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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그리고 국방부가 독립투사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한다고 합니다. 소련 공산당 가입 전력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우리 국군은 북한 공산주의를 상대하고 있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하며, 따라서 공산당 당원 경력의 인물에 대하여 경례를 하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가입이 공산혁명을 위한 것인가 독립운동을 위한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하여는 이미 많은 분들이 얘기하고 있으니, 여기서는 그 문제는 생략하고, 다만, 국군의 사명에 대하여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지금 대통령과 국방부 그리고 육사는 국군의 사명을 자유민주주의 수호에서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국군의 사명은 국토방위와 국가 독립의 수호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너무나 중요한 가치이지만, 국토 방위와 국가 독립을 넘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국군의 사명으로 삼는 것은 위험합니다. 더욱이 군부의 정치적 행동은 방치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국군이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나서게 되면, 그 명분과 이념에 구애되어 다면적인 국제관계에서 전쟁의 위험을 예방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전쟁의 위험을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둘째, 국군이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를 자처하게 되면 자칫 군부의 정치개입을 초래해 우리 헌정의 문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도리어 위협할 수 있습니다.
1. 국군은 복잡다단한 국제관계에서 오로지 국토 방위와 국가 독립 수호를 사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일찍이 제헌 헌법에서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제4조 제문)라고 규정하였고, 현행 헌법에서는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제4조 2항)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군의 기본 임무는 외적의 침입에 맞서 국토를 방위하고 국가의 독립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외적은 어떤 국가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국군의 사명을 자유민주주의 수호로 국한시키게 되면 복잡다단한 국제관계에서 우리 군의 자율성은 크게 제약될 수 있으며, 나라의 안전과 독립에 오히려 장애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한국전쟁이 휴전 중이어서 북한 그리고 중국이 주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과 1992년에 수교를 맺어 사실상 전쟁상태를 소멸시킨 바 있습니다. 한중 우호 관계는 그 동안 한국의 경제 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해왔습니다. 미국도 일찍이 1972년 닉슨이 모택동을 방문하여 국교를 정상화한 바 있습니다. 지금 다시 미중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일본과 중국도 마찬가지로 1972년 국교를 수립하였고, 현재 일본과 중국은 서로 가장 큰 무역 상대국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일찍이 1991년 노태우 정부 시절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여 남북이 “정치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기로 합의한 바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남북 정상회담이 예정되었으나 김일성의 사망으로 실현되지 않았고, 이후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에서 각각 남북 정상회담이 실현되기도 하였습니다. 전쟁 상태를 평화상태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1945년 해방 당시, 우리의 주적은 일본이었습니다. 삼국통일 이래 우리 민족을 식민지로 삼은 나라는 일본이 유일합니다. 임진왜란은 명나라 정벌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결국 일본은 한반도 전체를 유린하고, 정유재란 때에는 한반도 남부의 점령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근대 메이지 유신 이후 한반도 정벌은 일본 군국주의의 기초였습니다. 마침내 일본은 우리를 식민지로 삼았고, 내선일체라고 하여 한국을 일본의 홋카이도와 같은 내지(內地)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한국은 1965년 한일조약으로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였으며 우리 초기 경제성장을 위한 결정적 동력을 얻었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한일 우호관계를 지속되고 있습니다.
유사 이래 한민족의 가장 큰 외적은 중국이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에 의해 수많은 침략을 당하였고, 고구려는 결국 중국의 내지로 복속되었습니다. 다만 통일신라 이래 한민족은 중국에 사대 책봉의 관계를 인정하는 대신 안전보장과 자주적 지위는 보장받았습니다. 중국은 1500년 이상 한국 왕조를 지배하였지만, 한국을 복속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구한말부터는 러시아도 우리의 영토와 독립을 위협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일본과 각축을 벌이며, 한반도 분할을 논의하였고, 마산 등 조차를 시도하였고, 압록강 용암포에 진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미국의 승인 하에 한반도 38도선 이북을 점령하고 위성국가를 세웠습니다.
러시아와 세계적 경쟁 관계에 있던 영국도 한반도에 진출하였습니다. 구한말 영국은 러시아에 앞서 선제적으로 거문도를 무단 점령하고, 2년 넘게 주둔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종주권을 행사하던 청의 중재로 비로소 철수하였습니다. 또한 영국은 영일 동맹으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지하였으며,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였습니다.
미국은 러일 전쟁 당시 가쓰라-태프트 조약으로 한민족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인정하였으며, 후에 태평양전쟁 당시 러시아(구 소련)의 참전을 요청하였고, 한반도 신탁통치를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 러시아가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남진해 오자 한반도에 38도 선을 그어 북반부 점령을 용인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시 미군은 북한과 중국군을 격퇴하여 대한민국을 구했습니다. 한국 전쟁 후 미군은 계속 남한에 주둔하며, 비무장지대 등 정전체제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하고 있고, 우리 군의 전시 작전통제권은 미국 지휘의 한미연합사에 속해 있습니다. 현재 대만 등 미중의 분쟁이 발발할 경우 주한미군의 투입이 기정사실화되고 있습니다. 이는 미중 갈등에 한반도가 미군 기지로 활용되고, 우리가 불가불 연루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복잡다단한 국제관계에서 전쟁와 평화의 양상이 어떻게 될지, 한 나라의 독립과 영토에 대한 위협이 언제 어떻게 발현될지는 미리 알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어떤 국가도 실제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주적의 규정에서 불확실성이 있을 수밖에 없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립관계가 더욱 첨예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북아 국제정치가 어떻게 진행될지 우리가 먼저 예단하고 앞서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동맹은 우리를 지켜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를 원치 않은 전쟁에 연루되게 만들기도 합니다. 국군은 국토 방위와 국가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오히려 나서는 것을 삼가하는 것이 국토 방위와 국가의 독립에 도움이 되는 때도 있습니다.
국군의 사명을 특정의 정치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결박시켜 놓으면 ‘주적’이 고정되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국제관계에서 국군의 운용에 경직화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국토 방위, 국가 독립과 무관한 타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휩쓸려 들어가 오히려 우리 국가와 국민의 안위에 위협을 자초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 친명 사대 명분론이 어떻게 병자호란의 참화를 초래하였는지 반추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2. 국군의 사명과 역할을 자유민주주의 수호에서 찾는 것은 우리 헌법의 문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오히려 위협할 수 있습니다.
우리 헌정의 자유민주주의는 소망스러운 것입니다. 국민주권 민주주의 복수정당제, 권력분립 사법권의 독립, 국민의 기본권 보장은 지켜져야 합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를 군대의 힘에 의존케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소망스러운 것이지만, 자유민주주의의 내포와 외연에는 불확정적인 요소가 있으며, 그것을 둘러싸고 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초래될 수 있습니다. 헌법학적으로도 우리 헌법이 사회민주주의를 수용하는 헌법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습니다. 또한 토지 공개념, 기본 소득 등의 논의가 전통적으로는 자유주의 사상에서 발전한 것인데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를 사회주의 정책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외 관계에 있어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국가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도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예컨대 중국, 베트남 등 공산당 일당 국가들은 물론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등 이슬람 비자유민주적 국가들도 그들이 우리 국토와 독립을 침해하지 않는 이상 그들과 선린 우호를 유지하는 것이 국제적인 차원에서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를 근본주의로서 신봉할 경우 비자유주의 국가들을 모두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하고 우리 국토와 독립을 침해하는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들 모두를 적으로 대하자고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더욱이 우리 정치에서 북한과의 관계 개선 여부는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최근 남북 관계가 경색되었지만, 세계적 냉전 해체와 더불어 노태우 정부 이래로 남북관계는 상당한 진전이 있어 왔습니다. 남북의 공존 및 적대관계의 해소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바람직한 결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를 교조주의적으로 신봉하게 되면 북한 체제 교체가 아닌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은 이적행위로 간주될 수도 있습니다.
국가 정책, 대외 정책의 판단은 정치권에서 국회에서 정부에서 또 국민의 일반 의지로 수행되어야 하며 군부의 개입은 차단되어야 합니다. 군부가 우리 헌정질서, 국가 체제를 수호한다는 책임감에 사로잡히게 되면, 이는 도리어 우리 국가와 민족에 위험천만한 일일 수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군부가 ‘국체 수호’의 주체가 되고, 군부가 내각 구성을 좌우하면서 결국 군국주의로 치달아 인류에 다대한 피해를 야기하고 일본 민족을 거의 멸망으로 이끌었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헌법은 제헌 당시부터 그점을 유념하였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제헌 헌법 제4조에서 국군의 사명은 국토방위에 국한시켰으며, 제69조에서는 군인은 현역을 면한 후가 아니면 국무총리 또는 국무위원에 임명될 수 없게 하여 국무위원의 자격을 문민으로 제한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문민 헌법의 기조는 역대 헌법 및 현행 헌법에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는 군부의 정치개입, 군부 정권의 경험이 있습니다. 문민주의 원칙이 침해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1961년 박정희 군부는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켜 우리 헌법을 정지시키고, 헌법기관을 해산시키고, 군정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는 군대에서 예편하였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군부 지배를 이어갔고, 1972년에는 또 하나의 헌정 파괴인 유신 체제를 강행하였습니다. 그 흐름은 1980년 새로운 군부 세력(신군부)의 쿠데타로 이어졌고, 더욱 참혹한 양민학살을 불러 왔습니다.
이는 우리 헌법의 역사에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우리 제1공화국 제헌 헌법과 제2공화국 헌법에서 국군의 사명은 국토방위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성한’ 의무로 규정되어 그 엄격하게 강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3공화국 5.16 쿠데타 후의 헌법 개정에서는 그 조항이 사라지게 됩니다. 국군이 신성한 사명인 국토방위를 넘어 정치에 개입한 이상 그 조항을 헌법 조문에 실어 공표하기가 꺼려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국무위원에 현역 군인을 배제하는 조항은 그대로 유지되어, 다행스럽게 문민주의의 한 축은 존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1972년 유신 헌법의 제4공화국은 물론 1980년 신 군부의 제5공화국 헌법까지 이어졌습니다. 유신 헌법에서도 국군의 사명이 국토 방위에 있다는 조항은 여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제5공화국 헌법에서는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동 헌법 제4조 2항)고 하여 국군 사명의 규정이 부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국토방위에 더하여 ‘국가안전보장’이 추가되었습니다. 제5공화국 신군부는 국토 방위라는 우리 국군 헌법의 전통적 기본 원리를 인정하면서도 ‘국가안전보장’이라는 추상적인 요건을 통하여 자신들의 쿠데타와 양민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찾고자 시도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사회 민주화 이후 개정된 현행 1988년 헌법에서는 국군의 사명에 대하여 다시 수정이 있었습니다. 동 헌법 제4조 2항은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5공화국 신군부 헌법에서의 국가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사명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정치적 중립성을 명기하였다는 점에 특징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헌법의 전통이었던 국토 방위 원리를 기본으로 하면서 당시까지 집권하고 있던 군부 출신 정권의 입장인 ‘국가안전보장’을 반영하면서, 민주화 시대 헌법 정신으로 ‘정치적 중립성’을 추가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당시 정치 세력들 사이의 절충의 결과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문민주의와 군인의 정치적 중립은 우리 헌법의 근간입니다. 군부가 정치적 중립을 벗어나 정치적 책임감이나 정치 이념 수호의 사명감에 사로잡힌다면 이는 우리 자유민주주의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자유민주주의를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소망스럽고, 반드시 수호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의 내포와 외면은 불확실합니다. 더욱이 대외관계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얼마만큼 적용하고 확장할 것인지는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 헌법의 근본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입니다. 온 국민 그리고 후세대까지 포함하여 평화와 안전 그리고 복리를 위해 우리는 기성의 체제의 모순과 결함들을 고쳐 나가야 하고 개혁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기존 상황의 변경을 필요로 하게 될 수도 있고, 기득권의 양보를 필요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에 따라 기성 세력은 언필칭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그에 반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사회는 자유민주주의를 둘러싸고 논쟁과 갈등을 피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군부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이는 어떤 방향이든 우리 사회 문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파탄에 이르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무엇이 자유민주주의에 부합하는지, 무엇이 자유민주주의에 위배되는지, 특히 한반도 상황에서 남북 적대 관계를 어떻게 해소하고, 한반도 평화를 어떻게 유지하고 진전시켜 나갈 것인지 하는 등의 문제는 절대적으로 문민의 정치과정에 맡겨야 합니다. 그에 대하여 군부 권력이 판단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신념이라는 그 경건한 정의감이 오히려 국가의 안전과 헌정질서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국군 조직의 정치적 의사 표현은 차단되어야 하며, 정치적 중립은 엄정 준수되어야 합니다. 우리 헌법의 전통적 규정처럼 국군은 오로지 국토 방위와 국가의 독립을 위해 복무하는 것임을 명확히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