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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의 『술탄과 황제』를 읽고(2013.8.17)
1453년 비잔틴 제국 최후의 날, 세계사를 바꾼 리더십의 격돌
������1453년5월29일,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으로써 비잔틴제국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오스만 제국이 세워졌다. 이 글은 동서 문명의 교차로인 이스탄불에서 종군기자가 된 심경으로 써내려간 54일간의 격전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전쟁의 주역이었던 오스만의 술탄과 비잔틴의 황제, 두 제국의 리더십에 대한 치열한 탐구이다.������
책을 읽기 전에
서술 구조와 구성상 특징
전개 방식은 소설이지만 그 내용은 본격 역사서인 독특한 장르의 책 한 권이 탄생했다.
이야기(작가가 주인공인 현재의 이스탄불) 속에 이야기(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쟁)가 있고, 그 안에 또 다른 이야기(황제의 일기와 술탄의 비망록)가 존재한다. 문학평론적 시각을 빌리자면 스타일이 독특한 삼중 구조의 액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자도 이례적으로 세 사람이다. 작가-황제-술탄, 이 세 주인공이 각각 일인칭 관찰자(나=작가)및 일인칭 주인공(나=황제 나=술탄) 시점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화법 또한 세 가지 방식을 취하고 있다. 노트 역할을 하는 태블릿 PC(작가)와 일기(황제)와 비망록(술탄) 이란 각기 다른 매개체를 통해 저마다 시대와 역사를 증언하며, 그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고 해석한다.
팩션(Faction: Fact+Fiction, 사실과 허구가 섞인 기록물)에 좀 더 가까운 글
������역사적 사실과 자료를 찾고 검증하는 과정이 너무나 힘들어 차라리 픽션(소설)을 쓸까 하는 유혹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때대로 황제와 술탄과 나는 꿈속에서 삼자대면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한여름 밤의 미몽이 아닌, 오매불망 한 역사학도의 몰입과 탐구가 빚어낸 결과라 생각한다.������
역사를 지키고, 만들어 나가 모든 사람들에게 바친다.
저자의 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힘든 순간과 어려운 곡절들은 탐닉과 몰두로 극복해 나갔다. 이 책은 그 결과물이다. 부족하지만 세상에 내놓으면서 많은 질타와 비판을 기다린다.
프롤로그 비잔틴 제국 1123년의 약사
AD 330년부터 1453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제국의 역사는 길고 또 파란만장했다. 무려 1123년, 단일 제국으로서는 지구상 가장 오래 존재했던 비잔틴 제국의 탄생부터 소멸까지를 제한된 지면에 담으려는 만용을 부릴 수밖에 없다.
제국은 번영과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굳건한 성벽과 황궁들과 교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전성기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은 100만 인구가 상주하는 거대 도시였고, 전 세계 70여 개 언어가 통용되던 무역의 중심지였다. 영토 역시 광대했다.
8세기 말엽이 되자 제국의 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살해된 니케포루스 1세의 두개골은 은박이 입혀져 불가리아 왕 크룸의 술잔으로 쓰이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9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 비잔틴 제국의 황금기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게 제국은 군사력은 물론 정치력과 상업적인 측면에서도 주변국들을 압도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1453년4월,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슬람국의 최고 통치권자, 오스만 황제) 메흐메드 2세는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제국으로 쳐들어와 콘스탄티노플을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급기야 그해 5월29일 화요일, 54일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난공불락의 철옹성은 무너지고 오스만 깃발이 하늘 높이 나부꼈다.
비잔틴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세계 모든 도시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가 지켜주는 도시라는 찬사를 접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새롭게 탄생하면서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시작된 비잔틴 제국은 88인의 황제들을 배출하며 장수를 누렸으나 개국시조와 이름이 똑같은 콘스탄티누스 11세에 이르러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Ⅰ 1453년5월29일~6월1일, 콘스탄티노플
1453년5월29일(화)
천 년 보다도 더 긴 하루였다.
8만이 넘는 오스만 군대에 비해 비잔틴군은 정규군 비정규군 시민군 외인부대까지 모두 합해도 채 7천명이 될까 말까 했다.
이 모두가 무슬림들의 시작으로는 신성 모독적이고 우상 숭배로 치부되는 정당한 전리품들에 대한 탈취 행위라서 죄책감 따위는 한 점도 없었다.
황궁 앞에서 술탄은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사디가 제국의 소멸을 한탄하며 읊었다는 쓸쓸한 어조의 2행시를 혼잣말하듯이 암송했다.
황제들의 궁에서는 거미들만 부지런히 커튼을 치고 있고 아프라시아브(이란 신화에 등장하는 유목민의 왕)의 성탑에서는 부엉이 홀로 슬피 울며 보초를 서고 있구나.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제국의 수도로 군림했던 이 도시의 운명은 이처럼 비장하게 막을 내렸다. 그날 이후 이 도시는 이제 더 이상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아니었다. 머지않아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될 이스탄불이었다.
1453년5월30일(수)
성벽은 함락되고 제국은 정복되었지만 후폭풍은 거세었다. 항복을 거부한 대가는 참담하고 혹독했다. 첫날보다는 많이 약화되었으나 이튿날도 살육과 학대와 강간과 약탈이 도성 곳곳에서 간헐적으로 자행되었다.
함락 이후 살해된 도성 시민들의 수는 연대기 작가마다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크리토불로스를 비롯해 이 분야에서 신뢰성을 확보한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그 수를 4,000명 안팎으로 보고 있다. 전체 주민 수의 10분의 1 가량이므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량 학살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점령군들이 어느 순간부터 격렬하게 저항을 하지 않는 한 칼에 피를 묻히기보다는 포로로 잡아 노예로 파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1453년5월31일(목)
도성이 함락된 5월29일 이후 황제의 모습을 본 비잔틴 시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동안 황제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면서부터 황제가 최후를 맞았다고 이 지상에 없다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졌다. 술탄의 차지가 된 황궁으로부터 흘러나온 이야기에 따르면 그 정황은 이러했다.
술탄은 정복 첫날부터 황제의 생사를 가장 궁금해 했다. 병사들이 오스만의 망명 왕자 오르한의 머리를 갖다 바쳤지만, 술탄이 정작 보고 싶어 한 것은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목 잘린 얼굴이었다.
미확인된 정보만 있고 정작 황제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되자 술탄은 전군에 황제의 행방을 수소문했고 시신을 수색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결국 황제의 머리를 찾게 되었고 술탄은 그 목이 잘린 황제의 머리를 아우구스테이온 광장의 원주위에 올려 두었다가 속을 채워 박제로 만든 다음 주요 무슬림 국가들의 궁정에 보내 순회 전시토록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 백성들 중 상당수는 술탄의 진영에서 흘러나왔다는 그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구도 광장의 원주 위에 진열된 황제의 머리를 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1453년6월1일(금)
혼란은 빠른 속도로 정리되고, 제도는 새롭게 정비되었다. 사전에 치밀하게 짜 놓은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듯 술탄은 정복 이후 제국을 질서 정연하게 통치하고 재편해 나갔다.
술탄은 포로들을 일일이 살펴보며 그 가운데서 자신이 차지할 몫을 골랐다. 비잔틴 명문가 출신과 고위 관료들이 주로 그 대상이었다. 술탄은 그들에게 비교적 관대했다. 대부분의 귀부인들은 가족을 되찾을 수 있는 돈까지 하사받고 즉시 풀려났다. 하지만 미소년과 아름다운 처녀들은 하렘을 위해 남겨 두었다. 나머지 청년들에게는 종교를 포기한다면 자유를 주고 오스만군 장교로 임관시켜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이를 받아들인 젊은이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내가 그토록 사랑한 비잔틴 제국은 적들의 침공으로 사라지더라도 이 기록은 남아 제국의 위대한 정신과 제국 신민들의 고결한 영혼을 영원히 역사에서 증언하여 주기를 기대하며 제국의 황제로서 일기를 적노라.-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 팔라이올로구스
세계 정복을 꿈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서 나 또한 황제의 일기에 답하고 그의 오판과 어리석음도 깨우쳐줄 비망록을 적겠노라. 두 제국의 지도자가 어떠한 철학과 신념으로 전쟁에 임하였는지를 후세에 가감없이 전하겠노라.
Ⅱ 황제의 일기와 술탄의 비망록
1453년4월2일(월) 황제의 일기
부활절 다음날 월요일, 적들이 왔다. 오스만 군대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진군 중이라는 소식은 이미 한 달 여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정교회의 큰 축일인 어제는 무사히 의식을 마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를 비롯한 우리 신민들은 부활절 특별 예배 시간 내내 마음이 편치 아니 하였다.
이들은 야만의 종족이다. 1446년 헥사밀리온 공격과 지난해 루멜리히사르 축성 과정에서 나는 그것을 역력히 경험하였다. 이들은 무고한 생명들을 잔인무도한 말뚝 형벌로 유린한 야수보다 더한 놈들이다. 콘스탄티노플이 이들 이교도들의 수중에 넘어가는 순간 유구한 세월 동안 쌓아온 기독교 문명은 하루아침에 짓밟혀 버리고 말 것이다. 옥쇄를 각오하고 야수의 발톱으로부터 반드시 제국을 지켜내어야 한다.
1453년4월2일(월)(이슬람력 857년3월22일) 술탄의 비망록
시작은 미약하였다. 1299년, 개국시조이신 오스만 1세께서 셀주크 술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아아톨리아 서북부에 세력을 확립, 새로운 정권을 세우셨을때만 해도 오스만국은 셀주크 튀르크 제국의 열 개 봉건 토후국 중 규모가 가장 작은, 변경의 초라한 부족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가까운 국경 지대에 자리잡은 오스만은 처음에는 비잔틴과 사이가 좋았다. 우리는 안정과 평화를 원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비열하다. 믿을 수 없는 놈들이다. 십자군들은 끊임없이 싸움을 걸어왔고, 같은 신을 믿는다면서 자기들끼리 종교 갈등으로 날을 지새웠다. 이 전쟁은 그로 인한 죄업이고, 이 지하드(성전)는 정당하다.
거듭 말하거니와 이 전쟁은 너희가 자초하였다. 너희는 호시탐탐 우리를 공격할 기회를 노렸으며, 주변국들과 십자군을 부추켜 우리 영토를 침범하였다. 또한 비잔틴은 우리 제국에 반감을 품은 자들의 정치적 망명지였다. 앞으로도 너희가 우리 오스만 제국에 크고 작은 손실을 입힐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자위권의 발동이며, 비잔틴의 기만정책에 대한 오스만의 반격인 것이다.
나는 세계 정복에 나섰던 알렉산더 대왕보다 아침 해를 더 많이 보았고, 그보다 훨씬 많은 병사들을 갖고 있다. 나는 준비된 술탄이다. 유년기와 소년기, 훌륭한 스승들 밑에서 세상을 공부하고 국정을 경험하고 전쟁을 치렀다. 과학과 철학, 천문학과 점성학, 이슬람 및 그리스 문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세계 전체도 내 야망의 함량에는 미달한다. 나는 이 도시를 예언자의 계시에 따라 세계 정복의 중심에 둘 것이다. 황제여, 염려마라. 우리는 문명을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 기존의 문명 위에 더 찬란한 문명을 꽃 피우기 위하여 우리는 여기 온 것이다. 주인을 잘 만나야 문명도 빛이 나는 법이다. 자 이제 시작이다.
4월6일(금) 황제의 일기
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 있다. 병사들에게도 축성 이래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는 천년 요새의 존재를 강조하였다. 적들의 수장인 술탄 메흐메드 2세는 1432년3월30일, 아드리아노플 출생이다. 이제 고작 스물한 살, 나와는 스물일곱 상이나 차이가 나는 애송이다. 그러나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자.
4월6일(금) 술탄의 비망록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응집된 열망이 나를 이 도시로 이끌었다. 드디어 우리 군대가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였다. 몇몇 아버지 측근들의 간교에 의하여 술탄의 자리에서 2년 만에 물러난 내가 마니사 총독으로 가사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할 때도 이 거룩한 과업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철두철미하게 준비하였으며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선친 무라드2세 때와는 달리 육지만 봉쇄한 것이 아니라 바닷길도 막아 놓았다. 선대 술탄들이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실패한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성벽을 무너뜨릴 무기가 취약했던 탓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공성용 무기 개발에 주력하였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도다.
4월7일(토) 황제의 일기
원군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어딘가 오고 있거나 출발을 서두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자. 솔직히 불야성을 이룬 적들의 막사를 보니 기가 질린다. 나는 일찌감치 다가오는 위기를 감지하고 서방 국가 군주들에게 구원군을 요청하였다.
4월7일(토) 술탄의 비망록
나는 사전에 이 도시를 완벽하게 학습하고 숙지하였다. 수많은 지도자를 섭렵하였으며, 내 눈으로 직접 지형지물들을 관찰하였다. 그러므로 군대와 무기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데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내 머릿속에 이미 완성된 전략 지도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여, 이 말을 기억하는가. 나의 증조부이신 술탄 바예지드 1세께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공격하며 그대의 선친인 마누엘 2세 황제에게 던진 일갈이다.
������도시의 성문을 닫고, 그 안에서만 지배하라. 그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니라.������
현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비잔틴 제국은 그처럼 목숨만 겨우 부지하여온 나라인 것이다.
우리 군은 다국적군이다. 창검을 들고 방패, 갑옷, 투구 등으로 무장한 기병들은 유럽 및 아시아 전역에서 총동원하다시피 한 정규군이다.
4월8일(일) 황제의 일기
오늘은 적들의 대포 소리가 잠잠하다. 그러나 물밑에선 또 어떤 계략을 꾸미고 있을 것인지...... 적들은 대포를 우르반 거포라고 부른다. 우르반, 그는 우리의 우방국인 헝가리 출신 대포기술자이다. 이제 와서 뼈아프게 후회스러운 것은 그 작자가 술탄 진영으로 가기에 앞서 비잔틴 궁정으로 먼저 찾아왔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제국의 재정 형편상 나는 도저히 우르반이 요구하는 보수를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또한 그런 신형 무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화약, 염초, 구리, 주철 등과 석재 같은 엄청난 자원을 조달할 능력도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군사지식도 부족하였다. 철옹성을 너무 믿은 까닭에 나는 공성용 무기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포의 위력 또한 과소평가하였다.
4월8일(일) 술탄의 비망록
우르반을 불러 대포의 성능을 보강하고 약점을 개선하라고 지시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거푸집을 다시 만들어 새로운 거포를 제작하고 싶었지만 시간상 무리였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을 앞두고 내가 가장 역점을 두고 준비한 것은 철옹성을 깨부술 대포 개발이었다. 우르반이 애초에 기대하였던 것보다 네 배 더 많은 급료를 주고, 모든 금전적, 기술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노라고 약속하였다. 그 결과 석 달도 채 못되어 우르반은 대포를 만들어내었다. 그 대포는 루멜리 히사르 주탑에 배치되어 베네치아 선박을 격침시켰다.
4월9일(월) 황제의 일기
오스만 함대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 보스포러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에 포진해 있는 전함들은 아직 적들의 발길이 못 미친 골든 혼 안쪽 해안으로 진입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짐짓 공격이라도 해 올 듯 주변을 얼쩡거리기도 한다. 이럴 때 골든 혼 입구를 철벽 수비하는 쇠사슬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자신감을 갖자. 해군의 전투력과 항행술, 실전 경험만큼은 우리가 적들보다 전적으로 막강하고 우세하지 않은가.
4월9일(월)술탄의 비망록
우리 진영에서는 상대적으로 해전 경험이 많은 쉴레아만 발로울루 제독에게 오스만 함대의 지휘권을 맡기었다. 선박 수로는 우리가 비잔틴을 크게 능가한다.
나는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이 그러했듯이 함대를 골든 혼 안으로 들여보내 그쪽 성벽을 무너뜨리고 도성으로 진입할 계획이다. 골든 혼 돌파의 가장 큰 걸림돌은 만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막강한 봉쇄용 철제 사슬. 석양무렵의 골든 혼은 시심을 자극할 만큼 아름답다. 양의 뿔 모양을 한 골든 혼이 저녁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들면 그곳에서 침몰한 배들과 함께 가라앉았던 금은보화들이 해저에서 몸을 뒤채며 발광을 하는 것만 같다. 가까운 날, 내 반드시 노을빛 물든 골든 혼의 바다에 손을 담그리라. 금싸라기 같은 바닷물을 두 손 가득 움켜쥐리라.
4월10일(화) 황제의 일기
오늘따라 부쩍 형제들이 그립다. 모레아에 가 있는 두 아우 데메트리오스와 토마스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나는 1405년 2월8일 황실의 자줏빛 방에서 선친(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구스 황제)와 세르비아 왕가 출신 어머니(황후 헬레나 드라가스)사이의 일곱 형제(출생 연대 순으로 요안네스, 테오도로스, 안드로니코스, 콘스탄티누스, 데메트리오스, 토마스)중 넷째로 태어났다. 내 나이 한 살 때(1406년) 숨진 미카엘이란 형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억이 없다.
4월10일(화) 술탄의 비망록
형제들 간에 우애가 참으로 남다르구나, 일기를 보아 하니 그 모두가 콘스탄티누스가 형들을 존중하고 아우들을 아낀 데서 얻어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애틋할 정도이다. 술탄의 세계에는 그런 나약한 형제애가 존재하지 않는다. 권좌에 먼저 오르는 것이 선이고 승자이다. 권력을 움켜잡기 위해서라면 형도 아우도 없다, 연인과 형제, 때로는 부모와 자식까지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술탄의 의자에서는 그리하여 항상 피의 냄새가 맡아진다. 오스만 제국을 위한 길이라면 목숨을 걸어야 하고 살인 또한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은 일시적이지만, 국가는 영속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일기가 변화무쌍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특히 위생에 신경을 써야 한다. 내 머리와 군사들 머리를 삭발한 것도 그래서였다. 이교도들처럼 지저분한 머리를 청결은 물론 전투 수행과 정신 위생에 좋지 못하다. 그들이 장기전에 약한 이유는 그런 기본 상식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4월11일(수) 황제의 일기
자고 일어나 보면 적들의 막사가 성벽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성벽을 덮쳐버릴 기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10만 대군이 집결한 술탄의 진지에서는 말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군기가 엄격하다는 의미일까. 튀르크군 1만 명보다 기독교 병사 100명의 행군이 더 시끄럽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전투가 소강상태인 틈을 타 우리 병사들이 방어 중인 성벽을 일일이 돌면서 격려의 말을 전하였다. 적은 병력으로 수많은 적들과 대적하려니 효율적인 배치가 쉽지 않았다.
4월11일(수) 술탄의 비망록
나는 성벽으로부터 먼 거리에서 가까운 거리로 세 번에 걸쳐 천막을 이동 설치하였다. 거대한 성곽의 위용에 압도당하였을 병사들의 심리를 감안, 그들이 위축되지 않고 적응할 수 있도록 원근법의 이치에 따라 단계적으로 막사를 전진 배치한 것이다. 아울러 적들에게는 큰 도시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게 하는 효과도 노렸다.
4월12일(목) 황제의 일기
오늘의 해전도 우리 해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골든 혼 봉쇄 사슬 또한 여전히 견고하다. 그래도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적들의 해상 공격은 정말 집요하다. 아무래도 육지 성벽에 투입하였던 수비군을 골든 혼 방어를 위한 지원군으로 분산 배치시켜야 할 것 같다. 그쪽도 대포 공격이 만만치 않지만 우선 골든 혼 쪽이 더 시급하다. 비잔틴 제국은 그동안 상비군 양성을 너무 등한시하였다. 특히 해군은 용병이나 다름없는 외국인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한 그 무렵은 그리스정교회가 교회 통합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하여 파멸의 내리막길을 달리던 때였다. 그랬다. 제4차 십자군의 침략과 지배 이후 비잔틴 제국은 극심한 혼란과 침체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게다가 오스만 튀르크의 거듭되는 공세로 점점 그 입지가 좁아져가고 있었다. 번영과 재건의 망치소리는 그친 지 오래였다. 말하자면 나는 거의 파산 직전인 제국의 유산을 물려받은 상속자인 셈이었다.
4월12일(목) 술탄의 비망록
앞으로 육지 성벽 포격을 밤낮 없이 계속할 것이다. 물론 성벽에 대한 육탄 공격도 병행하겠다. 우르반의 대포가 헬레폴리스란 명성에 걸맞게 적들을 혼쭐내면 일주일도 못 버티고 성벽은 무너질 것이다. 서서히, 그러나 한꺼번에 삼중 성벽을 허물어뜨리고 말 것이다. 그 다음은 입성이다.
4월13일(금) 황제의 일기
어제에 이어 오늘도 포격 소리가 진동한다. 성벽이 손상을 입었지만 무너진 곳은 없다. 그러나 방책은 파손이 심하고, 파편이 튀어 부서진 성벽도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무엇보다 귀청을 찢는 굉음이 도성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간다. 병사들도 대포 소리만 나면 몸을 웅크리기 바쁘다, 그러나 포를 쏠 적에는 적들도 다른 공격을 못한다. 소리만 요란할 뿐이니 솜으로 귀를 틀어막고 차분히 대응하라고 일렀다. 어떠한 경우라도 적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면서 독려에 독려를 거듭하였다.
4월13일(금) 술탄의 비망록
발토울루 제독의 함대를 출동시켜 콘스탄티노플 주변에 있는 성과 섬들을 정복토록 하였다. 마르마라 해역 안에 있어 지중해 기독교군이 중간 기지로 삼을 수 있는 왕자 섬까지 포함해서였다. 비잔틴 정부가 왕족이나 고관, 사제들의 유배지로 쓰고 있는 섬이다.
4월14일(토) 황제의 일기
오늘도 대포 소리가 성벽을 진동한다. 파편이 튀는 속에서 우리 병사들은 성벽을 보수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하여도 못내 후회스럽고 미련이 남는 건 어쩔수가 없다. 우르반의 대포 이야기다. 최소한 그가 술탄의 진영으로 가게 하는 일은 막았어야 옳았다. 여차하면 감옥에 가두어서라도 말이다.
왕자 섬을 포함한 도성 주변 섬들이 초토화되고, 포로로 잡힌 병사들은 항문에 말뚝을 박아 죽이는 끔찍한 형에 처해졌다는 보고를 받았다. 놈들은 야만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분노와 함께 공포가 엄습해 온다.
4월14일(토) 술탄의 비망록
왕자 섬을 비롯한 콘스탄티노플 인근의 섬들을 완전히 정복함으로써 보스포러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협 등 콘스탄티노플로 통하는 모든 해역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아직 골든 혼 해역만큼은 요지부동이다.
4월15일(일) 황제의 일기
적과 싸워 이기려면 적을 알아야 한다. 특히 메흐메드 2세 같은 인간형은 더욱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4월15일(일) 술탄의 비망록
참으로 놀라운 분석력, 아니, 상상력이다. 그러나 왜 이리 가소로운가, 황제여, 나는 묻고 싶다. 그대는 그대의 적인 나를 알기에 앞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얼마만큼이나 정확히 알고 있는가.
4월16일(월) 황제의 일기
한 제국을 책임진 군주 된 자가 이래도 되는 것일까. 불현듯 외로움이 가슴 가득 밀려오는 적이 있다. 고독하고 허전하다. 여인의 체취, 여인의 숨결을 느껴본지가 언제인지 아득하기만 하다. 나는 참으로 아내 복, 자식 복이 없는 사람이다. 아내 둘을 병마로 잃고, 슬하에 후손 하나 없다. 쇠잔해 가는 제국의 군주에게는 결혼도, 가정도, 아내와 자식도 모두 사치란 말인가. 아, 이럴때 제국의 대를 이을 늠름한 왕자라도 하나 슬하에 있었다면 용기가 백배, 천배로 치솟았으련만...
4월16일(월) 술탄의 비망록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불행한 가정사에 대하여서는 일찍이 나도 들은 바가 있다. 두 번의 상처 이후 그의 최측근인 프란체스가 동분서주하며 왕비로 들일 욍족이나 귀족가문의 여자를 물색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의 결혼 생활 역시 그다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446년부터 1450년, 4년 사이에 나는 세 명의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귈베하르 하툰, 귤사 하툰, 시트 하툰이 그녀들이다. 첫 번째 아내와 두 번째 아내 사이에서는 각각 하나씩 두 아들도 얻었다.
4월17일(화) 황제의 일기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비열하기 짝이 없다. 이거야말로 말 바꾸기, 뒤통수치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메흐메드 2세는 술탄 즉위 즉시 자기 아버지(무라드2세)가 서방 여러 나라와 체결한 우호 통상 조약을 기꺼이 승인하겠노라고 공언했다. 베네치아 사절은 1451년9월에 5년 전 맺었던 평화조약을 정식으로 갱신하였으며, 헝가리의 섭정 후냐디와는 협상 끝에 3년간의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나는 술탄의 공언을 믿었다. 그러나 가면은 곧 벗겨졌다. 메흐메드의 말과 몸짓은 모두가 허언이고 가식이었다.
4월17일(화) 술탄의 비망록
읽다가 집어던져 버렸다. 이런 바보 같은 놈! 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힌 연후에야 일기를 마저 읽었다. 황제는 외교의 본질을 모른다. 무릇 모든 외교란 결국 자국의 이익,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목적 달성을 위하여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국가와 백석을 책임진 군주라면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권모술수도 군주의 능력이다. 약속이란, 그리고 서약이란 지키기 위하여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가끔은 깨기 위하여서도 존재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 약속이고 서약이다. 더구나 그런 외교술은 너희 유럽, 기독교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습성이 아니더냐.
4월18일(수) 황제의 일기
연일 산발적인 공격이 이어지고 있다. 고양이가 쥐를 어르듯이 간헐적인 반복 공격이다. 진을 빼려는 것인지....그런데 적들은 왜 전면공격을 감행하지 않았을까.
4월18일(수) 술탄의 비망록
해자를 메우는 일이 급선무이다. 비잔틴군은 블라헤니아를 제외한 육지 성벽 전체에 걸쳐서 해자를 파 놓았다. 평균 폭이 20미터, 수심이 10미터에 이를 만큼 넓고 깊다. 게다가 길다. 성으로 진격하려면 우선 해자 통과가 필수적이다. 오늘도 우리 군은 참호와 땅굴을 만드느라 파낸 흙더미를 온갖 잡동사니들과 함께 해자 안으로 밀어 넣었다.
4월19일(목) 황제의 일기
적들의 파상공세는 오늘 날이 밝은 뒤에도 줄기차게 이어졌다. 또 다시 많은 것들이 짓밟히고 무너져 내렸다. 외성 벽 일부와 리쿠스 계속 쪽 내성탑 두 개가 부서졌다. 전쟁의 상흔이 깊다. 파괴와 복원의 끊임없는 연속이며 반복이다. 그전까지 아라비아 군대를 위시한 숱한 외세의 공격에도 끄떡없었던 외성벽에 금이 가고 일부는 귀퉁이가 허물어졌다. 비잔틴의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제국이 어려울때면 머리카락이라도 잘라 밧줄을 꼬아 국가에 바칠만큼 강인한 정신력과 애국심으로 무장하고 있다.
4월19일(목) 술탄의 비망록
인류가 존재하면서 전쟁은 있어 왔다. 모든 동물들도 서로 싸운다. 그러나 인간만큼 처절하고 끈질기게 집단적으로 싸우는 동물은 없다.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다. 승리의 대가는 엄청나고 패배는 처참하다. 전쟁이란 유사 이래 우리 인류가 창조해낸 탁월한 발병품이다. 많은 것들이 전쟁을 통하여 해결된다.
4월20일(금) 황제의 일기
참으로 기쁜 날이다. 오랜만에 호쾌하게 웃어 보았다. 오늘 아침,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무기와 식량을 가득 실어 보낸 세 척의 대형 제노바 갤리선들이 남풍을 타고 재빨리 마르마라 해역으로 접어들었다. 몇 달 전 내가 물자 조달 임무를 주어 파견하였던, 밀과 여러 곡물을 선적한 비잔틴 제국의 대형 수송선과 함께였다. 두 나라 배들은 다르다넬스 해협 부근에서 합류 겔리볼루를 경유하여 목적지인 콘스탄티노플로 왔다. 비잔틴 제국과 제노바 공화국 국기가 해풍에 나란히 펄럭이고 있었다.
4월20일(금) 술탄의 비망록
오늘 아침, 교황이 보낸 제노바 갤리선들이 비잔틴 수송선과 함께 마르마라 해역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나는 즉시 말에 올라타고 언덕을 달려 해군 지휘부가 있는 치프레 슈툰(디플로키온)으로 가서는 발토울루 제독에게 배들을 네 척 모두 나포하되 여의치 않으면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임무를 완수 못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엄포도 덧붙였다. 그러나 언급조차 하기 싫은 치욕스러운 패배였다.
4월21일(토) 황제의 일기
연이은 해전의 승리와 육지 성벽의 철벽 수비로 인하여 우리 군은 자신감과 사기가 한껏 드높아졌다. 도성의 높은 지대에 모여들어 저마다 손에 땀을 쥐고 애타게 응원하며 어제의 해상 전투를 지켜본 도성 시민들에게도 다시금 희망이 생겼다. 희망이야말로 비잔틴 제국을 지탱하여 온 원동력이 아닌가. 희망이 도시를 방어하고, 희망이 평화를 가져다준다.
4월21일(토) 술탄의 비망록
해법을 찾았다. 바로 이것이다.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내밀하고도 대대적인 거사를 시도할 참이다. 보안을 지키려면 속전속결이 최고다, 감히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던 일을 나는 조만간 전광석화처럼 이루어낼 것이다.
4월22일(일) 황제의 일기
경이롭기 불가사의한 일이다. 하늘 아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술탄의 함대가 갈라타 언덕을 넘어 골든 혼 바다로 진입하였다. 최소한 해발 60미터에 이르는 그 험한 산등성이와 비탈진 언덕을 수많은 배를 끌고서 넘어갔다니!
4월22일(일) 술탄의 비망록
도로는 하루만에 완성되었다. 주머니에 넣어 준 볶은 쌀과 말린 고기로 식사를 대신하게 하며 작업에 박차를 가한 결과였다. 이제 함대를 이끌고 갈라타 언덕을 넘어가기만 하면 된다. 오스만 해군 본부가 있는 치프테 슈툰에서 출발하여 카슴파샤로 이어지는 길이다. 나는 오늘 아침 동틀 무렵부터 정오까지를 이 기상천외하고 전무후무한 작전의 전격 결행 시간으로 잡았다.
이런 와중에 적의 사절이 와서는 평화안을 내밀었다. 참으로 가증스럽고 어처구니가 없다. 아무리 겁에 질렸어도 그렇지, 오늘 같은 날 누가 그런 평화안을 수용하겠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다. 글자를 모를 때부터 다른사람이 읽어주는 낭독에 귀를 기울이며 책과 친하여졌다. 역사책과 위인전, 병법과 군사학을 다룬 책들은 읽으면 읽을 수록 흥미로웠다.
세계 제패를 위해서는 각국의 언어 습득 및 지도책 학습 또한 필수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모국어인 튀르크어 외에도 그리스어, 아랍어, 라틴어, 페르시아어, 히브리어를 별도의 통역관을 필요로 하지 않을만큼 배우고 익혔다. 술탄이 본인 명의로 서한을 보낼 때 서방 국가들에는 라틴어로, 슬라브 족 국가들에는 그리스어로 겉봉에 표기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4월23일(월) 황제의 일기
창졸간에 손써 볼 겨를도 없이 골든 혼을 적들에게 점령당해 버리다니.....! 적함들이 정박한 지역은 찬물이 나온다 하여 샘의 계곡이라 불렀는데, 이거야말로 우리가 찬물을 뒤집어쓴 꼴이다. 거듭 생각하여도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우리 군대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백성들의 근심은 한층 깊어졌다.
4월23일(월) 술탄의 비망록
함대를 골든 혼 바다에 성공적으로 진입시킨 우리군은 다음 작전으로 부교 건설 공사에 돌입하였다. 제4차 십자군도 작은 배들로 부교를 만들어 골든 혼을 건너갔다.
4월24일(화) 황제의 일기
내부에 첩자라도 있는 것일까. 그렇게도 기밀엄수를 신신당부하였건만 하루도 채 안되어서 야간 기습작전계획이 갈라타 거류구로 새어나가 버렸다. 통탄할 노릇이다.
4월24일(화) 술탄의 비망록
황제의 우유부단함이 여기서 드러나는구나. 그런 유약한 마음으로 전쟁을 지휘하였으니 이 꼴이 될 수 밖에....당신의 작전 유예가 우리 군에 승리를 안기는 결정적 요인이 되리란 것을 짐작이나 하는가. 물론 우리는 언제라도 기습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4월25일(수) 황제의 일기
바다는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해상 주도권을 되찾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골든 혼에 진입한 적들의 함선을 다시 몰아내어야 한다. 안 그러면 골든 혼 쪽 성벽 라인이 위험하여진다.
4월25일(수) 술탄의 비망록
적들이 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를 나는 훤히 알고 있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들의 계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적들로 하여금 모르게 하는 일이다.
4월26일(목) 황제의 일기
백성들 형편을 살피려고 궁 밖으로 나갔다. 날씨는 비가 올 듯 잔뜩 흐리다. 내 마음도 밝지 못하다.
4월26일(목) 술탄의 비망록
심리전은 나의 오랜 관심사, 지속적인 연구 대상이었다. 끊임없는 대포 발사로 공포심과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도 심리전의 일환이다. 때로는 빛이나 소리도 심리전의 효과를 높이는 수단이다.
4월27일(금) 황제의 일기
도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리쿠스 강과 계곡은 도시민들의 휴양처 겸 말들의 급수원이었다. 군마를 돌보는 제국의 병사들은 매일 새벽과 저녁에 말을 물가로 데려가 물을 먹이고 갈기를 윤기 나게 닦아 주곤 하였다.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고, 여름이면 아이들이 물장구를 쳤다. 이 강물은 퇴적물이 쌓여 지금은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테오도시우스 항을 거쳐 마르마라 바다로 흘러간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강물 역시도 수난을 겪고 있다. 상류 지역인 메소테이키온에서 치러지는 격전이 강물에 핏물을 보내었다. 말들도 고개를 돌리는 폐수가 되어 버렸다.
4월27일(금) 술탄의 비망록
비단 리쿠스 강뿐이랴, 머지많아 골든 혼과 보스포러스 바다도 피로 물들게 될 것이다. 지하 저수장의 물 또한 마찬가지다. 물길을 찾아 내어 급수를 차단시켜 버릴 것이다. 문제는 도성 안으로 연결된 도성 밖 수원지를 도통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아니다, 구태여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결국은 그 모두가 우리의 식수원이 될 제국의 재산이 아니던가. 그런 기반 시설은 마땅히 아무런 파괴 없이 보호하여야 한다.
4월28일(토) 황제의 일기
그날이 왔다. 그런데.....애초의 기습 예정일보다 4일이나 늦은 오늘, 동이 크기 두 시간 전쯤 행동이 개시되었다. 4월20일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트레비사노가 지휘를 맡은 베네치아 갤리선 두 척의 호위 아래 단단하게 무장한 비잔틴 연합군의 대형 수송선 두 척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척은 베네치아, 다른 한 척은 제노바 선박이다. 수송선들은 포격에 대비하여 두터운 솜과 양털을 채운 자루로 뱃전을 보호하고 있었다. 갤리선 두 척에는 각각 40명의 노잡이들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실행일이 연기되는 바람에 오스만 진영으로 기밀이 흘러들어가 오히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적들의 역공을 당하고 만 것이다.
4월28일(토) 술탄의 비망록
전쟁은 정보다, 누가 얼마만큼 빠르고 풍부한 정확한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가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좌우된다. 특히 군사작전에 있어서는 비밀 엄수가 생명이다. 비잔틴군의 야습 작전 계획은 갈라타의 제노바인들 귀에 들어가는 순간 곧바로 우리 진영으로 흘러들어왔다. 작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결과는 자명하였다.
4월29일(일) 황제의 일기
코코의 전사 이후 베네치아 함대가 재편되었다. 나는 새로운 갤리선 사령관으로 조르조 돌핀을 임명하였다.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쓴 스트라테기콘을 펼쳐 들었다. 젊은 장교들에게도 적극 추천하는 야전교범 겸 병법서다.
병기를 잘 갖추고 정신 무장이 잘된 병사일수록 자신에게는 더 큰 자신감을, 적에게는 더 큰 두려움을 심어 주게 된다.
4월29일(일) 술탄의 비망록
어제 있었던 해상 전투의 압승으로 많은 상황들이 개선되었다. 갈라타 뒤쪽에 주둔한 자아노스 파샤 부대와 치프테 슈툰 에 위치한 해군 본부의 통신이 원활해지고 빨라졌다.
4월30일(월) 황제의 일기
꿈에 테오도라 황후가 나를 찾아왔다. 아니다, 나의 간절한 염원이 꿈길에서나마 나로 하여금 황후를 찾아가게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꿈속의 황후는 비감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는 제국을 벗어나 도망치느니 차라리 이 황후복을 수의로 삼겠사옵니다.
4월30일(월) 술탄의 비망록
나스레딘 호자가 쓴 우화 가운데서 하나를 부하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들 귀에도 익숙해 있을 유명한 이야기다.
5월1일(화) 황제의 일기
큰일이다. 식량이 점점 떨어져 간다. 사용할 일이 없어진 스푼과 포크들에 녹이 슬 지경이다. 창고는 바닥났고, 양식 값은 급등하였다. 제국의 금고는 하루가 다르게 비어가고 있다. 보금품이 고갈되고 급여를 지급받지 못하여 탈영하거나 적진으로 투항하는 병사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였다. 한때 100만 인구가 북적대던 도시였건만 이제 그 10분의 1도 되지 않으니 성 안 곳곳에 포도원과 농경지가 널려 있다. 그러나 농사지을 일손도 부족하거니와 매일처럼 포연과 소음에 시달리다 보니 과일이나 푸성귀 역시 작황이 좋을 리가 없다.
로마 가톨릭 교회 측보다도 더 서운한 것은 정교회 측 군주들의 태도다. 어느 누구 하나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이러고도 신앙의 형제라고 할 수 있는가.
5월1일(화) 술탄의 비망록
비겁하고 무능한 기독교 나라 겁쟁이 군주들은 의리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자기 앞가림도 못하여서 쩔쩔매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 홀로 애를 태우는구나. 아라곤 국왕 알폰소? 웃기지 마라. 그 자의 속셈은 자신이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되는 것이다.
5월2일(수) 황제의 일기
개전 이래 술탄은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어 물밑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도무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온갖 언어로 치장을 하여 조건을 바꾸는 듯하지만 그 본질은 앵무생처럼 항상 동어 반복이다. -무조건 항복하라, 그러면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겠다. 원한다면 황제도 모레아로 은퇴할 수 있도록 하여 주겠다.
5월2일(수) 술탄의 비망록
할릴 찬다를르 파샤, 이 자의 행태가 갈수록 가관이다. 비잔틴 궁전에 심어 놓은 밀정들의 보고를 종합하면 할릴은 명백한 이적 행위를 하고 있다. 선대 술탄 시절부터의 친교를 핑계삼아 두 진영 사이를 오가면서 우리 내부의 정보를 제공하고, 자칫 적들로 하여금 오판을 하게 만들 여지가 있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5월3일(목) 황제의 일기
전세는 점점 더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기대하였던 구원군은 오지 않는다. 바람결에 들여오는 소식조차 없다. 나는 기다리다 지쳐 라틴 자치구 대표인 베네치아 대사 미노트와 트레비사노 제독을 궁으로 불러들여 답답함으로 토로하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5월3일(목) 술탄의 비망록
어리석은 황제여, 마르마라 해와 다르나넬스 해협은 물론 에게 해까지 우리가 장악하고 있음을 잊었는가. 너희 돛단배가 우리 군사로 위장하여 나가는 것을 내가 왜 몰랐겠는가. 추격하는 척하다가 일부러 놓아 보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였겠지. 이 배가 망망대해를 아무리 헤쳐 나가도 원군을 발견 못하고 그럴 기미조차 없다는 걸 확인한다면 그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5월4일(금) 황제의 일기
극한 상황일수록 누구나 신경이 예민해지는 법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부쩍 도성 안쪽 라틴구에 거주하는 베네치아인들과 골든 혼 연안에 갈라타에 모여 사는 제노바인들 사이에서 갈등과 마찰이 잦다는 소식이다. 제노바 사람들이 낮에는 황제의 측근, 밤에는 술탄의 첨자라는 말도 있다.
5월4일(금) 술탄의 비망록
개와 원숭이는 친구가 될 수 없는 법이다. 둘 다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 국가인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오리엔트 시장을 두고서 오랫동안 각축을 벌여온 라이벌이다.
5월5일(토) 황제의 일기
달리 방법이 없다. 상황이 너무나 절박하여 내가 직접 나서서 교회와 수도원, 그리고 일부 재력가들로부터 자선기금을 거두어들였다. 대신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교회의 헌금 집사를 녹이도록 권유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네 배로 보상하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까지 내걸었다.
5월5일(토) 술탄의 비망록
육상은 물론 해상에도 이제 안전지대란 어디에도 없다. 전 지역이 전쟁터이다.
5월6일(일) 황제의 일기
마르마라 해에서 가까운 스투디오스에 있는 세례 요한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다. 병설 수도원 스투디온은 천년 가까이 이 도시에서 중요한 종교적 역할을 맡아왔다.
5월6일(일) 술탄의 비망록
그새 한 달이 지나갔다. 나사는 조일 만큼 조여졌다. 적들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었다. 그런데도 백기를 들지 않는다. 우리 군사들도 지쳐가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런 때일수록 잡념이 끼어들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몸이 한가하면 마음이 향수에 젖기 마련이다.
우르반이 죽었다. 개량 대포를 발사하다가 파편에 맞아 숨졌다. 비밀에 부쳤지만 알 만한 이들은 다 안다. 다행이 우르반 없이도 이제는 대포 운용이 가능하다.
5월7일(월) 황제의 일기
해가 지고 나서 네 시간 뒤부터 적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집중 표적은 메소테이키온 성벽. 공성용 사다리와 갈고리 달린 밧줄, 창검과 도끼를 손에 든 수많은 적병들이 속을 메워 평지로 만든 해자를 건너질러 굶주린 들개떼처럼 밀고 들어왔다. 세 시간 넘도록 핏방울이 튀고 뼈가 으스러지고 살점이 베어져 나가는 접전이 벌어졌다. 성벽과 방책도 무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벽 안으로의 침입은 허락하지 않았다.
5월7일(월) 술탄의 비망록
애석하도다. 용병대장 주스티니아니를 해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만 아깝게 놓치고 말았다.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오스만 병사 무라트는 외성벽과 방책 사이에서 주스티니아니를 상대로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위기에 처한 주스티나아니를 구한 것은 성벽에서 뛰어내린 비잔틴 병사였다. 그 병사는 도끼를 휘둘러 무라트의 다리를 잘라 버린 뒤 주스티니아니를 부축하여 성벽 뒤로 사라졌다.
5월8일(화) 황제의 일기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다시금 비상 대책 회의를 소집하였다. 허물어진 나르텍스 아래에 있는 성스러운 샘물은 아직 그대로다. 나는 참석자들과 함께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한 후 그 신성한 샘물을 마셨다.
5월8일(화) 술탄의 비망록
오늘 새벽에도 어김없이 우렁찬 수탉의 울음소리가 나의 잠을 깨우고 병사들을 잠자리에서 벌떡 일으켜 세웠다. 어떤 기상나팔도 이보다 더 경쾌하고 박진감 넘치는 소리를 낼 수 없으리라. 그 소리를 듣고 새벽하늘의 별들도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빛을 반짝 밝혔다.
5월9일(수) 황제의 일기
적들의 총공격이 있었다. 군악대를 비롯하여 앞뒤에서 얼쩡거리는 군더더기들까지 포함하면 5만여명은 되어 보인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까마득하게 몰려오는 적들과 치열한 공방전을 치렀다. 이번에는 내 거처가 있는 블라헤니아 궁과 포르피로게니투스 궁전 앞 성벽들이 표적이었다.
5월9일(수) 술탄의 비망록
세 번째 총격을 강행하였다. 중점 타격 대상은 블라헤니아 황궁 주변 성벽, 아나톨리아 군단과 유럽정규군, 자아노스 파샤 휘하의 병사들까지 5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였다.
내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후퇴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언월도를 들고 뒤에 정렬하여 있는 내 친위대의 손에 살아 남지 못한다. 비겁자는 처단한다는 것이 나의 군율이요, 원칙이다.
5월10일(목) 황제의 일기
기둥 위 고행자들이 있다. 높은 기둥 위에 올라가 앉아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폭풍이 몰아치거나 아랑곳없이 기도와 고행과 금욕으로 신에게 자기 삶을 헌신하는 수도자들이다. 이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기둥, 고트의 기둥, 아르카디우스의 기둥, 마르키아누스의 기둥, 심지어는 이집트 오벨리스크에도 올라가 수행을 한다. 개전 초기에는 이곳저곳에서 간혹 보였으나 지금은 극히 소수만 남고 자취를 감추었다. 며칠 전 기둥위에서 10년을 고행하였다는 수도자가 기둥을 내려와 제국을 지키겠다며 방위군을 자청하였다.
5월10일(목) 술탄의 비망록
건국 초기에 선조 가지(이슬람 전사)들은 성전 수행에 전념하여 영토를 확장하여 나아갔다. 아나톨리아와 발칸의 옛 비잔틴 국가들이 하나둘씩 가지들의 칼끝에 무릎을 꿇고 제국의 영토로 속속 편입되었다. 유럽 지역 대부분의 점령지들은 제국에 완전히 병합시키기보다는 해마다 연공을 바치는 가신국 형태로 지배하였다.
5월11일(금) 황제의 일기
어찌하여 구원군은 오지 않는가. 제국을 구하기 위하여 나는 대부분의 도성 시민들과 성직자들이 굴욕감을 느끼며 반대하던 동서 교회의 통합마저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유럽 각국은 복잡한 내부 사정을 핑계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강 건너 불 구경이다.
오늘도 구원군의 동태를 알아보라고 내보낸 열두 명의 우리 용사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을 비잔틴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은 지 1123주년이 되는 날이다. 예년 같았으면 히포드롬에서 전차 경주와 서커스 공연이 하루 종일 열리고, 황제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축하 행차를 할 이 영광스러운 국경일에 축포 한 발 쏘아 올릴 수 없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5월11일(금) 술탄의 비망록
서방 세계에서 종교란, 그들이 이야기하는 기독교 신앙이란 이미 오래 전부터 정치와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정치와 종교는 서로가 서로를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때로는 야합하고 때로는 대립하면서 말이다.
십자군 전쟁이 그 전형이다. 신의 이름을 팔고 신의 뜻임을 내세웠지만, 결국은 종교를 빙자하는 서유럽 기독교 국가들 간의 권력 다툼, 교황과 황제의 알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축하한다, 황제여! 참으로 오랜 역사를 용케도 유지하여 왔구나. 그러나 기억하라. 올해는 이 도시가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는 마지막 해가 될 것이다. 기독교도들을 지배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내년 5월의 어느 날, 나는 이스탄불의 밤하늘을 정복 1주년을 기념하는 불꽃들로 찬란하게 수놓을 것이다.
5월12일(토) 황제의 일기
지난 밤 적들의 공격이 있었다. 유례없는 강공이었다. 성곽의 손상이 컸고 사상자도 많았다. 자정이 넘어서자 우르반의 대포는 한 시간 간격으로 굉음을 터뜨렸다. 사이사이 중형 포들도 목표 지점을 때렸다. 전 성벽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한달 넘게 지속된 전쟁으로 도성 시민들은 공황 상태에 이르렀다.
5월12일(토) 술탄의 비망록
자정 무렵 전군에 비상을 걸고 또 다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블라헤니아 성벽과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연결점 부근으로 화력을 집중하였다. 성벽은 여전히 견고하다.
5월13일(일) 황제의 일기
도성 시민들의 중보기도소리가 나날이 높아져 간다. 겸손하고 참된 신앙인만이 지닐수 있는 성숙한 시민의식에 나는 새삼 감사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5월13일(일) 술탄의 비망록
나는 며칠 전부터 은밀하게 또 하나의 비밀 작전에 돌입하였다. 바다가 막히자 배를 끌고 언덕을 넘어갔듯이 이번에는 포탄이 뚫지 못하는 성벽을 지하로 관통할 생각이다. 지상 공격을 보완할 땅굴 공략, 이름하여 두더지 작전이다. 세르비아 은광 출신 광부들이 자아노스 파샤 부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5월14일(월) 황제의 일기
적은 수의 병력으로 대규모 적군을 상대하느라 지휘관과 병사들 모두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육군과 해군의 분리 배치 또한 무의미하다. 그러다보니 이따끔씩 부대 편성 등을 놓고 지휘관들 간에 의견이 엇갈려 마찰이 빚어지는 경우가 있다.
5월14일(월) 술탄의 비망록
샘의 계곡 뒤편 언덕에 세워 두었던 대포들을 골든 혼 부교 쪽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부교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던 베네치아 배들이 경비선 몇 척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크로폴리스 아래 방재구역안에 있는 작은 항구로 옮겨 감으로써 적함의 공격을 받을 확률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대포들로는 블라헤니아 성벽의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을 공경할 계획이다.
5월15일(화) 황제의 일기
오늘은 전투가 소강상태였다. 오랜만에 포성이 잠잠하였다. 육상과 해상 양쪽 모두 이렇다 할 교전이 없었다.
5월15일(화) 술탄의 비망록
비가 온다. 발포 준비를 하는 도중 소나기가 퍼부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대포에 화약을 장전하지 못한다. 병사들의 쑥덕거림이 있는 듯하다. 딴 생각을 못하게끔 하여야겠다.
5월16일(수) 황제의 일기
술탄이 지하에 갱도를 파서 성벽 밑을 뚫고 침투하거나, 성벽 바로 밑에서 화약을 폭발시켜 버팀목과 함께 성벽을 무너뜨린 다음 도성으로 진입하는 전술을 택하리라는 것은 우리도 이미 예상하였던 바이다.
5월16일(수) 술탄의 비망록
아뿔사, 적들이 두더지 작전을 눈치채어 버렸다. 갱도를 파던 우리 병사들이 그야말로 화공을 받은 두더지 새끼들처럼 까맣게 타 죽거나 연기에 숨이 막혀 죽었다.
5월17일(목) 황제의 일기
적 함대의 소형 선박들이 디플로키온에서 내려와 골든 혼 방어 사슬 부근을 얼씬거리며 정탐을 하다가 가는 일이 잦아졌다.
5월17일(목) 술탄의 비망록
벌써 여섯 번째이다. 땅굴 작전에서 연거푸 여섯 번씩 이나 실패를 맛보았다
5월18일(금) 황제의 일기
괴물이 등장하였다. 사다리 구조를 지닌 거대한 공성용 탑이다. 후방 어딘가에서 만들어져 밤중에 소리 없이 메소테이키온 쪽 해자 부근까지 운반하여온 모양이다.
5월18일(금) 술탄의 비망록
성공이다! 비잔틴 황제와 지휘관들 그리고 병사들이 밤사이에 진군하여 온 공성탑을 목격하고는 괴물을 맞주친 양 놀라 까무러쳤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 탑들은 우리의 기술력과 역량이 결집된 야심작, 다목적 병기이다.
5월19일(토) 황제의 일기
적들이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다. 중과부적이다. 우리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다. 이 전쟁의 끝은 어디인가.
5월19일(토) 술탄의 비망록
참으로 나약 하도다, 황제여! 그대 같은 군주들이 통치하는 한 비잔틴 제국은 미래가 없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다. 이런 판국에 세상의 종말 운운하며 감상적인 정서에 함몰되어 있다니, 역대 황제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5월20일(일) 황제의 일기
아침 일찍 팜마카리스토스(행복이 넘치는)교회를 방문, 성찬 예배를 드렸다. 해자가 관건이다. 해자 위로 길을 내어 성벽에 접근하고 도성으로 진입하려는 술탄의 의도를 확실하게 안 이상 절대로 수수방관하여서는 아니 된다.
5월20일(일) 술탄의 비망록
아깝도다. 공성탑이 화염이 휩싸여 날아가 버렸다. 주변 경계를 소홀히 한 탓이다. 병사들이 모두 지쳐 있다. 기강과 체계를 더욱 다잡아야겠다.
5월21일(월) 황제의 일기
아침이 되자마자 곧바로 후속 조치에 들어갔다. 기습 폭격의 성공으로 적들이 공성탑을 후퇴시킨 자리에 해자를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손상된 방책도 손을 보았다.
5월21일(월) 술탄의 비망록
의미 없는 행동이란 없다. 특히 전쟁에서는. 며칠을 두고 우리 함대를 골든 혼 방재 구역으로 내려 보내었다. 공격을 할 듯 말 듯 변죽만 울렸을 뿐, 방재 구역 위아래를 서성거리다가 그냥 되돌아오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였다.
5월22일(화) 황제의 일기
긴장, 초조, 조바심, 두려움, 절망감, 자포자기.....,이런 나약하고 불순한 감정들이 도성 안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신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고 있다. 하늘마저도 이 제국을 버리려 하는가. 이런 때일수록 굳세고 의연하여야 하건만 때로는 내 마음도 동요하고 있음을 느낀다.
제국의 역사가 천년을 훌쩍 넘게 이어지는 동안 지금까지 숱한 신화와 전설과 민담, 예언과 주술과 미신이 탄생하였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와 범람하며 도성 시민들의 심리를 암호처럼 지배하고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5월22일(화) 술탄의 비망록
황제의 일기를 읽고 나니 나도 갑자기 1449년9월에 세상을 뜨신 어머니가 그립다. 길지 않은 한평생을 늘 아들 곁에서 머무셨던 당신..... 부르사에 있는 무라디예 모스크에 안치한 어머니는 아버지(무라드2세)묘소에서 100여 걸음쯤 되는 곳에 누워 계시다.
내 어머니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은 기독교인이셨다. 그래서인지 내 종교관은 관용적이다. 기독교인들에 대하여서도 적대감은 없다.
5월23일(수) 황제의 일기
찌는 듯한 여름 날씨인가 싶더니 오늘 따라 잔뜩 흐리다. 곳에 따라 소나기도 뿌릴 것 같다. 아침 일찍 쌍돛 범선이 돌아왔다. 떠난 지 20일만이다. 그러나 바라던 희소식은 실려 있지 않았다.
5월23일(수) 술탄의 비망록
20일전 오스만 배로 위장한 비잔틴의 쌍돛 범선이 특수 임무를 띠고 출항하였을 때 그것을 눈앞에서 놓친 함대 지휘관을 짐짓 꾸짖었는데 오늘 새벽 그 배가 다시 마르라마 해에 나타났다. 이번에도 오스만 군복과 깃발로 위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피골이 상접한 몰골과 입고 갔던 옷 그대로인 채 해풍과 파도에 시달린 모습이라니....! 차라리 우리가 잡기보다 도성안으로 비보를 안고 가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5월24일(목) 황제의 일기
어제 우리 공병들이 블라헤니아 황궁 근처 성벽 밑을 목적지로 삼아 땅굴을 파들어 오고 있던 여러 명의 적들을 생포하였다. 장교 한 명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고문에 못 이겨 자신들이 파놓은 다른 땅굴들의 위치를 죄다 실토하였다.
5월24일(목) 술탄의 비망록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땅굴을 뚫던 놈들이 적에게 생포되어 작업 중이던 갱도에 대한 모든 정보를 발설하여 버렸다. 찢어 죽일 놈들! 그러고도 호의호식은커녕 비잔틴의 칼날에 참수가 되어 잘린 목이 성벽 아래로 패대기쳐졌다.
5월25일(금) 황제의 일기
초여름, 전쟁의 포연 속에서도 도성의 정원과 교회담장, 민가의 울타리에는 장미꽃이 탐스럽게 피어났다. 그 향기가 애잔하게 코끝으로 스며든다. 어찌 이리 비애스러운가. 오늘은 아침나절부터 도성 시민들이 성모에게 마지막 간청을 드리려고 모여들었다. 나는 그 현장에 없었지만 프란체스를 통하여 자초지종을 낱낱이 전해 듣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5월25일(금) 술탄의 비망록
역시나 비잔틴 황제는 어제의 월식을 보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혔구나. 비잔틴 시민들과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구나. 반면에 우리 오스만 진영은 축제 분위기였다. 지구의 그림자가 점점 달을 잠식하여 동그랗던 달이 초승달 모양으로 변하였을 때는 환성을 질렀다. 문득 오스만의 깃발이 비잔틴의 하늘 위에서 나부끼는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국의 깃발에 그려진 초승달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생성과 확장이다. 우리는 초승달이 반달로, 반달이 보름달로 바뀌어 가듯이 제국의 영토를 확대하여 나아갈 것이다.
5월26일(토) 황제의 일기
언제나처럼 적들은 또 포격을 가해 왔다. 늘 그래왔듯이 우리 병사들은 열성적으로 도성을 방어하였다. 전투가 일상화되면서 성벽 수리 역시 일과처럼 되어 버렸다.
5월26일(토) 술탄의 비망록
나 역시도 저녁 무렵 하기아 소피아 돔 주위를 서성거리다가 십자가 위에 올라앉는 그 신비스러운 불빛을 목격하였다. 막사에 있던 병사들도 그 불빛을 발견하고는 일순 술렁거렸다.
5월27일(일) 황제의 일기
골든 혼 수비 상태를 점검하고 적들의 동태도 살필 겸 아침 일찍 이레네 성당을 찾아갔다. 적들은 든 혼 입구에 대포를 배치하고 활쏘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5월27일(일) 술탄의 비망록
도성 안으로 들여보냈던 이스마일 함자가 돌아왔다. 이제 그만 항복하고 무조건 성문을 열라는 말을 황제에게 전하도록 보낸 사자였다. 나로서는 마지막 기회를 준 셈이었다.
5월28일(월) 황제의 일기
오늘따라 종소리가 왜 이리도 간절하게 심금을 두드리는 것일까. 도성 시민들은 크고 작은 종소리를 가슴에 안고 황금 모자이크가 수많은 등불과 촛불 속에서 빛나고 있는 하기아 소피아로 모여 들었다. 작년 12월12일 동서교회 연합 미사가 치러진 이래 지난 5개월 여간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반대하여 온 신자들이 애써 발길을 끊었던 곳이다.
5월28일(월) 술탄의 비망록
드디어 내일이다. 아니, 오늘 밤이 새기 전이다. 날이 밝으면 그토록 갈망하였던 콘스탄티노플 도성 안에서 식사를 하고, 대성당에서 알라를 영접하고, 황제의 궁 안에서 잠을 자게 될 것이다. 곧 날이 바뀐다. 시대가 바뀐다. 제국이, 군주가 바뀐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이 바뀐다.
5월29일(화) 황제의 일기
예감이 불길하다. 요 며칠 사이 대대적인 총공격에 대한 소문이 돌아 보초병들 수를 늘리고 전국에 경계 태세 강화 명령을 내렸다. 적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술탄 진영의 각료 회의 내용이 담긴 비밀 서신이 화살에 매달려 성벽 너머로 날아왔다. 이 자들은 지금 곧 시작할 태세다. 대포며 전투 장비들이 속속 성곽 근처로 이동하여 오고 있다.
이 전란 중의 일기는 나의 충실한 신하이며 사려 깊은 친구이기도 한 프란체스를 통하여 후대에 전하여질 것이다. 나는 죽고 제국은 자라져도 이 기록은 영원히 남아 있기를 기원하며.....
5월29일(화) 술탄의 비망록(이슬람력 857년5월20일)
황제의 일기는 여기서 끝이다. 더 이상은 한 줄도 이어지지 않는다. 아니, 이어질 수가 없다. 그런데 왜일까, 제국을 결국 멸망으로 몰고 간 비잔틴 마지막 황제의 일기를 읽어나가면서 이 사나이가 점점 더 친근하게 다가온 것은.....,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처음 며칠간, 나는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마침내 철옹성을 무너뜨리고 필생의 과업을 성취하였다는 감격과 희열감에 도취되어 첫날과 둘째 날을 보내었다. 비잔틴 황제가 왜 그토록 자기자신과 제국을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갔는지에 대하여서도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정복된 나라의 백성들에게 법의 테두리 안에서 신앙, 전통과 관습, 경제적 기득권을 보장하는 것은 우리 이슬람의 오랜 전통이다. 학문과 지식, 문화와 예술 역시도 당연히 존중받고 계승,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정복은 단절이 아닌 계승이고 융합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교회는 비잔틴 백성들의 소유이다. 예배와 기도와 성경 읽기도 허용하겠다. 다만 그리스 정교회를 대표하는 하기야 소피아만은 모스크로 전환, 알라에 대한 상징적 예의를 표할 것이다. 나머지 교회들은 보전하되 종을 울리지 말고, 교회를 새로 짓거나 수리하지만 않으면 된다.
메흐메드 2세의 정복 전쟁은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정복자 사후 100년이 지나도록 이 나라는 유럽, 중동,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존속되었다.
Ⅲ 2012년5월29일~6월1일, 이스탄불
2012년5월29일(화)
오늘은 559년전 비잔틴 제국이 1123년의 기나긴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다. 이스탄불에서는 이 날 다채로운 축하 공연과 기념행사가 열린다.
2012년5월30일(수)
아침을 먹자마자 톱카프 궁전으로 향했다. 조금 일찍 도착했지만 벌써부터 관람객들로 북적거렸다.
2012년5월31일(목)
5월의 마지막 날이다. 이스탄불에 머문 지 한 달 반, 시간이 이렇게나 빨리, 훌쩍 지나가 버릴 줄이야....오전에 나는 술탄 메흐메드 2세와 황후 귈베하르 하툰의 묘가 있는 파티 자미를 찾아갔다.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메흐메드 2세는 전장의 한복판에 있었다. 40대 중반을 넘기면서부터 비만으로 인한 온갖 합병증으로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정복 사업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481년 5월3일 밤 10시 무렵, 아시아로 원정을 떠났다가 갑자기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술탄의 나이 마흔아홉살이다.
2012년6월1일(금)
6월의 첫날이다. 또한 내가 이 도시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다. 내일이면 나는 이스탄불을 더나 서울로 가야 한다.
에필로그������왜 나는 그곳에 있었는가������
비잔틴과 오스만, 두 제국의 수도로서 1600년 동안이나 그 명맥을 이어온 세계 역사상 가장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도시....인류 문명의 퇴적층이면서 동서양의 교차로인 이스탄불은 민족, 인종, 지역, 종교, 언아, 문화가 얽히고 설킨 곳이다. 실크로드의 최종점이자 기점이기도 하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쟁은 지상전, 지하전, 해상전, 공중전, 유격전, 심리전, 첩보전,. 외교전 등 사용 가능한 모든 전략과 전술이 총동원된 드라마틱한 전쟁이었다.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사생결단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술탄 메흐메드 2세는 터키인들에게는 영웅 중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에 이순신 장군을 더한 정도의 존경이랄까. 그러나 터키에선 국민 영웅이지만 그 당시 유럽에선 악마요, 사탄의 아들로 지탄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콘스탄티누스 11세-이 황제의 무덤조차 없다.
김형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나와 기자,공무원,정치인을 거쳐 오래 유보해 두었던 제3의 길을 걷기 위해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읽는 이에서 쓰는 이로 역사에 대한 탐구자로 본격적인 방향 전환을 했다.
술탄과 황제는 작가가 4년 남짓한 산고 끝에 완성한 집념과 열정의 산물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작가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정복 전쟁의 한복판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전쟁의 무대였던 터키 이스탄불을 다섯 번 다녀왔고, 특히 지난 4월 중순부터 6월 초순까지 47일간 머물면서 막바지 취재 및 연구 활동을 했다. 이스탄불 유수의 대학과 연구소에 틀어박혀 수백 권의 책들과 씨름했으며, 수십 명의 학자.전문가들과 심도 있는 인터뷰를 했다. 집필에는 꼬박 5개월이 걸렸다. 밤잠을 줄이고 휴일도 반납한 채 하루 열 시간 넘게 오로지 사실과 진실 추구에만 매달렸다. 안경알을 세 번 씩 바꾸고 흰머리를 늘려가면서 피를 찍어 잉크로 쓰듯 심혈을 기울였다. 지은 책으로는 돌담집 파도소리, 엿듣는 사람들,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 이 아름다운 나라 등이 있다.
술탄과 황제
1판 1쇄 발행 2012년11월21일
1판29쇄 발행 2013년7월22일
지은이 김형오
펴낸이 김영곤
펴낸곳 (주)북이십일 21세기북스
출판등록 2000년5월6일 제10-1965호
주소(413-120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201(문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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