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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30세의 젊은 풍운의 기사가 '심판과 분노의 산맥'에 소도(小
道)를 놓는 대역사의 일환으로 산맥에 거주하는 몬스터들을 수색 소탕
하는 작전에 투입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 젊은 혈기가 하늘을 찔
러 그 기상이 하늘에 닿았다던 린츠 만슈타인은 그날 놀라운 경험을 하
고야 말았다.
"오늘 우리가 작전을 펼칠 곳은 바로 이곳, 35번 떡갈나무에서 저기 산
봉우리 위에 특이하게 솟아나온 4번 민대바위까지다. 제군들은 공작전
하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영광스런 산불조심산악수색대원들이
다. 각자 제국 최정예 군대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습으로 오늘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길 바란다."
지금은 제국의 5대 무력단체 중 하나로 인정받은 산악특전단의 전신
(前身), 산불조심산악수색대의 수색3조를 직접 지휘하게 된 만슈타인
은 언제나 항상 그렇듯, 작전투입 전 수색조원들에게 각자 자신들의 임
무를 숙지(熟知)시키고 긍지를 북돋아 사기를 고양(高揚)시키고 있었
다. 투입 전 준비절차가 마무리되자 차질 없는 임무수행을 다시 한번
강조한 만슈타인은 조원들과 함께 오늘의 수색지역으로 출발하였다.
산불은 언제나 그렇듯 생태계에 심각한 위협이 되며 그 피해가 백성들
에게까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재해이다. 하지만 만슈타인이 작전
을 수행하는 이곳, '심판과 분노의 산맥' 에서의 산불이란 재해를 뛰어
넘어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한다.
"정지. 10분간 휴식한다."
수색 작전에 돌입한지 2시간여, 방금 도착한 105번 너도밤나무에서 잠
시 휴식을 명령한 만슈타인은 근처에 튀어나온 나무 등걸에 아무렇게
나 걸터앉아 과거 단 한번 '심판과 분노의 산맥'에서 일어났던 산불을
떠올렸다.
작은 화재로 시작한 산불은 2월달 건조한 기후와 몬순(monsoon)의 영
향으로 생겨난 북동풍을 타고 순식간에 산맥 전체로 번져나갔으며 이
것은 모험공작이 불모지를 개척하면서 산맥으로 몰아낸 몬스터 및 적
대종족들의 대대적인 침입사건으로 이어졌다. 피에 굶주린 몬스터
는 몹시 흉폭하다. 하지만 공포에 질린 몬스터는 흉폭을 넘어 광기에
휩싸인 괴력을 발휘한다. 대자연의 분노에 겁을 집어먹고 광기에 사로
잡힌 몬스터와 적대종족들이, 번져가는 산불을 피해 대대적으로 산맥
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블라드미르 영
지는 심각한 민간인 피해와 전략 사업으로 추진하던 소도(小道)건설 사
업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다. 대재앙이 끝난 후, 황실에서 사재
를 털어 보내준 대민지원품들은 영지민들의 자발적인 복구의지에 활력
을 불어넣어 사건의 휴우증을 빨리 털어 버릴 수 있게 하였지만, 더 이
상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 없었던 블라드미르 영지는 모험 공작의
의지 아래에 산불조심산악수색대를 창설하기 이른다. 그 자신이 최고
의 레인져였던 모험 공작은 손수 산불조심산악수색대원들을 지도했고
그 결과 자타가 공인하는 최정예 특수부대가 된 것이다.
제3수색조의 1번 조장은 지금 몹시 흥분된 상태다. 영광스럽게도 오늘
작전에 '풍, 뢰, 천의 삼인' 중 한 분이신 풍운의 기사께서 직접 투입하
신 것이었다.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고고한 시선으로 산맥의 저편을 바
라보고 있는 만슈타인, 은은한 산바람에 나풀거리는 갈색 장발 사이로
살짝살짝 드러나는 푸른 색 눈동자는 왼쪽 눈 위아래로 길게 그어진 흉
터와 잘 어울리며 광채를 뿜어내고 있고, 우뚝 솟은 코는 드높은 기상
(氣像)을 품고 있으며 굳게 다문 입술은 강인한 의지를 담고 있다.
검은색 소프트 레더 아머(Soft Leather Armor)를 입었어도 황금색 풀
플레이트 메일(Full Plate Mail)을 입은 듯한 광휘를 뿌리며 사색에 잠
겨 있는 그 모습을 영웅의 풍모(風貌)라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눈부신 모습을 흠모의 시선으로 훔쳐보고 있던 1번
조장은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자 흠칫 놀라며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휴식시간이 약간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각하께 더 쉬어야 되는지 여
쭈어 봐야 되지 않습니까?."
자신의 바로 아래 기수(紀數)인 제3수색조 5번 저격수가 슬며시 건네
는 말에 1번 조장은 마침 자신도 휴식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
끼고 있던 터라 몸을 일으키곤 만슈타인을 향해 걸어갔다.
"모두 기상. 작전을 속개한다."
만슈타인은 자신에게로 가까이 오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상념에서 벗어
나며 작전속개(作戰續開)를 명령했다.
그때였다.
"캬오오오!"
"꾸에에에엑!"
인세(人世)의 소리가 아닌 것 같은 괴성들이 조용한 산맥의 공기를 타
고 퍼져나가 대지를 진동시키기 시작하자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수색조
원들은 저마다 무기를 움켜쥐며 벌떡 일어났다. 만슈타인 또한 흠칫 놀
라며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더니 바로 곁에 있던 1번 조장을 불렀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꾸어어어억!"
"캬아아아!"
1번 조장은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괴성에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그 위
치를 가늠해 보다가 만슈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57번 산딸기나무 근처 같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만슈타인은 갑옷 속에 넣어둔 작전 지도를 꺼
내 잠시 살펴보다가 어느새 수색대형을 갖춘 조원들을 둘러보며 조용
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작전내용을 수정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특이사항이 없는 한 20번 징검
다리까지 구보로 전진한 후 57번 산딸기나무까지 속보로 접근한다."
말을 마친 만슈타인이 검집을 풀러 양손에 움켜쥔 후 소리 없이 뛰어나
가자 나머지 수색조원들 또한 각자 자신의 무기를 소음이 안나도록 고
쳐 잡은 후 그의 뒤를 따라 뛰어갔다.
"꾸에에엑!"
"어흥!"
항마전쟁의 주인공 '세이블 피어스'가 만들어낸 악의 사도와 신세기전
당시 세상을 공포로 물들였던 사악한 마법사 '카스톨'이 만들었다는 괴
수가 서로 싸우고 있다면 맞는 표현이 될까?
[쿵!]
거대한 그레이트 웜(Great worm)의 꼬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포복으
로 기어가고 있던 만슈타인의 바로 옆 아름드리 나무를 치고 지나가자
나무는 완전히 뿌리 채 뽑혀져 하늘로 치솟았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바로 그의 뒤를 따라가던 1번 조장은 흙먼지가 후두둑 쏟아지는 가운
데 만슈타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황급히 소리를 질렀다.
"조용! 더 이상은 위험할 듯 하다. 여기서 정지한다."
한 손으로 눈가에 묻은 흙먼지를 비비며 제거한 만슈타인은 나머지 손
을 등뒤로 살짝 들어 주먹을 쥐었다. 만슈타인의 정지신호를 확인한 1
번 조장이 마찬가지로 나머지 조원들에게 정지신호를 보내자 포복전진
(怖伏前進)하던 수색조는 완전히 멈추었다. 57번 산딸기나무로부터 동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관찰된 흙구름은 이 상황의 전모를 은폐하
고 있었다. 그에 따라 돌발상황 발생에 따른 즉각조치 매트릭스(卽刻措
置 Matrix)에 의해 제3수색조는 상황발생지역까지 포복으로 전진하게
되었고 그러기를 3분 여, 마침내 이 상황의 주인공들과 조우하게 된 것
이다.
"저놈은 이 산맥의 주인인 것 같습니다."
어느새 자신의 옆까지 기어온 1번 조장의 말에 만슈타인은 조용히 고개
를 끄덕였다. '심판과 분노의 산맥의 주인' 은 그도 익히 알고 있던 놈
이었다.
"오늘 작전은 수색작전에서 소탕작전으로 변경한다. 저 몬스터를 잡지
못하면 자대복귀(自隊復歸)는 없다고 조원들에게 전하라."
만슈타인이 결연한 눈빛으로 명령을 내리자 표정이 굳어진 1번 조장은
뒤에 대기중인 조원들을 향해 또다시 포복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풍운의 기사는 자신을 오늘날의 위치에 있게 한 애검 바람돌이의 손잡
이를 슬며시 잡아갔다. 검자루를 감싼 쥔 건틀렛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감촉은 자신이 어느새 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소도
(小道)의 건설 현장에서 인부들을 습격하여 간식 삼아 잡아먹고, 때때
로 산맥 입구에 건설한 관문요새의 지반을 흔들어 붕괴사고를 일으켜
왔던 악적 그레이트 웜, 자신의 손으로 반드시 처단해 죄 없는 영혼들
을 위로하리라 마음먹고 있었건만 막상 이렇게 맞닥뜨리고나니 약간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꾸에에에엑!"
[쾅~!]
그레이트 웜의 괴성과 함께 거대한 바위 하나가 산산조각이 되어 하늘
로 치솟자 만슈타인은 검자루를 굳게 쥔 손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끼
고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모험인생 10
년, 그리고 몬스터들을 소탕하는데 정력을 쏟았던 5년, 도합 15년 동안
저런 괴물은 상대해본 적도 상대해보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모험공작을 모시고 '노도와 같은 10년'을 보냈다지만 솔
직히 저런 괴물을 상대론 자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좀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군. 지금부터 저 큰놈을 타겟 A, 저
기 날렵하게 움직이는 놈을 타겟 B로 명명한다. 그리고 수색조원들은
각자 은폐엄폐물(隱蔽掩蔽物)을 찾아 경계상태에 임하라."
어느 샌가 자신의 옆으로 기어와 같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1번 조장
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만슈타인은 그에게 다시 명령을 하달했다.
포복으로 열심히 기어가고 있는 1번 조장은 자신의 기대가 성사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팔꿈치가 까지는 줄도 모르고 줄기차게 팔
을 놀리고 있었다. 원래 이런 전달사항은 수색조의 막내인 9번 전령이
하는 일이지만 풍운의 기사 만슈타인 경과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던 1번
조장은 자신의 조장 임무를 5번 저격수에게 미루고 이렇게 열심히 기어
가고 있는 것이다.
'산맥의 주인 그레이트 웜과 풍운의 기사 만슈타인 경의 사투! 이 얼마
나 멋진 일이냐! 역시 산불조심산악수색대로 지원입대한 일은 잘한 일
이었어.'
'풍, 뢰, 천의 삼인'이라는 이름은 대륙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존경하는
인물 1순위로 꼽는 위인들, 그들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어서 이
렇게 빡세기로 유명한 산불조심산악수색대로 자원입대하는 젊은이들
을 찾아볼 수 있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젊은이들 중에 하
나인 1번 조장이 이렇게 열심히 기어가고 있을 때 또 다른 괴수의 괴성
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쿠워워웡!"
[쾅!]
몸길이 30m는 가뿐히 넘어 보이는 그레이트 웜은 육체적인 힘만 따진
다면 드래곤과 필적한다는 괴력으로 또다시 나무 하나를 저 하늘의 별
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원래의 표적은 바람과 같은 몸놀림으로 유연
하게 피한 다음 또다시 그의 몸통에 커다란 송곳니를 박아 넣은 상태였
다.
"꾸어어어억!"
고통이 심했는지 몸부림치는 그레이트 웜의 몸짓에 애꿎은 나무 몇 그
루가 또다시 박살이 나고 하마터면 그 거대한 몸통에 깔릴 뻔한 야수
는 잽싸게 몸을 튕기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푸아아악!]
송곳니를 박아 넣었던 곳이 재수 없게도 동맥을 건드렸는지 그레이트
웜의 노란색 피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여기 이 손수건을 쓰십시오."
어느새 자신의 옆으로 기어와 하얀 손수건을 내미는 1번 조장의 얼굴
을 유심히 살펴본 만슈타인은 그 손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지저분한 피
를 닦아낸 후 다시 그에게 건네주며 상황에 집중했다.
산맥의 주인이라는 그레이트 웜의 상대는 놀랍게도 멸종된 것으로 알
려진 '송곳니 호랑이'였다. 과거의 기록과 학자들의 추측대로 '송곳니
호랑이'는 백수의 왕이라 불리었던 존재답게 노련한 몸짓으로 상대의
힘을 차근차근 빼고 있었고, 계속되는 상황을 보아하건데 저 두 괴
수들간의 싸움은 아무래도 '송곳니 호랑이'의 승리로 끝날 것 같았다.
"각하께서는 언제 움직이시게 되는 것입니까?"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있는 1번 조장은 아무래도 자신이 저 괴수
들과 싸울거라 생각하고 있나보다. 물론 자신이 모험공작을 모시게 된
후, 대륙의 거의 모든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 것은 알고 있지만 마치 나
가서 싸우라는 듯한 투로 질문을 하고 있는 이 병사는 약간 기대감이
지나친 듯 하다.
"조원들에게 전하라. 타겟 A와 B들 중, 하나가 쓰러졌을 때, 그때 행동
한다."
사사삭 소리를 내며 바퀴벌레와 같은 속도로 사라지는 1번 조장을 뒤로
하고 송곳니 호랑이의 몸놀림을 유심히 관찰하던 만슈타인은 이 싸움
의 결말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저 덩치 큰 벌레의 둔한 공격을 피하면서 헛점투성이
로 가득 찬 그 몸통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역시나 맛은 없었다. 그
동안 산맥에서 거주하는 숱한 동물들을 시식해보긴 했지만 이렇게 맛
없는 놈은 처음이었다. 덩치만 커다란 불곰, 성격만 더러웠던 호랑이,
몸만 빨랐던 사슴 등의 맛있는 육질들을 생각한다면 전혀 사냥할 필요
가 없는 놈이었지만 이놈은 오늘, 자신이 보금자리에 없는 틈을 타 새
끼들을 노렸다. 세 마리 새끼 중 두 마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저놈
이 잡아먹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또다시 몸을 뒤집는 놈의 일정
한 패턴에 지루함을 느끼며 사뿐히 뛰어내렸다. 비록 단단하긴 했지만
자신의 송곳니는 확실하게 저놈의 몸통을 뚫고 있었고 여기서 조금만
더하면 새끼들의 원수는 곧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조금씩 풍
겨 나오는 저 인간들의 노린내뿐이었다.
"꾸에에에엑"
놈이 한번 괴성을 지르면 반드시 몸통으로 내려친다. 분명 대단한 힘이
었다. 만약 자신의 새끼들 일만 아니었다면 그 엄청난 힘에 뒤도 안보
고 도망갔을 터이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싸워보니 힘만 쎄고 그 이상
은 아무 것도 없는 놈이었다.
역시나, 또다시 날아오는 그레이트 웜의 몸통공격을 사뿐히 피한 그녀
는 나비처럼 날아올라 그 몸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사실 그레이트
웜은 제국제일출판사가 편찬한 몬스터대백과사전에서 초괴수로 분류
되는 강대한 놈이었다. 압도적인 힘은 인간이 쌓은 성벽을 무너트리
고 그 단단한 피부는 잘 제련된 강철무기들을 튕겨냈으며, 설상가상으
로 성격마저 몹시 흉폭하여 지금까지 출몰한 적은 얼마 없었지만 당당
히 초괴수로 반열에 오른 놈인 것이다. 그런 그레이트 웜도 오늘 제대
로 된 임자를 만났으니 바로 우아한 몸짓으로 뛰어올라 사나운
공격을 감행하는 송곳니 호랑이가 그 주인공인 것 같다. 송곳니 호랑이
가 멸종되기 전, 제3 세기에도 이 둘이 서로 싸웠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
을 보면 아마도 서로 자웅을 겨룰 기회가 없었던 모양인데 지금 이 순
간만큼은 서로의 기량을 확실히 가늠하여 기록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꾸어어어억!"
괴성소리도 똑같다. 몸통공격을 할 때는 '꾸에에에엑', 몸을 뒤집을때
는 '꾸어어억', 이렇게 확실히 알려주고 공격을 하니 그녀로서는 하품
이 나올 따름이다. 발자국 소리조차 내지 않고 가볍게 땅에 착지한 그
녀는 놈의 다음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도 아무 공격이 없
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놈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쿵]
곧이어 지축을 울리는 반동에 움찔 놀란 그녀는 뒤로 한번 폴짝 뛰었다
가 좀 더 뒤로 물러선 후 놈을 주시하였다. 저기 저 멀리서 냄새를 풀
풀 풍기는 인간들에 대한 경계 또한 늦추지 않고 말이다.
"타겟 A가 쓰러졌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슈타인은 내심 두 괴수가 서로 상잔하길 기대했지만 송곳니 호랑이
가 압도적인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키자 눈을 찌푸렸다. 일반 무기로
는 상처 내는 것조차 힘겨운 그레이트 웜보다 송곳니 호랑이가 자신에
게 상대하기 편한 상대이긴 하지만, 그녀가 저 강대한 상대를 너무도
쉽게 물리치자 조금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일단 조원들을 모아라. 타겟 B가 우리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시작하면
바로 격퇴에 들어간다."
만슈타인은 곳곳에 흩어진 조원들이 그녀의 날랜 몸놀림에 각개격파
당할까 두려워 일단 소집을 명령했다. 그레이트 웜같은 초대형 괴수를
상대할 때는 조금이라도 일행을 흩어지게 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이 원칙이지만 송곳니 호랑이 같은 괴수는 여럿이 모여 한꺼번에 공격
을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전투세부시행규칙에 있는 모범
답안대로 지시를 내린 그는 점점 걷혀져 가는 흙구름을 보며 돌발상황
에 대비했다.
놈은 쓰러져서 헐떡이고 있었다. 몸통의 1/5 정도가 땅에 파묻혀 있는
것을 보니 땅속으로 도망치려다 그 전에 기력이 다한 모양이다. 하긴
저렇게 많은 피를 뿌려댔는데 그전에 쓰러지지 않은 게 신기한 일이기
도 하다.
5번 저격수는 조원들이 모두 소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무 위에
엎드려 자신의 무기를 어루만졌다. 아까 전만 해도 1번 조장이 억지로
조장 임무를 떠넘기는 바람에 땅에 내려와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임
무에 충실할 때이다. 손에 든 석궁에 볼트(bolt) 한 대를 조용히 재어 놓
은 5번 저격수는 커다란 송곳니를 가진 동물이 숨을 헐떡이는 그레이
트 웜에 접근하자 석궁의 조준간을 눈앞에 가져가며 상황을 주시했다.
"크르르르..."
그녀는 송곳니에 묻어 있는 파란색 피를 혓바닥으로 살짝 핥아먹으며
약간 망설이고 있었다. 섯불리 접근 했다간 놈이 파묻어 놓은 꼬리가
갑자기 튀어나와 자신을 공격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야생동물답지 않게 영악한 머리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신중한 눈빛으
로 놈을 지켜보다가 주위를 빙빙 돌며 서서히 접근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마지막 숨통을 끊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그 순간!
그녀가 서있던 자리에서 기다란 촉수 같은 것이 땅을 뚫고 순식간에 튀
어나왔다.
[쾅!]
"쿠와와왕!"
만슈타인은 벌떡 일어났다.
그 역시 송곳니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땅속에 묻어 놓은 꼬리를 주시하
고 있었는데 그레이트 웜은 생각지도 못한 거리에서 공격을 시도했던
것이다. 몬스터대백과사전에도 기록되지 않은 그레이트 웜의 특수능
력, '신체변형'이 세상에 처음 선을 보이는 순간이다. 깜짝 놀란 송
곳니 호랑이는 뒤로 풀쩍 몸을 날렸지만 솟아오른 촉수는 그대로 그녀
의 허리를 칭칭 감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녀의 몸을 칭칭 감은 꼬리
는 길이가 늘어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름드리 나무 5배는 될듯했
던 몸통이 보통 인간의 허벅지 굵기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지만, 공중에
서 발버둥치는 그녀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 힘만은 그
대로인 것 같았다. 하늘로 꼬리를 힘껏 뻗은 그레이트 웜은 그 동안의
화풀이라도 하는 듯, 그대로 그녀를 땅에다 패대기쳤다.
그레이트 웜이 속해있는 환형동물빈모강(環形動物貧毛綱)의 다른 동물
들, 쉽게 말해 지렁이들은 각 환절들을 늘리고 줄여서 거기에 붙은 센
털로 미끄럼을 방지하며 이동을 한다. 다시 말해 신체자체의 수축, 이
완이 어느 정도 자유롭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 수축, 이완도 어느 정도
이지 저기 저 그레이트 웜처럼 몸을 수십배로 늘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한번의 공격에 축 늘어진 송곳니 호랑이를 또다시 내동갱이 치려는 듯
촉수가 다시 한번 하늘로 치솟자 만슈타인은 검을 빼들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조원들은 각자 흩어져 은폐엄폐(隱蔽掩蔽) 하라!"
바람과 같은 속도로 달려간 풍운의 기사는 그레이트 웜의 머리를 밟고
뛰어 올라가 몸통을 따라 꼬리까지 질주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다다른
촉수, 만슈타인은 달려오던 가속도를 이용하여 공중으로 몸을 한번 솟
구친 다음 눈앞에 하늘거리는 촉수를 향해 참격(斬擊)을 날렸다.
서른 살, 육체의 최절정기에 이른 힘과 노련한 기술이 어우러진 필생
(筆生)의 참격! 강철보다 단단하다는 그레이트 웜의 피부는 그의 검에
의해 치즈처럼 갈라지며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요동치는 단면(斷面)에
서 피 한 방울 새어나오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참격이었다.
[쿵]
하늘 높이 솟아 있던 촉수가 그의 검에 두 동강이 나자 잘려나간 촉수
에 묶여 있던 송곳니 호랑이는 지표면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
에 땅에 착지한 만슈타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 나무 숲 속으
로 도망쳤다.
난데없는 간식거리의 개입에 꼬리를 잃은 그레이트 웜은 분노하며 그
의 뒤를 쫓아 무서운 속도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의 앞에 놓
인 것은 촘촘히 박혀있는 나무 숲... 나무들의 방해로 추격이 불가능해
진 그레이트 웜은 괴성을 질렀다.
"꾸에에에에에엑!"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나무들을 모두 날려버리기로 작심한 듯 그레이
트 웜의 몸통 공격이 숲을 향해 노도와 같이 가해졌다. 그러자 어느 샌
가 하늘 위에서 빙글빙글 공중제비를 돌며 떨어지는 만슈타인! 그는 그
대로 자신의 검을 그 징그러운 갈색 몸통 한가운데다 쑤셔 박으며 놈
의 몸 위에 둔탁한 착륙을 감행했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가속도와 자신
의 체중 모두를 실은 강맹한 공격이었다.
"꾸어어어어억!"
저 패턴은 아까 송곳니 호랑이와의 싸움에서 드러난 패턴이다. 그레이
트 웜의 몸통 위에 착지한 만슈타인은 놈이 몹시 괴로운지 요동을 치
기 시작하자, 단단한 피부를 뚫고 말랑말랑한 살 속을 헤집고 있는 자
신의 검에 의지해 중심을 가누다가 타이밍을 노려 지면으로 뛰어내렸
다. 그리곤 역시 뒤도 안돌아보고 반대편 숲 속으로 사라졌다. 바람처
럼 나타났다 구름처럼 흩어지는 그의 몸놀림은 과히 세인(世人)들이 칭
송하는 '풍운(風雲)의 기사'라는 명호(名號)에 걸맞는 표홀(飄忽)한 움
직임이었다.
"... 꾸엑? 꾸에에에에엑!"
그 모습에 잠시 머리를 세우고 우두커니 서 있었던 그레이트 웜은 그제
서야 만슈타인이 어떤 패턴으로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가 파악했는지
더욱더 분노에 찬 괴성을 질러대며 그가 사라진 숲 속으로 돌진했다.
[쿵! 쿵!]
잘려진 꼬리에서 푸른색 피를 뿜으며 저돌적인 움직임으로 숲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그레이트 웜! 그리고 그런 놈의 옆구리에 순식간에 나
타난 만슈타인! 어느새 자신과 괴수가 대치하고 있는 공터를 빙 돌아
비어있는 놈의 옆구리를 노린 것이다.
[부아악!]
힘과 정교한 기술을 사용하여 그레이트 웜의 옆구리에 검을 폼멜까지
쑤셔 박은 만슈타인은 양팔에 힘을 잔뜩 싣더니 그대로 놈의 꼬리 쪽
을 향해 달려나갔다. 일반 무기로는 흠집내기도 힘들다는 그레이트 웜
의 피부를 우격다짐으로 찢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만슈타인이 달려가
는 방향을 따라 놈의 옆구리에서는 길다란 자상(刺傷)이 일(一)자로 갈
라지며 노란색 피를 사방에 뿌려대었다. 사무치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그레이트 웜은 만슈타인이 또다시 뒤쪽 숲 속으로 사라지자 한마디 커
다란 괴성을 지르고는 땅속으로 몸을 파고들었다.
"각하! 승리하신 겁니까!"
놈이 땅속을 파고 사라진지 한참이 지나도 다시 나타날 생각을 안하자
1번 조장은 안심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감격스런 표정으
로 만슈타인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저 멀리 나무 위에서 대롱대롱 매
달려 있던 만슈타인은 그런 그를 향해 소리쳤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모두 나무 위로 올라가라!"
그의 말에 화들짝 놀란 1번 조장과 나머지 조원들은 모두 서둘러 나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저 강대한 괴수는 풍운의 기사나 홀로 대적
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놈이 자신들을 노린다면 한끼 식사도 안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차 한잔 마실 시간이 흘렀을까?
만슈타인은 이대론 안되겠다는 듯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까 송곳니 호
랑이와 같이 치고 빠지는 작전을 사용한다면 확실히 이길 수 있을 테지
만 영악한 적은 이미 자신의 주 활동무대인 땅속으로 몸을 숨긴 터였
다. 저기 송곳니 호랑이가 숨을 몰아쉬는 공터에 아직도 살기가 가득한
걸 보면 놈은 땅 속 깊이 숨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음이 틀림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을 더 끈다면 필경 놈은 도망을 칠 터, 그레
이트 웜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만슈타인은 조심스
럽게 나무 위에서 내려와 공터에 자신의 몸을 노출시켰다.
[저벅 저벅]
자신이 내고 있는 발걸음 소리를 따라 심장도 덩달아 고동쳤다. 이마에
서 흐르는 땀이 자꾸 눈으로 들어와 시야를 방해하자 만슈타인은 아에
눈을 감고 자신의 감각에 집중했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비록
빛이라곤 전혀 없는 어둠의 세계이지만 전신에 열어둔 감각이 최고조
에 다다른 만슈타인에게는 눈을 뜬 것 보다 더 자세한 정보가 들어왔
다.
저기 누워있는 송곳니 호랑이는 촉수의 공격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
는지 기침을 해대며 숨을 몰아쉬고 있다. 아마 더 이상 살기는 힘들 것
이다. 근처 나무 위에서 익숙한 반응들도 느껴진다. 조원들은 아마도
자신의 지시를 충분히 따른 모양이다. 아니 저놈은? 슬금슬금 나무
위에서 내려와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까지 기어가 다시 올라가
고 있는 것을 보니 1번 조장이 틀림없다. 상황이 해제되면 따끔하게 훈
계하기로 마음먹은 만슈타인은 이 공터를 지배하고 있는 살기의 주인
공을 찾아 감각의 더듬이를 좀 더 확대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두둥! 두둥!]
놈의 심장소리가 자신의 발 아래에서 느껴지고 있다. 역시 놈은 여전
히 땅속을 헤집고 다니며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만슈타인은 놈
의 기척을 쫓아가며 근육을 달구었다. 생각보다 영악한 그레이트 웜의
행동을 보건데 이번의 공격마저 실패하면, 놈에게 더 이상 같은 방법
의 공격은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단 한번이다. 이 한번의 공격으
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 한번, 상단세를 시전하기 위해 몸의 상태를 최고조로 끌
어올리고 있던 만슈타인은 예기치못한 놈의 움직임에 표정을 구겼다.
"이런! 1번 조장! 당장 그 나무 위에서 벗어나라!"
"...?"
두 눈을 번쩍 뜨며 1번 조장이 올라가 있는 나무를 향해 달려가는 만슈
타인은 그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자신만을 쳐다보자 답답함을 느꼈
다. 그리고 거대한 그레이트 웜은 1번 조장이 올라가 있는 나무 밑을 뚫
고 올라와 나무 몸통을 물고는 그대로 하늘로 솟구쳤다.
"뀌이이이익!"
지면에서 15m는 솟아올라 아름드리 나무 한 그루를 입에 물고 용두질
치는 저 거대한 그레이트 웜은 신화에서나 등장할법한 괴수의 모습, 바
로 그것이었다.
"히엑!"
이리저리 사방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바람개비처럼 빙빙
휘돌려지고 있는 1번 조장을 바라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은 만슈타인은
양손에 쥔 검을 힘껏 움켜잡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저놈을 놓치는 한
이 있더라도 일단 1번 조장의 목숨부터 구해야 할 터였다.
[쉬이이익!]
그때 숲속에서 볼트 한 대가 빛살처럼 뻗어나와 용두질 치고 있는 그레
이트 웜의 머리에 적중했다.
[부르르르]
볼트의 궤적을 추적한 만슈타인의 시선에 잡힌 것은 부르르 떨고 있는
빈 석궁에 다시 볼트를 장전하고 있는 5번 저격수였다.
[팅~ 팅~]
하지만 5번 저격수의 석궁에서 무수히 쏘아지는 볼트는 그레이트 웜의
두꺼운 피부를 뚫지 못하고 여기저기 튕겨져 나오기만 했다. 그러나 만
슈타인은 저 볼트들이 놈의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과
감한 접근을 시도했다.
"꾸에에에엑!"
마침 볼트 한 대가 먼저 송곳니 호랑이가 파먹은 상처 부위에 명중했는
지 그레이트 웜은 입에 물고 있던 나무를 집어던지며 몸부림치더니 땅
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바로 지금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포착한 최적의 기회!
숨을 깊게 들이마신 만슈타인은 자신의 몸을 덮어 가는 거대한 그림자
를 보며 양손으로 잡은 검을 머리위로 치켜올리기 시작했다. 잘 벼려
진 바스타드 소드(Barstard Sword)의 무게가 서서히 느껴지자 그는 온
몸의 힘을 끌어 모아 검을 쥐고 있는 양 손목을 향해 단번에 폭발시켰
다. 그를 '풍, 뢰, 천의 삼인'중 한명으로 만들어 준 절초! 상단세(上端
勢)가 발휘되려는 순간인 것이다!
"우워워워웍!"
만슈타인의 입에서 괴수 못지 않은 괴성이 터져 나오자 그의 몸 전체
가 날카로운 예기(銳氣)의 칼날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폭사(爆射)했다.
[번쩍!]
지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던 그레이트 웜의 머리에서 한줄기
빛이 솟았다. 그리고 그 빛은 괴수의 머리로부터 시작해서 허리까지 길
게 이어지더니 마침내 노란색 폭발을 일으켰다.
[추아아악!]
망가져버린 폐물 분수가 뿌리는 물줄기처럼 사방으로 솟구치는 노란
색 피분수 속에 거대한 그레이트 웜은 머리부터 허리까지 세로로 양단
(兩斷)되어 땅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헉.. 헉..."
온몸에 노란 피칠을 하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던 만
슈타인은 자신의 곁으로 5번 저격수가 달려오자 돌아보지도 않고 명령
을 내렸다.
"각 조원들은 2인 1개조가 되어 1번 조장을 수색하라."
그의 명령에 조용히 경례를 붙인 5번 저격수는 자신의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뛰어갔다.
만슈타인은 온몸에 묻은 푸른색 피들을 손으로 대충 털어낸 후 몸을 일
으키며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공터 한구석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
는 송곳니 호랑이의 곁으로 걸어가 그녀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의 복수는 내가 하게 됐구나."
강대한 적과 홀로 대적한 경험을 공유한 동지애라고나 할까? 만슈타인
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아직도 그녀의 허리를 조이고 있는 촉수를 풀어
주었다. 그리곤 처참하게 드러난 그녀의 상처에 눈을 찌푸렸다. 무시
무시한 힘으로 조여진 허리는 시커멓게 괴사(壞死)되어 죽어있었고 땅
에 처박힐 때 입은 상처인지 갈비뼈 몇 개가 그녀의 살가죽을 비집고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었다. 벌써 죽었어도 수십번 죽었을 상처를 안고
도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듯 그렁그렁한 눈을 힘겹게 깜박이고
있는 그녀를 지켜보던 만슈타인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에 몸을 일
으켰다.
"찾았습니다!"
"상처하나 없이 멀쩡합니다!"
몹시 흥분한듯한 조원들의 기쁜 함성이 점점 다가오자 만슈타인은 입
가에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1번 조장은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이었나
보다. 그 높은 곳에서 내동갱이 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상처하나 없다고
하니 말이다.
마침내 수색조원들이 공터에 몸을 드러내자, 갑자기 그 동안 죽은 듯
이 누워 있었던 그레이트 웜이 괴성을 질렀다.
"꾸에에에에엑!"
머리에서 허리까지 양갈래로 잘려진 몸을 사방으로 휘두른 괴수는 한
차례 괴성을 내뱉고는 순식간에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헉!"
"뭐... 뭐냐!"
"모두 흩어져라!"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수색조원들에게
고함을 지른 만슈타인은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며 눈을 감고 놈의 기
척에 집중했다.
[구워워워워!]
놈은 땅속에서도 괴성을 지르고 있는 듯 온 대지가 요동을 쳤다. 자신
을 향한 살기 또한 숨기지 않고 자욱하게 뿌리는 것을 보니 아마도 자
신은 놈에게 원한을 산 듯 싶었다. 하지만 그 살기가 점점 옅어져가고
기척 또한 멀어져 가는 것이, 그레이트 웜은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도망
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레이트 웜이 완전히 자신의 감각에서 벗어날
때까지 몸을 긴장시키고 있던 만슈타인은 마침내 그 기척을 추격할 수
없게 되자 감았던 눈을 뜨며 움켜잡았던 검 손잡이에서 손을 풀었다.
심각한 타격을 입은 놈은 아마도 땅속 깊은 곳에서 죽어버리던지, 아니
면 한동안 활동을 하지 못할 터였다.
"놈은 도망쳤다. 안심하고 나오도록."
만슈타인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조원들이 내
려오더니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만슈타인은 그런 그들 중, 한 인물
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나무 위에 떨어져서 다친 곳은 없습니다. 한데.. 근처에서 이런걸 발견
하게 되었습니다."
1번 조장의 양손에는 고양이와 비슷하게 생긴 작은 동물 한 마리가 발
버둥치며 안겨져 있었다. 무뚝뚝한 그가 봐도 정말 귀엽게 생긴 동물이
었다. 하지만 그 앙증맞은 입술 양쪽 가장자리로 기다란 송곳니가 튀어
나온 것을 보니 성질 하나는 있어 보였다. 만슈타인은 1번 조장이 내미
는 동물을 건네 받고는 뒤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송곳니 호랑이에게
로 가져갔다.
"의무병. 힐링 포션을 가지고 오도록."
만슈타인의 명령이 떨어지자 조원들 사이로 앳돼 보이는 병사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야전낭에서 병 하나를 꺼내 공손한 표정으로 그에게 건
넸다. 힐링 포션을 받아 든 만슈타인은 바둥거리는 동물을 옆구리에 끼
고는 송곳니 호랑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갸르르릉"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자신과 옆구리에 끼어진 동물을 번갈아
쳐다보며 애처롭게 울고 있는 송곳니 호랑이와 자신의 옆구리에서 요
동을 치고 있는 작은 동물의 행동을 보니 이들은 분명 어미와 새끼의
관계가 틀림없었다. 만슈타인은 어미의 머리 앞에서 조용히 한쪽 무릎
을 꿇으며 새끼를 내려놓았다.
괴상한 노린내가 나는 동물에게서 자유를 찾은 새끼는 허겁지겁 달려
가 어미의 목덜미 속으로 파고든다. 어미는 그런 새끼의 귀를 핥아주
며 조용하게 울었다.
"그르르릉"
만슈타인은 한손에 든 힐링 포션의 뚜껑을 연 후 새끼를 핥아주고 있
는 어미의 입을 강제로 열어 쏟아 붇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무언가 강제로 넘어가는 액체에 어미는 기침을 하며 뱉어내었지만, 그
액체를 마셔감에 따라 몸을 지배하고 있던 고통이 점차 사라져가자 그
녀는 만슈타인이 부어주는 힐링 포션을 한방울도 안남기고 다 삼켜냈
다. 힐링 포션 한통을 다 쏟아 부은 만슈타인은 몸을 일으켜 그녀의 곁
을 벗어나며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조원들까지도 뒤로 물려 공터 한구
석까지 걸어갔다. 그러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두 모녀가 하는 행동
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꺄옹~"
"갸르르릉~"
서로 부벼주고 핥아대는 모습은 정말이지 정겨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어미의 살가죽을 비집고 튀어나온 갈비뼈가 무척 신기한 모양인지 앞
발로 툭툭 건드리는 새끼의 행동에 몸을 움찔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참
으로 눈물겨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힐링 포션 수백개를 쏟아
부어도 살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야생동물에게 비싸디 비싼 힐링포션
한통은 사치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만슈타인은 강대한 적과 당당히 맞
서 싸운 전사에게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갖게 해 주는 것은 당연
한 일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행동에 타당성을 부여했다.
밥 한끼 먹을 시간이 지났을까? 땅에 드러누운 채 새끼와 장난을 치던
어미는 몸을 일으켜 세운 후 바둥거리는 새끼를 살짝 입에 물고는 제3
수색조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송곳니 행동의 모습에
만슈타인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가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발치까지 걸어온 어미가 입에 문 새끼를 내려놓고는 자신의 눈을 올려
다보자 만슈타인 또한 한쪽 무릎을 꿇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낯선 동물 앞에 서게 되자 자신의 뒤로 재빨리 몸을 숨기는 새끼와 조
용한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만슈타인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는
잠시 후 앞발로 자신의 새끼를 강하게 쳐서 만슈타인 쪽으로 던져 버렸
다.
"아니!"
"저.. 저런!"
송곳니 호랑이의 행동에 깜짝 놀란 수색조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지
만 그녀는 그런 그들을 무시하며 오만한 표정으로 만슈타인을 향해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낸 후, 휙 몸을 돌려 숲 속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저...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초괴수를 궁지로 몰아넣은 야수입니다. 후환을 남기지 않는 게 좋을
듯 합니다."
어미를 따라가려는 듯 발버둥치는 새끼를 간신히 붙잡은 만슈타인은
검집에서 칼을 꺼내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한 1번 조장과 어느새 장전
한 석궁을 송곳니 호랑이에게 겨누고 있는 5번 저격수를 돌아보더니 조
용히 고개를 저었다.
"강력한 적과 당당히 맞서 싸운 전사의 최후다. 무례는 삼가도록."
1번 조장과 5번 저격수의 행동을 제지한 만슈타인은 울창한 숲이 가려
주는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오른 손의 주먹
을 왼쪽 심장 위에 올려놓은 다음 고개를 숙였다. 숭고한 정신을 보여
준 전사에게 보여주는 기사의 마지막 예의였다.
인간의 손으로 멸종된 송곳니 호랑이는 이렇게 자신의 자식을 인간에
게 맡긴 채,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며 스스로의 이름에 걸맞는 최후를
맞이하러 모습을 감추었다.
[타박 타박]
경쾌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아마도 주군은 목욕을 해서 그
런지 기분이 몹시 좋은 모양이다. 주군의 침대 위에 걸터앉아 그때의
새끼에서 이렇게 훌쩍 커버린 마리아의 아름다운 털을 부드럽게 쓰다
듬어 주며 옛일을 회상하던 만슈타인은, 어느새 자신의 손길을 뿌리치
고 문쪽으로 쪼르르 달려가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 먼저 씻어서 죄송합니다. 엇! 마리아가 왜 들어와 있죠? 혹시 문
을 열어주셨습니까?"
만슈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군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마리아가 아까 일로 몹시 서운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저렇게 좋다
고 달려드는 것을 보면 오늘은 그냥 주군께서 조금 양보해 주심이 옳
은 듯 싶습니다."
"에휴... 만슈타인경께서 그렇게 오냐오냐 하시니까 마리아의 버릇이
점점 나빠지는 거에요."
만슈타인은 가슴에 안겨드는 마리아의 육중한 무게에 버거워하며 자신
을 향해 푸념을 늘어놓는 레닌을 뒤로하고는 방문을 나섰다.
"그럼 저도 씻고 오겠습니다."
레닌은 침대 위에 누어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켜 세운 채로, 자신의 다
리를 베고 누운 마리아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며 달빛을 감상했다.
"마리아야. 마리아야... 넌 도대체 어디서 온 누구니?"
두 눈을 감고 부드러운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던 마리아는 그이의 입에
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살며시 눈을 떴다.
"기록으로 전승되는 송곳니 호랑이는 몸길이 2m 50cm, 송곳니 길이
18~20cm인데 너는 그보다 훨씬 크구나."
레닌은 4m나 되는 마리아의 육중한 거구에 깔린 다리가 저려오는지 슬
며시 자세를 고쳐 잡으며 다시 중얼거렸다.
"아마도 너는 송곳니 호랑이들의 여왕인가보지? 아니면 너처럼 아름다
운 생물이 멸종된 것을 슬퍼한 자애의 여신 베르디께서 다시 창조하신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전보다 더 아름답게, 그리고 인간의 손길을 물리
칠 수 있도록 훨씬 더 강하게 말이야."
마리아는 그이가 읊조리는 목소리를 조용히 음미했다. 무슨 말인지 알
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이의 말에서 전해져 오는 따뜻한 마음은 그녀
를 기쁘게 해 주었다.
"알았네. 그리로 가지."
여관 주인의 설명을 들은 만슈타인은 오랜 마차여행에 지친 몸을 씻기
위해 그가 가르쳐준 욕실로 내려가다가 마침 때를 맞추어 내려오는 케
드리언과 만나게 되었다.
"아! 만슈타인경."
"집사도 씻으려는 것이오?"
케드리언은 만슈타인의 말에 손을 양옆으로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경을 만나기 위해서 내려온 것입니다."
근심을 하나 가득 품고 있는 케드리언의 표정에서 말이 약간 길어질거
라 예상한 만슈타인은 팔짱을 끼며 복도 벽에 몸을 기대었다.
"말씀해 보시구려."
그런 만슈타인을 바라보던 케드리언은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하
더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으며 말문을 열었다.
"에휴... 세상물정 모르는 우리 도련님께서 왜 그런 결심을 하시게 되었
는지 모르겠습니다. 옛 주인님의 길을 다시 걸으시겠다니요. 안정된 영
지와 도련님만을 바라보는 백성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버리고 가신다
니 말도 안돼는 일입니다."
만슈타인은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흐음... 나도 솔직히 한달 전에 지금의 주군께서 영지를 버리고 모험
을 떠나시겠다는 말씀을 하실 때 몹시 놀랐었소. 또 그것은 몹시 잘못
된 결정이라 생각했었소."
눈물 젖은 손수건을 다른 손수건으로 교체하고 있던 케드리언은 만슈
타인의 입에서 반가운 소리가 튀어나오자 화색을 띄며 고개를 번쩍 들
었다.
"그렇죠? 도련님의 결정은 몹시 잘못된 것이 맞죠? 그럼 만슈타인 경께
서 그 결심을 바꿔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러나 만슈타인은 양옆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말이오 집사... 내 그 동안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아니었
소. 우리 주군께서도 올해로 스무살이 되셨지 않소이까? 이제는 완벽
한 성인이 되셨다는 뜻이오. 스스로 뜻을 세우고 자신의 앞길을 결정하
는 성인이라면 그 판단은 마땅히 존중해 주어야 하는 법, 특히나 우리
주군 같은 고귀한 핏줄을 이어받으신 분의 결심이라면 우리와 같이 바
로 곁에서 모시는 사람들은 수하 된 도리로써 더욱더 심려(深慮)깊게
존중해 드려야 마땅할 것이오."
케드리언은 아직도 만슈타인이 도련님의 결심을 두둔하고 있자 억장
이 무너지는 심정을 느꼈다.
"아이구... 영지에서만 사셔서 세상물정 하나도 모르는 도련님께서 무
슨 험한 꼴을 당하시려고 그러시나... 아이구... 아이구... 끼니때마다
홍차를 드시지 않으시면 반드시 투정을 부리시는 분인데 그건 또 누가
받아주나... 잠자리는 항상 몸이 살짝 잠길 정도로 푹신한 쿠션으로
챙겨드려야 하는데 그건 누가 챙겨주나... 아이구..."
주군의 불안한 앞길에 노심초사하며 구슬프게 한탄하는 케드리언을 잠
시 바라보던 만슈타인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띄웠다.
"집사. 너무 걱정 마시오. 모험공작전하의 길에 동참했던 이 풍운의 기
사가 주군과 함께한다지 않소. 더군다나 내가 그분을 따라나섰을 때는
애송이 수련기사였지만 지금은 그 이름도 당당한 풍운의 기사가 되었
소. '풍, 뢰, 천의 삼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란 걸 집사도 잘 알지 않
소? 너무 걱정 마시오. 내 필히 주군을 안전하게 모시겠소이다."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말이라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저렇게 보
고 있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슬피 우는 케드리언을 안심시키기 위해
만슈타인은 평소의 그 같지 않은 말로 위로를 시작했다.
케드리언은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주며 안심시키는 만슈타인
의 얼굴을 올려다본 후, 그래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지 손수건으로 연
신 눈물을 찍어내기 바빴다.
[탈칵]
목욕을 끝낸 후 살며시 방문을 열고 들어온 만슈타인은 귀를 쫑긋 세우
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마리아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녀의 부드러운
눈빛을 보니 몸을 창가 쪽으로 뉘이고 잠을 자고 있는 주군의 잠을 방
해하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 만슈타인은 그런 그녀에게 조용히 고개
를 끄덕여 준 후, 셔츠를 벗어 침대 옆 작은 옷장에 올려놓고는 살며시
자신의 자리로 들어갔다.
"이제 오시나요, 만슈타인 경?"
이런이런... 자신이 들어오는 소리에 주군이 잠에서 깨어났나보다. 만
슈타인은 자신을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마리아에게 미안
하다는 눈빛을 보내고는 그의 말에 대답했다.
"집사와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레닌은 완전히 잠에서 달아났는지 몸을 만슈타인 쪽으로 돌려 눕더니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입을 열었다.
"케드리언은 아직도 제가 모험을 떠난다는 것에 대해 못마땅하나봐요."
만슈타인은 자신을 향해 불만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는 레닌을 응시하
며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
"주군이 태어나실 때부터 항상 주군만을 바라보고 살아왔던 집사니까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잘 다독이고 왔으니 너무 걱정하
지 마시기 바랍니다."
레닌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뻗어 마리아의 목덜미를 어
루만져주기 시작했다.
"그르릉"
무척이나 기분이 좋은 듯 마리아가 낮은 울음소리를 내자 레닌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슈타인 경?"
"말씀하십시오 주군."
"아까 마부의 일 말인데요..."
만슈타인은 몸을 옆으로 누운 상태로 한쪽 손을 턱에 받친 다음, 상체
를 약간 일으켜 세운 후 레닌의 말에 대답했다.
"마부는 아까 집사가 따끔하게 훈계를 해주었습니다. 그런 소소한 일까
지 신경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마부는 저도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던 사람
이거든요. 승마를 하러 마구간에 가면 항상 성실한 자세로 말을 돌보
고 있었고, 제가 말을 탈 때면 낙마는 하지 않을까 걱정스런 표정으로
항상 제 주위를 떠나지 않던 순박한 사람이었죠."
레닌의 말에 만슈타인은 주군이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는 침
대에서 일어나 자세를 바르게 고쳐 잡았다. 만슈타인의 입을 주시하고
있던 레닌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바르게 하자, 자신도 서둘
러 일어나 침대 위에 정좌하고는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평소에 착하고 순박했던 사
람도 조금이라도 권세를 등에 업으면 변질되게 마련이죠. 하지만 그 권
세에 좌지우지(左之右之)되지 않고 스스로의 뜻대로 자신의 길을 올바
르게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그 초연(超然)한 자세가 그 사람의 인
품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슈타인 경은 참 재미있는 분이다. 저렇게 무엇 하나 가르치려 할 때
도 항상 쉽게 하는 법 없이 언제나 근엄한 얼굴로 정색을 하니 말이다.
물론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가르쳐주는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가
르쳐 주고 있는지 그 의미를 확실히 해주기 때문에 편하긴 하지만 말이
다.
"명심하겠습니다, 만슈타인 경. 영지 밖으로 나와보니 인간이라는 종족
은 참 재미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슈타인 경은 가르침이 끝났는지 다시 자리에 몸을 눕히고 있다. 레닌
도 그를 따라 침대에 몸을 파묻고는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
다.
"푸하하하!"
갑자기 레닌의 맑은 웃음소리가 방을 가득 채우자 만슈타인은 의문스
런 얼굴로 그를 향해 돌아 누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아까 그 곰머리 4형제처럼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나요? 그렇다면 모험이 상당히 재미있어질텐데 말이죠."
만슈타인은 레닌의 웃음을 터트린 이유가 곰머리 4형제 때문인 것을 알
자 살짝 웃으며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그 곰머리 4형제와 같은 이들은 확실히 만나보기 힘든 부류의 사람들
이죠. 하지만 앞으로 모험을 하신다면 그보다 더 재밌는 일이 주군의
앞에 수없이 많이 펼쳐질 것은 확실합니다."
이불을 가슴까지 치켜올리며 잠을 청하기 시작하는 만슈타인을 바라보
던 레닌은 자신도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눈을 감았다.
'모험이라... 아버지가 하셨던 모험이라... 정말 기대되는 구나.'
그러나 이때만 해도 레닌은 수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정이 생각보다
복잡하게 꼬여있어, 그가 가고픈 모험을 그 들뜬 마음처럼 쉽게 떠나
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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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의 교향곡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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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뭐냐 이 긴 글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