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 할 방송인들
정운종(전 경향신문논설위원)
한평생 신문기자로 글을 쓰다 정년으로 물러 난지도 어언 27년, 필자에게 전국의 기라성 같은 방송기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방송저널지에 기고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행운중의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해진 주제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수없이 경험한 필자의 입장에서 또다시 그런 모험을 감내하게 된데 대해 먼저 양해를 구한다.
필자가 방송국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67년 4월로 기억된다. 당시 KBS는 남산에 있었고 사회교육방송 부서가 아니라 중앙방송 라디오국 대공과에서 심리전 방송을 전담하고 있을 때였다. 송현식 PD가 당시 이혜복 KBS 해설위원의 추천이라며 신아일보 논설위원인 나에게 뉴스해설을 부탁하면서 방송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그 후 1975년 7월경 KBS 라디오에서 청취율이 높았던 '세월 30년'(광복 30주년 특집대담)프로에 고정 출연함으로써 한동안 요란하게 전파를 탔던 일이 엊그제 같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KBS
이 프로는 1975년 이른 봄부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혜복 KBS 해설위원과의 대담을 녹음해 내보낸 기획프로였다. 담당 국장은 KBS 사우회장을 지낸 서병주씨(현 대한언론인회 자문역), 매일 밤 8시 45분부터 9시뉴스 직전 까지 방송(사전 녹음)됐다. KBS는 "세월 30년"의 주제가(새날의 기쁨도 잠시 한순간, 끊임없는 비바람 눈보라 속을 구비 구비 헤치며 살아온 우리 아 아 세월 30년!)까지 붙여 청취자의 관심을 돋우려 신경을 썼다. 처음엔 고재경 선생(작고)과 이혜복 선생이 대담을 했으나 고재경 선생의 사정으로 후반부터 필자가 대담 상대로 바뀌면서 5개월 가까이 1주일에 세 번은 녹음을 하기위해 남산 KBS 방송국을 드나들었다. 일요일이면 국립도서관에 들러 묵은 신문을 들쳐가며 해묵은 자료를 찾아 ‘그때 그 사건’을 메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또 한 가지 보람 있었던 방송 출연은 1970년 심야 생방송 프로였던 '새 소식과 해설'(한때 MC를 맡아보기도 했다)이다. 이팔웅 아나운서와의 인연도 잊지못할 추억이다.
이런 인연으로 대한언론인회 사무총장당시 바른말실천시민협의회를 창설 한동안 동분서주했던 일도 보람있는 나날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움직이는 세계' '시사촛점' 고정연사로, 비상임 전문위원으로 KBS 직원 못지않게 여의도를 분주하게 오가며 가끔 생방송으로 진땀을 빼곤 했던 기억도 새롭다. 이렇게 KBS를 내 집 드나들듯 하다 보니 KBS 사회교육방송 요원들과의 교분도 나에게는 큰 인적자산이나 다름없었다. 김순경 국장을 비롯하여 김은구 이상설 안표순 박미정 변영하 정 량 김규홍 국장과 방이동, 길성철, 김 집, 윤 우, 김찬식, 최규락, 송현식, 라득룡, 장민구, 서진원, 박동선, 최 춘, 이내수, 이후재, 박교서, 이기청, 윤동원, 이건장, 서진원, 윤 군, 박휘서, 김창곤 전윤표, 이승남, 어호선, 최 백, 윤석훈, 안중원 승원세씨 등과도 오랫동안 친분을 두터이 할 수 있었다. 강인덕, 장청수, 정용석, 서병철, 강성윤, 전정환, 이서행, 남주홍, 이대웅, 김영수, 박영호, 김경웅, 양재성, 이창하, 이항구, 정석홍, 정연권, 여영무, 정종문, 이재근, 도준호씨등 기라성 같은 전문가들과의 방송대담도 엊그제같다.
80년대 초였던가, 이상갑, 김준석, 김영일 유동수기자가 사회교육방송 보도반에 파견돼 함께 일한 일도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 당시 KBS 사회교육방송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왔다. 많은 시베리아 벌목공들이 이 방송을 듣고 귀순을 결심했다고 실토했다. 이처럼 방송전파 매체의 위력은 지구촌을 몇 바퀴 돌고도 남을 정도로 크며 효과 또한 지대하다는 것을 자주 실감했다. 오직 사명감 하나만을 간직한 채 밤낮없이 총칼 없는 전쟁터에서 북한을 묵묵히 계도하고 있는 대북 방송요원들도 국군 못지않은 '총칼 없는 호국의 간성'이 아닐까. 이혜복 선생은 바로 그 중심에서 북한의 대남전략을 비판했고 북한 동포들이 하루 속히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북한이 개방되고 민주화 돼야한다고 줄기차게 역설하셨다. 낭랑한 목소리와 논리 정연한 해설은 이혜복 선생을 아는 분들이라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KBS의 입장에서 때로는 곤혹스럽게 여겨졌을 시사해설도 지혜롭게 풀이해 모가 나지 않는 해설로 정평이 나 있었다.
필자가 대한언론인회 회원이 된 것도 이혜복 선생의 추천이 있어 가능했고 대한언론인 회보에 자주 글을 쓰는 영광도 누렸다. 이혜복 선생이 대한언론인회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대한언론인회가 어떻게 성장 발전했는지는 회원들 모두가 익히 아는 바다. 기금을 조성하고 회원복지증진에 역점을 둔 회 운영의 역동성은역대회장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사실 이혜복선생을 빼놓고 대한언론인회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2007년 ‘대한언론인회30년사’ 편찬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느낀 일이지만 대한언론인회와 이혜복 선생은 하나의 몸체요 분신이었음을 여러 곳에서 확인하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1990년 2월 15일 회장 직을 맡으면서 기금 조성이 간절했던 이혜복 선생의 노력으로 10억 기금을 조성, 오늘의 대한언론인회를 반석위에 올려놓은 분도 이헤복 회장이었다. 지금 같은 방송인으로 춘천 강릉 MBC 사장을 역임한 박기병 대한언론인회 회장과의 인연도 한때 방송국 문턱을 넘나들던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우연한 인연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박기병 회장은 언제 만나도 따뜻한 인간미가 넘쳐난다. 후배들로부터 부탁을 받으면 좀 체로 거절하지 않는 성품으로 유명하다. 박기병 회장은 추진력과 친화력이 남다르기로 정평이 나있다. 매사에 빈틈없는 성품에다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에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미로 100세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요즘 신뢰 문제가 자주 화두에 오르곤 하지만 오직 신뢰 하나로 평생을 살아온 박기병 대한언론인회 회장(전춘천문화방송 사장)을 보며 참 언론인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새삼 확인하는 오늘이다.<2020년 mbc사우회 방송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