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루카 8,15)
이번 주간 계속되는 요한복음의 말씀은 유다인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살해의 위협까지 받게 되는 예수님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이 같은 복음의 분위기는 이제 곧 예수님을 향한 유다인들의 위협이 실제로 실현되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알립니다.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메시아 그리스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분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며 그 분이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굳을대로 굳은 마음의 목이 뻣뻣한 백성, 그들이 결국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게 되는 이 일련의 비극적 상황 하에 오늘 복음에서는 약간 다른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오늘 복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제 복음에 바로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자격을 두고 논쟁합니다. 메시아가 우리가 알게 올 수는 없다고 말하며 딴지를 거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에서 비롯되는 자신의 자격을 이야기하자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합니다.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다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고 그 말에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분이 진짜 메시아가 아닐까 하며 술렁입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에 어김없이 찬물을 끼얹는 이들이 등장하고 그들을 이렇게 말하기에 이릅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요한 7,41ㄴ-42)
이들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그대로 성경을 잘 알고 있던 이들입니다. 구약성경 미카서 5장 1절에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구약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구절구절 너무도 정확하게 잘 알고는 있지만, 하느님 말씀의 육화이자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 너무나 역설적이면서도 참으로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그들의 모습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런 그들의 모습은 차치하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들과는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니코데모입니다.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성전 경비병들을 보낸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빈손으로 돌아온 것도 모자라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인 것 같다고 말하자 수석 사제들은 노기를 띠며 그들을 질책합니다. 이에 니코데모가 등장해 이렇게 항변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요한 7,51)
다짜고짜 묻지도 않고 무조건 잡아넣으려는 수석사제들의 행동을 막으려는 니코데모의 이 모습이 이제껏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 편을 드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눈물 날 정도로 용감한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니코데모의 이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편에서 항변하고 있는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저 합법적인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그러니 잡아들이기는 하되 예수님의 말은 먼저 들어봐야 하지 않겠냐는 지극히 소극적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니코데모는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던 예수님이 이렇게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뭐든 해봐야겠다는 마음으로 나섰지만 막상 나서자니 용기가 부족해서 고작 이런 말을 할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니코데코의 이 같은 모습에서 호기롭게 나서긴 했지만 막상 가장 중요한 순간에 밀려오는 두려움에 뒤로 물러서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니코데모의 이 같은 항변에 대항하는 수석사제들의 말이 더욱 인상적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응합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줄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기가 찹니다. 니코데모는 분명 절차상의 문제를 들어 그 적법성을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너도 같은 갈릴래아 출신이냐며 같은 동네 출신이 자기 사람을 챙기는 문제로 사안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전공분야이자 그들이 내세울 유일한 근거인 성경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 너무나 역설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들이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메시아 그리스도를 가장 먼저 알아보아야 헸을 그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며, 아니 자기 좋을대로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함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면에서 오늘 복음이 전하는 수석사제들의 모습은 오늘 제 1 독서의 예레미야 전하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은 처지에 처하게 된 예언자 예레미야가 왜 그와 같은 처지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예레 11,19)
예언자를 박해하는 이들의 모습이 오늘 복음의 수석사제들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이들을 없애버리고 그들을 송두리째 뽑아 제거하려는 마음을 먹는 이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음에도 그 말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고, 듣기 불편하다고 하여 그 말씀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전하는 하느님의 아들도 제거헤 버리려는 그들의 모습이 섬뜩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까지 만들어 버린 것일까? 왜 그들은 이 지경까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것일까? 사실 이 모든 질문들은 저 스스로에게도 똑같이 제기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는 과연 그러하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나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그들의 모습이 아닌 하느님이 바라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듯합니다. 루카 복음을 인용한 오늘 복음환호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루카 8,15)
하느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바르고 착한 마음이어야 한다고 복음환호송은 말합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내가 바라는대로, 내 입맞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대한다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수석사제들의 우를 범하고 말 것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대하며 인내로 그 열매를 맺고자 기다리고 기다리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하느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이라는 이 말씀이 제게 한 줄기 희망의 빛처럼 다가옵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는 여러분 역시 오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 말씀 앞에서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대함으로서 하느님과 함께 언제나 기쁘고 행복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루카 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