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과 마찬가지로 포근한 대한이었다. 찌푸린 날씨는 먼지 재울만큼 가랑비가 살짝 내렸다. 나는 점심 식후 등산화 신고 산책을 나섰다. 기능대학 후문에서부터 교육단지 뒷동산을 타고 걸었다. 집 가까운 도심에서 솔밭 길을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곳이다. 한두 방울 비가 흩뿌린 평일이라 적요한 숲이었다. 청설모 한 녀석이 길을 막고 있더니만 대숲 근처선 산토끼 한 마리가 후딱 사라졌다.
창원여고 지나 극동방송국 뒷동산 끝에서 내려왔다. 북사면 비탈에 신축 중인 청소년 과학체험관 뼈대가 거의 다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충혼탑 사거리에서 대상공원으로 올랐다. 오른쪽 골엔 순국선열을 추념하는 충혼탑이고, 왼쪽엔 청소년 전용 문화공간인 늘푸른전당이다. 창원전문대학 뒤를 계속 걸어 창원컨벤션센터에 이르렀다. 지난해 두대동으로 통하는 터널도로가 새로 뚫렸다.
복개한 터널 위로 예전의 산책길은 살려 두었다. 우뚝 솟은 시티세븐 빌딩은 마감공사가 진행 중인 모양이었다. 산자락 끝나는 곳에 골프연습장이 있었고 내려서니 대원동이었다. 경남아파트 단지를 지나니 어린이 교통공원이 나왔다. 건너가 홈플러스인 곳에 람사르를 기념한 습지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경기도가 총회 개최지 경상남도를 후원하는 협약에 따라 만든 공원이었다.
정부와 민간 환경단체 대표들이 습지보전을 위해 의견을 나눈 람사르 총회였다. 이탈이라 칼리아리에서 시작된 이래 열 번째 총회가 지난해 가을 창원에서 ‘건강한 습지, 건장한 인간’라는 주제로 열렸다. 지구환경의 습지를 인체의 콩밭에 비유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대암산용늪, 신안장도습지, 순천만갯벌, 물영아리오름, 무제치늪, 두웅습지, 무안갯벌, 우포늪이 람사르 등록습지였다.
생태공원 곁에 눈길을 끄는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해정(海亭) 마을 옛터 비였다. 용지봉과 불모산에서 흘러온 남천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해정 마을은 마산만이 가까워 해수와 육수가 만나는 곳으로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와우산 아래 봉암 갯벌이 멀지 않았다. 이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농사짓던 삼십여 세대가 신도시개발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고향이 생각나 그곳에 비를 새워두었다.
창원이 신도시로 개발된 지 삼십여 년 흐른다. 한 세대가 교체되는 데 걸리는 기간이 삼십년이라고 한다. 젊은 도시 창원도 이제 장년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오십여 만 명에 이르는 창원인구 가운데 조상을 창원에 뿌리 둔 원주민은 그렇게 많지 않은 숫자일 것이다. 신도시가 형성되던 초창기에 창원에 들어와 살았던 세대는 이제 그들의 장성한 자녀가 결혼해서 분가해 나갈 즈음이다.
해정 마을 옛터 비를 지나 삼동분수광장으로 가 보았다. 겨울이라 분수는 가동하질 않았다. 광장 곁에는 삼동(三東) 유허비가 있었다. 이 마을은 해정 마을 보다 더 큰 마을이었나 보았다. 연안 명씨 집안만도 쉰 두 가구가 떠났다고 새겨두었다. 제등산 아래 남천이 휘감아 도는 기름진 들녘에 오곡이 풍성했다고 전했다. 웃깍단, 아래깍단, 돌박깍단, 노산골이 모여 이룬 마을이 삼동이었다.
창원시내 외동과 안민동에는 아직 원주민의 주거가 섬처럼 몇 집 남아 있다. 지난해 봄에 봉곡동 뒤 안담 자연마을이 택지개발로 사라졌다. 창원컨트리클럽 가는 길 맨 안쪽에 있던 마을이었다. 삼정자동 외리도 마을 원주민들은 모두 떠나고 아파트 부지를 닦고 있다. 불모산 저수지 아래 불모산동 주민들도 곧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창원시내에서 마지막 남은 자연마을이 불모산동이다.
나는 충혼탑 사거리 건너 교육단지 앞 공원을 지났다. 넓은 공원부지 안에 야구와 축구를 비롯한 여러 체육시설이 있었다. 시민들이 여가에 취향 따라 운동 할 수 있게 해두었다. 봄 한철 벚꽃터널로 유명한 교육단지는 방학이라 조용했다. 창원도서관에 한 번 들려볼까 생각하다 등산복차림이라 마음 접었다. 맨살 드러낸 벚나무 아래를 거닐다 창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떠올렸다. 09.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