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權주자들은 많다. 가장 먼저 예비선거인 당내 경선이라는 관문을 뚫고 나온 한나라당의 李明博(이명박) 후보를 비롯하여 대통합민주신당의 鄭東泳(정동영) 후보, 李會昌(이회창) 前 한나라당 총재, 민주노동당의 權永吉(권영길) 후보와 민주당의 李仁濟(이인제) 후보, 여기에 장외에서 치고 올라와 「여권」의 통합 대상이 되고 있는 文國現(문국현)과 李壽成(이수성), 충청권을 배경으로 한 국민중심당의 沈大平(심대평), 그 외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예비후보」들이 수십 명에 이른다.
이들 중 일단 원내 의석이 있거나, 여론조사에서 지지도가 일정 수준 이상인 李明博·鄭東泳·李會昌·權永吉·李仁濟 다섯 사람을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에 정당의 競選(경선) 레이스를 통해 국민 상당수의 지지를 받았던 인물들, 예를 들어 한나라당의 朴槿惠(박근혜), 통합신당의 孫鶴圭(손학규)·李海瓚(이해찬) 등은 「다음」을 위해 살펴보았다.
大選주자들의 풍수적인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 필자는 지난 봄부터 몇 차례에 걸쳐 전국을 돌았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었다. 李明博의 출생지는 일본 오사카이기 때문에 찾을 수 없었다. 李仁濟의 生家(생가)는 철거되고 그 자리는 공터로 남아 있었다. 孫鶴圭의 先塋(선영)은 대부분 임진강 건너 장단의 비무장지대에 있어 찾을 수 없거니와 그 위치를 아는 이도 없었다.
이 때문에 先塋이 없는 경우에는 生家를, 生家가 없는 경우에는 先塋을 중심으로 풍수학적인 배경을 살폈고, 필요하면 현재 살고 있는 집도 살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부분의 「후보」들이 조상의 陰宅(음택)이건 태어나고 자란 陽宅(양택)이건 생기가 있는 명당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靑龍의 기백이 넘치는 李明博 生家
李明博이 어린 시절 살던 집. |
李明博(경주李氏)은 일제 때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을 했던 부모 슬하에서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광복으로 그의 가족이 귀국한 것은 李明博이 네 살 때였다. 고향은 포항시 흥해읍 덕성리, 일명 「덕실」 또는 「덕곡」으로 불리는 고지산 아래의 마을이다. 고지산을 넘어 안강평야를 바라보면 들판 저쪽에 이 일대에서 가장 높고 우람한 비학산이 긴 날개를 펼치고 있다. 6·25 전쟁 때 낙동강 교두보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방어하느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기개 안강전투(형산강전투)」의 현장이다.
『고향에 대한 나의 최초의 기억은 포항 시장통의 가난이다. (난파한 귀국선에서) 목숨을 부지한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이라며 고향 땅을 밟은 우리를 맞이한 것은 지독한 가난이었다. 굴 껍데기처럼 우리 대가족에 들러붙은 가난은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서도 떨어질 줄 몰랐다』(회고록 「신화는 없다」中에서)
일본에서 귀국한 李明博의 아버지 이충우는 송곳 꽂을 땅뙈기 하나 없는 고향 마을보다 도시인 포항의 시장통에서 연명할 길을 찾았던 것 같다. 그러나 6·25를 전후하여 이 가족은 몇 해 동안 고향 덕성리 마을로 돌아와 전란을 피하고 살길을 찾아 머물었다. 그때 기거했던 집이 명당터였다.
덕성1리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40호 정도 규모의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26가구로 줄어들었고, 그중 18가구가 경주李氏다. 경주李氏 집성촌이라 불러도 좋을 동네다.
이 동네 한가운데에 李明博 가족이 6·25를 전후하여 기거했던 집터가 있었다. 李明博 일가가 살던 집은 6·25 때 소실되었고 지금은 벽돌집으로 신축하여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이 집의 안채 앞마당에 길게 생기처가 있었다.
남향 집에 東南向(동남향) 대문으로 東四宅(동사택)의 이치에 배합하고, 집에서 바라보면 靑龍(청룡)의 기백이 힘찬데다 白虎(백호)가 잘 감싸고 돌았으며 정면의 안산이 수려했다. 생기도 넘치고 형국 또한 좋으니 명당이 틀림없다.
현재 살고 있는 집주인 이인학(69)씨는 『여러 풍수들이 와서 보고 여기에 氣(기)가 있으니 잠을 여기서 자라고 해서 일부러 방을 하나 더 늘렸다』고 했다. 많은 풍수들이 「李明博의 기」를 찾아 노력했다는 흔적이 이처럼 곳곳에 남아 있었다.
李明博의 9代祖 묘. |
조상 가운데 풍수에 조예 깊은 사람이 있었던 듯
마을의 위쪽에는 경주李氏 入鄕祖(입향조)인 11代祖(대조)를 모신 재실 履霜齋(이상재)가 있었다. 다시 그 뒤편 국골 뒷산에는 9代, 8代, 7代 조상들의 무덤이 화려하지는 않으나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중 9代祖의 쌍분 중 여자 쪽 무덤이 氣가 있었고, 유체가 氣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놓여 명당이라 할 만했다. 그 아래로 8代와 7代 조상의 무덤들은 평범했다. 다만, 무덤의 배치와 형국의 활용법 등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李明博의 조상 중 풍수에 깊은 조예가 있었거나 관심이 깊은 사람이 한두 사람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갔다.
이런 짐작은 5代祖와 4代祖, 3代祖 등 현재와 가까운 조상의 무덤으로 갈수록 현실로 나타났다. 5代祖 이하부터는 집성촌인 덕성리 뒷산을 넘어 드넓은 안강 들판을 사이에 두고 비학산 자락과 비학산 건너편 산자락에 각각 산재해 있었다. 李氏들이 마을 뒤편의 문중산을 두고 굳이 산 너머로 身後地(신후지)를 찾아 나선 것은 「명당찾기」 외에 달리 이유가 없다고 본다.
5代祖 李林(이림)의 무덤은 포항시 북구 신광면 안덕리, 비학산 자락에 있었는데 5代祖의 종손 중 한 사람이 경영하고 있는 매실 과수원을 지난 후미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5代 조부모의 쌍분 중 조모의 묘소가 子坐(자좌·正南向)로 비록 水脈(수맥)이었으나 묘소 바로 앞에 강한 氣가 흐르는 생기처가 있었다.
비학산의 건너편 만석초등학교 뒤편에는 李明博과 좀더 가까운 조상들 무덤이 몇 기 모여 있었다. 이곳은 집성촌인 덕성리에서 고지산 허리를 타고 넘으면 처음으로 나타나는 서쪽 산자락이다. 덕성리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뒤편이다.
이 산자락의 초입에 李明博의 증조부 李圭秀(이규수) 내외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상석에는 아들 鍾漢(종한), 손자 忠雨(충우), 증손자 相道(상도)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상도는 종한의 맏아들 贊雨(찬우)의 아들인데, 3형제 중 막내인 충우 아래 태어난 相殷(상은)·相得(상득)·相京(상경)·明博(명박) 형제들이 태어나기 전에 작고한 탓인지 그 이름들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증조부 묘가 명당
李明博의 증조부모 묘. |
여기서 보면 李氏 선조들 중 누군가 풍수에 밝아 명산을 찾아 헤맸던 성과가 비로소 드러난다. 무덤의 뒤로 고지산이 御屛(어병)으로 두르고, 靑龍 방향(丙午方)에 일자문성이 기세 좋게 뻗었으며, 안산인 비학산이 넉넉한 품을 열었다. 손방에는 厚高(후고)한 산이 무덤을 감싸고 돌았다. 무덤은 艮坐坤向(간좌곤향)인데 형국이 매우 크고 정중앙에 강한 생기가 있었다.
풍수에서 말하는 君王地(군왕지), 혹은 王氣(왕기)라고 할 만한 터로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어병이 두른 대국의 형세와 강한 생기가 상승작용을 하면서 명당의 기운을 뿜어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다시 고지산 허리를 타고 넘어 멀리 동해의 수평선이 보일락 말락하는 동쪽 산허리를 내려오다가 6代祖 내외의 무덤을 찾았다. 丑坐(축좌)로 앉은 이 무덤은 봉분이 멸실되어 간신히 무덤의 흔적만 남아 있었으나 명당의 기운이 있었다. 아쉬운 것은 자손이 많지 않다는 것. 「명당이 명당을 낳는다」는 풍수의 격언에 따르면 이 무덤의 명당 기운이 산 너머 증조부 묘소의 대국 명당을 빚은 원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李氏 문중의 재실인 履霜齋 뒤편 산자락에는 7代祖 내외의 무덤이 있었는데 이 무덤 또한 안산이 매우 좋고 무덤 머리 부분에 생기가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조부 종한의 묘소는 방향이 맞지 않아 자리가 아니었다.
李明博의 生家는 일본에 있어 확인할 길이 없으나 어릴 때 한동안 자랐던 집의 생기가 범상치 않았다. 先塋 중에서 대국명당 하나를 비롯하여 작은 명당 둘을 배경으로 둔 만만치 않은 기세가 확인되었다.
안내를 했던 李相旭(이상욱·60)씨는 지난 5월4일자 인터넷신문 「엠파스」의 기사 복사물 한 장을 건넸다. 5월3일 거행된 경주이씨 알평공 표암춘향대제 때(李明博 초헌관으로 참석) 태양 주변에 해무리 무지개가 나타나 『하늘문이 열렸다』고 참석자들이 크게 고무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전라북도 순창에 있는 回文山(회문산)은 예부터 명당이 많기로 소문나 있어 풍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산이다. 鄭東泳은 바로 이 회문산 자락, 순창군 구림면 통한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6·25 때는 공비들이 출몰했던 회문산 자락, 통한마을의 도로변에 鄭東泳 형제가 태어나고 자란 生家의 터가 남아 있었다. 이 집터는 한때 농가의 축사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빈터이다.
나무랄 데 없는 吉地, 鄭東泳의 生家터
정동영의 曾祖·高祖 묘. |
그런데 이 빈 터에 강한 생기가 있었다. 주산격인 背山(배산)의 형세가 일품인데다 靑龍 白虎가 잘 감싸고 돌아 나무랄 데 없는 길지로서 대명당을 이룰 만한 형국을 빚었다.
동래鄭氏 선조들이 묻힌 산록에는 제일 위에 鄭東泳의 증조부와 고조부 묘소가 있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이 묘소들은 結咽(결인)목 위에 배치되어 있었다. 결인은 산맥이 용틀임으로 꿈틀거리며 내려오다가 주먹을 쥐는 것 같은 형상으로, 사람의 신체상으로는 목(咽喉·인후)에 해당하는 잘록한 부분인데, 여기서 氣가 마지막으로 강하게 뭉쳐 명당을 빚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명당은 결인 밑에 있게 마련인데, 鄭東泳 증조부와 고조부 묘소들은 풍수의 상식을 무시하고 결인목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능선을 따라 鄭氏 종친들의 묘소가 이어지다가 중간쯤에서 왼쪽에 鄭東泳의 조부 묘소가 있었고, 오른쪽에 부모 묘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조부 묘소의 아래쪽, 수년 전 만든 저수지 사이 지점에 생기 넘치는 대명당 자리가 있었다.
鄭東泳 先塋을 찾는 데는 「鄭東泳 후보와 통하는 사람들」이라는 단체의 순창 대표 박기연씨가 안내를 맡았다. 같은 고향 출신으로 鄭東泳의 家系(가계)에 밝은 사람이었으나, 동래정씨 문중 先塋의 묘소들을 일일이 다 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고조부 이상의 묘소들은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鄭東泳의 생가터. |
李會昌 조상 무덤 移葬의 虛實
새로 옮긴 이회창 선영. 맨 아래가 이 전 총재의 부모 묘소. |
李會昌(이회창) 前 한나라당 총재의 출마설이 제기되기 시작한 지난 11월 초 신문들은 일제히 「금년 6월 말부터 7월 중순 사이에 李會昌 선조 무덤 9基를 移葬(이장)했다」고 보도했다. 「李 前 총재가 大權 3修(수)를 위해 음덕을 기대하여 조상들의 무덤을 대거 옮겼다」는 느낌을 주는 기사들이었다.
필자는 작년과 지난 봄 李會昌 前 총재의 선영을 답사했는데, 그때는 이런 일이 없었다. 필자는 신문 보도를 접하고 부랴부랴 현장을 다시 방문했다.
가서 보니 보도된 그대로 충남 예산군 산성리 산111-5 선영에 있던 조상 무덤들은 모두 예산군 신양면 녹문리 산 13의 1 새로운 선영으로 옮겨져 있었다. 새로 조성된 李 前 총재 조상의 무덤群(군)은 모두 9基였다. 맨 아래쪽에 李會昌의 부모인 이홍규-김사순의 합장묘가 있었고, 그 뒤쪽으로 3基의 무덤이 있었으며, 다시 그 위로 2基씩 3列(열)의 무덤들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었다. 모두 5列에 10基의 무덤群인데, 맨 아래쪽 李會昌 前 총재 부모의 합장묘가 이미 2004년에 옮겨 왔으므로 새로 옮긴 무덤은 9基였다.
무덤의 주인들을 분별하기는 불가능했다. 맨 아래쪽 부모 합장묘를 제외하고는 어떤 무덤에도 비석이나 상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덤들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수한 모습으로 돈이나 권세 있는 자손들이 흔히 만드는 호화 분묘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진입로는 廢(폐)아스콘으로 포장하여 후손들이 찾기 쉽게 정성을 들여 놓았다.
문제는 이 무덤들이 명당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얼른 보기에 靑龍이 잘 감아 돌아 좋은 局勢(국세) 같은 형상을 하고 있기는 했다. 그 때문에 신문에 인용되는 풍수들의 진단은 한결같이 「大명당」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아니었다. 물이 빠지는 쪽의 靑龍이 높아야 하는데 오히려 물이 드는 쪽의 白虎가 높아 균형과 조화를 잃었다. 主山이 白虎보다 낮은데다 전면의 안산도 靑龍의 밖으로 돌아버려 명당 眞穴을 빚을 만한 局勢가 아니었다. 즉 대지명당을 낳을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10基의 무덤들 중(모두 卯坐酉向 - 西向) 명당은 한 곳도 없었고, 이홍규-김사순 내외의 합장묘는 水脈이었다. 『李會昌 前 총재가 大選 3修를 위해 조상 무덤 9基를 옮겼다』 는 보도는 이와 같이 실체가 없었다.
이 무덤들을 이곳으로 옮기기 이전의 선영터로 가 보았다. 예전에 이곳 선영 중 李會昌 前 총재의 증조부 묘소에 생기가 있었다. 그 기운으로 李會昌 前 총재가 대법관·감사원장·국무총리를 거쳐 大選후보까지 갔던 것으로 필자는 판단하고 있었다. 게다가 증조부 묘소 아래에 생기처가 있어 부모 묘소를 그곳으로 모셨다면 좀더 좋은 일이 있었을 것인데, 지금은 그마저 버리고 모두 새로운 곳으로 가버렸다. 새로 조성된 선영은 생기처 없는 局勢라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 李會昌 前 총재는 왜 선영을 옮겼을까. 보도를 보면 지난 7월에 산역을 하여 옮긴 것으로 되어 있는데 과연 이 때부터 大權 3修를 계획하고 옮겼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옛 선영에 가서 보니 묘소 인근에 새로운 도로가 개설되면서 靑龍 쪽에 목이 잘렸고, 白虎 쪽에도 길이 새로 났다. 이런 상태에서는 조상의 무덤들을 그 자리에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즉 大權 3修 때문이 아니라 도로 개설 때문에 부득이 묘소를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혹시 집안의 누군가가 大權 도전을 염두에 두고 이장을 했다면 그는 잘못 판단한 것이다.
李會昌의 선영. |
權永吉, 남의 덕을 많이 본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고갯마루 가까운 곳에 민노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權永吉 후보를 축하하고 환영하는 현수막이 산허리에 걸려 있었다. 며칠 전 權永吉이 민노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후 고향으로 내려와 先塋에 참배했는데 현수막이 걸린 산길로 조금 들어서면 權永吉의 부친 묘소가 지척에 있었다. 묘소 앞에는 자손이 왔다 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필자를 안내한 權載表(권재표·69)씨에 따르면, 權永吉의 부친은 농사 짓던 사람으로 40여 년 전 작고했고, 모친은 서울에 살고 있으며, 할머니는 입석리 선들마을에 살고 있다고 했다. 權永吉은 입석리에서 가까운 울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 2학년까지 다니다가 삼촌을 따라 부산으로 가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生家는 흔적도 찾기 어려웠다).
필자가 先塋을 살펴보고 내린 결론 중의 하나는 『權永吉의 지나온 생애가 「남의 덕을 많이 본다」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과연 그는 「남의 덕」을 많이 입은 사람이었다.
「지게꾼도 벼슬할 자리」, 權永吉의 부친 묘
權永吉의 할머니 묘. |
權永吉 부친의 묘소는 시골 산자락에서 흔히 보는, 이름 없는 농사꾼의 평범한 묘소 그대로였다. 작고 나지막한 봉분과 치장하지 않고 수수한 둘레의 모습이 그랬다. 그러나 휘돌아보니 결인이 기막히게 좋고 안산 또한 수려하며, 左靑龍 右白虎가 좋은데다 앞으로 보이는 안산이 일자문성이어서 「지게꾼도 벼슬한다」는 풍수 속담을 고스란히 갖춘 자리였다.
게다가 묘소에서 바라보면 첩첩한 산의 흐름이 모두 나를 감싸고 돌아들 뿐 어느 것 하나도 배신하여 흩어지는 형상이 없었다. 주변의 어느 산도 나보다 높은 산이 없어 「唯我獨尊(유아독존)」의 형세였다. 「자손들이 남에게 굽히고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氣를 살펴보니 과연 생기처가 묘소의 지척에 있었다.
아깝게도 묘소 자체는 水脈에 있었다. 어느 풍수가 형국을 잘 보고 여기까지 오기는 했으나 정작 혈을 찾아 넣는 데는 실패했다는 증거다. 어쨌든 가문에 풍수에 밝은 사람이 있어 노력한 흔적이 분명했으므로 동행한 권재표씨에게 물었더니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權永吉의) 할아버지가 풍수에 밝은 분이었습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그분의 부친(權永吉의 증조부)이 묻혀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자기 부친의 묘소를 파내고 그 자리에 자식(權永吉의 아버지)의 묘소를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자식 사랑도 이만하면 하늘에 닿을 만하다. 그러면 身後地를 손자에게 물려주고 떠난 權永吉의 증조부는 어디에 묻혀 증손자의 오늘을 지켜보고 있을까. 가까운 산록에서 찾아낸 증조부(景熙) 내외의 합장묘는 형국도 아니거니와 생기가 없는 평범한 무덤이었다.
그 오른쪽에 權永吉의 할아버지(載上)와 할머니(할머니 두 분 중 한 분은 타계하고 한 분은 생존) 청주한씨의 묘소가 있었는데 할머니 청주한씨 묘소에서 생기가 있었다. 아버지 묘소는 명당의 局勢를 갖추었으면서도 실혈했으나 할머니 묘소는 權永吉 先塋에서 유일하게 생기가 솟는 眞穴(진혈) 명당이었다.
충남 논산시 연산면 송산리, 민주당 대통령 후보 李仁濟의 고향 마을에 필자가 방문하던 날 마침 마을 어른 몇 사람이 마을 어귀에 李仁濟 후보의 후보 확정을 축하하고, 그의 고향 방문을 환영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있었다.
李仁濟 生家터의 生氣
李仁濟의 先山. |
이웃 사포리에는 李仁濟의 큰형님 이덕제씨가 살고 있었으나 그는 마침 대전에 출타 중이어서 마을 사람들과 먼 친척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先塋 찾는 작업을 했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先塋 묘소란 웬만큼 집안 내력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몇 대 조상 무덤인지 제대로 짚어 내기 어려운 법인데, 이날의 답사도 그런 어려움이 많아 이 산과 저 비탈을 어둠이 깔릴 때까지 헤매고 다녀야 했다.
李仁濟는 조선 太祖 李成桂(태조 이성계)의 16代孫이다. 선조들은 비록 가난했다고는 하나 명문의 자손들답게 先塋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生家는 송산리 마을회관 앞에 있었는데 지금은 집 대신 공터가 되어 마을회관에 오는 차량들의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터가 아직까지 李仁濟 집안의 소유라고 증언해 주었다.
공터가 된 李仁濟의 生家터 한쪽에 감나무가 서 있었다. 이 감나무 부근의 도로에서 마을회관 앞까지 횡으로 길게 생기가 있었다. 陰宅이든 陽宅이든 터에 생기가 있으면 국세가 좋게 마련이고 국세가 좋으면 그 형국 속의 어딘가에 眞穴의 명당이 있게 마련이다. 李仁濟의 生家가 바로 그러한 경우로서 正南向의 터에 靑龍이 연장된 안산이 수구를 잘 막았고 배산은 開八(개팔)의 형세로 벌이면서 마을을 보듬었다.
연산면 송산리에서 멀지 않은 어은리에 李氏 문중의 선산이 있었다. 어은리는 포장된 지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산의 이쪽과 저쪽에 걸쳐 있는 마을인데 李氏 문중의 묘소들은 주로 어은리 동쪽 산록에 집중적으로 조성돼 있었다.
33代祖부터 수십 기의 묘소가 산 속의 여기저기에 조성돼 있었으나 어지럽지 않고 잘 정돈되어 있는데다 보기 좋게 관리되고 있었다. 큰 부자나 권문세가의 先塋처럼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높은 품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朴槿惠의 선영과 생가
박정희 대통령 묘소. |
朴槿惠의 부모 묘소는 서울 동작동의 현충원(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그러나 두 묘소 모두 「자리」가 아니라는 것은 풍수계의 상식이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은 생전에 그 사실(陸英修 묘소가 자리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알고 있으면서도 현충원에 안장된 전몰장병들과의 형평을 고려하여 陸여사 묘소의 이장을 거부했다고 한다.
朴槿惠의 운명을 가르는 풍수의 배경은 국립현충원에 있는 부모 묘소가 아니라 경북 구미시 상모동 뒤편 금오산 자락에 있는 祖父母와 증조 할아버지의 묘소이다.
朴槿惠의 증조 이상 선대의 묘소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적어도 상모동에 있는 先塋은 수많은 풍수가들이 답사하고 논란을 벌여 온 연구 대상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2002년 3월에 이장해 온 증조부 묘소는 이장 후 명당에 들어 그 힘으로 朴志晩(박지만)의 득남, 朴槿惠의 한나라당 대표 선임과 대통령 후보 출마 등 朴正熙 대통령 가문의 기운을 되살려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증조부 묘소 바로 밑에 대지 명당이 있으나 지금까지 비어 있으므로 조부 묘소 등을 그 명당 자리로 이장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孫鶴圭의 출생지는 서울 금천구 시흥이다. 그러나 生家터는 지금 아파트단지 안에 들어 어디인지 분간할 방법이 없다. 先塋은 파주의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는 부모 합장묘는 대명당에 모셔져 있으나 이를 제외하고 대부분 조상의 무덤이 임진강 건너 민통선 안의 장단 땅에 있다. 설혹 출입이 자유롭다 하더라도 무덤들의 위치를 아는 이가 없다.
李海瓚의 生家터는 충청남도 예산군 청양읍에 있으나, 李海瓚의 生家 역시 원래 살던 집은 간 곳이 없고 지금은 남이 건물을 지어 살고 있다. 다만 그 터에는 강한 생기가 있어 李海瓚이 명당에 태어나 성장했음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
生家터는 생기가 있을 뿐만 아니라 풍수적인 명당 요건을 모두 갖춘 대지로서 李海瓚의 오늘이 인연 없이 공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李海瓚 생가터의 生氣
生家가 있는 마을의 뒷산에는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증조부모의 묘소에 이르기까지 가까운 조상들이 모두 자리 잡고 있는데, 그중 증조부 묘소의 바로 뒤에 생기가 있는 대명당이 빈 채로 있음이 확인됐다. 그 윗대 조상들의 무덤은 공주에 있는데 풍수계에서는 공주 先塋의 무덤들 중 대명당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확인해 본 5명의 大選주자들을 포함한 8명의 풍수학적인 배경을 살펴본 바로는 이들 모두가 명당집 자손들이었다. 명당의 후광을 입어 여기까지 이르기는 했으나 그 다음 단계, 즉 최고권력의 자리에 오르고 오르지 못하고는 별개의 문제다. 天命(천명)은 盡人事(진인사) 다음에 오는 것이지만, 인간의 세계 못지않게 冥界(명계)의 조상들도 요즘은 무척 바쁘게 돌아가고 있을 것 같다.●
첫댓글 잘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