔는지를 모르게 됩니다.
반야경을 "고름 닦아 놓은 종이"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구경각(究竟覺)에 들어
가서 부처가 다 된 뒤에 경이 소용 없을 적에 하는 말이지, 아직 공부를 마치지 못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반야경을 걸머지고 다녀야 합니다. 오조 홍인(五祖 弘忍)스님도
육조 혜능에게 금강경을 전하셨고 육조 스님께서는 후학들을 위해 금강경의 뜻을 친히 풀어서
말씀 해주신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습니다. 설사 부처가 되었다 해도 부처님께서는
필요 없지만 중생에게는 역시 필요하게 됩니다. 유치원 교과서와 마찬가지이고 어린 아기를
가르치는 그림책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조국사(普照國師) . 서산대사(西山大師) 같은 조사(祖師)님들께서 선교(禪敎)가
둘이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과 부처님의< 뜻>이 하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육체는 나 아니다--波羅蜜> 1
우리는 육체를 <나>라하고 오온(五蘊)을 <나>라고 하기 때문에 천당 지옥을 생사윤회 합니다.
만날 돌아다녀 봐도, 시집을 천만 번 가 봐도 소용없고 장가가도 별수 없고 세계갑부가 되어도
별 수 없습니다. 생로병사를 면 할 수 없고 반야지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인류의 물질문화가
더욱 진보하여 10년 20년 후에 우주여행을 하루에 다녀올는지 모릅니다. <아폴로>가 발달해서
달나라뿐만 아니라 화성 금성에 가서 사람이 사는지 안 사는지 다 보고 올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아무리 그래봐도 육신을 <나>라고 하는 이상, 옛날 물질문명 미개시대(未開時代)에
먼 길의 여행을 두발로 꼬박꼬박 걸어 다녔고 좀 호강한다면 가마를 타거나 당나귀를 타고
다니던 그 때와 아무 것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기계는 발달했을지 모르지만 사람은 다 그대로
입니다. 원시인 야만인인 때와 근원적으로 무엇이 다릅니까.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 하지만 그 때도 밥 먹고 지금도 밥 먹고, 밥 먹으면 똥 싸고 오줌
누어야 하고 밤엔 자야하고 그밖에 무엇이 또 다른 게 있습니까. 인간 자체는 아무 것도
진보 된 게 없고 다만 물질문명과 악한수단, 남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일시에 죽일 수 있는
무기가 발달했을 뿐입니다. 공산주의도 그렇고 자본주의도 그렇고 예수니 공자니 어떤 종교도
저만 옳다는 자기중심으로만 살려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 세상에 전쟁이 없을 수 없고,
이 혼란을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행기가 나오고 원자탄이 나오고 아폴로가 나와 가지고 달나라까지 가서 거기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게 되어 달이 이제는 사람 죽일 한 개의 무기장치 곳간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육체를 <나>라고 하는 사고가 횡행(橫行)하는 이상 이런 인간 세상에는
영원히 불안과 공포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어딜 가나 무엇을 해도 설사 이 우주를 다
내 것으로 차지해 놓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거지로 돌아다니면 하루가 참으로
긴 것 같고 오래 산 것 같지만, 돈이 좀 많거나 권리가 높아지면 하루가 일년같이 지나갑니다.
이런 것은 다 육체가 <나>라는 유물적 사조(唯物的思潮)에 의한 인생관에 얽매여 살기 때문
인데, 이 사상은 인류가 저희끼리 서로 잡아 죽여 전멸하게 하는 화(禍)의 근원이 됩니다.
내가 늘 하는 말인데,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잘 산다 부자다 하지만 그 나라의 제일 부자집
아들딸들이 요새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인물도 다 잘나고 재주도 천재이며 모자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청소년들이 히피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사회의 모든 것은 부조리(不條理)이고
허무하고 뚜렷한 인간의 목표가 없지 않느냐. 도대체 <나>란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자아상실(自我喪失), 윤리기준(倫理基準)의 상실, 생의 의의에 대한 욕구불만
(欲求不滿) 등으로 몸부림치는 그들입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욕망(慾望)을 채우면 인생은 행복
하다는 수박 겉 핥기 식의 피상적 인생관(皮相的人生觀)으로는 이미 이들의 허탈을 해결해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병적으로 난동을 부리다시피 하니 미국의 앞날이 걱정입니다. 이들은 전쟁도 반대
하고 삶에 대한 애착도 집착한 것 같지 않습니다. " 전쟁한다고 이익될 것이 뭔가, 전쟁에 죽는
사람만 원통하다, 전쟁에 희생당하고 나면 엉뚱하게 딴 놈이 호강한다, 결국 인생은 부재(不在)
다, 무엇 하는 것이 나인지 모르겠다. " 이런 등의 실망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도 죽기는
싫어서 자살은 못 합니다. 환각제를 먹든지 술이나 마시든지 아편을 맞든지 하여 송장처럼
쓰러져 갑니다. 희망도 없는 내일이지만 그래도 또 만나보고 싶고 죽기는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덴마크 총각 처녀들은 자살까지 한다고 합니다. 도의적인 구속도 없고 성도 개방했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고 그야말로 지상의 극락세계이고 천당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많은 청년
들이 자살을 한다는 것입니다. 먹고 배설하고 죽는 것보다는 좀 통쾌하게 죽자 해서 오토바이
를 타고 가다 수십길 되는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택시를 타고 가다 강이나 바다에 떨어져
물이나 꼴닥꼴닥 먹다 죽자, 그래봤자 하나도 억울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물사상(唯物思想)으로는 아무리 고도로 진보해 봤자 먹고 똥 싸는 것밖에 인간을
만족 시킬만한 이상이 없습니다. 결국 자살할 길 밖에 없습니다. 영혼을 부정하는 인간의 말로
(末路)는 결국 비참하게 끝납니다. 그 중에는 머리는 좋은데 나쁜 사람들이 인간사회를 한 개의
도박장으로 만들어 갑니다. 머리가 우수한 권력자들은 강력한 조직을 가지고 전 국민이
한 사람도 반대를 못하고 최후 일인까지 싸우게 만듭니다. 뒤에서 호령 한 마디 하면 전쟁에
나가 죽으라면 죽습니다. 말 안 들으면 당장 죽겠으니 적을 만나는 동안이라도 살아 있고
싶어서입니다. 생의 애착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자살이 부쩍 늘어난다면 정말 이것은 생의 애착도 없어진 상태입니다. 백년 다 살아
봐도 아무 것도 아니다, 금방 죽어도 아깝지 않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인간이 여기까지
가면 다 끝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소수에 한한 일이고 전부는 아니지만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합니다.
<싣달태자의 바라밀--波羅蜜> 2
싣달태자께서도 三천년 전에 이것을 걱정했습니다. "사람은 죽는다, 나도 죽을 것이다, 어느
누가 나를 죽게 만들었으며 왜 그렇게 된 것인가. "그 깊은 비밀을 낱낱이 파헤치고 쳐부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 우주는 상대적 원리로 되어 있다, 높은 것이
있으면 낮은 것이 있고 더운 것이 있으면 찬 것이 있고 ,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전부
이렇게 대조적인 원리로 되어 있으니 죽는 것의 대조는 안 죽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죽지
않는 원리가 있을 것이다, 내가 안 죽는 원리를 발견하고야 말겠다. " 이렇게 생각한 그는
밤새도록 잠도 못 잤습니다. 마침내 싣달태자는 궁전과 미녀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서 인도
천지에 있는 도인들을 다 만나 물어 봤지만 몇 백년 몇 천년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지 않으나
아주 안 죽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 나는 조금 오래 사는 것이 원이 아니고 영원히
안 죽는 방법, 허공이 없어진다 해도 안 죽는 원리를 발견하자는 것이 나의 원이다. "이렇게
생각한 싣달태자는 개소리 닭소리 안 나는 산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서 그 해결을 위해 참선을
했습니다.
"내가 영원히 안 죽는다. 뭐가 그리 영원히 안 죽느냐.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나>다.
그러면 내가 무엇인데 영원히 안 죽나. " 가만히 자꾸 따집니다.
"이제까지 <나>라고 하는 것은 육체였는데, 만일 육체가 <나>라면 영원히 안 죽을 수 없다.
그러면 정신이 <나>인가. 그러나 이 생각 저 생각 변화무쌍하니 그 가운데 어느 생각을
<나>라고 할 수도 없다. " 싣달태자는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어서 모든 생각이 어디서
나오나 살펴보았습니다. 싣달태자의 생각은 아버지 생각도 어머니 생각도 아우 자식의 생각도
아니고 확실한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생사를 면(免)해야겠다, 영원히 죽지 않는 원리를
찾아보자, 이 생각은 분명히 내 생각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생각을 내는 <나>는 무엇인가. 생각을 내는 것이 <나>지 생각이 <나>일 수는 없다.
그러니 생각을 나게 하는 이 주체가 무엇인가. "이것이 의문으로 되었고 일차적인
결론이었습니다.
"허공은 아는 능력이 없으니 생각을 내 놓을 수 없다. 그렇다고 지구나 바위나 땅 속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그러니 확실히 무엇을 생각하는 이 주체는 물질도 허공도 아니로구나.
이것들은 생명이 없으니 무엇을 생각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확실히 물질도
허공도 아닌 것이 생각을 내고 그것이 바로 <나>로구나. 또 확실히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생사가 없겠구나. 육체가 <나>라고 하지만 육체고 따지고 보면 결국 물질임에 틀림이 없고
지식이라는 것도 생각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 지식 또한 <나>는 아니다.
육체와 지식을 초월한 모든 생각의 핵심이 <나>이니 이 <나>야말로 죽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
이렇게 생각을 한 뒤부터 싣달태자는 六년 동안 가속도(加速度)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말이 가속도로 생각을 했다고 하는 것뿐이지 실제로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안 한 것도
아니고, 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니라고 해도 안 되고 가만히 있었다고 해도 안 되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고 해도 안 됩니다.
남한테 아주 분한 소리를 들으면 생각할수록 분이 더 나서 밥을 먹을 수 없게 됩니다.
저녁에 드러누워 자려고 해도 잠이 안 와서 벌떡 일어나 앉아 있게 됩니다. 날만 새 봐라
칼을 가지고 너 죽고 나 죽자 하고 분한 생각 하나로 골똘하게 될 뿐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중대한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딴 생각을 멈추고 한 가지 문제에 정신을 집중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정신통일 . 주의집중(注意集中)의 힘을 가속화(加速化)하여 인생일대의 생사문제를
앞에 놓고 일념부동(一念不動) 깊은 마음의 바닥을 향해 들어가는 것을 선정(禪定)이라고
하는데 싣달태자는 이렇게 해서 마음을 깨쳐 부처를 성취했습니다. 그래서 우주에 대 자유하고
번뇌 . 생사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얻었습니다. 생각의 주체인 <나>, 우주와 인생의 핵심인
<마음>,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참나>를 깨달아서 저절로 바르게 아는
지혜를 <반야지혜>라하고 <보리설법(菩리說法)>이라 합니다.
<욕심 끊어야 큰 복--波羅蜜> 3
어떤 집념(執念)이 강한 생각은 우리를 구속하게 되는데, 소위 지식이 하나하나 늘어나서
학문이 한 가지 한 가지 발달하면 할수록 우리의 생명을 구속할 상대가 그만큼 더 늘어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옳다 하면 꼼짝 못하고 공산주의에 구속당하고, 자본주의가 옳다고
해도 구속되고, 기독교도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대자유 . 대해방을 얻으려면 이 세상
학문을 다 초월해야 하고, <나>아닌 다른 외부의 지식이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야 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도 내가
구속당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사람한테 꼼짝 못하고 마음이 끄달려서 뿌리치고 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남을 미워하는 것도 구속입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그 사건에
구속됩니다.
아무 욕심이 없어야 그 때가 비로소 자유뿐이고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고 천하가 다 우리집이
됩니다. 모든 것을 다 털어놓으면 모든 것이 내 것이 되고, 붙들어 쥐려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점점 더 고독해 지고, 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적이
많아집니다. 권리와 돈 다 버리고 나면 천하 물건 다 내 것이 됩니다. 아무 욕심없이 농사짓고
장사하면 무슨 사업을 해도 잘 되지만 욕심장이는 혼자 돈을 벌어서 남을 위해 한 푼도 쓰지
않으니 천 사람 만 사람이 다 증오하게 됩니다. 그런 욕심 버리고 돈을 모으면 온 세상 사람이
다 내 식구고 재미가 날 것이며 욕심을 떠나면 내가 없어도 하나 걱정 안 됩니다. 욕심 없는
처녀 시집가면 오직 남편만을 생각하고 위해주니 이런 아내는 다시없다고 업고 다니며 좋은
물건 다 사다 줄 것입니다. 욕심 없는 총각이 장가들면 자기의 모든 것 희생해서 아내만 위해
줄 것이니 그 아내는 우리 남편 제일이라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 남편이 조금만 다쳐도
큰일 납니다.
모두 제 욕심만 채우려니 첫날 저녁부터 남의 사정 하나도 안 봐 준다고 싸우고 원수가
됩니다. 욕심을 가지면 자유를 맛볼 수 없습니다. 욕심 없는 대자유의 맛은 안 가져 본 사람은
모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욕심을 버리고 내 마음을 깨쳐야 그것이 반야이며 참다운 지혜를 얻습니다.
이런 법문을 듣고 " 그런 것이 깨달음이로구나. " 하고 알아들은 정도를 가지고 반야 지혜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 개의 지혜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부처님 소식을
듣고 마음을 깨쳐야 하겠는데 그러자면 욕심을 버려야겠다고 하여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소리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위 되는 것이 아니라 허공되는
것이니, 불교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즐거움은 깨닫는 것--波羅蜜> 4
"욕심 버리고 일하라. 남을 위해 할 일 밖에 없다. 이 육체는 내가 아니니 완전히 내버리고
나면 육체를 위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 이런 정신으로 다만 내 이 본 마음의 자세를
그대로 지니고 간직할 뿐, 오직 부모와 형제와 아내와 남편을 위해서 살고, 친구와 이웃을
위해서 일하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쉬운 말로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정신을 따로 차릴 것이 아니라" 기분을
내지 말라" "부정(否定)이나 긍정(肯定)을 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본연 자세
그대로 드러나는데 그때의 즐거움이란 말로 다할 수가 없고 그것은 즐거움도 아닙니다.
그것은 돈푼이나 모아 가진 즐거움이 아니라, 우주를 다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생(生)의
환희(歡喜)이며 누구한테 얘기도 못하고 혼자 웃는 정말 통쾌한 즐거움입니다. 지구가 녹아서
이 마음의 창고에 들어오고 저 태양이 녹아 들어오고 일월성신(日月星辰) 온 우주가 다 녹아
나의 마음 가운데 들어옵니다. 그러니 모르는 것도 없고 다 알고 다 모르고 나와 우주가 일체
(一體)가 됩니다. 사람이 아는 것처럼 큰 고통이 없습니다. 아는 것 때문에 고통인데 불교를
알아 놓으면 하나도 모릅니다. 하나도 모르면서 다 아는 그곳에 참으로 큰 기쁨이 있습니다.
이때는 아무 근심 걱정이 없고 원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대반야이고 지혜입니다.
<남만을 위해 살 때---波羅蜜> 5
이렇게 해서 불생불멸하는 내 마음을 깨쳐야 하는 노력, 그것이 <바라밀다>입니다.
바라밀다를 도피안(到彼岸)이라 번역하는데, 그 뜻은 저 언덕으로 건너갔다. " 이 세상에 살다
저 세상에 갔다. 이 중생 세계에 살다 저 불보살세계에 갔다. 사바세계에서 극락세계로 갔다. "
그런 뜻입니다.
이것을 좀 쉽게 현세에 비유해서 말한다면, 가난하여 고학을 한 끝에 부처님 법대로 일도 잘
하고 아껴 먹고 저축해서 부자가 됐다. 나중에 병들어도 약 먹을 때 돈 염려 없다. 가난하다가
부자가 되어 모든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이 됐으니 이것도 하나의 도피안(到彼岸)이라 할 수
있으며, 자기가 발전하는 모두가 도피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살이에서 보면
도피안이란 말이 되겠지만, 우리가 마음을 깨쳐서 부처가 된다는 의미의 도피안은 아닙니다.
우리 범부가 천당 . 지옥 . 귀신세계로, 동물세계로, 인간세계로, 아수라세계로 육도윤회(六道
輪廻)하는 것은, 내 마음이 <참나>인 줄 모르고 육체를 <나>라하여 육체의 생존을 위해
업(業)을 짓기 때문입니다. 그 업의 인과에 따라 개도 되고 소도 되고 합니다.
육체가 내가 아닌 진리를 깨닫고 나면 지식 . 사상이 내가 아닌데 그러면서 또 지식을 알고
사상을 아는 <참나>를 찾게 됩니다. 이제까지 육체가 <나>라는 착각으로 고생을 하고 육도로
돌아다니다 도인을 만나 마음이 <나>지, 육체가 <나>는 아니다. 육체는 내 소유는 될지언정
<나>를 대표할 수는 없다. 이런 진리를 듣고 이제 부터는 참 마음을 단속해야겠구나, 지식
이나 학사 . 박사 . 노벨상 다 필요 없다. 돈도 권리도 의식주(衣食住)도 필요 없다고 결심하여
육체본위의 생활을 차차 청산해 갑니다.
하루 세끼에서 두 끼만 먹고 두 끼에서 한 끼로, 나중에는 안 먹어도 됩니다. 정신의 도가
높아지고 마음의 힘이 커져서 이 마음이 우주를 창조할 수 있으므로 굶어도 몸이 축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밥을 안 먹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도 아니고 도의 깊이를 굶는 능력으로
안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집착이고 구속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물질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부정 . 긍정의 아무 생각 없이 대합니다. 누워 자도, 장사를 해도, 정치를 해도 나를 위해선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나는 망하고 내가 없을 때, 그리고 남만을 위해서 살 때 <나>는
자꾸 커 갑니다. 온 우주가 전부 다 내 것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자아완성이 도피안(到彼岸)---波羅蜜> 6
자아완성(自我完成)이란 물질인 육체를 위해 산삼 한 뿌리씩 먹는 것인가. 대통령되면 완성
(完成)인가. 세계 대통령이 된다 해도 그것은 인격완성(人格完成)일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사람은 자꾸 죽어 갑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것이 나인데, 자아도 쓸데없고
지식도 신앙도 필요 없습니다. 불교도 믿을 필요 없습니다.
내가 부처이니 <나>만 잘 다스리면 됩니다. 석가여래만 천만번 믿어 봐야 석가여래 믿는
인간이고 중생일 뿐 별 수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단속해 나아가서 번뇌 망상 자꾸 없애
버리는 그것이 자아완성(自我完成)입니다. 그래서 순수한 본래의 자기 마음, 청정한 <나>를
깨달아 놓으면 온 우주가 그대로 먹을 것도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안 되는 것이 없이 전지전능
(全知全能)해 집니다. 이것이 비로소 해방이고 인격완성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정화(淨化)하고
교단(敎團)을 정화하는 것도 바로 이 인간 해방운동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국 부처가 되고 싶어
하는 생각을 내는 그 생각의 주체인 <참나>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이제부터 객관의 천당 지옥으로 돌아다니다가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고 딴 데 어디로
가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찾아 <참나>를 완성하는 것이 불교 최후의 목표
이기 때문입니다.
<도피안은 돌아온 것---還此岸>
도피안이란 결국 인도(印度)말로는 저 언덕에 간 것이라고 하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뜻과는 다릅니다. 부처님의 뜻대로 하자면 환차안(還此岸), 곧 이리로 돌아온다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만일 <도피안>이라 하여 어느 딴 곳에 가는 것이라 하면 <나>로부터 떨어지게
됩니다. 어디까지나 마음을 깨치는 것이 성불이고 자기 마음을 단속하는 것이 도피안의
길이니, 이렇게 함으로써 생사를 초월할 수 있고 대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피안>(到彼岸)이라 번역했는데, 이곳이란 뜻을 저쪽이란 말로 표현했다면 부처님의
뜻과 다르지 않지만, 참말로 저쪽 어디로 멀리 가서 보살이 되고 성불하는 것이란 뜻으로 알고
그렇게 번역했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뜻과 크게 어긋납니다. 이 도피안을 보통 한문대로 알다가
는 진리가 자기 마음자리인 <나>한테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여 어디로 가려고
하게 되니 큰 일입니다. "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부증불감(不增不減)하며 청정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닌 그러한 금강 같은 내 본 마음으로 돌아온다. 모든 객관 사물에서 보는
비판을 버리고 , 소위 철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모든 학문, 일체의 지식을 안 따라가는
내 마음자리로 돌아온다. " 그런 뜻으로 한 말이 <도피안>입니다.
<경중의 경---經>
경(經)이란 성인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내용을 이야기한 <말씀><글><이야기>란 뜻입니다.
이 경자(經字)를 <날경> . <법경>이라 하고 <글경>이라고도 합니다. 옷감으로 쓰는 베를
짤 적에 요사이는 방직기계(紡織機械)로 짜지만 원리는 다 한가지여서 날이 있어야 그 날
사이로 실을 감은 실톳이 왔다갔다하면서 길쌈을 짜게 되므로 날이 무명을 짜는데 핵심이
됩니다. 이와 같이 성인의 말씀이 모든 이치의 핵심이 되므로 <경>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 <經>자 대신 <徑>자를 쓰기도 하는데 <徑>자는 <지름길경> . <빠를경>자 이니 , 빠르게
지름길로 간다는 뜻입니다. 중생들은 삐뚤어진 길로 꼬불꼬불 돌아다니지만 성인이 말씀한
진리는 인생을 바른 길로 가게 하는 지름길로 빠르게 가게 한다는 뜻으로 <徑>자를 씁니다.
그러나 이것은 <경>에 <徑>자의 뜻이 있다는 정도이지 실제로는 <經>자로 그 뜻을 포함하여
표시합니다.
그래서 경전(經典) . 경교(經敎) . 경률(經律) . 경서(經書) . 장경(藏經) . 성경(聖經)이란 말이
있고, 유교(儒敎)에서도 사서삼경(四書三經)이 있는데 불교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四九년간 하루도 쉬지 않으시고 고구정녕(苦口 )으로 중생들의 근기
(根機)와 정도에 맞추어 이렇게 말씀하시고 저렇게 설명하셔서 마음을 깨치도록 하신
八만 四천 법이 경 가운데, 실려 있다고 해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 합니다.
이 팔만대장경은 부처님께서 멸도(滅度)하신 뒤 그 교법(敎法)이 흩어지지 않고 후세에 잘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 부처님의 제자들이 저마다 들은 것을 외워 내어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비로소 경으로 체계(體系)있게 결집(結集)함으로써 완성된 것입니다.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법문을 청함으로써 묻고 대답하는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깨쳐서
<참나>(眞我)를 완성하고 부처를 이루어 반야의 지혜를 말씀하신 것이 이 " 금강경 "이니
"[금강반야바라밀경]은 경(經)중의 경인 것입니다.
<구마라습삼장---(鳩摩羅什三藏)>
구마라습은 인도 구자국(龜玆國)스님의 이름인데 번역하여 동수(童壽)라 합니다. 어린이면서
노인처럼 학문이나 모든 것이 대성(大成)해 있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어린이면서
마음 쓰는 거나 생각하는 게 팔십 늙은이처럼 속에 영감이 들어앉아 있어서 사람 대하는 법이
실수를 안 합니다. 어려서부터 천재이어서 학문이 밝고 덕이 높으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그래서 어려서부터 <선생님>소리를 들은 분입니다. 일찍이 어려서 출가(出家)하여 소승교
(小乘敎)를 배운 뒤에 대승불교(大乘佛敎)에 능통했으며 다시 율장(律藏)을 통하여 경률논
(經律論)의 삼장(三藏)을 두루 통달(通達)했으므로 삼장법사(三藏法師)로 존칭(尊稱)되었으며,
이래 구자국에서 대승불교를 널리 전포(傳布)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구자국을 정벌했을 때 구마라습 삼장을 중국으로
모셔 왔던 것입니다. 그 뒤부터 장안(長安)에 있으면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 [묘법연화경
(妙法蓮華經)]등 많은 [경률론]을 번역했는데, [금강경]도 이때 구마라습 삼장이 번역한 것이
지금까지 제일 많이 유행했으며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이 [금강반야바라말경]도 이 구마라습
삼장이 번역한 것입니다.
<법회산림---(法會山林)>
불경(佛經)을 강의하는 것을 절에 가면 산림(山林)한다 그럽니다. 이 말은 파인아산(破人我山)
하고 양공덕림(養功德林)한다고 하는 글귀의 끝자 둘을 합해서 만든 말입니다.
너니(人) 나니(我) 하고 집착(執着)하는 착각(錯覺)을 두드려 부수는 것이 불교 공부하는 것이고,
태산(泰山)처럼 높은 <나>라는 감정을 앞세우는 아상(我相) . 인상(人相)을 없애는 말씀을
한 것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므로 파인아산(破人我山)한다는 뫼산자(山)를 떼어서 쓴
것입니다. 그런데 아상 . 인상만 부수는 것이 아니고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도 두드려
부수는 것이니, 결국 말은 <인아산>(人我山)이라 했지만 뜻은 아상산(我相山) . 인상산(人相山)
중생상산(衆生相山) . 수자상산(壽者相山)을 다 부수어 없앤다는 말로 봐야 합니다.
<아상>은 몸뚱이를 <나>라고 생각하고 생각을 <나>라는 고집이며 <인상>은 <나>에 대한
상대적인 존재, 곧 남을 뜻하며 객관을 뜻합니다. <중생상>은 살림살이하는 것, 좀 잘 살아
보자 남과 같이 살아보자는 생각이며, <수자상>은 이 몸뚱이로 타고난 백년 목숨을 살리려
하고 좀 더 오래 살려는 생각입니다. 이것을 사상(四相)이라고 하는데 역시 금강경의 중요한
사상(思想)입니다. 이 四상만 끊어지면 보살의 지위에 나갈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이 四상에 대해서는 본문을 공부할 때에 많이 나오게 되므로 자세한 설명은 뒤로 미루기로
합시다.
수풀림(林)자를 쓴 것은 숲은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고 재목이나 화목(火木)으로도 쓰고 과일도
있고 온갖 짐승들이 길들고 또 무성(茂盛)하는 것을 뜻하며 사람에게 덕(德)을 끼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공덕의 숲을 기른다는 뜻으로 양공덕림(養功德林)이라 했는데 그 끝자인
임(林)자를 따서 산림(山林)이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설법(說法)을 하고 법문
(法門)을 듣고하는 것은 모두 산림을 시작한 것이며, 인아산(人我山)을 부수고 불보살님과 같은
완전한 인격을 성취하는 공덕의 숲을 기르는 사업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