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끊음질에 한창인 나전장의 유려한 손놀림. 통영나전칠기공방에서 이 광경을 숨죽여 보았다.
어느덧 하늘이 훤히 보인다. 마을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왔다는 증거다. 멀리 누정 하나가 보이면 맞게 찾아온 것이다. 이름은 서포루. ‘통영성의 서쪽 망루’란 뜻이다. 오르는 언덕이 제법 가파른 탓에 숨을 몰아쉬었다. “서포루에 오르면, 평면이었던 이 통영 지도가 입체로 살아나는 체험을 할 수 있다니까 요.” 사실이었다. 순식간에 정오의 햇살을 가득 머금은 남해 바다가 눈앞에 찰 랑이고, 발아래엔 강구안과 동피랑 마을이 훤하게 드러났다. 저 너머로는 세 병관, 통제영, 김춘수가 즐겨 다녔다는 충무교회의 첨탑과 십자가까지 선명하 게 내다보인다. 박경리는 이곳을 ‘조선의 나폴리’라고 했지만, 적어도 지금 이 풍경을 본다면 그리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폴리의 아름다움을 훌쩍 뛰어넘 고도 남으니 말이다. 방금 골목에서 본 글귀 하나가 떠오른다. “넓다는 것은 해방이며 깊다는 것은 인생의 진수와 가까워진다는 뜻입니다.” -<토지> 중 서피랑의 너른 언덕과 깊푸른 바다를 마주한 순간. 인생에 좀 더 깊이 가 닿 은 듯한 기분이었다.
2 미륵도의 중심, 미륵산에 오른다.
미륵도, 자연을 벗 삼아 예술 트레킹
미륵도는 섬이면서도 섬 같지 않은 땅이다. 일찍이 충무교와 해저터널, 가까 이는 충무대교가 놓인 이래 오랜 세월 시내와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여 발전 해왔기 때문이다. 자연과 예술이 분방하게 어우러지는, 가장 통영다운 아름 다움을 간직한 섬이기도 하다. 이곳은 다도해를 끼고 휘돌아가는 산양일주도 로, 환상적인 낙조를 자랑하는 달아공원, 한려수도를 조망하는 통영케이블카 가 자리한 미륵산, 특히 찬란한 예기를 자랑하는 통영 12공방의 후예들을 한 데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을 차례로 만나러 간다. 우선은 진남초등학 교 아래쪽에 붙어 있는 통영나전칠기공방을 향한다. 미륵도에는 통영의 장인들을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통영나전칠기공방도 그중 하나다. 조선시대 군수물자와 진상품을 만들기 위 해 삼도수군통제영 산하엔 12공방이라는 공인들의 조직이 있었다. 부채를 만 드는 선자방부터 가구와 문방구를 만드는 소목방, 놋쇠로 각종 장석을 만드 는 주석방, 제품 위에 옻칠만 전담하는 칠방, 나전 제품을 만드는 패부방까지 그 품목도 빛깔도 각양각색이었다. 통영나전칠기공방이 계승하는 것은 자연 히 이 패부방이다. 이곳에서 열다섯 살 때부터 나전을 해온 박재성 장인을 만 났다. “습윤한 지역이라 전복 색깔이 영롱하거든.” 통영 나전이 왜 그토록 유 려한지 묻자 그가 답을 해왔다. 나전 기술의 꽃이라는 ‘끊음질’에 한창인 그를 방해하기 싫어서 작품만 몇 점 구경하고 자리를 떴다. 미리 방문할 것을 알리 고 가면 손거울 뒤에 나전을 붙이는 체험을 해볼 수도 있다. 박재성 장인 외에 도 통영엔 수많은 12공방의 후예들이 있다. 그들을 만나려거든 통영무형문화 재 비석군에 가서 참배하거나 온갖 작품들을 구경할 수 있는 통영전통공예관 에 가면 된다.
3 한산마리나 호텔 & 리조트는 요트 체험을 비롯해 그와 관련한 숙박 패키지를 제공한다.
그 전에 들를 곳이 있다. 미륵산이다. ‘다도해’라는 지명의 연원이 궁금하다 면 이곳에 반드시 올라야 한다. 통영의 온갖 섬들이 미륵산 자락을 둥글게 에 워싸며 늘어선 비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다리로 올라도 좋지만, 바다 와 산을 번갈아 감상할 수 있는 케이블카를 타는 편이 좀 더 편하다. 지금 케 이블카를 타면 발아래로 구불구불한 도로가 보일 텐데, 이는 3월 개장을 앞둔 ‘스카이라인 루지 통영’의 일부 트랙이다. 이미 케이블카를 찾는 관람객만 해 도 주말이면 1만 2000명을 훌쩍 넘는데, 스카이라인 루지 개장 이후론 얼마나 더 많은 인파가 몰릴는지 기대 반 염려 반이다. 어느새 정상. 서피랑과 강구안 에서 본 바다와는 또 다른 바다가 한눈 가득 펼쳐진다. 통영시가 거느렸다고 알려진 250여 개의 섬들이 말을 거는 듯한 태세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려들었다. 미륵산을 하산하는 길엔 미래사라는 작은 절간을 들른다. 그 옆으로는 수령이 적지 않은 편백나무가 빽빽이 숲을 이룬다. 사이로 호젓한 산책길이 나 있어 잠시 걷기로 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나뭇결이 뿜어내는 자연의 향내 를 맡는다. 눈과 마음이 온통 싱그럽다. 다시 눈을 바다에 적시고 싶어질 즈음, 도남관광단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 다. 그곳엔 이 고장의 랜드마크, 통영국제음악당이 위풍당당하게 자리한다. 이곳에선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이름을 딴 음악제가 매년 열리고, 그의 이름값에 어울리는 세계적인 명연주자들이 최고의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 곳을 다녀간 해외의 연주자들은 통영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 있어요. 이미 ‘윤이상의 고향’이자 ‘유려한 풍경을 간직한 해안 도시’로 제법 소문이 났죠.” 통영국제음악당 기획팀 이소엽의 호언은 틀리지 않았다. 창틀에 내린 롤스크 린을 끝까지 말아 올리자 과연 그의 말이 납득되는 풍경이 그려졌다. 호수처 럼 잔잔한 바다에 부드러운 포말을 그리며 항해하는 선적들의 모습. 그림 엽 서처럼 완벽한 구도다.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바로 이순신장 군이 학익진을 폈던 한산도 앞바다라는 사실 말이다. “밤이면 건너편 바다가 더 아름다워요. 조명에 물든 바다를 볼 수 있거든요. 매월 첫 금요일이면 2층 레스토랑에서 ‘재즈 나이트’가 열리는데, 그때 꼭 와보세요.”다음을 기약하기 전에, 바다의 도시에 와서 몸에 물 한번 닿지 못하고 가는 게 못내 아쉬웠다. 그렇다고 바다 수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뱃놀이라도 해볼 요량이다. 뒤로는 마파산, 앞으로는 작은 만을 끼고 있는 천혜의 장소에 아담한 리조트가 하나 있다. 산양읍의 한산마리나 호텔 & 리조트에 가면 그곳에서 보유한 4대의 요트를 탈 수 있다. 동해까지 나가는 요트 프로그램도 있 고, 항해 자격증이 있는 이들을 위해 선적을 대여하는 서비스도 있다. 잔잔한 바다가 아니라, 살아 펄떡이는 바다를 느끼려거든 도전해볼 만한 선택지다.

4 미래사 옆으로 뻗어난 편백나무 숲 오솔길. 걷노라면 온몸이 산뜻해진다.
미륵도에 새 아침이 밝았다. 숙소의 창가에도 햇살이 내려앉는다. 창가 건너 편에는 전혁림미술관이 어른거린다. 이곳은 북 스테이 아트 하우스, ‘봄날의 집’이다. 누구보다 충실한 통영 가이드가 되어준 책, <통영 예술 기행>의 출판 사 남해의봄날이 운영하는 공간이다. 여기 누워 있으면 밖으로 나가기가 싫 다. 눈을 어디에 두더라도 통영을 대표하는 예술가인 전혁림 화백, 그리고 그 의 아들인 전영근 화백의 작품이 아무렇지도 않게 걸려 있을뿐더러 손 닿는 데마다 통영의 장인들이 만든 가구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자리를 애써 물리고 본격적인 봉수골 산책에 나선다. 봉수골은 미륵산 초입 에 자리한 절, 용화사 아래로 펼쳐진 작은 동네다. 걷느라 못다 맛본 통영 굴, 제철이라는 물메기, 탕국에 밥을 비벼 먹는 통영식 비빔밥을 차례로 맛본다. 굴은 우유보다 달고, 물메기의 살은 솜처럼 연하디연하고, 비빔밥은 그 감칠 맛이 대단하다. 그리고 늦은 아침, 남해의봄날에서 운영하는 독립서점 ‘봄날 의책방’이 문을 빼꼼 열었다. <통영 예술 기행> 역시 이곳 서가 한편에 고요히 앉아 있다. 책거리를 하는 기분으로 여기서 책을 한 권 더 사들고 나왔다. 이 제부턴 나만의 통영 여행기를 새로 써내려갈 작정이다. 부는 바람이 봄처럼 부드럽다.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다.
5 남해의봄날에서 운영하는 독립서점 봄날의책방. 책방지기의 아기자기한 큐레이션이 눈길을 끈다.
6 통영국제음악당은 바다 풍경에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더했다.
7 남해의봄날에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봄날의집.
8 갈치조림과 꽁치회를 한 상에 차려낸 통영비빔밥 정식.
봉수골, 통영에 봄날을 불러온 마을
<2017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