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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第三發光地
1, 慶聞
佛子得聞此地行하니 菩薩境界難思議라
靡不恭敬心歡喜하야 散華空中爲供養이로다
讚言善哉大山王이여 慈心愍念諸衆生하사
善說智者律儀法인 第二地中之行相이로다
是諸菩薩微妙行이 眞實無異無差別하니
爲欲利益諸群生하야 如是演說最淸淨이로다
불자들이 이 지위의 행을 들으니
보살의 경계 불가사의함이라
공경하며 기쁜 마음 모두 내어서
공중에 꽃을 뿌려 공양을 삼았도다.
“장하여라. 큰 산왕(山王)이여”라고 찬탄하는 말
자비로써 모든 중생 가엾이 여겨
지혜 있는 이들의 계행과 위의의 법인
제2지의 행상(行相)을 잘 설하셨도다.
이러한 보살들의 미묘한 행은
진실하고 다르지 않고 차별도 없어
모든 중생을 이익하게 하기 위함이니
이와 같이 가장 청정함을 연설하였도다.”
*
제삼발광지(第三發光地)
*
십지가운데 세 번째 지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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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慶聞) ; 듣기를 경사스럽게 여긴다
*
불자득문차지행(佛子得聞此地行)하니 : 불자가 이 지위의 행을 얻어 듣게 되니
보살경계난사의(菩薩境界難思議)라 : 보살의 경계가 불가사의 하다.
미불공경심환희(靡不恭敬心歡喜)하야 : 공경해서 마음이 환희치 아니함이 없어서
산화공중위공양(散華空中爲供養)이로다 : 허공 가운데 꽃을 잔뜩 뿌려서 공양을 삼음이로다. 누구에게 축하를 할 때나 세상에 어떤 좋은 일이 있으면 가장 우선 등장하는 것이 꽃이다. 세상으로 돈 벌러 나가서 돈은 크게 못 벌어 와도 퇴근할 때 꽃 한송이 사서 집에 들어가면 하루종일 속상했던지 불편했던지 하는 마음이 싹 사라져버린다.
그런 것이 꽃의 위력이다.
밖에 나가 돈도 제대로 못벌어다 주는 사람의 속은 얼마나 아프고, 집에 있는 사람의 속은 또 얼마나 타겠는가. 그런데 한 송이 꽃으로써 그런 마음들을 다 녹인다.
선혜라고 하는 사람이 부처님께 꽃을 공양 올리게 된 설화라든지 꽃 이야기는 불교가 원조다. 불교에서는 맨 처음부터 꽃 공양을 중요하게 여겼다. 꽃공양의 가치와 위대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산화(散華)라는 말도 있다.
불교에서 행사할 때 산화락(散花落) 산화락 하면서 동남동녀가 나와서 꽃잎을 따 둔 꽃바구니에서 꽃을 뿌린다. 옛날부터 있었던 이 전통이 좀 더 발전해서 꽃을 꽂아서 부처님께 올리고 꽃꽂이로도 발달을 했다. 거기에 대한 책자도 많이 나오고 발표회도 많이 한다.
지금은 사시사철 꽃이 다 있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조화 또는 지화라고 해서 종이로 꽃을 만들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불교와 꽃의 관계 그 역사나 쓰임새를 경문에 있는 내용들 그대로 모아서 잘 정리해도 충분하게 훌륭한 책이 될 것이다. 여기 나오는 산화공중위공양(散華空中爲供養) 이런 구절들을 인용해서 해석하고 또 부연설명 하면 아주 좋은 경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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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언선재대산왕(讚言善哉大山王)이여 : 찬탄해 말하기를 훌륭하여라 큰 산의 왕이시여
자심민념제중생(慈心愍念諸衆生)하사 : 자비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생각 모든 중생들에게 그렇게 여기사
선설지자율의법(善說智者律儀法)인 : 지혜로운 자의 율의법인
제이지중지행상(第二地中之行相)이로다 : 제2지중의 행상을 잘 설명했음이로다.
율의법 십선계를 주로 제2지에서 이야기 했는데 그 내용을 잘 들었다 ‘아주 경사스럽게 들었습니다’ 하는 내용을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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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보살미묘행(是諸菩薩微妙行)이 : 이 모든 보살의 미묘한 행이
진실무이무차별(眞實無異無差別)하니 : 진실해서 다름이 없으며 또 차별도 없나니
위욕이익제군생(爲欲利益諸群生)하야 : 모든 중생들을 이익케 하고자 해서
여시연설최청정(如是演說最淸淨)이로다 : ‘가장 훌륭합니다. 이와 같이 참 훌륭하게 잘 들었습니다’ ‘제 2지를 잘 들었습니다’ 하는 내용으로 3지 설명 안에 이렇게 글을 연결시킨다. 보통 세상에서 이야기해도 이런 식으로 한다. 앞의 사람 이야기 한 것을 간단하게 말하면서 ‘참 이러이러한 표현을 했는데 잘 들었습니다’하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다른 내용 이야기하기를 청하는 형식을 밟는다. 2000년 전, 아니면 2600년 전에 이런 체계가 완비되어서 오늘날에 와서는 여기에서 하나도 발전한 것도 없고 발전할 필요도 없다. 그대로 이 격식으로 이 법을 따르고 있다. 이 법을 따르면 틀림없이 법도에 맞게 여법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행사를 할 때도 그렇다. 내가 자주 이야기 하는 것인데 우리 불교계에도 보면 내빈소개를 행사가 끝난 뒤에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행사 다 끝나고 마지막에 가서야 ‘오늘 행사에 누가 왔습니다’ 이렇게 하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경전 어디에 내빈소개가 마지막에 있는가? 경전에는 청법대중이 전부 처음에 있다.
화엄경에서도 보면 몇 페이지나 할애해서 맨 앞에 수백 명의 보살들 이름을 전부 소개한다. 지루할 정도로 이름을 낱낱이 소개하는데 그것이 원칙이다.
먼저 내빈소개를 하고 나면 ‘이 행사의 격이 어떻다’ 하는 것을 미리 알게 된다.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스님들은 초파일 행사를 하든지 낙성식을 하던지 꼭 그 격식을 지키기 바란다. 그렇게 해야 된다.
경전에는 다 그렇게 되어 있고 그게 이치에 맞다.
앞서 축사를 한 사람도 있고 격려사를 한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이 올라와서 먼저 소개를 했는데 행사가 다 끝난 뒤에 마지막에 내빈소개를 하면 그 사람들 이름을 또다시 거론해야 된다. 그건 맞지도 않고 모양도 아니다.
요즘은 박수도 흔해서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내겠습니다’ 라는 말도 많이 하는데 다 군더더기다. 그 사람을 위해서 박수 한 번 쳤으면 됐지 내려간 뒤에 다시 치자고 하는 것은 정말 듣기 거북하고 앞에서 쳤던 박수도 희석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아야 된다. 못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미세하게 그런 것들을 잘 느끼는 사람들은 ‘행사를 저렇게 빛이 안 나게, 뭘해도 빛이 안 나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행사가 제대로 빛이 나게 하려면 그런 순서도 여법하게 잘 밟아서 해야 된다.
2, 請說
一切人天供養者여 願爲演說第三地하소서
與法相應諸智業을 如其境界希具闡하노이다
大仙所有施戒法과 忍辱精進禪智慧와
及以方便慈悲道와 佛淸淨行願皆說하소서
時解脫月復請言호대 無畏大士金剛藏하
願說趣入第三地하는 柔和心者諸功德하소서
일체 천신과 인간의 공양을 받으시는 이여
원컨대 제3지의 법문을 연설하소서.
교법(敎法)과 상응하는 모든 지혜의 업을
그 경계와 같게 다 보이기를 바라나이다.
큰 신선이 갖추신 보시와 계율과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와
방편과 자비하신 도(道)와
부처님의 청정한 행을 원컨대 다 말씀하소서.
그때에 해탈월보살이 다시 청하여 말하기를
“두려움이 없으신 금강장(金剛藏)보살이여
원컨대 제3지에 들어가는
유화한 마음의 모든 공덕을 연설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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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설(請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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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인천공양자(一切人天供養者)여 : 일체 인천이 다 그에게 공양하는 이여
원위연설제삼지(願爲演說第三地)하소서 : 원컨대 제 3지를 연설하여 주소서
여법상응제지업(與法相應諸智業)을 : 법과 딱 맞아떨어지는, 법과 더불어 상응하는 모든 지혜의 업을
여기경계희구천(如其境界希具闡)하노이다 : 그 경계와 같이 해서 갖추어서 드러내 주기를 희망하노이다. 잘 드러내서 3지의 이치를 잘 드러내 주기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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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소유시계법(大仙所有施戒法)과 : 대선, 부처님이 소유하고 계시는 보시와 지계의 법과
인욕정진선지혜(忍辱精進禪智慧)와 : 그리고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와
급이방편자비도(及以方便慈悲道)와 : 그리고 방편과 자비의 도와
불청정행원개설(佛淸淨行願皆說)하소서 : 부처님의 청정한 행과 원을 다 연설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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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해탈월부청언(時解脫月復請言)호대 : 해탈월 보살이 다시 청해서 말하되
무외대사금강장(無畏大士金剛藏)하 : 두려움이 없는 큰 선비 금강장보살이시여
원설취입제삼지(願說趣入第三地)하는: 제 3지에 취입하는
유화심자제공덕(柔和心者諸功德)하소서: 유화심자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의 모든 공덕을 원컨대 설하여 주소서. 이렇게 청하면서 간단하게 제3지에 대한 내용도 약간 언급하고 넘어간다.
3, 入三地의 十心
爾時에 金剛藏菩薩이 告解脫月菩薩言하사대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已淨第二地하고 欲入第三地인댄 當起十種深心이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淸淨心과 安住心과 厭捨心과 離貪心과 不退心과 堅固心과 明盛心과 勇猛心과 廣心과 大心이니 菩薩이 以是十心으로 得入第三地니라
그때에 금강장보살이 해탈월보살에게 말하였습니다.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이미 제2지를 깨끗이 수행하고 제3지에 들어가려면 마땅히 열 가지의 깊은 마음을 일으켜야 하느니라. 무엇을 열 가지라 하는가. 이른바 청정한 마음과, 편안히 머무는 마음과, 싫어서 버리는 마음과, 탐욕을 여의는 마음과, 물러가지 않는 마음과, 견고한 마음과, 밝고 성대한 마음과, 용맹한 마음과, 넓은 마음과 큰 마음이니라. 보살이 이 열 가지 마음으로 제3지에 들어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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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삼지(入三地)의 십심(十心) ; 제3 발광지에 들어가는 열 가지 깊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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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에 들어가는 열 가지 마음도 있었다. 3지에도 또 열 가지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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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爾時)에 : 이시에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 : 금강장보살이
고해탈월보살언(告解脫月菩薩言)하사대 : 고해탈월보살언하사되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이정제이지(已淨第二地)하고 : 제 2지를 청정하게 이미 했고
욕입제삼지(欲入第三地)인댄 : 제 3지에 들어가고저 할진댄
당기십종심심(當起十種深心)이니 : 열 가지 깊은 마음을 마땅히 일으켜야 하나니
하등(何等)이 : 하등이
위십(爲十)고 : 위십고
소위청정심(所謂淸淨心)과 : 소위 청정심과 청정은 텅 빈 마음
안주심(安住心)과 : 안주심과 딱 안정된 마음
염사심(厭捨心)과 : 염사심 세속적인 것 번뇌를 다 싫어서 버리는 마음과
이탐심(離貪心)과 : 탐욕을 버린 마음과
불퇴심(不退心)과 : 물러서지 않는 마음과
견고심(堅固心)과 : 견고한 마음과
명성심(明盛心)과: 명성심은 열정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열정이 제일 중요하다.
자기 발전을 위해서, 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 밝고 성한 아주 왕성한 마음과
용맹심(勇猛心)과 : 용맹심과
광심(廣心)과 : 광심과
대심(大心)이니: 대심이니
보살(菩薩)이: 보살이
이시십심(以是十心)으로 : 이 열 가지 마음으로써
득입제삼지(得入第三地)니라 : 제3지에 들어가느니라.
4, 有爲法의 實相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住第三地已에 觀一切有爲法의 如實相하나니 所謂無常과 苦와 不淨과 不安隱과 敗壞와 不久住와 刹那生滅과 非從前際生과 非向後際去와 非於現在住며 又觀此法이 無救無依하며 與憂與悲하며 苦惱同住하며 愛憎所繫며 愁慼轉多하며 無有停積하며 貪恚癡火가 熾然不息하며 衆患所纏으로 日夜增長하며 如幻不實하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제3지에 머물고는 일체 유위법(有爲法)의 여실한 모습을 관찰하느니라. 이른바 무상하고, 괴롭고, 청정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고, 무너지고, 오래 있지 못하고, 찰나에 났다 없어지고, 과거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미래로 가는 것도 아니고, 현재에 있는 것도 아니니라.
또 이 법이 구원할 이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고, 근심과 함께하고 슬픔과 함께하고, 고통과 함께 있으며, 사랑하고 미워하는 데 얽매이고, 근심 걱정이 많아지고, 정지해 있지 않으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불이 치성하여 쉬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근심에 얽매여 밤낮으로 늘어나며, 환영과 같아서 진실하지 아니함을 관찰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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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위법(有爲法)의 실상(實相): 유위법의 실상을 관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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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 지계 인욕 해서 여기 제3 발광지는 인욕을 중심으로 수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기타 다른 것들도 많이 언급을 한다. 빛을 발한다고 하는 제3발광지를 이야기하는데 유위법의 실상에 대해서 먼저 알고 있어야 된다.
기본적으로 인생무상, 세상무상부터 알고 봐야 된다. 그래야 불법이 귀에 들어온다.
인생이 무상한지도 모르고 세상사 무슨 벼슬이니 재산이니 하는 것이 무상하다고 하는 것을 모르면 불법이 들어갈 구멍이 없고 도대체가 틈이 없다. 그래서 유위법의 실상을 여기서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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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주제삼지이(住第三地已)에 : 제3지에 머문 뒤에
관일체유위법(觀一切有爲法)의 : 일체 유위법 우리가 잘 아는 일체 유위법은 금강경에서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라고 나온다. 금강경은 대승시교(大乘始敎) 대승불교의 시작점이지 진정한 대승도 아니다.
금강경은 시작하는 대승인 대승시교라고 딱 못 박아 놓았다.
그 대승시교에서도 일체 유위법은 여몽환포영이라고 하였다. 일체유위법이
여실상(如實相)하나니 : 실상과 같음을 관하니, 유위법의 진실한 모습은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불과 같게 응당히 봐야한다고 나와있다.
평소에 살면서도 생활 속이나 주변사람에게서 그런 것을 많이 느낀다. 또 정치 세계의 무상함은 전부 경전이다. 화엄경까지는 못된다 하더라도 금강경 정도는 된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고 하는 이치는 정치 세계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다행히도 별 볼일 없는 서민이 되어서 큰 정치의 소용돌이에 물이 세차게 흘러가는 모습을 언덕에 앉아서 ‘참 잘 논다. 잘 논다’ 하고 그것도 서지도 않고 편한 의자를 놓고 앉아서 정치적인 소용돌이, 큰 물결이 흘러가는 것을 감상하고 있다. 물이 소용돌이 치고 흙탕물을 일으키고 집이 떠내려가고 사람이 떠내려가고 개 돼지 소 말이 떠내려가는 모습을 큰물이 졌을 때 많이 본다. 나는 영덕 오십천변에 살았기 때문에 여름에 큰물이 지면 그런 모습을 많이 봤다.
우리는 다행히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 그런 것을 구경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얼마나 다행한지 모른다. 안 그러면 그 소용돌이 속에 떠밀려 가고 흙탕물 속에 아우성치는 상황이 됐을 것이다.
그런 것을 제3자의 입장이 되어서 이렇게 바라볼 줄 아는 가르침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인생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참 다행 중에 큰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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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무상(所謂無常)과 : 소위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하고 그것이 곧 실상이라고 하는 사실, 진실한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 하는데 무상하다는 말이다. 첫째 일체 유위법인 인생사 세상사는 무상하다.
고(苦)와 : 그리고 괴로운 것이다. 한참 권력을 잡았을 때는 마음대로 휘두르다가 또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그 과보를 받느라고 사정없이 끌려다니고 큰집을 들락날락 한다. 그런 것이 다 괴로운 것이다.
부정(不淨)과: 또 부정한 것이고 청정하지 못함이다. 온갖 비리와 부정과 부패가 드러나는데 그것만이 아니라 더욱 부풀려서 기분 나쁘게 했기 때문에 더욱 보복을 하는 것이다. 다음에 권력이 바뀌면 또 자기가 지은 것보다도 더 받게 되는 상황들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사건들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환하게 보고 있다. 그래서 일체 유위법이라고 하는 것은
불안은(不安隱)과 : 불안은이다. 편안할 날이 없다.
패괴(敗壞)와 : 패괴다. 시간이 가면 다 뒤바뀌고 무너지고 흩어지는 일이다.
불구주(不久住)와 : 불구주는 패괴와 같은 뜻인데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다.
찰나생멸(刹那生滅)과 : 찰나생멸이다. 순간순간 그냥 뒤바뀌는 것이다. 순간순간 생로병사하고 춘하추동하고 생주이멸하고 성주괴공하는 이치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비종전제생(非從前際生)과 : 앞에 것으로부터 생한 것도 아니고
비향후제거(非向後際去)와 : 뒤에 것을 향해서 가는 것도 아니다.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어현재주(非於現在住)며 : 현재에 머문 것은 아니고 그대로 있는 것은 더욱 아닌 것이다. 내 세상인가 했더니 어느새 정치가 뒤바뀌어서 서로 먹히고 먹는 상황이 된다. 비어현재주 참 이런 설명은 깨달으신 성인들 불보살들과 조사스님들의 안목에서는 아주 명확하게 가차없이 매정하게도 설명하고 있다. 누구 특정인 한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치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이치다.
‘내가 니 보고 하는 소리냐? 나보고 하는 소리다’ 하면 책임이 없다.
아무리 매정하고 비정하게 얘기해도 ‘그건 나보고 한 소리다. 나도 거기에 다 포함된다’ 고 하면 된다. 사실이 그렇다. 일체 유위법의 실상을 관(觀)하며, 그러한 이치다. 여실한 상을 관하노니 그렇게 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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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관차법(又觀此法)이: 또 우관 이럴 때 관자는 뒤에다 새긴다. 또 차법이
무구무의(無救無依)하며: 구제함도 없고 의지할 바도 없다. 세상사가 어떻게 의지가 되겠는가, 그 무엇도 의지할 바가 못 된다. 사람이 이런 이치를 제대로 알고 살면 냉랭할 수밖에 없다. 냉랭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차라리 나은 것이다. 인생사는 뻔한데 온기 있다가 식어버리면 어쩔 것인가?
여우여비(與憂與悲)하며 : 또 근심으로 더불어 함께 하고, 슬픔과 더불어 함께 하며
고뇌동주(苦惱同住)하며 : 고뇌와 함께 머물며
애증소계(愛憎所繫)며 : 사랑과 미움에 얽힌다. 여기 다 설명해 놓았다.
수척전다(愁慼轉多)하며 : 근심과 걱정이 더욱 더 많으며
무유정적(無有停積)하며 : 멈추거나 쌓임이 없으며
탐에치화(貪恚癡火)가: 탐진치의 불길이
치연불식(熾然不息)하며 : 활활 타올라서 쉬지를 않는다. 이것을 진심이 불이고 탐은 물이고 이런 식으로 나눠서 배대하기도 하는데 이러나저러나 여기는 탐진치의 불길이 치연히 쉬지를 아니하며
중환소전(衆患所纏)으로 : 온갖 근심 걱정거리가 얽힌 바로써
일야증장(日夜增長)하며: 밤이 새면 더 나아질까, 해가 뜨면 나아질까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더욱 더하는 것이다. 일야 밤낮으로 증장하며
여환부실(如幻不實)하니라 : 환과 같아서 실다움이 없다는 사실을 관하느니라.
유위법의 실상이 이런데 이런 것을 참고 잘 받아들인다. 그래서 인욕바라밀이다.
이러한 것을 다 수용하고 소화하고 참고 다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5, 佛智慧
見如是已하야는 於一切有爲에 倍增厭離하야 趣佛智慧하며 見佛智慧가 不可思議며 無等無量이며 難得無雜이며 無惱無憂며 至無畏城하야 不復退還이며 能救無量苦難衆生이니라
“이와 같이 보고 나서는 일체 유위에 대한 싫증이 배나 더하여 부처님의 지혜로 나아가는데, 부처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고, 동등할 이 없고, 한량이 없고, 얻기 어렵고, 섞이지 않았으며, 시끄러움이 없고, 근심이 없고, 두려움이 없는 성(城)에 이르러 다시는 물러가지 않고, 한량없이 고통받는 중생을 능히 구제함을 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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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지혜(佛智慧) : 불지혜에 나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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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여시이(見如是已)하야는: 이와 같은 사실을 환하게 보고 나서는
어일체유위(於一切有爲)에 : 일체 유위법에
배증염리(倍增厭離)하야 : 배증염리하야, 더욱더 세상사가 싫다는 것이다. 인생사가 싫다. 정치 세계가 무상하다. 진짜 진정으로 싫어서
취불지혜(趣佛智慧)하며 : 깨달음의 지혜에 나아간다.
‘세상사 인생사 환하게 좀 꿰뚫어보는 지혜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무상한 것까지는 이해하는데 답답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취불지혜라, 깨달음의 지혜에 나아가며
견불지혜(見佛智慧)가 : 부처님의 지혜가
불가사의(不可思議)며 : 불가사의함을 보며
무등무량(無等無量)이며 : 같음도 없고 한량도 없으며
난득무잡(難得無雜)이며 : 얻기도 어렵고 뒤섞임도 없으며
무뇌무우(無惱無憂)며 : 괴로움도 없고 근심도 없으며
지무외성(至無畏城)하야 : 두려움이 없는 성, 두려움이 없는 마을, 두려움이 없는 도시 에 이르른다. 무상이 다 해결됐으니까 두려울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도시에 이르러서
불부퇴환(不復退還)이며 : 더 이상 거기에서 물러서지 아니하며 불지의 경계니까
능구무량고난중생(能救無量苦難衆生)이니라 : 능히 한량없는 고난의 중생들을 구제 하느니라. 둘째 단락은 마음에 쏙 든다. 평화의 내용이 잘 표현되어 있다.
6, 十種哀愍心
菩薩이 如是見如來智慧의 無量利益하며 見一切有爲의 無量過患하고 則於一切衆生에 生十種哀愍心하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見諸衆生의 孤獨無依하고 生哀愍心하며 見諸衆生의 貧窮困乏하고 生哀愍心하며 見諸衆生의 三毒火然하고 生哀愍心하며 見諸衆生이 諸有牢獄之所禁閉하고 生哀愍心하며 見諸衆生이 煩惱稠林의 恒所覆障하고 生哀愍心하며 見諸衆生의 不善觀察하고 生哀愍心하며 見諸衆生의 無善法欲하고 生哀愍心하며 見諸衆生의 失諸佛法하고 生哀愍心하며 見諸衆生의 隨生死流하고 生哀愍心하며 見諸衆生의 失解脫方便하고 生哀愍心이니 是爲十이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여래의 지혜가 한량없이 이익케함을 보고, 일체 유위법은 한량없이 걱정되는 줄을 보았으므로 곧 일체 중생에게 열 가지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었느니라.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모든 중생이 고독하여 의지할 데 없음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내며, 모든 중생이 빈궁하여 곤란함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내며, 모든 중생이 삼독에 불타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내느니라.
모든 중생이 모든 있음의 옥에 갇혀 있음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내며, 모든 중생이 번뇌의 숲에 항상 뒤덮여 있음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내며, 모든 중생이 잘 살펴보지 못함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내느니라.
모든 중생이 선한 법에 욕망이 없음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내며, 모든 중생이 부처님 법을 잃어버림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내며, 모든 중생이 생사의 물결을 따르는 것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내며, 모든 중생이 해탈하는 방편을 잃어버림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내나니, 이것이 열 가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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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종애민심(十種哀愍心) : 일체 중생에게 내는 열 가지 불쌍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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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이 : 보살이
여시견여래지혜(如是見如來智慧)의 : 이와 같이 여래 지혜의
무량이익(無量利益)하며 : 무량이익함을 보며 한량없는 이익, 여래 지혜는 그렇게 유익하다. 일체 유위법을 다 졸업하고 다 꿰뚫어보고 ‘인생사 세상사 뭐 그런데’ 하고 거기에 더 뒤돌아 볼 일도 없고 더 감상할 일도 없고, 이미 졸업한지 오래다. 졸업하면 그것이 그대로 이미 이익이 된 것이다. 졸업하고 아무것도 손에 잡힌 것도 없는데 손에 잡힐 리 없는 그것이 진정 졸업장이고 진정한 이익이라. 무량이익을 보며
견일체유위(見一切有爲)의 : 일체 유위법의
무량과환(無量過患)하고: 한량없는 허물과 걱정거리 근심거리를 보고는
즉어일체중생(則於一切衆生)에 : 즉 일체중생의
생십종애민심(生十種哀愍心)하나니 : 열 가지 애민히 여기는 마음을 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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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등(何等)이: 하등이
위십(爲十)고: 위십고
소위견제중생(所謂見諸衆生)의 : 소위 모든 중생의
고독무의(孤獨無依)하고 : 고독무의함을 보고
생애민심(生哀愍心)하며: 애민심을 낸다. 고는 고아라고 할 때의 고다. 어려서 부모 없는 것을 고라고 하고, 늙어서 자식 없는 것을 독이라고 한다. 독거노인이라고 할 때 독이다. 외로울 고(孤) 외로울 독(獨)이지만 전부 뜻이 다 다르다. 어려서 부모 없고 늙어서 돌봐줄 사람 없는 이들을 보고 애민심을 내며
견제중생(見諸衆生)의 : 모든 중생이
빈궁곤핍(貧窮困乏)하고 : 가난해서 겨우겨우 곤하게 어렵게 사는 것을 보고서
생애민심(生哀愍心)하며 : 애민심을 내며
견제중생(見諸衆生)의 : 모든 중생들의
삼독화연(三毒火然)하고 : 탐진치 삼독의 불길이 너무 활활 탄다.
도대체가 돌이켜 볼 줄도 모르고 삼독의 욕심이 꺼질 줄 몰라서 그만하면 살만하건마는 그냥 삼독의 불길이 치연한 것이다. 보면 볼수록 그런 데 대해서 너무 불길이 세게 타는 것을 보고는
생애민심(生哀愍心)하며 : 불쌍한 생각을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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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중생(見諸衆生)이 : 모든 중생의
제유뇌옥지소금폐(諸有牢獄之所禁閉)하고 : 모든 견고한 옥에 갇혀 있는 바 감금되어 있는 바를 보고는
생애민심(生哀愍心)하며: 애민심을 내며
견제중생(見諸衆生)이 :또 모든 중생들의
번뇌조림(煩惱稠林)의: 번뇌조림의
항소부장(恒所覆障)하고 : 항소부장한다. 얼마나 번뇌가 많은지 삼독으로부터 108번뇌 팔만사천 번뇌가 빽빽한 숲과 같다.
빽빽한 숲에 들어가면 나올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 중생들이 그렇게 번뇌에 얽히고 섥혀서 거기에 항상 덮이고 장애가 된 바를 보지만 알아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 그런데 스스로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사람들은 ‘이 번뇌에서 좀 벗어났으면 이 복잡한 상황에서 좀 벗어났으면’ 한다. 본인이 그렇게 알고 벗어나는 것이 제일 쉬운 방법이다. 그것을 누가 옆에서 해 줄 수 있겠는가.
본인이 그렇게 벗어났으면 하는데도 벗어나 지지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 이리저리 훈수하고 간섭하고 조언을 한다고 해도 참 안 되는 일이다. 그런 것을 보고는
생애민심(生哀愍心)하며 :생애민심하며
견제중생(見諸衆生)의 :중생들이
불선관찰(不善觀察)하고 : 잘 관찰하지 못함을 보고는, 중생들이 그런 것을 관찰을 잘 해야 되는데 관찰을 못하고 얽혀든다. 휘감기고 얽혀드는 그런 것을 보고는
생애민심(生哀愍心)하며: 애민심을 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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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중생(見諸衆生)의: 제중생의
무선법욕(無善法欲)하고 : 선법의 욕심이 없음을 보고는
생애민심(生哀愍心)하며 : 애민심을 낸다.
중생이 선법에 대한 욕심이 없음을 보고 보살들은 애민심을 낸다. 이건 무슨 말인고 하면 예를 들어서 ‘화엄경 참 좋다’ 하고 화엄경에 미쳐서 무슨 절 일도 돌아보지도 않고 세상사 돌아보지도 않고 소임도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화엄경 공부에 미쳐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선법의 욕, 선한 법의 욕심이다. 이 욕심이 없으면 안된다.
그런데 중생은 그 좋은 법을 만나고도 무심한 것이다. 무심도인이라서 무심한 것이 아니고 선법에 대한 아무 욕심이 없고 기대감도 없고 희망도 없기 때문에 무심하다. 그런 사람들은 참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보살은 그런 사람을 보고 애민심을 낸다.
견제중생(見諸衆生)의 : 또 모든 중생의
실제불법(失諸佛法)하고 : 모든 불법, 좋은 불법이 눈앞에 있고 턱 밑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을 보고는
생애민심(生哀愍心)하며: 애민심을 내며
견제중생(見諸衆生)의: 모든 중생의
수생사류(隨生死流)하고 :생사의 흐름에 따라감을 보고는, 중생은 그저 먹고 살고 하는데 그만 빠져서 헤어나올 줄을 모른다. 그것이 수생사류라 생사의 흐름을 따라감을 보고는
생애민심(生哀愍心)하며: 애민심을 낸다.
견제중생(見諸衆生)의: 모든 중생의
실해탈방편(失解脫方便)하고 : 해탈의 방편을 잃어버림을 보고는
생애민심(生哀愍心)이니: 애민심을 내나니
시위십(是爲十)이니라 : 이것이 열 가지니라. 보살의 열 가지 애민심에 대한 내용이 아주 절절하다. 정말 우리 마음에 와 닿는 내용이다.
7, 發大精進
菩薩이 如是見衆生界의 無量苦惱하고 發大精進하야 作是念言호대 此等衆生을 我應救며 我應脫이며 我應淨이며 我應度며 應着善處며 應令安住며 應令歡喜며 應令知見이며 應令調伏이며 應令涅槃이라하나니 菩薩이 如是厭離一切有爲하며 如是愍念一切衆生하며 知一切智智가 有勝利益하고 欲依如來智慧하야 救度衆生이니라 作是思惟호대 此諸衆生이 墮在煩惱大苦之中하니 以何方便으로 而能拔濟하야 令住究竟涅槃之樂고 便作是念호대 欲度衆生하야 令住涅槃인댄 不離無障礙解脫智니 無障礙解脫智는 不離一切法如實覺이며 一切法如實覺은 不離無行無生行慧光이며 無行無生行慧光은 不離禪善巧決定觀察智며 禪善巧決定觀察智는 不離善巧多聞이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중생계의 한량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보고 크게 정진할 마음을 내어 생각하기를 ‘이 중생들을 내가 응당히 구호하고, 내가 응당히 해탈케 하고, 내가 응당히 청정하게 하고, 내가 응당히 제도하고, 응당히 선한 곳에 두고, 응당히 편안히 있게 하고, 응당히 즐겁게 하고, 응당히 알고 보게 하고, 응당히 조복하게 하고, 응당히 열반케 하리라.’라고 하느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일체 유위의 법을 싫어하고, 이와 같이 일체 중생을 불쌍히 생각하고, 일체 지혜의 지혜가 훌륭한 이익이 있음을 알고는 여래의 지혜에 의지하여 중생을 제도하려 하느니라.
또 생각하기를 ‘이 모든 중생들이 번뇌와 큰 고통 속에 빠졌으니 무슨 방편으로 구제하여 구경(究竟)열반의 낙(樂)에 머물게 하리오.’라고 하느니라.
그리고 또 이렇게 생각하느니라. ‘중생을 제도하여 열반에 머물게 하려면 장애가 없이 해탈한 지혜를 여의지 않아야 하나니, 장애가 없이 해탈한 지혜는 일체 법에 실상과 같은 깨달음[一切法如實覺]을 여의지 않고, 일체법에 실상과 같은 깨달음은 행함도 없고 생멸도 없는 행의 지혜광명을 여의지 않고, 행함도 없고 생멸도 없는 행의 지혜광명은 선정의 공교롭고 결정하게 관찰하는 지혜[禪善巧決定觀察智]를 여의지 않고, 선정의 공교롭고 결정하게 관찰하는 지혜는 공교롭게 많이 앎[善巧多聞]을 여의지 않았도다.’라고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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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대정진(發大精進) : 보살이 크게 정진할 마음을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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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정진을 발하는 내용을 공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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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이: 보살이
여시견중생계(如是見衆生界)의 : 여시견중생계의
무량고뇌(無量苦惱)하고 : 한량없는 고뇌 덩어리를 보고
발대정진(發大精進)하야 : 대정진을 발해서
작시념언(作是念言)호대 : 이러한 생각을 한다. ‘아 중생의 세계가 이렇구나’ 하는 것을 보고는 보살은 스스로 마음에 다짐을 갖는 것이다.
차등중생(此等衆生)을 : 차중생을
아응구(我應救)며 : 내가 응당히 구제할 것이며
아응탈(我應脫)이며: 내 응당히 해탈시킬 것이며
아응정(我應淨)이며 : 내가 응당히 청정하게 할 것이며
아응도(我應度)며: 내가 응당히 제도할 것이며
응착선처(應着善處)며: 응당히 선한 곳에 머물게 할 것이며
응령안주(應令安住)며 : 응당 안주하게 할 것이며
응령환희(應令歡喜)며 : 응당 환희케 할 것이며
응령지견(應令知見)이며 : 응당 환하게 지혜로써 깨달아 알아보게 할 것이며
응령조복(應令調伏)이며: 응당 조복하게 할 것이며
응령열반(應令涅槃)이라하나니 : 응당히 모든 번뇌가 다 사라진 경지에 이르게 할 것이다 라고 보살은 속으로 그런 다짐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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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이 : 보살이
여시염리일체유위(如是厭離一切有爲)하며 : 이와 같이 일체 유위를 싫어해서 떠나며
여시민념일체중생(如是愍念一切衆生)하며 : 이와 같이 일체 중생을 불쌍히 여기며
지일체지지(知一切智智)가 : 일체지지가
유승이익(有勝利益)하고: 수승한 이익이 있음을 본다.
불교는 천번 만번 이야기 하지만 지혜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한다. 지혜가 있고서야 뭐든지 다 바르게 해결 되고 바르게 알게 되고 바르게 정리된다.
욕의여래지혜(欲依如來智慧)하야 : 여래의 지혜를 의지해서
구도중생(救度衆生)이니라: 중생을 구제해서 제도하느니라. 여래 지혜, 깨달음의 지혜를 의지해야 중생을 제대로 제도한다는 뜻이다.
옛날에 어떤 어머니가 출가한 아들이 선지식이 되어서 수백명 대중을 거느리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아이고 우리아들이 출세했는가보다’하고 찾아갔는데 조사스님이 된 그 아들이 어머니를 하룻밤도 재우지도 않고 밥도 한 그릇 대접하지 않고 그대로 쫓아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생각해도 아들이 그럴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선지식은 ‘진정 어머니에게 이익한 점이 무엇일까’를 생각한 것이다.
수백 명 수행자가 있는 총림의 방장이 되어 있다고 해서 ‘아이고 어머니 오셨습니까. 내가 이렇게 출세했습니다’ 하고 좋은 방에 모시고 시자 중에 한 둘을 붙여서 호의호식하게 하고 방도 따뜻하게 해서 몇 날 며칠 잘 쉬게 해서 내보냈다면 그 모습이 수행자로서 어떻게 보이겠는가? 우리가 보더라도 그것은 모양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이 모양 아닌 것은 짐작할 수 있는데 또 이 대선지식이 어머니에게 밥 한 그릇 안 주고 큰 장정 시자들을 시켜서 ‘저 여자는 내가 모르는 여자다’하고 쫓아버린 것도 이해가 안된다.
선지식의 안목으로 충분히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큰 선지식이 됐고 나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진정으로 이익하게 하려면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충분히 생각하고 선지식은 그렇게 부모를 매정하게 쫓아냈다고 하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함부로 법력도 없는 우리가 흉내 낼 일은 아니다. 깊이 잘 새겨서 자기 지혜가 미치는 한도 내에서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여래의 지혜를 의지해서 중생을 제도하고자 한다. 여래의 지혜를 의지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적합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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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시사유(作是思惟)호대 : 이러한 사유를 짓되
차제중생(此諸衆生)이 : 이 모든 중생이
타재번뇌대고지중(墮在煩惱大苦之中)하니: 번뇌의 큰 고통 가운데 떨어져 있으니
이하방편(以何方便)으로 : 무슨 방편으로써
이능발제(而能拔濟)하야 :능히 그들을 빼내고 구제해서
영주구경열반지락(令住究竟涅槃之樂)고하니라: 구경열반의 즐거움에 안주하게 할 것인가 하고
변작시념(便作是念)호대 : 곧 이러한 생각을 하되
욕도중생(欲度衆生)하야 : 중생을 제도하고자 해서
영주열반(令住涅槃)인댄 : 열반에 머물게 하고자 할진댄. 중요한 이야기여서 내가 고 밑넉 줄에 별표를 쳐놓았다.
불리무장애해탈지(不離無障礙解脫智)니 : 장애 없는 해탈지혜를 떠나지 말지니
무장애해탈지(無障礙解脫智)는 : 무장애 해탈지혜라고 하는 것은 뭐냐?
불리일체법여실각(不離一切法如實覺)이며: 일체법을 여실하게 깨달아 보는 것을 떠나지 말아야 하며
일체법여실각(一切法如實覺)은 :일체법을 실상과 같이 깨달아 보는 것은
불리무행무생행혜광(不離無行無生行慧光)이며 : 행도 없고 생도 없는 행과 지혜의 광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이며
무행무생행혜광(無行無生行慧光)은 : 무행무생행혜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처음 보는 낱말이다. 무행무생행혜광 그 광명이라고 하는 것은
불리선선교결정관찰지(不離禪善巧決定觀察智)며 : 불리선 선교 결정 관찰지다.
선과 선교방편 그리고 결정적인 관찰지혜, 결정이라는 말은 확실하다는 뜻이다. 확실한 관찰지혜를 떠나지 아니하는 것이며
선선교결정관찰지(禪善巧決定觀察智)는 : 선선교결정관찰지라고 하는 것은
불리선교다문(不離善巧多聞)이니라 : 선교다문이다. 이 말 때문에 내가 별을 쳐놨다.
선교다문 훌륭한 다문, 많이 보고 많이 익히고 많이 읽고 많이 듣는 것을 떠나지 않는 다. 듣고 또 듣고 읽은 것도 또 읽고 천 번 만 번 읽은 것도 또 읽는 것이다.
오늘처럼 화엄경 강의를 하려고 강의할 날짜가 다가오면 나는 최소한도 열흘 전부터는 책을 꺼내서 본다. 안보면 첫째 내가 불안하다.
다 아는 것도 보고 또 보고 볼 때마다 달리 이해가 된다.
‘이 대목은 이렇게 해석해서 설명해주는 게 좋겠다’‘이런 예화를 이끌어 여기다가 이야기 해주는 게 딱 맞겠다’하는 것이 생각나면 메모를 해 놓는다. 그래도 다시 또 보면 또 다른 예화가 떠오른다. 그것도 ‘이 경 구절에는 이런 예화가 딱 적절하다’ 라는 것을 메모해 놓는다. 생각난다고 아무거나 예화를 들어 이야기 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선교다문 해야 한다. 아주 익숙하게 자꾸 읽고 보고 많이 들어야 한다.
요즘은 누워서 핸드폰 유튜브를 틀어놓고 법문을 들어도 하루에 몇 시간씩 들을 수가 있다. 티비에서 법문 한 꼭지 들으려면 광고를 많이 봐야 된다. 불쌍한 아이들이 나오는 광고도 참고 몇 번이고 봐야 비로소 법문 한꼭지를 듣는다. 고행도 보통 고행이 아니다.
차라리 유튜브를 켜놓으면 거기에서 마음껏 듣고 싶은 법문을 골라 들을 수 있다. 내 강의도 수천 꼭지가 올라와 있다. 요즘 유명한 사람들 강사 이야기 천하의 이렇다는 사람들 설법은 그 속에 다 올라와 있다. 통도사 같은 데는 편집도 안하고 바로 올려버리니까, 관음재일이 됐든 초하루가 됐든 무슨 법문이든 딱 끝나면 한 시간 안에 유튜브에 그 법문이 올라온다. 그런 세상이다. 듣고 싶으면 얼마든지 들을 수가 있다.
나는 내 강의도 많이 듣는데 내가 내 강의를 듣는 이유는 아무도 내가 강의한 것을 지적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 그런 말은 안 맞습니다. 왜 그런 언사를 씁니까. 말이 촌스럽습니다. 유치합니다’ 이런 말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다시 들으면서 ‘이건 실수다, 이 대목은 내가 실수한 거다’ 하는 것을 교정해 간다. 선교다문을 떠나지 아니한다. 요거 하나면 위의 문제를 전부 해결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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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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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_()()()_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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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감사합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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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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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