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그를 아는 이들은 그의 시인 됨에 대해 아끼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남북이 분단되면서, 그를 아는 이들은 남하하였습니다. 시집이 1948년 서울에서 나왔으니, 북간도에서는 그의 시집의 존재조차 거의 몰랐겠지요. 냉전 시대하에서 남한과 북한, 남한과 중국 간 교류가 단절되니, 윤동주의 이름은 남한에서만 추모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다 한-중 교류의 길이 열리게 된 1990년 전후하여, 한국(남한)의 많은 인사들이 윤동주의 고향과 생가를 방문하면서부터, 연변 지역에서 윤동주 추모 열풍이 불었던 거지요. 일종의 한류 열풍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윤동주 생가라는 안내판이 만들어지고, 추모비가 새겨진 게 1990년대 중반입니다.
지금 연변 자치주의 국어 교과서에는 윤동주의 시가 자랑스럽게 등장합니다. 윤동주 시집도 한글로 나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전부 남한에서 나온 책을 그냥 그쪽 인쇄체로 찍은 것이지만, 몇 편의 동시를 발굴하여 추가하고 있습니다. 연변 쪽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바로 중국 조선족 문학의 선두 주자이며 중국 조선족 시인이기도 한 것이다. (중략) 문학사적인 견지에서 무엇보다 홀시하지 말아야 할 것은 (중략)그의 시어의 특징이거나 시어로 형상화된 화자의 개서 속에 중국 조선족 문화의 냄새가 다분하다는 이 점이 간과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중략) 윤동주 시인의 시들에는 밤하늘의 정경과 함께 달이며 별, 그리고 바람이라는 시어가 아주 많다. 연변 지역의 밤하늘, 특히는 가을의 밤하늘에서 뭇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그 야경을 보지 못하고서는 윤동주가 읊조린 하늘이요 별들에 대해 리해하기 힘들 것이다. 달과 바람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연변 쪽에서 윤동주를 연변 지역 조선족의 대표 시인으로 음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같이 윤동주는 그가 태어난 고향인 북간도로부터 서울, 일본에 이르기까지 추앙받고 있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