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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행동하지 않는 지성 - 사르트르(8)
그런데 이즈음, 그는 신선한 관심을 갖게 됐다. 톨스토이와 러셀처럼, 사르트르의 주의 지속 시간은 짧았다. 학생 혁명에 대한 그의 관심은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역시 짧은 기간의, 그러면서도 더욱 이상야릇한 시도가 뒤를 이었다. 스스로를 “노동자”와 동일시하려는 시도였다. 사르트르는 노동자라는 신비롭지만 이상적인 존재에 대한 글을 무척이나 많이 썼지만, 평생토록 노동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프랑스 극좌파는 1970년 봄 모택동의 과격한 문화 혁명을 유럽화하려는 시도를 뒤늦게 전개했다. 사르트르는 프롤레타리아 좌파라 불린 이 운동에 합류하기로 동의했다. 명목상 그는 이 운동의 잡지 <인민의 대의>의 편집장이 됐는데, 가장 큰 이유는 경찰이 잡지를 압수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운동의 목표 -공장 관리자들을 감금하고 국회의원들을 린치하는 것 - 는 사르트르의 취향에서 보더라도 상당히 과격했지만, 조잡하나마 어느 정도는 낭만적이었고 유치했으며, 상당히 반지식인적인 태도를 취했다. 운동 내부에서 사르트르에 어울리는 공간은 전혀 없었고, 그런 사실을 느낀 그는 이렇게 투덜거렸다. “계속해서 활동가들하고 어울리다가는 나는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돼서 모두에게 방해만 되고 말 거야.” 그렇지만 그는 젊은 추종자들과 함께 힘차게 길을 걸어 나갔고, 정치적 흥행사업의 유혹에는 끝내 저항할 수 없었다. 조잡하게 인쇄된 신문을 길거리에서 판매하거나 따분한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억지로 쥐어 주는 예순일곱 사의 사르트르, 드골조차도(사르트르를 약 오르게 만든) “친애하는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르트르는 파리의 재미있는 볼거리가 되었다. 1970년 6월 26일에 사르트르가 흰색 스웨터와 후드 달린 모피 재킷, 헐렁한 바지 차림으로 샹젤리제를 점거한 모습을 사진 기자가 사진에 담았다. 그는 일부러 체포되려고 했지만,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석방됐다. 그는 10월에 다시 한 번 그런 시도를 했다. 그는 빌랭쿠르에 있는 르노 공장 밖의 기름통 위에 서서 자동차 노동자들을 상대로 열변을 토했다. <로로르>의 기사는 경멸조였다. “노동자들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사르트르의 청중은 그가 데리고 온 모택동주의자 몇 사람이 전부였다.” 18개월 후, 그는 또 다른 르노 공장으로 갔다. 이번에는 단식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공장에 몰래 들어가려고 시도하다가, 경비원들에게 들켜 공장 밖으로 내던져졌다. 사르트르의 노력은 실제 자동차 노동자로부터는 조금도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의 동료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중간 계급의 지식인이 전부였다.
그런데 행동하는 데 실패한 사람, 진정한 의미의 행동가였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던 사람에게는 늘 “말”이 있었다. 그가 저서전의 일부에 이 제목을 단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그의 좌우명은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쓴다”였다. 그는 이 맹세를 지켰다. 그는 러셀보다도 더 수월하게 글을 썼고, 하루에 1만 단어를 쓸 수 있었다. 그런데 그중 상당수는 수준이 떨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호소력 있는 내용이라고는 없는, 잘난 체하거나 허풍만 부리거나 과장된 글이었다. 나는 1950년대 초반에 파리에서 그의 논쟁을 번역하면서 그 사실을 직접 깨달았다. 프랑스어로는 읽기 쉬운 듯 보였던 그의 글들은 언어의 특성상 표현이 구체적인 영어로 옮겨 놓고 나면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사르트르는 글의 수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는 1940년에 드 보부아르에게 쓴 편지들, 그리고 그가 종이에 눌러썼던 어마어마한 양의 글들을 돌이켜보면서 인정했다. “나는 늘 양이 미덕이라고 여겼다.” 말년의 10년 동안 사르트르가, 유별나게 까다롭고, 글에 대해서는 특히 더했으며 미친 듯한 끈기로 작품을 수정해 댔던 플로베르에게 매우 집착하게 된 것은 기묘한 일이다. 그는 플로베르를 주제로 2,802페이지에 달하는 3권짜리 책을 펴냈지만, 그 중 대부분은 거의 읽을 만한 가치가 없다. 사르트르는 많은 책을 썼다. 그중에는 분량 면에서 대작도 있고, 완성되지 않은 작품도 상당히 많다(소재들을 다른 작품에서 재활용한 경우가 잦기는 했다). 프랑스 혁명을 다룬 방대한 저서를 쓴 후, 화가 틴토레토를 다룬 방대한 저서를 쓰겠다는 계획도 있었다. 분량 면에서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편의 추억>에 필적할 그의 자서전은 또 다른 거대한 사업이었다. <말>은 사실상 그 자서전의 축약본이었다.
사르ㅡ트르는 자신의 생애 전체가 “말”이었다고 자인했다. “나는 문학에 내 모든 것을 투자했다…….나는 문학이 종교의 대체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에게는 말이 문자나 그 의미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인정했다. 말은 살아 있는 생물이었다. 조하르[유대교 신비주의 경전]나 카발라를 배우는 유대인 학생들이 율법의 문자에 종교적인 권능이 담겨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말의 신비주의를 느낀다….조금씩 조금씩, 무신론은 만물을 삼켜 버렸다. 나는 밑천을 날렸고, 글쓰기를 세속화시켰다….불신자로서 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말로 돌아왔다. ……나는 나 자신을 바쳤다. 그러나 나는 내 눈앞의 죽음의 꿈을, 즐거운 야만성을, 공포의 영원한 유혹을 감지했다.” 이 글은 사르트르가 써야 할 글을 수백만 단어나 품고 있던 1954년에 쓰였다. 이 글은 무엇을 뜻할까? 아마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보다는 난센스라도 쓰는 쪽을 항상 선호했다. 그는 존슨 박사의 냉혹한 관찰에 따른 의견이 옳다는 것을 입증한 작가다.” “프랑스인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 알든 모르든 항상 떠들어 댄다.” 사르트르 스스로 썼듯이 “(글쓰기는) 나의 습관이자 나의 직업이다.” 그는 그가 쓴 글이 효과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나의 펜을 나의 칼로 여겼다. 이제 나는 우리가 정말로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관없다. 나는 글을 쓰고 있고, 계속해서 책을 쓸 것이다.”
그는 말도 많았다. 가끔은 끝도 없이 떠들어 댔다. 때로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떠들어 댔다. 영화감독 존 휴스턴의 자서전에는 사르트르에 대한 훌륭한 에피소드가 들어 있다. 1958-1959년에 그들은 프로이트에 대한 시나리오를 공동으로 작업했다. 사르트르는 아일랜드에 있는 휴스턴의 집에 와서 머물렀다. 휴스턴은 사르트르는 아일랜드에 있는 휴스턴의 집에 와서 머물렀다. 휴스턴은 사르트르를 “작은 물통 같은 사람,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못생길 수 없는 사람이다. 얼굴은 얽은 데다 부어 있고, 이빨은 누런데다가 사팔뜨기다”라고 묘사했다. 사르트르의 가장 큰 특징은 끝없이 말을 해 댄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대화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어느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숨 돌이키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기다렸지만, 그는 숨도 돌리지 않았다. 땁잘총처럼 말이 쏟아져 나왔다.” 휴스턴은 사르트르가 말을 하면서 자기가 한 말을 그대로 받아 적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끝없이 이어지는 말을 참을 수가 없었던 휴스턴은 가끔 방을 떠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낮은 저음으로 웅얼거리는 사르트르의 목소리는 집 주위를 돌아다니는 그를 쫓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휴스턴은 여전히 떠들어 대고 있는 사르트르를 발견했다.
병적이라 할 이런. 수다 증세는 강연자로서의 그의 마력을 결국에는 망쳐 버렸다. 변증법을 다룬 사르트르의 참담한 저서가 출판됐을 때, 장 발은 그래도 콜레주 드 필로조피에서 강연을 해 달라며 사르트르를 초빙했다. 오후 6시에 강연을 시작한 사르트르의 참담한 저서가 출판됐을 때, 장 발은 그래도 콜레주 드 필로조피에서 강연을 해 달라며 사르트르를 초빙했다. 오후 6시에 강연을 시작한 사르트르는 커다란 폴더에서 꺼낸 원고를 “기계적으로, 서두르는 목소리”로 읽었다. 그는 원고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자기가 쓴 글에 완전히 빠져든 듯 보였다. 한 시간이 지난 후, 청중들은 안절부절못했다. 강연장은 만원이었고, 일부 청중은 서 있어야만 했다. 한 시간 사십오 분이 지난 후, 기진맥진한 청중들 중 일부는 바닥에 누워버렸다. 사르트르는 청중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했다. 결국 발은 사르트르에게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내야 했다. 사르트르는 무뚝뚝하게 원고를 집어 들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강연장을 떠났다.
그렇지만 사르트르에게는 늘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궁전이 있었다. 사르트르가 늙어 가면서 신하들의 주는 점점 줄어들었다. 사르트르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 돈을 집싸게 써 버렸다. 그는 돈에 대해서는 늘 부주의했다. 어렸을 때 그는 돈이 필요하면 어머니 지갑에서 꺼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교사 시절에 그와 드 보부아르는 거리낌 없이 돈을 빌리고 빌려줬다. 그녀는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돈을 빌렸다”고 인정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돈이 써서 없어질 수 있는 것이어서 좋아한다. 나는 돈이 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가서 사라지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부주의에는 유쾌한 측면도 있었다. 많은 지식인들, 특히 유명한 지식인들과는 달리, 사르트르는 돈 문제에 있어서는 정말 관대했다.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청구서를 집어 드는 것은 그의 즐거움이었다. 종종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요금도 지불했다. 그는 명분이 있는 곳에도 돈을 내놨다. 그는 RDR에 30만 프랑(1948년 환율로 10만 달러) 이상을 제공했다. 비서 장 코는 사르트르를 “믿기힘들 정도로 관대하고, 사람을 잘 믿는다”고 평가했다. 너그러움과 (때때로 보이는) 유머 감각은 그의 성격 중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었다. 그러나 돈에 대한 태도는 무책임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로열티와 에이전트 수수료에 대해서는 전문가인 척했다. 1949년 헤밍웨이와 만났을 때, 두 작가의 대화는 그런 화제에만 집중됐든데, 헤밍웨이는 이런 대화를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이 대화는 전시용이었다. 다음은 코의 후임자인 클로드 포의 증언이다. “(사르트르는) 돈과 관련된 문제는 뭐가 됐건 회피하려고 고집을 부렸다. 그는 그것을 시간 낭비로 봤다. 그러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돈을 필요로 했고, 돈을 써 댔으며, 다른 사람을 도왔다.” 그 결과, 출판업자에게 진 엄청난 빚은 늘어만 갔고, 끔찍한 액수의 소득세가 체납됐다. 어머니는 비밀리에 아들의 세금을 납부했다.(카뮈의 조롱은 이래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재산이 한도 끝도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1950년대 후반에 금전적 수렁에 깊이 빠져즌 사르트르는 결코 그곳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그는 계속해서 상당한 수입을 올렸음에도 늘 빚에 허덕였고 현금이 모자랐다. 언젠가는 신발 한 켤레 새로 살 형편이 못된다고 투덜대기도 했다. 그에게는 이런저런 일에 고용한 사람들이나 동냥을 받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사르트르의 외궁(外宮)을 만들어 냈고, 여자들은 내전(內殿)을 형성했다. 1960년대 말에는 재정 형편이 악화됨에 따라 궁전의 종사자들이 급격히 감소했고, 외궁의 규모도 축소됐다.
1970년대의 사르트르는 너무나도 애처로운 인물이었다. 너무나 나이들어보였고, 거의 실명 상태였으며, 종종은 술에 취해서 돈 문제를 걱정했고, 자신의 관점에 확신이 없었다. 필명이 피에르 빅토르인, 카이로에서 온 젊은 유대인 베니 레비가 사르트르의 삶 속으로 걸어들어왔다. 레비의 가족들은 1956-1957년의 수에즈 위기 당시 이집트에서 피난을 왔기 때문에 레비는 무국적자였다. 사르트르는 그가 프랑스에 체류 허가를 받도록 도와주고는 비서로 삼았다. 빅토르는 신비주의 성향이 있었다. 검은 안경을 꼈고, 가끔은 가짜 수염을 달았다. 특이하고 극단적인 관점의 소유자였던 그는 자신의 고용주를 강제로 억눌렀고, 진짜로 압박했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성한 이상한 성명서나 기고문에 사르트르의 이름이 오르곤 했다. 드 보부아르는 빅토르가 또 다른 랜프 쇤먼으로 변신할까 봐 두려웠다. 빅토르가 아를레트와 동맹을 맺었을 때 그녀의 고통은 특히 심했다. 소냐 톨스토이가 체르트코프를 싫어하고 두려워했던 것처럼, 드 보부아르는 그를 싫어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즈음의 사르트르는 대중을 상대로 바보짓을 할 능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의 사생활은 다양한 섹스를 즐기는 데 바쳐졌고, 그의 시간은 하렘의 여인들이 공유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휴가를 보냈다. 아를레트와 프랑스 남부에 공동으로 소유한 별장에서 3주, 완다와 이탈리아에서 2주, 엘렌과 그리스 섬에서 몇 주, 그리고 보통은 로마에서 드 보부아르와 한 달. 파리에서는 여자들의 아파트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드 보부아르는 소책자 <아듀: 사르트르여 안녕>에서 요실금과 술주정, 여자들을 이용해서 그에게서 위스키 병을 빼앗을 수 있었던 이야기, 그를 둘러싼 권력 투쟁 등으로 점철된 사르트르의 말년을 잔인하게 묘사했다. 1980년 4월 15일에 브루세 병원에서 사망한 사르트르의 죽음은 모두에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르트르는 1965년 비밀리에 아를레트를 딸로 입양했다. 따라서 그녀는 사르트르의 저작권을 포함한 모든 것, 그리고 사르트르의 원고를 사후에 출간한 권리를 모두 물려받았다. 드 보부아르 입장에서는 최후의 배신이었다. “중심인물”이 “주변인” 중 한 사람의 그늘에 가려 버린 셈이었다. 드 보부아르는 프랑스 좌파 지식인의 황태후가 되어 그보다 5년을 더 살았다. 그렇지만 자식도 없었고 상속자도 없었다.
러셀처럼 사르트르는 대중적으로 표방한 관점에 일관성을 부여하거나 체계를 세우는 데 실패했다.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내세운 주장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 결국, 다시 한 번 러셀처럼 그가 대변한 것은 좌파와 젊은이의 진영에 속하려는 모호한 욕망에 불과했다. 한때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인상적인 인생철학과 동일시되었던 사르트르의 지적인 몰락은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불만족스럽더라도 지적인 지도자를 요구하는 교양 있는 대중은 항상 넘쳐났다. 루소는 극악무도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사망 이후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 지적인 도시 파리는 또 다른 “대스타” 사르트르에게 성대한 장례식을 베풀었다. 대부분이 젊은이인 5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몽파르나스 묘지까지 사르트르의 관을 따라갔다. 몇 사람은 좀 더 잘 보기 위해 나무를 타고 올랐고, 그중 한 명은 관 위로 요란스레 떨어지기도 했다. 그들은 무슨 이유로 그에게 존경을 표하러 온 것일까? 거기 모인 군중은 어떤 신념, 인류에 대한 어떤 빛나는 진실을 역설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당연히 이런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