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부활존-드라마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헤니히
리뷰 정리하다가 문득 든 생각인데요, 이 드라마를 음악에 비유하자면 라벨(Maurice Ravel:1875~1937)의 '볼레로(Bolero)'같은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단순하지만 정교하고 아름다운 선율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중 하나죠. 라벨이 저명한 무용가 이다 루빈스타인(Ida Rubinstein) 여사를 위해 1928년에 지은 무용곡입니다. 원래 "볼레로"란 '날다'란 뜻을 가진 스페인의 무곡이랍니다. 악센트가 강한 3박자를 사용하여 현악기와 캐스터네츠의 반주로 보통 한 쌍의 남녀가 '연애의 밀고 당기기'를 연상시키는 춤을 춤을 춘다고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자무용수들끼리 혹은 남자무용수들끼리 추기도 하지요.
{ ↑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 1864~1901)이 그린 '볼레로 댄서'입니다. }
이 음악의 가장 독특한 점은 철저한 계산 하에 두 개의 주제만이 연속적으로 반복됨으로써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엔 리듬 주제가 2회(4마디) 피아니시모(pp)로 '매우 여리게' 연주되고, 주제가락 A와 B가 각각 2회씩 악기를 바꾸어 가며 점점 강하게 연주됩니다. 첫 주제가 악기를 바꾸면서 반복되면 이 주제에 응답하는 형태로 또 하나의 주제가 뒤따르죠. 그 사이마다 볼레로 리듬이 두 마디씩 끼어들고요. 이것이 통틀어 4회 반복된 후 마지막으로 A가 한 번 연주된 후 리듬이 나오고 비로소 B가 변형됩니다. 한 조의 주제가 동일한 리듬을 따르면서 조바꿈도 변주도 되지 않고 단지 악기 편성을 바꾸면서 고조되고 반복되는 셈입니다. 악곡은 그대로 진행되고 가장 작은 소리에서 가장 큰 소리로 변화하는 '크레센도'(cresendo)만 사용되는데 끝 두 마디에 이르러서야 조바꿈이 일어나 장대한 절정부로 끝납니다.
보통 어느 정도 큰 곡이라면 몇 가지 선율을 구성하여 거기다 변화를 붙이면서 하나로 정리하는게 일반적인 작곡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곡의 경우는 그와 같은 음악상식을 무시한 채 특징있는 두 개의 주제만 18회나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리듬이나 템포가 바뀌지 않고, 바뀌는 것은 다만 주제를 담당하는 악기의 구성뿐이라는 것은 거의 전무후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아요. 라벨은 전곡을 통해 같은 테마를 되풀이하면서도 특수한 악기 편성으로 여러 가지 색채를 부여하여 단순한 동의반복이 아닌 묘한 긴장감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음량이 커져서 겨우 마지막 2마디에 이르러 급작스럽게 분위기가 바뀌면서 맞는 대단원! 참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작품입니다. 또 악기 구성의 차이만으로 듣는 사람을 이끄는 점도 "오케스트라의 마술사" 라벨답지요. 제가 [마왕]과 이 곡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이유도 그 점 때문이예요. 이 드라마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제는 과거 12년 전의 사건 - 태훈의 죽음입니다. 다른 모든 불행의 시발점이자, 그 사건에 연관된 여러 사람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재구성되는 비극입니다. 분명 상황은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보는 각도와 그것을 기억해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관점들... 마치 같은 곡조를 다양한 악기가 반복해서 연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 모든 악기들은 드라마 <마왕>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여러 캐릭터들과 같습니다. 하나의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모두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입을 엽니다. 장장 169회의 볼레로 리듬에서 변화하는 것이 음색과 음량뿐인 것처럼, 이들은 이런저런 높낮이로 숱한 이견을 주고 받지만 동일한 얘기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합니다.
'볼레로'의 두 주제는 각각 '드라마의 중심축을 이루는 두 캐릭터', 오수와 승하에게 대입해도 괜찮지 않을지... 음악 속에서 주제가락 A는 다장조로 일관되게 진행되는데 반해, 주제가락 B는 바장조에서 바단조를 오가면서 진행되고 종결부에 다다르면 급격한 변화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느닷없는 끝맺음 - 멈출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느닷없는 파국을 맞이한 드라마가 떠오릅니다. 제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이 드라마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썩 만족스럽거나 전적으로 동의할 수 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드라마 중에서 이처럼 독특한 시도가 또 있었을까요? 제가 우선적으로 가장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그 '도전정신'입니다. 음악사적으로 그 이전까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던 '볼레로'의 구성처럼, 드라마 <마왕> 또한 국내 드라마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리라 생각합니다.
악기편성 피콜로, 풀루트 2, 오보에 2, 코랑글레(잉글리쉬 혼), 클라리넷 2(Eb, Bb), 베이스 클라리넷(Bb), 파곳 2, 콘트라파곳, 호른 4(F), 소트럼펫(D), 대트럼펫 3(C), 트롬본 3, 튜바, 색소폰 3(F,Bb, Bb), 팀파니 3, 작은북 2, 큰북, 심벌즈, 탐탐, 첼레스타, 하프, 그리고 현악5부.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이 1987년에 지휘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입니다. 원곡은 16분이 넘습니다만 여기서는 5분17초로 과감하게 축약시켰습니다~+_+
※ 원곡 듣고 싶으신 분은 링크를 클릭하시길~ → http://mediafile.paran.com/MEDIA_2319077/BLOG/200608/1154798459_volero.wma | ||||||||||||
꼬리말 쓰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