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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평화의 샘 원문보기 글쓴이: 보라매
대성당 잘츠부르크 음악제가 처음 시작된 돔 광장에는 1771년에 제작된 마리아 상이 서 있고, 그 뒤로 웅장한 규모의 대성당이 있다. 744년에 창건된 성당은 1181~1200년에 걸쳐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개축되었고, 1598년의 대화재 이후 재건되었다. 내부는 대리석과 회화로 장식되어 있고, 6000개의 파이프로 된 유럽 최대의 파이프 오르간이 유명하다. 돔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대성당의 보물이 전시된 박물관이 있다
대성당
대성당
대성당
대성당
대성당
대성당
잘츠부르크 대성당 내진의 주제단 대성당 건축가인 산티노 솔라리오가 17세기 초에 설계한 작품이다. 예수의 부활을 그린 제단화는 아르세니오 마스카니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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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 돔 성화
대성당 유럽 최대의 파이프 오르간
잘츠부르크의 역사지구 잘츠부르크는 바로크 시대에 유래하는 건축들이 대부분이다. 대성당, 오래된 수도원, 골목길, 광장 등이다. 탑이나 돔 지붕이 죽 늘어선 잘츠부르크의 실루엣은, 멘히스베르크 산 위에 1077년 이후 가로놓인 호엔잘츠부르크의 성곽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벽은 중세 성관 건축사의 초기 단계를 전하고, 성채의 부속 건물인 성게오르크 성당 등의 건축물과 황금빛 대연회장, 황금의 작은 방 등 성관의 화려한 방은 후기 고딕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잘츠부르크가 시의 벽을 건설키로 결정한 것은 뒤늦은 1278년의 일이다. 시의 벽이 있었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바로크 시대에 개조되었다고는 해도 중세의 도시 구조는 더욱 불규칙적으로 서로 얽힌 좁은 골목길 등에 잘 남아 있다. 특히 16세기에 지어진 시민들의 건축이 빽빽이 늘어선 거리의 모습은 중세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잘츠부르크는 처음 생긴 이후 특히 주교 도시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최초의 대성당은 대수도원 사제 성비르키리우스가 774년에 바친 것이다. 그 후 몇 세기 동안 교회는 끊임없이 영향력을 확대하려 애쓰고, 헌납이나 기부 또는 특권으로 보호받은 종교적인 지위를 세속적인 권력을 강화하는데도 활용했다. 13세기 후기 잘츠부르크는 영주인 대주교가 지배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한 제후국이 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싫어했으며, 족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시도했다. 왜냐하면 이 도시는 2개의 중요한 교역로에 접해 있기 때문에, 상품 중계 기지로서 막대한 이익을 내어 힘있는 상인층을 탄생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츠부르크가 신성로마제국의 자유도시의 지위를 얻도록 하려는 시민층의 노력은, 1511년 영주이기도 한 대주교에 의해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잘츠부르크는 계속해서, 다수의 성당과 수도원을 보유하는 신앙심 깊은 도시였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의 영주인 대주교는 바로크풍의 예술 취향을 로마네스크 양식이나 고딕 양식의 역사 건축물에도 도입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중세의 요소는 단지 세부적인 부분에만 남고, 건축사에서 기억 속의 편린이 되고 말았다.
그 전형적인 예가, 삼랑식 바실리카의 형식을 갖고 있으며, 오리지널 로마네스크 시대의 현관을 남기면서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된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성페터 성당이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성당은 나중에 많은 부속 건물이 추가되었지만 중세의 건축 요소를 가장 잘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800년쯤에 건축된 성미하엘 성당에서는, 이미 상인들의 교구 성당 역할을 맡았던 중세의 전통을 찾아볼 수 없다. 700년쯤에 성루퍼트가 창립한 베네딕트회의 성페터 수도원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회랑 서쪽 날개와 초기 고딕 양식의 마리아 예배당에서 다시 중세의 건축사를 새겨 넣었다.
성페터 수도원은 독일어권에서 가장 오래된 남자 수도원 중에 하나이다. 그 곳의 묘지 페터스프리트호프는 낭만주의 시대에 그야말로 꿈꾸는 낭만주의자들이 선호한 마술적인 흡입력이 있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로마네스크, 고딕 시대의 암굴 예배당, 그로타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지하 납골당은 계몽주의의 근대 합리주의 정신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할 때까지 그 뜨거웠던 신앙 열기를 느끼게 해 준다. 또한 700년쯤에 부르크베르크의 산자락에 창립된 독일 최고의 여자 수도원인 베네딕트회 여자 수도원 논베르크는 자랑할 만한 과거를 말해 주는 유물을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15세기 후기에 개조된 삼랑식 바실리카에는 1150년 로마네스크 시대에 제작된 벽화가 남아 있다.
바로크만큼 잘츠부르크에 영향을 남긴 예술 양식은 없다. 힘과 긴장이 넘치는 역동적인 움직임, 상상력 넘치는 형태 언어, 그야말로 상식을 틀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는 장식 열기는 절대적인 군주와 반종교 개혁 세력인 가톨릭 성직자들이 얼마나 축제성을 즐겼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 좋은 예가 도시 경관 속에서 확실한 악센트를 이루는 후기 바로크 양식인 성세바스티안 성당이다. 로마에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이 양식은, 교묘하게 변화하는 투시도 효과, 효과적인 광선과 음영, 과잉이라 할 정도의 스터코 세공 덕분에 역동적인 건축을 표현해 냈다. 그러므로 잘츠부르크의 풍요로운 바로크 양식이 ‘알프스의 북로마’라는 명성을 낳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옛 시가지 서쪽 경관을 압도하는 것은 건축가 피셔 폰 엘라하의 솜씨인 참사회 성당이다. 그가 남긴 건축 중 걸작에 속하는 것으로는 삼위일체 성당, 요하네스슈피타르 성당, 우르즈리넨 성당 등을 꼽을 수 있다. 요한 카스파르 츠카리에 의한 카이에타나 성당, 에어하르트 성당의 2개의 건축물, 대주교 궁전, 미라벨 궁, 대학 구관 등의 다수의 세속적인 건축 또한 이 부분의 주옥 같은 건축 경관에 공헌하고 있다. 도시 광장에도 물론 빼놓을 것은 없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대주교 궁전 앞의 분수가 있는 레지던츠 광장, 마리아 기념주가 서 있는 대성당 광장이다. 도시 경관의 건축적인 중심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시선은 대성당으로 향하게 된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것도 또한 화재를 입어 재건된 것이다. 잘츠부르크는 1628년에 있었던 헌당식에서 유사 이래 가장 화려한 축전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때는 39년 전쟁이 한 장 진행중이었다. 벤첸초 스카모치의 설계안이 폐기된 후, 산티노 솔라리오가 설계한 이 신의 성전은 돔을 얹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쌍탑을 갖고 있으며, 박공을 사이에 두고 명쾌하게 구성된 파사드가 특징이다. 여러 개의 조각 장식, 교차부에 솟아 오른 통 모양의 돔, 격조 높은 비례 구성을 보이며 스터코 장식과 빛의 효과로 꾸며진 장당과 교차부 날개의 내장 등은 지중해에서 온 건축가가 조형한 것임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같은 성격은 남독일, 곧 오스트리아 지방의 바로크 양식 후의 발전 방향을 결정하게 되었다 사랑과 평화의샘 http://cafe.daum.net/lcg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