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복을 주고 벌을 주는가.
산 위에는 어느새 가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개울물 소리도 차갑게 들린다. 산그늘에도 냉기가 배어 있다.
자연의 빛과 소리는 계절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진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도 삶의 모습과 생각이 달라질 법하다.
계절이 바뀌어도 우리들의 삶에 전혀 변화가 없다면
계절과 우리는 무연한 것이 되고 만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굳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굳어 있다면 그건 이미 숨이 멎어 버린 상태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움직임이요 꿈틀거림이며,
순간순간 새로운 탄생을 뜻한다.
또 계절이 바뀔 때 살아 있는 것들마다
옷을 갈아입는 것은 삶의 지혜다.
지나온 삶의 자취를 되돌아보는 것도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지 스스로의 물음이다.
이 또한 삶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지금 내 곁에 편지가 없어 상세한 것은 다 기억할 수 없지만,
사연은 대강 이런 것 이다.
시집이 거의 기독교를 믿는 집안인데,
요즘에 와서 남편이 하는 사업이 잘 안 되는 것은
아내인 자신이 불교를 믿기 때문이라고
시누이들이 자꾸 압력을 가해 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마음에 갈등이 생긴다는 요지였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더러 듣는 일인데,
이런 기회에 어떤 것이 진짜 종교이고,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내 나름대로 밝혀보고 싶다.
만약에 세상에 오로지 하나의 종교만 있다고 가정해보라.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숨 막히고, 그 독선의 냄새 또한 얼마나 역겨울 것인가.
어떤 것이 신이고, 진리인지 누구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맑은 제 정신으로 스스로 물어보라.
분노하고 질투하고 또 벌주는 것이 신인가?
오로지 자기만을 섬기고
남은 섬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신이오, 창조주인가?
단 하나의 신만 있어야 하고,
단 한 권의 성서와 한 명의 구세주만 있으란 법이
이 세상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얼마나 옹졸하고 독선적이고 추하고 비인간적인 생각인가.
수많은 신이 있다고 해서 문제될 게 무엇인가.
많은 신이 존재할 때 세상은 보다 풍요로워질 것이다.
무엇 때문에 단 하나의 신한테만 매달려야 한단 말인가.
종교와 신앙을 남녀 간의 사랑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종교의 이름 아래 무고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잔인한 행위가 저질러졌는지 한번 되돌아볼 일이다.
수천만의 선량한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산 채로 불태워졌다.
그 어떤 종교나 종파를 물을 것 없이
종교가 일단 조직화되고 제도화되면
그 순간부터 딱딱하게 굳어져 종교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만다.
조직화되고 제도화되어 껍질만 남은 사이비 종교가
선량한 시민들에게 얼마나 위협적이고 혹세무민하고 있는지
분명히 가려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럼 어떤 것이 진짜 신이고 진리이며 종교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모든 종교는 하나같이 사랑과 자비를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면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사랑이 곧 신이고 진리이며,
자비의 실현이 종교의 본질 아니겠는가.
사랑이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이웃으로 향한 부드러운 눈길이요 따뜻한 손길이며,
이해와 보살핌이며, 염려다.
사랑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싹트는 순간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우리들의 진정한 탄생이고 생명의 꽃 피어남이다.
그러면 다시 오늘 이야기를 실마리를 풀어보자.
남편의 사업이 잘 안 되는 원인이 아내가 다른 종교를 믿기 때문이란
말이 온전한 소리인가. 요즘 같은 불경기가
그럼 이질적인 종교 탓이란 말인가.
그야말로 웃기는 소리 아닌가.
설사 어리석고 옹졸한 음식점 주인일지라도
한 가지 메뉴만 가지고 영업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입맛대로 골라서 먹으라고 그 메뉴가 다양하다.
하물며 사랑과 자비를 내세우고 영혼을 구제한다는 종교집단에서
사랑과 자비를 등지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짓을 하고 있다면
그 종교집단은 이미 생명력을 잃어버린 빈 껍데기다.
장작을 패느라고 어깨를 많이 썼더니
바른쪽 어깨가 아파서 침을 맞으러 간 한의원에서,
한 환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거론해 보고 싶다.
50대의 그 아주머니는 스물네 살 때까지 절에 다니다가
시집간 뒤부터 발을 끊게 되었다.
지난 봄 딸이 나가는 강남의 어떤 절에 가서
여러 신도들이 열심히 절하는 것을 보고 같이 절을 하고 돌아왔는데
그 뒤 호되게 앓아눕게 되었다.
딸이 말하기를,
엄마가 그동안 절에 안 나와서 벌을 받아 그런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런 말이 불교의 어느 가르침에 있는 소리인가.
누가 벌을 주고 복을 준단 말인가.
앓는 사람들은 그럼 모두가 벌 받은 사람들이란 말인가.
부처님이 벌을 주고 복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혹시 불교 신자 중에 있다면 그는 불교를 크게 잘못 알고 있다.
무엇이 부처인가를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부처는 분노하고 질투하며 복을 주었다 거두었다 하는 그런 신이 아니다.
부처란 눈뜬 사람이다.
지혜와 자비를 몸소 실현하면서
이웃에게 그 그늘을 드리우는 너그러움이다.
신앙이나 진리는 누구에게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겪어서 체험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신앙과 진리는 항상 개인적인 영역이다.
진리는 우리들 존재의 가장 깊은 곳,
아무도 넘어다볼 수 없는 곳에서 은밀히 체험된다.
온전한 신앙인은 자신이 지닌 것을 나누어 갖는 사람이다.
나누어 갖지 않으면 그것이 시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시들 때 자기 자신도 함께 시든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끝없이 움직이고 흐른다.
그 움직임과 흐름이 멎을 때 거기 서리가 내리고 죽음이 찾아온다.
이런 살아 있는 생명체에 누가 복을 주고 벌을 주는지 스스로 물어보라.
그 물음 속에 답이 들어 있다. 1992.
법정 스님 <버리고 떠나기>중에서
출처 : 금음마을 불광선원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