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道)
200119 고전 1:18-25
1. 옹산과 후계동
(1) 동백꽃 필 무렵
지난 연말 아는 분 소개로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재밌어서 드라마 몰아보기로 며칠 만에 다 보았습니다. ‘동백꽃 필 무렵’이란 드라마입니다. 보신 분들 많으시죠? 게장으로 유명한 옹산이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동백이라는 이름의 젊은 엄마가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미모의 젊은 미혼모 동백이가 옹산에 나타나고 동네에서 술집을 운영하자 마을 아저씨들은 좋아하지만 동네 아주머니들은 동백이를 시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동백이를 미워하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속사정을 하나하나 알아가게 되면서 서로서로 정이 깊어지게 되지요. 결국 불쌍한 동백이에 대한 동네 아주머니들의 관심과 사랑은 무시무시한 연쇄살인범의 마수에서 주인공 동백이를 구해내게 되고, 동백이는 도망가는 범인을 쫓아가 생맥주잔으로 뒤통수를 후려쳐서 녹다운 시킵니다.
게장 하나만 유명한 이곳, 옹산이란 곳에는 번듯한 빌딩도 없습니다. 동백이네 술집은 겨우 만 원짜리 안주 두루치기를 파는 곳입니다. 이 동네엔 자랑할 만한 스펙의 인물도 없습니다. 가장 잘난 직업이라는 게 변호사고, 그 남편은 지역에서 군수가 되겠다고 설치지만 허당이고, 실제로는 그저 안경점 주인일 뿐입니다. 남자 주인공도 경찰입니다만 그저 시골 파출소 순경일 뿐 무슨 CSI 같은 과학수사는 꿈도 꾸지 못합니다. 이렇게 허름하기 짝이 없는 동네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이 드라마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옹산마을에 빠져들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 동백이도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하지요.
(2) 나의 아저씨
벌써 재작년이네요. 2018년에 방송된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아이유라는 가수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지은과 이선균이 주연한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에는 후계동이란 마을이 나옵니다. 옹산마을처럼 후계동도 실제로는 없는 가상의 마을입니다만, 마치 서울 변두리 어딘가에 꼭 있을 건만 같은, 그래서 가보고 싶은 정이 넘치는 곳이지요. 이 마을에도 술집이 하나 있습니다. ‘정희네’라는 곳인데요, 스님으로 출가한 옛 친구이자 연인을 사모하는 안타까운 여주인 정희가 운영하는 곳입니다. 이 술집 ‘정희네’는 젊은 시절 잘 나가다 이제는 망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한때는 은행 부행장, 자동차 연구소 소장, 제약회사 이사 등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텔에 수건을 대고, 미꾸라지를 수입하고, 청소방을 운영하고 있는 아저씨들이 밤이면 모여서 소소한 이야기로 힘든 하루의 고단함을 털어내는 곳입니다. 허술하지만 따뜻한 이곳은, 망가짐을 두려워했던 젊은 여자 연예인이 ‘망가져도 괜찮다’는 걸 깨닫게 했고, 삶의 무게로 얼어붙었던 여주인공도 쉬어가게 했습니다. 극에서 여주인공은 자기가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이곳에 태어나고 싶다고 하지요.
(3) 유토피아
옹산게장마을이나 후계동은 실제론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곳에 가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 곳이 있으면 그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은 매우 후진 동네입니다. 가난한 곳이고, 망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지저분한 일들이 발생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곳에 가고 싶어 할까요? 뭔가 갈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 5G의 시대, 서울 부산을 2시간 40분에 주파하는 고속철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 한 쪽은 여전히 허전하지요. 뭔가 따뜻한 것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2. 본문 이해
(1) 배경
고린도교회는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앞부분을 보면,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갈려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상황을 전해들은 바울은 이 분열상을 극복하고 교회를 교회되도록 하기 위해 오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에 따르면, 이 분열의 근본 원인은 복음에 대한 몰이해에 있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에 이런 분열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오류는 사람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믿음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베드로) 뭐 이런 사람들이 언급되는 것은 얼토당토않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능력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할 것을 강조합니다. 사람의 지혜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의지할 것을 역설합니다.
(2) 십자가의 말씀
우선 바울은 ‘복음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1:18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새번역에서는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만, 개역성경에서는 ‘십자가의 도(道)’라고 했습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이를 ‘message of the cross(십자가의 메시지)’라고 했습니다. 번역은 조금씩 다릅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모두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것! 영어성경 어느 곳에서는 nonsense(TEV)라고 했습니다. nonsense! 십자가의 도가 멸망할 자들에게는 nonsense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의 도는 세상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란 말입니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십자가의 도는 비웃음을 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노자도덕경의 한 구절입니다.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옳은 선비가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하고, 어쭙잖은 선비가 도를 들으면 긴가 민가 하고, 모자란 선비가 도를 들으면 크게 웃고 만다. 그러므로 비웃음을 사지 않는다면 결코 도라고 할 수 없다.) 도의 심원한 성격을 말씀하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경지입니다.
3. 십자가의 도
(1)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1:22-24입니다.
유대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리스도, 특별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삶이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거리낌이고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때문에 이 십자가의 도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2) 십자가의 도
일일이 다 소개할 수 없어 그렇지 십자가의 도를 행하는, 십자가의 삶을 사는 이들은 곳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이 무슨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는 아닙니다. 이분들도 다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이 놀라운 사역들을 가능케 했으며, 하나님의 지혜가 하늘의 비밀을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의 도, 진리의 복음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가 빠진 까닭에 우리네 삶이 퍽퍽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모두들 그렇게 헛헛하게 사는 겁니다. 찬송가 341장은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341장 1절입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세상에서 부귀영화 모두 잃어 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받고 영생 복을 받겠네.
부귀영화를 모두 잃어버리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나요? 그런데 주의 평안과 영생의 복을 받게 된답니다. 참으로 모든 것을 버림으로 모든 것을 얻게 되는 역설적인 신앙의 진리입니다. 성도여러분, 모든 것을 버림으로 모든 것을 얻습니다. 아니 모든 것을 버릴 때에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파악할 수 없는 하늘의 비밀입니다. 이와 같은 하늘의 비밀을 깨달아 우리네 삶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도를 묵묵히 살아나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