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참깨 들깨 쏟아져
주근깨 자욱했는데
그래도 눈썹 좋고 눈동자 좋아
산들바람 일었는데
물에 떨어진 그림자 하구선
천하절색이었는데
일제 말기 아주까리 열매 따다 바치다가
머리에 히노마루 띠 매고
정신대 되어 떠났다
비행기 꼬랑지 만드는 공장에 돈벌러 간다고
미제부락 애국부인단 여편네가 데려갔다
일장기 날리며 갔다
만순이네 집에는
허허 면장이 보낸 청주 한 병과
쌀 배급표 한 장이 왔다
허허 이 무슨 팔자 고치는 판인가
그러나 해방되어 다 돌아와도
만순이 하나 소식 없다
백도라지꽃 피는데
쓰르라미 우는데
주제 : 만순이의 비극적인 삶과 민족의 고통
해제 : 일제 말기 '만순이'라는 특정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의 비극적인 삶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만순이'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지만, 일제 말기에 꽃다운 나이로 정신대에 끌려간 이 땅의 젊은 딸을 모두 일컫는 보통 명사이기도 하다. 나아가 '만순이'는 우리 민족의 비극을 온몸으로 짊어진 채 살아야 했던 이 땅의 말없는 민초들의 삶을 상징한다. '미제부락 애국 부인단 여편네'(친일 반역자)의 꼬임에 빠져 공장으로 돈벌러 간 '만순이'는 실제로는 일본군 위안부인 정신대가 되어 떠난 것이다.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만순이'는 아직도 진행형의 상태로 남아 있는 민족사의 가슴 아픈 상처로 기록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2.바람의 집-겨울 판화(版畵) 1--기형도
내 유년 시절 바람의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 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 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 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
*출처, 고교생 필독 수험추천시 목록-11 (이민영)
기형도(1962~1989), 연세대학교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 당선, 윤동주 문학상 수상
1989년 3월 7일 ,27세로 요절
" 우리들 어린 시절, 빈허의 그 곳에 대한 추억과 회고" 다
"겨울 판화"가 다가온다. 아, 몸서리 친다.
과거가 각인되는 아스름의 추억,
문풍지가 겨울의 방을 그리워하면,
차마 그 봉창고리를 잡지못하고 서성이는 바람일 때,
하얀 햇살이 마른 날 사랑을 그리워하게 될 때 겨울일때,
부삭마다 징검미의 손에 나의 그림자가 몽통하여
'산 것의 깔로 아궁이에게 친하다고 이야기할 때,
소죽 그리운 송아지처럼 나도 송아지 되어 땟물에 발바닥과 손바닥을 문지를 때,
가을이 가지못하고 해넘짝 들판에서 이삭들의 행진에
넝마를 진 짐진나그네가 쉬이 집으로 가는길에 서지못할 때,
그럴때, 그리워하지 않으려는 과거는 향수가 아닌 것이다.
"밤, 울음소리, 마른 손, 종잇장 같은 내 배,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 서리 等에 스며오는
한기寒氣"에 사랑을 테워 보낸다, 사랑이라 할까,
아 사랑이여, 회억해 지지않는 욕辱이여,
과거여, 이름 석자 하나도 내밀 수 없구나,
명함일 수 없는 그대여,각角의 그대에게 귀와 눈과 느낌을 내밀어 본다,
을씨년스러운 겨울 바람에 나도 같이
바람이 되어 "기형도의 판화"가 된다.
李旻影(시인)
주제 : 어린 시절 가난의 추억과 회고
해제 : 화자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극심한 가난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는 작품이다. ‘겨울 판화’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겨울’은 가난과 추위로 떨며 지내던 과거를 의미하고, ‘판화’는 화자의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는 추억을 의미한다. 이 시에서 화자는 과거를 향수의 대상으로 그리워하지 않는다. ‘밤, 울음소리, 마른 손, 종잇장 같은 내 배, 시래기 한 줌 부스러짐, 서리, 한숨’ 등의 시어에서 나타나듯 과거는 오히려 부정적이고 암울한 이미지로 그려져 있다. 촉각, 시각, 청각 등의 다양한 이미지를 동원하여 상황을 감각화시키고 있다. ‘바람’은 겨울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소재이다.
3.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 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고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신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 온 곳
우리의 옛 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 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주제: 순수한 열정의 상실과 속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성찰과 반성
해제: 순수했던 젊은 날의 열정과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 채 속된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중년 화자의 모습을 통해 세속적
가치에 매몰된 일상화된 삶을 비판하고 새롭게 자신의 삶을 성찰할 필요성을 노래한 작품이다. 4.19와 대통령의 암살이라는, 실제로 일어났던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들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1~9행: 올바른 정치를 추구했던 젊은 시절의 의기
10~19행: 순수한 마음과 정열을 가지고 살았던 젊은 시절의 삶
20~37행: 속된 삶을 살아가는 화자와 친구들의 만남
38~49행: 순수했던 젊은 시절의 의기를 잃은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
4. 노신(魯迅)--김광균
시(詩)를 믿고 어떻게 살아가나
서른 먹은 사내가 하나 잠을 못 잔다.
먼― 기적 소리 처마를 스쳐가고
잠들은 아내와 어린것의 베개맡에
밤눈이 내려 쌓이나 보다.
무수한 손에 뺨을 얻어맞으며
항시 곤두박질해 온 생활의 노래
지나는 돌팔매에도 이제는 피곤하다.
먹고 산다는 것,
너는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느냐.
등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담배를 피워 문다.
쓸쓸한 것이 오장을 씻어 내린다.
노신(魯迅)이여
이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상해(上海) 호마로(胡馬路) 어느 뒷골목에서
쓸쓸히 앉아 지키던 등불
등불이 나에게 속삭어린다.
여기 하나의 상심(傷心)한 사람이 있다.
여기 하나의 굳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주제: 가난으로 인한 현실적 어려움과 그 극복 의지
해제: 시를 쓰고자 하는 아내는 자식을 거느린 가장으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다. 그러나 비굴한 삶을 생각하지 않고 ‘노신’으로 표상되는 이상적 존재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소명감과 인생의 목표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즉, 노신을 떠올리면서 화자는 흔들리고 있는 마음을 다잡고 있는 것이다.
1~2행: 현실적 고통에 대한 한탄
3~13행: 생활고와 시인으로서의 사명감 사이에서의 갈등
14~21행: 노신을 생각하며 현실 극복 의지를 다짐
5. 성호부근/김광균
1
양철로 만든 달이 하나 수면(水面) 위에 떨어지고,
부서지는 얼음 소리가
날카로운 호적(胡笛)같이 옷소매에 스며든다.
해맑은 밤 바람이 이마에 내리는
여울가 모래밭에 홀로 거닐면
노을에 빛나는 은모래같이
호수는 한포기 화려한 꽃밭이 되고,
여윈 추억의 가지가지엔
조각난 빙설(氷雪)이 눈부신 빛을 발하다.
2
낡은 고향의 허리띠같이
강물은 기일게 얼어붙고
차창에 서리는 황혼 저 머얼리
노을은
나어린 향수처럼 희미한 날개를 펴고 있었다.
주제: 강물을 보며 떠올린 쓸쓸한 추억
해제: 시각적 영상으로 달빛이 호젓하게 비친 차가운 겨울 호수의 풍경을 스케치하듯 그렸다. 제1장에서는 달빛이 비친 황량하고 고독한 겨울 호수의 모습을, 2,3연에서는 달빛이 강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빛나는 광경을 읊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조각난 빙설이기에 더 화려한 빛을 발하듯이, 아픈 추억이기에 더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제2장에서는 그러한 광경을 두고 떠나는 장면이 제시된다. ‘낡은 고향’은 떠나온 고향, 삶의 쓸쓸함에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먼 기억 속의 고향이다. 허리띠처럼 가느다란 강물은 여위고 쓸쓸한 느낌을 주고, 이 소멸의 이미지는 고향의 낡은 이미지와 결부된다. 떠나는 차 안에서 보는 황혼은 또 희미하게 펼쳐지면서, 어린 날의 아득한 향수를 쓸쓸히 떠오르게 한다. 회화적 이미지 구사로 잘 알려진 시인 특유의 비유 형상 능력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6. 연륜(年輪)/김기림
무너지는 꽃이파리처럼
휘날려 발 아래 깔리는
서른 나문 해야
구름같이 피려던 뜻은 날로 굳어
한 금 두 금 곱다랗게 감기는 연륜(年輪)
갈매기처럼 꼬리 덜며
산호(珊瑚) 핀 바다 바다에 나려앉은 섬으로 가자
비취빛 하늘 아래 피는 꽃은 맑기도 하리라
무너질 적에는 눈빛 파도에 적시우리
초라한 경력을 육지에 막은 다음
주름 잡히는 연륜(年輪)마저 끊어버리고
나도 또한 불꽃처럼 열렬히 살리라
주제: 열정적인 삶의 추구해제: 시의 화자는 서른 몇 해의 인생을 `무너지는 꽃이파리처럼 휘날려 발 아래 깔리는' 나이라고 제 1연에서 표현했다. 이는 덧없다는 뜻이다. 제 2연에 이르면 `구름같이 피려던' 뜻을 펼치지 못하고 굳어 나이테가 되고 있다고 했다. 이 시에서 연륜은 좋은 뜻이 아니다. 그것은 활력을 잃고 화석처럼 굳어져 버린 삶의 남은 자욱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제 3연에서 보듯이 시의 화자
는 비약을 꿈꾼다. 그 비약의 꿈은 산호 핀 바다에 내려앉은 섬으로 떠나가는 것이다. 그곳에는 비취빛 하늘이 있고, 맑은 꽃이 피고, 눈빛 파도가 있다. 육지에서 쌓은, 자랑스럽지 못한 초라한 경력, 곧 연륜은 이곳에서 사라지고, 그곳에서 그것을 태우는 `불꽃처럼 열렬히 살리라'고 다짐한다.
1연: 발 아래 깔리는 꽃잎 같은 서른 몇 해의 인생
2연: 뜻을 펼치지 못하고 굳어가는 연륜(나이테)
3연~5연: 열정적인 삶의 추구
7. 국경(國境)의 밤/김동환
1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外套) 쓴 검은 순사가
왔다― 갔다―
오르명 내리명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密輸出) 마차를 띄워 놓고
밤 새 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던 손도 맥이 풀려서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北國)의 겨울밤은 차차 깊어 가는데.
2
어디서 불시에 땅 밑으로 울려 나오는 듯
“어―이” 하는 날카로운 소리 들린다.
저 서쪽으로 무엇이 오는 군호(軍號)라고
촌민(村民)들이 넋을 잃고 우두두 떨 적에,
처녀(妻女)만은 잡히우는 남편의 소리라고
가슴을 뜯으며 긴 한숨을 쉰다.
눈보라에 늦게 내리는
영림창(營林廠)* 산림(山林)실이 벌부(筏夫)*떼 소리언만.
3
마지막 가는 병자(病者)의 부르짖음 같은
애처로운 바람 소리에 싸이어
어디서 ‘땅’ 하는 소리 밤하늘을 짼다.
뒤대어 요란한 발자취 소리에
백성들은 또 무슨 변(變)이 났다고 실색하여 숨죽일 때
이 처녀(妻女)만은 강도 채 못 건넌 채 얻어 맞는 사내 일이라고
문비탈을 쓰러안고 흑흑 느껴 가며 운다.
겨울에도 한삼동(三冬), 별빛에 따라
고기잡이 얼음장 끄는 소리언만.
주제: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비극
해제: 이 시는 두만강 유역 국경 지대를 배경으로 하여, 일제에 쫓기어 밀수꾼이 되거나 만주나 간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불안과 참담한 현실을 향토색 짙은 민요적 표현을 빌어 노래하고 있다.
전 3부 72장 893행의 긴 분량이지만,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전체의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부 (1 - 27장) : 설이 가까운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두만강 유역의 국경 마을에서 한 여인(순이)이 소금 밀수출 마차를 끌고 강
건너로 간 남편(병남)을 걱정하고 있다. 저녁 무렵, 한 청년이 나타나 그 여인의 오두막을 두드리며 주인을 찾는다.
2부 (28 - 57장) : 그 청년은 여인이 어렸을 때 함께 소꿉놀이 하던 친구로, 두 사람은 차차 연정을 느끼는 관계로 발전하였으나, 재가승(在家僧)인 여진족의 후예인 순이는 다른 혈통의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부족의 관습에 따라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고, 사랑 잃은 소년은 마을을 떠난다. 그 소년이 8년 뒤에 순이 앞에 나타난 것이다.
3부 (58 - 72장) : 청년은 이제 남의 아내가 된 순이에게 다시 구애(求愛)의 손을 내미나, 순이는 남편에 대한 도리와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들어 이를 거절한다. 그 때, 밀수출을 나갔던 그녀의 남편은 마적들의 총을 맞고 죽은 시체가 되어 돌아온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참담한 현실과 쫓기는 자, 소외된 자의 비극적 좌절 체험을 국경 지방의 겨울밤에서 느껴지는 삼엄하고 음산한 분위기와 극적 상황 설정을 통해 제시하고자 했던 이 작품은 제목에서 연상되는 것만큼 일제 하의 민족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못한 탓으로, 차라리 국경 지방을 배경으로 하여 펼쳐지는 세 남녀의 낭만적 사랑과 비극의 서사시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족한 역사 의식으로 인해 본격적인 서사시에는 다소 적합하지 못하더라도, 작품의 주제나 제재가 개인의 단순한 정서 표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사와 그 운명에 대해 치열한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1920년대 감상적인 낭만주의 시단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것만은 분명하다.
8. 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淫蕩)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悠久)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 수용소의 제십사 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비명(悲鳴)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 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장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장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洞會)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주제: 소심하고 옹졸한 자아에 대한 반성과 비판
해제: 이 시는 시인 자신의 소시민적 의식을 진솔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담담한 고백조와 반성적 어조로 산문적 진술을 사용하며 자신의 삶을 차분하게 술회하고 있다. 커다란 부정과 불의에는 대항하지 못하면서도 사소한 것에만 흥분하고 분개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봄으로써 마침내 시인은 자기 모멸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 또한, ‘절정 위에는 서 있지 /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 서 있’는 자신의 방관자적 자세를 확인한 그는 ‘모래’․‘풀’․‘바람’보다도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를 비판, 반성하게 된다. 불의한 현실에 정면으로 대적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 의식을 폭로, 고발함으로써 진지한 자기 반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1연: 조그만 일에 분개하는 나
2연: 부당한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아의 반성
3연: 옹졸하고 소심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과거의 자아
4연: 점점 소심해지는 자아
5연: 절정에서 벗어나 있는 현재의 삶
6연: 옹졸한 반항을 해 왔던 자아
7연: 작고 미미한 존재와 같은 자아에 대한 자책과 반성
9. 폭포(瀑布)/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楕)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핵심정리]
특징:반복에 의한 운율 형성과 주제의 강조
주제:부정적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준열한 삶의 의지
이 시는 자유당 독재 정권으로 인해 자유가 억압당하고 인권이 유린된 채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현실 상황에서 양심 있는 세력의 곧은 목소리를 갈구하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부정적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용기 있게 올바른 소리를 하여,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소시민의 의식을 일깨우는 지성인의 삶의 태도가 형상화된 이 시는 '폭포'라는 자연의 현상에 접해서도 일상적 영탄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여 추상적 의미로 전환함으로써 관념화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암담한 현실과 맞서는 양심 있는 자의 진실된 목소리를 갈구하는 시인의 강렬한 의식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연: 폭포의 외적인 모습
2연: 폭포의 내적인 속성 - 고매한 정신
3,4연: 폭포의 선구자적 행동
5연: 폭포의 거대한 힘과 절제 의지
10. 풀/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은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강한 생명력을 지닌 생명체로서 오랜 역사 동안 권력자에게 천대받고 억압받으면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맞서 싸워온 민중, 민초(民草)를 뜻하며, 이와 반대로 ‘바람’은 풀의 생명력을 억누르는 세력, 곧 민중을 억압하는 사회적 힘[독재권력, 외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바람에 의해 눕는 풀의 수동성과 바람에 앞서는 풀의 능동성, 그리고
바람을 넘어서는 풀의 넉넉한 생명력을 통해 민중의 끈질긴 저항과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11. 들국/김용택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 오는데 뭔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걸리면 뭐헌다요
마른 지푸라기 같은 내 마음에
허연 서리만 끼어가고
저 달 금방 져불면
세상 길 다 막혀 막막한 어둠 천지일 턴디
병같이, 바보 천치같이
이 가을 다 가도록
서리밭에 하얀 들국으로 피어 있으면
뭐헌다요, 뭔 소용이다요.
주제: 임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의 안타까움
해제: 이 시는 ‘들국’을 소재로 하여 임에 대한 시랑과 그리움, 기다림과 절망을 보여 주고 있다. 반복되는 ‘뭐헌다요, 뭔 소용이다요’라는 서술어를 통해 임에 대한 원망과 안타까움, 아쉬움 등이 효과적으로 드러나 있다. 또한 ‘단풍, 억새, 초생달, 하얀 들국’ 등의 아름다운 자연의 이미지와 ‘마른 지푸라기, 허연 서리, 어둠’ 등의 이미지로 제시된 화자의 암담한 마음이 대조를 이루면서 화자의 고통이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1~3행: 고운 단풍 및 물빛과 대조된 화자의 마음
4~9행: 부질없는 기다림
10~15행: 화자의 고통스럽고 막막한 심정
16~19행: 소용없는 기다림에 대한 허망함
12. 성탄제(聖誕祭)/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주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
해제: 이 시의 화자는 열병을 앓던 자신을 위해 눈 속을 헤치고 약을 구해 오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 형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옛 것’이 사라진 삭막한 도시에서 ‘눈’을 보며 사랑으로 충만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반추하게 된다.
구성
1~2연: ‘나’의 위급한 상황
3~4연: ‘나’를 위한 아버지의 정성
5~6연: 새로운 구원
7~8연: 삭막한 도시의 현실
9~10연: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그리움
13. 의자/김종문
내가 서양 문명의 혜택을 입었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 의자이다.
그렇지만 나의 의자는
바로크풍이나 로마네스크풍과는 거리가 멀고
더욱이 대감들이 즐기던 교의 따위도 아니다.
나의 의자는 강원도산 박달나무로
튼튼한 네 다리와 두터운 엉덩판과 가파른 등이
나의 계산에 의해 손수 만들어졌고
칠이라고는 나의 손때뿐이다.
나의 의자는
나의 무게를 저울보다는 잘 알고 있고
나의 동작 하나 하나에 대해 민감하며
나의 거칠어지는 피부를 어루만질 줄 안다.
나의 고독은 나의 의자와의 교감이기에 고독이 아니고
나의 독백은 나의 의자와의 대화이기에 독백이 아니다.
낮을 밤에 이어 시를 쓰노라면
나의 의자에서 시가 우러나며
나의 다리, 나의 엉덩판, 나의 등이 되어
때로는 지하 8척 아래로, 때로는 구중의 탑 위로
나를 운반하지만
나의 의자는 항시 제자리에 있다.
나의 의자는 세계의 축, 나의 만세반석이다.
세상에는 빈 것이 하도 많지만
나의 의자는
비록 공석중이라도 비어 있지 않다.
주제: 의자와의 교감을 통해 느끼는 소박한 삶의 즐거움
해제: 시인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자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드러낸 작품이다. 시인은 의자에 앉아 시를 짓는다. 그 의자는 강원도
산 박달나무로 만들어 칠조차 하지 않은 소박한 것이지만, 시적화자는 만족한다. 화자는 의자에 앉아 사색을 하고 그 결과를 시로써 표현한다. 시적 화자에게 의자는 교감의 대상으로 그의 몸의 일부이며 친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1~5행: 나만의 의자
6~10행: 내 의자의 생김새
11~16행: 나와 의자의 교감
17~23행: 모든 것의 중심인 나의 의자
24~26행: 공석 중에도 비어 있지 않는 나의 의자
14. 무화과/김지하
돌담 기댄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섰다.
내겐 꽃 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 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 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주제 : 현실의 고통과 절망 초월
해제 : 무화과의 생태에서 인간의 내적 가치를 발견하고 있는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친구가 술을 먹고 고통스러워하자 다른 친구가 그를 위로하며 달랜다는 단순한 서술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심층적으로 보면 ‘나’와 ‘나’의 내면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으로 읽을 수가 있으며, 이렇게 읽으면 ‘무화과’는 한 인간의 내면적 성숙과 자기 성찰을 환기하는 상징적 소재가 된다.
15. 김혜순, '납작납작-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드문 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가끔 심심하면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고
가이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가이 없이 : 끝없이
주제 : 서민들의 삶에 대한 연민과 현실 고발
해제 : 이 시는 박수근의 그림을 보고 시적으로 변용시킨 작품이다. 따라서 시 속의 내용은 박수근의 그림 속의 내용이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아낙네를 납작납작하게 눌렀다는 것은
그만큼 서민들의 삶이 고단하고 억눌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라고 묻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현실적 모순을 고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6.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주제 : 시련과 고난 속에서의 성숙
해제 : 이 시는 꽃을 통하여 시련과 고난 속에서 성숙하는 사랑과 삶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흔들린다는 것과 젖는다는 것은 삶의 시련과 고난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결실을 이루기까지 걸어야 하는 험난한 삶의 길을 나타낸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없고,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없다는 것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성숙되어 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17. 겨울 일기/문정희
나는 이 겨울을 누워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염주처럼 윤나게 굴리던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문 한번 열지 않고
반추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나는 누워서 편히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 겨울.
주제: 임을 잃어버린 슬픔
해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느끼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화자는 겨울 동안 ‘누워서 편히 지냈다’고 한다. 이처럼 화자는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반어적으로 표현하여, 절망적 정서를 더욱 부각하고 있다.
1연: ‘나’가 처한 상황
2연: 홀로 고립되어 있는 ‘나’
3연: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잠긴 ‘나’
18. 박남수,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방공호 위에
어쩌다 핀
채송화 꽃씨를 받으신다.
호(壕) 안에는
아예 들어오시질 않고
말이 숫제 적어지신
할머니는 그저 노여우시다.
―― 진작 죽었더라면
이런 꼴
저런 꼴
다 보지 않았으련만…….
글쎄 할머니,
그걸 어쩌란 말씀이셔요.
숫제 말이 적어지신
할머니의 노여움을
풀 수는 없었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인젠 지구가 깨어져 없어진대도
할머니는 역시 살아 계시는 동안은
그 작은 꽃씨를 받으시리라.
주제 : 전쟁의 폭력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
해제 : 이 시는 꽃씨를 받으시는 할머니의 정성스러운 모습(애정의 숭고함)과 방공호 속으로 대피해야 하는 상황을 대조시켜 전쟁의 비정함과 야만스러움을 드러냄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와 그의 할머니는 함께 방공호에 대피해야 할 상황에 있다. 그런데 할머니는 방공호 위에 피어 있는 채송화에서 꽃씨를 받고 있다. 여기서 포탄 하나가 떨어져도 쑥대밭이 되어 버릴 ‘방공호 위’ 공간은 전쟁의 포화 속에 놓인 인간의 위태로운 상황을, ‘꽃씨’는 전쟁의 비극을 넘어서는 휴머니즘적 희망을 상징한다.
19. 박목월, '가정'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주제 : 어설픈 가장으로서의 시인이 겪는 아픔
해제 : 저녁 무렵 가정으로 귀가하는 시인의 심정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화자는 시인이지만 동시에 가족을 거느린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하다. 시인에게 지상은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 올린 곳이고,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이 있는 곳이다. 이러한 지상에서 시인은 어설픈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
20. 박목월, '길처럼'
머언 산 굽이굽이 돌아갔기로
산 굽이마다 굽이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뵈일 듯 말 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 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 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주제 : 임에 대한 그리움
해제 : 이 시는 ‘그리움’이라는 지배적 인상이 곧 주제가 되고 있다. 특히 길을 가는 나그네의 모습을 통해 그리움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길이 실낱같이 가늘면 가늘수록 그리움은 더 깊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운 것은 산울림이 멀리 울려 나가고 산울림이 홀로 돌아 나가기 때문이다.
21. 박목월 - 만술아비의 축문
아배요 아배요
내 눈이 티눈인 걸
아배도 알지러요
등잔불도 없는 제삿상에
축문이 당한기요
눌러 눌러
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가이소
윤사월 보리고개
아배도 알지러요
간고등어 한 손이믄
아배 소원 풀어드리련만
지승길 배고플라요
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묵고 가이소
여보게 만술아비
니 정성이 엄첩다
이승 저승 다 다녀도
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
망령도 감응하여, 되돌아가는 저승길에
니 정성 느껴 느껴 세상에는 굵은 밤이슬이 온다
주제: 아버지에 대한 사랑
해제: 이 시는 현세적 삶을 넘어서서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오가는 인정의 교감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적 속신(俗信)에 바탕을 둔 인정의 세계는 ‘한(恨)’의 정서와 연결되어 있다. 화자는 정성과 효심이 넘치지만 무식하고 가난한 농민이기에, 그가 차일 수 있는 제사상은 소금에 밥 한 그릇뿐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의 마음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어 아버지에게 전달된다. 저승에서 제사상을 받으러 찾아온 아버지의 망령은 아들의 정성에 감동 받아 저승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굵은 눈물을 흘린다.
1연: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
2연: 아들의 정성에 대한 아버지의 감응
22. 박목월, ‘모일’
시인이라는 말은
내 성명 위에 늘 붙는 관사
이 낡은 모자를 쓰고
나는/ 비 오는 거리를 헤매었다.
이것은 전신을 가리기에는
너무나 어줍잖은 것
또한 나만 쳐다보는
어린 것들을 덮기에도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것
허나, 인간이
평생 마른 옷만 입을까부냐
다만 두발이 젖지 않는
그것만으로 / 나는 고맙고 눈물겹다.
주제: 빈곤한 삶에 대한 자족적 태도
해제: ‘시인’이라는 ‘낡은 모자’는 시인르로서 화자의 생활이 꽤 오래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갈수록 생활 여건이 호전되는 것은 없고 오히려 가족이나 자신에게 때로는 짐이 된다고 느낀다. 그런 속에서도 화자는 머리가 젖지 않은 정도만으로 고마움을 느낀다고 감사하고 있다.
23. 박봉우, '휴전선'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을 끝끝내 하나인데 ……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流血)은 꿈같이 가고 지금은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주제 : 분단 현실의 냉철한 인식을 통한 민족 화해, 분단 극복의 필요성 역설 및 열망
해제 : 이 시는 6.25의 참상과 휴전, 분단의 비극적 상황을 실감나게 하는 현실 고발적인 시다. 60년대 반공 이데올로기의 열악함 속에서도 시인의 강인한 의지를 표출하여, 민족의 대화와 화해만이 공존의 길임을 보여준다. 이 시는 분단의 역사적 상황을 단순히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설의적 표현과 수미상관의 기법으로 극복되어야 할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1연 : 남북 분단으로 대립된 역사적 상황 제시
2연 : 팽팽한 긴장으로 대립하고 있는 분단의 현실
3연 : 남북 분단으로 인한 민족 역사의 쇠퇴
4연 : 동족 상잔의 비극이 재발할 것에 대한 불안감
5연 : 분단의 역사적 상황을 극복하려는 소망
24. 박성룡, ‘과목(果木)’
과목에 과물(果物)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 붉은 황토에
가지는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멸렬(滅裂)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 흔히 시를 읽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서 시력을 회복한다.
주제: 과목에서 느끼는 삶의 의욕
해제: 가을날 무르익어 있는 과일 나무의 과일을 보며 거기에 내재해 있는 정신적 의미를 이끌어 내고 있다. 자연의 섭리에서 느끼는 경이로움 앞에서 화자는 그것을 '사태(沙汰)'라 하고 또 이를 두고 '경악(驚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시어를 통해 주제를 압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25. 박성룡, 교외(郊外) 3
바람이여.
풀섶을 가던, 그리고 때로는 저기 북녘의 검은 산맥을 넘나들던
그 무형(無形)한 것이여,
너는 언제나 내가 이렇게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 있을 땐
와 흔들며 애무했거니,
나의 그 풋풋한 것이여.
불어 다고,
저 이름 없는 풀꽃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아직은 이렇게 가시지 않았을 때
다시 한 번 불어다오, 바람이여,
아, 사랑이여.
주제 : 생기와 활력이 있는 삶
해제: 화자는 ‘교외1’에 나타난 것처럼 ‘무모한 생활(도회지의 삭막한 생활)’에 젖어 생기를 잃어버린 상태로 살아온 인물이다. 그렇기에 화자는 ‘교외2’에서 ‘풋물 같은 것’에 젖어들고 싶은 마음을 가진다. 화자는 바람을 맞으면서 그간 ‘나뭇가지’처럼 굳어 있던 자신의 모습에 활력을 되찾는다. 따라서 ‘바람’은 화자로 하여금 생의 활력을 느끼게 하는 매개물이 된다.
26. 박제천, ‘월명’
한 그루 나무의 수백 가지에 매달린 수만의 나뭇잎들이 모두 나무를 떠나간다
수만의 나뭇잎들이 떠나가는 그 길을 나도 한줄기 바람으로 따라
나선다
때에 절은 살의 무게 허욕에 부풀은 마음의 무게로 뒤쳐져서 허둥거린다
앞장서던 나뭇잎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쩌다 웅덩이에 처박힌 나뭇잎 하나 달을 싣고 있다
에라 어차피 놓친 길 잡초 더미도 기웃거리고 슬그머니 웅덩이도 흔들어 놀밖에
죽음 또한 별것인가 서로 가는 길을 모를 밖에.
주제: 삶에 대한 성찰과 죽음에 대한 관조
해제: 향가 ‘제망매가’를 떠올리며 쓴 시이지만 ‘제망매가’의 경우 누이의 요절이라는 화자의 구체적 체험이 시상의 출발인 데 반해, 이 작품은 무수히 떨어지는 나뭇잎과 바람의 관념적인 상징으로 처리한 인간은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시상의 출발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1~2행: 나무를 떠나가는 나뭇잎들(모든 인간)과 바람(나)
3~4행: 허둥거리는 나와 웅덩이에 처박힌 나뭇잎 하나
5~6행: 죽음에 대한 달관의 자세
27.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사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주제 : 나타샤에 대한 그리움
해제 : 눈이 푹푹 내리는 밤을 배경으로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시며 환상에 잠겨 있는 화자의 내면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화자는 아름다운 나타샤와 함께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 마가리에 가 살고 싶다는 소망을 표출하고 있는데, 이것은 더러운 세상 속에서의 삶을 힘겨워하는 시인의 고결하고도 순수한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28.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삿-삿자리의 준말.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딜옹배기-둥글넙적하고 아가리가 넓게 벌어진 질그릇. 질옹자배기
*북덕불-짚이나 풀 따위를 태워 담은 화톳불. 북더기불
*쌔김질-새김질
*갈매나무-갈매나뭇과에 속한 좀나무. 키는 2 m쯤 되고 가지에 가시가 나며, 잎은 넓은 바소꼴이며 톱니가 있다. 열매는 '갈매' 또는 '서리자'라 하여 약재나 물감으로 쓴다.
주제: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슬픔과 그 극복에 대한 새로운 희망
해제: 가족과 떨어져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화자의 모습과 비극적인 정서는 점차로 순화되고 결국 새로운 희망으로 전환된다. 백석
시에 있어서 운명론적 정조를 간직한 풍경들은, 실은 '높고 외로운 자아, 곧 고향 혹은 여성상으로부터 이탈된 자가'가 그 고독을 견뎌내는 풍경이다. 이 때의 '고독'이란, 자신과 몇몇 특별히 고독한 인간들에게 한정된 특수한 사회적 정황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불가피하고도 중심적인 현상, 곧 보편적인 인간 조건인 것이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중국 등지를 떠돌아 다니며 쓴 백석의 시로서 고향을 떠난 화자가 유랑, 방황의 삶의 살다가 어느 집에 더부살이 하면서 당대 지식인으로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며 굳세고 깨끗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것이다.
1∼8행-외로운 떠돌이 신세가 됨
9∼15행-지나온 삶에 대한 성찰
16∼19행-현실에 대한 비탄과 회한
20∼32행-새로운 삶의 다짐
29. 논개/변영로
거룩한 분노(憤怒)는
종교(宗敎)보다도 깊고
불 붙는 정열(情熱)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魂)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제재-논개의 의로운 죽음
주제-논개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절개
[짜임]
1연-논개의 절절한 마음
2연-논개의 아름다운 자태와 죽음에의 용기 예찬
3연-논개의 아름다운 넋을 기림
주제: 논개의 헌신적인 애국심
해제: 이렇게 소박한 주제가 비유의 기교로 적절한 감동을 일게 한다. 그러나 단지 역사적 사실을 노래했다는 것 자체로 이 시의 감상이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개의 충절은 당대, 즉 일제 강점기에 민족적 정기를 고취하려는 것으로 재해석된다.
이 시는 먼저 1연에서 죽음을 결심한 논개의 분노와 정열을 노래하고, 2연에서 죽음의 순간에서 선 논개의 모습, 3연에서 논개의 죽음 이후에 흐르는 푸른 강물을 각각 노래하고 있어서 시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헤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라는 반복되는 후렴구는 민족사의 영원성과 그 위에 흐르는 논개의 충성심을 색채감으로 형상화하여 단순하지만 적절한 감동을 유발하고 있다.
30. 서정주,‘신발’
나보고 명절날 신으라고 아버지가 사다 주신 내 신발을 나는 먼 바다로 흘러내리는 개울물에서 장난하고 놀다가 그만 떠내려 보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 내 이 신발은 벌써 변산 콧등 밑의 개 안을 벗어나서 이 세상의 온갖 바닷가를 내 대신 굽이치며 돌아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어서 그것 대신의 신발을 또 한 켤레 사다가 신겨 주시긴 했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용품일 뿐, 그 대용품을 신고 명절을 맞이해야 했었습니다.
그래, 내가 스스로 내 신발을 사 신게 된 뒤에도 예순이 다 된 지금까지 나는 아직 대용품으로 신발을 사신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 그대로 있습니다.
주제: 본원적 존재에 대한 그리움
해제: 이 시에서 화자는 아버지가 명절 선물로 사준 신발을 잃어버린다. 화자는 이런 어린 시절의 체험을 통해서 ‘본원의 것’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여기서 ‘신발’은 ‘어린 시절의 꿈’이나 ‘순수의 이상 세계’ 혹은 사물의 원초적 기억을 바탕으로 한 ‘원형 이미지’를 상징한다. 화자는 이런 자신의 체험을 통해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겪에 되는 상실감의 근원을 밝히고 있다.
1~3행:아버지가 사준 신발을 잃어버림
4~5행:아버지가 다시 사준 신발을 신고 명절을 맞음
6~7행:어른이 된 지금도 대용품으로 신발을 사서 신음
31. 다시 밝은 날에/서정주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랑이 같았습니다.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져 날으는 아기구름 같았습니다.
신령님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 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 때
나는 미친 회오리바람이 되었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벼랑의 폭포,
쏟아져 내리는 소나기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령님 .
바닷물이 작은 여울을 마시듯이
당신은 다시 그를 데려가고 그 훠 - ㄴ한 내 마음에
마지막 타는 저녁 노을을 두셨습니다.
그리고는 또 기인 밤을 두셨습니다.
신령님
그리하여 또 한 번 내 위에 밝는 날
이제
산골에 피어나는 도라지꽃 같은
내 마음의 빛깔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제재 이별한 뒤의 춘향
주제 자신의 사랑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
해제: ‘춘향전’에 나오는 ‘순향’을 소재로 한 시로 이별한 후에 재회의 날을 간절히 소망하며 자신의 사랑을 굳게 지키겠다는 의지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계절감이 드러나는 시어를 적절하게 구사하여 정서를 드러낸 것이 인상적이다.
1연: 그를 만나기 이전의 춘향의 평화롭고 순수한 마음
2연: 그를 만난 이후의 사랑의 열정
3연: 이별의 아픔을 겪은 허전한 마음
4연: 춘향의 사랑과 기다림
32. 무등(無等)을 보며/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주제 : 가난을 이겨내 보고자 하는 신념과 긍지
해제: 이 시는 서정주 초기시에 보이던 강렬한 생명의 솟구침이 가라 앉고, 화해와 달관의 세계로 나아간 1950년대 작품이다. 1954년경 광주 조선대학교 교수로 있었던 그는 6.25의 상처와 물질적 궁핍이 극심한 가운데 무등산(無等山)의 크고 의젓한 자태를 삶의 모형으로 삼아 이 시를 썼다.
가난이라는 것은 우리 몸에 걸친 헌 누더기 같은 것일 뿐 그 속
에 있는 몸과 마음의 근원적인 순수성까지를 덮어 가리지 못한다는 것이 작품 전체를 떠받치는 바탕이다.
33. 송수권, '산문(山門)에 기대어'
누이야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로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多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 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주제 : 누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부활의 의지
해제 : 이 시는 죽은 누이에 대한 그리움과 한(恨)을 새로운 만남에 대한 소망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현재'에서 '과거'를 되돌아 보는 회상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 회상의 매개는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낱'이다. 화자는 산사의 입구에서 단풍이 든 가을 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지켜보다 문득 죽은 누이를 떠올리고 누이의 삶과 한을 회상하며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옴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누이와 재회하게 될
것을 불교적 윤회의 관점에서 기대하게 된다. 살아서 만날 수야 없겠지만, 내세에서 누이와의 만남을 기대하는 것이다. 나아가 누이와의 만남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하게 됨으로써 죽은 누이의 부활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34. 송찬호, '구두'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주제 : 영혼의 자유로운 비상
해제 : 비약적으로 변주되는 ‘구두’의 이미지가 독특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구두’는 가죽으로 만든 ‘새장’으로, ‘작은 감옥’으로 변주된다. 이렇게 보면 구두는 갇혀진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은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작구 부드러운 구두는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구두는 ‘구름’위에 올려진 한 척의 ‘배’로 변주되고, 이어서 ‘새의 육체’가 된다. 구름의 자유로운 형상과 배의 항해 이미지를 통해 새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영혼의 비상을 꿈꾸는 것이다.
35. 신경림, ‘목계장터’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산서리 맵차거던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던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지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주제: 세속과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유랑하고픈 소망
해제: 일상적 삶의 구속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며 살아가고픈 마음을 드러낸 작품이다. 자연의 이미지와 민중의 삶의 이미지들을 통해 삶의 애환을 그려냈으며, 방랑과 정착 사이의 갈등도 드러내고 있다.
36. 산에 언덕에/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주제: 그리운 이의 부활에 대한 소망
해제: 이 시는 이미 죽어 얼굴을 볼 수도 없고, 노래를 들을 수도 없는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그’가 추구하던 소망과 신념이 언젠가는 실현되리라는 확신을 표현한 작품이다. 즉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산에, 언덕에, 들에 화사한 꽃과 숨결로 남아 있기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37. 신동엽, '종로 5가'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群像) 속에서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
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漁村)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娼女)가 양지 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를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半島)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李朝) 오백 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北間島)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 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그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주제 : 농촌을 떠나온 도시 빈민의 고통과 비애
해제 : 이 시는 산업화가 진행되던 1960년대에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농민들이 도시에서 노동자나 거리의 여자로 변해 가는 모습을 형사오하하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는 종로 5가 신호등 앞에서 동대문을 묻는 한 소년과의 만남을 꼐기로 당대 민중들의 비참한 운명을 들여다본다. 역시 노동자 계급인 화자('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으로 화자의 처지를 유추할 수 있음)의 눈에 비친 현실은 '이슬비 오는 날'로 시작하여 '비에 젖고 있었다'로 끝나는 작품의 어두운 분위기만큼 침울하고 고통스럽다.
주제: 광활한 자연 앞에서 느끼는 인간의 허무함
해제: 돌팔매라는 행위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적 화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존재의 순간성과 허무함이다. 화자는 ‘허무함’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시각적 구상화를 통해 시로 표현하고 있다. 화자는 눈앞에 전개되는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허무함의 의미를 드러낸다. 즉, 화자의 정서나 관념의 투사 없이 감각적 형상만으로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화자는 욕망과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또다시 도전하고 절망에 잠기는 것이 인생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기에 ‘돌팔매’는 대자연 앞에서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의욕이나 의지를 상징하는 말이다.
1연: 허무에 대한 도전
2연: 도전의 순간성과 미약성
3연: 자연의 힘에 대한 경이로움과 인간적 허무감의 인식
39. 안도현, ‘석류’
마당가에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고 나서
나도 지구 위에다 나무 한 그루를 심었노라,
나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몰랐지요.
그때부터 내 몸은 근지럽기 시작했는데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석류나무도 제 몸을 마구 긁는 것이었어요.
새 잎을 피워 올리면서도 참지 못하고 몸을 긁는 통에
결국 주홍빛 진물까지 흐르더군요.
그래요, 석류꽃이 피어났던 거죠.
나는 새털구름의 마룻장을 뜯어다가 여름내 마당에 평상을 깔고
눈알이 붉게 물들도록 실컷 꽃을 바라보았지요.
나는 정말 좋아서 입을 다물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가을이 찾아왔어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입을 딱, 벌리고 말이에요
가을도, 도대체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주제: 시련과 고통의 과정을 겪은 후의 성숙한 자아에 대한 만족감
해제: 이 시는 석류나무와 화자를 동일시하고 있다. 마당가에 석류나무를 심어 놓고 그 성장과 결실의 과정을 통해 한 인간의 성숙의 과정을 비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석류나무가 꽃을 피우기 위해 제 몸을 긁고 주홍빛 진물까지 흘리는 고통은, 인간의 정신적 갈등이나 시련의 과정을 통한 자아의 성숙과 의미적으로 통하는 시적 발상이다. 석류나무가 가려워 제 몸을 긁으며, 입을 벌리고 열매를 드러낸다는 재미있는 상상력으로 인간 내면의 성숙을 노래한 것이다.
구성
1~3행: 석류나무를 심고 좋아함
4~8행: 석류나무의 근지러움
9~11행: 피어난 석류꽃을 보고 좋아함
12~14행: 입을 벌리고 열매를 드러낸 석류
40.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다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주제: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
해제: 부정적이고 힘든 세상에서 함박눈이 되고 싶은 소망을 노래하고 잇다. 따라서 함박눈은 진눈깨비와는 달리 힘들고 상처받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대상을 의미한다. 즉,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위로와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노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1. 유치환, '귀고(歸故)'
검정 사포를 쓰고 똑딱선(船)을 내리면
우리 고향(故鄕)의 선창가는 길보다도 사람이 많았소.
양지 바른 뒷산 푸른 송백(松柏)을 끼고
남(南)쪽으로 트인 하늘은 깃발(旗)처럼 다정(多情)하고
낯설은 신작로 옆대기를 들어가니
내가 트던 돌다리와 집들이
소리높이 창가하고 돌아가던
저녁놀이 사라진 채 남아 있고
그 길을 찾아가면
우리 집은 유 약국(藥局)
행이불언(行而不信) 하시는 아버지께선 어느덧
돋보기를 쓰시고 나의 절을 받으시고
헌 책력(冊曆)처럼 애정(愛情)에 낡으신 어머님 옆에서
나는 끼고 온 신간(新刊)을 그림책인 양 보았소.
주제 : 고향에 돌아와서 느끼는 감회
해제 : 똑딱선을 타고 그리워하던 고향에 돌아온 화자의 들뜨고 설레는 심정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오랜만에 고향 풍경과 부모님을 마주하는 화자의 즐겁고 경쾌한 마음이 시상의 전개 과정을 따라 제시되고 있다. 넓은 바다가 남쪽으로 트인 조각난 하늘과 송백의 산으로 바뀌고, 그것이 다시 돌다리와 집들이 들어서 있는 마을로, 그리고 그 마을은 다시 유 약국이라는 고향집으로 좁혀진
다. 이러한 공간의 수축 작용은 집에서 대문으로, 대문에서 문지방으로, 문지방에서 방안으로 이어지고, 이윽고 그 내부의 구심점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리하게 된다. 여기서 '돋보기'는 어느 새 늙어 버린 아버지의 시간을 나타내는 환유(換喩)이고, '헌 책력'은 어머니의 시간을 나타내는 은유(隱喩)이다.
42. 윤동주,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어버렸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주제 : 본질적인 자아를 찾고자 하는 소망
해제 : 이 시는 본질적인 자아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본질적인 자아를 찾고자 하는 소망과 함께 노력을 하고 있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본질적인 자아와 현실적인 자아 사이에는 돌담이 놓여 있고, 본질적인 자아는 담 저 족에 있는 것이다. 쇠문을 굳게 닫아 건 담과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은 절망적인 상황을 상징하는 것인데,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본질적인 자아를 찾고자 한다.
43.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주제: 부끄럼이 없는 밝은 내일의 삶
해제: 식민지 치하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화자는 암울한 현실 앞에 무력하기만 한 자신의 모습을 고백적인 어조로 성찰한다. 아침(밝음)과 밤(어둠), 일상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의 대립 등 대조의 기법을 살리면서 밝은 미래를 염원하며 ‘최초의 악수’를 통해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44. 이건청, ‘하류’
거기 나무가 있었네.
노을 속엔 언제나 기러기가 살았네.
붉은 노을이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면
거기 나무를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네.
발뒤축을 들고 바라보았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 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그늘은 백사장이고 시냇물이었으며
삘기풀이고 뜸부기 알이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가는 늦 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네.
까마득한 하류에 나무가 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주제: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
해제: 이 시는 ‘나무’를 제재로 아름다웠던 유년 시절의 추억을 정겹게 회상하고 있다. 감각적인 이미지의 시어를 사용하면서 유년 시절의 추억을 동화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거기 나무가 있었네’라는 시구를 반복하면서 그리움의 정서를 심화하고 있다. 그러나 순수와 모성적 세계를 상징하던 ‘나무’는 이미 현실에서는 재가 되어 버리고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구성
1~8행: 유년 시절 추억 속의 나무
9~18행: 유년 세계의 중심이었던 나무
19~25행: 그리움의 대상으로서의 나무
45. 이성복,‘그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주제: 현대 사회와 현실의 부조리
해제: 이 시에서 연상에 의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그려지는 일상은 무감각하게 마비된 병든 삶의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궁핍과 퇴폐, 연대감의 상실과 소외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며, 이러한 현실의 부조리를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46. 이성교, '밤비 1'
아아 내 가슴에
떨어진 유성(流星)아
밤비는
너는 울음이었다.
땅이 움직여도,
산에 돌이 떨어져도
네가 온통
이 세상에
많은 것 같구나.
내 가슴에 묻혀 있는
너의 무덤에
해마다 무슨 꽃으로
피어 주련.
술을 먹어도,
술을 먹어도,
취하지 않는 밤.
밤비는 한 잔 술에 운다.
아빠가 태워 준
창경원의 비행기.
이 밤에도 찬 비 맞고
빙빙 돌겠지.
이제 와
머리에 뒷짐 인
옛날을 말하지 않으련다.
멀리 흰 나비 한 마리
훨훨 강을
건너고 있는데,
이리도 내 가슴에
천둥이 치랴.
주제 : 죽은 아이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
해제 : 자식을 잃은 슬픔이 중심 제재이자 주제가 되고 있는 작품이다. 슬픔을 잊기 위해 술을 먹어도 취하지 못하는 부모의 심정이 시 전 편에 애잔하게 흐르고 있다. 1연의 '내 가슴에 / 떨어진 유성'이나 3연의 '내 가슴에 묻혀 있는 / 너의 무덤'은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부모의 처절한 아픔을 환기시킨다. 따라서 제목인 '밤비'가 상징하는 것도 죽은 자식을 못 잊어하며 그리워하는 화자의 울음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시적 대상인 죽은 아이에게 대화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자신의 감정이 응축된 '이리도'에서는 자식을 잃은 슬픔이 격렬하게 드러난다.
47. 이성부, '벼'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주제 : 벼의 강인한 생명력과 희생 예찬
해제 : 이 시는 '벼'로 상징되는 민중(농민)들의 강인한 생명력, 자기 희생과 공동체 의식을 예찬하고 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일지라도 노여움을 표출하지 않고 감내하는 희생적인 민중의 미덕을 표현하였다. 서러움을 맑게 다스릴 줄 아는 벼와 노여움을 덮을 줄 아는 벼, 그리고 피 묻은 그리움을 달래면서 다시 일어서는 벼를 통해서 우리는 말없는 백성들의 넉넉한 힘을 깨닫게 된다.
48. 이수복, ‘봄비’
이 비 그치면
내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항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주제: 봄비 내리는 날의 애상감
해제: 이별의 한과 애상적 정서, 3음보의 율격 등 전통시의 특성을 갖춘 시로, 세상을 떠난 임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관조적인 자세로 노래하고 있다. 특히 상승적 이미지의 시어인 ‘풀, 종달새, 꽃,아지랑이’ 등과 하강적 이미지의 시어인 ‘비’의 대립을 통해, 자연에서 느껴지는 봄의 생동감과 사별한 임에 대한 애상감을 대조시키는 기법이 탁월하다.
1연: 마음 속의 애상적 정서
2~3연: 아름다운 봄의 모습과 생동감
4연: 사별한 임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49. 이시영, ‘공사장 끝에’
"지금 부숴버릴까"
"안돼, 오늘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
"안돼, 오늘밤은 오늘밤은이 벌써 며칠째야? 소장이 알면…."
"그래도 안돼…."
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어 들려오는
루핑집 안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것들을
불빛인 듯 덮어주고는
가만히 일어나 앉아
칠흑처럼 깜깜한 밖을 내다본다
주제: 도시 빈민의 비극적 삶과 현실
해제: 이 시는 철거의 위협 앞에 놓여 있는 도시의 무허가 주택 빈민의 비참한 삶을 차분한 어조로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캄캄한
밤인데도 밖에서는 인부들이 무허가 건물 철거를 위해 동원되어 있고, 루핑집에 살고 있는 여자는 혹시 불빛이라도 새어나갈까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불안해 하는 모습이 대조되어 있다. 불안과
초조 속에 여자의 어머니로서의 모정이 애처롭게 다가온다. 대화를 섞어 극적인 상황을 제시한 것이 특징이다.
50. 이육사, '절정(絶頂)'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끓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주제: 극한상황과 비극적 현실의 극복 의지
해제: 차갑고 날카로운 심상을 갖는 강철과 황홀하고 찬란한 심상을 갖는 무지개라는 서로 대립적인 사물을 등치시켜 독특하고 선명한 비유를 만들어냈다. 화자가 온몸을 바쳐 대결해 온 겨울의 극한상황은 육체적인 좌절의 끝에 정신적 초월을 위한 하나의 정점이 된다. 연의 무릎을 꿇는 행위는 간절한 기원의 자세로 볼 수 있다.
51. 정지용, ‘발열(發熱)’
처마 끝에 서린 연기 따러
포도(葡萄)순이 기여 나가는 밤, 소리 없이,
가믈음 땅에 시며든 더운 김이
등에 서리나니, 훈훈히,
아아, 이 애 몸이 또 달어 오르노나.
가쁜 숨결을 드내 쉬노니, 박나비 처럼,
가녀린 머리, 주사 찍은 자리에, 입술을 붙이고
나는 중얼거리다, 나는 중얼거리다,
부끄러운줄도 모르는 다신교도(多神敎徒)와도 같이.
아아, 이 애가 애자지게 보채노나!
불도 약도 달도 없는 밤,
아득한 하늘에는
별들이 참벌 날으듯 하여라.
주제: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는 부모의 애타는 마음.
해제: 화자가 아이의 고통에 안타까워 하는 장면이 숨가쁘게 그려져 있다.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는 애타는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쉼표를 자주 사용하여 숨가쁨을 극대화하고 있는데 애타는 심정이 대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 속에 조화되어 아이와 부모의 고통의 순간이 저절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기도 의식으로 승화되어 있다.
52. 정지용, '유리창'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山)새처럼 날아갔구나!
주제: 죽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
해제: 아이를 산새처럼 날려 보내고, 밤에 유리창 앞에 서 있는 화자의 아이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죽은 아이에 대한 주관적인 감정이 극도로 절제되어 맑고 차가운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53. 정호승, ‘부치지 않은 편지’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이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은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 이슬에 새벼 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주제: 시대를 앞서간 그대의 죽음에 대한 추모
해제: 화자는 ‘그대’가 별이 되지 않아도 된다고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그것은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이 없어도 별이 뜨기’ 때문이다. 또한 화자는 어떤 사물이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본질적인 핵심을 갖고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굳이 죽어서 별이 되지 않아도, ‘그대’가 갖고 있는 본질적 속성은 이미 별처럼 빛나는 존재로 남아 있다고 말하고 있다.
1~4행:별이 되지 않아도 좋음
5~9행:그대의 죽음에 대한 슬픔
10~13행:인생에 대한 통찰
54. 정호승, '우물'
길을 가다가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누가 낮달을 초승달로 던져 놓았다
길을 가다가 다시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쑥떡이 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홀로 기차를 타시는 어머니가 보였다
다시 길을 떠났다가 돌아와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평화 시장의 흐린 형광등 부맃 아래
미싱을 돌리다 말고
물끄러미 너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너를 만나러 우물에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보따리를 풀어
쑥떡 몇 개를 건네 주셨다
너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미싱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주제 : 가난하고 불행한 가족(이웃)에 대한 연민
해제 : 이 시는 '우물'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불행하고 서글펐던 가족사적 체험을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이 시에는 세 사람의 시적 인물이 등장하는데, 평화 시장 흐린 불빛 아래서 미싱을 돌리던 여공('너')과 쑥떡이 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혼자 기차를 타시는 어머니, 그리고 우물을 바라보며 이들을 떠올리는 '나'가 있다. '너'와 '어머니'는 화자의 가족의 일원으로 묘사되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정호승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외롭고 춥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변주이기도 하다. 길을 가다가 우물을 돌아보고, 또 길을 가다가 우물을 되돌아보는 반복적인 행위는 윤동주의 '자화상'을 연상시킨다. 윤동주가 '우물'을 자기 성찰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면 정호승은 '너'를 만나러 '우물'에 들어가는 행위로 미루어 과거 환기의 장치로 이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5. 정희성, ‘길’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는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떤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지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주제: 안분지족의 삶 추구
해제: 이 시는 자신이 걸어온 과거의 길, 현재의 길, 그리고 앞으로 가야할 미래의 길을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부모님이 소망하는 세속적 가치가 아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면서, 세상의 어떠한 유혹에도 ‘마음 단단히 먹고’ 의롭고 선한 삶을 다집하고 있다.
1~6행: 지난날의 삶 회고
7~13행: 서러운 현재의 삶
14~19행: 유혹에 이끌리지 않겠다는 다짐
56. 조지훈, ‘석문’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는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 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주제: 끝없는 기다림과 한(恨), 풀리지 않는 원한
해제: 이 시는 버림받은 신부의 하소연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핵심 이미지인 ‘돌문’은 그리운 임이 아니면 결코 열리지 않는, 임에 의해서만 열리는 문이다. 하지만 긴 세월 끝에 임이 오게 되면 이제는 사무친 원한으로 임에게마저 열어 줄 수 없는 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돌문’은 임에 대한 기다림과 원한을 동시에 함축하는 지독한 사랑의 열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3연: 풍상에 시달려온 돌문의 모습을 통해 천 년의 한을 간직한 신부의 서러움
4~5연: 미래에 있을지 모를 ‘당신’과의 해후
57. 최승호, '북어(北魚)'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 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드리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주제 : 현대인의 무기력한 삶에 대한 반성과 비판
해제 : 이 시는 북어의 메마르고 딱딱한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삶과 죽음의 삭막함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여기서의 ‘북어’는 시적 대상을 넘어서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지향하는 바 없이 무의미하게 하루를 보내며, 자신을 제대로 표현 못하고 언어장애를 겪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사물을 통해 현대인의 무기력하고 의미 없는 삶을 비판하고 있다.
58. 최영미,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것은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주제: 임을 잊을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
해제: 선운사의 동백꽃을 보고, 임과 이별한 화자의 처지와 대비시켜 표현한 작품이다.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을,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지고 잊는 과정으로 대비시켜, 이별한 사람을 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표현하고 있다.
1연,2연: 꽃이 짐(순간)
3연: 잊음도 순간이면 좋겠다는 생각
4연: 떠나간 임에 대한 그리움
5연: 임을 잊을 수 없는 안타까움
59. 황동규,‘달밤’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주리라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지금까지 내 생각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주게 되리.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두 팔 들고 얼음을 밟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주제: 내적 순수성의 인식을 통한 삶의 자세 발견
해제: 이 시는 삶에서 겪는 고독과 헐벗음은 우리 자신의 내적 순수성을 통해 극복될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달빛’으로 표상되고 있는 밝고 깨끗한 내면이야말로 몇몇 친구에게 기꺼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고, 결코 ‘외로움이 아닌 길’이며, 오랫동안 화자가 간직해 온 삶의 순수성이라는 것이다.
1~4행: 언 들판에 내리는 달빛
5~8행: 외로움이 아닌 길로서의 달빛
9~12행: 헐벗은 자아 위에 비치는 달빛
60. 함민복--눈물은 왜 짠가’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뭐 잘못된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 아저씨가 안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 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 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 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주제: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해제: ‘가난’과 ‘어머니’라는 상투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뜨거운 인간애를 잘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설렁탕집을 배경으로 하여 모자 사이에서 형성되는 애틋한 사랑과, 설렁탕집 주인아저씨에게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인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